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니체철학에서 인식/해석과 존재

나뭇잎숨결 2020. 2. 18. 02:51

니체철학에서 인식/해석과 존재

백 승 영

ꡔ철학ꡕ 제 58집. 1999 봄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니체의 철학에서 존재와 인식에 대한 사유를 해석(Interpretation) 개념을 중심으로 고찰할 것이다.

해석 개념이 니체에게서 비로소 철학적으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는 개념임은 주지하다시피 가다머에 의해1), 그리고 니체 철학내에서 해석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뢰비트2)와 야스퍼스3)에 의해 언급되었었다.4) 그러나 해석 개념이 니체 철학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위치는 이들이 언급하는 이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해석 개념은 1881년도 이후의 “생성의 철학(Philosophie des Werdens)”5) 혹은 생성에 대한 긍정의 철학(Philosophie der Affirmation)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니체 철학에서 존재와 의식, 실재와 인식에 대한 사유를 묶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해석 개념의 위와 같은 기능은 둘째, 그것이 ‘생기(Geschehen)’라고 표현되는 존재의 양태, 즉 힘에의 의지의 수행(Vollzug eines Willens zur Macht)과의 연관하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바로 영기서 니체가 제시하는 해석 개념의 독특성이 발견된다.

셋째, 해석을 생기와의 관련 구도하에서 고찰하면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니체 철학의 5가지 주요 사유 -힘에의 의지, 같은 것의 영원히 되돌아옴, 위버멘쉬, 허무주의, 가치의 전도-6)이외에 니체의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 형이상학 비판 및 이성 비판이라는 프로그램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더불어 니체 철학내에서 이 테제들의 상호 보완성 및 정합적 성격이 드러난다.7)

넷째, 인간 인식에 대한 니체의 전 작품에서 산발적으로 드러나는 사유를 위의 구도내에서 인식론적 도식하에 체계화시키면 인식에 대한 인간중심주의적-실용주의적, 다원주의적인 면과 인식론적으로 약화된 실재론적 입장이 도출된다.

니체의 존재와 인식에 대한 사유를 위의 구도로 정리하는 본 논의는 먼저 해석 개념의 보편성을 그것의 생기개념, 힘에의 의지개념과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특히 니체의 해석주의와 인식론적으로 약화된 실재론적 입장과의 연결가능성이 궁극적으로 이성의 한계에 대한 긍정을 요청하는, 즉 겸손한 이성(die bescheidene Vernunft)을8) 요청하는 니체의 철학적 태도의 증거가 됨을 말해보고자 한다.



2. 해석개념의 의미


해석 행위(Interpretieren)는 니체에게서 인간의 인식 행위만을 지칭하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힘에의 의지 작용 일반을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힘에의 의지 작용은 더 나아가 ‘생기(Geschehen)’라는 총괄개념(Inbegriff)으로 표현되며, 따라서 힘에의 의지 작용, 생기, 해석작용은 교환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


2.1 ‘생기’란 무엇인가?

생기란 ‘활동과 작용’을 본성으로 하는 힘에의 의지 즉, 니체가 인정하는 유일 실재의 작용일반에 대한 명칭이다. 힘에의 의지는 니체가 1883년에 이르러 당시의 자연과학과 자연철학의 영향하에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완성시켜 그의 초기부터 마지막 시기까지 일관되게 유지되는 전제인 생성으로서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에 의해 니체는 존재와 생성의 이분법을 말하는 도덕적 형이상학을 존재와 생성의 일치를 제시하며 극복한다.9) 힘에의 의지는 어떤 내용을 갖기에 존재와 생성의 일치를 말할 수 있는가?

힘에의 의지에 대한 니체의 사유의 파편들을 종합하면 힘에의 의지의 성격을 다음처럼 규정할 수 있다.

힘에의 의지는 첫째, 항상 “주인이 되고자 하는, 더 많은 힘을 얻기 원하는 그리고 더욱 강해지고자(Herr-werden, Mehr-werden, Stärker-werden)”10)하는 의지들에 내재하는 본성이다. 의지들은 따라서 외적인 원인에 의해 촉발되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내에 운동의 원인을 갖다. 둘째,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저러한 의지의 힘으로 충만되어 있고, 이 의지의 힘은 따라서 의지를 항상 작용하는 동적인 것으로, 구성력을 지닌 것으로 만든다. 이 작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셋째, 한 의지에 저항하는 반대 의지들이 있어야 하며, 이 의지들간의 싸움이라는 상호 작용을 통해 그때그때 승자가 되는 하나의 의지가 어떤 구체적인 현상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힘을 추구하는 의지는 항상 다수여야만 하고, 의지의 다수성은 힘을 얻기 위한 의지들 사이의 싸움에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11) 모든 존재하는 것은 생명력이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변화하는 것이고 이 변화의 양태를 결정하는 것은 의지들간의 긴장 관계와 그 힘의 긴장 관계에서의 승자이다.

