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스피노자와 세 가지『윤리학』

나뭇잎숨결 2020. 2. 17. 18:50

스피노자와 세 가지『윤리학』

                                                                         질 들뢰즈


첫 번째 독해에서 ꡔ윤리학ꡕ는, 정의, 공리 공준, 정리, 증명, 系, 주석을 반복해서 통과하면서 그 거대한 과정에 모든 것을 연쇄시키는, 비길 데 없이 강하고 고요하게 거의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길고 연속적인 운동으로 보일 수 있다. 그것은 때로는 넓게 퍼져 나가고s'étaler 때로는 천 개의 지류들로 분지하는[분할되는] 강물과도 같다. 그것은 또 때로는 빨라지고 때로는 느려지는, 그러나 언제나 그 근원적인radicale 통일성을 긍정하는 강물과 같다. 그리고 스콜라적으로 보이는 스피노자의 라틴어는 영원한 강을 따라 가는 不老의(sans áge) 배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인다1). 그러나 정서emotions가 독자들을 덮치는[사로잡는] 순간, 혹은 두 번째 독해 이후에, 위의 두 가지 인상은 잘못되었음이 입증된다. 세계의 가장 위대한 책 중 하나인, 이 책은 우리가 처음에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 그것은 동질적이고, 직선적이고, 연속적이고, 고요하고, 항해가능한, 순수한 문체 없는 언어이다.

 

ꡔ윤리학ꡕ은 표현의 내용일 뿐만 아니라 표현의 형식이기도 한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 기호Signes 혹은 情動affects ; 관념Notion 혹은 개념 ; 본질Essences 혹은 지각. 그것들은, 현존[실존] 및 표현의 양태들이기도 한 세 종류의 인식[지식]에 상응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기호는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하나의 효과[결과]이다. 효과,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에 새기는 흔적이고, 다른 신체의 작용을 받고 있는 한에서의 한 신체의 상태이다 : 변용[촉발]된 신체의 본성을 지시하고 단지 변용시키는 신체의 본성만을 내포하는[감싸고 있는] 것은 하나의 변용(affection : affectio), 예컨대 태양이 우리 신체에 미치는 효과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idées, 감각작용sensations이나 지각작용perceptions, 열과 색깔에 대한 감각작용, 형태와 거리에 대한 지각작용을 통해 우리의 변용을 인식한다(태양은 우리 위에 있고, 쟁반 모양이며, 200피트 떨어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시간상의 한 계기에서의 우리의 상태를 표현하고 그를 통해 다른 유형의 기호들과 구별되므로, 그것들을 편의상 스칼라 기호(scalar signs)라고 부르자 : 현실적 상태(l'état actuel)는 언제나 우리의 지속의 절단이고, 그 자격으로 선행하는 상태―그것이 아무리 인접한 것이라 해도―와 관련해서 지속에 있어서의 우리의 현존의 증대augmentation 혹은 감소diminution, 팽창expansion 혹은 수축restriction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반성적 조작 속에서 두 가지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기 보다, 각각의 변용의 상태가 더 혹은 덜로의 이행을 결정하는 것이다 : 태양열은 나를 가득 채우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것의 열기[타는 듯한 느낌]가 나를 밀쳐 낸다. 따라서 변용은 한 신체의 나의 신체에 대한 일시적 효과일 뿐 아니라, 나의 고유한 지속에 대한 효과―즐거움 혹은 괴로움, 기쁨 혹은 슬픔―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행, 생성[되기], 상승montée, 하강chutes이고,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연속적인 능력puissance의 變異이다. 우리는 그것을 情動(affects : affectus)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변용, 감각작용, 지각작용 등과 같은 스칼라 기호가 아니라, 상승[성장]croissance 및 하강[쇠퇴]decroissance의 기호, 즉 (기쁨-슬픔의) 벡터 기호(signes vectorial)이다. 

      

사실, 훨씬 더 많은 유형의 기호들이 있다. 스칼라 기호의 네 가지 주된 유형이 있다. 첫 번째 것, 즉 오직 그 원인의 본성을 내포하기만 하는, 감각적 혹은 지각적인 물리적 효과는 본질적으로 지시적[표지적]indicatifs인 바,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고유한 본성을 지시한다. 두 번째로 유한한 우리의 본성은 그것을 변용시키는 것으로부터 이러저러한 선별된 특징들(직립vertical 동물 혹은 이성적 동물, 혹은 웃는 동물로서의 인간)을 붙잡는다[고정시킨다]retenir. 이것은 추상적 기호이다. 세 번째로, 기호는 언제나 하나의 효과이므로, 우리는 효과를 목적fin으로, 효과의 관념을 원인으로 간주[착각]한다(태양이 열을 낸다는chauffer 이유로, 우리는 태양이 우리를 따뜻하기réchauffer “위해서” 존재한다고 믿는다 ; 열매가 쓰다는 이유로, 아담은 그것을 먹으면 “안 된다”고 믿는다). 이것은 도덕의 효과(moral effects) 혹은 명령적 기호(imperative signes)이다 : 이 열매를 먹지 말아라! 햇볕을 쬐라(Mets-toi au soleil)! 마지막 스칼라 기호는 상상적 기호이다 : 우리의 감각작용과 지각작용은 그것들의 최종적[궁극적] 원인인 초감각적supra-sensibles 존재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역으로 우리는 이 존재들을 우리를 변용시키는[촉발하는] 것의 터무니없이 확대된 이미지로 형상화한다figurer(무한한 태양 혹은 군주Prince혹은 입법자로서의 신). 이것은 해석적(herméneutiques ou interprétatifs) 기호이다. 가장 위대한 기호 전문가인 예언자들은 추상적, 상상적, 해석적 기호들을 놀라운 방식을 결합[조합]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ꡔ신학-정치학 논고ꡕ의 유명한 장은 희극의 힘puissance을 그 분석의 깊이[심오함]profondeur와 결합한다. 따라서 다음과 부를 수 있는 네 가지의 변용의 스칼라 기호가 있다 : 감각적 표지, 논리적 도상, 도덕적 상징, 형이상학적 우상.

