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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적인 것의 모상인 원형으로서의 ‘아버지’는 마치 바람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것, 창조적 기풍, 입김, 氣Pneuma, 아트만Atman, 혼Geist이다. 인간과 법과 국가, 이성과 정신에 대한 관계를 결정하는 존재이며 자연의 동적인 힘, 바람과 폭풍과 뇌성과 번개 같은 것이다. 여성적인 것의 모상, 원형으로서의 ‘어머니’는 산출력 있는 대지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기도 하나 또한 죽음을 포용하기도 한다. 그만큼 무의식적인 것, 비합리적이며 영원한 것에 연계되어 있다.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란 이러한 무의식에 있는 내적 인격의 특성을 말하며 간단히 말해서 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를 ‘아니마’, 여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남성적 요소를 ‘아니무스’라고 부른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말하는 남성적, 여성적이란 사회적인 통념을 넘어선 보편적, 원초적 특성을 말한다."
다음 날 시월의 아침 햇살이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으로 들어와 광선 줄기 사이로 먼지들을 내비쳤습니다. 거리는 시끄러운 차 소리로 다시 소란스러웠지요. 런던은 이 시간이면 다시 기지개를 켜며 준비운동을 합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공장이 기계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앞서 여러 책들을 읽고 난 후 이제 창밖을 내다보며 1928년 10월 26일 아침에 런던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졌습니다. 런던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어느 누구도 <안토니오 클레오파트라>를 읽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런던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지요. 어느 누구도 소설의 미래나 시의 죽음, 평범한 여성의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해 줄 산문체의 발달에 대해 털끝만큼도-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런 문제에 대한 견해들이 보도 위에 백묵으로 쓰여 있다면 그것을 읽으려고 몸을 굽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무관심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자국들이 삼십 분 만에 그것을 문질러 지워버리겠지요. 저기 심부름꾼 소년이 오고 있군요. 한 여인이 개를 줄에 매어 끌고 지나갑니다. 런던 거리의 매력이라 할 만한 점은 서로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이 작은 가방을 들고 지나갑니다. 지하실 출입구 난간에다 지팡이를 부딪치며 정처 없이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길거리를 클럽의 회원실 정도로 여기는 지 마차에 탄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인사하고 묻지도 않는데 새로운 소식을 알려주는 붙임성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장례식 행렬도 지나갑니다. 행인들은 자신들의 육체도 사라져 버릴 것을 갑자기 깨닫기라도 한 듯 모자를 들어 경의를 표하는군요. 또 아주 별난 차림의 신사가 천천히 층계를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는 허둥대는 어떤 부인을 비켜 가기위해 멈춰 섰습니다. 그녀는 무슨 수로 장만했는지 화려한 모피 코트를 입고 파르마 제비꽃 한 다발을 안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각각 분리되어 자기 일에만 몰두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통행이 완전히 뜸해지고 정지되었습니다. 런던에선 가끔 이런 일이 있지요. 아무 것도 거리를 따라 내려오지 않았고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거리 끝의 플라타너스에서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그 휴지(休止)와 정지의 순간에 내려앉았습니다. 어쩐지 그것은 하나의 신호, 지금까지 사람들이 간과해 온 사물에 내재한 힘을 가리키는 신호 같았지요.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게 흘러가면서 모퉁이를 몰고 길을 따라 사람들을 끌어가 소용돌이치게 하는 어떤 흐름을 가리키는 듯했습니다. 옥스브리지에서 보트에 탄 학부생과 낙엽을 싣고 흐르던 강처럼 말입니다. 이제 그 흐름은 거리의 한 쪽에서 대각선 방향의 다른 쪽으로 에나멜가죽 구두를 신은 한 소녀를 실어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또한 택시도 실어 왔지요. 그것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내 창문 바로 밑으로 데려와 그곳에서 택시가 멈추었고 마치 그 흐흡에 휩쓸리듯 미끄러지며 이내 다른 곳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광경은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지요.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내 상상력이 그 광경에 역동적인 질서를 부여했고, 두 사람이 택시에 올라타는 광경이 외견상 그들의 만족감 같은 것을 전달하는 힘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택시가 방향을 돌려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두 사람이 거리를 따라 내려와 모퉁이에서 만나는 광경이 마음의 긴장을 덜어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내가 지난 이틀간 생각해 온 방식대로 한 성을 다른 성과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은 고역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마음의 통일성을 방해하지요. 이제 두 사람이 만나서 택시에 올라타는 광경을 봄으로써 그 노력은 중단되었고 마음의 통일성이 회복되었습니다. 마음이란 확실히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입니다. 나는 창문에서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몸이 명백한 원인들로 인해서 긴장하듯이, 마음에도 단절과 대립이 있다고 느낀 것은 무엇일까요? '마음의 통일성'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하고 나는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마음이란 어느 때고 어떤 점에라도 집중할 수 있는 막대한 능력이 있기에 단일한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 듯하니까요. 예를 들어 그것은 거리의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듯 하니까요. 예를 들어 거리의 사람들과 스스로를 분리시킬수 있고, 2층 창문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그들과 그 자체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혹은 군중들 가운데에서 새로운 소식이 발표되기를 기다릴 때처럼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지요. 아버지를 통해서 또는 어머니를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쓰는 여성은 어머니를 통해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만약 여성이라면 또한 그녀는 종종 갑작스런 의식의 분열에 놀라게 됩니다. 