사유(思惟)

후설의 '자아' 개념의 선험적 성격*

나뭇잎숨결 2020. 10. 23. 10:50

후설의 '자아' 개념의 선험적 성격*

이 성 환(경상대)


[한글 요약]

이 논문은 <이덴> 이후 뚜렷하게 나타나는 선험적 현상학을 선험적 관념론으로 해석하고, 선험적 관념론으로 후설의 '자아' 개념을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방법적으로 데카르트의 사유의 결과가 내포하고 있는 인식론적 난제를 문제 상황으로 설정하였다. 특히 물자체와 주관-객관의 이원성 위에 설정된 자아, 그리고 세계의 추상성을 문제로 파악하였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신과 물체의 이원성을 낳고, 이 이원성은 자아와 세계 사이의 건너 뛸 수 없는 인식론적 아포리아를 형성하였다. 이에 후설은 판단중지로 의식 밖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라는 데카르트 이래의 독단론적 믿음을 버린다. 이러한 태도 변경은 대상을 의식의 대상으로 확보하고, 의식의 대상은 의식의 지향적 관계 속에 나타난다. 지향적 관계에 관한 후설의 사유는 선험적 관념론으로 확정된다.

선험적 관념론은 자아와 세계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말한다. 후설은 여기서 자아가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임을 분명하게 주장한다. 우리는 지향성으로 나타난 자아와 세계를 각각 자아극과 대상극, 습득성과 전형성으로 파악하고, 이 양자의 관계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자아의 선험적 성격을 모나드적 자아로 확인한다.

우리는 데카르트적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후설의 사유를 위와 같이 검토함으로써 후설의 선험적 현상학과 생활세계의 현상학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확인하고, 후설의 사유와 동양적 사유의 비교철학적 관점들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할 수 있는 토대를 비로소 확보할 수 있다.


주제분야 : 현상학
주 제 어 : 인식론적 스캔들, 선험적 관념론, 자아극, 전형성, 습득성, 모나드적 자아


1. 데카르트의 유산/인식론적 스캔들과 자아

하루 중에 우리는 얼마만큼 자신을 의식하고 살까? 자아에 대한 이해가 없다고 해서 사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단 말인가? 자아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삶이 의미있어지는 걸까? 우리가 늘 '자아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근대 이후의 삶에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토대를 묻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양의 근대를 정치 혁명, 산업혁명, 종교 개혁(혁명), 과학 혁명없이 생각할 수 없다. 그런 혁명의 근저에는 항상 중세와 스스로를 구분하는 근대인의 더 높은 자각과 자의식이 깔려 있다. 혁명하는 자아로서의 자기 인식과 확인이 없이는 시대를 바꾸어 내는 역동성을 기대할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시대의 변화는 자아의 변화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도 혁명적 변화라고 한다면 자아의 혁명적인 변화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을 이념적으로 주도한 사람들은 중세와의 결별을 인간의 부활로, 그 부활의 힘을 그리스·로마에로의 귀향을 통해 휴머니즘의 새로운 터잡기를 시도함으로써 성취하려고 하였다. 이런 작업을 하면서 그들은 거인(그리스·로마 문화)의 어깨 위에서 더 높은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근대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인들의 철학적 사유가 인식혁명의 정당성의 토대와 인식의 주체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데카르트는 이런 역사적 자부심을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로 표현하고 있다.

서양 근대 사상의 토대를 제공한 데카르트는 당대의 회의주의와의 대결 속에서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완전하게 보편적이고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고 절대적으로 확실한 학적(學的)인 설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는 당대의 인식의 혁명적 변화에 대한 회의주의적 반응에 관한 데카르트의 응답이다. 데카르트는 절대 확실한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방법적 회의>라고 일컬어지는 과정을 통해 이제까지의 모든 지식과 신념을 재검토하였다. 회의의 결과 그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에 도달하였다. 코기토는 데카르트의 사유를 스콜라 철학과 구별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이며, 그 이후 근대철학의 골격을 결정하는 요소가 된다. 또한 데카르트는 "진리를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일생에 한 번은" "인간 인식이 무엇이고 또 어느 곳에까지 미칠 수 있는지를 고찰"해야 한다고 말하여 근대 철학의 전개 방향이 인식비판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이 과정 중에 정신과 물체, 마음과 신체의 이원론을 형성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이 둘을 유한 실체 혹은 상대적 실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에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를 남기게 된다. '실체'개념의 정의에 따르면 양자는 존재론적 위상에서 상호간의 관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체의 뚜렷한 구분은 몇가지 스캔들을 남기게 된다. 즉, 1) 정신이 자신을 건너 뛰어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물체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2) 인간이 상호 배타적인 마음과 신체로 이루어진 복합 실재인 한 우리는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3) 자아란 무엇인가? 등이다. 로크, 버클리, 흄은 인간 오성(정신적 과정)에 관한 검토를 통해 이 문제를 확연하게 인식론적 문제로 구체화한다. 인식론은 인식(지식)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우리는 이를 단순하게 주관-객관의 관계로 정돈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성의 계몽, 즉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근대 철학자들의 책 제목들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보면, {이성을 올바르게 지도하는 방법서설}, {정신지도를 위한 제규칙}, {지성개선론}, {신 인간 오성론}, {인간 오성론}, {인간 지식의 원리론}, {인성론}, {순수이성비판} 등이다. 심지어 헤겔의 {정신현상학}조차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로티는 이를 <자연의 거울>이란 표현으로 압축한다. 로티에 따르면, "정신이 거울이라는 생각이 없었다면, 지식을 표상의 정확성으로 보는 생각 자체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생각이 없었다면, 데카르트와 칸트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전략, 가령 거울을 조사하고 교정하고 깨끗이 닦아서 좀더 정확한 표상을 얻고자 했던 전략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했을 것이다."

