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감정의 도상학 그리고 1파운드의 살

나뭇잎숨결 2020. 12. 3. 11:12

감정의 도상학 그리고 1파운드의 살

from 204호 2014. 6. 18. 11:11

마이클 래드포드Michael Radford가 연출한 영화 ‹베니스의 상인›(2004)은 1914년 이래 제작된 같은 제목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반유대주의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다. 래드포드의 ‹베니스의 상인›은 관객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샤일록은 나쁜 사람일까? 유대인 샤일록은 왜 그렇게도 무자비한 악한이 된 것일까? 나아가 악한 유대인 샤일록은 어쩌면 베니스 도시가 만든 사회악이 아닐까?

래드포드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에 내포된 선악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그리고 16세기 베니스 사회의 반유대주의 현상을 변증법적 시선으로 재조명한다. 카메라의 시선은 샤일록의 악행보다는 그의 감정 변화의 궤적을 따라간다.

 

유대인 샤일록의 인내

 

1596년 베니스 이야기라고 고지하는 영화는 첫 시퀀스부터 불편하다. 영화는 베니스 사회에 팽배해 있던 반유대주의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곤돌라에 탄 수도사가 내뱉는 저주의 말에 그것이 함축되어 있다. “고리대금업으로 이자를 취하는 자를 어찌 살려두겠는가? 살려둘 수 없노라. 이런 가증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아직도 도둑질과 강도질을 일삼는 자, 너희 고리대금업자는 교수형에 처해져야 마땅하도다. 너희가 주의 계율을 어기고 짓밟았도다!”

바로 그때 다리 위에서는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가 유대인 샤일록과 마주친다. 안토니오는 샤일록에게 침을 뱉고 지나간다. 그리고 “너희 고리대금업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저주를 퍼붓는다. 카메라는 얼굴에 튄 침을 닦으며 멀어져가는 안토니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샤일록을 오랫동안 비춘다. 베니스의 상징적 건축물인 리알토 다리 위에서 공개적인 수모를 당한 샤일록의 심경은 어땠을까를 묻기라도 하듯. 여기까지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종교적 반유대주의 차별과 학대를 끈기 있게 참아낸다.

 

유대인 샤일록의 분노

 

그러나 외동딸 제시카가 이탈리아 청년 로렌조와 야반도주한 뒤 샤일록의 인내심은 바닥난다. 집에 돌아와보니 딸이 사라지고 없다. 그는 넋 나간 사람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딸을 찾는다. 그러나 제시카는 온데간데없다. 마침내 샤일록은 딸이 자신을 배반하고 개종하여 기독교도인 로렌조와 결혼하기로 결심했음을 알게 된다. 샤일록은 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부짖는다. 영화는 비를 맞은 샤일록의 초라한 모습과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한참동안 보여준다. 하나뿐인 외동딸을 기독교도 청년에게 빼앗긴 아버지 샤일록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려는 것처럼.

밤새 시내를 돌아다니며 딸을 찾던 샤일록은 새벽까지 창녀촌에서 놀던 살레리오와 솔라니오와 마주친다. 로렌조와 안토니오의 친구인 그들에게 샤일록은 울분을 토로한다. 이어 안토니오의 반유대주의적 차별에 격분한 샤일록의 성난 목소리가 베니스의 새벽을 깨운다. “유대인은 눈이 없소? 유대인은 손이 없소? 오장육부도 없고, 형체도 없소? 감각도 감성도 열정도 없소? 먹는 게 다르오? 흉기에 다치지도 않소? 같은 병에 걸리지도 않소? 같은 처방으로 치료도 안 되고?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는단 말이요? 당신들이 찔러도 우린 피가 안 나오? 간질여도 웃지 않고? 독약을 먹여도 안 죽는답디까?”

로렌조와 안토니오, 밧사니오, 살레리오, 솔라니오가 모두 친구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안토니오 개인을 겨냥한 분노라기보다는 유대 민족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해온 베니스의 반유대주의자 전체에 대한 반발이다. 샤일록의 분노가 외동딸의 도망결혼 문제에서 불거져 나왔다는 사실은 베니스 시민들의 유대인 차별이 일상의 층위에서 자행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유대인 샤일록에게 선고된 최악의 죽음

 

샤일록은 1파운드의 살점을 담보로 3천 두카트를 빌린 안토니오가 기한 내에 돈을 갚지 못하자 그를 베니스 법정에 기소한다. 자비를 베풀라는 재판관의 권고도, 원금의 두 배를 내겠다는 밧사니오의 간청도 뿌리친 샤일록은 흥미로운 비유로 법대로의 판결을 촉구한다. 재판을 주재하는 공작은 자신의 권한으로 소송을 기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벨라리오 현자에게 이 사건을 의뢰하고 벨라리오가 추천한 젊은 학자에게 주재권을 넘기겠다고 한다. 그의 특별 요청에 따라, 로마의 법학자 행사를 하는 포오샤가 변장한 모습으로 법정에 들어선다. 그때부터 법정 분위기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1파운드의 살덩이는 떼어가되 기독교인의 피는 한 방울도 흘려서는 안 되며, 만일 그럴 경우 거꾸로 샤일록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포오샤의 명판결에 따라 피고 안토니오는 극적으로 죽음에서 벗어난다. 반대로 원고 샤일록은 외국인으로서 베니스 시민의 목숨을 노렸기 때문에 베니스 법령에 따라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목숨은 공작의 재량권에 맡긴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공작은 샤일록의 목숨만은 살려주겠지만, 그의 전 재산을 몰수시킨다는 최종 결정을 내린다.

이 장면에서 포오샤는 피고 안토니오에게 “당신의 입장은 어떠냐”고 묻는다. 안토니오는 샤일록의 재산 중 국가로 환수될 부분은 벌금형으로 대신하고 자기에게 올 재산은 맡아서 관리하다가 때가 되면 샤일록의 딸 내외에게 양도하겠다며 공작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조건부다. 샤일록이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일 때에만 제안은 유효하다. 샤일록은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표식인 목걸이를 부여잡은 채 신음한다. 이윽고 안토니오의 조건부 제안에 동의한다는 말을 정신나간 사람처럼 남긴 뒤 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법정에서 물러난다.

베니스 상인 안토니오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제시된 개종을 강요당했을 때 샤일록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영화는 개종 직후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지 못하는 초라한 모습의 샤일록을 부각시킨다. 샤일록에게 있어 기독교로의 개종은 유대 사회로부터의 축출, 곧 종교적 죽음을 뜻했다. 영화는 베니스 법정에서의 개종 요구가 유대인 샤일록에게 정신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는 불편한 여운을 남긴다. 베니스 법정에서 포착되는 반유대주의 현상은 적어도 개종 유대인들에게는 일종의 집단 살인극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래드포드의 ‹베니스의 상인›은 유대인 샤일록의 감정을 면밀히 터치하는 세밀화처럼, 또 그를 통해 유대인 전체의 감정을 정식화하는 도상학처럼 보인다.

 

최용찬 영화사학자



출처: https://ysgradnews.tistory.com/128?category=551802 [연세대학원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