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니체의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의 의미

나뭇잎숨결 2020. 2. 18. 02:48

니체의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의 의미

 

 

정 영 도

 

 

1. 서 언

 

니체(Friedrich Nietzsche)에 있어서 Übermensch는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두루 알려진 바와 같은 그런 인간의 이상적인 존재전형(存在典型)도 아니고 또 초감성적(超感性的)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그런 초월적 존재도 아니고 또 현실세계에서 神의 계시를 받고 초능력을 발휘하는 超人(Superman)1)은 더욱 아니다.

 

Übermensch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의 구현이고 개인마다 자기의 내면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생장(生長)시키고 향상시키고 강화시키고자 하는 활동이며 동시에 「힘에의 의지」로서 자기자신을 부단히 고양(高揚)시켜 나가는 내재적 자기초극(自己超克)이다. 그러므로 Übermensch는 개념적 정의 또는 체계적 논리적 기술(記述)을 허용하지 않는다. Übermensch는 자기초극을 감행하는 활동의 도상에서 체험되고 깨달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Übermensch를 구조적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에의 체험 및 이해를 도식화하고 체계화하고 논리적으로 형식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Übermensch에 대한 구조적 분석은 니체의 역동적 Philosophieren으로서 Übermensch라는 니체 특유의 철학적 Stimmung을 훼손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Übermensch라는 엄청나고 심오한 실존적 활동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의 일환으로 일단 Über와 Mensch를 분리하여 분석하고 음미한다는 것은 시도해 봄직 하다.

따라서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가 각각 어떤 철학적 함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니체의 철학사상의 근본적인 핵심을 터득하고자 하는 것을 뜻한다.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묻고 그 물음에 답을 줌에 있어서 그 언어구조적 측면에서 Über를 해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니체의 철학적 의도를 헤아린다면 새로운 가치설정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의 차원에서 Über에 대한 해석을 수행하는 것이 더욱 근본적이다.

「힘에의 의지」를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가운데서 Über의 철학적 의미 즉, 니체가 의도하고 있는 Über의 - 「힘에의 의지」의 구조 속에서 - 구조적 역할을 논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에 의하여 제약을 받는 Mensch에의 이해 역시 「힘에의 의지」의 차원에서 감행되면서 동시에 개인마다의 내면에 내재하는 비본래적(非本來的) 경향의 분석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 같다. 더욱이 그것이 서양정신사의 발전과정의 차원에서 시도된다는 것은 Übermensch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고 있다.

이 논문은 니체의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를 분리하여 Über가 「힘에의 의지」의 자기생장과 자기강화에서 가지는, 이른바 「힘에의 의지」의 자기의지함 속에서 가지는 그 때마다의 일종의 “굽이”2)를 토구(討究)하고 überwinden되어야 하는 Mensch의 日常性과 데카당 성향을 구조적으로 분석․음미하는데 그 논지(論旨)를 둔다.

 

2.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意志하고자 함의 일종의 “굽이”로서 Über의 의미

 

니체에 의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생명적 존재는 「힘에의 의지」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3) 예컨대 들녘에 외로이 핀 한송이 백합도, 대지에 몸을 붙여 기어다니는 한 작은 미물(微物)도 「힘에의 의지」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일체의 생명적 존재는 자기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향상시키고자 부단히 힘쓰고 또 시도하는 어떤 “하고자 함”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생명적 존재가 “하고자 함”에 불과하다고 말할 때 이 의미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낼 수 있는 언표는 니체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라는 말 이외 다른 알맞은 말이 없다.

우선 여기서 「힘에의 의지」를 분석하고 음미할 경우에만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힘에의 의지」라고 말할 때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는 개념을 시사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역동적인 활동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의지란 심리학에 있어서 知, 情, 意로서 구분할 때 의지라는 하나의 기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의지는 관념론에서와 같이 근본실재로서 사유되고 있는 정신보다도 우위에 설정되어 있는 존재 자체의 다른 또 하나의 언표는 더욱 아니다.4)

