흄의 도덕 인식론*
― 이성과 감정의 도덕적 역할과 관계
전 영 갑**경성대학교 철학과 교수.
요 약 문
행위의 원리와 도덕적 판단의 근거를 확립하는 것은 실천철학으로서의 윤리학이 짊어진 가장 본질적인 과제 중의 하나이다. 선․악과 같은 도덕적 구별이나 도덕적 판단의 원천이 이성에 있다는 합리주의적 전통이 지배적인 도덕철학의 역사에서, 흄은 선․악과 같은 가치를 파악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근대의 가치인식론 또는 도덕적 인식론의 영역에 정서주의의 한 범례를 제공하고 있다.
흄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에는 이성과 대비되는 감정 또는 정서의 능력이 있어서, 오히려 이성을 제치고 가치파악과 도덕적 인식의 가장 근원적인 원리로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위에서, 본 논문의 목적은 감정과 이성의 역할과 관계에 관한 흄의 정서주의적 기초 논변을 고찰하고, 그럼으로써 흄 도덕 인식론의 기본구조와 특징 및 실천적 의미를 밝히는데 있다. 흄이 드러내고자 한 도덕 인식론적 논지를,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으며,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겠다. 첫째, 도덕적 구별은 이성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고, 감정 즉 도덕적 정서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둘째, 감정 자체의 무표상적 성질이 근원적인 지각을 구성하는 인상에 다름 아니며, 반영 인상으로서의 감정과 차분한 감정이 실질적으로 도덕적 지각 즉 도덕 인식에 관여하고 있으며, 셋째,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성주의를 전복하는 정서주의를 전개하면서도, 도덕적 지각과 구별 및 행위의 영역에서 감정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이성은 보조자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 주요어 : 감정, 이성, 정서, 윤리적 이성주의, 정념, 도덕감, 정서주의, 도덕적 인식.
1. 들어가는 말
인간은 지각하고 사고하며 행동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도덕적 주체로서 행동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가치의 인식자나 담지자로서, 선․악과 시․비를 가리고 행위의 근거와 동기를 따지며 나아가 자신이 행한 행동의 결과를 반성적으로 사유한다. 또한 관찰자나 조언자로서 타인의 행동에 대해 칭찬과 비난의 판단을 내리거나 실천적․도덕적 조언과 충고를 행하며,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할 보편적인 행위규범과 도덕적 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럴 때 선․악과 시․비를 구별하는 근거와 행위의 동기에 관한 실천철학적 성찰은 가치판단이나 도덕적 인식의 근원에 대해 모색한다.
우리가 행위일반의 원리와 도덕성의 근거를 모색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제기하는 도덕철학적 물음은, 칸트가 제시한 바와 같이, “나는 무엇을 해야만 되는가?”라는 형태로 표현되지만, 이러한 당위적․실천적 물음은 동시에 행위의 대상이나 기준이 되는 가치 즉 선․악의 인식에 관한 물음 즉 “선․악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그것은 행위의 원리나 도덕적 규범이 가치와 반가치의 구별이나 선․악의 인식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치인식 또는 도덕적 인식의 본질적 구조와 특성이 먼저 규명되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치인식이나 도덕적 인식의 문제에는 ‘지성주의’와 ‘정서주의’의 두 가지 견해가 맞서고 있는 바, 보편타당성과 객관성이라는 표준과 이념을 중시한 도덕철학의 역사는 지성과 이성을 도덕의 근원으로 삼는 ‘윤리적 이성주의’(ethical rationalism) 역사에 다름 아니었고, 도덕과 행위의 근거가 감정이나 정서에 있다는 ‘정서주의’(sentimentalism, emotionalism)는 상대성과 주관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무시되거나 배제되어 왔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적 인식과 행위의 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성만이 그 정당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과 권리가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적 이성주의의 기치아래 계몽주의가 한창 꽃피던 17․8세기 경에 영국을 배경으로 샤프츠베리(Shaftesbury)와 허치슨(Hutcheson)의 뒤를 이어 소위 ‘도덕감’(moral sense, moral sentiment)이론을 주장한 흄(D. Hume)은, 도덕적 구별의 원천과 행위의 동인이 이성이 아니라 정념( 감정 또는 정서)과 같은 감성의 영역에 있음을 역설하였다. 윤리적 이성주의나 관념론적 윤리설을 과감하게 비판하고 “도덕성은 판단된다기보다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도덕적 구별과 인식 및 행위의 근원에 대한 정서주의적 또는 감정주의적 논의의 길과 마당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흄은 이성주의가 우세하던 근대의 도덕 인식론과 행위론의 영역에 정서주의의 한 범례를 적극적으로 제공한 것이다.
