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블로그 개설하고 매해 올린 포스팅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인생의 책이 있다면 나에게 들뢰즈의『차이와 반복』은 그런 의미의 책이다. 들뢰즈의 모든 저서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 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을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를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들뢰즈의 저서들은 가속력이 붙지 않는다. 앞문장과 뒷문장의 연결이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것 뿐 아니라, 그가 주목한 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니체, 베르그송 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가지뻗기를 많이 해야 하는 들뢰즈 읽기, 들뢰즈의 저서는 철학의 한 사유, 체 혹은 틀 뿐 아니라, 21세기 문화 - 문학연구를 바라보는 틀, 자본주의를 작동하는 원리를 관통하는 시선으로 정착했다. 들뢰즈의 리좀 시리즈 가운데 『차이와 반복』, 『안티오이디푸스』,『천의 고원』 등을 몇 년째 읽고 있다. 텍스트 밖으로 나갔다 안으로 들어오기를 반복하면서... 들레즈의 저서를 읽어내는 길은 철학이나 인문학 하면 언뜻 떠올리기 쉬운 방법론(methodology)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비판 또는 어떤 이론을 구축하는 것을 겨냥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모든 사유의 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유하는 방법에 대한 사유(noology)를 겨냥하고 있다. 즉 방법을 정교하게 구축하는 대신 그러한 방법론이 어떤 근거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며, 이념의 논리(즉 ideo-logy)를 찾거나 그럼 이념들이 어떤 뿌리에 근거하여 번성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들뢰즈 여러 저서들 가운데『차이와 반복』은 나에게 책에는 길이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책이기도 하다.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과 접목시켜 읽노라면 자유의 지평이 한없이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여기서 일반적인 상식을 넘는 <차이> 에 대한 개념정립이 관건이다. <차이>는 <반복>을 낳게 하는 원인으로, <차이>는 자기 갱신의 내적 에너지를 일컫는다. 그 역도 물론 성립한다. 상승의 에너지에 의한 차이 안에서의 반복은 대자적 영겁회귀를 가능케하는 옷 입는 반복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의 반복은 소아병적인 헐벗은 반복, 생의 비루함과 치졸함과 배고픔을 확대 재생산하는 좀비적 '리좀'에 해당한다. 마치 연쇄범죄처럼 어둠의 블랙홀로 함께 빨려들어가는 탕진의 매커니즘이 될 것이다. 차이와 반복에서 또 하나의 관건은 두 개의 매커니즘이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히틀러나 간디는 21세기에 다른 모습으로 여전히 사회 속에 우리 내부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안과 밖, 혹은 어둠과 빛으로 미끄러지면서 상승하거나 경계에 서거나 하면서 영겁회귀를 반복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는 이렇게 말했다>와 <비극의 탄생>에 나타나는 영겁회귀가 아주 다른 방향에서 제기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우상숭배의 파기가 가능한 것이다. 어떤 책도, 어떤 스승도 정착의 도그마가 될 수 없다. 이것은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노마드> 논쟁 조차 통과한 유목적 사유가 필요한 이유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중력을 거스리는 법칙처럼 인류역사에 던진 명암의 매커니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두 상태의 정태적인 비교에서 도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라리 두 상태가 만나고 섞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헛바퀴를 도는 공전, 도덕적 습관, 흉내내기와 반복의 외피와 내피르 통찰해 보는 일, 동일성의 원리가 반복을 가능케 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반복을 가능캐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차이의 에네르기를 긍정해야 한다. 차이의 긍정이다. 책의 도입부에 들뢰즈는 반복과 차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모네의 수련 연작을 언급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고 보았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모네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모네의 수련 연작은 모네가 지닌 영겁회귀에 대한 대자적 갈망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내 인생의 필독서 가운데 하나로 꼽는 이유 역시 나의 영겁회귀에 대한 대자적 갈망이 『차이와 반복』에서 빛과 수련처럼 조응되기 때문이다. 밖의 보편자(빛 혹은 신)에서 내 안의 보편자(완성된 인성)가 차이와 반복을 거듭하며 영겁의스펙트럼을 만들듯...
절대적으로 똑같은 개념을 지니고 있는 어떤 동일한 요소들 앞에 있을 때 우리는 반복에 대해 말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이산적 요소들, 이 반복되는 대상들과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것들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반복하는 비밀스런 주체,반복의 진정한 주체이다. 우리는 반복을 대명사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반복의 자기(自己)를 발견해야 하며, 스스로 반복하는 독특성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반복자 없이는 반복이란 없기 때문이며, 반복하는 영혼 없이는 반복되는 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것과 반복하는 것, 대상과 주체의 구별보다는 오히려 반복의 두 가지 형식을 구별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반복은 개념없는 차이다. 그러나 첫 번째 경우 차이는 단지 개념에 외부적인 것으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로서, 무차별성을 띤 시간과 공간으로 추락한다. 두 번째 경우 차이는 이념의 내부에 있다. 이 차이는 이념에 상응하는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어떤 순수한 운동으로 펼쳐진다. 첫 번째 반복은 같음의 반복이고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된다. 두 번째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며 스스로 이념의 타자성 안에, 어떤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포괄된다.
