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과 모더니티 혹은, 현대 예술의 조건
현대는 비극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한다. 더이상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비극의 조건이 성립되던 시대 이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 인간 혹은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진 대표단수가 개인이라는 모나드로 분화했고, 세속과 조화를 이루던 신성은 죽음의 자리에 유폐되었고, 개체 내면의 분화구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감정의 잔존물은 ‘사건’의 이름으로 ‘운명’을 몰아냈다. 모나드적 분열과 조울을 자본과 오락으로 겹겹이 둘러싼 현대의 이 버라이어티한 감각의 제국에 숭고한 카타르시스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우울과 애도, 멜랑콜리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비극적인 것들이 비극을 통해 정화되지 못하는 시대의 한 징후인지도 모른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비극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비극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극의 유효기간이 만료된 현대에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신화의 시대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냈던 질문, ‘인간성’과 ‘인간의 조건’에 관한 답 없는 물음이다.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에 답을 하고자 했던 제의적·장르적 시도일 수도 있다. ‘비극과 모더니티’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간의 조건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한 시기인 근대의 근대성, 모더니티와 더불어 비극이 어떻게 변형되어 소멸에 이르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기획이다. 또한 이는 비극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에 대한 검증의 과정이 될 것이다.
지금은 비극의 시대가 아니다. 적어도 비극을 특정한 예술양식, 즉 그리스 비극을 전범으로 하는 극적 표현양식으로 이해할 경우에는 그렇다. 비극의 소재가 고갈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한편으로는 행복을 꿈꾸던 개인의 처참한 몰락과 자살의 행렬이, 다른 한편으로는 정권이나 타민족에 의한 집단학살과 테러의 연쇄가 우리의 불행한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면 아래로 더 내려가면 자본의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비틀린 정신들, 열뜬 욕망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은 예술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현실을 가리키는 수사일 뿐이다. 비극적 사태에서 비극예술이 탄생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는 아마도 현재만이 아니라 근현대 전체에 적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근현대 예술은 현실 자체가 생산하는 수많은 불운들에 ‘비극적’이지 않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온 것이다. 비극과 근현대는 어울리지 않는다.
물론 이 말은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다. 근대 이후의 여러 극문학과 서사문학, 그리고 공연예술이 ‘비극’이나 ‘비극적인 작품’으로 지칭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때는 ‘비극적인 것’의 함의가 전혀 달라진다면 어떨까? 일찌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그리스의 비극(Tragödie)과 근대 독일의 비애극(Trauerspiel)을 미학적으로 엄밀히 구별하면서, 전자에서 후자의 기원을 찾는 ‘아류 비극이론’을 비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일군의 비극 이론가들은 두 종류의 극에서 (죄와 속죄를 핵심으로 하는) 동일한 윤리적 세계를 발견하며, 이런 윤리 도식에서 자유로운 니체조차도 심미주의라는 또다른 도식에 묶여 고대와 근현대 비(애)극의 차이를 흐리고 만다. 벤야민은 비극론에 ‘역사철학적 인식’을 요구한다. 역사철학은 그리스 비극과 독일 비애극이 상이한 시대의 산물로서 상이한 미적 원리에 기초하고 있음을 통찰하게 하며, 오늘날에도 비극이 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는 ‘억측’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
그리스 비극을 근대 비애극에서 갈라놓는 특징은 무엇인가? 그리스 비극에서 영웅적 희생의 본질은 옛 법과 새로운 법 사이의 충돌에 있다. 다시 벤야민을 참조하면 비극적 희생은 최초의 희생이자 최후의 희생인 바, “옛 법을 수호하는 신들에 바쳐지는 속죄의 희생물이라는 점에서는 최후의 희생이지만, 민족 생활의 새로운 내용들을 알리는 대임(代任) 행위라는 의미에서는 최초의 희생이다.” 그런데 두 개의 법 사이에서 희생되는 비극의 주인공은 현대적 의미의 분열된 주체, 또는 실존적 고뇌의 주체가 아니다. 훗날 출현할 새로운 공동체의 이념은 주인공의 의식이나 말이 아니라 그의 죽음에 반향되는 것이다. 주인공이 보여주는 모든 행동과 말의 의미는 그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 귀속된다. “주인공의 정신적·신체적 현존재는 비극이 수행되는 틀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고대 비극의 주인공은 다채로우면서도 협소한 의식을 지닌 근대적 주인공과 구별된다.