최근에는 인지주의적 감정론의 등장으로 의지의 동기와 구체적인 행위기제 및 생활양식의 주요원천이 합리적 이성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감정은 윤리학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 연구의 중심적인 대상과 주제로 인식되고 있다. 감정이 인간 정신의 부차적인 기능이나 파생물이 아니고, 학습과 기억, 판단과 평가 및 관심과 구성 등과 같은 고도의 합리적 사고와도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인지주의의 감정론은 윤리학 분야에서도 매우 적극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
감정에 대한 이성의 일방적 우위라는 전통적인 주․노 이분법은 이제 비판․극복되어야 하고, 감정과 이성의 기능과 역할을 바르게 규명함으로써, 이성과 감정의 관계나 도덕적 인식의 구조 및 인간의 생활양식에 대한 인식의 틀을 재정립할 계제가 되었다.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시대적 상황에서, 흄의 비이성주의적인 정서론의 논의가 그 자체 주관주의나 회의주의로 비판받을 특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 도덕성의 실질적 근거 해명과 도덕의식에 대한 실제적 관점이나 보안적 관점을 제공할 수 있다는 면에서, 철학적 반성과 재성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우리는 애링톤(Arrington)이 지적한 것처럼, 흄이 도덕철학에 크게 기여한 바는 무엇보다도 ‘도덕적 판단의 인식적인 근원에 대한 반성적 고찰에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고, ‘도덕적 구별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의욕과 행위의 실제적 근거는 무엇인가?’, ‘어떻게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 등과 같은 당대의 실천철학적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나온 흄의 도덕철학이 근대라는 시대적 정황을 뛰어 넘어 탈근대의 도덕적․실천적 현실에도 매우 유효한 문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흄의 도덕론 특히 도덕적 인식론과 행위 심리학의 기본 논지는, 그의?인성론?제3권 제1부 1절과 2절에서 ‘도덕적 구별은 이성에서가 아니라 감정 즉 도덕감에서 유래한다’는 주장과, 그리고 같은 책 제2권 제3부 제3절,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정념의 노예여야만 한다’는 주장에서 단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바, 위의 논변들을 우리는 흄 도덕론의 기초 논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 소론은, 흄의 도덕 인식론의 기본 구조와 특징 및 의미를 고찰하기 위해서, 우리의 도덕적 판단의 원천과 행위의 근거가 대부분 그리고 본질적으로 이성보다는 정서 또는 느낌과 같은 감정에 있다는 흄의 정서주의적 논변들을 ?인성론?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감정의 인식론적․행위론적 작용기제와 그것이 지니는 실천적․윤리적 의미를 규명해 보고자 한다. 논문의 전개는, 2장에서 윤리적 이성주의의 비판을 통해서 도덕적 구별이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덕감과 같은 정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논변을 고찰하고, 3장에서는 인상으로서의 정념이 정신적 지각의 근원적 요소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인식과 행위의 근거가 된다는 논변을 살펴보며, 4장에서는 도덕적 인식과 행위의 영역에서 이성이 정념에 예속된다는 논변을 고찰함으로써, 흄의 정서주의적 도덕 인식론이 지닌 실천철학적 특징과 의의를 논의해 보고자 한다.
2. 윤리적 이성주의 비판과 정서주의의 옹호
가. 윤리적 이성주의 비판
도덕적 판단의 근원 그리고 행위의 근거를 새로 찾기 위한 흄의 도덕철학적 탐구는, 도덕에 있어서 이성의 주도적 역할을 주장하는 ‘윤리적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흄이 뉴턴을 모범으로 삼아 과학적 인간학을 정초하기 위해 당대의 관념철학과 지배 이데올로기인 윤리적 이성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것은, 과학성과 실험성을 표방한 그의 철학적 경향으로 볼 때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흄은 「실험적 추론 방법을 도덕적 주제들에 도입하기 위한 시도」라는 부제를 단 그의 주저 ?인성론?과 그 후속편이면서 개정판인 ?도덕원리의 탐구?에서 기울이고 있는 주된 윤리학적 관심사의 하나를, 도덕의 일반적 토대를 재검토하는 것에 두고, 그 토대를 이성이 아닌 감정이나 정서에서 구하고 있다. 허치슨과 흄의 도덕감이론을 비판했던 당대의 대표적 윤리적 이성주의자들인 월라스톤(Wollaston)과 클라크(Clarke), 그리고 발귀(Balguy)는, “이성을 토대로 한 선․악의 구분과 정념에 대한 이성의 우위”를 신봉하고 또 주장했었다. 그러나 흄은 그들에 맞서 이성이 전통적으로 도덕적 구별과 판단에 대해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온 역할과 기능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오직 이성만으로 도덕적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일이 가능한가? 아니면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데는 반드시 다른 원리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도덕 인식론적 문제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한편에서는 전통적인 이성주의자의 도덕론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적이며 경험적인 토대에서 도덕 인식의 원리와 행위의 근거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것이다.
그래서 흄은 도덕원리의 탐구를 위한 과제로, “도덕이 이성으로부터 도출되는가 아니면 감정으로부터 도출되는가, 도덕적 지식이 일련의 논변과 귀납에 의해 획득되는가 아니면 감정이나 어떤 섬세한 내적 감각에 의해 얻게 되는가, 또한 진․위에 관한 모든 건전한 판단처럼 도덕성도 모든 이성적 지성적 존재에게 동일한 것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미․추에 관한 지각의 경우처럼 전적으로 인간의 특정한 기질이나 성향에 의존하는 것인가”하는 문제들을 제기하고, 이것들을 실험적․경험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이성을 토대로 한 도덕과 정념에 대한 이성의 우위가, 합리주의자들 또는 이성주의자들의 인위적인 관습과 신념에 있음을 밝히고자 시도했다. 그러면 흄은 어떤 이유로 이성이 도덕적 구별이나 행위의 일차적인 원리로서 작용할 수 없다고 보았으며, 윤리적 이성주의를 비판하고 정서주의를 주장한 근거는 무엇인가?
다른 이성주의 철학자들과 마찬 가지로, 흄도 이성에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보고, 이성의 두 가지 기능과 특성에 대한 분석과 논의를 통해서 윤리적 이성주의의 도덕 인식론을 비판하고, 도덕적 구별이 이성에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한다.