첫 번째 반복은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이며, 두 번째 반복은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가언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정언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정태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동태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결과에서 일어나고 두 번째 반복은 원인 안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 반복은 외연 안에서 일어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강도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평범하고, 두 번째 반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 첫 번째 반복은 수평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수직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개봉되고 설명되지만, 두 번째 반복은 봉인되어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 첫 번째 반복은 공전의 성격을 띠고 있고, 두 번째 반복은 진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이 동등성, 통약 가증성, 대치성을 띠고 있다면, 두 번째 반복은 비동등성, 통약 불가능성, 비대칭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믈질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자연과 대지 안에서조차 정신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생기가 없으나 두 번째 반복은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헐벗은' 반복이지만, 두 번째 반복은 옷 입은 반복으로서, 스스로 복장을 하면서, 가면을 쓰면서,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 첫 번 째 반복은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두 번째 반복의 기준은 진정성에 있다.
- 질 들뢰즈, 김상환 역, 『차이와 반복』, 민음사, 2004, pp73~78 .
오랜 오류의 역사, 그것은 곧 재현의 역사, 모상들의 역사이다. 사실 같은 것, 동일자는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차이나는 것의 영원회귀가 그것이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영원회귀는 그 회귀 가운데 스스로 어떤 특정한 가상을 불러일으키고, 그 가상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본다. 또 영원회귀는 그 가상을 향유하고, 그 가상을 이용하여 차이나는 것에 대한 자신의 긍정을 이중화한다. 즉 영원회귀는 이제 마치 차이나는 것의 목적인 양 어떤 동일성의 이미지를 생산한다. 영원회귀는 '계속되는 불일치'의 외면적 효과에 해당하는 어떤 유사성의 이미지를 생산한다.(......)오히려 존재자들은 모든 형식들에 의해 열려있는 일의적 존재의 공간 안에서 할당된다. 개방성은 일의성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유비의 정착적 분배들에는 유목적 분배들이 대립한다. 또는 일의적인 것 안의, 왕관 쓴 무정부주의자들이 대립한다.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 온다!"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여기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은 평등하다와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는 차이의 극단에 도달했을 때만 언명될 수 있는 말이다.
<차이와 반복>은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와 더불어 들뢰즈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책이다. 앞의 것이 주논문, 뒤의 것이 부논문이다. 앞의 것이 동일성의 사유 아래 억압당해온 ‘차이의 철학’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면, 뒤의 것은 그 동안 외면당해 온 사상가 스피노자를 본격적으로 조명하게 만든 결정적인 책이었다.
예전에 푸코는 <차이와 반복>과 그 이듬해에 출판된 <의미의 논리>를 묶어서 ‘철학극장’이라는 제목의 서평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서평은 첫 문장에 적어놓은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같은 예언으로 인해 더 유명해진 바 있다: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20세기가 들뢰즈만의 세기가 될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들뢰즈 없이는 생각하기 힘든 세기가 되리라는 것은 지금 들뢰즈의 이름이 유령처럼 온 세상을 떠도는 것을 보면 이미 어느 정도는 입증된 것처럼 보인다.
들뢰즈가 이 책뿐만 아니라 이후의 책들에서 일관되게 ‘차이의 철학’을, 그리고 ‘차이의 정치학’을 하고자 했다는 것은 이젠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자유주의자들마저 ‘차이’에 대해, ‘차이의 정치학’에 대해 말하는 지금, 과연 ‘차이’를 말하는 게 무슨 별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이로써 오히려 분명해진 건,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차이를 말하는가가 문제라는 사실이다.
사실 철학자가 차이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같다’는 것이 ‘다르다’는 것의 짝인 이상, 차이를 말하지 않고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뢰즈가 겨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헤겔도 동일성만큼이나 차이에 대해 말한다. 문제는 거기서 차이가 동일성에 복속되어 있고 그것에 포섭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생물학에서 지금도 사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 개념은 가령 호랑이라는 ‘종’이 다른 종과 다른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그 차이는 고양이과라는 동일한 ‘유’ 개념 안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
또 하나,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란 두 상태의 정태적인 비교에서 도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차라리 두 상태가 만나고 섞임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양인 A가 인디언인 B에게 “나는 너와 달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양자를 비교해서 서로에게 없는 차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자도 이런 의미의 차이는 안다. 그들은 그 차이에 앞선 것과 뒤처진 것의 자리를 할당하곤, 뒤처진 것을 앞선 것에 맞추고자 한다. 즉 차이는 부정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것이 ‘문명화’고 ‘계몽’이다. 자유주의자라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자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나도 네 인생에 참견하지 않을테니, 너도 내 일에 참견하지 말란 말이다. 이 경우 차이를 말하는 것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동일하게 존속하겠다는 말이 된다. ‘관용(tolerance)’ 또한 여기서 멀리 나간 게 아니다. “나는 너와 다르지만, 네 차이를 존중하겠다”는 것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감수하겠다는 말일 뿐이다. 달라도, 혹은 싫어도 참고 견디는 것, 그것은 차이를 긍정하는 게 아니다. 진정 차이를 긍정하는 자라면, 자신과 다른 것과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이 달라지겠고 생각한다. 그것이 차이를 진정 긍정하는 것이고 차이를 생성으로서 파악하는 것이다.