이 긴장 관계 및 싸움의 형태인 생기는 넷째, 끝이없는 진행과정이다. 왜냐하면 의지들의 힘 겨루기 과정은 어떤 최종적인 이김와 저항력을 상실한 복종으로 끝이 나는 관계가 아니라, 그때 그때 새로운 의지의 힘들간의 싸움내에서 이김과 복종이라는 관계가 새로이 설정되는, 명령하고- 저항하는 복종12)의 형식을 갖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가 가능한 이유는 의지들이 부단히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는 어떤 도달한 상태에 만족하고 그 상태를 유지시키려는 의지의 힘이 아니다. 현상태에 머무름이나 보존(Stehenbleiben, Erhaltung)이 아니라, 자기 극복과 상승(Über-sich-hinaus-gehen, Steigerung)이 힘에의 의지의 본성이다. 의지 활동의 목적은 항상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이 목적은 의지에 내재한다. 의지는 따라서 그것의 활동 목적을 그 자체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목적은 의지의 본질과 같다. 즉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이 다섯째 힘에의 의지의 특성이다.

여섯째, 의지들 이외에 어떠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원인을 갖지 않는, 더욱 많은 힘을 추구하는 의지는 매 순간마다 자신의 힘의 극대화를 꾀하며 또 실제로 도달한다. 니체는 이러한 힘의 작용을 후기 철학에서 “힘의 극대적 사용의 경제(Maximal-Ökonomie des [Kraft]Verbrauchs)”13)로 설명한다. 의지는 항상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해, 의지들간의 긴장 관계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힘을 최대한 발휘한다.14) 모든 생기현상들은-인간의 행위로부터 자연현상에 이르기까지- 니체에 의하면 외적원인의 상정이나 기계론적 모델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지 이 의지의 본성에서 연유한다. 항상 더 많은 힘을 원하는 의지는 자신의 본성상 그 작용을 멈출 수 없고, 매순간마다 자신의 힘의 극대화를 꾀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매순간마다 자신의 힘의 극대화는 이루어진다. 즉 매순간마다 의지는 자신이 힘을 최대한 사용한다. 힘에의 의지의 “이러할 뿐이고-다르지는 않은”15) 작용방식은 니체에게서는 힘의 본성에서 연유하는 필연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생기로서의 생성과정의 필연성은 이렇듯 힘에의 의지에 내재하는 목적이 매순간 완수되는 데에서 확보된다. 니체가 생성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통해 가능케 하고자 했던 ‘생성의 무죄(Unschuld des Werdens)’의 입증은 생성의 매순간마다의 필연성의 확보에서 이루어진다. 힘에의 의지작용의 필연성에 의해 가능한 생성의 필연성을 니체는 “비이성적 필연성(unvernünftige Notwendigkeit)”16)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더 많은 힘을 원하는 의지의 이러한 작용 방식은 의지의 힘이 늘 같은 것을 원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의지가 항상 더 많은 힘을 추구한다는 자신의 본성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의지는 어느 순간에는 그 작용을 멈춰 버리게 된다. 의지의 힘은 어떤 특정한 순간에 의지들간의 긴장관계에서 자신의 본성상 자신의 힘의 극대화를 꾀하고 또 거기에 도달하며 다음 순간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의지의 힘은 매순간 자신의 힘의 극대화를 꾀하는 자신의 본성에 항상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ewiges wiederkehren). 이 점은 니체 철학에서 제일 난해한 사유로 평가되고 있고 아직까지도 논의의 통일을 보지 못한 ‘같은 것 영원히 되돌아 옴’을 그 내용상 ‘같은 것으로 영원히 되돌아 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고 하겠다.17) “힘의 극대적 사용”과 “같은 것의 영원히 되돌아옴”은 따라서 본 논의에 의하면 상호 보완적이며 니체가 말하는 “의지의 원인성(Willenskausalität)”18)의 내용이다. 만일에 의지의 힘이 항상 자신의 본성에 맞게 작용하려는, 즉 자신의 본성에로 되돌아 오려는 속성을 갖지 못한다면 “힘의 극대적 사용”이라는 니체의 논의는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된다. 따라서 의지는 자신의 본성상 항상 모든 다른 의지들간의 힘을 겨루는 관계에서 더 많은 힘을 얻고 이기고자 하는 것 이외의 어떤 다른 것도 바라지 않으며, 의지의 힘은 이러한 자신의 본성에 따른 행위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행할 수 없다. 의지들은 자신들의 본성에 맞게, 니체의 표현대로 의지라는 것의 “정의로부터(aus der Defintion)”19) 그렇게 작용한다. 따라서 생기의 진행과정에서는 어떤 특정 순간에 의지의 힘의 극대화는 이루어지지만, 전 과정에서 유일한 힘의 극대화점은 가능하지 않다.

이 사유의 귀결은 ‘생성의 과정은 끝이 없다’는 것이다. 생성의 끝은 생성의 전과정에서 하나의 최종적인 힘의 극대화점인, 따라서 의지의 힘들간의 더 이상의 싸움을 허용하지 않는 힘의 균형 상태를 의미할 터이지만, 이것은 의지의 본성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생기로 이해되는 생성의 과정에는 어떤 마지막 종결점이란 없다.

