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즘 1
이진경 지음, 휴머니스트
차이의 철학과 역사유물론
제 생각이지만, 『천의 고원』은 아마도 20세기에 간행된 가장 ‘위대한’ 철학책 가운데 하나일 것이며, 또한 가장 아름다운 책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것이 보여주는 사유와 그것이 만들어낸 개념들의 새로움과 독창성, 그것을 표현하는 간결한, 그러면서도 익살스럽고 때론 환상적이며 때론 치밀하고 때론 허허로운 문장들이 그렇고, “만 미터 심해를 들여다본 고래의 충혈된 눈”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책-기계로 이용하여 새로운 무엇인가를 산출하는 것은 관두고 읽고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생소함이나 난해함만이 아니라, 접근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체(style)'의 문제도 있을 거예요. 들뢰즈 역시 나름의 독창적인 문체가 독창적 사상가의 전제 조건처럼 간주되고, 그런 문체를 만드는 데 필요하다면 문장을 돌리거나 비틀기도 하고, 장황한 설명이나 해설은 생략해버리기도 하는 프랑스에서 철학을 하는 사람이니 말입니다.
난해함의 또 하나의 이유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잡학’ 때문일 겁니다. 특히 이 책에는 정신분석학이나 철학, 문학, 언어학은 물론, 신화학, 민속학, 동물행동학, 경제학, 고고학, 음악, 미술사, 물리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온갖 ‘잡학’들이 다 동원됩니다. 이는 한편으로는 다양한 학문의 성과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사유를 펼치려는 생각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성과를 자신의 철학적 사유 안에 담으려는 생각에 따른 것일 겁니다.
들뢰즈나 스피노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가, 표상 없이 사유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표상을 통해서 지각하고 생각하며 말합니다. ‘의미’란 대개 그렇게 표상된 어떤 것을 지칭하지요. 그런데 ‘표상(representation)’이란 ‘다시 나타나게 하는 것(re-representation)’입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를 보고 ‘빨간 깃발’이라고 판단할 때, 우리는 단지 눈앞에 나타난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눈앞의 ‘빨간 깃발’은 그 자체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무언가 다른 어떤 것과 연관되어 떠오릅니다. 혹자는 거친 투우를 떠올릴 것이고, 혹자는 운동회의 홍군 깃발을 떠올릴 것이며, 혹자는 공산주의를 떠올릴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깃발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런 것들을 통해 다시 나타나는 거지요. 그리고 그런 다시 나타남은 언제나 자신이 갖고 있는 기존 관념의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포상을 통한 사유, 즉 표상적인 사유가 근본적으로 동일성에 의한 사유라는 것은 이런 뜻에서지요. 그것은 여러 사물들을 보면서 공통성을 추출하는 그런 사유(공통성의 추상으로서 추상 개념)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1980년에 씌어진 『천의 고원』이라는 책에 이르기까지, “둘이면서 하나인 동시에 그 이상인” 이 책의 저자들이 어떤 경로를 거쳤는지 간단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질 들뢰즈는 철학사를 전공한 철학자입니다. 일생 동안 거의 여행도 하지 않고, 인용된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책을 읽고 이용하며 사유했던, 편안하고 여유 있는 표정의 철학자지요. 그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펠릭스 가타리는 정신분석가로, 한때는 라캉의 영향 아래 있었고, 우리(J.Oury)등과 더불어 라 보르드 병원에서 집단요법이라는 실험적인 치료를 하기도 했던 의사지요. 가타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이미 전투적 좌익 활동가였고, 그래서 죽을 때까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전투적인 실천을 했던 전사였다는 평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활동가’입니다.
이렇게 다른 경력과 성격을 가진 이질적인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사유하고 함께 책을 쓰게 된 겁니다. 그 결과 아주 독창적이고 훌륭한 네 권의 책이 씌어집니다. 아시다시피 『안티 오이디푸스』『카프카』『천의 고원』『철학이란 무엇인가?』가 그것이지요. 나중에 『안티 오이디푸스』로 드러난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세간의 많은 비난을 샀다고 해요. 그 비난의 주된 내용은 전도가 양양한 철학자 들뢰즈가 가타리와 만남으로써 인생을 망쳐버렸다는 그런 것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런 비난은 두 사람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들뢰즈는 반대로 “나에게 정치가 무엇인지 가르쳐준 사람은 가타리와 푸코였다.”고 말하면서 가타리에 대한 애정을 반복해서 표시합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작업했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들뢰즈는, 한 사람은 굉장히 적게 말하고 한 사람은 굉장히 많이 말하는 관계였다고 해요.