비극과 근현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명제가 비극과 비애극의 차이를 논하는 맥락 속에서만 이해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비애극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티까지 포함하는 근현대를 대표하는 예술장르라고는 할 수 없으며, 현대적 의식을 구성하는 어떤 요소들은 진정한 비극을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비애극에 대해서도 거리를 둘 것이기 때문이다.(가령 지젝이 허위의식과 구별하는 가운데 분석해낸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나 냉소주의를 떠올려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애극의 바탕에 흐르는 정조는 근현대성 자체의 뿌리에서 연원한다고 보아야 하며, 비록 벤야민이 그 정조의 시대적 함의나 심리적 기제를 충분히 다루지는 않았지만 이에 관한 후대의 논의가 그의 역사철학적 명민함에 큰 빚을 지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정조’는 물론 우울이다. 우울은 단지 우리가 겪는 여러 감정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일견 그에 대립되는 감정들의 저변에 마치 지하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근현대인의 원형질적 정서인 것이다. 현대 주체는 흔히 이렇게 정서적으로 중층결정되어 있으며,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탈현대적’ 지향이 지니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특징적인 명랑성 또는 의도적인 가벼움은 우울의 자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며, 오히려 우울과 짝을 이루어 조울증적 주체를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는 공모관계에 있다.
왜 우울은 그토록 우리에게 친숙한가? 우울은 무엇보다 상실의 효과다. 희구하는 대상의 발견이 끝없이 지연될 때 영혼 깊숙한 곳에서 스며나오는 자학의 독즙, 그것이 우울이다. 프로이트는 우울을 애도의 실패와 연관시킨다. 상실한 대상에서 자아가 리비도를 점차 거둬들이는 과정, 즉 대상을 떠나보내는 과정인 애도에 실패할 때 리비도는 자아 자신에게로 역행하는데, 이 퇴행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관계에서 리비도는 상실의 책임자로 지목된 자아를 향한 가학의 에너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상실과 그 효과인 우울은 이런 설명에서보다 우리 존재에 더 본원적일지 모른다. 심지어 우리는 대상의 분명한 출현 이전에 이미 상실이 발생했으며, 상실이야말로 반복해서 대상을 정립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동인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본원적으로 상실된 것은 대상이 아닌 주체다. 더 정확히 말해 그것은 주체 자신의 일부다. 라캉은 출현과 동시에 사라지는 주체, 한쪽에서 기표에 의해 생산되어 의미로 나타나면 다른 쪽에서는 ‘아파니시스’(사라짐)로 나타나는 주체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의 통찰에 따를 때 주체는 한 번도 그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주체는 자신과의 불일치 속에 태어난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해 주체(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않는 한 항상 ‘비본래적’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대상의 추구는 주체의 본원적 상실을 만회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 파악된다. 주체는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인식하기 때문에 대상의 추구에 나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의 궁극적인 목표,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궁극적인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게다가 외적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얻게 되는 자신에 대한 인식은 사라지는 주체에 대한 망각 또는 억압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오인’에 해당한다. 이렇듯 주체가 상실과 분열 속에 태어나며 한 번도 성취된 적이 없는 상태의 복원, 즉 자기 자신과의 일치를 희구한다는 것은 근현대에 고유한 사태가 아니다. 그러나 이 사태가 개인의 일평생을 통한 실존적 고민과 자기 계발 의지를 통해 명백히 가시화되고, 자기 불만족에 따른 우울의 정서가 보편화되며, 다른 한편 바로 그런 실존적 열망과 열패감을 동력으로 사회적 경쟁과 가치 축적의 체제가 발달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정착한 근대 이후의 일일 것이다. ‘단단한 모든 것이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근대 자본주의 세계에서 주체는 계속된 변신과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을 요구받지만, 그 요구에 부응하려 하면 할수록 주체의 고유한 ‘세계’는 주체 자신의 흔적과 더불어 사라지고 그 상실에서 오는 우울은 외면할 수 없는 정서적 현실이 된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렬한 주체의식에 사로잡히지만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되는 데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다.