로크 이래로 정식화된 정신적 과정으로서의 인식론은 이성을 아무리 교정하고 올바르게 사용한다 하더라도 의식, 마음, 정신 바깥에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데카르트의 유산으로 남겨진 인식론적 스캔들은, 하이데거가 지적한 것처럼, 데카르트 이래로 사물 그 자체에 관한 '증명이 거듭거듭 다시 기대되고 시도된다'는 사실에서 성립되었다. 표상의 정확성에서 지식이 성립하는 한, 이성, 마음, 정신이 표상의 기체인 사물 그 자체를 알 수 없는 한, 확실한 지식의 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근대 인식론이 결국 흄이 주장하는 신념에 의한 지식의 개연성으로 귀결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에 대해 칸트나 독일 관념론 식의 해법이 주어졌다하더라도 우리의 인식론적 의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데카르트를 위시한 합리론자들은 이성주의적·형이상학적·신학적 사변 속에 그 문제를 해결한다. 그런 까닭에 정신과 물체 사이의 간극도 그들에게는 문제되지 않는듯 하다. 데카르트는 표상으로서의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cogito의 절대 확실성을 정당화하는데 오히려 심혈을 기울인다. 물체 혹은 신체와 정신 혹은 마음을 확연하게 구분짓게 되는 까닭도 그 과정 속에서 확립된다.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는 물체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극단적으로는 내 신체에 대한 인식까지도 의심할 수 있지만 사유하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내 존재의 확실성은 내가 사고할 때, 혹은 내가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 확보할 수 있다. "나는 있다, 나는 현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얼마 동안? 내가 사유하는 동안이다. 왜냐하면 내가 사유하기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인가? 사유하는 존재이다. 사유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의심하고 이해하며, 긍정하고 부정하며, 의욕하고 의욕하지 않으며, 상상하고 느끼는 존재이다." 데카르트는 나의 존재와 사유가 同時·同延的co eval 임을 주장하고 있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자아'개념을 비판한다. 칸트는, "우리 바깥의 공간 속에 있는 대상들의 존재를 의심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는 존재한다]는 오직 하나의 경험적 주장만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언명하는" 데카르트의 입장을 개연적 관념론이라고 규정한다. 칸트가 보기에 데카르트는 외적 경험이 없이도 자아가 내적 직관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칸트는 외적 경험이 없이는 어떠한 내적 경험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헤겔 식으로 표현하면 대상의식이 없이는 어떤 자아의식도 성립할 수 없다. 칸트는 데카르트의 이런 입장이 대상인식에 있어서 결국 선험적 실재론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즉 데카르트는 외적 현상을 우리의 감성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의 표상이라고 본다. 그런 까닭에 선험적 실재론자는 경험적 관념론자가 된다. 대상은 사물 그 자체의 표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대상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후설의 철학은 이러한 인식론적 아포리아들을 문제삼고 있다. 더우기 <이덴> 발표 이후로는 확연하게 데카르트적 전통 속에 들어선다. 그때문에 <논리연구> 발표이후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고 따랐던 많은 사람들과 결별한다. 우리는 후설의 철학의 발전과정에서 '자아'개념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그 자신의 철학적 변화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후설의 '자아'개념의 변천사는 논의 밖에 두고 오로지 후설의 '자아' 개념만을 살펴 보고자 한다. 오직 '인식론적 스캔들과 자아'의 문제에 맞추어 후설의 사유를 따라 가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후설의 철학적 성찰이 얼마만큼 데카르트가 남긴 아포리아에 대한 해결책이 되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2. 인식론적 스캔들의 해소와 선험적 관념론