『천의 고원』은 한마디로 ‘배치(agencement)’에 관한 책입니다. 배치란 흔히 사용하는 말이라 별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은 사물이나 사태를 바라보는 어떤 새로운 태도를 포함하고 있어요. 그걸 이해하려면 약간의 우회가 필요합니다. 그건 ‘계열화’라는 개념을 통과하는 겁니다. ‘계열화’란 개념은 주로 시간적인 선을 따라 진행되지만 공시적(共時的)인 차원에서의 계열화 역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처럼 공시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계열들을 ‘배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치 안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이웃 항과 접속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합니다. 물론 여러 기계가 접속되어 만들어진 하나의 배치가 그 자체로 다른 것과 관련하여 하나의 기계로 작동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접속하는 항이 달라지고, 작동하면서 그것이 절단하고 채취하는 흐름이 달라지면 동일한 항도 다른 기계가 됩니다. 가령 식당의 배치 안에서 입은 식기와 접속하여 영양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에는 ‘먹는 기계’지만, 강의실의 배치 안에서 여러분의 귀와 접속하여 소리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경우에는 ‘말하는 기계’가 되고, 침실의 배치 안에서 성기나 성감대와 접속하여 리비도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면 ‘섹스 기계’가 되며, 거식증 환자의 배치 안에서 밀어내는 식도와 접속하여 음식을 토하는 경우에는 ‘싸는 기계(항문 기계)’가 됩니다.
비로 이 점에서 배치의 개념은 역사유물론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맑스는 『임노동과 자본』이란 책에서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지요. 이는 계열화 내지 배치를 통해서만 어떤 항의 의미나 기능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지요. 이 말이 역사유물론의 기본명제라는 것은 모두 잘 아시는 바일 겁니다. 요컨대 맑스가 사회적 생산의 영역에서 배치의 역사이론을 선취했다고 할 수 있는 만큼,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것을 벗어나 기호나 사회관계는 물론, 얼굴이나 리듬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역사유물론의 영역을 확장하고 변환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천의 고원』ㅡ ‘고원’은 책 전체의 서론에 해당되는데, 이 ‘고원’에서는 ‘뿌리줄기’라는 뜻을 갖는 리좀(rhizome)을 통해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내재성(immanence)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1장, 2장…’처럼 각각의 장들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고, 그것이 ‘결론’으로 이어지며, 역으로 ‘결론’을 통해 앞에 등장한 여러 장들이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가 되는 고전적인 책의 구성방식에 대해 거리를 두고자 합니다. 그것은 리좀이란 이런저런 줄기들이 어떤 중심뿌리 없이 분기되고 접속되는 그런 상(狀)을 취하는데, 자신들이 쓰려는 책 또한 그런 리좀 상(狀)의 구도에 따라 만들려고 하고 있는 거지요. 그래서 이 책의 각 장은, 다른 것과 접속되고 이어질 수 있는 길을 이리저리 갖지만, 독립적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독자성을 갖고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각각의 장은 일종의 고원이고, 이 책 전체는 그런 고원들이 이리저리 이어지면서 연결되는, 하지만 어떤 하나의 결론으로 모든 논지와 문장을 끌고 가지는 않은 고원들의 ‘모호한(fuzzy) 집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ille Plateaux'이란 제목은 직역해서 ‘천의 고원’이라고 하긴 했지만, ‘수많은 고원들’이란 뜻이고 그래서 ‘수 천의 고원들’이라고 하는 게 더 적당한 그런 제목입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둘이서 함께 『안티 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자가 여러 명이었던 것처럼, 그것 또한 이미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접근해갔던 모든 것들을 가장 가까운 것에서 가장 먼 것에 이르기까지 이용했다.” 이는 어떤 책을 하나의 ‘저자’에 귀속시키는 것에 거리를 두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사실 이 책은 들뢰즈, 가타리라는 두 사람의 저작으로 간주되지만, 그 안에는 그들이 인용문의 형식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발언하고 있는 것이고, 인용은 없지만 이미 그들이 읽고 들은 수많은 저자들이 발언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그런 많은 발언들이 중첩된 연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여기에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쓴 사람이 단수일 경우에도 대상이 이미 복수라면, 책이 주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상도 마찬가지지요. 그렇다면 책이란 무엇인가? 저자들은 말합니다.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성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다.”라고 말입니다. 또한 상이한 상대속도를 갖는 흐름들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책은 하나의 다양체”라고도 말합니다.