니체가 「der Wille zur Macht」라고 말할 때 Wille는 한국 말로서는 결코 적절하게 옮겨질 수 없다. 지금까지는 「힘에의 의지」라는 한국 말로 옮겨서 사용되고 있지만, Wille는 오히려 한국 말로 풀어서 옮긴다면 “뜻”, “氣”, “情熱”, “하고자 함”등으로 새겨진다. 그러나 이처럼 옮겨진 어떤 말도 Wille를 적절하게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Wille는 오히려 이 모든 의미를 복합적으로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하튼 Wille가 의지라는 말로 옮겨져서 사용되어 오고 있는 처지에 일단 이 언표를 수용한 가운데 그것에 대한 철학적 해석 또는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 같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이해함에 있어서 힘과 의지를 분리해서 이해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힘에의 의지」는 전체로서 즉, 힘과 의지를 하나로 통일한 전체로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된다.5) 그러나 「힘에의 의지」에의 조명이라는 일종의 학습상의 이해를 위해서는, 비록 니체의 경고를 위배하는 오류를 범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한이 있더라도, 조명의 방법상 힘과 의지를 일단 분리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의지는 결코 근원도 아니고 존재도 아니고, 오히려 직유(直喩)를 빌려서 말하자면 휴지(休止)없는 흐름(Fluß)에 불과하다. 흐름으로서의 의지는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작용 즉, 의지 자신이 자기에 대하여 가지는 작용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지가 자기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기자신을 지향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의지는 자기심화, 자기생장, 그리고 자기강화의 형식으로 향상하고 발전한다.

의지는 일종의 흐름이다라는 Aphorismus로서 언표될 때 이 흐름은 생장과 강화를 상징한다. 따라서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강한 “많은 힘”(mehr Macht)을 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생장과 강화로서의 흐름은 자기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하는 힘을 의미한다.

엄밀하게 분석하자면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힘은 의지의 목적이다. “意志하다”, “의욕하다”, “하고자 하다”라는 의미의 의지가 여기서 목적하는 것은 바로 힘이다. 의지는 의지하되 자기를 의지하고 의지되는 자기는 이전의 자기가 아니고, 생장되고 강화되고 심화된 자기이다. 의지가 의지하는 바 목적으로서 힘은 “더욱 강하게 함”이라는 의미를 가리킨다.

따라서 힘은 그것이 힘의 향상(Macht-Steigerung)의 도상에 있고 그리고 “보다 더 많은 힘”을 요구하는 경우에만 힘이다. 그러나 힘이란 그것이 단순히 힘의 향상에 머물러 있을 경우 즉, 힘의 한 단계에 단순히 머물러 있을 경우 이미 힘이 아니다.6) 만일 힘이 힘 자신의 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힘은 오히려 몰락하기 시작한다. 힘은 자기가 자기를 압도하고 자기를 극복하며 자기를 향상시켜 나갈 경우에 있어서만 힘으로서 작용할 뿐이다.

가령 강물이 흘러가는 흐름을 작용으로서의 힘으로 빗대어 말한다면 즉, 의지가 자기를 지속적으로 강화시켜 나가는 작용을 하나의 흐름에 투영하여 살펴본다면 굽이쳐 흘러가는 흐름 자체가 의지이고 하나의 "물굽이"에서 다음 "물굽이"로 발전하는 것이 곧 자기를 강화시키는 것이면서 동시에 힘이라는 물리적 작용의 양태이기도 하다.

강물이 흘러감에 있어서 흐름의 한 "물굽이"가 다음"물굽이"로 넘어간다고 할 때 넘어가는 또는 흘러가는 작용, 진행, 전개는 반드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간다” 또는 “건너간다”라는 운동의 필연성을 가진다. 여기서 “넘어간다”또는 “건너간다”라는 운동의 양태이면서 그 운동을 나타내는 언어가 곧 Übermensch에 있어서의 Über이다.

니체의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는 운동성(運動性)과 넘어가는 또는 건너 가는 “굽이性"을 함유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Über는 역동성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의지 자신이 자기의 목적하는 바로서 “더욱 강하게”라는 양태로 생장하고 강화하는 도상에서 Über는 생장과 강화의 매순간을 나타내는 하나의 "물굽이"와 같은 흐름 또는 지속의 “굽이” 즉, “하고자 함”으로서 의지의 "굽이"가 된다. Über는 생장하고 향상하고 발전하고 강화하는 것만을 지시하지만, 그러나 정체하고 머무르고 제자리에 서 있음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힘을 향해서 즉, 더욱 강하게라는 국면으로 의지하는 의지는 이처럼 Über를 하나의 형식으로 수반한다. 물론 니체는 형식이라는 말을 혐오하고 제거하고자 했지만, 이 의지를 조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법상 니체의 경고를 거스르는 모순을 범하지 않을 수 없다.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 Über는 힘의 단계로서 “굽이”를 나타낸다라고 앞서 기술했는데 여기서 이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경우에 Über에는 힘의 전․후 단계가 동시적으로 수반되어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힘에의 의지는 Über의 연쇄에 불과하다.

Über가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면 저 쪽에 도달했을 때 그 지점에는 도달과 더불어 즉시 다시금 이 쪽이 존재하게 되고 동시에 저 쪽으로 건너가야 하는 것을 지시하는 새로운 Über가 현존한다.