우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사물들 속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사물과 사람들의 존재를 가장 기본적인 사실로서 의심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들이 세상 속에 살면서 확신하고 있는 가장 상식적인 믿음을 세 가지 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1) 우리는 물리적 대상을 직접 지각한다. 2) 이러한 대상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공간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차지한다. 3) 이러한 대상의 특성은 그것이 현재 그렇게 있다고 우리가 지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믿음은 갈릴레오가 현상을 재규정하기 전까지의 학적 사유 속에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現象이란 대상이 관찰자의 마음 안에 일으킨 효과이며 따라서 그것은 心的 狀態에 해당한다."고 정의하였다. 이 정의는 현상이 대상과는 구분되는 주관적 존재이며, 외적 실재의 존재와 본질을 인식하는 실마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적·과학적 지식은 감각에 나타나는 것들로부터 출발한다 하더라도 경험이 참임을 확인하거나, 거짓임을 밝히는 이성을 통해서 성립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 갈릴레오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는 감각적 경험은 불충분하고 주관적인 것이어서 항상 의심스러운 것이므로 이성의 법정에서 검정받지 않는한 참된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지식의 정당성을 경험이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험적 사실의 학적 정당화는 당대의 과학 발전의 토대가 된 수학적 자명성을 가진 이성만이 제공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갈릴레이가 주장하는 현상을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즉 우리 마음 속에 현상하는 존재로부터 판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는 "양, 즉 길이, 넓이, 깊이를 지닌 양의 연장 혹은 양적인 것의 연장"이라는 관념과 이 관념에 귀속시킬 수 있는 "온갖 크기, 모양, 위치, 장소, 운동, 지속" 등의 관념이 있으며, 또한 판명하지 않지만 감각을 통해 더 잘 인식되는 것에는 "색깔, 소리, 맛, 고통"등의 관념이 있다. 그리고 전자의 관념은 우리 바깥에 있는 물체 그 자체에 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나 후자의 관념은 그렇지 않다. 지각된 관념에 대한 이런 설명 방식은 로크에서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다. 로크는 데카르트의 관념의 분류를 이어받아 전자를 제일성질에 의해 생긴 관념으로, 후자를 제이성질에 의해 생긴 관념으로 파악한다. 데카르트와 로크의 이런 설명 방식은 갈릴레이를 이어받아 그대로 인식론적 스캔들의 원형을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가 사물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지난 삼백여년 동안 논의되어 왔다.

근대를 관통하고 있는 인식론적 스캔들은 이처럼 갈릴레오가 가졌던 과학적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후설이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 현상학}에서 근대에 나타난 학의 위기의 원형을 갈릴레오로 설정하고, 이에 대한 철학적 대응으로 데카르트를 설정하였던 까닭이나, 데카르트가 여전히 갈릴레오 식의 물리학적 객관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으로써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정초하는데 철저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이해할 수 있다. 학의 근원에 대해 철저하지 못했던 철학은 갈릴레이의 유산을 심화하여 학문의 위기, 철학의 위기를 초래하는 데 오히려 일익을 담당하였다.

후설은 자신의 철학이념을 성취하기 위해 '환원', '판단중지', '괄호침', '배제'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를 크게는 "판단중지와 환원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으며, 괄호침과 배제 등은 판단중지에 부수되는 상황으로 간주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볼 때 우리의 관심은 환원보다는 오히려 판단중지에 있다. 판단중지가 인식론적 스캔들과 관련하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후설은 판단중지를 통해 무엇을 해소시키려 했을까. 일상인들은 대상 세계가 확실하게 우리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이 대상을 획득하기 위해 애쓰며, 획득한 것에 대해 집착하며, 획득하지 못한 데 대해 원망하고, 또 획득하기 위해 다른 대상들을 이용하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일상인들은 항상 대상 세계에 몰두한다. 대상 세계에 몰두하기 때문에 존재의 근원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판단중지는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이 대상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이런 믿음을 중단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대상을 직접 지각하며, 지각된 대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우리가 지각한 것은 대상 세계의 바로 그 특성이다'는 앞서 정돈된 상식적인 믿음들에 대한 중단이다.

판단중지는 그 다음으로 과학자들이 분석하고 증명하려고 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중단시키고자 한다. 과학자들이 믿는 세계란 이중적이다. 이 세계는 존재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는 현상의 세계이며, 참된 존재의 세계는 지각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증명하기가 어려운 세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이성을 통해 이념적·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이 세계가 바로 후설이 파악한 것처럼 갈릴레이가 수학적인 상징의 옷으로 이념화한 세계이다. 그것이 바로 근대인들이 참된 세계라고 믿고 있는 세계이며, 이러한 과학적 신념 때문에 생활세계는 은폐되고 황폐하게 되었다. 근대의 철학자들이 증명하려고 애쓰던 세계는 바로 그 과학적·이념적 세계였다.