무의식과 욕망 : 욕망하는 기계에서 욕망의 다양체로
매우 거칠게 말하는 게 되겠지만, 프로이트는 모든 욕망의 근저에서 성욕을 봅니다. 프로이트가 집요하게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모든 성욕은 본질적으로 어머니에 대한 성욕이고, 어머니와 자려는 욕망이며, 어머니의 남근이 되려는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의 명제가 욕망을 성욕으로 환원하는 것이었다면, 이 명제는 모든 성욕, 아니 모든 욕망을 어머니에 대한 욕망으로, 그리하여 남근으로 귀착되는 욕망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명제는 필연적으로 욕망의 억압을 말하는 명제를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인간은 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자려는 ‘동물적인 욕망’으로 인해 ‘야수’가 될 것이고, 인간이 문화나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찬양하는 모든 질서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경스럽고 끔찍한 욕망을 거세로 위협하며 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는 법과 질서, 문화, 문명을 대변하는 심급(審級)이고, 아버지에 의한 일차적인 욕망의 억압은 문명화된 모든 인간적 질서의 출발점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억압된다고 해도 욕망 자체가 사라지거나 해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억압된 채 무의식 깊숙한 곳에 남아서 꿈이나 환상 등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다시 나타나거나(re-present), 문학이나 예술에서처럼 암묵적 형태로 다시 나타나거나, 법적인 금지에서처럼 부정적 형태로 다시 나타납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해 직접적으로 나타날 수 없게 된 욕망은 이제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드러낼 수 있는 것과 드러낼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다양한 표상(representation)들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이디푸스나 햄릿에서 초현실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예술, 혹은 마치 발기한 남근처럼 우뚝 솟은 높은 건물들, 아니면 말실수나 농담 같은 다양한 언어적 상징들, 그리고 꿈이나 환상 같은 수많은 표상들이 바로 그런 무의식이 드러나고 표상되는 영역입니다. 이제 삶은 무의식이 펼쳐지는 극장이 되지요.
반면 들뢰즈와 기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와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을 정의합니다. 욕망을 성욕화하는 것도, 그것을 엄마-아빠-나의 오이디푸스적 가족 삼각형 안에 가두는 것도, 그리고 무의식의 표상들을 산출할 뿐인 극장들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무의식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무의식이란 상징이나 환상, 기호를 만들어내며 통상적인 현실을 통해 숨겨진 채 다시 나타나는 그런 실재가 아니라, 우리의 신체를 통해 작동하는 우리 자신의 욕망이고, 그런 욕망에 의해 생산되는 기계와 실천들의 집합이며, 그런 것을 변이시키고 변환시키는 변혁의 장이고, 그 모든 것의 질료로서 그 모든 욕망이 자리잡고 작동하며 물러서고 전진하는 기관 없는 신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분열 분석은 욕망의 배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기계들을, 그리고 그것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들을 구성하는 질료이기도 한 기관 없는 신체를 대상으로 합니다. 무의식이 때론 욕망 내지 욕망의 배치로 정의되기도 하고, 때로는 기관 없는 신체로 정의되기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말은 신체적인 모든 것, 신체적인 변용을 야기하는 모든 것, 그리고 그러한 신체와 결부된 언표행위 모두가 바로 무의식에 포함되며, 그 모두가 분열분석이 연구하고자 하는 대상이란 것을 뜻합니다.
이중분절, 혹은 지질학적 역사유물론
저자들의 어법으로 말하면, 지구는 어디든 지층화되어 있고 이중분절의 집게발에 의해 분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지층은 또한 나름대로 변이의 성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추상기계(抽象機械)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지층의 내적 조건을 이루는 외부에 의한 것이든, 모든 지층은 변이의 선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층은 상대적으로 안정성을 갖는 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떤 지층을 오직 하나의 동일성에 의해 포착합니다. 손은 손일 뿐이고 입은 입일 뿐이라는 거지요. 더구나 지층에 붙여놓은 이름은 그런 동일성을 더욱 강화합니다. 그 동일성의 표상 아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사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의 지층이 다른 지층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고 접속된 지층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지층이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절방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 지층의 변이능력에 대해 좀더 접근하기 쉬운 통로를 제공합니다. 숟가락을 든 손, 시청을 가리키는 손, 다른 유기체를 때리는 손, 애인의 몸을 더듬는 손, 이처럼 두 지층이 만나는 양상이 달라지면 동일한 손이 다른 기계가 됩니다. 이처럼 상이한 지층들이 계열화를 통해 정의되는 사물의 상태를 ‘배치(agencement)'라고 합니다.