의지가 마치 강물의 흐름과도 같이 부단히 의지 자신을 지향하고 의지하는 가운데 Über는 굽이굽이마다 또는 한 단계 한 단계마다 이 쪽과 저 쪽을 一新해 가면서 현존한다.

Über가 역동성 및 운동의 필연성을 불가피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힘에의 의지가 자기강화 또는 자기생장이라는 작용 및 운동을 부단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감행하는 필연성 또는 운명성에 있다. Über가 역동성 또는 운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Über는 공간적 차원과 시간적 차원을 동반한다.

Über는 공간적 차원에서 본다면 “위로 치솟아 올라감”, “이 족에서 저 쪽으로 건너감, 그리고 ”뛰어 넘어감“의 역동적 운동성을 가지고 있다. 다른 말로 해서 Über는 수직적인 공간에서 본다면 밑에서 위를 향해서 부단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치솟아 올라감을 지시하고 수평적인 공간에서 본다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즉, 직선형으로 저 건너 地平을 향해서 감을 지시한다.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은 Über에 대한 공간적 차원에서의 이해를 촉구하고 있다.

「인간은 超克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인간을 超克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Der Mensch ist Etwas, das überwunden werden soll. Was habt ihr getan, ihn zu überwinden?)7)

이 인용문에서 본 바와 같이 überwinden(超克하다)은 밑에서 위를 향해서 치솟아 올라감 또는 여기서 저 위쪽을 향해서 뛰어 넘어감이라는 이른바 고양(高揚), 도약(跳躍),초극(超克) 등의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Über가 초월 즉, 존재 자체 또는 피안에로의 초월을 시사하고 있다라고 이해한다면 그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니체가 사용하는 “Über”는 엄밀히 말하면 transzendieren(초월하다)을 함유시킨 가운데 수용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hinuber"라는 의미로서 이해되고 있다. 이 지상에서 즉, 이 현실 또는 이 세계 내에서의 자기초극을 지시하고 있는 역동적인 운동성이 이 Über에 함축되어 있다.

이 Über는 자기초극의 운동을 시사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운동에는 반드시 추락 및 역행의 위험도 수반한다는 경고도 함께 지시하고 있다. 니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간은 짐승과 위버맨쉬 사이에 연결된 밧줄이다. 심연 위에 놓여 있는 밧줄이다.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도상도 위험하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험하고 무서워 벌벌 떨면서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도 위험하다. (Der Mensch ist ein Seil, geknüpft zwischen Tier und Übermensch, - ein Seil über einem Abgrunde.

Ein gefährliches Hinüber, ein gefährliches Auf-dem-Wege, ein gefährliches Zurückblicken, ein gefährliches Schandern und Stehenbleiben.)8)

Über는 이 쪽에서 저 쪽으로 향해서 부단히 건너가는 역동적 활동이라는 창조의 열정도 수반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위험과 긴장도 수반한다. 「힘에의 의지」에 있어서도 의지가 의지 자신을 향해서 의지하는 경우에 그 Über에는 위험과 긴장이 따른다. 의지함이 의지하는 한 지점에 머무르거나 역행할 경우에 의지는 의지하는 것을 중단하고 일체의 힘을 상실한다. 「힘에의 의지」의 구현으로서 인간이라는 정신과 육체의 복합체 역시 자기강화 및 자기고양 또는 자기생장의 형식으로서 Über가 건너감을 지시하는 경우에도 거기에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위험이 내재한다.

Über는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건너가는 자에게 모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긴장도 시사하고 있다.

Über는 언제나 저 쪽으로 건너간 자로서 현존하거나 아니면 짐승으로 퇴영하거나 또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전율의 순간을 야기시키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Über는 건너가는 도상에서도 자기집중 및 자기긴장을 요구하고 또 순간적으로나마 긴장을 이완시키는 경우에는 심연에로의 추락과 더불어 자기종말을 가지고 오고 그리고 이 긴장을 견지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인간이기를 그만 두고 짐승과 같은 존재에로 역행하는, 이른바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결단의 상황을 조성한다.