근현대의 본질적 정조인 우울은 왜 비극을 외면하는가? 고대 비극은 주인공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하나의 점으로 집중된 현실, 즉 주인공의 자기 운명과의 마주함이라는 극적 현실에 전일적으로 몰입할 것을 요구한다. 주인공이 의식을 하든 안 하든 공동체의 역사를 곧바로 반영하는 그의 운명은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들을 통해 사회구조와 역사의 층위를 어렴풋이 암시하는 근대소설 주인공의 운명과 선명히 대조된다. 비극에서 주인공의 행동이 세계의 의미를 직접 드러낸다면 소설에서 행동은 의미의 구축에 필요한 인간관계들을 방사형 또는 리좀형으로, 그러나 언제나 점진적으로 형성할 뿐이다. 근대 소설에서 내세우는 주체는 흔히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그에 맞설 만한 집중력을 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낯설어한다. 자신의 삶이 운명의 점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의미의 계속된 지연, 기껏해야 순간적 성취와 상실의 반복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근대 초중기에 신적 임재를 대신하여 대중의 흐트러진 정신을 모아냈던 대서사로서의 ‘역사’는 후기 근대에 인공 구조물로 낙인찍혀 폐기처분되는 형국이고, 이에 따라 ‘총체성’의 이념이 서사문학에서마저 축출되고 있다. ‘대타자는 없다’는 후기근대적 상황은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의미를 희석시키면서 우울 또는 조울증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우울이 이처럼 의미의 모호함 속에 도래하는 지속적 슬픔이라면 비극성은 의미의 충만함 속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적 슬픔이다. 우울은 자학의 고통을, 비극적 슬픔은 고통의 카타르시스를 내포한다. ‘비극’이 그리스 비극과 전혀 다른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 한, 우울은 비극의 원천이 될 수 없다. 오늘날 우울의 주체(이는 ‘비주체의 주체’와 같은 역설적 표현이다)는 비극적 숭고미를 재연하려는 국가적 퍼포먼스나 예술적 시도들에 좀체 공감하지 못한다. 만에 하나 공감하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시도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해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감정으로부터 주체 자신을 해방시켜줄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키치와 진정한 재현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되며, 극단적으로는 파시즘의 정서적 토대가 될 수 있다.(희박하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 제시되는 비극적 사건과 주체의 공감이 모두 근본적인 사회변화의 흐름 속에 뿌리를 두고 있을 경우다. 하지만 주체가 변화를 바란다는 것과 변화에 나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렇다면 오늘날 만연한 불행에 예술은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하는가? 고전적인 비극을 제외하고 수많은 방식이 있을 텐데, 어느 경우든 예술이 시대적 정조의 문제, 그리고 그와 연관된 개별 주체의 실존적 문제를 외면해서는 호소력을 지니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맥락에서 상이한 미학적 선택을 대표하는 두 편의 작품을 거론할 수 있다. 하나는 극작가 새뮤얼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1953), 다른 하나는 소설가 D. H. 로런스의 『연애하는 여인들』(1920)이다. 연극과 소설이라는 장르상의 차이도 있지만, 두 작가는 현대인의 우울을 다루는 방식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여준다.
잘 알려져 있듯 베케트는 대상의 도래의 끝없는 지연과 허망한 기다림의 시간을 적나라하게 그려냄으로써 의미의 궁극적 지평에 대한 (전)근대적 믿음과 구원의 환상에 종지부를 찍었다. 기다림의 시간을 채우는 무의미한 행위의 연속은 진정한 사건의 부재라는 현대적 삶의 본질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오지 않을 대상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삶의 부조리에 대한 베케트의 정직한 시선은 흥미롭게도 좌파 이론가들을 매료시켰다. 이는 좌파 종말론(공산주의유토피아론)과 결별하되 우파 종말론(시장지상주의)에 투항하지 않고 기다림 자체의 가치를 지켜내고자 하는 그들의 열망을 베케트가 대변하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고도의 도래’와 같은 사건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비극적인 사건을 이야기 안에 포함시킨 것은 로런스 쪽이었다. 그의 소설 역시 문제의 궁극적 해결을 향한 선형적 서사와는 거리가 있으며 그의 작중인물들에게도 허무와 우울은 낯설지 않다. 그러나 소설가답게 로런스는 허무와 우울을 이질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의 삶 속에 배치하여 그들에게서 상이한 대응방식을 이끌어낸다. 주인공 중 하나인 사업가 제럴드는 자신의 사회적 삶과 애정관계를 관통하는 허무의 공포와 문뜩 마주하며 결국 죽음의 충동에 자신을 내맡기는데, 다른 인물들과 달리 그가 자살을 택하는 것은 그에게 내면의 허무를 감지할 딱 그만큼의 민감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삶이 내적 위기에 처한 순간에 요구되는 창조적 생명력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인물과 그의 관계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사건의 사회적 인과관계보다 존재론적 필연성을 그리는 데 역점을 둔다. 이 소설이 선사하는 극적 강렬함은 고대비극적인 거대한 갈등의 묘사에서 오는 것도, 개인의 영혼을 잠식하는 우울의 사실적 재현 자체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심층에서 벌어지는 존재론적 사건들을 포착하고, 그 사건들에서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보며, 나아가 삶의 새로운 양식을 모색하는 작가의 창조적 역사의식에서 나온다.
예술적 형식을 두고 보면 베케트와 로런스가 우리 시대의 전범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각자 어떤 감상적 타협도 없이 시대의 정조를 그 한계지점에서 그려낸 데서 이들의 탁월함을 엿볼 수 있거니와, 탈비극의 시대에 개인의 불운을 어떻게 보편적 공감의 대상으로 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이들의 작품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미세한 감상이나 관념에서 심오한 존재의 층위로 하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현대 한국문학의 맥락에서는 그들의 미적 성취를 되돌아볼 필요가 더 절실한 듯싶다.
김성호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출처: https://ysgradnews.tistory.com/9?category=650031 [연세대학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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