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적 사유(Nomad Thought)
- Gilles Deleuze
* "Nomad Thought", in The New Nietzsche : Contemporary Styles of Interpretation, ed. & intro. by David B. Allison, MIT Press, 1985, pp.142-149.
** First published as "Pens e nomade" in Nietzsche aujourd'hui, 1973 (Union G n rale d'Editions, Paris).
*** 영역본은 불어 원문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주로 영역본을 따르고 (영역자의 오역 및 삭제가 많기 때문에) 불어본을 참고함.
아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 근대 문화의 여명을 니체-프로이트-맑스라는 세 사람으로 새겨두고 있다. 그리고, 세계가 그들에 대해 미리 준비되지 못했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제는, 아마도 맑스와 프로이트는 우리 문화의 여명을 제시하지만, 니체는 뭔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서 대항문화counterculture의 여명을 제시한다.
근대 사회는 분명히 코드들codes의 기반 위에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맑스와 프로이트를 글자 그대로 채택하기보다는) 맑스주의나 프로이트주의가 전개되어 온 것을 고려해보면, 그것들이 역설적이게도 재코드화recodification의 시도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맑스주의의 경우에는 국가에 의한 재코드화("당신은 국가에 의해 병들었으며, 국가에 의해 치료받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동일한 국가는 아니다), 프로이트주의의 경우에는 가족에 의한 재코드화("당신은 가족에 의해 병들었으며, 가족에 의해 치료받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동일한 가족은 아니다). 맑스주의와 정신분석은 진정한 의미에서 근본적인 관료주의bureaucracies ― 전자는 공적인, 후자는 사적인 ― 를 구성하는데, 그 관료주의의 목표는 그런 대로 우리 문화의 지평에서 끊임없이 탈코드화decodified되는 모든 것을 재코드화하는 것이다. 반면에, 니체의 관심사는 전혀 이런 것이 아니다. 그의 과업은 다른 곳에 놓여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코드들을 넘어서, 그 자신이 코드화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코드화되는 것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어떤 것을 전달하는 것. 그것을 새로운 신체에 전달하는 것, 그것을 받고 퍼뜨려 낼 수 있는 신체를 발명하는 것; 우리 자신의 것이 될, 대지의 것이 될, 심지어 씌어진written 어떤 것이 될 신체. . .
우리는 코드화의 거대한 장치들에 매우 친숙하다. 결국 사회들은 많이 다르지 않으며, 그리 많은 코드화의 수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세 가지 주요한 수단들은 법률law, 계약들contracts 그리고 제도들institutions이며, 이것들은 예를 들어 우리가 맺거나 맺어왔던 서적들과의 관계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특히 법전들codes로 불리는 어떤 법률서들이나 심지어 종교적 텍스트들과 독자의 관계는 그 자체로 법률에 의해 지배된다. 또 다른 종류의 서적은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반영하는데, 그것은 상업적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세속적 문학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구입하고, 당신은 나에게 읽을 거리를 준다." 이러한 계약 관계는 모든 관계를 포괄한다: 작가, 출판업자, 독자. 현존하는 또는 미래의 제도들에 관한 책으로 제시된 정치적 책(경향에 있어 혁명적인) 또한 있다. 다양한 종류의 코드화가 온통 퍼져있고, 자주 겹쳐서 하나가 다른 것에 파묻혀 있는 것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들 사이에서 모든 종류의 혼합들이 발생한다(예를 들어, 계약적 또는 제도적 서적들은 종교적 텍스트들로 취급될지도 모른다).