일상인들의 세계에 대한 믿음은 그 소박함때문에 판단중지해야 한다면, 과학자들의 믿음은 여전히 소박한 상식적인 믿음을 근저에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으로부터 과학적 세계를 쌓아 올리고, 교양인들에게 잘못된 존재 믿음을 심어주기 때문에 판단중지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데카르트 이래의 철학자들이 갖고 있는 과학적·인식론적인 세계(존재)에 대한 믿음도 동시에 판단중지해야 한다. 후설로서는 근대적 인식론의 스캔들은 바로 이런 그릇된 존재 믿음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에 과학적·인식론적·객관적 세계(존재)의 믿음에 대한 후설의 판단중지는 태도의 근본적인 변화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판단중지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태도의 변경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데카르트가 일찍 주장한 것처럼 판단중지하는 주체, 마음, 의식인가? 후설의 대답은 일단 '그렇다'이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후설은 판단중지 이후에 남아있는 것은 현상 그 자체, 사태 그 자체라고 말한다. 이것은 데카르트와 달리 판단중지한 후에도 우리의 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좀 정교하게 말하면 우리가 통속적인, 또한 과학적인 존재 믿음을 판단중지하고 돌아오는(환원하는) 세계는 우리가 판단중지하기 전의 세계와 같은 세계이면서도 다른 세계이다. 자연적인 삶 속에서 갖게 되는 존재 믿음이 실제의 세계나 대상을 가리기 때문에 우리가 판단중지를 통해 세계나 대상을 해방시켜 바로 그 현상을 주목한다면 그 세계는 같으면서도 다른 세계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객관적·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은 로티가 주장한 것처럼 마음을 거울로 파악하는 거울이론을 성립시켰다. 후설의 판단중지는 바로 그 거울을 깨는 역할을 한다. 마치 혜능의 게송이 신수의 거울 이론을 깨뜨린 것처럼. 그러나 혜능이 신수의 거울의 비유를 깨뜨렸어도 거울의 비유를 밑바탕에 두고 있는 것처럼 후설도 역시 데카르트의 마음(Cogito)을 버리지 않고 현상학의 원형적인 토대로 받아 들인다. 판단중지 이후에 남아 있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마음(Cogito)이다. 마음의 해명이 현상학의 가장 주된 철학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후설이 말하는 마음은 데카르트가 말하는 마음과 어떻게 다른가? 이 부분의 해석이 인식론적 스캔들을 해소시키는 결정적인 지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 후설이 데카르트를 해석한 부분을 참조해 볼 필요가 있다. 후설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를 '데카르트적 판단중지'라고 부른다. 데카르트는 이를 통해 '나는 존재한다. 나는 사유하는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보한다. 이때 사유하는 존재(Sum cogitans)는 "나는 사유된 것을 사유된 것으로서 사유한다.(ego cogito-cogitata qua cogitata)"는 의미를 지닌다. 후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이 사실은 개별적 사유작용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의 흐름을 하나의 사유작용(cogito)의 보편적 통일로 종합하는 모든 사유작용들 - 이 속에서 세계와 내가 그때그때 세계에 귀속한다고 생각한 것이 사유된 것(cogitatum)으로 나에 대해 존재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지니고 있다 - 을 포괄하다." 후설의 이런 해석이 데카르트와 결정적으로 결별하게 만든다.

후설은 세계에 대한 모든 규정과 세계 자체가 나의 관념(ideae)이며, 이 관념이 나에게 사유된 것(cogitata)으로서 나의 사유작용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후설은 데카르트가 객관주의에 대한 지나친 관심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cogito에 대해 그릇된 해석을 하게 되었다고 본다. 데카르트는 갈릴레이가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이고 절대적으로 순수한 물체에 대한 확신과 이를 탐구하는 수학적인 것으로서의 순수 사유에 대한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세계 일반과 자신의 신체까지도 판단중지에 포함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결과 데카르트는 자아를 물체의 추상 이후에 남은 잔여(Residuum)로 파악하며, 외견상으로는 자아를 마치 물체를 보충하는 부분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순수 자아는 심리학으로 탐구될 수 있는 것처럼 왜곡되었고, 자아를 마음 즉 혼 즉 지성(mens sive animus sive intellectus)으로 규정하게 하였다.

근절하기 어려운 자연적 소박성은 심리학적 자아로부터 '외부 세계'를 추론하도록 만들었으며, 수세기 동안 이런 사실의 '자명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리하여 자아는 모든 수수께끼 가운데 가장 큰 수수께끼가 되었다. 후설의 cogito에 대한 앞의 해석은 인식론적 스캔들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킨다. 문제아닌 것을 문제로 삼았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우리는 문제 바깥에 서게 된다. 태도의 변경만으로 우리는 인식론적 스캔들 바깥에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대상에 대한 그릇된 믿음을 깨뜨리는 순간, 대상을 올바르게 반영하는 역할로서의 거울인 마음도 깨어진다. 전통적인 데카르트주의자들이 바라보는 마음 안과 밖이라는 구분을 떠나야 후설이 판단중지를 통해서 확보한 선험적 주관성이 비로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주관을 객관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인식론적 관점으로는 선험적 주관성을 이해할 수 없다.

후설은 선험적 주관성을 말하는 자신의 입장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부른다. 앞서 정돈된 "나는 사유된 것을 사유된 것으로서 사유한다."는 말을 재구성해보면, 우리는 후설의 입장을 좀더 확연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후설은 {데카르트적 성찰} 속에 이를 간략하게 정돈하고 있다. 즉 "대상들은 나에 대해 존재하며,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의식의 대상들로서 그것이 존재하는바 그대로 나에 대해 존재한다." 이를 좀더 분명하게 말해 보면, "세계는 도대체 나에 대해서는 그러한 '나는 생각한다' 속에서 의식되어 존재하고 나에게 타당한 세계 이외에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세계는 그것의 일반적이고 특수한 의미 전체와 그 존재 타당성을 오직 그와 같은 사유 작용(cogitationes)으로부터만 갖는다. 이 사유 작용 속에서 나의 세계 삶 전체는 경과하며,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정초지우는 나의 삶도 이러한 세계 삶에 속한다. 나는 내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 의미와 타당성을 갖는 세계 이외에 다른 어떠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 살고, 경험하고, 생각하고, 평가하며 행위할 수는 없다. 만약 내가 이러한 삶 전체 위에 나를 세우고, 이 세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곧바로 받아들이는 그 어떤 존재 신념을 수행하는 모든 것을 억제한다면 - 만약 내가 오직 나의 시선을 그 세계에 관한 의식으로서 이러한 삶 자체에 향한다면 - 나는 나의 사유 작용의 순수한 흐름을 지닌 순수한 자아로서 나를 획득하게 된다."

