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가따리 다시 읽기
- {분자혁명} {안티 오이디푸스} {천의 고원}:비(非)파시스트적 삶에 관한 입문서들 -
권혜원(서울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1. 들어가며
들뢰즈, 가따리를 어떤 방식으로 다시 읽을 것인가?
들뢰즈는 푸코와의 대담에서 이론을 '도구 상자'에 비유한 바 있다. 도구는 손에 움켜쥐고서 눈앞의 구체적 대상이 안고 있는 구체적 문제를 뜯어고치는 것이며, 그 문제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도구들이 동원될 수 있다. 또 문제가 변화하면 기존의 도구를 버리고 다른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진리체계이자 준거 모델로서의 이론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일반 이론으로서의 맑스주의의 위기를 돌파할 대안적인 일반 이론으로서의 '탈근대' 이론이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현실을 분석하고 바꾸는데 유용한 도구로서의 개념들이 있을 뿐이며, 우리는 그 개념들을 차용하고 각색하여 '지금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을 깨부수는 무기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들뢰즈, 가따리의 이론을 재독해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들뢰즈, 가따리에 대한 글들은 주로 난해한 이들의 개념을 중심으로 이들의 이론을 요약, 소개하는 수준에 머물거나, 이들의 이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욕망의 문제설정'을 들뢰즈, 가따리가 서구의 맥락에서 제기하고 있는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이들이 창안한 새로운 개념들도 주로 '주체의 탈중심화'와 '근대적 주체의 해체'라는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되었다. 그에 비해서 그 개념들이 함축하고 있는 정치적 의미와 그 정치성이 우리를 둘러싼 현실 속에서 어떠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분석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글은 들뢰즈, 가따리에 대한 보다 정치적인 독해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이들의 개념들을 현실적 맥락 속에 재위치시켜서 탐색하고자 한다. 물론, 필자는 기존의 철학적 논의를 비정치적인 것으로 폄하하거나 철학과 정치학을 명확히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또한, '나만이 독창적인 정치적인 해석을 가한다'는 특권을 주장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다만, '탈주의 철학'을 모토로 제기된 그간의 논의들이 지나치게 함축적인 정치적 의미만을 제기하고 있어서 '지금 당장 어떻게 바꾸고 전복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질문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이론적 추상주의에 맞서기 위해서 이 글에서 필자는 들뢰즈, 가따리의 저작을 '비(非) 파시스트적 삶에 대한 입문서'로서 읽었던 푸코의 독해 방식을 따르고자 한다. 푸코는 {안티 오이디푸스} 영어판 서문에서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요한 적 중 하나가 바로 파시즘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역사적 파시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파시즘, 우리의 일상적 행동과 영혼을 따라다니는 파시즘, 권력을 사랑하게 만들며,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 권력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이다.1)
푸코는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스스로를 혁명적 활동가라고 여기고 있을 때조차, 또 특히 그럴 때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의 담론, 행위, 심장과 쾌락으로부터 파시즘을 제거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의 태도 속에 박혀 있는 파시즘을 격퇴할 것인가?"
왜 이와 같은 질문이 우리에게도 유효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싸우고자 하는 대상들, 즉 자본주의, 가부장주의, 국가주의, 파시즘, 권위주의, 위계주의와 각종 차별주의 등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공고화된 구조이지만, 그 구조는 또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서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대한 구조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적대가 완전히 사라진 공간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구조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환상을 고수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거시적 국가기구나 거시 파시즘이 결정화(結晶化)될 수 있는 기반 자체를 공략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각자의 고유한 장 속에서, 매 번의 투쟁 과정에서, 구체적인 지배의 효과에 맞서 투쟁함과 동시에, 일상적 삶과 관계 속에서 지배 질서를 견고하게 지속시키고 있는 문화와 규범으로부터 급진적으로 단절하고 새로운 집단적 관계를 창출해나가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파시즘의 유혹을 경계하라'는 일상적 삶의 지침을 전달하는 한에서 정치적인 것임과 동시에 강한 윤리적 함축을 띠고 있는 것이다.
2. 몇 가지 개념에 대한 재검토: '욕망', '배치', '미시정치학'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들뢰즈와 가따리의 개념은 강력한 정치적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분석과 정치 행동의 도구로 삼으려면, 먼저 이 개념들을 우리의 이론적 현실적 지형 속에 재위치시켜서 독해할 필요가 있다. 이 장은 이들의 개념을, 현실에 대한 비판적 개입을 확장하기 위해 이용하려는 탐색적 시도의 일환이다.