흄에 의하면 이성은 사실에 관해서나 관념들간의 관계에 대해 판단한다. 전자가 인과적 추론으로서 ‘개연성’의 탐구에 관계한다면, 후자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처럼 ‘논증성’과 관계한다. “인간 오성의 작용들은 그것들 자체가 관념들간의 비교와 사실의 문제를 추론하는 두 종류로 구별된다. 만일 덕이 오성을 통해 밝혀진다면, 덕은 그런 오성작용들 중 하나의 대상이어야 하지, 이 덕을 밝힐 수 있는 제3의 오성작용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흄은 덕이나 악덕 같은 도덕적 가치의 판별은 오성 작용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이성이 도덕적 구별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성의 두 가지 기능에 의한 것이어야 하지만, 흄은 둘 중의 어느 이성적 기능도 도덕적 구별을 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흄이 관념들의 관계를 다루는 논증적 이성이나 사실을 다루는 개연적 이성이 도덕과 도덕적 가치구별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윤리적 이성주의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덕과 악덕은 ‘관념들간의 관계’ 또는 ‘대상들간의 관계’가 되어야 하므로, 덕과 악덕의 인식은 이러한 관계를 추적하는 논증적 이성이 작용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단지 어떤 행위에 대한 관념들을 검토함으로써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인식할 수 있으며, 오직 추론을 통하여 그러한 행위의 옳고 그름을 구성하는 관념들간의 필연적인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성론? 제1권에서 흄은, 우리가 이성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논증적 확실성을 가지고 파악할 수 있는 관념들간의 관계는 오직 네 가지 즉 ‘유사성’, ‘반대’, ‘성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율’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구별이 관계와 관련된 것으로서 이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라면, 덕과 악덕은 유사성, 반대, 성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율과 같은 어떤 관계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관계가 물질적 사물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위나 정념 및 의지 등에도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점이다. 유사성, 반대, 성질의 정도, 양과 수의 비율이라는 관계는 이성적이든 비이성적이든 생명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자연 안의 모든 것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일한 관계 속에 있는데도 왜 근친상간은 인간에게는 부도덕과 범죄로 되고, 동물들의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가? 그 관계들은 두 경우에 동일한 것인데도 말이다. 이처럼 도덕적 특성들이 이런 관계에 속한다면 그것은 비이성적인 동물이나 무생물에까지 적용되어야할 것이지만, 비이성적 존재인 동물과 무생물에 대해 선악시비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흄은, 사람의 존속살해 행위와 오크나무의 묘목이 자라면서 부모나무를 뒤덮어 죽게 만드는 경우에 있어서, 두 사건을 구성하는 관계는 비록 서로 다른 원인을 지니고 있지만 관계자체는 동일하다는 논변을 편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러한 관계가 발견되지만 둘 모두에서 부도덕성의 관념이 나타나지는 않으므로, 이로부터 부도덕성의 관념은 관계를 발견하는 데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존속살해의 비도덕적인 행위와 부모나무를 죽이는 묘목의 무도덕적 사건을 구별하는데는, 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이성적 사유가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못하고 도움도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도덕적 구별이나 특성들은 논증적 이성을 통해서 파악되는 관념들간의 네 가지 관계 중 어느 하나나 둘 이상으로 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흄은, 사물의 영역에서 그들간의 인과적 관계에 관한 개연적 지식을 획득하는 이성 역시 도덕과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본다. 어떤 사태에 관한 도덕적 구별이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덕이나 악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사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유덕한 행위나 악덕한 행위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의 대상이 아니라 느낌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정념, 동기, 의지작용, 사고와 같은 것들이라는 것이다.
고의적인 살인과 같은 사악한 것으로 인정되는 행위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을 모든 면에서 검토해 보고, 당신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사실이나 실제 존재를 발견할 수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자. 당신이 그 행동을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든 간에 당신은 오직 특정한 정념과 동기 그리고 의욕과 사유를 발견할 뿐이다. 이 경우에 어떤 다른 사실 문제도 없다. …당신은 가슴 깊이 반성해서 이 행위에 대해서 당신 안에 일어나는 비난의 감정을 발견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의 대상이지 이성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 대상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T. 468-9)
이와 같이 볼 때, 도덕적 구별들은 사실들에 관계하는 이성에서 유래할 수 없으며, 사실에 관한 개연적 이성도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없게 되는 셈이다. 이성은 도덕과 도덕적 선․악 구별의 원천이 될 수 없고, 어떤 행위나 감정도 억제하거나 산출할 수 없다고 하는 점을 강조하는 흄의 논변 하나를 더 들어보자.
이성은 참이나 거짓을 발견한다. 참이나 거짓은 관념들의 실제 관계 또는 실제의 존재와 사실에 대한 일치와 불일치에 의존한다. 따라서, 이러한 일치나 불일치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무엇이든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고, 결코 우리 이성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이제 분명한 것은, 정념들과 의욕들 그리고 행위들은 그와 같은 일치나 불일치의 여지가 없는 바, 그것들은 근원적 사실이고 실재이며, 그 자체로 완결적이어서, 그 밖의 다른 정념들과 의욕들 그리고 행위들에 대한 아무런 지칭관계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정념들과 의욕들 및 행위들을 참이나 거짓이라고 말하거나, 이성과 상반되거나 부합한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T. 458)
위의 인용문은, 참과 거짓을 발견하고 구별하는 이성의 기능과 그 작용대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또한 감정과 의욕 및 행위가 의미론적으로 고립되어 있어서 즉 어떤 대상을 모사하거나 재현하지도 않아서, 이성에 의한 진․위의 대상도 아니며, 이성에 부합하거나 상반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접적으로는 감정이나 행위의 가치와 반가치가 이성과의 부합성이나 상반성과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간접적으로는 이성이 어떤 행위에 대해 부인하거나 시인함으로써 그 행위를 유발하거나 금지할 수 없으므로 도덕적 선․악을 구별하는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논의의 선상에서 당위(ought) 명제와 존재(is) 명제의 구별과 논리적 무연관성에 관한 흄의 입장이 정립된다. 도덕적 판단에 속하는 당위 명제는 사실이나 관념의 관계를 표현하는 존재 명제와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존재와 당위를 구별하는 흄의 논변은 현대의 메타윤리학자들이 가치 평가적 판단과 사실 기술적 판단을 구별하는 논의의 근원이 되었다. 실제로 이모티비즘과 규정주의를 포함하는 비인지주의는 옳고 그름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없으며, 도덕적 믿음들은 정당화될 수 없고 따라서 인식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모티비스트들과 규정주의자들의 논변에 의하면 어떠한 도덕적 판단들이나 도덕적 신념도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기술하는 명제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도덕적 정서