이러한 특성을 갖는 의지들의 서로 싸우고 대립하는 작용에 대한 다른 명칭이 바로 생기이다. 이 힘에의 의지라는 “내적 생기(innerliches Geschehen)”20)에 모든 존재자와 자연 현상, 인간의 사회현상들이 의존하고, 그것에 의해 규정된다. 그렇다면 생기로 표현되는 힘에의 의지는 보편성을 띠는 존재론적 원리이다.


2.2 해석과 힘에의 의지 작용 및 생기 개념의 호환성


왜 해석개념이 생기현상 일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지는-바로 이것이 니체가 제시하는 해석 개념의 독특성을 이루는데- 니체가 생의 기본 조건으로 제시하는 “관점성(die Perspektivität; das Perspektivische)”21)에서 연유한다.

니체에게서 ‘삶 혹은 생을 위한’으로 표현되는 관점성은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한, 즉 자기 극복을 통한 자기 상승을 목적으로 하는 의지 작용의 조건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생이란 니체에게서 힘에의 의지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의 기본 조건으로서의 관점성은 더 이상 다른 것으로서의 소급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명있는, 달리 말해 생성하는 모든 것은 이것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임의적으로 만들어 내거나 변화시킬 수 없는 선험적인 것이다. 이것을 부정하면 니체가 의미하는 생이란 불가능하다. 관점성의 부정은 곧 생의 포기를 의미한다. 관점성은 따라서 힘에의 의지 -니체가 “관점을 설정하는 [의지의] 힘(Perspektiven-setzende [Willens]kraft)”22)라고 표현하는- 에 내재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점성은 생기라고 표현되는 힘에의 의지 작용의 가능 조건이다. 생기는 이 조건에 의존하며, 생기는 필연적으로 관점적이다.

또한 해석 작용(Interpretieren)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들이 자신의 관점성에 의해 자신의 외부의 것들을 측정하고, 자신에 맞게 구성하는 “관점적 평가(perspektivische Schätzung)”23)행위로 규정한다. 이 해석 작용이 인간 뿐 아니라, 의지의 힘을 갖는 모든 존재의 영역에서 행해진다는 점을 니체는 “필연적인 관점주의(notweniger Perspektivismus)”24)라고 부른다. 따라서 생기는 곧 해석 작용이요, 이것은 힘에의 의지가 필연적으로 갖는 관점성에 연유한다. 이렇듯 힘에의 의지 작용, 생기 및 해석은 서로 호환될 수 있는 개념들이고, 힘에의 의지 작용이 보편성을 띠듯이 해석 작용 및 생기도 보편성을 띤다. 왜냐하면 힘에의 의지에 내재하는 관점성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해석 행위는 필연적으로 힘에의 의지가 갖는 속성을 가지며, 힘에의 의지가 행사되는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한다. 또한 관점적인 것의 부정은 곧 힘에의 의지의 부정을 의미하며, 힘에의 의지의 부정은 생기의 부정이며, 이는 곧 생의 부정을 의미한다.



3. 해석으로서의 인식의 생기적 성격


그렇다면 인간 인식은 힘에의 의지, 생기 및 해석작용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니체의 인간 인식에 대한 사유는 해석의 생기적 성격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이로부터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어떤 가치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도출시킨다.

해석의 생기적 성격은 해석으로서의 인식의 독특한 점을 드러낸다. 니체가 해석 작용을 힘에의 의지 작용 일반을 지칭하는, 다시 말해 생기를 지칭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함은 이미 지적되었다. 그러나 해석 행위는 인간의 인식에 대한 명칭이기도 하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식 주체로서의 인간, 니체에게서 몸(Leib)으로 제시되는 인간에 내재하는 힘에의 의지 때문이다. 즉 인간은 힘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몸-주체의 힘에의 의지는 몸-주체를 단순한 인식-주체가 아닌 해석-주체로 만든다. 해석 주체의 인식과정은 곧 생기현상으로서의 해석 작용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석 주체의 해석 과정에서의 특정한 관점(Perspektive)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요소가 힘에의 의지이고, 이 점은 니체가 힘에의 의지를 “관점을 설정하는 힘”으로 명명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관점을 설정하는 힘에 의해 규정되는 해석으로서의 인식은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Gleichmachen des Ungleichen)” 구조를 갖고25), 이것은 인식으로서의 해석의 필연적 오류성의 원인이다. 같게 만듦은 이성에 앞서서(prärational) 전개되는 해석-주체의 힘에의 의지 작용에 의해 가능하며 감각 작용과 순수한 사변 인식(만일에 이것이 가능하다면) 전반에 걸쳐서 수행되는 인식 작용의 첫 단계이다. 이 단계는 인식 대상의 생기적 성격 때문에 필요 불가결하다. 인식 대상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인식 주체에게 파악될 수도 인식되어질 수도 없다. “인식과 생성은 항상 배타적 관계(Erkenntniß und Werden schließt sich aus)”26)에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생성에 대해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니체에 의하면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의지가 미리 앞서서 기능해야 한다. 이 의지는 이미 말했듯이 “관점을 설정하는 힘”을 갖는 의지이고, 이것이 인식 주체를 그 자체로는 한 순간도 자기동일성을 유지하지 않는 인식 대상을 잡아내어 붙들어, 인식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Erkennbarmachen). 이 행위의 성공은 그러나 오류를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의 오류란 절대적인 생성의 흐름과 반대되는, 인식에의 의지가 구성해 낸 허구로 바로 이 허구들 위에서만 인식이 가능하게 된다. 비교하고, 도식화하고, 예속시키고, 범주화시키는 등의 과정들, 즉 니체에게서 ‘같게 만드는 행위‘의 양태로 표현되는 이 과정들은 모두 허구들을 만들어 내는 행위이며, 이 행위는 인식 과정의 필연적인 요소이다.