차이의 긍정, 혹은 생성으로서의 차이란 이런 점에서 ‘반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A가 B와 만나 A'이 되고, C와 만나 A''이 되었을 때, 여기서 A의 궤적 A-A'-A''-...은 A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가령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그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똑같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 그것은 반복의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그러나 그런 반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제거하는 반복도 있다. 가령 실험실에서 동일한 약품을 섞을 때, 온도나 양 등의 차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온도를 동일하게 하고 실험해야 한다. 차이를 만드는 조건을 제거하여 원하는 요인이 동일한 결과를 반복하게 만들지 못하면 실험은 실패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실험은 차이 없는 반복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반복에는 두 가지가 있는 셈이다. 차이의 반복과 차이 없는 반복. 차이의 반복으로 인해 들뢰즈는 베르그송과 달리 반복을 긍정할 수 있었다. 베르그손에게 반복이란 습관처럼 차이 없이 되풀이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니체의 ‘영원회귀’를 “차이나는 것만이 되돌아온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들뢰즈는 이와 다른 종류의 반복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긍정한다. 이 두 가지 반복은 동일성마저 차이로 정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일성이란 차이나며 반복되는 것에서 차이를 제거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의 철학은 차이가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이고, 차이가 생성으로서 정의되는, 그리하여 차이를 긍정하는 철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차이의 철학은 차이의 철학이란 이유로 인해 근본적인 난점에 부딛친다.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일차적인 ‘원리’로 삼는 철학이다. 그러나 차이의 철학이 차이를 원리로 삼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는 순간 차이는 모든 것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또 다른 동일자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 포기한다면 차이의 철학은 불가능한 기획이 된다.
이를 위해 들뢰즈는 차이를 하나의 ‘이념’으로 설정한다. 그런데 이 ‘이념’이란 말은 칸트에게서 빌린 것이지만 칸트나 플라톤과 달리 어떤 이상적 모델이나 ‘근거’가 아니라 차라리 ‘문제’다. 그것은 차이를 근거 삼아 모든 것을 추론하는 원리가 아니라 모든 것에서 차이가 작동하게 하는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원리나 법칙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미분소’ dx 같은 것이다(미분differential은 차이difference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내용도, 규정도 없지만, dy나 dt 같은 다른 미분소와 만나 규정가능한 것이 되는 것(가령 xdx+ydy=0). 무한소에 가까운 차이조차 포착하게 하지만, 동일한 것은 동일한 것으로 다룰 수 있는 것. 힘관계가 미분방정식(‘문제’!)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러한 ‘이념’이 ‘문제’와 결부된 것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어 동일한 방정식(문제)으로 표시된 場은 동일한 관계를 갖는 것임을 안다면, 이 기이한 이념이 동일성 또한 다룰 수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념’과 반대쪽에 있는 것은 개별적이고 개체적인 것이다. 이념이 추상적이라면, 개체는 구체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층위에서 차이적/미분적(differential) 관계가 개체화되는 것을 다루기 위해 들뢰즈는 ‘강도(intensity)'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강도란 힘의 차이를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미분적인 관계는 강도적인 양을 통해서 개체적 차이로 구체화(분화)된다. 예컨대 유전자는 뉴클레오티드들의 이웃관계(미분적 관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는데, 이러한 관계는 수정란 표면에 새겨지는 힘의 강도들을 통해 상이한 기관들로 분화된다. 이처럼 유기체는 차이적 관계가 작동하여 만들어지는 것이고, 그 관계의 차이에 따라 다른 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감성적인 것’ 또한 ‘강도’(차이)로 설명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차이라는 말에서 흔히들 상상하는 ‘사소한 것에의 함몰’과 반대로, 이른바 ‘포스트모던’ 시대에 때 아닌 거대 존재론을 꿈꾸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의 개념을 통해 존재자들의 양상들을 설명하려는 그런 존재론을. 그것은 일종의 메타피직스metaphysics다. 그러나 하나의 원리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metaphysics’이 아니라, 자연학(physics)에 의거하여 자연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란 의미에서 ‘메타-피직스’다. 이러한 차이의 존재론은 이후 >의미의 논리>에서 의미를 다루는 ‘사건의 철학’으로 전개되고,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의 고원>에서 자본주의와 대결하는 역사-정치학으로 확장된다.
차이의 긍정, 혹은 생성으로서의 차이란 이런 점에서 ‘반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A가 B와 만나 A'이 되고, C와 만나 A''이 되었을 때, 여기서 A의 궤적 A-A'-A''-...은 A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가령 모네의 <수련> 연작은 빛과 수련이 만나 만들어진 차이들이 만날 때마다 다르게 반복되어 그려진 것이다. 빛 안에서의 차이, 혹은 빛으로 인해 야기되는 수련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한, 수련은 항상 다른 수련으로 반복되어 그려진다. 더 이상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그는 수련을 더 그릴 수 없게 된다. 똑같은 그림에 지나지 않는 것, 그것은 반복의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이처럼 차이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되돌아온다. 반복한다는 것은 행동하는 것이며,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단독자 안에서 일어나는 반복의 반향이다.
