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구원을 향한 미완의 반복, 비애극

나뭇잎숨결 2020. 12. 3. 11:09

구원을 향한 미완의 반복, 비애극

 

 

현대는 비극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한다. 더이상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비극의 조건이 성립되던 시대 이후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 전, 인간 혹은 공동체의 운명을 짊어진 대표단수가 개인이라는 모나드로 분화했고, 세속과 조화를 이루던 신성은 죽음의 자리에 유폐되었고, 개체 내면의 분화구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 감정의 잔존물은 사건의 이름으로 운명을 몰아냈다. 모나드적 분열과 조울을 자본과 오락으로 겹겹이 둘러싼 현대의 이 버라이어티한 감각의 제국에 숭고한 카타르시스가 들어설 여지는 없다. 우울과 애도, 멜랑콜리 같은 주제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비극적인 것들이 비극을 통해 정화되지 못하는 시대의 한 징후인지도 모른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비극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비극이 유효하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극의 유효기간이 만료된 현대에도 피해갈 수 없는 질문이 있다. 신화의 시대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냈던 질문, ‘인간성인간의 조건에 관한 답 없는 물음이다. 비극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질문에 답을 하고자 했던 제의적·장르적 시도일 수도 있다. ‘비극과 모더니티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인간의 조건이 가장 드라마틱하게 변한 시기인 근대의 근대성, 모더니티와 더불어 비극이 어떻게 변형되어 소멸에 이르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기획이다. 또한 이는 비극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에 대한 검증의 과정이 될 것이다.

 

 

 

 

“Trauerspiel”의 번역어인 비애극이라는 말은 아직 우리에게 생소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말은 오랫동안 비극Tragödie으로 이해되어왔고, 국내 독문학자들조차도 여전히 비극으로 옮기는 것에 익숙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소 어색하지만 비애극이라는 말로 굳이 비극과 차별성을 두어야 할 필요성은 발터 벤야민의 교수자격취득논문을 국내에 소개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교수자격취득에 좌초되어 오랫동안 아카데미 바깥을 떠돌던 벤야민의 논문 『독일 비애극의 원천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은 바로크 시대에 등장한 독일 드라마에 대한 탐구서이다. 이 책의 연구대상을 여전히 비극으로 이해하는 관행과 이로부터 탈피해야 할 요청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해외 번역판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영어판은 제목을 “Tragic Drama”라고 옮기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원어 그대로 “Trauerspiel”을 쓰고 있으며, 그것이 “mourning-play”를 뜻함을 해명하고 있다. 불어판도 역시 독일 원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제목을 바로크 드라마drame baroque라고 표기함으로써 비극tragédie이라는 말을 애써 피하는 길을 택하고 있다.

 

어원의 유래를 잠시 살펴보자면, “Trauerspiel”은 독일 바로크 시대의 문인인 마르틴 오피츠가 세네카의 『트로이의 여인들』을 번역하면서 처음 사용하였다. 그 번역본 서설에 등장하는 이 단어는 사실상 비극을 지칭한 것이었으며, 이때부터 고대 비극 개념과 동의어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들은 오피츠의 이 신조어를 그야말로 낭만적 드라마의 새로운 비극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고, 이러한 용법을 기점으로 고대 비극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로운 비극이나 이른바 시민 비극이라는 개념도 역시 결국은 근대 비극을 통칭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이 개념은 벤야민에 이르러서야 용어에 대한 개념적 윤곽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벤야민에 의해 제시된 비애극 개념이 논리적·추상적 사유를 통해 얻은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벤야민은 “Trauerspiel”이라는 명칭 자체에 시선을 돌려 이 이름을 구성하는 요소로 나누어 판독한다. Trauer(비애, 슬픔)-Spiel(연극, 유희), 곧 비애극은 슬프게 만드는 연극이 아니라, 슬퍼하는 자들 앞에서 펼쳐지는 연극이며, 또 기이하게도 슬픔이 자신의 만족을 찾는 연극이다. 이 극의 특성으로 애도의 과시를 꼽을 수 있다. 연극의 장면은 보여주기 위해 설정되고, 또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배치된다. 제의적 가치보다는 스펙터클처럼 보여주기 위한 전시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하며, 그것은 보는 사람, 곧 관찰자의 관점에 정향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모든 것은 바로크 비애극이 드라마적 요소보다는 연극적 성격이 더 강하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로써 비애극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산물로 규정짓게 만들며, 더 나아가 포스트드라마적 연극으로 귀속시킬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애극은 멜랑콜리한 연극이기도 하다. 우울한 자는 이러한 전시의 관객 또는 관찰자이다. 그의 눈앞에서 공허한 세계가 일종의 가면극으로 활성화되어 펼쳐진다. 우울한 감정은 바로 이러한 가면행렬을 바라보는 것에서 불가사의한 만족을 얻는다. 벤야민의 비애 이론에서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Melancholie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애극에 대한 벤야민의 이러한 독법은 물론 고대 비극과의 차별성을 확보하기 위한 시도이다. 기본적으로 비극이라는 용어가 고대 그리스 시대의 비극에 한정되어 있다면, 비애극은 다름 아닌 바로크 시대에 출현한 새로운 드라마, 근대적 매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근대성의 파악이라는 벤야민의 시각은 독일이라는 민족국가의 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세계사적 관점으로 확장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바로크 비애극의 완성된 예술형식은 칼데론과 셰익스피어의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두 드라마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기준은 유희와 성찰이라는 예술기법의 탁월한 활용에 있다. 유희의 기법은 무엇보다도 삶 자체를 유희로 보는 인생관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절대성을 향한 강렬함 앞에서조차 삶이 최후의 진지함을 상실할 때, 예술작품이 유희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조건이 가능해진다. 칼데론의 작품이 이러한 경향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면, 독일 작가들은 민족국가로 규정된 편협한 진지함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독일 비애극에 대한 인식은 바로 영국과 스페인의 완성된 형태를 잣대로 하여, 그것의 우회로를 거친 후 확보된다. 『인생은 꿈』이나 『햄릿』에 견주어 보면, 독일 비애극은 결함을 내포하거나 무능함을 드러낸다. 벤야민의 멜랑콜리 이론이 중간 결산의 형식 속에서 햄릿의 해석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비극의 대상이 신화라면, 바로크 비애극의 대상은 역사이다. 비극에서 인물에게 비극적 상황을 부여하는 것이 전사적前史的 현존재, 곧 먼 과거의 영웅적 행위라면, 비애극에서는 신분, 곧 절대군주제가 비극적 상황을 규정한다. 바로크 작가가 의미한 것은 신이나 운명과의 대결이나 태곳적 과거의 현재화가 아니라,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그것의 보존 또는 악덕, 외교능력과 정치적 간계의 실행력, 국가 통치술의 이해 여부 등이다. 비애극에서 주권자는 역사를 대표한다. 17세기에 등장한 주권론, 곧 왕위찬탈논쟁을 둘러싸고 분출된 예외상태론은 정치적 전환으로서의 근대성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시대의 신학적 상황에 대한 벤야민의 통찰로 이어진다. 이와 관련해 벤야민이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을 나름대로 수용하는 맥락을 꼼꼼하게 따져본다면, 자크 데리다의 『법의 힘』뿐만 아니라 『호모 사케르』로 대표되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어찌됐든 주권자의 야누스적인 두 얼굴로 표상되는 폭군순교자는 바로크 시대의 혼란과 불화를 체현하고 있으며, 또다른 인물 유형인 음모꾼은 근대 통치기술 및 규율 권력의 탄생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비극은 반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위 심급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나는 비극적 소송의 재개이다. 비극적 죽음이 바로 일회성의 의미를 결정짓는 주요 범주인 것이다. 비극적 사건은 영웅의 죽음으로 종결된다. 이와 달리 비애극은 비극적인 것이 희극으로 이행하면서 무한히 이어지는 반복의 법칙에 의거한다. 여기에는 제대로 된 결말이 없으며, 사건은 강물처럼 무한정 흘러갈 뿐이다. 설령 결말을 맞는다고 해도 비애극에서는 역사적이고 개인적인 의미에서 비극적 영웅의 죽음에 부여되는 것과 같은 한 시대의 종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애극이란 앞서 서술한 것처럼 슬픈 연극이고 또 슬픔이 자신의 만족을 찾는 연극이기 때문이다. 비애는 비극의 상실로 인한 애도이며, 그 애도는 비극적인 것이 재차 활성화되어 회귀함으로써 반복된다. 비극적인 것의 회귀는 비극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 죽음을 애도할 수 있을 뿐이다.