 

또한 두 종류의 정동의 벡터 기호가 있다. 그것들은 벡터가 증대의 벡터인지 감소의 벡터인지, 상승[성장]의 벡터인지 하강[쇠퇴]의 벡터인지, 기쁨의 벡터인지 슬픔의 벡터인지에 달려 있다. 이 두 종류의 기호는 증대하는 능력(puissances augmentatives)과 감소하는 예속(servitudes diminutives)이라고 불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 다시 세 번째 종류의 기호를 추가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변용이 우리의 능력을 동시에 증대 혹은 감소시킬 때, 하나의 변용이 우리를 기쁨과 슬픔으로 동시에 변용시킬[촉발할] 때, 애매하고 변동하는(오르락내리락 하는) 기호이다. 따라서 서로 조합되는[결합하는] 예닐곱 가지의 기호가 있다. 특히, 스칼라 기호는 반드시 벡터 기호와 조합된다. 정동은, 그것이 변용으로 환원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자신이 유래하는 변용을 전제한다. 

 

이 모든 기호들의 공통적 특징은 결합가능성(associablité), 가변성[변이가능성], 다의성équivocité 혹은 유비이다. 변용은 신체들 간의 결합[연합]association의 사슬chain에 따라 변화[변이]한다varier(태양은 점토를 굳게 하고 밀납을 녹인다. 말은 전사와 농민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다). 도덕적 정동 자체는 사람들에 따라 변화한다. 그리고 예언자들은 각각 자신들의 상상력이 그것에 응답하는 개인적 기호를 갖고 있다. 해석에 관해 말하면, 그것은 주어진 것과 주어지지 않은 것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가변적 결합association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다의적이다. 그것은 무한한 지성과 의지를 우리의 지성과 의지의 확대된agrandie 이미지로 신에게 부여한다prêter : 그것은 짖는 동물 개와 천상의 별자리 개 사이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다의적인 것이다. 말mots과 같은 기호가 관례적이라면, 이는 정확히 그것이 자연적 기호 위에서 작동하고, 단지 자연적 기호의 가변성과 이의성을 분류할 뿐이기 때문이다 : 관례적 기호는 가변적인 결합의 사슬에 대해 상대적인 常項constant을 고정시키는 추상이다. 따라서 관례적-자연적 구별은, 사회 상태와 자연의 상태가 그렇듯 기호들에 대해 규정적이지 않다 ; 벡터 기호조차, 보상(증대)과 처벌(감소)처럼 관례에 의존할 수 있다. 벡터 기호 일반, 즉 정동들은 정동들만큼이나 많은 가변적 결합에 착수한다 : 신체의 한 부분의 성장[상승]croissance은 다른 부분의 감소diminution가 될 수 있고, 한 부분의 예속인 것이 다른 부분의 능력일 수 있으며, 하강 뒤에 상승이 오거나 그 역일 수 있다. 

       

기호는 대상을 직접적인 지시체référent로 삼지 않는다. 서로를 參照하는[가리키는] 것은 신체의 상태들(변용들)과 능력의 변이들(정동들)이다. 기호들은 기호들을 參照한다. 기호들은 우연Hasard의 질서 혹은 신체들 간의 우발적인fortuite 마주침의 질서를 따르는, 신체들의 혼동된 혼합들과 능력의 모호한 변이들을 지시체로 갖는다. 기호는 효과이다 : 한 신체의 공간에 있어 다른 신체에 대한 효과 혹은 변용 ; 변용의 지속에 대한 효과 혹은 정동. 스토아학파를 따라서 스피노자는 인과성을 변별적인 두 사슬로 부숴 버린다 : 우리가 원인들을 그것들 사이에서 파악한다는 조건하에서, 효과들 자체 간의 효과들. 기호가 기호를 참조하듯이 효과는 효과를 참조한다 : 결과는 그것의 전제와 분리된다. 인과론적으로 뿐만 아니라 광학적으로도optiquement 효과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효과 혹은 기호는 신체의 표면에서, 언제나 두 신체 사이에서 움직이는(se jouer) 그림자들ombres이다. 그림자는 언제나 가장자리bordure에 있다. 다른 신체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신체이다. 우리가 신체들을 인식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드리운 그림자에 의해서이고,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신체를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그림자에 의해서이다. 기호는 우연히[무작위적으로] 충돌하는 사물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 속에서의 빛의 효과이다. 만일 스피노자가 라이프니쯔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면, 이는 바로크적 영감에 가까운 라이프니쯔가 어둠Sombre(“fuscum subnigrum) 속에서, 명료함-모호함, 색깔, 그리고 빛조차도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母體, 前提를 보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스피노자에게 있어 모든 것은 빛이고, 어둠은 그림자, 단지 빛의 효과, 즉 빛을 반사하거나(변용) 흡수하는(아펙투스) 신체들 위의 빛의 한계limite일 뿐이다 : 이것은 바로크보다 비잔틴에 가까운 것이다. 붉은 빛을 축적함으로써 그림자로부터 단계적으로 생겨 나는 빛 대신에, 우리는 푸른 그림자의 級[단계]을 창조하는 빛을 갖는다. 명료함-모호함은 그 자체 그림자의 밝게 함 혹은 어둡게 함의 효과이다 : 그것은 능력의 변이 혹은 명료함-모호함의 級을 구성하는 벡터-기호이다(능력의 증대는 밝게 함이고 능력의 감소는 어둡게 함이다). 