왜 모든 반복은 대자적 반복일까?(즉자적 반복은 없다)
1절) 반복: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흄의 테제-‘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이것이 양태변화의 본질이다) 어째서 반복되고 있는 요소나 경우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반복을 지배하는 불연속성이나 순간성의 규칙은 어떤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는 어떤 차이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한다. 대자적 측면은 반복을 필연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야 하는 어떤 근원적 주관성에 해당한다. (반복의 역설: 응시하는 정신 안에 차이나 변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반복이다. 하시만 반복은 그 차이나 변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수축은 어떤 시간의 종합을 이루어낸다. 시간은 어떤 근원적 종합 안에서만 구성된다. 순간들의 반복을 대상으로 하는 이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서로 안으로 수축한다. 이 종합을 통해 살아 있는 현재가 구성된다. (이 종합은 수동적 종합이며 구성적이다. 이 종합은 기억과 반성에 앞서 응시한 정신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수동적 주체의 주관성이다. 수축은 살아 있는 현재안에서, 지속으로서의 이 수동적 종합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시간은 현재 안에서 펼쳐진다. 선행하는 순간들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한다. 기대는 그런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예상이므로 미래또한 현재에 속한다. 살아 있는 현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지만, 그 과거와 미래는 현재 자체가 시간 안에서 구성한 과거이자 미래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살아있는 현재
기억은 자신에게 고유한 ‘시간의 공간’안에 특수한 경우들을 보존하고, 그런 가은데 이 경우들을 구별되는 경우들로 재구성한다. 과거는 재현에 의한 반성적 과거, 반성되고 재생된 특수성이다. 미래는 예견에 의한 반성적 미래, 지성에 의해 반성된 일반성이다.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이 상상력의 수동적 종합과 중첩되고 또 능동적 종합이 수동적 종합에 의존한다.
반복의 구성에서 세 가지 층의가 함축되어 있다. 먼저 즉자의 층위가 있다. 그러나 사유 불가능하다. 그 다음 수동적 종합에 따르는 대자적 층위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층위에 기초한 반성적 재현의 층위가 있다.
베르그손의 예 A A A A라는 요소의 반복(닫힌 반복)이다. 흄의 예 AB AB AB A...는 경우들의 반복(열린 반복)이다. 그러나 경우들의 반복이 열려 있다면, 그것은 이항 대립을 통해 요소들 사이에 폐쇄적 관계가 성립한 이후이다. 요소들의 반복이 닫혀 있다면, 그것은 그 배후에 경우의 구조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이다.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이러한 반복의 두 형식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다. 즉 경우들의 반복은 요소들의 반복을 가정하지만, 요소들의 반복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서 경우들의 반복 안으로 들어간다.
습관, 수동적 종합, 수축, 응시
반복의 두 형식 사이의 구별보다 어떤 수준들의 구별이 중요하다. 한 형식과 다른 형식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조합되는 수준들이 있다. 지각된 대상 그 자체는 두 가지 사태를 함축한다. 먼저 경우들의 수축이 있고, 이 수축을 통해 한 성질은 다른 성질 안에서 독해된다. 다른 한편 어떤 구조가 있는데, 이 구조 안에서 대상의 형식은 그 성질과 짝을 맺는다. 그러나 구성적 수동성의 질서 안에서 지각적 종합들의 배후에는 어떤 유기체적 종합들이 자리 한다. 이는 마치 감관들의 감성이 우리의 존재에 해당하는 어떤 원초적 감성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모든 유기체는 수축(현재), 파지(과거), 기대(미래)들이 어우러진 어떤 종합이다. 체험된 현재가 이미 시간 안에서 어떤 과거와 미래를 구성하고 있다. 이 미래는 욕구 안에서 나타나며, 이 욕구는 기대의 유기체적 형식에 해당한다. 반면 파지의 과거는 세포의 유전에서 나타난다. 유기체적 종합들은 지각적 종합들과 조합되며,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 안에서 다시 자신을 펼친다.( 즉 각각의 수축, 각각의 수동적 종합은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고, 이 기호는 능동적인 조합들 안에서 해석되거나 펼쳐진다) 감각이나 지각이 반복에 참여하는 방식, 욕구와 유전, 학습과 본능, 지성과 기억이 반복의 방식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반복의 형식들의 조합, 이 조합들이 정교화되는 수준들, 이 수준들의 연관성,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들의 상호 간섭등이다.
습관은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곧 차이를 훔쳐낸다. 습관의 본질은 수축에 있다. 수축은 응시하는 영혼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틱-탁(반복)의 융합을 가리킨다. 이것이 수동적 종합이다. 이 수동적 종합은 우리의 삶의 습관을 구성한다. 즉 그것이 구성하는 것은 ‘이것’이 계속되리라는 우리의 기대이며, 두 요소 중의 하나가 다른 요소 이후에 뒤따라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이다. 그러므로 습관이 수축이라는 것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반복의 융합이다. 우리가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는 우리가 수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수축하게 되는 것은 응시를 통해서이다. 이 둘은 동시적 사태이다. 우리는 오로지 응시하기 때문에 실존한다. 우리는 수축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한다.
