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질 들뢰즈, 사유 안에서 사유하기가 발생하는 과정

나뭇잎숨결 2020. 2. 12. 12:54

 

  

질 들뢰즈, 사유하기: 사유 안에서 사유하기가 발생하는 과정

 

인식능력들로 하여금 자신들 각각의 한계에 이르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매개되고 재현과 결부된 형태들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차이 그 자체의 자유롭거나 야생적인 상태들이다. 이것은 감성적인 것 안의 질적 대립이 아니라 그 자체로 차이인 어떤 요소이고, 게다가 이 요소는 감성적인 것 안에서 질을 창조하는 동시에 감성 안에서 초월적 실행을 창조한다. 이 요소는 곧 강도이고, 이 강도는 순수한 즉자적 차이에 해당한다.(320)

 

마주침 안에서 강도를 직접적으로 포착하는 초월적 감성의 관점에서 보면, 이 요소는 동시에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다. 또 감성이 자신이 겪는 강제력을 상상력으로 전달하고, 그래서 이제는 상상력이 초월적 실행으로 고양될 때, 상상되어야 할 것, 오로지 상상밖에 될 수 없는 것이자 경험적으로는 상상 불가능한 것을 구성하는 것은 환상이고 환상 안의 불균등성이다. 또 기억의 단계에서는, 어떤 초월적 기억의 아득한 태고를 구성하는 것은 상기 안의 유사성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시간의 순수한 형식 안에 있는 비유사성이다. 그리고 이 시간의 형식에 의해 균열된 어떤 나는 마침내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도록 강제받기에 이른다. 사유는 오로지 사유를 야기하는 것, 사유되어야 할 것에 직면하여 겪게 되는 강제와 강요의 상태에서만 사유할 따름이다.(321)

 

사유되어야 할 것으로 이르는 길에서는 진실로 모든 것은 감성에서 출발한다. 강도적 사태에서 사유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사유가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어떤 강도를 통해서이다. 강도적인 것, 강도 안의 차이는 마주침의 대상인 동시에, 이 마주침을 통해 감성이 도달하게 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감성이 마주치는 것은 신이 아니고 다이몬이며, 도약, 간격, 강도적이거나 순간적인 것 등의 역량들이며, 이것들은 차이를 메우되 오로지 차이나는 것을 통해 매운다. 이것들은 경계에 놓인 기호들이다. 감성에서 상상력으로, 상상력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다시 사유로 어떤 이행이 일어날 때-각각의 탈구된 인식능력이 다른 인식능력으로 폭력을 전달하고, 이 폭력을 통해 이 인식능력이 자신의 고유한 한계에 이르게 될 때- 어떤 자유로운 형태의 차이가 매번 인식능력을 일깨우고, 게다가 이 차이의 차이소로서 일깨운다. 강도 안의 차이, 환상 안의 불균등성, 시간 형식 안의 비유사성, 사유 안의 미분 등이 그것이다. 대립, 유사성, 시간 형식 안의 비유사성, 사유 안의 미분 등이 그것이다. 대립, 유사성, 동일성, 그리고 심지어 유비까지도 차이의 이런 여러 가지 현시 작용들에 의해 산출된 어떤 효과들에 불과할 뿐, 차이를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어떤 재현된 사태로 만드는 조건들이 아니다.(322-323)

 

아르토에게 있어서 문제는 자신의 사유에 방향을 설정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이 사유하는 것에 대해 완벽한 표현을 찾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응용과 방법을 얻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시들에 대해 최대한의 완성도를 추구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문제는 그저 무엇인가를 사유하기에 이르는 데 있다. 사유가 사유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결국 사유 자체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붕괴, 사유 자체의 균열, 사유에 고유한 자연적 “무능”이다. 이런 무능은 사유의 가장 커다란 역량과 구별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유되어야 할 것들, 아직 말로 표현되지 않은 이 힘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이고, 이 힘들은 그대로 사유의 절도나 불법 침입에 해당한다. 이 모든 점에서 아르토는 끔찍스럽게 드러나는 어떤 이미지 없는 사유를 추구하고, 또 재현을 용납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권리를 끝까지 장악하고자 한다. 그는 본연의 어려움과 이것에 뒤따르는 문제와 물음들이 사실적 차원의 사태가 아니라 사유의 권리적 구조임을 안다. 기억상의 기억상실증 환자, 언어상의 실어증 환자, 감성상의 지각불가능증 환자 등과 마찬가지로 사유상의 무두인이 있음을 안다. 그는 사유하기가 본유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사유 속에서 분만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사유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고, 그 밖의 다른 창조는 없다. 하지만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유 속에 ‘사유하기’를 낳는 것이다.(327-328) 가능성으로서의 자궁으로 충분하지 않다. 아이를 ‘낳는 행위’여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한다. 이 정의는 ‘이성적’ 이라는 개념과 ‘동물’이라는 개념이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가정한다. 데카르트는 이 정의를 거부하고 코기토를 제시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명시적으로 가정하는 개념들인 객관적 전제들을 멀찍이 밀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번엔 새로운 전제들이 스며들어 있다. 개념 안에 담겨있지는 않으나 어떤 ‘느낌’ 안에 놓여있는 전제들, 즉 주관적이거나 암묵적인 전제 말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개념에 의존하지 않고도 ‘자아’, ‘사유’, ‘존재’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주관적이거나 암묵적인 전제는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바로 이것이 재현의 형식이고 재현적 주체의 이야기 형식이다.