또 하나 매우 다른 종류의 예를 들어보자: 광기madness의 코드화. 무엇보다도, 합법적인 형태가 있었다: 병원, 수용시설. 이것은 미래에 건강의 마지막 희망으로 불리게 될 억압적인 코드화, 감금, 낡은 방식의 투옥이다(그때에는 광인the insane이, "그들이 우리를 가두었을 때는 좋은 시절이었다; 오늘날에는 훨씬 나쁜 일조차 일어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사건, 즉 정신분석이 생겨났다. 의학에서 나타난 것처럼,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해되어 왔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계약 당사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신이상인insane 것으로 판정되었다; 그들은 법률적으로 "무능한incapable" 자들로 여겨졌다. 프로이트의 천재적 업적은 일종의 정신이상insanity(넓은 의미에서의 신경증neurosis)을 계약 관계 하에 가져 놓은 점, 그리고 이 경우에는 정신이상자가 특수한 계약이 가능하다고 설명한 점이다 ― 그것에서 최면의 "포기abandon"가 나온다.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새로움은 부르주아 계약 관계를 그때까지 배제되어 왔던 요소인 정신 치료psychiatry에로 도입한 것에 있다. 보다 최근의 해결책들, 흔히 정치적 함의와 혁명적 야심을 동반한 해결책들을 우리는 제도적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다시, 코드화의 삼중의미가 있다: 법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계약 관계; 계약적인 것이 아니라면, 제도적인 것. 이러한 코드들 위에서 우리의 관료적 조직의 모든 형태가 번성한다.
우리 사회들이 점진적으로 탈코드화되고 비규정화unregulated되는, 우리의 코드들이 모든 지점에서 분해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니체는 재코드화의 시도를 하지 않은 유일한 사상가이다. 그가 말하기를: 여전히 그 과정은 충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어린아이들일 뿐이다("유럽인의 평등은 오늘날의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 경향은 오히려 가속되어야 한다."). 니체는 그의 글쓰기와 사상에서, 탈코드화의 시도에 참가한다 ― 과거, 현재 또는 미래의 코드들을 탈암호화deciphering에 의한 상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모든 코드들을 혼란시키며 코드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함으로써 절대적 의미에서의 탈코드화. 그러나, 모든 코드들을 혼란시키는 것은 글쓰기와 사상의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조차도 쉽지 않다. 내가 여기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하게 대등한 것은 카프카가 프라하 유태인의 언어 상황과의 관련하에서 독일어에서 행한 것이다: 그는 독일어에서 전쟁 기계를 구축하고 그것을 독일어를 향해 돌렸다. 어떤 불확정성과 엄숙으로 인해, 그는 그전에는 전혀 전달되어 본 적이 없는 독일 언어의 코드화된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표현한다. 유사하게, 니체는 그 자신이 독일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폴란드인이 되기를 유지하거나 가정하였다. 대가다운 언어의 공략siege을 통해 그는 코드화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전달하게 되었다: 정치로서의 문체style의 개념.
보다 일반적인 용어로, 법률들의 범위 내에서(그것들을 거부하는 동시에), 계약 관계들의 범위 내에서(그것들을 부인하는 동시에), 그리고 제도들의 범위 내에서(그것들을 조롱하는 동시에), 그것의 역동성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사상의 목적은 무엇인가? 간단히 정신분석의 예로 되돌아가서,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과 같은 독창적인 사상가가 어째서 정신분석적 체계 내에 머무르는지 질문해보자. 그녀는 그것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한다: 그들의 [감정의] 분출, 그들의 [의식의] 흐름과 함께, 그녀가 논의하는 부분 대상들partobjects은 환상들fantasies이다: 환자들은 그들의 생생하고 강렬한 경험들을 끄집어내고, 멜라니 클라인은 그 경험들을 환상들로 번역해낸다. 따라서, 어떤 계약, 즉 특수한 계약이 성립된다: 당신 경험의 상태를 나에게 주면, 나는 당신에게 환상들을 되돌려 줄 것이다. 