니체는 감각 경험과 판단들, 기억 행위 및 지성의 기능 모두 이 행위를 토대로 가능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지각이라는 행위(wahrnehmen), 즉 어떤 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etwas-als-wahr-nehmen) 행위는 어떤 특정한 것을 취사 선택해서 받아들이고 이 과정에서 다른 것들을 필연적으로 밀어내게 되기에,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긍정(Jasagen zu Etwas)”27)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용 방식과 양태를 규정하는 것이 바로 니체에 의하면 이성에 앞서서 기능하는 의지의 힘이다. 따라서 지각이라는 것은 더 이상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 기관을 통한 단순히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작용이 아니다. 지각의 신경-생리학적 과정들은 의지의 힘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이 의지의 작용은 기능하는 순서상으로 항상 첫 번째이다. 만일에 지각 경험이 니체가 말하듯이 이러한 것이라면 지각 경험은 우리의 내부 세계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지각경험이 제공하는 상당 부분은 허구나 “환상”28)을 만들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지성(Intellekt) 역시 니체에 의하면 그 기능상 지각 경험과 같은 과정을 갖는다. 지성이 만들어내는 허구와 오류들은 ‘같지 않은 것을 같게 만드는’, 정확히 말하면 같은 것으로 ‘가정’하는 과정의 귀결이다. 그 자체로 동일성을 유지하는 어떤 것은 증명할 수 없는 가정일 뿐이나 이 가정은 새로운 것들을 오래되고 우리에게 익숙한 범주들 아래로 조정, 정리하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하다. 이 가정은 다른 인식 도구들, 예를 들어 실체, 항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주체 및 객체, 개념, 본질 등의 개념들의 성립 근거이다. 이 가정들을 만들어 내는 일차적인 목적은 생기의 현상을 기술하고, 정리하여 우리들이 생각하고 추론하고 판단할 수 있기 위해서이고,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의 삶의 유지를 위해서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요청되는 가정은 니체에 의하면 인식의 도구들로 필요불가결하며, 따라서 그것의 필연성은 단지 관점적-실용적 필연성일 뿐이다.

해석으로서의 인식이 이렇듯 인식의 전 과정에서 관점을 설정하는 의지의 힘이라는 규정적 요소를 갖기에 대상 세계에 대한 어떤 가치중립적이고도 객관적인 인식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더불어 어떤 ‘신의 관점(Gottesgesichtspunkt)’을 갖는 것도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세계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이러저러한 것은 옳고 이러저러한 것은 옳지 않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주관성이 배제된 관점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에게는 없다.

인식 주체의 관점 혹은 관점의 ‘변화’는 어떠한가? 관점은 그때 그때의 의지들 간의 관계에서 승자가 되는 의지에 의해 결정되기에 관점의 다양성은 힘에의 의지에 의해 논리적으로 보증된다. 몸-주체로서의 인간이 이 힘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이기에 달리 말하면 관점의 다양성은 니체에게서 인간의 존재적 구조에서 보증된다고 할 수 있다.

“관점을 설정하는 힘”인 의지의 작용은 비단 인식 작용 뿐 아니라, 모든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행위 및 현상에 이르는 보편성을 띤다. 이 활동의 목적은 이미 말했듯이 더 많은 힘을 얻기 위함이며 니체에게서 이 과정은 인간의 자기 극복 및 자기 향상의 과정을 함축하는 니체가 말하는 생(혹은 삶)을 위함이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에의 충동 및 노력 역시 생에의 의지라고 표현되는 부단한 자기 극복을 통한 자아 상승을 목적으로 한다. 달리 표현하면 인식은 생에의 의지로부터 생기하고 삶에의 의지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해석 행위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말하자면 인식 행위는 해석 행위이며 해석 행위가 아닌 인식은 없고, 더 나아가 우리는 삶이라는 대전제하에서는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인식의 해석각인적(interpretationsimprägniert) 성격, 해석의 가치각인적 성격(wertimprägniert)을 가능하게 이유이다.29)