일상에서 우리가 도덕적 구별이나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면, 그리고 덕과 악덕 같은 도덕적 구별이 이성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느낌으로부터 유래하거나 감정에 기초해야만 한다. 결국 흄이 이성에 의해서 도덕적 구별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논증함으로써 이끌어낸 방향과 결론은, 도덕적 특성들이 이성에 의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정서 또는 인상의 결과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덕과 악덕은 이성만으로는 발견될 수 없고 관념의 비교를 통해서도 발견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덕과 악덕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들이 일으키는 인상이나 정서에 의해서임에 틀림없다. … 그러므로 도덕성은 판단된다기보다 느껴진다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흄에 의하면, 이성 또는 지성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사실이나 사물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고, 그런 사물이나 사실들에 대하여 우리는 정서적인 반응을 나타낸다. 그 중의 어떤 것은 시인(approval)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며 다른 것들은 부인(disapproval)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시인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나 개인 또는 사건들을 우리는 좋다고 하거나 옳다고 부른다. 반면에 부인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에는 나쁘다거나 그릇되다고 평가한다. 그러므로 흄은, 선과 악, 덕과 부덕, 쾌락과 고통, 유쾌함과 불쾌함, 시인과 부인 등과 같은 도덕적 구별이나 가치평가는 이성에 의해서 판단된다기보다 정서나 도덕감의 방식으로 느껴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성격이나 행위가 덕이 있다는 점을 관찰이나 추론을 한 후에 그 결과로 만족감을 느끼거나 유쾌한 느낌을 갖는 것은 아닌가? 또는 느낌에 앞서서 또는 느낌과 무관하게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성격이나 행위가 덕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흄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고귀하고 관대한 행위만큼 정정당당하고 아름다운 광경은 없고, 잔인하고 배반적인 행위만큼 우리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없다.(T. 470)
덕의 감각을 갖는 것은 어떤 특성을 응시하는 데서 어떤 특수한 종류의 만족을 느낀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 느낌이 우리의 칭찬과 찬미를 구성한다. … 우리는 어떤 특성이 우리에게 유쾌하기 때문에 그것을 덕이 있다고 추론하지 않는다. 그 특성이 어떤 특수한 방식으로 유쾌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상 그 특성이 유덕하다고 느끼는 것이다.(T. 471)
이것은 유덕한 행위나 특성은 추론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유쾌하거나 즐거운 느낌을 일으키지만, 악덕의 경우에는 불쾌하거나 거북한 느낌을 직접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내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성격이나 행동들을 볼 때, 어떤 성격이나 행동이 우리에게 편안하고, 기분좋고, 만족스러운 시인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면 유덕하다고 판단하고, 거북한 느낌 즉 부인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면, 무엇이 그런 감정을 일으켰던 간에, 악덕으로 여긴다. 이렇게 볼 때, 성격이나 행위의 도덕적 본성은 정서적인 반응과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된다. 덕이란 한 개인의 성격이나 행동이 시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악덕이란 부인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의해 구성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흄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판단은 주로 덕과 악덕에 관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덕을 행하면 도덕적으로 칭찬하고, 악덕을 행하면 비난한다. 우리가 어떤 행위나 성격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이유는 성격이나 행위가 그 속에 내재된 도덕적으로 찬양할 만한 성질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러 가지 성질들을 덕으로 칭찬하고 악덕으로 비난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흄에 따르면 다양한 성질들을 덕과 악덕으로 구분하는 요인은, 그 소유자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호감을 주거나’ ‘유용하다는’ 점이다. 어떤 성질의 소유가 직접적으로 즐거움을 줄 경우는 호감을 주고, 간접적으로 즉 그 다음에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사태를 증진시키는데 도움을 줄 경우는 유용하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호감은 직접적인 즐거움 즉 쾌락에 다름 아니며, 유용성은 쾌락을 증진시키는 도덕적 원리가 된다. 이 점에서 흄은 공리주의의 선구자가 되고 있다.
요컨대 흄은 쾌․고와 호․불호, 도덕적 시인과 도덕적 부인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통해서 도덕적 선․악이 판별된다고 보며, 쾌락과 호감, 시인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유덕한 것이며 고통과 불쾌, 부인의 정서를 자아내는 것은 악덕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덕과 악덕, 선과 악은 기본적으로 쾌와 고의 정서적 반응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대상을 지각하는 사람들의 주관적인 정서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흄이 파악한 도덕적 특성들은 색, 소리, 맛, 향기 등과 같은 제2성질들과 유사하다. 그런데, 이렇게 쾌․고의 정서적 반응이 주관적이라면, 어떻게 덕이나 악덕과 같은 도덕적 구별이 보편적인 도덕적 원리로 일반화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흄은 쾌․고를 구분하는 인간의 정서가 단순히 개별적이거나 주관적이라고 보지 않는다. 덕에 포함된 성질들은 즐거움을 주거나 유용한 것으로, 악덕에 속하는 성질들은 혐오감을 주거나 무용한 것으로 느껴지는데,이같은 구별은 인간들에게 대부분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본다. 그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도덕적 정서’ 또는 ‘도덕감’의 구조가 있기 때문이며, 쾌․고의 개인적 반응은 개별적이지만, 그 반응능력인 도덕적 정서 자체는 인간에게 보편적이라는 것이다. 흄은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의 도덕적 정서를 공감(sympathy)이라고 생각한다. 공감은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한 위대한 유사성”에 근거하고 있어서, 도덕성의 보편적 성향이나 원리로서 작용한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성질들 가운데 성질 그 자체에서나 그 귀결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기질적 경향이 우리와 다르고 또 상반된다고 하더라도, 상호 교류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기질적 경향과 감정을 수용할 수 있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흄에 있어서 ‘공감’ 개념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흔히 이해되고 있는 '동정심'이나 '연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시인과 비난의 감정을 느끼는 인간의 타고난 도덕적 성향이나 능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공감은 그 성격상 다른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므로, 인류애(humanity)와 동포 감정(fellow-feeling) 또는 이타심(benevolence)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본다. 우리는 이 공감의 원리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즉 먼 옛날이나 먼 나라에서 행해졌던 행위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시인하거나 비난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흄에 있어서 공감은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한 도덕적 인식 능력이며, 도덕적 구별이나 판단의 보편적 원리가 되는 것이다.