Über가 지시하는 “건너감”의 공간상의 길이는 끝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갔을 때 그 건너간 지점에서는 다시금 하나의 단계 즉, 하나의 “굽이”에 직면한다. 따라서 이 “굽이”가 이전의 저 쪽이 이 쪽이 되고 동시에 건너가야 할 저 쪽을 지시하는 다른 또 하나의 Über로서 현존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Über는 강물의 흐름에 있어서 그 흐름을 그 흐름이 당도하는 매지점(每地點)마다에서 다음 흐름을 可動 또는 作用시키는 하나의 "물굽이"처럼 건너간 매지점 또는 매 단계마다에 현존하면서 저 쪽을 건너가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이 Über는 직선형의 운동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원형운동을 시사한다. 니체의 다음과 같은 Aphorismus는 Über가 지시하는 원형운동을 시사하고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날카롭게 우짓는 새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보라! 한 마리의 독수리가 넓은 원을 그리며 공중을 날고 있었고 한 마리의 뱀이 독수리에 매달려 있었다. 먹이가 아니라 연인처럼. 왜냐하면 뱀이 독수리의 목을 휘감고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Er hörte über sich den scharfen Ruf eines Vogels. Und siehe! Ein Adler zog in weiten Kreisen durch die Luft, und an ihm hieng eine Schlange, nicht einer Beute gleich, sordern einer Freundin: denn sie hielt sich um seinen Hals geringelt.)9)

이 인용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 독수리와 뱀이 서로 원형으로 뒤엉킨 채 공중을 선회하고 있는 형상을 음미하는 가운데 Über가 원형운동을 지시하는 필연적인 법칙성이 이해될 수 있다.

독수리와 뱀은 正午와 같은 것 즉, 對立項의 통일을 상징한다. 이러한 통일에 있어서 대립항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보존․유지된다.

여기서 독수리는 구체적 직접적으로 해석한다면 높이의 차원으로서 공중에 날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동물로서 이성 즉, 정신을 나타낸다. 가장 영리한 동물로서의 뱀은 자기의 생활권을 땅에서 찾고 있는 동물로서 육체를 나타낸다. 독수리와 뱀 간에는 이동방식의 상이성에도 불구하고 圓形性이라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10)

독수리는 공중을 선회하며 뱀은 자기 자신을 고리처럼 휘감는다. 이러한 형상은 그것이 대립항들의 통일을 명백히 하는 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동적 구조 즉, 「힘에의 의지」의 원리를 가리킨다.11)

따라서 이러한 동적 구조에 있어서도 Über는 대립항들의 통일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 토대, 계기의 역할을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수리와 뱀 즉, 정신과 물질이 높이와 깊이를 대표하는 차원으로서 이 양자는 정적인 고정 가운데 상호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대립적인 양극으로서 원운동의 동적 실현에서 통일된다.

이처럼 대립항의 통일로서 자기동일성이 다시금 대립항으로 모순․갈등을 일으키고, 이 대립항이 또 다시 통일로 지향하곤 하는 이른바 대립항의 통일의 연쇄를 이루는 형상이 영원한 원운동의 국면을 드러낸다. 뱀에 의해 자기의 목을 휘감긴 독수리가 공중을 선회하는 이 형상은 분명히 「힘에의 의지」의 생장, 강화, 고양을 본질로 하는 원운동의 국면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위버맨쉬와 짐승 사이에 연결된 밧줄에 있어서 이 쪽으로부터 저 족으로 건너가는 행위를 시사하고 있다.

Über는 이처럼 「힘에의 의지」의 원형운동에 있어서 대립항의 통일의 근거, 토대, 계기로서 그 의미를 가진다.

Über는 공간적 차원에서 보면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감에 있어서 현존하는 하나의 “굽이”라는 점에서 이 쪽과 저 쪽을 동시적으로 통일하고 있는 지점이면서 시간적 차원에서 보면 이 쪽이라는 과거와 저 쪽이라는 미래를 통일하는 단일시점(單一時點)으로서의 현재이다. 따라서 Über는「힘에의 의지」의 원형운동에 있어서 항상적(恒常的)인 現在 또는 과거와 미래를 포괄하는 단일시점으로서의 영원한 현재이다.

이 Über가 Mensch에 적용될 때 즉, Mensch의 접두어로 이해될 경우에도 Über 뒤에 첨가되는 Mensch는 초극되지 않으면 안되는 즉, 이 쪽이 되고 과거적인 것이 됨으로서 지양(止揚)되지 않으면 안되는 Etwas이다.

 

3.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를 분리해서 본 Mensch의 형상

 

니체에 있어서 Übermensch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상적인 존재전형도 인식대상도 아니고 또 언표되거나 전달될 수 있는 형상도 아니다. Übermensch는 자기를 초극하여 나아가는 역동적인 활동이다.