쾌락의 요소들은 자극체들이 이완과 수축들을 이어나갈 때 발견될 것이다. 쾌락은 모든 경우 안에서 우리의 심리적인 삶을 지배하는 어떤 최고의 원리인가? 쾌락이 원리라면, 이는 그것이 어떤 충만한 응시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응시는 이완과 수축으로 이루어진 경우들을 자기 자신, 안에서 수축할 때 충만해진다. 응시를 통해 우리는 쾌락을 맛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다른 사물을 응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응시가 가져다 준 쾌락을 통해 모두 나르키소스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응시하는 것을 통해 언제나 악타이온이 된다. 응시한다는 것, 그것은 훔쳐낸다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반복의 요소와 경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습관들을 서로 얽고 조여 매고 있다.
습관의 문제
행위는 특수한 것을 변수로 취하고, 일반성을 요소로 삼는다. 일반성은 반복에 의존한다. 반복은 일반성이 구성되는 숨겨진 기저이다. 행위가 일반성의 질서 안에서, 이 질서에 상응하는 변수들의 영역 안에서 구성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반복 요소들의 수축을 통해서만 그러하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행위와 능동적 추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이다. 우리가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이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은 본질상 상상적이다. 왜냐하면 상상만이 구성의 관점에서 반복적인 힘의 ‘계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참된 반복은 상상에서 나온다. 즉자의 상태에서 와해되는 반복과 재현의 공간 안에서 우리에 대해 펼쳐지고 보존되는 반복사이,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반복의 대자적 측면이고, 이 측면은 상상적인 것이다. 차이는 반복에 거주한다. 수평적 구도에서 볼 때 차이는 반복 안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이때 즉자적으로 와해되는 순간적인 반복에서 출발하여 수동적인 종합을 경유하고,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재현된 반복으로 이행한다. 수직적 구도에서 볼 때 차이는 어떤 반복의 질서로부터 다른 반복의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이때 수동적인 종합들 그 자체 안에서 하나의 일반성으로부터 다른 일반성으로 이행한다. 같음의 반복은 외피이다. 그것은 중핵에 해당하는 차이와 좀더 복잡한 내적 반복들을 감싸고 있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이는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으며, 차이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한 질서로 이동하게 만든다.(가브리엘 티라트의 예-변중법적 전개는 반복이다. 이 반복은 어떤 일반적 차이들의 상태로부터 독특한 차이로 옮겨가는 이행이며, 외부적 차이들로부터 내부적 차이로 향하는 이행이다. 반복은 차이의 분화소이다.)
시간의 종합은 시간 안에서 현재를 구성한다. 오로지 현재만이 실존한다. 종합은 시간을 살아 있는 현재로 구성하며, 과거와 미래를 이 현재의 차원들로 구성한다. 그렇치만 이 종합은 시간 내적이다. 이는 이 현재가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응시 안의 수축은 요소나 경우들을 따르는 반복의 질서에 언제나 질적 변용을 가져온다. 수축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지속을 띤 현재를 형성한다. 욕구의 반복과 이것에 의존하는 모든 것의 반복은 시간의 종합에 고유한 시간을 표현하며, 이 종합의 시간 내적 특성을 표현한다. 반복은 본질적으로 욕구 안에 기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욕구는 본질적으로 반복과 관계하는 심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심급은 반복(특정한 지속)의 대자적 측면을 형성하고 있다.(수동적 종합의 관점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 자체의 서로 다른 차원들이다. 예-흉터는 부상에 대한 응시이다. 상처는 자아를 부상과 분리시키는 모든 순간들을 하나의 생생한 현재 안에 수축한다)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은 자연적인 기호와 인공적인 기호의 구분이다. 자연적인 기호들(현재의 기호들)은 자신이 의미하는 대상 안에서 현재를 드러내는 기호들, 수동적 종합에 기초하는 기호들이다. 인공적인 기호들(과거나 미래의 기호들)은 능동적 종합들을 함축한다. 함축된 것은 자발적 상상력에서 반성된 재현, 기억, 지성 등의 능동적 인식능력들로 향하는 이행이다.