            

만일 우리가 ꡔ윤리학ꡕ의 두 번째 요소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기호들과의 결정적인 대립이 부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공통관념은 대상에 대한 개념이고 대상은 원인이다. 빛은 더 이상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신체들에 의해 반사되거나 흡수되지 않고, 내부[본질적인]intime 구조(織造fabrica)를 드러냄으로써 신체들을 투명하게 만든다. 이것이 빛의 두 번째 측면이다 ; 그리고 상상력이 다른 신체 위에 드리워진 한 신체의 그림자의 把握saisie에 불과한 반면, 지성은 신체의 구조에 대한 참된 捕捉appréhence이다. 여기서 다시 그것은 광학, 그러나 광학적 기하학의 문제이다. 실제로 구조는 기하학적이며 단단한 선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그것은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형성되고 해체[탈-형성]된다. 구조를 구성하는 것은 하나의 투명한 신체의 무한히 작은 부분들 간에 확립되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합성 관계이다. 부분들은 덜하든 더하든 무한하게 오기 때문에, 각각의 신체에는 무한한 관계들이 있다. 그 무한한 관계들은, 신체가 새로운 합성 관계 하에서 보다 큰 신체를 이루거나 반대로 보다 작은 신체들로 하여금 그것들이 합성하고 있는 관계로부터 벗어나게[다시 떠나게] 하는 방식으로 합성되고 분해된다. 양태들은 기하학적 구조이지만, 빛 속에서 가변적인 속도로 변형되고 해체[탈-형성]되는 변동하는[변덕스러운] 구조이다. 구조는 리듬, 즉 형상들figures의 관계를 합성하고 분해하는 형상들의 연결(앙센느망)이다. 구조는 관계들이 해체될 때는 신체들 간의 부조화[불일치]disconvenance의 원인이고, 관계들이 새롭게 합성될 때는 조화[일치]convenacne의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적인 이중의 방향direction이다. 카일과 림프는, 독이 혈액을 분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합성 관계 하에서 혈액을 구성하는 두 가지 관계 하에서 취해진 두 개의 신체이다. 만일 내가 헤엄치거나 춤추는 것을 배우려면, 나의 운동[움직임]과 정지, 나의 빠름과 느림이 더 혹은 덜 지속가능한 조절adjustment을 따르면서suivant 바다 혹은 파트너의 리듬과 공통적인 리듬을 탈 필요가 있다. 구조는 언제나 다수의 신체를 공통적으로 갖고 있으며, 대상에 대한 개념 즉 공통 관념을 지시[참조]한다. 구조 혹은 대상은 적어도 두 신체로 형성되고, 그 두 신체 각각은 다시 둘 혹은 다수의 신체로 형성되며, 그렇게 무한히 나아간다. 반면에 그렇게 무한히 쪼개진 신체들은 다른 의미/방향sens으로는 더욱 더 큰 신체로 통일되어uniser, 전체 자연(Nature entière)이라는 유일무이한unique 대상, 무한히 변형가능하고 해체[탈-형성]가능한 구조, 보편적 리듬, 전체 자연의 얼굴(facies totius Naturae), 무한 양태로까지 합성된다. 공통관념들은 보편적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적어도 두 신체들 혹은 가능한 모든 신체들(공간 속에 있는, 운동중이거나 정지중인 모든 신체들)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므로, 그에 따라 공통관념들은 더 혹은 덜 보편적이다.

 

그렇게 이해할 때, 양태들은 投射들projections이다. 혹은 그보다 한 대상의 변이들은 운동 및 정지의 관계를 그것들의 불변항invariant(內旋involution)으로 감싸고 있는envelopper 투사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관계들은 매 순간 변이하는 질서 속에서 무한히, 다른 모든 관계들로 채워지므로[보충되므로]se complète, 이 질서는 매 순간 전체 자연의 얼굴 혹은 모든 관계들의 관계를 감싸고 있는 프로필 혹은 투사이다2).

 

빛의 투사로서의 양태들은 색들, 채색하는 원인들(causes colorantes)과 동등하다. 색들은, 각각의 색이 극한에서 모든 색을 재구성하도록 하는, 그리고 모든 색들이 합성의 질서에 따라 백색(무한 양태) 속에서 재결합되거나 분해의 질서 속에서 백색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보색[상보성] 관계 및 대비contrast 관계로 진입한다. 각각의 색들에 대해 괴테가 백색에 대해 말한 것을 말할 필요가 있다 : 그것은 순수 투명성에 고유한 불투명성이다. 단단하고 곧은(직선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채색된다. 그것은 빛이 신체를 투명하게 만들 때 드러나는 불투명성이기 때문이다. 색과 그림자 간의, 채색하는 원인과 그림자의 효과 간의 본성의 차이는 그런 식으로 긍정된다. 하나는 빛을 적합하게 완성하고terminer 다른 하나는 부적합함 속에서 빛을 제거한다[소멸시킨다]abolir. 베르미르Vermeer에 대해 우리는, 그가 명료함-모호함을 색의 상보성과 대비로 대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림자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림자가, 원인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isolable 효과, 분리된 결과, 색들 및 색들의 관계와 구별되는 외래적인 기호들로 머무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베르미르에게서, 그림자를 발생시키는 빛의 심층을 프레임화하고frame 경계짓기border 위해, 그림자가 떨어져 나오고se détacher, 앞으로 가져가지는 것을 본다(“우유를 쏟는 하녀”, “진주목걸이를 한 젋은 부인”, “러브레터”). 이 때문에 베르미르는 명료함-모호함의 전통과 대립한다 ; 그리고 모든 점에서 스피노자는 렘브란트보다 베르미르에게 무한히 가까운 자리에 있다.