니체가 구름 속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의해 고지(告知)되는 소위 구름 속의 번개라12)는 Metapher로 언표하는 Übermensch는 Über와 Mensch의 합성어이다. Mensch의 접두어로서 Über는 단순한 어휘가 아니고, 오히려 Mensch 앞에 버티어 섬으로 해서 철학적으로 엄청날 정도로 깊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앞의 장에서 이미 논의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논의의 방향을 바꾸어서 말하건대 Über가 자기 앞에 버티어 섬으로 해서 압도되고 차단되는 Mensch는 도대체 무엇일까

Über의 사족(蛇足)으로서 Mensch는 분명히 überwinden(초극)되어야만 하는 인간 즉, 저 쪽으로 건너감에 있어 뒤에 남겨두도록 시원스레 걷어차버림을 받아야 하는 Mensch를 뜻한다. 이러한 Mensch에는 두 가지 스타일의 人間種이 있다.

하나는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고 있는 데카당적 경향의 Mensch이고, 다른 하나는 니체 자신의 동시대와 앞으로 올 시대에 대두하게 될 사회학적 경향의 Mensch 즉, "der letzte Mensch"(終末人)이다.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는 경향으로서 초극되어야 할 Mensch로서는 벌레, 원숭이, 인간 등이 있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잇다.

「너희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이 되는 길로 걸어 왔다. 그러나 너희들은 아직도 많은 점에 있어서 벌레이다.」13)

인간의 내면에는 초극되어야 할 가장 저급한 성향으로서 벌레라는 은유로서 규정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벌레는 원래 슬금슬금 기어다니면서 움직이는 근육모피이다.14) 벌레가 보여 주는 생존상의 표현들은 한정적이면서 획일적이다. 벌레는 자기 이외의 다른 자연존재와의 긴밀한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기도 한다. 예컨대 벌레는 기생충처럼 식물들 또는 어떤 생물에 기식하기도 하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고 다시금 배설하기도 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공동체 생활에 참여한다.

벌레의 이러한 습성이 인간의 내면에는 있을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벌레 습성의 성향이 있다면 그것은 곧 비굴과 위선이다. 이러한 벌레의 습성․지향적 성향은 인간 존재의 데카당化를 촉진한다.

벌레의 성향에서 한 단계 앞서 발전한 것이 원숭이의 성향이다. 원숭이의 성향을 지향하는 인간은 벌레의 성향에 있어서처럼 자기의 宿主에 기식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스스로 독립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함으로서 벌레의 성향을 넘어서고 있다.

원숭이의 단계에 있어서 원숭이는 벌레가 가지고 있지 못한 손과 발을 가지고 있다. 이 손과 발은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고 자기의 종족을 번식하는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 및 도구로서 작용한다. 원숭이가 자기의 영양을 섬세할 정도로 공급시키고 있는 동시에 자기의 활동영역을 넓게 확보해 감에 있어서 원숭이는 벌레가 결여하고 있는 도구로서의 손, 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벌레에 비해서 엄청난 진보의 징표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자립과 독립에 기여하는 수단으로서 손과 발은 해방의 징표 즉, 벌레의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원숭이의 손과 발은 자기 이외의 다른 존재를 흉내내기 위해서 이용되는 도구이기도 하다. 15)

원숭이는 자기의 손과 발을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창조성에 근거하여 시도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내면에 있어서의 원숭이의 성향은 이처럼 창조성 및 독립성을 결여하고 주어진 전통적인 사유방식, 인습적인 행동 및 감정양식, 그리고 기존의 도덕 및 가치를 맹목적․무비판적으로 순응하는 이른바 畜群的 대중적 성향을 뜻한다.

이러한 무비판적 순종의 성향이 바로 「힘에의 의지」에 거역하여 자기를 나약하게 만드는 초감성적 세계, 피안, 존재자체, 神 등을 배태시킨다.

여하튼 원숭이는 자기가 흉내내는 대상을 자기의 도구를 사용하여 흉내내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이 대상과 동일한 것으로서가 아니라 이 대상을 단순히 반복해서 흉내낼 뿐이다.

원숭이의 단계를 초극하지 못한 인간은 다른 인간이 사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고 畜群化된 대중에 맹목적으로 따라 갈 뿐이다. 다시 말해서 원숭이 성향의 인간은 畜群道德에 순종할 뿐이다.