응시한다는 것, 그것은 묻는다는 것이다. 대답을 ‘훔쳐낸다’는 것. 응시들은 어떤 물음들이다. 응시들 안에서 이루어 지고 응시들을 채우는 수축들은 모두 어떤 유한한 긍정들이다. 이 긍정들이 발생할 때 현재들은 시간의 수동적 종합 안에서 영속하는 현재로부터 태어난다.(부정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욕구를 능도억 종합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는 우리의 성급한 태도 때문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모든 유기체적이고 심리적인 삶은 습관에 의존한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습관들(수축, 응시, 지망, 자만, 만족, 피곤들, 가변적 현재들)은 수동적 종합들의 기저 영역을 형성한다. 본연의 수동적 자아는 감각 작용들을 구성하기 전에 이미 유기체 자체를 구성하는 수축하는 응시에 의해 정의된다. 수동적 종합들의 세계는 규정되어야 할 어떤 존건들 안에서 자아의 체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체계이다. 자아는 그 자신이 어떤 양태변화이고, 훔쳐낸 차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존재가 형성되거나 수동적 자아가 있는 것은 바로 어떤 소유를 통해서이다. 모든 수축은 자신이 수축하는 것에 대한 기대나 권리를 표명하고 자신의 대상이 자신을 벗어나자마자 와해된다. 분열된 자아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피곤들 안에서, 모든 자기만족들 안에서, 모든 자만들 안에서, 자신의 비참과 가난 속에서 존재한다.(하지만 자신이 응시하고 수축하며 소유하는 것의 영광을 노래한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 순수 과거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시간을 현재로 구성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현재는 지나가버리는 현재이다. 현재의 역설은 현재는 시간을 구성하지만, 이 구성 된 시간에서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 일어나는 어떤 또 다른 시간이 있어야 한다. 즉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필연적으로 어떤 두 번째 종합을 전제한다. 첫 번째의 종합은 습관의 종합이고, 이 종합은 시간의 정초이다. (정초와 근거를 구분해야한다) 즉 습관은 시간의 정초 지점이고 지나가는 현재에 의해 점유된 움직이는 땅이다. 하지만 현재를 지나가도록 만들고 현재와 습관을 전유하는 것은 시간의 근거로 규정되어야 한다. 시간의 근거는 본연의 기억에 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에 정초를 두는 동시에, 기억의 수동적 종합에 의해 근거지어야 한다. 습관은 시간의 시원적 종합이며, 이 종합은 지나가는 현재의 삶을 구성한다. 기억은 시간을 근거짓는 종합이며, 이는 과거의 존재을 구성한다.(주8 정초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발생, 근거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에서 주어짐, 시간의 세 번째 종합에서 성립하는 토대는 바탕이라 불리고 이 바탕은 무-바탕과 근거와해로 이어짐.)
기억, 순수 과거, 현재들의 재현
과거는 사라진 현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 사라진 현재가 겨냥되는 요소이다. 또한 특수성도 겨냥된 것 안에 있다. 반면 과거 자체는 본성상 일반적이다.(파지와 재생을 구분해야 한다. 주11. 재생은 파지와 달리 능동적이고 재현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재기억의 기능을 말한다) 습관의 파지는 특정한 지속의 어떤 현행적 현재 안에서 수축되어 있는 계속적 순간들의 상태이다. 그 순간들은 특수성을, 다시 말해서 본성산 현행적 현재에 속하는 무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과거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기대를 통해 미래로 열려있고 일반적인 것을 구성하고 있고, 기억의 재생 쪽에서 보면 일반성은 오히려 과거(현재들의 매개로서 과거)이고, 특수성을 띠게 된 것은 현재(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이다.
사라진 현재가 과거 일반안에 보존되고 있다면, 사라진 현재는 현행적 현재 안에 ‘재현전화’되어 있다. 이런 재현이나 재생의 한계들은 실제로 유사성과 인접성의 가변적 관계들에 위해 규정되고, 이 관계들은 연상이라는 이름 아래 파악되고 있다. 사라진 현재가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행적 현재와 유사해야 하고, 또 매우 다른 지속을 띠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동시적인 현재들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라진 현재들은 서로 인접해 있고 극단의 경우에는 현재와 인접해 있다.
재현은 그 자신의 고유한 재현성을 재현한다. 현해적 현재는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고. 그 차원을 통해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를 재-현하고 또 그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현한다.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의 회상을 형성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반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능동적 종합은 대칭적이지는 않지만 서로 상관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재생과 반조, 재기억과 재인, 기억과 지성)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재현의 원리라 불릴 수 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의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하고 있다. 왜냐하면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가능한 모든 현재 일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현재라는 조건 아래 순간들의 수축을 통해 시간을 구성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현재들 자체를 서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시간을 구성한다. 사라진 현재가 재생될 수 있는 것은, 현행적 현재가 자신을 반조하는 것은 과거의 순수 요소에 의해서이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이 습관이 (경험저거인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하고 있다 해도 기억 자체의 고유한(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에 의해서만 근거지어질 수 있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살아 있는 현재를 구성하고 과거와 미래를 그 현재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든다. 반면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순수 과거를 구성하고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본래적 과거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든다.