1) 욕망
들뢰즈, 가따리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무엇에 안티를 걸고자 했던 것인가? 그리고 이 안티는 어떠한 '긍정'(affirmation)으로부터 도출된 것인가? 먼저, 이들이 긍정하고자 하는 것은 푸코가 지적하듯이 "욕망은 자신의 힘을 정치의 영역에서 전개할 수 있고, 확립된 질서의 전복 과정에서 강도를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곧바로 '어떻게 그럴 수 있도록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도출되며, 안티 오이디푸스라는 저작은 이 질문을 탐색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그다지도 오이디푸스 제국주의에 대한 '안티'에 몰두하는가? 그것은 서구의 정신분석학자들이 무의식과 욕망에 대한 분석을 전문가인 자신들에게 위임할 것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욕망을 진료실의 침대 위에서 사유화하고, 나만의 내밀한 가족적 영토 속으로 식민화하기 때문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욕망이 실재적인 사회 정치적 실천으로 투여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반면, 들뢰즈, 가따리는 가족적 콤플렉스에 의해 병합된 표상적 무의식을 깨고, "만들고 흐르게 해야 할 실체이자 정복해야 할 사회적 정치적 공간"2)으로서의 생산적 무의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문제 틀은 사회적 상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그 상황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함축하고 있다. 정신분석학에 안티를 걸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존 질서의 보증인이자 지주(支柱)3)로서 욕망의 흐름을 끊임없이 왜곡하거나 봉쇄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욕망이 "미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어진 체계로부터 탈주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대중적 에너지인 것이다. 이로부터 혁명적 힘을 보유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욕망의 연계'라는 테제가 도출된다. 사람들이 혁명을 원하고 일으키는 것은 의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욕망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 의하면, 기존 질서로부터의 단절의 잠재력을 탐색하는 과정에서는 이 단절을 가능하게 해주는 객관적 요인들, 계급 이해의 영역들을 탐구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욕망이 갑자기 돌입하여 객관적 인과관계의 연결고리를 끊고, 국면을 완전히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욕망의 차원과 욕망의 돌입만이 특정한 순간 특정한 장소에서 단절의 현실성을 설명해 준다는 것이다.4)
그러나, 들뢰즈, 가따리에게서 욕망은 그저 원초적 본능이나 야생적인 자연적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되지 않아도 강렬하게 분비되는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는 자생적인 것이지만, 이 때 이 자생성은 권력의 관계 망 외부에서의 자연적 힘으로서가 아니라, 그 내부에서 고유하게 결정된 극으로서 작동하면서 정치적 실천으로 투여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고정된 하나의 주체로서의 개인으로부터 분비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 행동, 정동(情動)을 소통시키는 집단적 관계 속에서 복수적인 힘들의 작용을 받아 분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비판되는 것처럼 들뢰즈, 가따리의 욕망 개념이 자생성과 무정부성에 대한 맹목적 찬양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이러한 관점과 명백히 결별하고 있다.
우리의 욕망에 대한 개념은 자생성에 대한 송시나, 어떤 날뛰는 해방에 대한 찬양과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기계적이라고, 말하자면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긴급한 기계적 유형들과 접합된 것으로 정의하였던 것은 정확히 욕망의 인공적이고 구성주의적인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5)
즉, 욕망은 자연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며, 그것도 언제나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인 힘 관계 망 속에서 순환한다는 것이다. 이 속에서 욕망은 사회적 억압을 내면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질서를 돌파하는 전복적 잠재력을 구성하기도 한다. 이 잠재력 또한 자연적이거나 단순히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상황과 조건 속에서 그 상황에 '특이한'(singulier) 힘으로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의 문제 틀은 '혁명적 힘을 보유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욕망의 연계'라는 것을 시사하지만, 욕망 그 자체를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욕망은 파시즘적 극(편집증적 극)과 혁명적 극(분열증적 극)사이에서 진동하는 벡터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주어진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 조건을 뚫고 새로운 사회․정치적 공간을 창출할 수 있는 욕망의 흐름들이 어떤 지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 물꼬를 트고 있고, 이 물길의 방향을 바꾸거나 봉쇄하는 권력은 어떻게 행사되고 어떠한 효과를 낳는지, 이 속에서 욕망의 벡터를 이 구체적인 권력의 작용을 깨뜨리는 쪽으로 향하게 하려면 어떠한 실천이 요구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욕망에 대한 정의는 두 가지 편향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의 편향은, 구체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욕망이 어떻게 배치되어 있는지를 분석하지 않고서, 욕망이 지닌 탈주의 잠재력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 가따리의 욕망 개념은 우리가 흔히 '욕망'하면 떠올리는 '욕구'(내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대상을 소유하고픈 욕망)의 개념과는 달리 결핍이나 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어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려는 긍정적 힘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순수한 자연적 힘으로서 분출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결정되어 있는 배치 속에서 순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세력관계가 어떻게 편재되어 있는지를 추적하면서, 그러한 가시적인 세력관계가 그 이면의 비가시적인 욕망의 흐름들과 어떻게 착종되어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미시정치학적 분석을 요구한다. 주어진 사회적 조건을 뚫고 세력관계를 재편할 수 있는 욕망의 흐름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가능한 변이의 지점들을 구성하고 있는가? 이 욕망의 흐름을 방해하고, 봉쇄하며, 굴절시키거나 도착시키는 요인들은 무엇인가? 이에 맞서 어떻게 욕망의 전복적 잠재력을 실재적인 실천으로 투여하여 그 잠재력을 확장할 것인가? 따라서, '언제나 체계로부터 이탈하고 누수하는 대중의 욕망의 흐름이 존재한다'는 낙관적 언명은 실재적인 사회적 관계에 대한 분석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는 공허한 상투어에 불과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네그리가 지적한대로 대중의 잠재력에 대한 "낙관주의적 정향 곁에서 구체적인 것을 고려하는 비관주의"6)이다. 그것은 투쟁의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제한하는 비관주의가 아니라, "의지 및 현실에 대한 의지의 관계가 지닌 언제나 상이하고 가변적인 효과에 대한 현실주의적 개념"이다. 이 개념에 입각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사회적 장의 다양한 층위에서 욕망의 혁명적 투여를 막는 구체적 권력관계를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며, 이를 통해 그러한 권력이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욕망의 잠재력을 탐색할 수 있게 된다.