우리는 후설이 자신의 입장을 선험적 관념론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칸트의 입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후설과 칸트의 사유 속에서 관념론에 대한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금방 확인해 볼 수 있다. 간략히 정돈해 보면, 먼저 칸트가 사물 그 자체(Ding an sich)를 인정하고 있다면, 후설은 이미 살펴 본 바처럼 이를 근원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둘째 칸트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인 '선험적 논증'을 통해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정당화를 꿈꾸었다면, 후설은 자신의 철학적 방법인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경험 속에 들어있는 본질적 요소들을 기술하여 구체화하는 데 있다. 바꾸어 말하면 칸트는 경험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관심이 있었다면, 오히려 후설은 경험을 지배하는 선험적 자아의 선천적 원리들을 밝혀 내는데 관심이 있었다.

이 두 가지 차이점에 연루하여 보면 확연하게 구분되는 점이 또 하나 있다.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은 세계의 본성은 선험적 주체의 고정되고 불변한 12가지 근본개념으로부터 성립한다. 즉 인식되는 세계의 특성은 경험에 어떤 확실한 구조를 부과하는 마음의 산물이다. 주관은 마음이 부과하는 개념이 없다면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칸트의 이 주장의 밑바탕에는 지각하는 주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객관주의적 믿음이 깔려있다. 그래서 칸트 스스로도 자신의 선험적 관념론을 '경험적 실재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 부분을 전혀 수용할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후설에게는 칸트의 순수오성개념과 같은 고정되고 불변하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후설은 자신의 철학이 '연구철학'임을 주장한다. 연구철학이란 마음에 나타나는 본질(형상)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현상학의 특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3. 자아의 얼굴로서의 세계, 세계의 원천으로서의 자아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인간의 본성과 내력을 신화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인간이 자신의 온전한 모습에 대한 욕망과 그것의 추구를 에로스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것은 잘 알다시피 에뤼크시마코스의 제안, 즉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미하자는데 대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이다. 우리는 이 신화가 선험적 관념론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하나의 좋은 비유라고 생각한다. 자아와 세계는 서로의 상관관계에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자아와 세계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으로 믿고, 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우리의 삶을 이해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동경하고, 추구하며, 획득하고자 무익한 노력을 기울이며 갈등한다. 이는 제우스의 형벌로서 내려진 쪼개진 인간들이 다른 반쪽의 자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다. 우리에게 내려진 형벌은 존재와 사유의 일치로서의 존재 체험을 망각하고, 존재 체험을 주관과 객관의 관계로 파악하여 주관이 객관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으며, 객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목말라하는 것이다.

우리는 후설이 선험적 관념론을 "대상들은 나에 대해 존재하며,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의식의 대상들로서 그것이 존재하는바 그대로 나에 대해 존재한다."는 매우 추상적인 문장을 빌려와서 정리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대상이란 우리의 의식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지시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의식도 대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의식도 의식된 대상이 없이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마음은 늘 마음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관계맺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추리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상상하며, 지각한다. 즉 추리하는 마음은 추리되는 것, 판단하는 마음은 판단되는 것, 느끼는 마음은 느껴지는 것, 상상하는 마음은 상상되는 것, 지각하는 마음은 지각되는 것과의 관계에서 표현된다.