계약은 어떤 교환, 즉 돈의 교환 그리고 말words의 교환을 나타낸다. 이제, 위니코트Winnicott와 같은 정신분석학자는, 어떤 점에서 이 계약적 과정이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한계에서 작업을 한다. 환상들을 번역하고 기표signifier나 기의signified를 해석하는 것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은 때가 온다. 즉 공유되어야 할 시점이 오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을 환자의 상황에 두어야 한다, 당신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일종의 공감sympathy, 또는 감정이입empathy, 또는 동일시identification를 공유하는 것인가? 틀림없이 그것은 이러한 것보다 더욱 복잡하다.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법적이지도 계약적이지도 제도적이지도 않은 관계에 대한 암시적 필요성이다 ― 그리고 이것은 니체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짜라투스트라에 의한 아포리즘이나 시를 읽지만, 이와 같은 텍스트들은 물질적이고 형식적으로 법률의 정초나 적용에 의해서도, 계약 관계의 제공에 의해서도, 제도의 설립을 통해서도 이해될 수 없다. 아마도 유일하게 있을 법한 해결책은 "승선embarkation"이라는 개념에 있을 것이다. 여기, 파스칼에게 되돌려진 파스칼적인 어떤 것이 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일종의 "메두사"의 뗏목에 승선한다; 뗏목이 얼음같은 지하수를 향해 ― 또는 아마존 오리노코의 작열하는 강을 향해 ― 표류할 때, 폭탄이 뗏목의 주위에 떨어진다; 탑승자들은 함께 노를 젓고, 그들은 서로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그들은 서로 싸우고, 그들은 서로를 먹는다. 함께 노를 젓는 것은 공유하는 것, 즉 법률, 계약 또는 제도 너머의 어떤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표류의,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의 시기이다. 이것은 하나의 가정, 즉 새로운 종류의 책인 니체의 텍스트들의 독창성에 관련한 모호한 인상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매우 느슨하고 혼란스런 방법으로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인상을 주는 니체의 아포리즘의 특성은 무엇인가?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는 그의 저작 {끝없는 대담L'Entretien infini}에서 눈부신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깥the outside, 외부the exterior와의 관계이다. 니체의 책들 중 하나를 임의로 펼치면, 당신은 그것이 의식의 내적인 영혼이라 불리든 개념의 내적인 본질 ― 즉, 항상 철학의 지도적인 원리로서 복무해온 것 ― 이라 불리든, 내부성interiority의 방법에 의해 계속 나아가지 않는 거의 기발한 경험을 한다. 외부와의 관계가 항상 내부에 의해 중재되고 용해되는 것은 바로 철학적인 글쓰기의 특성이며, 이 과정은 언제나 어떤 주어진 내부성 내에서 일어난다. 반면에, 니체는 그의 사상과 글쓰기를 바깥, 외부와의 즉각적인 관련 위에 토대를 둔다. 어떠한 아름다운 그림이나 도안처럼, 아포리즘은 틀 지워져 있다framed. ― 그러나 어떤 점에서 그것은 아름답게 되는가? 운동movement, 틀 지워진 선이 다른 곳에서 오며, 그것이 틀의 한계 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느끼는 순간에서부터. 그것은 틀의 아래 혹은 옆에서 시작되었고, 틀을 가로지른다traverse. 고다르의 영화에서처럼, 어떤 이는 벽으로with wall 그림을 그린다. 회화적 화면의 한계 설정이 되는 것을 너머서, 그 틀은 즉시 이 화면을 바깥에 관련시킨다. 그래서, 사고를 바깥에 붙들어 매는 것은, 철학자들이 예를 들어 정치에 관해 말할 때조차도 사실상 전혀 수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산책이나 신선한 공기와 같은 주제를 다룰 때조차도. 사고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바깥에 붙들어 매기 위해서 신선한 공기나 외출에 대해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들은 운명처럼, 원인 없이, 이유 없이, 고려 없이 또는 구실 없이 온다; 그것들은 번개가 치는 것처럼, 아주 무섭고, 아주 갑작스럽고, 아주 설득력 있고, 싫어하는 것이 되기에는 너무 다른 것으로 거기에 있다." 따라서 니체의 축복 받은 텍스트는 국가의 정초자들, "동상bronze의 모습을 띤 저 예술가들" 위에 있다.
