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니페스토 혹은 진동하는 비평
언어의 복수에 앞서 복수의 언어가, 세대를 관통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말하는 복수의 언어가 있(었)다.
— 자크 데리다
잘못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것은 흔하고 비겁한 물음이다.(책임 소재를 명확히 뭉뚱그리기 때문에)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것일까? 이것은 정직하지만 어리석은 물음이다.(마치 엉뚱한 주소로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출처와 시작을 알 수 없는 무수한 무정형의 잘못들 앞에서 실로 망연자실해진 상태, 바로 이 상태를 뚫고 출현하는 것이 이른바 ‘비판’ 혹은 ‘비평’이라는언어활동이다. 한때 비판과 비평은 보편 윤리와 세계 인륜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는 최종심급의 역할을 담당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서도 비판과 비평이 들어설 여지를 (전혀: 정말이지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 아무리 많은 잘못이 있어도, 아무리 많은 회한과 반성의 질문들이 던져져도, 그로 인해 생겨나는 망연자실의 상태가, 마치 매일매일의 뉴스처럼, 곧바로 휘발되기 때문이다. 마치 어떤 시스템이, 누구도 일부러 만들거나 계획하지 않았(겠)지만, 비판과 비평을 일체 배제하고 축출하는 어떤 빼곡한 시스템이 구축된 듯 보인다.
뉴스
이 체계 안에서 잘못은 비단 또다른 잘못으로 덮이거나 가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들은 심지어 상호 보완하면서 어떤 근사한 세력을 형성하기까지 한다. 이 세력의 활동 방식은 실로 비길 데 없이 근사하다. 이제 이들에 의해서 비판에 맞서는 방법은 표적이 된 바로 그 잘못에 대한 적합한 해명이 아니라 다른 엉뚱한 잘못에 대한 엉성한 입장 표명이 되었다. 그리고 이 입장 표명에 대한 비평은 결코 가당치 않다. 행여라도 그런 비평이 제출된다면, 돌아오는 것은 분명 한참 동안의 가공할 딴청피우기일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제일 격한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이 세력은 실은 저 체계의 중핵이 아니라 가장 먼 그러나 제일 도드라지는 가장자리에 주둔해 있을 따름이다. 뉴스처럼 쏟아지는 당일치기 비평들은 바로 저 가장자리만을 줄기차게 공략하고 있을 따름이다.(가장자리의 지평은 상상보다 크고 멀다) 이 무개념한 비평들을 향해 매서운 메뚜기 떼처럼 마구 달려드는 댓글들과 그 댓글들에 대한 댓글들—땟글(!)—과 댓글 및 땟글들에 대한 한숨 섞인 한줄 비평들은 저 가장자리 공간의 신축성과 체계 자체의 비가시성을 여실히 증명해줄 따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당연한 이야기(가 돼버렸)지만, 체계는 세계다. 세계의 체계를 말하거나 체계 안의 세계를 말할 수는 없다. 체계는 곧 세계가 되었다. 비판의 체계를 세움으로써 세계를 수리하려 했던 먼 옛날의 위대한 시도들은 이제 잠깐의 뉴스조차 되지 못한다.
봉쇄
체계는 비판을 버리고 세계를 택했고, 세계는 비평을 내쫓고 체계와 연합했다. 체계로 진화 중이던 세계가 여러가지 시(간)대를 다소 명확하게 구분함으로써 (좋든 나쁘든) 모종의 진보를 획책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체계를 체화한 세계, 체계로 육화된 세계는 시간을 뒤섞고 공간을 압축했으며 시공간을 쪼갰다. 요컨대 방향(성)을 없앤 것이다. 방향이 없으므로 지향이 불가능해졌고, 지향이 불가(능)하므로 경계긋기, 곧 비판 및 비평은 (원천)봉쇄되었다. 비판의 지평은 폐쇄되었고, 비평의 원천은 오염되었다. 무규칙 이종예술보다 더 변화무쌍하고 날씨보다 더 제멋대로인 법체계에 대한 비판과 비평이 원천적으로 차단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에 대한 가장 통렬한 예증이 될 것이다. 이제, 식상한 이야기지만, 법은 무법지대다.