다른 하나의 편향은, 욕망을 능동/수동의 이분법 속에서 파악함으로써 노동자의 욕망을 너무나 쉽게 수동성의 범주에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이 이분법 속에서 노동자는 능동성을 결여한 채 반복적 노동만을 수행하는 수동적 대상으로 개념화된다. 다음을 보라. "능동성을 빼앗긴 노동자들의 신체를 공장-기계로 포섭하고 지속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여기서 결정적인 것은 실업화 압력과 경쟁이다. 이 두 가지 요소는 노동자 각각을 개별화하며, 실업이라는 끔찍한 상황에 몰리지 않기 위해서 자본가에 복종하고 자본가의 눈에 들고자 하며, 그들이 눈에 부합하는 능력을 갖추려고 한다. 죽음과 연결된 실업의 공포가 복종에 자발적 형태를 부여한다…이런 식으로 자본의 요구는 나의 욕망이 된다. 자본의 요구를 자신의 욕망으로 간주하고,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의 신체를 보는 욕망의 배치가, 노동자의 공간적 신체를 공장-기계로서 형성하고 유지한다."7) 이와 같은 손쉬운 이분법은 노동자들을 수동적 존재로 개념화함으로써 은연중에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자본을 능동적인 것의 범주로 분류하는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낳는다. 능동/수동의 이분법이 재생산적 노동자/생산적 자본가의 이분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이분법 속에서는 "프로그램되지 않은 것을 추가하면서 작동하는 성분"은 능동적인 것이고 "프로그램된 것을 반복하여 수행할 뿐인 성분"은 수동적인 것인데, 이 경우 자본은 노동자들에 대한 관리와 통제의 전략을 매번 새롭게 생산하면서 "능동성을 장악"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의 노동조직은 노동자의 욕망을 끊임없이 사적인 욕망으로 치환시킨다. 가따리는 "자본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오직 자신의 착취기계에 연결할 수 있는 욕망하는 기계 및 생산기계"8)라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자본가들은 노동자 스스로 내핍과 희생을 받아들이게끔 하는 억제의 심리장치를 생산하여 노동자들의 모든 욕망의 투여를 가족주의와 소비주의 등의 사적인 소우주 속에 가두고자 한다. 그러나,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이러한 사적 욕망은 욕망하는 생산에 대한 사회적 억압에 의해 욕망이 왜곡되고 치환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욕망이 순환하는 사회적 장은 욕망이 탈주하는 흐름(탈영토화)과 이 흐름에 대한 이차적 억압(재영토화), 이 억압을 뚫고 변이와 창조의 지점들을 구성하는 욕망의 흐름들(탈영토화)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장(場)이다. 공장도 마찬가지여서, 그 안에서의 노동과 욕망의 배치는 능동/수동의 이분법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적 지형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실업화 압력에 따른 노동자들의 대응을, 자본의 욕망을 체화하고 자본의 요구에 복종하는 수동적 존재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단히 정식화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현장에서 나타났던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흐름들을 따라 가보면, 우리는 노동자들 속에서 자본의 이해 및 욕망으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집합적 욕망을 투여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해고 대상자로 통보를 받은 사람이든 아니든 투쟁주체들은 '돈 몇 푼, 실리 몇 개 챙기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나 한 사람 짤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당면한 투쟁에서 정리해고를 막아내지 못하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본의 통제력을 강화하게 될 것이기에 해고된 사람뿐만 아니라 공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까지도 죽어난다. 그래서 끝까지 싸울 것이다'고 역설하였다. 이는 '여기가 극한이므로 힘 관계에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다. 그러니 이 싸움에서 굴복하고 현장 권력을 완전히 박탈당한 현장으로 복귀하느니 공권력이 들어오면 차라리 나도 죽고 회사도 망하게 하겠다'는 의지로서 표현되기도 하였다.9) 이런 의미에서 싸움에 대한 이들의 감성은 단순한 '일자리 사수'를 넘어서는 것이었으며, 자본이 설치해 놓은 사적 욕망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 미세하고도 무수한 결들을 지나친 채, 실업화 압력에 따른 욕망의 배치를 '자본의 욕망을 스스로의 욕망으로 삼아 자본의 요구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배치'로 정의하는 것은 현실의 다양하고도 역동적인 흐름들을 극도로 환원론적인 도식에 포개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가시적으로 능동적인 행위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타자의 욕망을 억압하고 타자에 대한 지배를 통해서만 자신의 능동성을 행사할 수 있는 주체나 집단은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무능력한 것이다. 