불가피하게 카프카의 {중국의 만리장성Great Wall of China}이 떠올려진다: "그들이 어떻게 국경으로부터 아주 먼 수도capital를 향한 모든 길을 통과해왔는지를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어쨌건 그들은 여기에 있으며 그들의 숫자는 매일 아침 늘어나고 있는 듯이 보인다. . . 그들과 대화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우리의 언어를 모른다. . . 그들의 말들horses 조차도 육식성이다." 어떤 경우에든, 우리는 그러한 텍스트들은 외부로부터 오는, 그 페이지에서(그전의 페이지들에서도) 시작하지 않는, 그 책의 틀에 의해 경계지워지지 않는 운동에 의해 횡단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표상representation의 상상적 운동이나, 단어들 사이에서 그리고 독자의 마음속에서 습관적으로 발생하는 개념들의 추상적 운동과는 완전히 다르다. 어떤 것이 책으로부터 뛰쳐나오고 책에 대해 순수한 바깥과의 접촉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이것은 니체의 전 저작에 대한 오독의 정당성이다. 아포리즘은 항상 서로 따로따로 유지되는 힘들forces의 혼합물이다.
아포리즘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나타내지 않으며, 기의가 아닌 것처럼 기표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텍스트의 내부성은 혼란 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을 것이다. 아포리즘은 가장 근래의 힘 ― 가장 최근의, 가장 새로운 그리고 잠정적으로 가장 최후의 힘 ― 이 항상 가장 외부적인, 힘들의 유희이다. 니체는 이것을 매우 명확하게 한다: 만약 당신이 내가 의미하는 것을 알고 싶다면, 내가 말하는 것에 새로운 의미를 주는 힘을 발견하라, 그리고 텍스트를 힘에 따라 결정되게 하라. 이러한 접근을 따른다면, 니체를 해석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단지 그의 텍스트를 구획하고, 외부적인 힘이 실제로 텍스트를 통과하도록 해주는 것, 말하자면 에너지의 흐름을 찾는 것과 같은 기계적인 문제가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파시스트나 반-셈족과의 공유점을 지진 니체의 어떤 텍스트에 의해 부과되는 문제들에 직면한다. 우리는 우선 여기서 니체가 다수의 젊은 파시스트들에게 자양분을 주었고 여전히 자양분을 주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니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잘못 전취되고 완전히 변형되어왔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던 때가 있었다. 쟝 발Jean Wahl, 바따이유Bataille 그리고 클로소프스키Klossowski가 Ac phale 리뷰에서 이것을 행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니체를 원문 분석의 수준에서 논의할 필요가 없다. ― 우리가 그 수준에서 논쟁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논쟁이 더 이상 가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이제 문제는 해방의 의미, 즉 각기 다양한 문구들에 대한 외부성의 의미를 주는 외부적 힘들을 찾고 평가하고 조합하는 형태를 띤다.