 

들뢰즈는 철학의 개념적 사유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사유의 이미지를 지적한다. 첫 번째는 바로 사유를 보편적 본성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사유하기에 사람들은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보편적 본성으로서의 이 자연적 사유는 사유 주체의 선한 의지와 사유의 올바른 본성을 전제한다. 사유 주체는 선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사유는 참, 진리를 지향한다. 사유는 선한 본성을 갖고 있다. 들뢰즈는 이런 사유의 이미지를 독단적, 교조적, 도덕적 이미지라 부른다. 왜 사유 주체의 의지를 선하다고 하는가? 왜 그의 사유는 참과 진리의 편에 있어야만 하는가? 니체는 철학의 일반적 전제들이 본질적으로 ‘도덕적’ 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오로지 도덕만이 우리에게 사유가 선한 본성을 지니고 사유 주체가 선한 의지를 지녔음을 설득할 수 있고, 또 오로지 선만이 사유와 참 사이에 가정된 친근성을 근거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에 역시 “아니오”라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사유의 도덕적 이미지를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이를 통해 철학은 어떤 ‘이미지 없는 사유’안에서 자신의 본래적인 반복을 찾게 될 것이다. 사유가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선-철학적 이미지와 그 공준들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할 때뿐이다. ‘아니오’라고 외치는 그 열정과 고립 속에서 마침내 사유가 탄생한다. 악한 의지로 가득 찬 어떤 독특한 사람만이 실질적으로 사유한다.

 

 

사유의 암묵적인 두 번째 이미지(공준).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로서의 공통감과 이 일치를 보증하는 할당으로서의 양식이라는 이상. 재인의 모델은 인식능력(감각 지각 기억 상상 사유)들이 조화롭게 일치한다는 공통감을 요구한다. 대상의 동일성 형식은 철학자에게 어떤 근거를 요구하고, 이 근거는 다른 모든 인식능력들을 양태로 하고 있는 어떤 사유하는 주체의 통일성 안에 있어야 한다. 코기토는 주체 안에 있는 모든 인식능력들의 통일성을 표현한다. 양식과 공통감은 사유가 아니라 독사의 두 구성요소이다.

 

사유의 암묵적인 세 번째 이미지(공준)는 재인의 활동-모든 인식능력들을 똑같다고 가정된 하나의 대상에 적용되도록 유도-을 사유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연필이다. 이것은 빵이다. 안녕 오라클. 나는 지금 생각(사유)하고 있는가? 대상이 아니라 ‘가치들’을 재인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확립된 모든 권력들, 가치들을 재인하는 사유를 진정 사유라 할 수 있는가? 그 누구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는 사유, 사유하는 자에게도 그 밖의 다른 이들에게도 일체 고통을 주지 않는 사유는 도대체 사유일 수 있을까? 재인의 기호 속에서 사유는 다만 국가를 재발견하고 교회를 재발견하고 시대의 모든 가치들을 다만 재발견할 뿐이다. 확립된 것은 그 정체성이 파악되기까지 약간의 경험적 시간이 필요하다해도 애초부터 확립된 것이었다. 새로운 것의 고유한 측면, 즉 차이는 사유 안에서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재인과는 무관한 어떤 힘들을 자극하는 데 있고, 재인된 적도 없고 재인할 수도 없는 어떤 미지의 대지 안에서 전혀 다른 모델의 역량들을 자극하는 데 있다. 차이, 진정한 사유는 ‘본유성’의 껍질을 벗겨내고, 또 매번 사유를 언제나 현존했던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제와 강요를 통해 시작하는 어떤 것으로 취급하는 바로 그런 와해-어떤 중심적인 악한 의지, 어떤 중심적인 와해-와 더불어 도래한다.

 

칸트는 사유의 이미지를 전복하기 위해 무장한 듯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암묵적인 전제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사유는 계속 올바른 본성을 향유해야 했고, 철학은 공통감 그 자체나 ‘상식적인 대중의 이성’보다 더 멀리 나아갈 수 없거니와 그와 다른 방향들로 나아갈 수도 없어야 했다. 칸트는 공통감의 형식을 전복하기는커녕 복수화했을 뿐이다. 죽은 신과 균열된 나는 어떤 다른 관심, 실천적이거나 도덕적인 관심 안에서 부활하여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공고해지고 확실해지며,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을 확신하게 된다.