 

따라서 기호들과 개념들 간의 구별은 Eschyle에서 만큼이나 환원불가능하고 극복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 “그는 더 이상 소리없는muet 언어 속에서나 산봉우리cime에서 타오르는 불의 연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명료한 용어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기호들 혹은 정동들affects은 부적합한 관념들이고 수동정념들passions이다 ; 공통관념들 혹은 개념들은 그로부터 참된[진정한] 능동작용actions이 뒤따르는[파생하는] 적합한 관념들이다. 우리가 인과성의 틈새(분열)clivage에 관계된다면se rapporter, 효과들이 효과들을 參照하는 것처럼 기호들은 기호들을 참조한다. 물리적인 신체들의 우연한 마주침과 같은 질서에 의존하는 결합association의 사슬에 따라서 말이다. 그러나 개념들이 개념들을, 원인들이 원인들을 참조하는 한, 이는 관계 혹은 비례proportions의 필연적 질서에 의해, 그것들의 변형 혹은 해체[탈-형성]의 정해진 연쇄에 의해 규정[결정]되는, 자동적이라고 얘기되는 연결enchaînement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 것과는 반대로, 기호들 혹은 정동들affects은 ꡔ윤리학ꡕ의 적극적 요소들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으며, 더욱이 표현의 형태는 더욱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호들이 구성하는 인식의 종류(유)는 거의 인식이 아니며, 오히려 경험이다. 우리는 그 경험에서 신체들 간의 혼합의 혼동된 관념들, 그러한 혼합을 피하고 다른 것을 찾으라는 난폭한brutes 명령들, 그리고 이 상황들에 대한 망상적인 해석들을 우연히 재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표현의 형태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동적인affectif 질료적 언어이고, 개념의 담론보다는 외침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므로 기호-정동이 ꡔ윤리학ꡕ에 개입한다면, 이는 단지 혹독하게 비판되고, 고발되기 위해서, 그리고 빛을 되받아 쏘거나 아니면 삼켜 버리는 그것들의 밤nuit으로 되돌려 보내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다. ꡔ윤리학ꡕ 2부는 가장 보편적인 것(모든 신체들에 합당한convenir à 것들)에 의해 시작함으로써 공통관념들을 설명한다 : 그것은 개념들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가정한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공통관념들이 기호들에 아무 것도 빚지고 있지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가 어떻게 우리는 하나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이르는지, 혹은 어떻게 우리는 결과에서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를 물을 때, 적어도 특정한 기호들이 발판(도약대)으로 기능하고, 특정한 정동들이 우리에게 필연적인 비약(도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5부). 신체들 간의 우연한(au hasard) 마주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것과 일치하고convenir avec,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즉 우리 능력을 증대시키는 특정한 신체의 관념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각각에 대해 틀림없이 가변적인 어떤 지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능력이 충분히 증대되었을 때만, 우리는 관계들의 합성의 질서에 따라 점점 더 큰 개념에 도달할 각오를 하고 가장 덜 보편적인 것(우리의 신체의 하나의 다른 신체와의 일치)에서 출발함으로써, 이 능력의 소유를 시작하고, 하나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쁨, 능력의 증대의 벡터 기호를 해방시키고dégager 고통과 능력의 감소의 기호를 억제하는repousser, 수동적인 정동들과 그것들이 의존하는 관념들의 선택이 있다 : 이러한 정동의 선택은 첫 번째 종류의 인식으로부터 벗어나서 충분한 능력을 획득함으로써 개념에 도달하기 위한 조건이다. 증대의 기호들은 수동정념들로 머무르며, 그것들이 전제하는 관념들은 부적합한 채로 머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관념들notions의 전조[선행형태]précurseurs, 어두운 전조이다. 더욱이 공통 관념들이 획득될 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능동작용들이 새로운 유형의 능동적 정동으로서 파생된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부적합한 관념들과 수동적 정동, 즉 기호들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불가피한 슬픔조차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존속할 것이다, 그것들은 관념들을 이중화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관념들과 능동작용들을 위해 배타적이고 전제적인[불가항력적인]tyrannique 성격을 상실할 것이다. 따라서 기호들에는 개념들을 예비하는 동시에 이중화하는 어떤 것이 있다. 광선들은 그림자 속에서 계속 작동하는 과정들processus에 의해 예비되는 동시에 그것들을 동반한다. 스피노자에게 명료함-모호함[明暗]의 가치가 재도입된다. 왜냐햐면 수동정념으로서의 기쁨은 우리를 관념들의 빛으로 인도하는 밝게 함[解明]의 기호이다. 그리고 ꡔ윤리학ꡕ은 수동적이고 기호에 의한 표현 형식―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첫 번째 종류의 인식에 속박된 채로 머물러 있게 될 불가결한indispensable 선택을 실행할opérer 수 있을 뿐인 표현 형식―없이는 나아갈 수 없다. 