후설이 파악한 Cogito가 데카르트가 일찍이 파악하여 그 이후로 전승되어 논의되는 Cogito와 같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선험적 관념론을 완전히 해명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Cogito도 보기에 따라서는 후설이 주장하는 Cogito와 차이가 없어 보인다. 데카르트나 그의 후계자들도 마음의 구체적 형태들은 그 대상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지적한 바처럼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마음이나 자아를 세계의 잉여물로 파악하였다. 그 때문에 마음과 자아는 자연주의적인 심리학적 탐구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이것은 세계를 마음과 구별되는 마음 밖의 대상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데카르트는 마음을 마음 밖의 대상과 관련맺는 기능적인 작용으로 파악하였기 때문에 자아를 마음 작용의 주체로 파악하는 '자아실체론'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경험적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려는 흄은 마음이나 자아를 외적 대상처럼 지각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가 자아라고 부르는 관념의 다발(기억의 합)만을 지각하게 된다는 '자아 현상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자아의 주체성에 관한 논란의 시발점이 된다. 우리는 판단중지를 통해 마음 밖의 대상을 배제하였기 때문에 밖과 안이라는 인식론적 구분을 더이상 가질 수가 없고, 그런 까닭에 마음을 기능으로 혹은 대상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는 어떤 자아론에도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경우는 자연주의적·심리학적 자아론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대상들은 나에 대해 존재하며,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의식의 대상들로서 그것이 존재하는바 그대로 나에 대해 존재한다.'는 명제의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논의해 보자. 후설은 '대상들이 나에 대해 존재한다.'는 것을 다르게는 지향성으로 설명한다. 지향성은 잘 알다시피 후설이 어떤 물리현상도 지향성을 갖지 않지만 정신현상만은 지향성을 갖는다는 브렌타노의 입장을 받아들여 철학의 핵심개념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는 앞의 명제를 '의식은 언제나 대상을 지향한다'거나, '의식은 언제나 대상에 관한 의식이다.'로 다시 표현할 수 있다. 이 표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의 능동성이 대상(세계)의 성립 원천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의식이 홀로 자신의 존재 모습을 지니지 못하고 오로지 지향적인 활동 속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주체 혹은 선험적 자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발견하기 위해서 세계(대상)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고찰해야 한다. 또한 세계는 의식의 경험대상으로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구조를 밝히기 위해서는 경험의 본질적·선천적 속성들을 밝혀야 한다. 그러한 경험의 속성들은 자아의 본질적 속성들을 밝히지 않는 한 확보할 수 없다. 이것은 자아와 세계가 상호 공속(共屬)되어 있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상호공속성을 밝혀야만 비로소 선험적 주관성의 신비를 벗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향성은 '자아-의식작용-의식된 대상(ego-cogito-cogitatum)'으로 도식화해서 이해될 수 있다. 후설은 자아를 경험하는 주체·선험적 자아·자아극으로 설명하려 하고, 대상을 경험된 대상·대상극으로, 의식작용을 자아와 대상이 상호관계하는 경험의 흐름(의식하는 삶)으로 구체화시킨다. 이러한 도식은 자아와 세계의 상호공속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상호공속성은 자아의 모든 구성과 자아에 대해 존재하는 모든 대상성을 해명하지 않고는 밝혀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아 프리오리한 자기 해명의 방식을 취한 후설의 입장을 따라 자아와 세계의 상호공속성을 밝혀야 할 것이다. 후설은 자아를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 '습득성의 기체로서의 자아', '모나드로서의 자아' 등 세 가지 모습으로 강조한다. 이 세 가지 모습의 자아를 세계(대상)와의 관계 속에서 해명해야만 비로소 '자아'개념의 선험적 성격이 분명해 질 것이다.

세계는 어떻게 인식될까? 구체적인 지각경험을 통해서일까, 아니면 보편을 통해서일까?. 만약 후자라면 우리가 이런 보편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플라톤의 비유대로 우리는 이념의 세계에 살다가 유배된 탓에 보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하고 있는 것일까? 유래를 묻는 것이 대답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물음이라면 우리는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후설은 이것을 지향성으로 설명한다. 즉 우리는 대상을 지향한다. 이때 '지향된 대상'은 지각된 것이 아니라 의미이며, 이 의미는 의식의 지향성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의미(보편/형상)를 지향하는 의식의 지향성을 설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의미가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와 공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의미는 의식이 그것을 어떻게 정립하느냐에 따라 지각 의미, 상상 의미, 회상 의미로 성격지워질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을 하나의 나무로 지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회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상의 의미는 동일하다. 이처럼 감각에 주어지는 양식과 의식의 정립성격이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유지되면서 감각에 주어지는 양식과 의식의 정립성격에서 규정되는 내용들의 통일점을 후설은 '의미핵심', '중앙핵심'이라고 하며, 이것을 '대상적 의미'라고 불렀다. 그리고 판단 속에서 술어들을 통해 이 의미핵심을 고찰하면 드러나는 가장 내적인 중심점을 '순수 X'라고 불렀다. 순수 X는 술어들의 담지체이다. 순수 X는 모든 술어들을 다 사상한 공허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이 순수 X가 바로 '지향적 대상'이다. 지향적 대상이야말로 모든 현상 양식들을 대상적 단일체로 모으는 하나의 극, 즉 대상극이다.

자아는 지향적 관계를 통해 대상(순수 X)과 관계 맺는다. 지향적 관계란 "순수 자아가 노에시스를 통하여, 그리고 노에마를 넘어 저편, 핵심의 중심점, 지향적 대상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실질적인 모든 의식작용에는 순수 자아의 시선이 그때마다 의식의 상관자인 '대상'에게로 향해 있다. 대상의 다양성만큼이나 우리의 체험도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 때마다 자아의 시선은 달라진다. 자아는 "지각에 있어서 지각하는 시선, 상상에 있어서 상상하는 시선, 찬성에 있어서 찬성하는 시선, 의지에 있어서 의지하는 시선 등등으로 어떤 무엇에 대한 시선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선은 단 하나의 자아의 시선이다. 이 모든 시선은 순수 자아로부터 솟아 나온다. 의식의 모든 체험(의식작용)은 단 한 자아의 체험으로 수렴된다.