과거의 네 가지 역설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시간론(순수 과거에 대한 이론)을 네 가지 역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첫 번째 역설은 동시간성의 역설(과거는 먼저 한때 현재였던 ‘동시에’ 과거로서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구성될 수 없을 것. 과거와 그것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의 동시간성이라는 역설)로 순수 과거와 사라진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두 번째 역설은 공존의 역설(각각의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면, 사실 모든 과거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지금 거리를 둔 새로운 현재와 공존함)로 순수 과거와 현행적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세 번째 역설은 선재의 역설(각각의 과거는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고, 과거 전체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와 공존하지만,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함)로 순수 과거와 지나가는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마지막으로는 순수 과거의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라는 역설이다.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은 동시간성과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 순수 과거와 관계한다. 능동적 종합은 현재의 재현이며, 이 재현은 사라진 현재의 재생과 새로운 현재의 반조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능동적 종합은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에 근거지어진다.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은 일관성을 결여하거나 서로 대립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비일관성이나 대립이 아무리 크더라도 각각의 현재가 어떤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삶’을 펼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운명이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 사이에서 함축하는 것은 어떤 정위 불가능한 연관들, 원격 작용들, 재취함과 공명과 반향의 체계들, 객관적 우연들, 신호와 기호들, 공간적 상황과 시간적 계속성들을 초월하는 어떤 역할들이다. 운명을 표현하는 현재들은 수준의 차이를 제외하면 언제나 똑같은 사태와 똑같은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은 결정론과는 그토록 부합하지 못하는 반면 자유와는 그토록 잘 부합한다.
우리는 우리를 형성하는 현재들 사이의 계속적 관계와 동시적 관계들을 경험적 특성이라 부른다. 이 현재들이 인과성, 인접성, 유사성 그리고 심지어 대립에 따라 연합하는 것도 경험적 특성이라 불릴 수 있다. 반면 어떤 순수 과거의 수준들 사이에 성립하는 잠재적 공존의 관계들을 본체적인 특성이라 부른다. 능동적 종합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현재들의 계속을 경험한다면, 그 계속의 사태는 또한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일어나는 과거의 수준들의 공존이기도 하며, 그 공존은 언제나 증대해간다.
현재의 기호는 극한으로의 이행이며, 어떤 수준이든 하나의 수준을 선택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최대한의 수축이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수준은 그 자체로 수축되어 있거나 팽창되어 있으며, 무한히 많은 다른 가능한 수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삶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각각의 삶이 어떤 지나가는 현재라면,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윤회: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
물질적 반복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요소나 순간들의 반복이다.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상이한 수준들에서 일어나는 전체의 반복이다.(*물질적 반복-헐벗은 반복, 부분들의 반복, 이어지는 반복, 현행적, 수평적 반복. *정신적 반복-옷 입은 반복, 전체의 반복, 공존하는 반복, 잠재적, 수직적 반복) 현재는 언제나 수축된 차이다. 물질적 반복의 경우 현재는 서로 무관심한 순간들을 수축한다. 반면 정신적 반복의 경우 현재는 극한에 이르고 그런 가운데 하나의 수준을 수축한다. 현재들 자체의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놓인다. 하나의 반복은 요소적 순간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순간들에서 훔쳐내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하나의 반복은 전체가 지닌 수준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수준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반복 중 어느 것도 재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 반복은 성립하는 동시에 와해되기 때문이다. 물질적 반복은 오로지 능동적 종합에 의해서만 재현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반복은 재현의 대상이 되자마자 요소들의 동일성이나 경우들의 유사성에 종속된다. 정신적 반복이 과거의 즉자 존재 안에서 성립한다면 재현을 통해 모든 반복은 반조 안의 현행적 현재의 동일성에, 그리고 재생 안의 사라진 현재의 유사성에 종속된다.
상기는 자발적 기억의 모든 능동적 종합과는 본성상 다른 어떤 수동적 종합이나 비-자발적 기억을 지칭한다. 과거의 즉자 존재가 출현하는 것은 바로 본연의 망각 안에서 이다. 과거에 즉자 존재가 있다면, 상기는 그것의 본체이거나 그 본체에 사로잡힌 사유이다. 순수 과거는 지나가는 현재들에 힘입고 또 그 현재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재현 아래에서 나타난다. 그 안에서 현재들이 지나가고 서로 충돌하는 요소를 제공한다.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 규정되지 않은 것, 규정, 규정 가능한 것
시간 이론의 관점에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의 차이를 보면,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규정과 규정되지 않은 실존이라는 두 가치에 기능한다. 규정은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존으로 규정한다. 칸트는 규정을 규정되지 않은 것에 직접적으로 관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따라서 규정 가능한 것을 덧붙인다. 이것은 미규정자가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이다.(규정에, 그리고 규정되지 않은 것에 규정 가능성의 형식을, 다시 말해서 시간을 덧붙인다.)그것은 본연의 차이 자체의 발견을 구성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는 본래적 규정 자체와 그것이 규정하는 것 사이의 초월론적 차이다.
(칸트-규정되지 않은 실존이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은 시간의 형식) 규정되지 않은 나의 실존은 오로지 시간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때 나의 실존은 어떤 현상의 실존으로, 곧 시간 안에서 출현하는 수동적이거나 수용적인 현상적 주체의 실존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단지 수동적 자아의 변용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수동적 자아-‘나는 어떤 타자이다’ 혹은 내감의 역설로 집약된다. 사유의 능동성은 어떤 수용적 존재자에 적용되고, 따라서 이 수동적 주체는 능동성을 행사한다기보다는 표상한다. 그 능동성의 효과를 느끼며, 능동성을 자신 안의 어떤 타자로 체험한다.) 나는 시간의 텅 빈 형식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 이런 형식을 통해 볼 때, 나는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수동적 자아의 상관항이다. 수동적 자아와 균열된 나의 이 상관관계를 통해 초월론적인 것의 발견이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요소가 구성되고 있다.