3. 감정의 특성과 도덕 인식론적 의미
2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덕적 선․악의 구별이 이성에 근거하지 않고 정서나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면, 이제 감정이 갖고 있는 인식론적 특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지닌 도덕 인식론적 작용기제는 어떠하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3장에서는 흄의 도덕 인식론의 주제 개념인 감정 또는 정서의 인식론적 기능과 역할에 관한 흄의 논변을 고찰함으로써, 도덕적 인식문제와 행위에 대한 감정의 종류별 특성을 드러내 보이고, 그것이 도덕적 인식과 행위에 대해서 갖는 의미연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감정의 작용방식과 특성 및 기능에 관한 생각은 흄 자신이 펴고 있는 일반적 인식론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감정의 작용방식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 정신의 기본적 지각을 구성하는 인상의 구조와 특징을 파악해야 하겠다. 흄에 있어서 감정은 인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흄은 정신의 모든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나누고, 인상은 다시 근원적인 감각 인상과 이차적인 반성 인상으로 나누고 있다. “근원적 인상 또는 감각 인상은 어떠한 선행하는 지각도 없이 신체의 구조로부터, 생기로부터 또는 대상들이 외부 기관에 적용되는 것으로부터 영혼 안에 발생하는 그런 것들이다. 이차적 또는 반성적 인상들은 직접적으로든 또는 관념의 개입에 의해서든 원초적 인상들 중의 어떤 것에서 유래하는 것들이다. 감각 기관의 모든 인상들과 모든 신체적 고통과 쾌락은 첫번째 종류이며, 정념들, 그리고 이것들과 유사한 감정들은 두 번째 종류이다.” 근원적 인상인 감각 인상들은 직접 경험을 통해 생겨나며, 관념들은 이러한 인상들로부터 파생되므로, 관념들은 인상들의 복사나 모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관념들은 인상들을 재현하는 한에서 참이고, 인상들을 재현하는데 실패하면 거짓이 된다. 감정과 정서는 이차적 종류의 인상에 속하는 것으로서 반성 인상 혹은 반영 인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반성 인상에는 다시 차분한 것과 격렬한 것의 두 종류가 있는 바, 미적 대상이나 행위 그리고 외부의 대상에서 느끼는 미․추 등의 감정과 느낌은 전자에 속하고, 사랑과 미움 및 슬픔과 기쁨 그리고 긍지와 소심 등의 감정은 격렬한 인상에 속한다. 흄은 또한 감정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나누고, 선․악과 쾌․고로부터 직접 발생하는 직접 감정에는 욕구, 혐오, 슬픔, 기쁨, 희망, 두려움, 좌절, 안심 등이 있고, 간접 감정에는 긍지, 소심, 야심, 허영심, 사랑, 미움, 질투, 연민, 악의, 관용 등이 속하는 것으로 분류한다.
감정 또는 정념에 관한 이러한 분류법 안에서 도덕 인식론의 문제와 관계되는 중요한 부분은 감정이 인상들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이며, 인상으로서의 감정은 그 발생의 특성상 아무런 매개도 없이 어떠한 표상적 성질도 포함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정신은 자신이 지각할 때 어디선가 시작되어야 하고, 인상은 그 대응관념보다 선행하므로 어떤 종류의 인상이 있어야 하며, 이 인상은 어떤 매개도 없이 직접적으로 영혼에 나타난다는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볼 때, 정념 또는 감정은 인상에 다름 아니며 관념과 같은 표상적 성질 즉 재현적 특성을 지니지 않게 된다. 이러한 감정의 기본 특징과 기능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흄의 논변이 ‘무표상적 성질’의 논변이다.
정념은 근원적 존재이며, 사람들이 원한다면, 근원적 존재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념은 자신을 다른 어떤 존재나 그 존재의 변용 따위의 모사로 나타내는 아무런 표상적 성질도 포함하지 않는다. 내가 화를 낼 때, 나는 실제로 그 정념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목마르거나 아프거나 또는 단지 나의 키가 5피트 이상일 때처럼, 이런 정서에는 그 밖의 다른 지칭 대상이 없다. 따라서 이 정념은 진리 및 이성과 맞설 수 없으며, 모순될 수도 없다. 이런 모순은 관념과 대상의 불일치 때문이며, 이때 관념은 자신이 표상하는 대상들의 모사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감정에 관한 흄의 설명과 표현에 의하면, 감정은 그 성격상 하나의 근원적 존재이므로, 어떠한 표상적 성질도 포함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형성되는 지각이다. 따라서 진․위로 판별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다.
그런데도 우리가 어떤 감정에 대해 불합리하다거나 적합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흄은 두 가지 경우에 감정의 불합리성이 말해진다고 한다. 첫째는, 희망이나 두려움, 슬픔이나 기쁨, 절망이나 안심 등과 같은 감정이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의 현존을 가정하는 것에 근거하고 있을 때이며, 둘째로는, 어떤 감정이 작용할 때, 우리가 의도한 목적실현을 위해 불충분한 수단을 선택하고, 인과에 관한 판단 속에서 우리 자신을 기만할 때라는 것이다.
도덕이 관념의 관계들에 의해 결정되는 선험적 이성의 영역이 아니라 경험적 문제라고 볼 때, 현실의 사태 안에서 직접적이며 근원적으로 지각되는 인상인 감정은 어떤 대상도 표상하지 않으므로, 아무런 사유의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그런 면에서 감정은 단순하고 근원적인 지각 즉 인상이 된다. 이것은 덕과 악덕, 선과 악, 쾌와 고 등과 같은 도덕적 구별이 무표상적 성질을 지닌 인상으로서의 감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덕이 인상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은, 예컨데 아무리 많은 선험적 논증도 잔디가 무슨 색인지 말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잔디의 색깔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잔디의 인상을 획득해야만 하고, 그런 인상들로부터 잔디가 초록색이라는 것을 구별하게 된다. 근원적인 지각인 인상으로서의 정념 즉 감정에 기초한 흄의 정서주의적 도덕 인식론은 그러므로 자연주의나 주관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일종의 직각주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언표하는 합리적이라든지 비합리적이라는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불합리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이며, 어떤 감정이나 욕구가 불합리하려면 거짓 판단을 동반해야 하고, 거짓 판단과 연계되어야만 욕구와 감정이 불합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은 명백하다. 하나의 감정은 거짓 가정에 근거하거나 의도된 목적을 위해 불충분한 수단을 선택하지 않는 한, 어떤 의미에서는 결코 불합리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이성과 감정은 서로 상반될 수 없으며, 의지와 행동을 지배하기 위해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 분명해진 것은, 인식론적인 면에서 기본 지각인 인상으로서 감정 자체의 적합성과 근원성은 이성에 의해 진․위로 구별되지도 않고, 감정과 이성은 서로 다투는 투쟁관계 속의 상반되는 적대자도 아니며, 또한 감정과 욕구에 대한 이성의 우선성과 우위성이 근거없다는 점이다. 실제적 도덕인식과 행위의 영역에서는, 이성과 감정간에 어떠한 대립이나 갈등도 없으며, 이성을 감정보다 우위에 두거나 이성에 대해서 감정을 열등하게 여길 아무런 정당한 근거나 이유도 없으며, 오히려 호․불호, 쾌․불쾌 등과 같은 감정이나 정서가 도덕적 판단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 허치슨과 그의 주장을 계승한 흄의 생각이다.