이를테면 화이트홀을 따라 걸으면서 자신이 그 문명의 타고난 계승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문명의 변두리에 서 있는 이질적이고 비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듯이 말이지요. 분명히 마음은 항상 그 초점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다양한 시작으로 보게합니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든 것이라도 어떤 마음 상태는 다른 마음 상태보다 불편해 보입니다. 불편한 마음 상태를 지속하고 있으려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억제하게 되고 점차 그 억제는 고역스런 일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억제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고도 지속할 수 있는 마음 상태가 있습니다. 아미 지금이 그런 마음일 거라고 나는 창문에서 물러나며 생각햇지요. 왜냐하면 두 사람이 택시에 올라타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이 분열되어 있다가 다시 모여서 자연스럽게 융합된 듯 했기 때문입니다. 두 성이 협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이 그 명백한 이유이겠지요. 우리에게는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최고의 만족과 가장 완벽한 행복을 이룬다는 이론을 선호하는, 비합리적일지라도 심오한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택시에 올라탄 광경과 그것이 나에게 준 만족감으로 인해 나는 육체의 두 성에 상응하는 마음 속의 두 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들도 또한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위해서 결합되기를 요구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더 나아가 나는 서투르게 영혼의 윤곽을 그려 보았지요. 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도라도 자기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 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하지요. 콜리지가 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융화가 일어날 때라야 마음은 온전히 풍부해지고 제 기능을 모두 사용하게 됩니다. 아마도 순전히 남성적인 마음은 순전히 여성적임 마음과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멈춰 서서 책 한두권을 살펴보며 여성적 남성과, 그 반대로 남성적 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지요.
-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이미애올김,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 민음사, 2006, pp.14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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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the kiss>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비소설의 산문, 에세이다. 1928년 5월 울프는 옥스포드의 여자대학 뉴넘에서 ‘여성과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케임브리지의 여자대학 거튼에서 또 한 번 강연을 했다. 이 두 개의 강연을 토대로 그것을 수정 보완한 글이 이 에세이이다.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자는 주제나 형식면에서 모두 특이하다.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암시된 아웃사이더로서 여성의 위상, 소유욕과 경쟁을 부채질하는 대학 교육과 전문직, 여성 억압과 자본주의적, 제국주의적 기획 및 전쟁과의 관련성, 가부장제 사회의 문명 결핍 등은 「 3기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면서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대안 제시로 이어진다. 이미 '자기만의 방'에서 하나의 성이 지배하는 문화가 얼마나 자아를 억압하는지를 폭로하며 양성이 고루 조화를 이룬 문명의 도래를 희망했던 울프는 「3기니」에서 여성을 소외시켰던 역사가 도리어 여성들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소외되고 억압되었던 아웃사이더들이 파시즘과 전쟁에 대립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에세이는 전쟁을 방지하고 "문화와 지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방법을 문의한 변호사의 편지와 여자대학 재건 기금을 요청하는 편지, 여성의 전문직 진출을 원조하려는 협회의 기금 요청 편지에 답변하는 세 겹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일견 서로 무관한 듯 보이는 이 세 가지 사안이 실은 평화의 증진이라는 대의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밝히면서 울프는 세 단체에 각각 1기니씩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울프는 평화라는 대의를 위해서는 여성의 고등교육과 전문직 진출이 필수적인 전제 조건임을 역설한다. 알아야 제대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1장에서 청탁받은 강연의 제목이 ‘여성과 소설’인데 왜 ‘자기만의 방’으로 고쳤는가에 대해서 추궁을 받았다고 가정하고, 그것에 대한 해명을 하겠노라고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위의 제목이 지나치게 거창하니까 차라리 자그마한 의견 하나를 제시하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즉, 여성이 소설을 쓰려면 돈과 자기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다. 이날 옥스브리지에서 점심 초대가 있는 것으로 설정해 놓았다. 300여 년간 잘 다듬어진 잔디 위는 남자만 걸을 수 있고 여자는 거친 자갈길만 다닐 수 있으며, 여자는 도서관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 같은 날 저녁식사는 여자 대학인 뉴넘에서 하게 되어 있었는데, 두 군데서의 식사가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2장의 세팅은 대영박물관이다. 화자의 숙모가 사망해서 연 50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된다. 이날(1919)은 영국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던 날이기도 하다. 고정 수입 500파운드가 생긴 이후 필자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검은 뱀인 분노가 증오와 함께 스러지고, 화자는 그 동안 그렇게나 분노를 끓게 한 남성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또한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이 독점한 돈과 권력은 그 속성상 소유한 자들의 간을 뜯어내고 허파를 쪼아먹기도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된다. 다시 말해서 화자는 공포와 한에서 연민과 관용의 단계를 넘어 가장 위대한 해방,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역사가에게 구체적으로 엘리자베스 조 영국에서 여성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고 하면서 여성 문학사를 더듬는다. 유명한 영국의 사학자 트레벨리언 교수의 『영국사』에 기록된 여성의 비참한 운명을 1470년경부터 고찰해 나간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누이동생 주디스도 이 장에 등장한다.