 

이 선택은 대단히 곤란하고 어렵다. 기쁨과 슬픔, 증대와 감소, 밝게 함과 어둡게 함은 많은 경우에 애매하고 부분적이고 변화무쌍하며, 서로서로 뒤얽혀 있다. 그리고 특히 자신들의 권력Pouvoir을 슬픔과 고통 위에, 다른 사람들의 능력의 감소 위에, 세상을 어둡게 하는 것 위에다만 세울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 그들은 마치 슬픔이 기쁨의 전제, 그리고 이미 기쁨 그 자체인 것처럼 꾸민다. 그들은 슬픔의, 예속의, 무능력의, 죽음의 의식(숭배)을 창시한다. 그들은 슬픔의 기호들을 유포하고 부과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자신들이 병들게 한[부패시킨] 영혼들에게 이상과 기쁨으로 제시한다. 그리하여 지옥의 커플인 <전제군주>와 <사제>는 삶의 끔찍한 재판관들이 된다. 따라서 개념의 발생의 첫 번째 조건으로서 기호들 혹은 정동들의 선택은 각자가 자신(이성Raison)에 대해 행해야 하는 개인적 노력일 뿐만 아니라, 죽을 위험을 무릅쓰는 정념의[수동적] 전쟁[투쟁], 억누를 수 없는inexpiable 정동의affectif 전투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고 類를 변화시키도록 만드는 약간의 기쁨이라도 구제되도록, 기호들이 기호들과 맞서고(대결하고), 정동이 정동과 충돌하는 전투. 기호들의 언어의 외침은 이러한 수동정념들, 기쁨과 슬픔, 능력의 증대와 감소의 전투를 표식한다.

 

ꡔ윤리학ꡕ은, 적어도 ꡔ윤리학ꡕ의 대부분은 가장 일반적인 것으로 시작해서, 중단 없이 그것들의 결론을 전개함으로써, 공통관념들로 쓰여진다. 그것은 이미 획득되었거나 주어져 있는 공통관념들을 전제한다. ꡔ윤리학ꡕ은 개념의 담론이다. 그것은 담론적이고 연역적인 체계이다. 이로부터 고요하면서 강력한puissant 長江의 측면이 나온다. 정의, 공리, 공준, 정리, 증명, 계는 거대한 흐름cours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요소들 중 하나 혹은 다른 하나가 부적합한 관념과 정념을 다룰 때, 이는 그것들의 불충분함을 고발하고dénouncer, 가능한 한 그것들을 억누르기 위해서이다(그 수만큼의 강둑 위의 침천물들처럼). 그러나 외관상으로만 선행하는 것들과 동일한 본성을 지닌 다른 요소가 있다. 그것은 주석이다. 주석은 증명의 연쇄 속에 삽입되지만 독자는 그것이 전적으로 다른 톤을 갖는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린다. 그것은 다른 스타일, 거의 다른 랑그langue이다. 그것은 그림자 속에서 작동하고, 우리가 공통관념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과 반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우리의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과 증대시키는 것, 우리의 예속의 슬픔의 기호와 우리의 자유의 기쁨의 기호를 식별하려고 시도한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의 감소 뒤에 달라붙어 있는 인물들, 슬픔을 보유하고 퍼뜨리는데 관심이 있는 인물들, 전제군주와 사제들을 고발한다. 그것은 개념들을 형성하고 정동을 능동작용으로 변환시키기 위해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증대시킨 새로운 인간의 기호 혹은 조건을 알린다.

주석은 명시적이고ostensf 논쟁적이다. 만일 주석이 보다 자주 주석을 참조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주석 자체가 증명 및 담론의 연쇄와 구별되는 특수한spécifique 연쇄를 구성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증명은 주석을 참조하지 않고, 다른 증명, 정의, 공리, 공준을 참조한다. 만일 주석이 증명의 사슬 속에 삽입된다면, 이는 주석이 증명의 사슬의 일부를 형성하기 때문이기보다는, 그것의 고유한 본성에 힘입어 그 사슬을 절단couper 및 재절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증명적 요소의 사슬, 강물처럼 흐르는 거대한 연속적인 사슬을 간헐적으로 가로막는interrompre, 불연속적이고, 은밀하며souterraine, 폭발하는[화산같은]voclanique, 부서진 사슬 같은 것이다. 각각의 주석은 먼 거리에서 증명의 흐름을 가로질러, 다른 것들과 신호를 교환하는 등대와 같다. 그것은 물의 언어와 구별되는 불의 언어와 같다. 그것은 물론 외관상으로는 동일한 라틴어이지만, 우리는 주석에서 라틴어가 히브리어로 번역된다고 믿지 않는다. 주석은 독자적으로, 스피노자의 안티-바이블인 듯한 <분노>와 <웃음>의 책을 형성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보다 가시적인 <윤리학>, 개념의 책을 수반하며, 자신만을 위해 폭발 지점에서 솟아오를 뿐인 <기호들>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이중적 <윤리학>의 구성[합성]에 있어 완전히 적극적인 요소이고 자율적인 표현의 형식이다. 두 권의 책, 두 가지 ꡔ윤리학ꡕ이 공존한다. 하나는 투명성의 빛으로 정복된 자유로운 관념을 파생시키는 것이고, 반면에 다른 하나는 신체들의 모호한 혼합의 가장 깊은 층위에서 예속과 해방 간의 전투를 수행하는 것이다. 신의 언어의 두 가지 버전처럼,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의미를 갖지만, 동일한 랑그를 갖지는 않는 적어도 두 가지 ꡔ윤리학ꡕ.