순수 자아는 대상의 관계방식 혹은 태도 방식으로서만 존재한다. "그것은 텅 비어 있으며 해명되어질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는 그 자체 기술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순수 자아일 뿐이며 그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순수 자아는 흘러가는 의식 삶 속에서 이러저러한 것을 체험하는 의식을 어떻게 동일한 것으로, 또한 자기 자신을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으로 구성할 수 있단 말인가? 즉 자아는 어떻게 자신의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단 말인가? 지각하는, 상상하는, 상기하는 의식의 작용(지속적으로 흐르는 의식 삶/체험의 흐름)은 순수자아에 의해 동일한 대상의 체험으로 인식된다. 순수 자아는 이 체험의 일치 속에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 우리는 삶의 체험(의식의 흐름)을 어떻게 일치시키는가. 그것은 오직 '순수 X', '지향적 대상'으로 파악된 의미를 통해서만 우리의 체험을 한 자아의 체험으로 인식한다. 순수 자아는 오로지 이 지향적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체험들을 한 자아의 체험으로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다. 이렇게 해서 확보된 자아를 후설은 자아극, 즉 '체험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자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것을 인식할 때, 일반적으로 어떠한 지각경험도 없는 의미 대상으로만 그것을 인식한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것은 한낱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는 음영으로 주어질 때 인식된다. 우리는 물체를 인식할 때 늘 지각되는 부분만을 인식한다. 예컨대 책상을 본다고 할 때, 우리 눈앞에 보여지는 책상의 부분만을 보며, 나머지 부분은 볼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책상을 인식할 때, 보지 않은 즉 아직 규정되지 않은 부분을 함께 인식한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후설은 이 미규정성의 지평은 오직 확고하게 이미 예시된 전형(典型/定型/ Typus/Typik/Stil)에 의해서 인식될 수 있다고 한다. 물체는 이 전형을 통해 노에마적 지평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전형은 경험을 통해 단번에 확보되며, 경험이 계속되면서 더욱 풍부해지기도 하고 수정되기도 하는 경험적 보편성이다. 후설은 이것을 자연적 경험 통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형에 의해서 지각 경험에서 어떤 대상을 인식할 수 있으며, 나아가 그 본질을 직관하게 된다.

전형의 획득을 통해 우리는 대상에 대해 늘 확실한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떤 책상을 지각할 때 미규정적 음영을 지닌 채 인식하는 현재의 지각에서 뿐만 아니라 책상에 대한 과거의 지각에 대해 회상할 때조차도 미규정적 지평을 예시하는 정형을 통해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전형, 즉 사물의 '미리 알려져 있음(Vorbekanntheit)', 사물의 '지평을 미리 지시함(Horizontvorzeichung)', 지각의 지평이 '미리 주어져 있음(Vor- gegebenheit)'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그것은 순수 자아의 습득성(Habitus/ Habitualit ten)에 의해 가능하다. 후설은 습득성을 "습기(習氣)들, 즉 <발생에 의해서, 자아가 그때그때 능동작용actus을 수행해 옴으로써, 자아에게 增長되고 오직 이러한 능동성들에 힘입어서만이 역사적으로 자아에 귀속되는> 습기Beschaffenheit이다."라고 정의한다.

자아의 습득성을 좀더 분명하게 정리 해보면, "자아는 역사를 가지며, 그의 역사를 근거로 해서 자아는 그에게 습득적으로·그리고·동일한·자아로서·존속하는 하나의 자아를 창출한다." "예를 들면, 만약 내가 판단 작용 속에서 어떠한 존재나 그렇게 존재함에 대해 최초의 결정을 내린다면, 이 유동적인 작용은 사라져 버리지만, 그러나 그 이후에도 나는 이러저러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확신하는 자아이며, 그러한 자아로 남아 있다. …. 그 확신이 나에 대해 타당한 한에 있어서 나는 그 확신에로 반복하여 되돌아 갈 수 있고, 그 확신을 언제나 다시 나의 확신, 즉 나에게 습관적으로 고유한 확신으로서 발견하게 된다. 또는 그러한 한에 있어서 나는 나 자신을 확신하고 있는 자아 - 이렇게 지속하는 습관(Habitus)으로서 견지하는 자아로서 규정된 자아 - 로서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결단, 즉 가치의 결정과 의지의 결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아의 습득성은 인식 대상의 전형을 획득하는 자아의 확신에서 성립된다. 이 때 습득성은 자아가 "끊임없이 나(자아)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환경세계를 갖고 있고, 이 환경세계 속에서 나에 대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대상들을, 즉 지속하는 분절 속에서 이미 나에 대해 알려진 것으로서 대상들 혹은 알게 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단지 예측된 대상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후설은 이를 '습득성의 기체로서의 자아'라고 명명하는데, 이 자아는 습득에 의해 자신을 견지함으로써 '머무르며 지속하는 인격적인 자아', 즉 자아의 개별성을 얻게 된다.

지금까지 설명한 자아의 구성 요소들은 구체적인 자아를 설명하는 토대이다. 구체적인 자아란 "자아의 지향적 삶의 흐르고 있는 다양성과 그 삶 속에서 사념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삶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구성된 대상들 속에서만" 비로소 존재한다. 이것은 순수자아가 자아극으로서의 형상적 자아로서 삶 속에 현존하는 단순한 사물들을 만나 대상의 전형과 마음의 습득을 확보하고, 이 전형성과 습득성을 통해 단순한 사물들을 '∼ 로서' 구성하는 활동을 하면서 사실적 자아가 되며, 이러한 활동 속에서 선험적 자아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구체적 자아야말로 실질적으로 자아의 구성을 논의할 수 있는 곳이다. 후설은 이 구체적 자아를 '모나드적 자아' 혹은 '자아, 즉 모나드'라고 부른다. 이 것은 일찍이 라이프니츠가 모나드 속에 우주가 반영된다(mirror)고 말하였기 때문에 택한 이름 같다.

