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호-스키마 β 칸트의 꿈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칸트Immanuel Kant(1724~1804)라는 이름은 익숙하다. 그만큼 칸트는 서양철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철학자다. 칸트철학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저인 『순수이성비판』에서의 형이상학 비판이나 경험론과 합리론을 종합한 인식론, ‘정언명령’으로 요약되는 의무주의 윤리학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칸트가 철학사에 남긴 주목할 만한 업적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칸트철학에 대한 그간의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미처 주목받지 못했던 칸트의 모습이다.
이 알려지지 않은 칸트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칸트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스웨덴의 신비주의 사상가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1688~1772)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스베덴보리는 물리학·생리학·심리학 등의 자연과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저명한 학자였고, 개인적인 신비 체험을 계기로 종교 사상가가 된 이후로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국내에도 번역서가 여러 권 있는 이 신비주의 사상가의 존재보다도 더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칸트가 스베덴보리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는 사실이다. 1766년 칸트는 『시령자의 꿈』이라는 책을 익명으로 출간했다.
허영심에 뿌리내린 형이상학의 꿈
이성의 철학자,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가 스웨덴 출신의 한 신비주의 사상가에 대해 깊은 학문적 관심을 갖고 있었고, 나아가 그의 사상을 검토하는 독립된 저술을 남겼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칸트는 어떠한 이유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을까? 칸트의 다른 저술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내용은 난해하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꿈에 의해 해명된 시령자의 꿈』이라는 원제는 이 난해한 저술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힌트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 원제를 통해 칸트가 형이상학과 시령자를 비교하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형이상학’이란 전통적으로 철학의 큰 축을 형성해온 분과이고, ‘시령자視靈者’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를 가리킨다.
칸트의 설명에 따르면, 형이상학이 관심을 갖는 주제는 영혼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것은 물체와는 어떻게 다른지, 영혼이 만약 존재한다면 신체의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 신체의 죽음으로 영혼과 신체가 분리된다고 하더라도 영혼은 계속 존재할 수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이 책에서 칸트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스베덴보리는 특별한 영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죽은 자들과 20년 이상 친밀한 교류를 맺고 있던 인물이다. 그는 저 세상의 정보를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알려주거나, 역으로 현 세계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영혼의 세계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곤 했다.
『시령자의 꿈』에서 칸트가 형이상학과 시령자를 비교할 때 그의 의도는 둘의 차이를 강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을 드러내는 데 있었다. 형이상학자들의 입장에서 이런 시도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형이상학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작업인 데 반해 신비주의는 비합리적인 경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칸트가 스베덴보리의 체험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시령자가 주장하는 영혼 세계의 경험은 실제의 경험이 아니라 상상력이 만들어낸 미망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칸트의 입장에서 보면, 형이상학이 시령자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었다. 이성과 신비적 경험이라는 서로 다른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인식 능력이 닿을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앎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형이상학과 시령자는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양자의 노력은 모두 하나의 ‘꿈’에 비유될 수 있다.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인간의 허영심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신비주의가 허황된 것임을 보이는 것, 그것이 바로 『시령자의 꿈』을 집필한 칸트의 목적이었다.
내세에 대한 희망 없이는 의로운 영혼도 없다
하지만 그것이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니다. 칸트에게는 영혼의 존재와 다음 세상에 대해 할 말이 더 남아 있었다. 칸트는 이것을 ‘희망의 저울’이라는 비유를 통해 설명한다. 여기 어떤 저울이 있고, 그 저울의 한쪽 접시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글자가 조각되어 있다고 하자. 칸트에 따르면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저울이다. 왜냐하면 다른 쪽 접시에 아무리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는다고 하더라도 내려가는 것은 ‘희망’이 새겨진 접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평범해 보이지만 결코 예사롭지 않은 칸트의 통찰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들어도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는 영혼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혼의 존재를 둘러싼 여러 문제에 대해 철학자들이 그토록 몰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관심과 열정도 따지고 보면 미래에 대한 희망, 죽음 후에 인간이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 칸트의 통찰이었다. 그렇다면 희망의 저울을 통해 칸트가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칸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영적 세계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모든 이야기들, 또는 영혼의 본성에 관한 모든 철학적 이론들은 희망의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면 많은 무게가 나갈 테지만, 사변의 접시 위에서는 공기의 무게에 불과할 것이라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세에 대한 이러한 희망은 칸트의 기획에서도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적어도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에게 이러한 희망은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을 견딜 수 있었던 의로운 영혼, 그리고 그의 고귀한 심성이 다음 세상에 대한 희망을 낳지 않았던 의로운 영혼은 결코 살았던 적이 없다.”(『시령자의 꿈』 2부 3절)
인식의 한계를 수용할 것, 그리고 주어진 일을 할 것
『시령자의 꿈』을 읽는 독자들은 칸트가 한편으로는 스베덴보리의 신비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적 세계에 대해 스베덴보리 못지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다. 칸트의 입장이 지니는 독특함은 영적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유지하면서도, 형이상학자들 또는 신비주의자들과는 달리 인간의 제한된 인식 여건에 주의를 기울였다는 데 있다.
인간 지식의 유한성을 강조하는 칸트의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에게는 사실 두 가지 삶의 방식만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다음 세상의 존재가 불확실하다면, 현세에서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추구하는 것을 최선의 삶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둘째, 미래의 불확실성에서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대신 현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에 전력을 다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칸트가 권하는 삶의 방식은 후자 쪽이다. 그는 『시령자의 꿈』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고 있다.
다음 세상에서의 우리의 운명은 현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들을 어떻게 감당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기에 ······우리의 행복에 신경을 씁시다! 밖으로 나가 일을 합시다!(『시령자의 꿈』 2부 3절)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삶의 방식이 더 설득력이 있는가?
임승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출처: https://ysgradnews.tistory.com/178?category=551701 [연세대학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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