배치가 지층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간-지층이었다면, 추상기계는 지층과 탈지층화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즉 지층들 뒤에 있다는 점에서 메타지층의 위치에 있는 셈입니다. 배치는 간-지층일 뿐만 아니라 메타지층이란 점에서 이미 변이의 선, 추상의 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체적인 배치는 항상 추상기계를 작동시키고 있으며, 역으로 추상기계는 항상 구체적인 배치를 통해서만 존재하고 작동합니다.
그렇지만 저자들은 추상기계를 우리가 구체적인 기계적 배치라고 부르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배치는 항상 탈영토화의 첨점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영토화하는 성분 또한 항상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배치가 작동시키는 탈영토화는 그 자체로는 항상 상대적 탈영토화에 머물 뿐입니다. 반면 추상기계의 탈영토화는 모든 지층에서 탈분절화하고 탈지층화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절대적 탈영토화를 향해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언어학의 외부 : 반음계주의적 언어학을 위하여
언어활동의 본질은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이나 의사를 전달하고 소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하도록 시키고 명령하는 것이라는 게 저자들의 공준(공리(公理)처럼 확실하지는 않으나, 원리로 인정되어 어떤 이론 전개에 기초가 되는 근본 명제)입니다. 이런 관점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더욱더 명확하게 말합니다. “언어활동의 기초단위인 언표는 명령어다.” 여기서 언표는 ‘에농세(enonce)’라는 말을 번역한 것인데, ‘진술하다, 서술하다’등을 의미하는 동사의 과거분사로서, 말해진 것, 진술된 것을 뜻하지요.
저자들은 말이든 글이든, 혹은 심지어 일정한 침묵조차도 모두 ‘언표행위의 배치’ 안에 있으며, 그러한 배치 안에서 나름의 의미를 획득한다고 봅니다. 언어활동의 기본단위인 언표는 ‘명령어’라는 명제 의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는 겁니다. 명령어란 프랑스어에서 암호나 슬로건을 뜻하지만, 직역하면 명령-어(word of order)란 뜻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명령어는 사실 직접 언표되기보다는 다른 언표에 실려서 간접적으로 전달되기에, ‘암호’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도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저자들은 명령어란 ‘암묵적 전제에 대해 모든 말이나 언표가 갖는 관계, 다시 말해서 언표를 통해 이루어지거나 그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화행(話行)에 대해 말이나 언표를 갖는 관계’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슬로건은 신체적 변환과 비신체적 변환의 교차점에서 특정한 ‘순간’ 작동하는 이런 명령어의 기능을 잘 보여줍니다. 저자들은 『공산당 선언서』의 마지막 장에 등장하는 유명한 슬로건(명령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는 프롤레타리아적 조건이 신체로 주어지기 이전에 대중으로부터 프롤레타리아적 계급을 추출하는 비신체적 변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그 슬로건(명령어) 하나로 맑스는 이전에 없던 계급을 창안했을 뿐만 아니라, 불특정한 대중을 새로운 계급으로 묶어내어 하나의 새로운 계급을 구성했다.”는 말입니다.