우리는 자연적·사회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꾸려 나간다. 자신의 미래 삶(가능적 삶)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현재의 삶에 동기를 부여하고 살아갈 수 있다. 후설은 이를 선험적 자아로서의 순수자아가 동기부여의 형식에 따라 자신의 삶의 내실적인 존재 내용으로 체험되는 단순한 사물들을 질서지우고, 하나의 세계로 구성한다고 말한다. 이 동기부여의 형식이 끊임없이 주어지는 과거-현재-미래라는 의식의 흐름을 하나의 인식작용-인식내용으로 구성한다. 즉 자아는 동기부여의 형식에 의해 실질적으로 만나는 사물들을 내적 시간의식 속에서 수동적 종합의 원리인 연상에 의해 단순한 대상들로 구성하며(수동적 발생), 이 구성을 통해 우리는 대상들의 환경을 갖는다. 또한 자아는 그 형식에 의해 단순한 대상들을 형상에 의해 구성된 것(의미대상/세계)으로 의미부여한다(능동적 발생). 동기부여의 형식에 의해 모나드적 자아는 자아극으로서의 형상적 자아를 실질적 자아로 성취하고, 실질적 자아를 구성함으로써 모나드적 자아는 그 때서야 선험적 자아가 된다. 이 선험적 자아가 상호공속성을 구성하는 주체이며, 선험적 주관성의 원천이다.

체험들의 동일한 극이 되는 자아는 늘 대상극으로서의 본질, 형상을 직관한다. 직관된 본질들은 모든 가능한 경험들의 목록이며, 또한 가능한 대상들의 목록이다. 본질(형상)들은 체험 속에서 자아의 습득성들에 의해 가능적이거나, 현실적인 경험이 되며, 또한 현실적인 대상의 인식이 된다. 본질이 자아극과 늘 상호공속적이란 점에서 형상적 자아는 모든 구체적인 선험적 자아에 관한 형상적 분석이다. 우리는 모나드적인 자아의 해명을 통해 '대상들은 나에 대해 존재하며,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의식의 대상들로서 그것이 존재하는바 그대로 나에 대해 존재한다.'는 명제 속에 나타난 '현실적이거나 가능적인 의식의 대상들로서 그것이 존재하는바 그대로 나에 대해 존재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 맺음말

후설이 1928년 프라이부르그 대학을 은퇴하고 1938년 79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남긴 글은 {형식 논리와 선험 논리}, {데카르트적 성찰},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 현상학}으로 볼 수 있다. 이 중 {성찰}과 {위기}는 후설 스스로가 행한 강연이 그 토대가 되어 출판된 책들이다. {성찰]의 주제는 1929년 소르본느 대학의 데카르트 기념관에서 '선험적 현상학 입문'이라는 주제로 강연된 이후 1932년 후설이 그의 연구 조교인 E. 핑크를 위임하여 '선험적 방법론'이라는 명칭아래 '제6성찰'을 구상하게 하고 검토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위기}의 주제는 1935년 비엔나에서의 '유럽 인간성의 위기에서의 철학'과 프라하에서의 '유럽 학문의 위기와 심리학'으로 강연되었다. 그리고 프라하에서의 강연은 1936년 발행된 {philosophia}란 잡지의 창간호에 실렸다. 후설은 이 강연의 주제를 완결짓기 위해 그 후에 계속적인 작업을 행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굳이 후설의 말년의 년보를 간략하게 더듬어 보는 까닭은 단순하지만 의미가 깊다. 후설의 은퇴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연구는 {이념}에서 시작된 현상학의 정점, 즉 선험적 현상학의 완성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며, 또한 선험적 현상학의 새롭게 발전된 형태를 발견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선험적 현상학의 핵심 개념이며, 근거 개념인 [선험적 자아], [선험적 주체(관)성]을 데카르트적 유산에 촛점을 맞추어 해명하는 까닭은 그것이 후설의 철학적 사유를 가장 잘 드러내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논증의 과정을 통해 후설의 후기 현상학, 특히 생활세계의 현상학이 단절적인 발전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선험적 자아를 해명하는 연장 선상에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으며, 생활세계적 현상학에서의 자아 해명은 이 단계의 해명을 거치지 않고서는 그 본령에 닿을 수 없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아의 선험적 성격을 해명함으로써 후설이 철학 즉 학문을 "인간성 그 자체에 '타고난 본래의' 보편적 이성이 계시되는 역사적 운동"으로 파악하고, 근대철학을 근대의 유럽 인간성을 위한 철학들의 투쟁으로서 주장하는 까닭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즉 "그리스 철학의 탄생과 더불어 유럽의 인간성은 타고난 본래의 목적, 곧 철학적 이성에 기초한 인간성이 되고자 하고 오직 이러한 인간성이 될 수 있는 목적"을 실현시키고자 하며, 이를 위한 학의 이념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 확인된 자아 개념만이 근원적으로 동양적 사유 속에 나타난 인간성과 학의 이념과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비로소 탐구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