니체 사상의 혁명적 특성은 방법의 수준에서 명백하게 된다: 니체의 텍스트를 그 자체로 "파쇼적인", "부르주아적인" 또는 "혁명적인" 것으로 성격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파쇼적, 부르주아적 그리고 혁명적 힘들이 격돌하는 외부적 장field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의 방법이다. 만약 우리가 그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제기한다면, 니체의 방법에 적합한 반응은 혁명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문제는, 언제나 외부로부터 오고 니체적인 텍스트를 아포리즘의 뼈대 내에서 횡단하고 절단하는 새로운 힘들을 간파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서 정당한 오역이 있는데, 그것은 아포리즘을 현상phenomenon으로, 다가와서 그것을 "정복할", 또는 그것을 작동하도록 만들, 또는 심지어 그것을 폭발하도록 만들 새로운 힘을 기다리는 현상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외부에 대한 그것의 관계에 덧붙여, 아포리즘은 강렬한 것과의 관계를 가진다. 클로소프스키와 리오따르가 보여주었듯이, 두 가지 특성은 동일하다. 어떤 지점에서 표상이나 환상으로 번역되어서는 안되는, 법률적, 계약적 또는 제도적 코드들에 의해 통과되어서는 안되는, 교환되거나 돈으로 바뀌어서는 안되는, 그러나 반면에, 우리를 보다 더 바깥으로 데려가는 역동적인 유출flux로 보이는 것이 분명한 그러한 체험된 상태들로 잠시 동안 되돌아 가보자. 이것은 정확히 강도intensity, 집중들이다. 체험된 상태는 기원에 있어 주관적이지 않거나 불가피하지 않다. 더욱이 그것은 개별적이지 않다. 그것은 지속적인 유출이고 유출의 파열이며, 각각의 집중은 필연적으로 다른 강도와의 관계 즉, 접속contact과 전송transmission의 지점을 낳는다. 이것이 모든 코드들의 근저에 있는 것이고 모든 코드들을 벗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코드들 자신이 번역하고 전환하고 돈으로 바꾸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니체는, 그 자신의 강도의 글쓰기에서, 우리에게 단순한 표상을 위해 강도를 바꾸지 말라고 말한다. 강도는 기표(표상된 단어)에도 기의(표상된 사물)에도 관련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만약 강도가 탈코드화의 작인agent과 대상object 양자 모두로서 복무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니체의 사상에 부과된 가장 불가해한 미스테리이다.
또한 고유의 이름들이 여기에서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것들은 사물들(또는 인물들) 또는 단어들의 표상들이 되도록 의도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Presocratics, 로마인들, 유태인들, 그리스도, 반그리스도, 줄리어스 시저, 보르기아Borgia, 짜라투스트라 ― 니체의 텍스트들에서 오가는 집단적 또는 개별적인 이 고유의 이름들은 기표들도 기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대지나 책이 될, 그러나 또한 니체 자신의 고통을 겪는 신체가 될 신체 위에 각인된inscribed 강도의 명칭이다: 역사의 모든 이름들, 그것이 나다. . . 일종의 유목주의nomadism 즉, 고유의 이름에 의해 명명된 강도들 내에서의 끊임없는 변위displacement, 단일한 신체에 의해 살아오고 경험된 동일한 시간에 상호 침투하는 강도들이 있다. 따라서, 강도는 신체 내에서 그리고 고유의 이름의 변화하는 외관 아래에서 유동적인 각인과 연관되어 있을 때에만 경험될 수 있으며, 따라서 고유의 이름은 항상 가면mask, 즉 그것의 작인을 가면 씌우는 가면이다.
아포리즘은 또한 세 번째 중요한 관계 ― 이 경우에는, 유머와 아이러니에 ― 가 있다. 웃지 않고 ― 자주, 풍부하게, 쾌활하게도 웃지 않고 ― 니체를 읽는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니체를 전혀 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니체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저항문화의 동일한 지평에 속한 다른 모든 작가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의 퇴폐decadence, 우리의 퇴보degeneration를 반영하는 것들 중 하나는, 사람들이 그 속에서 그들의 고통, 고독, 죄악을 표현하며 만남들을 드라마화할 필요를 느끼는 방식이다. 막스 브로트Max Brod는 카프카가 {심판The Trial}을 읽을 때, 관객들이 어떻게 미친 듯이 웃었는지를 자세히 이야기한다. 사실, 베케트Beckett 조차도 웃지 않고, 환희의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가지 않고 읽기는 어렵다. 정신분열적 웃음 또는 혁명적 쾌, 이것은 위대한 책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소한 나르시시즘의 고통, 죄악의 공포가 아니라. 우리는 이것을 초인의 희극, 신성한 익살이라 부를 수 있겠다. 위대한 책들이 추하고 절망적이거나 두려운 것들을 나타내 보일 때조차도, 말할 수 없는 환희가 항상 거기에서 튀어나온다. 그러하듯이, 모든 위대한 책들은 변이를 일으킨다; 그것들은 내일의 건강을 준다. 코드들이 혼란될 때, 사람들은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사유를 외부와의 접촉 하에 두게 되면, 사유는 자유의 공기를 띠고 디오니소스적 웃음을 자아낸다. 자주 일어나듯이, 니체는 자신이 느끼기에 메스껍고, 비천하며 비열한 어떤 것에 대면했음을 발견했을 때, 웃는다. ― 그리고 그는 어쨌든 가능하다면 그것을 과장하고 싶어한다. 그는 말하기를: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여라, 그것은 충분히 역겹지 않다; 또는 한편: 그것이 역겹기 때문에 놀랍고, 그것은 경이로운 것, 걸작, 독성 있는 꽃이다; 결국, "인간은 재미있게 되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니체가 예를 들어, 나쁜 양심[죄의식]bad conscience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하는 방법 ― 다루는 방법 ― 이다. 그러나 웃음의 의미를 가져본 적이 없는 헤겔주의적 주석가들, 내부성의 항존하는 주석가들은 말한다: 당신이 보듯이, 니체는 나쁜 양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신spirit의 전개에서의 한 계기로 만든다. 물론 그들은 위험을 감지하기 때문에, 니체가 이 정신성을 이해한 것을 서둘러 무시한다.