애인
이 무법지대를 겁 없이 살고 있는 이 세대, 이 체계 세계의 세대에게는 더이상 복수의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단, 언어의 복수는 남아 있다! 남아 있을 것이고, 도래할 것이며, 파괴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을 예감하는 문장이다. 그러므로 또한 위험하고 험악한 문장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축출된 비판과 짓눌린 비평을 위한 호흡기가 달려 있다. 비판은 이제 예언처럼 출몰해야 한다. 예언은 시대를 관통하고, 시공을 초월하며, 초월과 내재의 구별을 내파하는 언어 형식이다. 예언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두려움과 떨림을 선사한다. 예언을 (정말로) 듣는 자들은 두려움에 떤다. 그들의 두려움은 예언에 대한 가장 명석한 의심마저 압도한다. 그러나 예언은 언제나 거짓 예언의 위험을 안고 태어난다. 하지만 바로 그 위험이 가능성의 약속이다. 비평은 오직 강렬한 예감을 선사해야 한다. 그것은 너무나 강렬해서 거부하거나 떨쳐낼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분석 자체의 한계를 의식적으로 끌어안으면서 행한 철저하고 냉엄한 분석을 읽는 자의 뇌리에 깊숙이 찔러넣어야 한다. 모종의 명제를 제시함으로써가 아니라, 치밀하게 암시함으로써 예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야 한다. 시적인 영감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의 파괴력이 오롯이 시적(인 것)으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평은 “해야 한다”의 무(기)력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도래할 언어의 복수를 위한 사전 작업이다.
비평
언어의 복수는 복수의 언어들을 완료할 것이다. 복수의 언어들이 생겨난 자리에 아직 남아 있는,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피와 눈물을 거둘 것이다. 비평은 앞으로도, 계속, 기약 없이, 피를 흘려야만 할 거라고 말하는 잔인한 작업이다. 비판은 이미 흘러내린 눈물들을 다 모아도 아직 노아의 홍수를 만들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미친 짓이다. 그러나 예언은 언제나 미친 (자의) 말이(었)고, 예감은 어김없이 잔혹하(게 실현된)다. 예언처럼 출몰하는 비평은 날마다 죽는 자의 유언이(어야 한)다. 죽(어가)는 자만이 유언할 수 있고, 그 유언 속에 어떤 엄청난 예언을 담을 수 있다. 유언의 실현 여부 또는 예언의 적중 여부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가 그 미래의 사건을 목도하거나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 언어가 가진 무게에 견주면 부차적이다. 유언과 예언을 준비하는 자가 가장 먼저 직면하는 사태는 이제 죽음이 더이상 어떤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모든 죽어가는 자의 우선 과제는 죽음을 죽음으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살아 있는 자, 죽음을 회피하는 자에게 죽음에 대한 존중심을 심어주는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죽음을 죽음으로 (비로소) 세우는 것은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순수한) 믿음마저도 이제는 더이상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을 깨닫는 일과 연관된다. 죽음을 죽음으로 (제대로) 남아 있게 하는 것은 허무주의를 (단호하게) 배격하는 것도 허무주의를 (아무렇게나) 실천하는 일도 더는 그 어떤 위안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어딘가에) 새겨두는 것이다. 죽어가는 자의 유언 속에 숨겨지는 예언, 그 예언에 매달리는 비평 혹은 비판. 이 언어는 두 개의 극, 즉 세계 자체에 대한 궁극의 훼방이 될 가능성과 도래(해야)할 언어의 복수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가능성 사이에서 맹렬히 진동하는 언어다.
조효원 뉴욕 대학교 독문과 박사과정
출처: https://ysgradnews.tistory.com/163?category=551801 [연세대학원저널]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다머의 예술철학과 유희개념의 문제 (0) | 2020.12.03 |
---|---|
감정의 도상학 그리고 1파운드의 살 (0) | 2020.12.03 |
스키마 β 칸트의 꿈 (0) | 2020.12.03 |
구원을 향한 미완의 반복, 비애극 (0) | 2020.12.03 |
비극과 모더니티 혹은, 현대 예술의 조건 (0) | 2020.1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