균열된 나, 수동적 자아, 시간의 텅 빈 형식
데카르트는 시간을 연속적인 창조 작업중인 신에게 내맡겨놓는다. 나에 대해 가정된 동일성은 신 자신의 단일성 외에는 다른 보증이 없다. 하나가 보존하는 동일성은 정확히 다른 하나에 의존하는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은 나의 동일성을 존속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신의 죽음을 통해 어떤 본질적 비유사성. ‘표시 삭제’가 생겨나고 내면화 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바로 이점을 꿰뚫어 보았다. 신의 사변적 죽음은 나의 균열로 이어진다. 초월론 철학의 위대한 창의성은 시간의 형식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순수하고 텅 빈 이 형식은 이제 죽은 신, 균열된 나, 그리고 수동적 자아를 의미하게 된다. 칸트는 이런 창의성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다. 횔덜린은 순수한 시간의 공허를 발견한다. 이 공허 안에서 신성한 것의 연속적 전회, 나의 심화된 균열, 그리고 본연의 자아를 구성하는 수동적 정념을 동시에 발견한다.
기억의 불충분성: 시간의 세 번째 종합
플라톤의 상기는 이미 시간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상기는 어떤 형식을 통해 시간을 도입하는가? 시간은 이데아의 순수 과거 안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이데아를 통해 현재들의 질서는 이상적인 것에 대한 유사성의 증감에 따라 원환적으로 조직된다. 이데아 자체를 정의하는 순수 과거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표현되고, 사라진 신화적 현재로서 표현된다. 이미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이 지닌 애매성, 기억의 모호성은 이 점과 이어져 있었다. 그것(기억)은 근거, 즉자 존재, 현상 배후의 본체, 이데아이다. 하지만 그것(기억)은 자신이 근거짓는 재현에 묶여 있다. 므네모시네(기억)는 현재로 환원될 수 없고 재현보다 우월하지만 현재들의 재현을 순환적이거나 무한하게 만들뿐이다. 근거(기억)의 불충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거(기억)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상대적이고,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서 특성들을 빌려오며, 그 빌려온 특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즉 근거(기억)는 사유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인다기보다 영혼 안으로 운동을 끌어들인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또한 재현의 상관항으로 머물러 있는 즉자 존재의 가상을 폭로하는 세 번째 종합을 향해 자신을 넘어선다. 과거의 즉자 존재와 상기 안의 반복은 일종의 ‘기억 자체의 어떤 광학적 효과’(에로스적 효과)일 것이다.
시간의 형식, 순서, 집합, 계열
시간의 텅 빈 형식 혹은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빗장(시간의 방위 기준점)이 풀린 시간은 미친 시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텅 빈 순수한 형식임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이때 결코 어떤 것도 시간 안에서 펼쳐지지 않는다. 그 대신 시간 자체가 스스로 자신을 펼쳐간다. 이것이 시간의 순수한 순서다. 그 순서는 시작과 끝을 어긋나게 하는 ‘각운의 중단’이다. 나의 균열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각운의 중단, 그리고 그 중단이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 순서를 부여하는 이전과 이후다.(그 중단은 정확히 균열의 탄생 점이다) 자신의 고유한 근거를 전복한 시간. 이 시간은 형식적이고 텅 빈 순서에 의해 정의되며, 또한 어떤 시간의 집합과 계열에 의해 정의된다. 각운의 중단, 이전과 이후를 모두 회집하는 한에서 이런 상징적 이미지는 시간의 집합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동등하지 않게 분배하는 한에서 이 상징적 이미지는 어떤 시간의 계열을 가능하게 한다. 각운의 중단 자체를 전제하는 두 번째 시간은 변신의 현재, 행위에 필적하게 되는 동등하게-되기, 자아의 이분화이다. 그것은 행위의 이미지 안에 어떤 이상적 자아를 투사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집합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각운의 중단은 언제나 어떤 행위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하며, 시간 전체에 부합하는 단일하고 어떤 사건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이 이미지 자체는 어떤 분열된 형식을 통해 동등하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현존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를 통해 일체의 시간 전체가 회집된다. 이 이미지는 동등하지 않은 부분들을 포섭하고 회집하되 동등하지 않은 것들로서 회집한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상징이라 불려야 한다]
미래를 발견하는 세 번째 시간의 경우-이 시간은 사건, 행위가 자아의 일관성을 배제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일관성은 자아에 등을 돌리고 자아를 수천 조각으로 쪼개어 투사한다.(새로운 세계를 잉태한 자는 자신이 낳고 있는 파열하는 다양체에 의해 압도되고 탕진된다) 자아가 필적하게 된 것, 그것은 즉자적 비동등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균열된 나와 시간의 계열에 따라 분할된 자아는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서로 상응하고 어떤 공통의 출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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