저자들은 언어활동 내지 언어를 보편성과 향상성, 불변성을 갖는 언어 내적인 구조로 환원할 게 아니라, 비언어적인 성분들을 포함하는 변이의 연속체로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반화된 반음계주의라는 개념은 이런 발상을 요약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 서게 되면, 법칙과 보편성이라는 관념을 포함하는 언어(Langue)와, 생활형식 내지 상황에 따라 그 언어를 사용해 말하고 글을 쓰는 것 사이에 어떤 근본적인 단절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소설은 작가에 의해 크게 규정되지만, 이 역시 특정한 언표행위의 배치 안에 있습니다. 가령 19세기 프랑스 소설은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고유한 서사형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작가와 서술자, 인물 및 사건을 관련짓는 특정한 표현형식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작가 개인이 발 딛고 서 있는 계급적 내지 신분적인 조건 등에 따라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서사의 스타일은 다시 제한되게 됩니다. 혹은 카프카처럼 아주 특이한 문체를 창안한 경우에도 그것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 이후 프라하에서 활동한 유대인이라는 복합적인 상황, 그리고 체코의 공식적인 언어였던 독일어의 건조하고 어눌한 스타일 등이 포함된 언표행위의 배치의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문체란 언어 안에서 언어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기호체제들 : 기호계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기호체제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표현의 모든 형식화를, 최소한 그 표현이 언어적인 한에서 기호체제라고 부른다. 하나의 기호체제는 하나의 기호계를 이룬다.” 표현형식이 언어적 형식을 취할 때 그것을 기호체제라고 정의한다는 겁니다. 이런 식의 개념은 사실 라캉이 말하는 상징계란 개념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고 하면서 구조화된 언어들이 갖는 힘을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말한 바 있지요.
그렇지만 다른 점은 라캉이 정관사(le)를 써서 상징계의 ‘단일성’과 ‘보편성’을 설정하고 있다면, 저자들은 부정관사(une)를 써서 다른 종류의 기호계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하나의 보편성 및 단일성을 갖는 기호계란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며, 나아가 이는 통상 언어학적 모델을 따르는 기호학에서 상징계라는 개념으로 기표적인 기호를 유일하고 특권적인 기호 형태로 간주하는 것 또한 겨냥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기호계 내지 기호체제의 개념을 통해서 저자들은 ‘일단’ 네 가지 상이한 기호체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표적 내지 의미적 기호체제, 전기표적 내지 전-의미적 기호체제, 반 기표적 내지 반-의미적 기호체제, 탈기표적 내지 탈-의미적 기호체제가 그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근대 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의 유명한 문구지요. 이렇게 하여 시작된 철학의 지반을, ‘나’라는 주체가 신에게서 독립하여 만들어진 것이란 점에서 ‘주체철학’이라고도 하지요. 요컨대 코기토는 ‘나’를 속이려는 신에게서, 신의 기표에게서 얼굴을 돌려 ‘나’ 자신을 사유의 새로운 지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체화 체제를 특징짓는 ‘주체화의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를 속이려는 신과 그에게서 교묘하게 얼굴을 돌리는 교활한 천재.
하지만 데카르트는 그처럼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를 하나의 동일한 ‘나’로 만듦으로써, 즉 두 개의 주체, 두 개의 ‘나’를 하나로 포갬으로써 ‘나’라는 존재의 확실성을 끄집어냅니다. 이로써 신에게서 얼굴을 돌렸던 탈영토화된 주체는 ‘존재하는 나’라는 언표주체로 재영토화됩니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나’라는 주체를,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 언표행위의 주체와 언표주체로 이중화하고는, 그 양자를 동일시하는 방식으로 포갬으로써 이중화된 주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확실한 출발점이 된다고 확신했던 이 의식적 이중체인 주체는 끊임없는 ‘소송’에 휘말리게 됩니다. 확실해야 하는 나, 나의 의식인 나, 내가 갖고 있는 생각으로서의 나가 확실한 나를 끊임없이 배신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데카르트는 코기토의 주체를 철학의 확고한 출발점으로 삼고자 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혹은 부정하려는 과정이 이후 20세기까지 이어지게 되지요.
두 개의 주체를 포개는 이런 코기토 식의 의식적 이중체는 어떤 지배적인 질서가 요구하는 규범이나 규칙에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메커니즘을 형성합니다. 코기토의 ‘나’와 달리 커플은 두 명의 주체로 구성됩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정신분석가와 환자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서 두 개의 주체는 하나의 주체를 이중화한 것이 아니라 마주보는 두 명의 주체고, 정염에 의해 서로에게 끌려가면서 결합되고 포개지는 이중체입니다. 따라서 이 경우 주체화의 점은 하나가 먼저 얼굴을 돌리고, 나중에 다른 하나가 그것을 호명하는 식으로 정의된다기보다는, 차라리 커플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 응답하는 식으로 정의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기호체제는 사실 순수하고 단일하지 않으며, 대개는 둘 이상이 섞여서 이루어진 혼성적 체제예요. 몇 가지 기호체제에 대해 설명한 것은 이러한 혼성의 양상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지요. 또한 이러한 혼성의 과정에서, 혹은 다른 배치 속에 어떤 기호체제가 도입될 때, 하나의 기호체제는 다른 기호체제로 변환되기도 합니다.