이러한 성향의 인간은 자기의 이익지향만을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의 충돌을 피하고 삶을 마찰 없이 안전하게 영위하기 위해 다른 인간들을 흉내내고 또 그들을 모방해서 행동한다. 다른 인간들을 흉내내고 모방하고 그들처럼 사유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동의를 신호하고 동시에 이 행위와의 일치를 암시한다. 이러한 일치에 대한 보상으로 말미암아 개인은 아무런 걱정없이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인간은 자기성찰 없는 즉, 단순히 흉내만 내는 몸짓을 본성으로 가지는 원숭이 존재 그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이 때문에 자기의 내면 속에 내재하는 이러한 원숭이의 성향을 초극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초극의 계기는 자기의 내면에 현재하는 원숭이 성향에 대한 자기수치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에 대해서 원숭이는 무엇인가? 웃음꺼리 또는 고통스러운 수치이다. 위버맨쉬에 대해서 인간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웃음꺼리 또는 고통스러운 수치이다.」16)

자기의 내면 속에서 원숭이 성향을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자기수치와 더불어 자기냉소 및 자기비판을 감행한다. 자기수치는 원숭이 단계로부터 벗어나서 저 쪽으로 건너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이란 “Übermensch와 짐승 사이에 연결된 Seil이다”라고 말한 그 의도에 근거해서 음미할 때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는 짐승인 원숭이 단계에서 저쪽을 향해서 건너가는 행위가 Mensch를 überwinden하는 즉, 초극하는 행위 또는 건너가는 행위로서 Übermensch이다.

 

4. 정신사적 발전과정에서 본 Übermensch에 있어서 Mensch의 형상

 

Übermensch에 내재하고 있는 이른바 überwinden 되어야 할 Mensch는 서양의 정신사적 발전과정에서 드러난 정신의 세 가지 유형화에서도 통찰된다. 니체는 이것을 짐짓 Zarathustra에서 Metapher로서 냉소하고 있다.

「나는 너희들에서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말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며, 낙타가 사자가 되며 마침내 사자는 어린이가 되는가」17)

이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니체는 überwinden되어야 할 Mensch에는 -정신사적 발전과정에서 보았을 때- 정신의 두 가지 유형 즉, 낙타와 사자 등이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서양의 정신사는 정신의 이 세 가지 유형화로 점철되고 있다. 이러한 정신사는 니체에 의하여 데카당의 역사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서양의 2000년의 정신사는 운명적으로überwinden되어야 하고 거부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정신사가 파괴되는 자리에서 새로운 창조를 위한 고양, 생장, 강화의 노동 즉, 저 쪽으로 건너가는 지속적인 노동이 시도되지 않으면 안된다.

Übermensch에는 바로 이러한 노동에의 시도가 충만되어 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Übermensch는 서양의 정신사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즉, 낙타와 사자로 상징되는 Mensch를 überwinden하여 어린이(das kind)로 생장하는 활동이다.

여하튼 정신의 발전사에 있어서 überwinden되어야 하는 낙타는 무엇이며 사자는 무엇인가?

낙타는 정신의 굴종과 자기고행을 상징한다. 낙타가 등에 짐을 실을 때는 먼저 앞다리를 꾸부리고 앉은 다음 뒷 엉덩이를 땅에 붙이는 그런 자세를 취한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는 모습 즉, 예수像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낙타가 짐을 실을 때의 모습에 투영시키고 있는 니체의 생각 깊숙한 곳에는 필경 예수像 앞에서의 굴종에 대한 냉소가 있으리라.

인간의 내면에서 솟아 올라 오는 걷잡을 수 없는 「힘에의 의지」의 감지를 주재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란 어쩔 수 없이 그 힘의 감정이 자기에게서 연유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압도하는 他者로부터 비롯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경우에 나약한 인간은 자기의 힘의 감정을 이 他者에 투영하고 그 他者를 Gott라는 허구로 만든다. 그리하여 그 Gott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도덕이라고 니체는 규정한다.

니체는 낙타라는 짐승의 형상과 생활 모습에서 그리스도교의 굴종과 자기고행을 투영하여 조명하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서양의 정신사는 낙타로 상징되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으로서 굴종과 자기고행이 지배해 왔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적 도덕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인간은 반드시 überwinden되지 않으면 안된다. 니체의 Übermensch에 있어서 Mensch는 이처럼 überwinden되지 않으면 안되는 christlicher Mensch로서 규정된다.

Übermensch에 있어서 Mensch에는 또한 사자로 상징되는 자유정신이 내재하고 있다.

이 자유정신은 서양정신사의 발전과정에서 보면 제2단계에 속한다. 사자로 상징되는 자유정신은 서양의 전통적인 도덕과 그리스도교적 편견을 버리고 획득되는 정신을 뜻한다.