 

소송 또한 종결을 모른다. 죽음의 장면에서 폭군에 의해 희생된 순교자의 항소는 항상 놓여 있지만, 죽음에 대한 고소는 비애극의 종결부에서 단지 절반만 다루어진 채 서류에 기록될 뿐이다. 판결은 입증 불충분한 것으로 남는다. 재심은 비애극에 내재되어 있으며, 때때로 잠재적 상태를 벗어나기도 하지만, 근본 상황의 반복이라는 틀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17세기 비애극은 항상 반복해서 동일한 대상을 다루며, 그것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처리한다. 여기에 동일한 것의 회귀라는 운명의 시간이 똬리를 틀고 있다. 운명극은 비극에서 볼 수 없는 비애극 고유의 아주 중요한 특성이다.

 

비애극에서 죽음은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다. 비극적 죽음으로 비극이 종결된다는 것은 한 시대가 영웅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운명으로 마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달리 비애극에서 인물의 죽음은 관계자 모두를 최고 심급의 법정으로 소환하는 것처럼 공동체의 운명으로 규정된다. 폭군과 순교자를 비롯한 주권자, 또 음모꾼과 같은 비애극의 인물들이 시대의 역사적 삶을 대표하기에 그러하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죽음으로써 개인성이 상실될 뿐이지 그 역할의 생명력까지 상실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극이 종결되지 않는 한 극 중의 역할이나 배역 또한 가면의 형태로 남는다. 역할이 지속되기에 무한한 반복이 가능하며, 그러한 점에서 비애극은 열린 극이다.

 

역할의 생명력이 다시 되살아나는 곳은 유령의 세계. 유령은 밤의 시간, 특히 시간이 저울의 바늘처럼 평형을 이루는 자정에 출몰한다. 『햄릿』의 유령은 반복의 법칙을 명하듯 외친다. ‘나를 기억하라!’ 비애극은 살해된 인물을 왜곡한 채로 유령의 세계로 내보낸다. 출몰하는 유령은 흔히 복수와 저주를 맹세하거나 다가올 미래의 운명을 예고한다. 유령의 출몰은 사실상 죽은 자를 소환하는 주문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소환을 통해 수행할 역할 하나가 발견되며, 세계라는 연극무대에서 사자의 가면을 쓰고 그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렇게 비애극은 반복된다. 왜일까? 벤야민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유령의 세계에 역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유령의 출몰은 역사를 모르는 영원한 자연적 질서, 그야말로 영원회귀의 운명을 표명하는 것이다. 동일한 것의 반복, 그것은 미해결로 남은 것의 구원을 기다리는 징표이다. 비애극이 비종결적 특성을 가진 열린 극이라면, 그것은 바로 구원을 향한 기대와 희망 때문이다.

 

고지현 가천대 학술연구교수



출처: https://ysgradnews.tistory.com/28?category=650030 [연세대학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