기관 없는 신체에 관하여 : “인간은 자신이 본래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관 없는 신체란 무엇인가? 기관 없는 신체는 알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알은 기관 없는 신체라고 해야 하지요. 기관 없는 신체가 ‘잠재성’ 차원의 개념이라는 점을 이해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드뢰즈가 베르그송을 원용하여 자주 말하듯이, 여기서 잠재성은 현실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란 점에서, 현실과 대립되는 개념인 가능성과 구별됩니다. 가능성이 현실이 아닌 것이라면 잠재성은 현실적인 것이며, 다만 지금 ‘현재화’되어 있는 것을 뜻하는 현재성과 대립될 뿐입니다.
잠재성의 차원을 주목한다는 것은 어떤 현실적인 것도 고정될 수 없고 확고부동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변화 상태에 있음을 보는 것이며, 현재적이고 지배적인 것의 확고함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되고 생성되는 새로운 힘을 보는 것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가 정확하게 이러한 관념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겁니다. 기관화되기 이전의 상태인 알을 통해서 가시적인 형태로 설명하긴 했지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알이라는 형태가 아니라, 신체적인 힘의 강밀도가 끊임없이 그 분포를 달리함에 따라 다른 기관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수정란이든 거북이의 알이든, 모든 알을 ‘기관 없는 신체’라고 정의하게 만드는 요인입니다.
그렇지만 기관 없는 신체의 문제는 단지 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젓가락질을 하려면 수저를 사용할 때와는 다른 근육을 사용해야 하고 이전과 다른 힘의 분포를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익숙하게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글씨를 쓰려면 또다시 손가락이나 손목의 관절은 물론, 필요한 근육을 새로운 운동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힘의 분포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강밀도의 분포가 만들어지면 손은 다른 종류의 ‘기관’이 됩니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는 알로 그려졌지만 단지 알이 아니라 손이고 발이며 눈이고 항문이며 입이고 피부며, 이런 탈지층화 운동에서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얼굴의 정치학 : 얼굴의 권력, 권력의 얼굴
사르트르는 지향성이라는 현상학적 관점에서 시선을 단순한 지각의 대상이나 지각의 통로로서의 눈(oel)과 구별합니다. 자아와 타자의 근본적 유대를 ‘대타존재’라는 명칭으로 포착하려고 했던 사르트르는 타자가 단지 나라는 주체의 대상이 아니면서도 또한 나에 대하여, 나를 위하여 나타나는 존재일 수 있는 가능성을 사유하려고 합니다. 이를 나와 타자의 ‘쌍생아적 출현’이라고 부르며, 여기서 ‘타인과 쌍을 이룬 존재’로의 지향성을 발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얼굴을 다루는 방식은 사르트르나 라캉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많이 다를 뿐만 아니라, 레비나스가 얼굴을 다루는 방식과도 많이 다릅니다. 그는 현상학적 지향성 개념이 담긴 시선을 통해서 얼굴을 정의하지 않으며, 반대로 그런 시선에 대한 얼굴의 일차성을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시선이 얼굴을 만드는 게 아니라 흰 벽과 검은 구멍의 조합과 배열이 얼굴들을 만드는 것이며, 그러한 배열을 통해 입에서 튀어나간 기호들에 의미를 부여하거나 마주보는 얼굴에 대해 동조와 공명을 요구하는 ‘표현기계’라는 것입니다.
얼굴을 본다는 것은 눈과 입 등으로 만들어진 ‘표정’을 본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얼굴을 뜻하는 프랑스어에는 표정이란 뜻도 담겨 있습니다. 이 말은 ‘본다’는 의미를 갖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얼굴이 표정이란 말과 동일한 단어라는 걸 염두에 둔다면, 머리와 얼굴의 차이는 분명해집니다. 머리는 표정에 의해 정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으로, 표정을 갖는 신체의 표면은 모두 얼굴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표정을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얼굴이 탄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굴을 머리와 구별하는 데 유용하고, 풍경으로서의 얼굴을 이해하는 데는 중요하지만, 얼굴 전체를 다루는 데는 불충분합니다. 가령 저자들이 얼굴이 없다고 말하는 이른바 ‘원시인’의 경우에도, 기쁨이 드러나거나 고통이 드러나는 ‘표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저자들이 말하는 얼굴이란, 자연스런 표정이 아니라 계산되고 만들어진 표정이고, 그것을 통해 의미의 흐름을 전제군주적 기표로 영토화하거나, 정염의 흐름을 주체성으로 영토화하는 권력이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얼굴이 만드는 고통의 표정, 슬픔의 표정, 기쁨의 표정은 자연적인 감정의 발현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계산되고 조직된 표정이며, 효과를 겨냥하여 만들어지는 ‘기호’들입니다.