 

Robert Sasso는 주석의 사슬과 명제의 연결 간의 본성의 차이의 원리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증명의 연결 그 자체를, 소용돌이와 돌발사고로부터 보호되어 펼쳐지는, 연속적이고 직선적인 동질적 흐름cours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단지 주석이 증명의 연쇄suite에 돌입[난입]irruption함으로써, 여기저기에서 그 흐름을 깨뜨리기 때문만이 아니다. Sasso는 극히 가변적인 계기―때로는 보다 느리고, 때로는 보다 빠른, 정의, 공리, 공준, 증명―를 통과하는 것은 개념 자체라고 말한다. 우리는 가속되고 감속되는 정박지station, 支流bras, 彎曲coudes, 環狀線boucles들을 구별할 수 있다. 거대한 부분들의 처음과 끝을 표식하는 서문과 부록은 강물 위의 배가 새 승객을 태우고 옛 승객을 내려주는 정박지 같은 것이다 ; 거기에서는 종종 증명들과 주석들의 합류[교차]jontion가 이루어진다. 支流는 하나의 동일한 명제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증명될 수 있을 때 나타난다. 그리고 만곡들은 강물의 방향orientation의 변화가 있을 때 나타난다 : 하나의 유일한 실체가 모든 속성들에 대해 상정되는 반면, 상류에서[생산의 前단계] 각각의 속성이 하나의, 오직 하나의 실체를 가질 수 있는 것은 만곡들에 의해서이다. 동일한 방식으로 만곡은 신체들의 물리학을 도입한다. 系[보충]들은 자신의 편에서[자신을 위해], 환상선 내에서 증명된 명제로 회귀하는 파생명제들을 구성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증명들의 계열은, 강이 그 흐름을 넓히고 좁히는 데 따르는 상대적인 빠름과 느림을 표시한다témoigner : 예를 들어, 스피노자는 언제나 우리가 신, 신의 관념에서 시작할 수는 없지만, 그것에 가능한 한 빨리(le plus vite possible) 도달해 한다고 주장한다. 구별할 수 있는 많은 다른 증명의 형상들figures이 있다. 그러나, 그 변이들이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의 모든 상태를 가로질러[모든 상태 전체에 걸쳐] 영속하는perdurer 동일한 강, 개념의 ꡔ윤리학ꡕ 혹은 제2종의 인식을 형성하는 동일한 강이 문제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석의 다른 요소들과의 차이가 최종 심급에서 증명적 요소들 간의 차이들을 설명해 주기 때문에, 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이유이다. 주석들의 은밀한[지하의] 작용 없이, 강은 그토록 많은 모험[진기한 사건]aventure들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증명들을 박자에 맞추어 연주하고scander 소용돌이[전회]들tournants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주석들이다. 그 특수성 속에 있는 기호들의 ꡔ윤리학ꡕ을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그 다채로움[변이상]variété 안에 있는 개념의 ꡔ윤리학ꡕ 전체이다. 증명의 흐름의 다채로움은 주석의 충격[떨림]secousses과 압력[부력 ; 돌발]poussées에 項對項으로 상응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을 전제하고 감싸고 있다.

그러나 아마 5부에 의해 표상되고, 5부 혹은 적어도 5부의 상당 부분에 육화된 세 번째 ꡔ윤리학ꡕ 또한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흐름[과정] 속에서 공존하는 다른 두 가지 것과 같지 않다 ; 그것은 정확한 장소, 즉 마지막 장소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작용하는 중심[근원]foyer, 초점point-foyer으로서,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5부를 다른 모든 것들과 공존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 우리는 그것에 도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언제나(tout le temps), 모든 시간 동안에(de tout temps),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논리학의 세 번째 요소이다 : 더 이상 기호나 정동도, 개념도 아닌, <본질> 혹은 <특이성>, <지각>. 그것은 빛의 세 번째 상태이다. 더 이상 그림자의 기호도 색으로서의 빛도 아닌, 그-자체로서의(en elle-même), 그-자신에 의한(pour elle-même) 빛. 공통관념들(개념들)은 신체들을 투과[관통]하며traverser 그것을 투명하게 만드는 빛에 의해 드러난다 ; 따라서 그것들은, 데자르그의 방식으로 투사 기하학의 요청을 따르는 투사 공간에서 변형가능하고 해체[탈-형성]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만큼 더 생생한vivant 기하학적 형상[도형]figures 혹은 구조(직조fabrica)를 참조한다. 그러나 본질은 전혀 다른 본성을 갖는다 : 실체적인 <發光物[光源]le Lumineux>에 의해 생산된 빛의 순수 형상들figures(빛에 의해 드러나는 기하학적 형상들이 아닌)3). 우리는 종종 플라톤주의적이고 심지어 데카르트주의적이기조차한 이데아idées가 촉각-시각적인(tactilo-optiques)채로 머문다는 것에 주목했었다 : 순수 시각적인[광학적인] 세계로 상승하는 것은 플라톤과 관련해서 플로티누스, 데카르트와 관련해서 스피노자가 하는 것이다. 공통관념들은 투사 관계와 관련된 한에서 이미 시각적[광학적] 형상들이다(그것들이 여전히 촉각적 지시체의 최소치를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본질들은 빛의 순수 형상들이다 : 그것들은 그-자체로 “관조들contemplations”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신의 통일성, 주체 혹은 대상의 통일성 속에서, 그것들이 관조되는 만큼 관조한다(지각). 공통관념들은 상대 속도를 구성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참조한다 ; 반대로 본질들은 투사에 의해 공간을 구성[합성]하는 것이 아니라, 한 차례의[동시에], 단 한 번의 움직임[加擊]coup으로 공간을 가득 채우는 절대 속도이다4). Jules Lagneau의 가장 큰 기여는, 비록 그가 절대 속도를 상대 속도로 환원시키긴 했지만, 스피노자가 생각한 것과 같은 사유에 있어 속도의 중요성을 지적한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본질의 두 가지 특징이다 : 더 이상 상대 속도가 아닌 않은 절대 속도, 더 이상 빛에 의해 드러나는 기하학적 형상들이 아닌 빛의 형상들. 상대 속도, 그것은 변용affections과 정동affects의 속도이다 : 공간 속에서의 한 신체의 다른 신체에 대한 작용의 속도, 지속 속에서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의 속도. 관념notion이 파악하는 것, 그것은 상대 속도들 간의 관계이다. 그러나 절대 속도, 그것은 본질이 영원성 속에서 자신의 정동affects과 변용을 조망하는survole 방식이다(능력puissance의 속도).