 

사유의 암묵적인 네 번째 이미지(공준). 사유가 재현의 요소 내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것. 재현은 개념 안의 동일성, 개념의 규정 안에 있는 대립, 판단 안의 유비, 그리고 대상 안의 유사성 등의 요소들에 의해 정의된다. 재현 안에서는 동일성을 띤 것, 대립하는 것, 유비적인 것, 유사한 것 등만이 차이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차이가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언제나 개념적으로 파악되는 어떤 동일성, 판단을 통해 주어지는 어떤 유비, 상상에 의한 어떤 대립, 지각상의 어떤 상사성과 관계 맺을 때이다. 재현의 세계는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하는 데는 물론이고 또한 반복을 그 대자적 측면에서 있는 그대로 사유하는 데 무능력하다.

    

 

차이론적 인식능력 이론

 

사유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사태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태가 있다. 사유는 대상을 재인하는 데 얼마든지 열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열중과 동원은 사유한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시, 나는 생각한다(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떠올려보자. ‘의심’이 재인의 관점을 떠나게 할 수 있을까? 이 정의는 의심과 확실성을 본질적으로 구별짓는 것이 무엇인지를 식별하려는 의지가 이미 사유에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확실한 사태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할까? 삼각형의 세 각은 두 직각과 동등하다. 확실한 사태들은 물음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을 미리 가정한다. 이 역시 사유 속에 사유하는 행위를 분만하지 못한다.

 

개념들이 지칭하는 것은 단지 어떤 가능성들에 불과하다. 개념에는 어떤 발톱이 없다. 절대적 필연성의 발톱, 사유에 가해지는 어떤 원천적 폭력의 발톱, 어떤 이방성의 발톱, 어떤 적의의 발톱 같은 것이 없다. 사유는 오로지 이런 적의의 발톱을 통해서만 자연적 마비 상태나 영원한 가능성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 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 침입, 폭력, 적이다. 또 사유 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지혜의 사랑을 상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것은 어떤 지혜의 증오에서 출발한다.(310-311)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어떤 사태는 근본적인 마주침의 대상이지 결코 어떤 재인의 대상이 아니다. 마주침의 대상의 첫 번째 특성은 오직 감각밖에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어, 이거? 이게 뭐지? ... 무언가 감각은 되는 데 뭐라 명명할 수 없는 것. 상기 상상 지성이 작동되는 않는 순간.) 마주침의 대상은 감각 속에 실질적으로 감성을 분만한다. 이것은 감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각되어야 할 어떤 것이다. 이것은 어떤 질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기호이다. 이것은 어떤 감성적 존재자가 아니라 오히려 감성적인 것의 존재이다. 이것은 주어진 어떤 소여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통해 비로소 소여가 주어진다. 게다가 이것은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보면 감각불가능한 것이기도 하다.(312)

 

마주침의 대상이 지닌 두 번째 특성.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것은 영혼을 뒤흔들고 ‘막-주름지게’ 만들며, 다시 말해서 어떤 문제를 설정하도록 강요한다. 말하자면 마주침의 대상, 곧 그 기호가 마치 문제를 머금고 있었던 양, 마치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양 그렇게 강요하는 것이다.(312)

 

인식능력들이 조화롭게 일치한다는 사유의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근본적인 마주침의 대상은 이 이미지에 균열을 낸다. 모든 인식능력들이 수렴하면서 어떤 하나의 대상을 재인하려는 공통의 노력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떤 발산적인 노력이 목격되고, 여기서 각각의 인식능력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관련된 ‘고유한’ 측면과 마주하게 된다. 불화를 겪는 인식능력들, 연쇄적으로 이어지는 힘, 실처럼 이어지며 불타는 화약. 각각의 인식능력은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다른 인식능력으로부터는 오로지 어떤 폭력만을 수용한다. 감성은 마주침을 통해 감각되어야 할 것을 감각하도록 강요되지만, 이번에는 감성이 다시 기억을 강요하여 기억되어야 할 것, 오로지 상기밖에 될 수 없는 것을 회상하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초월론적 기억은 다시 사유를 강요하여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사유되어야 할 것, 곧 본질을 파악하게 만든다. 이것이 마주침의 대상이 지니는 세 번째 특성이다. 감각되어야 할 것에서부터 사유되어야 할 것에 이르기까지 개봉되고 전개되는 것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의 폭력이다.

    

 

들뢰즈는 플라톤이 인식능력들에 대한 우월한 사용이나 초월론적 실행을 발견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용이나 실행을 감성적인 것 안의 대립 형식, 상기 안의 상사성 형식, 선 안의 유비 형식에 종속시킨다. 플라톤은 감성적인 것의 ‘존재’를 어떤 단순한 ‘존재자’, 어떤 순수한 질적 ‘존재자’와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기는 과거의 어떤 ‘존재’와 어떤 과거적인 ‘존재자’를 서로 혼동한다. 상기의 압력 아래 사유하도록 강요받는 것, 본질을 정의하는 것은 실재적 자기동일성의 형식이다.(317) 선 안의 유비 형식 위에 근거하는 어떤 선한 본성과 어떤 선한 욕망이 이미 전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