사자단계에 있는 정신 즉, 자유정신은 일체의 전통적인 가치관념에 의한 지배로부터 벗어나서 자율적으로 자기를 다스려 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자유정신은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그리스도교의 규범체계가 가지고 있는 타율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획득한 자유는 그 자체에 있어서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자유는 과거에 지배했던 모든 도덕, 가치, 규범으로부터 해방이라는 의미의 자유에 불과하다. 이 자유는 부정적 소극적 테두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자유정신조차도 überwinden되어야 할 Mensch에 포함된다. 이러한 Mensch를 überwinden하는 경우 이 자유정신은 어린이라는 Metapher로 고양․생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린이는 천진난만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 하나의 놀이, 스스로 구르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신성한 긍정이다.」18)

정신사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사자단계로서 자유정신이 허무주의의 단계이면서 혁명과 거부의 단계 즉, 부정의 단계라면 이 자유정신의 단계는 “어린이” 단계에서 überwinden된다. 어린이는 낙타 및 사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속하는 인간으로서 순진무구성 그 자체를 상징한다. 낙타와 사자는 여하튼 동물의 차원에 속하는 것으로서 넓은 의미의 동일한 범주라고도 간주될 수 있지만, 어린이는 차원을 달리 하는 Überwindung이라는 높이에의 상승을 시사한다.

“어린이는 스스로 구르는 바퀴이다”라는 인용문이 지시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 구르는 바퀴로서 어린이는 이 쪽에서 저 쪽으로 부단히 건너가는 원형운동을 상징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기존의 모든 가치, 관념, 도덕, 그리스도교까지도 부정하는 천진난만 또는 순진무구 또는 새로운 시작 또는 신성한 긍정으로서 Übermensch의 Metapher이기도 하다.

낙타와 사자의 단계로서 Mensch를 초극함으로서 도달하는 Übermensch의 Metapher로서 어린이 단계에서는 수레바퀴가 굴러가듯이 원을 그리며 감행하는 원형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 단계에서는 시작이면서 끝이고 끝이면서 시작이라는 영원한 원환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니체가 내세우고 있는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winden 되어야 하는 Mensch로서는 낙타와 사자라는 Metapher뿐만 아니라 앞으로 올 고도산업사회에서 출현하게 될 대중인의 Metapher인 der letzte Mensch(終末人)도 있다.

니체는 앞으로 올 시대는 분명히 과학, 기술 그리고 기계에 의해 지배되는 고도산업사회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는 대중인이 인간 존재의 전형이 될 것임은 말할 나위 없고 대중인의 사유방식, 감정방식 그리고 행동방식이 일체의 것에 침투할 것으로 니체는 진단하고 있다. 니체는 대중인이라는 말을 Zarathustra에서는 終末人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종말인은 그 배태과정에서부터 überwinden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니체는 역설하고 있다.

특히 니체는 19세기를 풍미한 공리주의 및 사회주의를 혐오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사상에서는 다수의 큰 행복이니 형제애니, 만민평등 따위와 같은 윤리학적 정치학적 이론의 슬로건만 발견될 뿐 개인의 삶의 향상, 고양, 생장, 강화 등과 같은 그런 힘에의 의지는 결여해 있다. 이러한 이론에 근거한다면 대중으로서의 인간의 삶은 相異, 모순, 대립, 갈등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그러나 창조를 야기시키는 Chaos 즉,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Chaos따위는 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자기자신 속에 Chaos를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19)

춤추는 별 즉, 자기의 내면에서 자기자신을 강화하고, 고양시키고, 생장시키기 위해서 치솟아 올라오는 Chaos와 같은 「힘에의 의지」를 분출시키는 행위, 그것은 분명히 개인의 새로운 창조적 삶의 전개이며 매순간 자기의 일상성에서 해방하여 저 쪽으로 건너가는 창조적 모험이다. 이 쪽의 일체의 진부하고 정체적인 것을 걷어 차버리고 미지의 저쪽으로 향해 건너가는 생생한 걸음 즉, 긴장과 위험을 수반하는 Seiltanz같이 밧줄(Seil)위에서 가볍게 춤추며 저 쪽으로 건너가는 행위 그것은 진실로 고도산업사회 또는 대중사회가 지시하는 일체의 가치, 관념, 도덕 등을 überwinden하는 행위이다.

니체가 대중사회의 모범이라고 조소하고 있는 종말인은 제멋대로 모든 것을 평균화시키고 모든 위대를 왜소화시킨다. 그러므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대지는 작아지고 대지 위에서는 모든 것을 작아지게 만드는 종말인이 날뛴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이 말살되지 않는다. …

사람들은 이제 가난해 지지도 않고 부유해 지는 것도 아니다. … 모든 사람은 평등을 원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우리는 행복을 발명했다. -- 종말인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박거린다.20)

이 Aphorismus가 시사하고 있는 바와 같이 종말인은 모든 모험을 비켜나가며 더 이상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 과도한 노력을 혐오한다. 종말인은 자기자신을 높이와 깊이를 더 이상 알지 못하는 中位에 세운다. 이 中位에서 종말인은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영위한다.