들뢰즈와 기타리는 “얼굴은 개인적인 것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대로 그것은 개인들 사이에서 기호를 방사하고 고유한 명령어를 전달하는 방식이며, 언어적인 기호 못지 않게 그것을 위해 만들어지는, 그런 만큼 충분히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표정입니다. 그러한 계산된 표정을 통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나 방사하는 사람은 방사되는 기호에 대응하는 특정한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개인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에 존재하던 필연성의 결과가 바로 개인화”라고 해요. 개인적인 어떤 느낌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얼굴들을 조직하는 특정한 표현을 통해서, 그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함으로써 특정한 종류의 개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든 그것을 작동케 하는 것은 얼굴의 개별성이 아니라 계산의 결과나 효과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경제 및 권력의 조직화 문제다. 우리는 얼굴, 얼굴의 능력이 권력을 발생시킨다거나 그것을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특정한 권력의 배치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른 배치라면 그렇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정치다.”라는 저자들의 테제는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얼굴은 그것의 생산을 필요로 하는 권력 배치의 산물이란 점에서 그 자체로 권력과 결부된 것이고, 따라서 얼굴의 문제가 권력의 문제인 한, 얼굴 자체가 바로 정치라는 겁니다.
사건의 철학과 분열분석
『천의 고원』의 여덟 번째 고원은 소설에 대한 정의로 시작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시제의 질문이 소설과 콩트를 정의하는 질문입니다. 다른 많은 서사적인 예술들도 그렇지만, 특히 소설이나 콩트는 ‘사건’을 만들며 사건을 맴돌며 만들어집니다.
소설은 이미 일어난 어떤 것과 관련하여 현재를 사건화한다면, 콩트는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과 관련하여 현재를 사건화 합니다. 그리하여 대개 현재의 상태에서 시작하여 뜻밖의 어떤 사태에 도달하면서 끝이 납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하는 기대와 긴장을 갖고 읽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소설이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찾아가는 방식의 내러티브를 뜻하는 건 아닙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어떤 현재적 사건을 만드는 감추어진 어떤 것(비밀), 그 현재를 가능하게 했던 과거에 대해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는 콩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라는 소설의 질문과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라는 콩트의 질문이 보여주듯이, 사건화 하는 양상에서 소설이 대개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는 선을 따라 펼쳐진다면, 콩트는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선을 따라 펼쳐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현재와 과거를 연결하여 사건화 하는 방식은 후설(Husserl)의 개념을 빌려 ‘다시 당김(Retention)'과 결부되어 있다고 합니다. 반면 현재를 미래와 연결하는 선은 ‘미리 당김(Protention)'과 결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이 두 개념은 후설이 시간성을 구성하는 지향성(Intention)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들을 통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설과 콩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미 일어난 어떤 것,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은 방금 지나간 과거와 가까운 미래를 표시할 수 있기에, 그것들은(후설 의 말처럼) 현재 그 자체의 다시 당김과 미리 당김에 의해 하나를 이룬다. 현재를 활기 있게 하고, 현재와 동시적인 상이한 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이러한 구별은 정당한데, 하나는 현재와 함께 운동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현재)이 나타나자마자 과거로 내몰면서(소설), 동시에 미래를 연계시키는 것(콩트)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신체는 수많은 선들을 통과합니다. 아니, 거꾸로 말해야 정확할 듯합니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신체도 서로 교차하고 뒤섞이는 수많은 선들에 의해 횡단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선들은 그 특성과 작동방식 등에 의해 유형화한 선들의 집합이고 묶음입니다. 경직된 몰적 선분성의 선, 유연한 분자적 선분성의 선, 탈주선.