그런데 왜 철학의 역사는 이성중심적이고 또 이성우월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는가? 또한 일반 사람들도 같은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흄은, ?인성론?의 제2권 제3부, ‘의지의 유력한 동기’ 끝부분에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종래의 형이상학자들이 직접 경험이나 관찰보다 사변과 인습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반사람들이 감정 가운데 차분한 감정의 작용들을 이성의 작용이나 운동으로 혼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상의 습관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소박하게 사물과 사태에 대해 판단하고 규정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차분하고 조용하게 작용하는 모든 심리적 활동도 이성의 작용으로 혼동하거나 같은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심리적 활동이 서로 다른 감각을 산출하지도 않으며, 감정과 지각으로 직접 구별되지도 않을 때, 심리작용과 활동은 서로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이성은 느낄 수 있는 아무런 감정도 산출하지 않고 작용한다. … 이성이 결코 쾌락이나 불안감을 전해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흄은 실제로 감정인데도 마음 속에 어떠한 느낌이나 정서를 산출하지 않은 채 직접적 느낌이나 감각에 의해서 보다는 그 결과나 효과 등에 의해 더 잘 알려지고 파악되는, 어떤 차분한 정념들과 성향들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도덕적 구별뿐만 아니라 의욕과 행위의 근거도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나 정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흄에 의하면, 이와 같은 차분한 감정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바, 그 하나는 인간성에 그 근원적 뿌리를 두고 있는 직감으로서, 예컨데, 박애심과 원한의 감정, 생명에 대한 사랑과 어린이에 대한 친절성이 이에 속한다. 또 다른 하나의 차분한 감정에는 선을 추구하는 일반적 욕구와 악에 대한 혐오감 등이 속한다. 이러한 차분한 욕구와 감정이 정신의 무질서를 야기하지 않으면, 그 내적인 차분함과 지속성 때문에 진․위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기능인 이성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정신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은, 차분한 정념이 격렬한 정념에 우세하게 작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구별 및 행위와 의지의 동기를, 차분한 감정의 본성과 원리를 근원적으로 반성하지 않고 소박하게 생각하게 되면, 이성에 있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합리주의자의 도덕적 습관이 형성한 신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흄의 정서주의적 도덕 인식론이 기초하고 있는 기본 개념인 정념 또는 감정의 특성을 분석함으로써 드러난 논지는, 근원적 존재으로서의 감정은 반성적 인상이기에 어떠한 사상적 내용도 담고 있지 않으며, 즉 무표상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기에 이성에 의해서 판단되거나 또 이성과 상반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욕구와 감정의 지배자가 아닐 뿐만 아니라 그 적대자나 반대자가 아닌 이성은, 그 자체만으로서는 인상으로서의 감정의 합리성과 비합리성을 말할 수 없고, 도덕적 선․악의 구별에 맹목적이며, 행위를 유발하지도 못하며 금지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선악시비를 구별하고 행위를 유발하며 의지를 결정하는 힘이 이성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실제로 차분한 감정에 다름 아니며, 차분한 감정에 의해 도덕적 구별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4. 감정에 대한 이성의 예속성: 주인과 노예의 관계
앞장에서 우리는 주로 감정의 특성과 종류에 대한 흄의 분석을 통해서 감정이 지닌 도덕 인식론적 특징과 의미를 논의해 보았지만, 이 장에서는 감정과 이성의 도덕적인 역할관계를 흄의 유명한 ‘노예의 비유’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의 역할과 지위와 관련하여 흄은 전통적인 이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감정에 대한 이성의 예속성을 주장함으로써, 감정중심의 도덕 인식론과 행위론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인식론의 전통에 따르고 있는 흄은, 이성과 감정이 담당하는 기능과 역할을 경험기술적인 면에서 심리학적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 실제로 흄의 윤리학적 논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중적인 심리학적 탐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한 면에서는 인간사나 인간의 행위와 결부되어 있는 도덕적 구별을 여하한 방법으로 수행하는가 하는 문제이고, 다른 면에서는 이러한 도덕적 구별이 인간의 행위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전자가 주로 도덕적 인식론의 문제로서 도덕 심리학적 논의와 관계한다면, 후자는 행위 심리학과 함께 동기론 및 덕론과 정의문제 등이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흄의 도덕 인식론적 논의는 그의 일반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심리학적 탐구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선․악과 시․비를 구별하고, 보다 고차의 도덕적 판단을 행함에 있어서도 늘 이성에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에 따를 때에 스스로 정당하고 유덕한 행위를 한다고 믿는다. 이성적 존재로 정의되고 있는 인간이, 인간의 비본질적인 요소라고 믿고 있는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을 통해 도덕적 구별과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행위를 합리적으로 이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현실 생활에서, 이성적으로만 판단하고 또 행위하는가? 그리고 인간행위의 동기가 이성에 있으며, 이성은 감정이나 욕망에 대해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인가?
앞의 2장에서 살펴보았지만, 흄에 의하면 오성의 일차적 작용인 수학적 지식과 같은 논증적 지식 혹은 추론은 도덕적 구별의 근거도 못되고 나아가 의지활동의 직접적 동기나 원인이 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된다. 논증적 지식과 추론의 대상이 추상적인 관념들의 관계라면, 행위와 의욕의 영역은 구체적인 현실의 작용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다. 즉 관념의 관계에 관한 논증과 추론은 사태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판단을 지배할 뿐, 인간행위의 직접적인 동인이 되거나 의지활동의 일차적인 추동력이 되지는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논증적 지식과 추론이라는 오성의 작용이 우리로 하여금 인과관계를 형성하도록 돕는 한에서만 행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만,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도 오성의 이차적 작용영역인 개연성과 연계될 때만 가능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대상으로부터 쾌락이나 고통을 지각하며, 그럴 경우에 우리는 쾌․고의 경험이 그 대상에로 마음이 끌리거나 또는 거부하게 되며, 그렇게 함으로써 행위를 유발하는 동기를 갖게 된다고 할 수 있다. 한 대상에 대해서 유쾌함이나 쾌락을 예상하고 지각하면 애착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고, 고통을 예측하고 지각하면 혐오감을 갖게 되는 바, 쾌락과 같은 만족의 대상은 즐겁게 애착심을 갖고 받아들이고, 고통의 대상은 불유쾌하고 불만족한 것으로 혐오하며 물리치게 된다. 그러므로 인과적 지식이나 신념은 행위에 실제적이며 직접적인 동인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근원적 일차적 대상과 연관된 대상 사이의 의미연관 즉 원인과 결과와의 관계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게 하기 위해서 논증과 추론이 작용하고 봉사하는 것이지만, 행위의 동기로서 직접 개입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흄은, “행위에의 충동은 이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에 의해 단지 방향 지워진다.”고 말한다.