5부가 단독으로 세 번째 ꡔ윤리학ꡕ을 구성하려면, 특수한 대상을 갖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다른 두 가지와 구별되는 다른 방법을 채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은 것처럼 보인다. 5부는 단지 증명과 주석의 요소들만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기하학적 방법이 여기서 거칠고[야생적이고]sauvage 이례적인 모습을 취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5부가 단지 잠정적 버전, 초고라고 믿게 만들 수 있다 : 명제와 증명들은 대단히 난폭한 단절[균열]hiatus에 의해 횡단되고, 아주 많은 생략과 모순을 포함[허용]하므로, 삼단논법은 단순한 “생략추리법enthymèmes”에 의해 대체된 것처럼 보인다5). 그리고 5부를 읽어 나감에 따라, 우리는 이러한 특징들traits이 방법의 실행에 있어서의 불완전함이나 축약raccourcis이 아니라, 모든 추론discursivité 및 연역의 질서를 넘어서는[능가하는]dépasser 한에서 완전하게 본질들에 합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단순한 사실의 절차procédé가 아니라 권리상의 과정procédure 전체이다. 이는 개념의 층위에서, 기하학적 방법이 충만함complétude 및 포화상태saturation를 요청하는설명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 이것이 공통관념들이, 어떻게 우리가 하나의 공통관념에 효과적으로 도달하는지 물을 필요 없이, 하나의 공리적인[자명한]axiomatic 것에서처럼, 가장 보편적인 것에서 출발함으로써 그-자체로(pour elles-mêmes) 설명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5부의 기하학적 방법은, 설명하는 이성적 인간이 아닌 찾아다니는 개의 방식으로, 간격intervalles과 도약, 단절hiatus과 축약contraction에 의해 나아가는 발명의 방법이다. 아마도 그것은 “결정불가능한” 것에서 작동하는 만큼 모든 증명을 넘어선다.

 

수학자들이 공리적인 것의 구성에 몰두하지 않을 때, 그들의 발명 스타일은 기묘한 권력을 제시하고, 연역적 연결관계는 거대한 불연속에 의해 파괴되거나 반대로 폭력적으로 축약된다. 누구도 데자르그의 천재성을 부정하지 않지만, Huygens나 데카르트 같은 수학자들은 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모든 평면이 한 점의 “極線”이고 모든 점이 한 평면의 “극”이라는 것에 대한 증명은 너무 빨라서 그 증명이 건너뛰는franchir 모든 것을 채울 수는 없다. 누구도 이 덜컹거리고[요동치고], 튀어오르며, 좌충우돌하는 사유―수학에서 특이한 본질들을 파악하는 사유―를, 그 자신이 또한 자기 동료들의 몰이해와 마주쳤던, Evariste Galois보다 더 잘 묘사하지는 못했다 : 분석가들은 “환원하지 않고, 조합하고 구성[합성]한다 ; 그들이 진리에 도달할 때, 그것은 그들이 고꾸라지는 모든 측면에서 그것과 충돌함으로써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특징들은, “보다 빨리” 나아가기 위한, 설명에 있어서의 단순한 불완전성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속도를 정복하는 새로운 사유의 질서의 힘으로 등장한다. 5부livreⅤ는, 처음 4부의 흐름에서 공통관념들에 의해 전개되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러한 사유를 표시[입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블랑쇼가 말하듯, 책들livres이 “책의 부재”(혹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보다 비밀스런 책)를 상관물로 갖는다면, 5부는 기호들과 개념들이 사라지고, 사물들이 공간의 간격들을 건너뛰면서 자기 자신에 의해(par elles-mêmes), 자기 자신의 힘으로(pour elles-mêmes) 쓰는écrier 이 부재 혹은 이 비밀일 수 있다. 