만일 니체가 정당한 오역을 허락한다면, 완전히 부당한 오역도 있는데 ― 진지성의 정신, 위엄의 정신, 짜라투스트라의 원숭이로부터 기원한 모든 오역들 ― 그것은 내부성의 숭배cult이다. 클로소프스키와 리오따르가 지적했듯이, 니체에게 있어서, 웃음은 항상 아이러니와 유머의 외부적 운동, 강도들의, 강렬한 양들quantities의 운동을 지시한다. 낮은 강도와 높은 강도 사이의 자유로운 유희가 있다; 낮은 강도는 가장 높은 강도를 침식할 수 있고, 심지어 가장 높은 강도만큼 높은 것이 될 수 있다. 강도의 규모에 따른 이러한 유희는, 니체에게 있어서 아이러니와 유머의 오르내림에 영향을 미칠 뿐 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경험을 구성하거나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아포리즘은 웃음과 쾌의 순수한 질료이다. 만일 우리가 아포리즘에서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유머와 아이러니의 분배가 무엇인지, 강도들의 분할이 무엇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의 최종적인 지점이 남았다. 국가 그리고 제국의 정초자들에 관한 {도덕의 계보학}에서의 훌륭한 구절로 되돌아 가보자. 거기에서 우리는 소위 아시아적 생산의 인간들을 만난다. 원시적 농촌 공동체의 기반 위에, 거대한 사업들을 조직하고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통치관료주의와 더불어, 이 전제 군주들despots은 모든 것을 과잉코드화하는 그들의 황제 기계들imperial machines을 구축한다("그들이 나타나는 곳이면 어디든, 곧 뭔가 새로운 것이 일어난다, 활기찬 지배 기구, 그 안에서 각 부분들과 기능들이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경계 지워지고 결정된다. . ."). 그럼에도, 이 텍스트가 다른 점들에서 구분되었을 두 힘들 ― 카프카가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구분하였던, 맞서기조차 하였던 두 힘들 ― 을 함께 묶지 않는지가 또한 의문스럽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시적인 분할segmented 공동체가 어떻게 다른 형태의 통치권을 부여하는지 ― 니체가 {계보학}의 제 2부에서 제기하였던 문제 ― 를 발견하려 할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엄밀하게 관련된 현상이지만 완전히 다른 사실이 생기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중앙에서는, 농촌 공동체들이 문필가들, 사제들, 공무원들과 더불어 전제 군주의 관료적 기계에 의해 흡수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변방에서는, 이러한 공동체들은 다른 종류의 모험을 감행한다. 그들은 또 다른 종류의, 이번은 유목적 집단, 유목적 전쟁 기계로 들어가며, 그들은 그들 자신을 과잉코드화overcodify되기를 승인하는 대신에 탈코드화하기 시작한다. 모든 그룹들이 떠난다; 그들은 유목민이 된다. 고고학자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유목주의를 최초의 상태가 아니라, 바깥과 이동에 대한 유혹으로 강제된 정주 그룹들에 의해 갑자기 발생된 모험으로 생각하도록 이끌어 왔었다. 전쟁 기계를 가진 유목민은 통치 기계를 지닌 전제 군주에 대항한다: 외재적인extrinsic 유목 집단은 내재적인intrinsic 독재자 집단에 대항한다. 그러면서도, 독재자의 목적은 유목 전쟁 기계를 통합하고, 내부화internalize하는 것이 될 것이고 유목민의 목적이 새로이 정복된 제국에 대한 통치를 발명하는 것이 될 것인데, 이것은 상관적이고 상호침투적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가 혼동스럽게 되는 지점까지 끊임없이 서로 대항한다.