흄은, 이성 자체만으로서는 도덕적 구별의 원천도 못되고 어떠한 행위도 촉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성 혼자서는 어떤 행위도 억제하거나 금지시킬 능력이나 권한도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일상에 있어서 우리는 이성적 판단에 의하여 선․악을 구별하고, 부당하거나 적합치 못한 행위를 자제하거나 억제할 수 있다고 믿지만, 이성 자체로서는 선․악을 재대로 판별할 수 없고, 직접적으로 의욕이나 욕망을 금지시킬 수도 없으며, 다만 감정작용에 이어 사태에 수반되는 관점이나 연관을 추론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리고 보조적으로 도덕적 인식과 행위의 선택에 참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흄은,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정념의 노예가 되어야만 하지, 정념에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직분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성은 감정의 적대자로서가 아니라, 감정에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의욕과 행위의 직접적 원인인 감정을 보조하고 그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흄이 이성을 감정의 노예라고 언표했다고 해서, 이성이 도덕의 영역에서 전혀 역할을 못한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성만으로서 즉 이성 혼자서는 도덕적 선․악을 판별할 수 없고, 행위를 유발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행위를 촉발시키는 추진력은 일차적으로 사랑, 분노, 긍지, 질투, 두려움, 욕망 등과 같은 감정에 있는 것이지, 이성 자체만으로서는 어떠한 행위에의 동기도 제공하지 못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성은 사실들을 분석하고 관계들을 지각하며 기본적 구조를 관망하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기능을 수행하고, 그러한 기능들이 어떠한 행위를 실행할 것인가를 결정하는데 개입하지만, 근원적으로 감정의 개입이나 관여가 없다면, 즉 감정의 촉발을 동반하는 도덕적 구별이나 가치인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행위는 유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흄은 노예의 비유를 통해서, 지금까지 전통적인 윤리학적 논의에서 주인으로 행세하던 이성의 지위를 부차적이며 예속적인 지위로 강등시키고 있으며, 반합리적이고 탈이성적인 정서주의를 전개함으로써 선언적 언명 이상으로 자연주의 윤리설과 도덕 심리학의 인식론적 논의를 촉발시켰다. 노예의 비유에 관한 흄의 논변이 함의하고 있는 주장은 결국, 이성 홀로서는 선․악을 구별할 수 없고, 행위를 유발시키거나 금지시킬 수 있는 충분한 근거도 되지 못하며, 이성적 추론을 넘어서고 앞지르는 어떤 종류의 정서작용이나 감정이 개입한다는 사실이다. 흄은 그의 전 도덕철학체계를 통해 감정에 대한 이성의 예속성의 원리를 수미일관 수행하고 있는 바, 감정을 이성보다 우위에 두는 노예의 비유 속에는 두 가지 논지가 함의되어 있다. 즉 하나는 감정이 이성적 추론보다 시간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적 추론이 감성적 욕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시간적 우선성과 의존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흄이 이성보다 감정을 더 중요하게 보는 이유는, 감정이나 정서를 선․악의 구별과 의지활동의 일차적 원천으로 보고, 그러한 근원적 충동들은 시간상으로 뒤이어 행해지는 인과적 추론에 의해 다만 방향지워질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흄 자신이 예로 들고 있는 상인의 경우, 상인은 자신의 부채에 대한 부담감과 그것를 정리하고 싶은 욕구와 더불어 채무변제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며, 그런 욕구의 발동이 있은 연후에만 채무변제를 이행하는데 필요한 산술적 추론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행위의 주체자도 역시 인과에 관한 추리를 하지만, 어떤 목적을 향한 욕구로부터 시작해서, 그 뒤에 목적 실현의 수단과 방도에 관한 추론에로 이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흄은 감정으로서의 욕망을 최우선적인 것으로서 취급하는 바, 욕망이라는 감정이 시간상으로 이성에 의한 추론보다 앞선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흄이 욕망으로서의 감정이 이성보다 중요하다고 본 이유는 욕망이 시간상으로 먼저 발동하므로, 욕망으로서의 감정에 선행하는 어떠한 추론과정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이 추론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욕구에 뒤이어 행해지는 추론은 욕구를 추인할 뿐만 아니라, 선행하는 욕구의 발현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상인의 경우, 상인이 우선 먼저 자신의 채무를 변제하고 싶은 욕구가 발동하지 않는다면, 결코 산술적 계산에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행위자가 자신의 목적을 향한 욕구를 감지하지 못한다면, 뒤이은 인과적 추론은 일어나지 않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성과 지성은 감정과 욕구 즉 정념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리고 고통과 좌절을 피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정보들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정보들 자체가 우리가 무엇을 행하며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대한 실천력은 오직 정보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반응인 감정 즉 욕망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이성은 정념에 봉사하고 정념을 지지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기본적으로 감정에 대한 이성의 예속성을 주장하는 흄은, 특히 ?인성론? 제2권 제3부 제3절과 제3권 제1부 제1절을 통해 이성에 대한 반대 논변들을 전개하는 바, 우리는 그 특징을, 로버트슨(Robertson)을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정리할 수 있겠다. ①이성의 가치맹목성: 덕과 악덕의 구별은 관념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상들에 의해 이루어지며(T. 456-7), 오성의 어떠한 판단도 도덕적 개념을 담고 있지 않다. ② 이성의 무력성: 오성의 어떤 판단도 그 자체로는 감정이나 행위를 산출하거나 반대하지 못한다(T. 414-415). ③ 이성의 간접 작용성: 이성은 감정이나 욕망의 도움을 받아 단지 간접적으로만 행위에 작용한다(T. 414). ④ 도덕적 판단의 실천성: 오성의 판단들과 달리 도덕은 행위와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정념을 자극하며, 행위를 유발하거나 또는 못하게 막기도 한다( T. 457). ⑤ 감정들에 대한 이성적 판단 불가능성: 정념은 무표상적 성질을 지니므로, 이성과 진리 개념에 의해 판단되지 않는다(T. 415, 458).