어쨌든 이처럼 다양한 선의 교차와 혼합, 연결과 끊어짐, 변환과 전변 등, 한마디로 선의 배치 내지 선의 양상을 대상으로 분석하는 것이 분열분석의 과제라고 합니다. 분열분석이 선의 배치를 대상으로 한다는 말은, 그 다양한 선들이 그려지고, 그 선들을 통해 분할되고 재분할되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실재계를 그 대상으로 한다는 말로 고쳐 쓸 수 있겠습니다.
분열분석은 삶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문제를 다루는 미시정치학과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몰적인 거대선분을 다루는 거시정치학 또한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일상적인 삶조차 탈주와 생성, 권력과 혁명의 문제로 파악하는 삶의 정치학이며, 그런 의미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의 ‘윤리학’이며, 맑스가 말한 것과 동일한 의미의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미시정치학과 선분성 : 거시정치와 미시정치
미시정치학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는 이 장에서 우리가 통상 익숙해져 있는 ‘정치학’의 주제와 관련하여 특히 주목할 만한 것 가운데 하나는 ‘대중(masse)'이라는 개념입니다. 계급이 몰적인 선분성의 선과 관련된 것이라면, 대중은 분자적인 선분성의 선 내지 분자적 흐름과 결부된 것입니다. “한 편으로는 변이, 탈영토화의 양자, 접속, 자극을 갖는 대중 내지 흐름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항적 조직화, 공명, 통접 내지 축적, 어떤 하나로의 초코드화를 갖는 계급 내지 선분들이 그것”입니다.
사실 계급과 대중이란 개념적으로 분명히 구별되진 않았지만, 맑스주의 혁명이론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어온 개념입니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동자 피억압민중에 대해서 사용되는 ‘대중’이란 개념을 좀더 확장해서 분자적인 운동, 분자적인 흐름을 형성하는 모든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대중’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흐름이 미시정치학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정치학의 중심문제라는 점에서 대중의 문제가 욕망 내지 믿음의 흐름, 혹은 화폐의 흐름 등과 같이 어떤 흐름을 선분적인 선 안에 포획하는, 선분성과 권력에 대한 문제로 변환되는 겁니다.
계급이란 분명히 거대한 몰적 이항성을 갖는 경직된 선분들입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그 두 계급 중 하나로 귀착될 다양한 중간 ‘층’들. 그렇지만 계급이란 그것을 실질적으로 구성하는 대중들이 없다면 공허한 개념일 것입니다. 그런데 대중의 흐름을 합류하게 하고 그들의 힘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통합하기 위해서 ‘계급’이란 개념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대중이란 개념이 계급과 아주 상이한 것이라는 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대중이란 활동이나 힘의 흐름이고, 조건에 따라 상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자적인 움직임과 결부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몰적 선분성은 모두 나쁘고, 분자적 선분성은 모두 좋다는, 미시정치학을 오도하는 가장 통상적인 오해에 대해 쐐기를 박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분자적 흐름을 그저 거칠고 단순하게 통합하는 몰적 통일성에 대한 지지로 해석된다면, 미시정치학은 통상적인 거시정치학으로 환원되고, 여기서 제기하려는 정치의 개념은 무의미한 군더더기가 되고 말 겁니다. 차라리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에서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를 배타적으로 선택하는 것을 벗어나는 것이고,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 교차되고 섞이는 양상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분자적 욕망에 기초한 몰적 정치를 가동시키는 것입니다.
“대중의 개념은 분자적인 개념으로서, 계급의 몰적인 선분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선분화 유형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계급들은 대중들을 분명히 구분하고, 그들을 응결시킨다. 또한 대중들은 계급들로부터 연원하며 거기서 흘러나온다.” 이런 점에서 계급과 대중이 다른 성질을 가지며 다른 차원에서 다른 양상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지도자들이 많은 경우 ‘대중운동’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켜야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좌파 조직들이 그 미시 파시즘을 은폐하는 마지막 형태는 아니다. 분자적이고 개인적이며 집합적인 것과 더불어, 파시스트는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 자신이 그것을 견지하고 배양하고 있으며, 그것을 소중하게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다만 몰적인 수준에서 반파시스트가 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거시정치와 구별되는 미시정치의 고유한 양상, 다시 말해서 미시정치학, 그것은 분자적 욕망과 결부된 정치학이고, 대중이라고 불리는 흐름의 정치학이며, 경직된 선분이 아니라 유연한 선분성의 선 위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에 대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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