철학적 담론은 제정imperial 집단으로부터 생기며, 무수한 변형들, 즉 우리를 제국의 설립에서 그리스의 도시로 이끌어 온 것과 동일한 변형들을 통과한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내에서도, 철학적 담론은 전제 군주와의(또는 적어도 전제 군주의 그림자 내에서), 제국주의와의, 사물들과 사람들의 통치와의 면밀한 관련 속에 남아 있었다(레오 스트로쓰L o Strauss와 코제브Koj ve는 이것의 다양한 증거들을 그들의 저작 {폭정에 관하여On Tyranny}에서 보여준다). 철학적 담론은 항상 본질적으로 법률, 제도들 그리고 계약들과 관련되어 왔다 ― 종합하면, 그것들은 통치권의 문제를 구성하며, 최초의 전제 국가들에서 근대의 민주주의들에 이르기까지 정주 민족들의 역사의 일부가 되어왔었다. "기표"는 진정 전제 군주의 마지막 철학적 변형이다. 그러나, 만일 니체가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가 저항-철학counter-philosophy으로서의 또 다른 종류의 담론을 생각해낸 최초의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담론은 무엇보다도 유목적이다; 그것의 진술들statements은 이동 전쟁 기계에 의한 산물들로 생각될 수 있으며, 합리적·통치적 기계, 순수 이성의 관료들로서의 철학자들에 의한 산물로 생각될 수는 없다. 니체가 그와 더불어 시작하는 새로운 정치(클로소프스키는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계급에 대한 책략이라 부른다.)의 도래를 알리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일 것이다.
유목민들이 우리의 정치권력 하에서 비참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는 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어떠한 먼 거리도 갈 것이고, 그들은 쉽게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니체는 그림자로 환원되고, 갖추어진 공간furnished room에서 갖추어진 공간으로 이동하는, 그런 유목민처럼 살았다. 그러나 유목민은 반드시 이동하는 자는 아니다: 어떤 여행들은 원래의 장소에서in situ 일어나며, 강도에서의 여행들이다. 역사적으로도, 유목민들은 반드시 이주민들처럼 이동해 다니는 이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동하지 않는다; 유목민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장소에 머무르며, 정착한 사람들의 코드들을 지속적으로 벗어나는 이들이다. 오늘날의 혁명에 있어서의 문제는, 당 또는 국가 장치의 전제적이고 관료적인 조직으로 전락하지 않으면서 개별적인 투쟁의 통일체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있다. 우리는 국가 장치를 재생산하지 않을 전쟁 기계, 내부적인 전제적 통일체를 부활시키지 않으며 바깥과의 관계를 가진 유목적 통일체를 찾는다. 아마도, 이것은 니체의 사상에서 가장 심오한 것이며, 적어도 그것이 아포리즘에서 나타나는 한에는 철학과의 단절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는 사고에서 전쟁 기계를, 유목적 힘을 만든다. 그리고, 비록 여행이 움직이지 않는 것일지라도, 비록 그것이 지각불가능한, 예기치 않은 그리고 은밀한 지점에서 일어날지라도, 우리는 자신에게 "오늘날 우리의 유목민, 우리의 진정한 니체주의자는 누구인가?"를 물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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