4. 언어와 해석

해석 작용으로서 규정되는 인간 인식 작용의 중요한 특징인 오류성과 관점성-실용성은 언어의 발생이나 언어의 사용에서 잘 나타난다. 인간은 자연 내에서 미약한 존재로, 외부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른 인간들과 연합하는데 이 과정에서 메타포와 개념들을, 그리고 문법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언어계보학적으로 일차 단계인 메타포를 만드는 과정을 니체는 게르버(G. Gerber)의 영향하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정한 신경 자극이 특정한 상(Bild)으로 그리고 이 상이 다시 소리(Laut)로 전해지는데, 이 전달과정에서 신경 자극과 상 그리고 소리들은 서로 일치하거나 혹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아닌, “완전한 비약과 자의적으로 경계를 짓는(vollständiges Überspringen, willkürliche Abgrenzung)” 과정이다.30) 또한 신경 자극이라는 단계도 감각 지각에 대한 니체의 입장에서도 드러나듯이 인간의 의지 작용이 규정적 역할을 하기에 메타포들이 사물의 본질에 대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처음부터 근절된다고 할 수 있다. 개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개별적인 메타포들은 다른 것을 배제시키고 비슷한 것을 동화시키는 추상 작용에 의해 개념으로 되어지는데, 이 과정은 단지 오류를 만들어 내는 과정일 뿐이다. 언어라는 것은 따라서 이미 그것의 발생에서부터 그 언어가 관계 맺는 대상과 절대로 일치할 수 없다. 언어가 표현하는 것은 단지 언어사용자와 그의 대상에 대한 “관계”일 뿐이고, 바로 이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언어의 “본질”이다.31) 그러나 언어를 만드는 것은 니체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인간에게서 분리시킬 수 없는 행위이다. 이미 만들어진 언어들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 사회가 개별적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도덕적 강제성을 띤다. 물론 이 과정에서 언어 사용자들은 그들의 의사 소통이나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경험의 개별성을 거부하고 일반성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합의에 도달하고 이를 따르는 것은 서로 가급적이면 “빨리 그리고 쉽게”32) 소통하고 이해하려는 목적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쉬운 그리고 빠른 의사소통 그리고 자신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니체에 의하면 의사 전달자들간의 서로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힘들의 긴장 관계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때 항상 의사 전달 대상에 의해 동의를 얻고자 하는 내적 욕구를 갖는데, 동의를 얻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의사 전달 대상자에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은 우리의 힘을 의사 전달자에게 행사하려는 것이다. 의사 전달 대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이 과정은 타자의 낯선 힘을 인정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억압당하는 과정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따라서 니체에게는 이해받는 사람이 이해해 주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로 이것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힘의 표시이다.33)

언어는 일반성의 추구라는 성향 때문에 개별적 인간의 체험의 차이성을 표현할 수 없다. 따라서 이해는 항상 동시에 오해를 의미하게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대상 세계와 타인을 파악하고 기술한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대상 세계를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피상화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대상 세계를 “잘못 그려내고”34)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더 이상 실재 세계에 대한 “적합한 표현 수단”35)도 아니고, 이해와 의사 소통을 위한 보편적으로 타당한 수단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갖는 유용성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또 사용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어떤 오류없는 이상 언어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또 만들 수 도 없다. 왜냐하면 일상언어의 오류성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요청되고, 인간은 자신이 필연적으로 갖는 관점성으로 인해 실제적인 관심을 배제한 이상언어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언어라는 이상은 단지 개념의 박물관에나 들어가야 하는 것일 뿐이다.



5. 해석과 인식론적으로 약화된 실재주의


5.1 사실이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해석 주체와 대상 그리고 실재와의 관계는 해석작용을 통해 어떻게 규정되는가? 이 점에 대해 니체 연구가들은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해왔다. 이 의견들은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단토(A. Danto)이후의 미국의 니체 연구가들은 이 관계를 대부분 강한 의미의 형이상학적 실재론으로 이해한다.36) 아벨(G. Abel)은 절대적인 해석주의적 관념론으로, 렌크(H. Lenk)는 아벨과 반대로 실재론적 해석주의적 전통으로 구성해낸다.37) 필자는 이 관계를 니체의 해석주의와 인식론적으로 약화된 실재론의 입장을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알아보고자 한다.38) 이를 위해 위의 니체 읽기들의 증거로서 사용되는 니체의 유명한 말을 분석하고자 한다:


모든 생기하는 것들의 해석적 성격. 사건 그 자체라는 것은 없다. 생기하는 것은

해석자에 의해 현상들의 집합으로 읽혀지고 요약된다

KGW VIII 1 1[115], S. 34.


위의 글은 크게 두 종류의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첫째, 위의 글은 해석자의 세계와의 관점적인 관계맺음을 제시한다. 즉 생기하는 세계는 해석에 의하지 않고는 파악되거나 인식될 수 없다. 그렇다면 생기의 세계는 해석자에 의해 “읽혀지고”, “요약되며”, 이런 한에서 인식은 해석각인적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관점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신의 경험에서 생기세계를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해석은 따라서 가치각인적이며, 해석된 세계는 니체가 “우리와 상관하는 세계(die Welt, die uns etwas angeht; die Welt, die uns irgendwie angeht)”39)라고 명명하는 바로 그 세계이다. 이 방향의 니체 읽기는 생기세계를 해석작용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해석자의 생기세계와의 관계맺음(Bezug)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 전제는 생기세계가 이것을 경험하는 인간이 존재하고 또 그가 경험한 이후에 비로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더불어 생기세계가 인간이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그것에 부여한 성질들만을 갖는다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둘째, 위의 글은 다음처럼 읽혀질 수 있다. 경험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경험내용과 생기세계와는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건 그 자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인간의 해석작용에 의해 생겨난다. 여기서 외부의 생기세계는 “해석”이라는 마술개념에 의해 사라져 버린다.