종말인은 고도산업사회가 유용성과 편리를 만들어 줌으로 해서 그것에 만족해 하고 하물며 행복을 느낀다. 따라서 종말인은 현실에 안주하며 어떤 창조적 활동도 단념한 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평균화된 삶을 살아 가고자 한다. 눈을 크게 열고 세계를 인식하기를 싫어한다. 세계를 향해 눈을 뜨는 것보다도 차라리 눈을 깜박거리는 것이 편하다. 그러므로 세계를 향해 눈을 크게 뜬다는 것은 종말인에게는 귀찮고 괴롭기조차 하다.

Übermensch에 있어서 Mensch를 상징하는 이러한 종말인을 überwinden하는 행위 역시 니체의 Übermensch이다.

 

 

 

 

5. 결 언

 

니체의 Übermensch는 「Gott ist tot」라는 역동적인 “굽이”와의 表裏를 이루고 있다. Übermensch 속에 Gott ist tot가 실현되고 있다. Über라는 역동적인 “굽이”라는 지시자 또 명령자에 의하여 überwinden 되는 Mensch는 「Gott ist tot」라는 명제로서 반영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Gott ist tot는 Über라는 역동적인 “굽이” 또는 Über라는 「힘에의 의지」의 연쇄에 의하여 「Mensch ist tot」라는 명제로 전변(轉變) 될 수도 있다.

「Gott ist tot」라는 명제에 있어서 Gott는 두루 인식되고 있는 바와 같이 서양의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 논의되고 있는 Sein selbst, der absolute Geist oder Freiheit, die Idee, 그리고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피안을 설정하는 종교상의 Gott, 바꾸어 말하면 Platonismus와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Metapher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Übermensch도 Über라는 “굽이”에 의해 “Mensch가 überwinden된다"라는 인간의 내재적 행위를 시사하는 Metapher이다.

이 때 Mensch의 카테고리에 편입될 수 있는 것으로서는 형식론에서 말하면 저 쪽으로 건너가기 전의 시작으로서의 이 쪽이 있고, 내용론에서 말하면 인간의 내면에 내재하는 경향성으로서 벌레와 원숭이라는 Metapher로 언표되는 비본래적(非本來的) 현존재, 서양의 정신사적 발전과정에서 조명될 수 있는 낙타와 사자라는 Metapher로서 언표되는 그리스도교적 도덕 및 자유정신, 그리고 초고도산업사회에서의 존재전형으로서 나타나는 대중인의 Metapher로서 종말인 등이 있다.

요컨대 Übermensch라고 말할 때 Mensch는 überwinden되어야 하고, 이 경우에 überwinden되지 않으면 안되는 Mensch는 곧 벌레, 원숭이, 그리고 낙타, 사자, 종말인이라는 Metapher로서 상징된다.

언어의 구조분석적 측면에서 보면 Übermensch는 Über라는 전치사와 Mensch라는 명사 간의 단순한 합성어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러한 언어구조의 활용을 통해서 근대적 이성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가치로서 Platonismus와 그리스도교를 파괴하고, 새로운 가치설정의 원리로서 「힘에의 의지」를 구현하고자 하는 새로운 Philosophieren을 Übermensch라는 창조적 활동의 Metapher로서 제시하고 있다.

니체의 Übermensch라는 Metapher가 이상적인 존재전형도 아니고 새로운 人間変種의 개념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자신을 생장하고 강화시켜 나가는 자기초극(Selbst-Überwindung)의 행위인 한 Übermensch는 다양한 차원과 측면에서 조명되고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Philosophieren이다.

그러므로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를 분리하여 분석․음미하면서 동시에 전체적 통일의 차원에서 사유하는 그런 이중적인 이해의 시도도 역시 니체의 Übermensch의 깊이를 고려한다면 수용됨직 하다.

 

 

참고문헌

 

1) F. Nietzsch, Also sprach Zarathustra, K.S.A(Kritische Studienausgabe), Bd. 4, dtv, 1980

2) __________, Jenseits von Gut und Böse, K.S.A, Bd. 5. dtv, 1980

3) __________, Nachgelassene Fragmente, K.S.A, Bd. 7, 8, 9. dtv. 1980

4) Annemarie Pieper, Ein Seil geknüpft zwischen Tier und Übermensch, Kleta Cota Verlag, Stuttgart, 1990

5) Martin Heidegger, Holzwege, Vittorio Klostermann, Frankfrurt am Main, 1972

6) 정영도, 니체의 Zarathustra에 있어서 정신의 발전과정, 니체연구, 제2집, 한국니 체학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