4장의 세팅은 아직도 대영박물관이다. 드디어 18세기 말엽 아프라 벤(Aphra Behn, 1640~1689)이 등장해서 처음으로 직업 작가가 된다. 이 사실은 십자군전쟁이나 장미전쟁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난관들을 극복해 나갈 방향 제시를 하고 있는 5, 6장은 이 책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여기서 울프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5장의 배경은 19세기이다. 처음으로 카마이클이라는 여성이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글을 쓴다. 필자는 앞으로 100년은 더 지나야 참다운 여류시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예언 아닌 예언을 한다.
마지막 장인 6장의 때는 1928년 10월 26일이고 장소는 런던이다. 필자는 ‘양성론’을 들고 나와 결론을 대신한다. 작가란 모름지기 셰익스피어와 같은 양성적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작가 자신의 성에 대해서조차 걸림이 없이 글을 씀으로써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울프는 이 에세이에서 여자가 소설을 쓰려면 고정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여성의 경제적인 독립은 투표권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생각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다. 척추 속의 램프, 즉 우리의 정신활동에 불을 밝힐 수 없다”고 힘주어 이야기 하는데, 이 견해는 작품 도처에 되풀이되어서 나타난다. 즉 소설 예술이라는 것이 거미줄과 같은 것이어서,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네 귀퉁이가 모두 실생활에 달라붙어 있다고 운을 뗀다. 계속해서 예술이 보기보다 건강, 돈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집과 같은 물리적 여건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울프 시대와 울프가 거론한 작품들이 쓰인 시대상으로 아주 정당한 목소리다.
또한 경제적인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신적인 독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은 물론 물리적인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이 제대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칭한다. 울프는 여기서도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자기만의 방은 여성이 남성처럼 글을 쓰고 남성처럼 살고 남성처럼 보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고 단단히 못을 박는다.
빵만으로도 살 수 없고 빵이 없어도 살수 없는 존재, 그것이 어찌 여성에 국한되겠는가? 그러니 '자기만의 방'은 닫힌 공간이면서 동시에 열린 곳이며, 모든 사람들의 동의하에 그리고 여성 자신이 그곳에서 살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돈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남성의 아량에 의해 얻은 방은 결코 정신적인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울프는 말한다. 이는 남성에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방은 온전히 자기 방이 아닌 것이다. 스스로가 만든 자기의 방, 자기만의 방이 부여하는 긍정적인 고독 안에서 예술가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양성적 존재로서 자유롭게 진리를 탐구하고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이는 정신적 독립은 경제의 독립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과도 일맥 상통한다.
또한 이 에세이는 역사, 풍자, 문학비평 그리고 자기 고백이 뒤섞여 있어 작가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드러내게 된다. 싸르트르가 말하는 소위 작가의 ‘상황(situation)’ 분석을 가능케 해 준다. 즉 울프라는 작가가 그녀가 받은 교육, 그녀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문학적 환경에 어떻게 반응하면서 성장한 인물인가, 하는 점, 그녀는 이 모든 역류에 어떤 방식으로 항거하며 자신을 주장했으며, 이 항거 자체가 그녀의 인격을 어떻게 연단했는가를 우리는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최근에는 장르 허물기의 경향마저 두드러져서 이와같이 특이한 형태의 에세이를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6장에서 콜리지의 말을 인용하며 "두 종류의 힘 즉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장하고 있습니다. 남성의 두뇌에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우세하고 여성의 두뇌에서는 여성적인 것이 남성적인 것보다 우세합니다. 그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정신적으로 협력할 때 우리는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남성이라 하도라도 자기 두뇌의 여성적인 부분을 사용해야 합니다. 여성도 또한 자기 내면의 남성적인 부분과 교섭을 가져야하지요. 콜리지가 위대한 마음이란 양성적이라 말했을 때 그 말의 의미는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융화가 일어날 때라야 마음은 온전히 풍부해지고 제 기능을 모두 사용하게 됩니다. 아마도 순전히 남성적인 마음은 순전히 여성적임 마음과 마찬가지로 창조력을 잃을 것입니다. 그러나 잠시 멈춰 서서 책 한두권을 살펴보며 여성적 남성과, 그 반대로 남성적 여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좋겠지요." 가 이 글이 지닌 힘이 아닐까 싶다. 여성과 남성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며, 또 성은 밖에 있는 성뿐 아니라 우리 각자의 고유의 성 안에 내재한 이성의 존재를 일깨워 전인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여성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견해뿐 아니라, 인간존재의 존재성에 대해 묻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비평의 전범에 머물기에는 이 작품이 지닌 외연이 훨씬 크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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