위의 두 종류의 니체 읽기 중에서 첫째의 읽기가 타당한 것 같다. 니체의 다음의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의 글은 그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현상들 곁에 멈춰서서 “단지 사실(Thatsachen)들만이 있다”라고 말하는 실증주의에

반해서 나는 다음처럼 말하려 한다: 아니, 바로 그러한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고

해석들일 뿐이다.” 우리들은 어떤 사실 그 자체를 확정할 수 없다: 아마도 그런 것

을 바라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KGW VIII 1 7[60], S. 323.


만일에 위의 글이 실증주의와의 관계를 배제하고 읽혀진다면 앞서 말한 두 번째의 니체 읽기의 증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는 다음 글을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사실 자체(Thatbestand an sich)란 없다. 오히려 사실이 주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가 항상 먼저 넣어져야(hineinlegen)만 한다.”40) 이 두 글들은 니체를 반실재론자로 이해하는 두 번째의 니체 읽기의 증거로 실제로 많이 사용되지만, 사실상 이 글들은 반실재론적 의미가 아닌, 오히려 다음과 같은 니체의 인식론적 입장만을 대변한다: 생성세계는 해석자의 세계에 대한 모사설적인 관계나 세계의 직접적 소여등을 배제한 해석을 통해서만 파악가능하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니체 읽기가 정당하다고 하겠다. 과연 이런 이해가 어떻게 가능하고, 또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위의 인용문에서 표명된 “사실”이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사실을 의미하고, 여기서의 “사실”과 더불어 다른 글들에서 니체가 사용하는 “사실“41)이라는 개념이 지속성(Beständigkeit)과 관점에의 무의존성(Perspektivenunabhängigkeit)과 관계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밝히면 얻을 수 있다. 즉 변화를 배제하는 지속적인, 인식 주체의 관점성을 전제하지 않는 사실을 니체는 없는 것으로 말한다.

위의 인용글에서 니체가 언급하는 실증주의의 특징인 형이상학적 사유의 거부와 실증적-경험적 학문의 인정을 니체는 콩트(A. Comte), 밀(J. S. Mill) 그리고 마흐(E. Mach)를 통해 접한다.42) 그 중에서 특히 인간 인식의 생물학적 근거들의 중요성, 지속성과 물자체의 허구적 성격, 개념형성에서의 실제적 요구들의 기능등에 대한 마흐의 사유와 니체의 사유중에는 비슷한 부분이 많으며, 특히 위의 인용글은 직접적으로 마흐를 향해있다.43) 더구나 성질의 지속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마흐는 경험적으로 파악가능한 어떠한 성질들도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점과 성질들의 불변하는 담지자는 설정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거부한다. 마흐는 또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요소들의 복합(Elementekomplexe)”으로서의 “감각경험(Sinnesempfindung)”과 그것들의 복합체이라고 규정한다.44) 이 요소들의 복합 즉, 다양하고 무수한 요소들의 의존적 관계로서의 복합체가 실재의 근거로서 작용한다. 저러한 요소들의 복합이 특수한 학문들이 탐구할 수 있는 마지막 원리들이고, 바로 이런 한에서 이것들에 대한 물음이 가상적 물음이 아닌 학적 탐구의 대상이다.45)

니체의 위의 인용문에서 실증주의에 대한 공격은 바로 마흐가 제시하는 마지막 원리로서의 감각경험, 즉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실증적 의미로서의 ‘주어진 사실’ 및 ‘순수 원재료’ 등에로 향한다. 감각자료란 니체에게는 마흐가 생각하듯이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요소도 아니고, 순수 원재료는 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감각작용이 이미 힘에의 의지에 미리 규정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실증적 의미의 “사실”들에 비록 그것이 “전적으로 숨겨져 있기”46)는 하지만, 의지들의 해석 작용이 앞서서 전개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니체의 표현대로 “결코 사실들과 충돌할 수 없다”.47) 의지들의 해석 작용은 항상 서로 싸우고 스스로를 극복하려는 의지들의 생기작용이고, 따라서 해석 작용은 부단히 지속된다. 이런 생기 작용은 “흐르고, 붙잡을 수 없는”48) 것으로, 바로 이것이야말로 니체에게 “가장 원초적 사실들”로 이해되고 있다. 니체의 “...그 자체(...An sich)”에 대한 거부 역시 “사실”개념에서처럼 그것의 지속성과 관점성에의 무의존성 때문이다.49)

이것으로부터 명확해지는 점은 다음과 같다: 니체의 “사실”과 “... 자체”에 대한 거부는 한편으로는 생기와는 반대되는 자존적인, 미이라화된 그 자체,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 원재료나 직접적 소여 그리고 반영이라는 표상에 대한 거부이다. 이것으로 니체는 자신의 견해를 실증주의자 뿐 아니라 본질형이상학, 소박한 반영이론, 객관성의 이념등에 대립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인용글들에 대해서 단지 다음과 같은 점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해석자가 해석행위를 통해서만 생기세계를 파악할 수 있으나, 여기서 생기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해석자의 관계맺음은 이미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가와는 독립적으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우리는 그 세계 자체가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라고 말하는 반영이론적 실재론과는 다르다.