   

명제 10을 보자 : “우리가 우리 본성에 반하는 정동들에 의해 고통받지 않는 한, 우리는 지성에 상관적인 질서를 따르는 신체의 변용들을 질서짓고 연결할 권력을 갖는다.” 그것은 부차적인[종속된] 것과 주요한[원리적인] 것 사이에서 나타나는 거대한 단층[균열]faille, 간격intervalle이다 ; 우리의 본성에 반하는 정동들은, 우리의 신체와 불일치하는disconvenir avec 신체들에 의존하므로, 무엇보다도 우리가 공통관념들을 형성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 반대로 하나의 신체가 우리 신체와 일치하고 우리의 능력(기쁨)을 증대시킬 때마다, 그로부터 변용들의 능동적인 질서 및 연결이 파생하는 두 신체에 공통적인 관념이 형성될 수 있다. 이 자발적으로 패인 단층 속에서, 암시적인 現前만을 가지며, 우리가 결여된 사슬을 재구성하는 한에서만 그 둘 모두가 등장하는, 두 신체 간의 일치의 관념들, 제한된 공통관념notion commune의 관념들idées이다 : 이중의 간격. 만일 이 재구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만일 이 흰 바탕blanc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증명은 결론지어지지 않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미결정의 상태로 머무를 것이다 : 어떻게 우리는 어떤 공통관념을 형성하는데 이를 수 있는가? 그리고 왜 가장 덜 보편적인 것의 관념(우리의 신체와 다른 하나의 신체에 공통적인)이 문제인가[중요한가]? 간격, 단절[틈새]의 기능은 멀리 떨어져 있는 항들을 최대한 근접시키고, 그럼으로써 절대적 조망의 속도를 보증하는 것이다. 속도는 절대적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더 혹은 덜 클 수 있다. 절대 속도의 크기는 정확히, 그것이 한번의 움직임으로 건너뛰는[주파하는] 거리, 즉 그것이 감싸고 있고, 조망하거나survoler 암시하는sous-entendre 매개의 수(여기서는 최소한 둘)에 의해 측정된다. 여전히 3종 인식의 적극적 특징으로서의 도약sauts, 공백[누락]lacunae, 절단이 있다.

 

또 다른 예는 정리 14와 22에 의해 주어진다. 거기서 우리는 이번에는 축약contraction에 의해 가장 보편적인 공통관념으로서의 신의 관념으로부터 가장 특이적인 본질로서의 신의 관념으로 이행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상대 속도(가장 큰)로부터 절대 속도로 도약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증명30은 점선을 따라서 일종의 숭고한 삼각형을 그린다tracer. 그 꼭지점은 빛의 형상들(자아, 세계, 신)이고, 그 변은, 거리들distances로서, 제 차례에서 가장 큰 것으로 드러나는 절대 속도로 주파되는 삼각형을. 5부의 특별한 특징들, 이전 부분들의 방법을 넘어서는 그 방식은 언제나 이것을 참조한다 : 빛의 형상들의 절대 속도.

 

정의, 공리, 공준, 증명, 보충의 ꡔ윤리학ꡕ은 자신의 흐름[물결]을 전개하는 강의 책이다. 그러나 주석의 ꡔ윤리학ꡕ은 은밀한[지하의], 불의 책이다. 5부의 ꡔ윤리학ꡕ은 섬광에 의해 나아가는, 기체적인aérine, 빛의 책이다. 기호의 논리학, 개념의 논리학, 본질의 논리학 : 그림자, 색채, 빛. 세 가지 ꡔ윤리학ꡕ 각각은 본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들과 공존하며 다른 것들 안에서 계속된다. 그것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세계이다. 그것들 각각은 그것들을 분리시키는 허공을 건너뛰기[가로지르기]franchir 위해 다리를 놓는다. (권순모 번역)


1) (역주) latin 자체에 삼각 돛단배라는 뜻이 있음.

2) ꡔ스피노자와 투사 공간ꡕ에서 Yvonne Toros는 스피노자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기하학이 데카르트의 것이나 홉스의 것이 아니라, 데자르그 기하학에 보다 가까운 투사 광학 기하학이라는 것을 부여주기 위해 여러 논증을 사용한다. 이 논증들은 결정적인 것으로 보이며,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낳는 것이다. 이전의 저작(ꡔ공간과 변형 : 스피노자ꡕ)에서, Toros는 스피노자와 베르미르를 비교하고 ꡔ무지개에 대한 논고ꡕ에 따라서 투사적 색채 이론을 스케치했다.

3) 과학은 우연히 이 기하학적 형상들의 문제 및 빛의 기하학의 문제와 마주친다(그런 식으로 ꡔ지속과 동시성ꡕ, 5장에서 베르그송은 상대성 이론이 빛의 형상들의 단단한 기하학적 형상에의 전통적 종속을 역전시킨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예술에서, 화가 Delaunay는 빛의 형상들을 추상 미술만큼이나 입체파의 형상들의 기하학에 대립시킨다.

4) Ynonne Toros(5장)는 데자르그 기하학의 두 측면 내재 두 원리를 정확히 표식했다 : 투사와 관련된, 상동성homologie의 측면 ; 선의 점과의, 점의 평면plan과의 상응에 관련된 “이원성”이라 명명될 수 있을 측면. 바로 거기에서 평행론은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사유에 있어서의 점(신의 관념)과 연장에 있어서의 무한한 전개[펼침]déroulement 간에 확립되기 때문이다.

5) 참조. 아리스토텔레스, ꡔ분석론 전서ꡕ, Ⅱ, 27 : 생략추리법은 그 중 어떤 전제가 함축[암시]되고sous-entendue, 감추어지고[신비화되고], 억눌리고, 생략되는 삼단논법이다. 라이프니쯔는 그 물음을 다시 취해서, 설명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 자체에서도 단절[균열]이 일어나며 “결론의 힘”은 부분적으로 우리가 억누르는 것에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