5. 나오는 말
이상에서 우리는 도덕적 구별의 원천이나 도덕적 신념들의 토대가 실제적으로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생각에서 전통적인 도덕적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흄이 여하히 감정이 도덕적 구별의 원천이 되고 또 행위의 원리와 의지작용의 동기가 되는지를 그의 도덕 인식론적 사유의 방향과 내용을 규정하고 표현하는 정서주의적 기초논변들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도덕적 판단의 근원에 대한 인식론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이성과 감정간의 관계와 역할에 관한 정서주의적 기초 논변을 통해서 그리고 도덕의식의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서 흄이 드러내고자 한 도덕철학적 언명을, 우리는 크게 세 가지 관점에서 요약․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 도덕적 구별은 이성으로부터 유래할 수 없고, 감정 즉 도덕감에서 유래하는 것이며, 둘째, 감정 자체의 무표상적 성질이 근원적인 지각인 인상에 다름 아니며, 반영 인상으로서의 감정과 차분한 감정이 실질적으로 도덕적 지각 즉 도덕 인식에 관여하고 있으며, 셋째,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고 선언함으로써 이성주의에 대항하는 정서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도덕적 지각과 구별 및 행위의 영역에서 감정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이성은 보조자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었다.
흄은 윤리적 이성주의 비판을 통해서, 실제로 어떤 행위나 성격의 특성을 미덕이나 악덕, 선과 악으로 지각하고 판별하며, 의욕과 행위의 동기로 작용하는 힘은 감정이나 정서 또는 특별하게 욕구와 같은 심리적․정서적 작용에 있다는 논변을 전개했다. 이런 입장에서, 도덕성은 기본적으로 이성에 의해 판단되지 않고 정서나 인상으로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흄의 관점은, 우리의 생활연관과 도덕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실질적인 타당성을 지닌 성찰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흄도 인정하듯이 현실적으로 도덕적 인식이나 행위의 동기 및 작용 영역에서 이성이 아무런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욕구나 감정과 연계해서 이성적 지식과 추론이 무엇이 더 나은 선택인가를 결정하는데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흄은, ?인성론?의 후편이면서 개정편이라 할 수 있는 ?도덕원리에 관한 탐구?에서, 이성과 감정이 거의 모든 도덕적 판단 속에 같이 등장해서 행위와 선택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함께 협력한다고 함으로써, 감정의 일차성과 근원성을 강조하는 정서주의를 근간으로 하면서도 이성의 보조적인 지위와 역할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구별과 행위의 동인은 이성에서보다는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흄은 전통적 이성주의의 관점을 뒤집어서 이성이 정념의 노예라는 비유를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노예의 비유를 통해서 흄은 도덕의 영역에 이성이 전혀 개입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고, 신념이나 지식 그리고 계산과 같은 이성의 기능들은 감정에 대해 종속적이거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고, 정서의 작용인 호감과 유용성에 원리에 따라 그것들을 획득하기 위한 욕구를 숙고하고 반성하면서 도와주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성은 그 자체로서 즉 이성 혼자서는 도덕적 구별의 근원도 될 수 없고 행위의 동기도 유발할 수 없듯이, 행위를 유발하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감정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성의 적대자나 반대자로서 상충되지 않으면서도, 보다 덜 엄밀한 의미에서는 두 가지 의미에서 비합리적인 것으로 즉 이치에 맞을 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 두 경우는 어떤 감정이 대상의 존재를 허위로 가정하고 있을 때나, 그러한 감정의 대상을 실현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 불충분할 때인데, 이 때 이성은 그러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려줄 수 있거나 또는 선택된 수단이 불충분함을 지적할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감정을 교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욕망의 보조자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흄은 도덕적 감정으로서의 공감이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본 것은, 공감이 인간성에 내재된 보편적인 정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흄의 정서주의적 도덕 인식론은 그 자체의 특징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가장 근원적이고 또한 다중적으로 관련되는 기본 문제점은 이성의 역할을 줄이고 감정의 기능을 확대 인정한 점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흄의 도덕 인식론은 주관주의의 한 형태로 특징지울 수 있다. 흄은 도덕성이 경험과 이성을 사용해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도덕적 구별과 판단이 주관적이고 상대적이어서 객관성의 확보가 어렵다는 문제를 스스로 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굳이 흄의 입장을 옹호하려 한다면, 실제적인 도덕적 인식과 행위의 작용 영역에서 감정과 이성의 상호 협력관계를 흄이 바르게 성찰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서주의를 도덕적 현실에 적용하는 원리로 삼으려면, 도덕적 인식에 있어서 보편성과 객관성의 요구가 감정이나 정서 작용에 의해서 충족될 수 없다는 합리주의자들과 이모티비스트들의 반대 주장을 극복해야 하고, 정서주의의 관점을 더욱 확장하고 강화할 적극적인 분석이나 논변을 탐구해야 한다. 그에 대한 탐구는 우리들과 미래 철학의 몫이라 하겠다.
그러나, 도덕적 인식과 행위의 근거에 대한 경험적 실제적 탐구라는 점에서, 윤리학적 사유의 패러다임을 이성적 사변에서 현실의 작용영역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감정이나 정서의 작용이 미적 영역을 넘어 인식활동과 도덕의 영역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또 환기시겼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외되었던 감성의 영역을 복원하여 건강하고 균형있는 인간학의 탐구를 촉진시켰다는 점에서, 흄의 도덕철학적 논변들은 비이성주의적 탈현대성과 이성주의적 현대성에 대한 담론이 무성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 관점을 제공하고 있고 윤리학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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