5.2 주체와 객체관계

해석 작용에서 주체와 대상은 해석 주체의 관점을 설정하는 힘의 규정적 기능에 의해 더 이상 모사설적 관계를 갖지 못한다.50) 오히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작용하고-반작용하는 (aktivieren-reaktivieren)” 관계를 맺는다.51) 여기서 주체와 인식 대상은 물론 서로 구별(unterscheiden)은 되지만, 인식 활동상 서로 분리(trennen)될 수 없는,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에서는 물론 주체의 관점적 활동이 우선적으로 대상에 작용한다. 따라서 인식 결과는 항상 주관적이고, 개별적이고 가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인식 주체의 외부 세계를 인식 주체의 영역에 남김없이 환원시킬 수 있다거나, 외부 세계가 해석하는 주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점과는 다르다. 니체의 다음 글은 이점을 잘 대변하고 있다: “개개의 힘중심은 전체의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즉, 자신의 특정한 가치평가를, 자신의 행위-양식을, 자신의 저항양식을 갖는다.”52) 여기서 물론 인식 주체가 경험하는 외부 세계(위의 글에서는 나머지 부분으로 명시됨)의 범위와 내용은 가변적이다. 같은 시점과 다른 시점을 막론하고 동일한 어떤 인식 대상이 인식될 수도 있고 인식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 한 대상에 대한 다른 식으로의 인식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외부 세계의 존재와 그리고 이 외부 세계와의 관계맺음(Bezug)이 없으면 니체가 말하는 해석 행위는 불가능하다. 이 관계맺음이라는 주체와 대상의 의존관계를 니체는 떠나지 않는다. 따라서 니체에 대한 다음의 비판, 즉 “니체가 실재론의 기본입장을 더 이상 유효하게 만들지 않는다”53)는 주장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인식 활동에서 물론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주관적 관점성을 배제한 외재적(external) 관점을 가질 수 없다. 또한 해석된 세계는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이고, 주체가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가 의미를 만들어 내는 그런 세계이다. 또 이 세계가 바로 주체에게 어떻게든 상관하는 세계(die Welt, die uns angeht)이다. 그러나 이 세계의 상정이 곧 대상으로서의 세계의 사라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해석된 세계의 범위는 단지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의 범위일 뿐, 대상으로서의 세계 자체의 범위와 같은 것은 아니다. 또한 내 해석의 한계는 나에 의해 경험된 세계의 한계일 뿐이다. 따라서 아벨의 다음과 같은 니체 비판은 적절하지 않다:“해석의 한계들은 세계의 한계들이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격언이 니체에 의해 확장된 것이다. 세계와 실재는 단지 해석안에 그리고 해석으로서(in und als Interpretation) 뿐이다. 실재는 버려질 수 없는 해석쉐마의 내적 기능이다. 그것의 논리는 의미론으로서 발전되었어야 했다.”54) 니체는 아벨이 말하듯이 멀리 나아가지는 않는다. 니체는 해석 작용 내에서 원텍스트가 사라져 버리고, 해석들만이 텍스트로서 남아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벨의 니체 이해와 여타의 니체를 반실재론자로 이해하는 견해들은 니체의 사유를 과장하고 있다. 니체 스스로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관점적 관계맺음의 불가피성이다. 둘째, 경험가능한 해석의 세계가 인간의 경험의 한계이고, 경험의 한계가 바로 인간 자체의 한계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해석의 세계는 하나의 그물이고, 우리는 그안에 잡혀 있다. 우리는 달리 말하면 니체의 표현대로 “유리잔을 나올 수 없는 파리”55)이다. 셋째, 해석 주체에게 상관하는 해석의 세계는 그에게는 ”완전히 옳다“56). 왜냐하면 이 세계는 해석 주체가 자신의 관점성에 의해 즉 생의 유지를 위해 창조한 의미세계이기 때문이다. 넷째,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해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는 절대로 세계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한계로서 인정해야만 한다.

이상의 니체의 입장은 현대 분석철학자 쿠체라와 해석주의자 렌크가 말하는 인식론적으로 약화된 실재론 (erkenntnistheoretisch abgeschwächter Realismus, erkenntnistheoretisch naiver Realismus)과 공동의 부분을 갖는다. 이 논의는 다음처럼 요약될 수 있다: 약화된 실재론은 자연을 경험의 대상으로 삼는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인식 주체의 관계맺음과 의존 관계 없이는 경험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것은 인식론적으로 우리가 자연을 어떤 external한 관점에 의해서 파악할 수 없고, 단지 자연이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제시되는 방식으로 우리는 자연을 붙들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라는 인식론적인 기본 사유에 의해 정당화 된다. 이것은 사유 가능한 대상들이 어떤 정신적인 것이나, 표상 혹은 이념들이라는 idealistisch한 오류추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 단적으로 대상들이 단지 우리에게만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하면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들을 생각하고 경험하는 한에서 존재하고 또 우리가 그 대상들에 귀속시키는 그러한 속성들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57)

물론 니체가 인식 과정 전반에 걸친 인식의 관점성 및 의지 작용, 그리고 인식 활동에 있어서 예외없이 적용되는 의지의 일차적 기능을 강조하는 점에서 쿠체라나 렝크의 논의와는 다른 면을 갖기는 하지만, 인식의 대상 관계적 차원에서는 이 입장을 취한다.

이상의 내용은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생기하는 것들의 해석적 성격”이라는 니체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본질 형이상학을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의 세계에 대한 그리고 객관적 경험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비판적인 한계설정을 한다. 더불어 소박 실재론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이다.



6.. 글을 마치면서: 가능한 비판 및 의의


해석으로서의 인식을 제시하는 니체의 사유는 개념 규정 과정에서 편협함을 보인다. 해석을 관점적인 평가작용으로 보는 니체는 관점을 규정하는 의지의 작용을 강조하며, 이것 이외에 인간의 사회, 역사적 조건들의 의미가 지나치게 축소된다. 이는 곧 모든 인식의 유형을 해석에로 귀속시키는 환원주의의 입장이다. 만일 니체가 말하듯이 인간에 내재하는 더 이상 다른 것으로 소급될 수 없고, 인간이 생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관점성이고, 또 이것이 자기 극복과 자아 상승의 욕구로 나타나는 생에의 의지의 조건이라면, 당연히 개개인의 독특한 역사나 그들이 처해 있는 사회․역사적 여건 역시 해석을 규정하는 조건들로 고려되어야 하는데, 이 점에 대한 고려가 니체에게서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모든 인식은 관점적 해석이다’라는 니체의 환원주의적 사유는 논의의 불충분함을 보인다. 아주 원초적인 개개인의 습관에 관한 진술이나, 자연과학적 설명, 수학적 지식, 논리학, 철학적 명제 등등 모든 종류의 인식의 본질이 원칙적으로는 같다는 점을 말하는 니체는 방향과 단계의 차이가 명백한 다양한 인식의 유형들에 대한 차별적인 고려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나 해석으로서의 인식의 내용은 충분히 철학적으로 논의할 만한 부분들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인식은 해석이고 해석은 관점적 평가작용이다’라는 니체의 사유는 인간 인식에 대한 문제를 새로운 차원에서 접근한다. 인식은 인간의 삶과 직접적인 연관하에서 고찰되어 가치중립적인 이론 인식과 인식을 위한 인식이란 사유는 유명무실하게 된다. 인식 활동은 이제 삶의 실천(Lebenspraxis)차원에서 이해된다. 둘째, 인간 인식의 다원성과 역사성에 대한 강조를 들 수 있다. 인간 인식의 다원성과 역사성에 대한 옹호는 곧 해석이라는 실험을 통한 세계에 대한 무한한 인식 가능성에 대한 옹호이다. 셋째, 니체의 인식론적으로 약화된 실재론의 입장은 해석하는 이성을 겸손한 이성으로 해석하는 필자의 제안을 강화시킨다. 즉 인간의 경험 세계 및 해석된 세계와 텍스트로서의 세계의 구분, 세계의 객관적인 실재와 그것과 해석 주체의 관계맺음, 그리고 관점성을 배제한 외재적 관점의 거부, 한 해석의 정당성이 이 해석의 객관성을 논리적으로 보증하지 못한다는 점(여기서 객관성이란 인식 대상과 해석의 대응을 의미한다)을 말하는 니체의 입장은 해석이란 필연적으로 생성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해석 주체의 개별성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점에 대한 긍정이다. 따라서 인간 인식의 필연적인 한계를 한계로 인정할 수밖에 없고, 또 인정하려는 겸손한 이성을 요청하게 된다. 만일에 그렇지 않다면 이성은 다시 실재의 규준 역할을 하게 되며,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오류들을 마치 오류가 없는 것으로 절대화시키고, 우리가 마치 하나의 궁극적 진리를 발견한 듯한 귀결을 갖게 된다. 이는 다시 어떤 하나의 해석, 어떤 하나의 진리만을 고집하는 니체가 말하는 과거 형이상학이 취했던 독단을 다시 범하는 것이다.

실재론자로서의 니체의 견해는 비단 니체의 형이상학과 이성 비판의 맥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철학의 추세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극도의 인식 다원론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대 철학의 추세, 예를 들어 “우주는 서술되는 방식들로 구성되어 있다(N. Goodman)”, “세계의 상실(R. Rorty)” 혹은 “실재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해석들뿐이다, 나의 해석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G. Abel)” 등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재조명해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