자본과 권력은 모든 생활의 구석구석으로 그 촉수를 뻗어나가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기쁨과 활력을 박탈한다. 또한 언제나 그로부터 빠져 달아나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 권력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권력의 중심들은 능력의 지대보다는 그로부터 달아나는 것에 의해서, 그리고 무능력에 의해서 정의된다고 말한다.10) 반대로, 외관상 체념과 굴종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그저 반복적 활동의 재생산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피지배집단에 대해서도 쉽게 수동성의 낙인을 찍을 수는 없다. 그들은 일상적으로는 자본의 욕망을 내면화하고 그 허상을 쫓다가 파업이나 투쟁, 혹은 혁명의 시기에만 능동적 주체로 비약하는 것이 아니다. 주체는 동질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과 노동에서 균열과 틈, 과정상의 파열들과 이질성들을 생산하면서 스스로를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네그리를 따라서 "늘 종속되어 있지만 또한 늘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고 있는 산 노동의 이념과 경험을 가정해야 한다."11)
한편, 욕망의 문제 설정은 능동/수동의 이분법 자체를 문제시한다. 욕망과 무의식을 중요시하는 순간 우리는 논리적인 언어로 스스로를 표현하거나, 합리성에 기대어 가시적인 성과를 생산하는 것, 혹은 실재적인 변이를 만들어내는 것만을 배타적으로 능동적인 것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 때로는 발화 행위로 표현되지 않지만, 욕망과 의지를 체현한 몸으로서 정동(情動)을 전달하는 무의식의 언어들, 침묵과 웅얼거림이 있다. 사실 지배자들은 종종 소수자들의 언어를 불명료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묵살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몸의 언어들과 침묵들은 공식적인 기록에서는 삭제되거나 유실된 편린들로서만 남게 된다. 욕망의 문제설정은 소수자의 관점에 서서 바로 이들의 웅얼거림, 침묵, 몸짓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무의식과 욕망의 언어를 경청하고 그 속에서 공명하는 법을 배우라고 권유한다. 트린 민하(Trinh Minh-ha)는 "지배적 서사에 참가하기를 거부하는 침묵은 때로는 들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그러나 다른 침묵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의 침묵은 여전히 들리지 않고 알아차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삭제된 하나의 목소리, 침묵을 강요하는 자들에게 한 점을 더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12)고 말한다. 하나의 침묵은 그저 <무언의 동의>와 복종의 표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묻혀져 있는 침묵 속에서 함께 공명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그리하여 하나의 가시적 행동으로 수렴되거나 변이의 흐름으로 확장되지는 않았어도 충분히 능동적인 의지와 욕망을 분비하고 있었던 무언의 거부와 저항의 몸짓들을 드러내고, '왜 어떤 이유에서 이들의 에이전시(agency)와 목소리가 소실되었는가' '어떤 권력의 장벽이 이를 용해해버렸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지배적이고 공식적인 담론과는 전혀 다른 담론을 구성해낼 수 있을 것이다.
2) 배치(agencement), 그리고 배치의 미시정치학
배치는 들뢰즈, 가따리에게 매우 주요한 개념이다. 이들은 이것이 '기계적'으로 배치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초점은 기계의 자동생산에 의해 공급되는 차이가 불균형에 기초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근본적인 존재론적 재전환'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계는 피드백 고리를 함축하고 있는 구조의 개념과 단절한다.13) 각각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평형을 회복하는 동질적 구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매번 하나의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기존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로 변모되고, 하나의 효과가 출현하면 그것은 곧 다른 변동에 의해 추월된다. 또한 기계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를 전제하지 않는다. 기계의 의미는 전체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작동에 달려 있으며, 그 작동은 부품들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기계는 끊임없는 생산의 재개를 특징으로 하며, 비록 기계가 생산해내는 것이 무한히 재생산가능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특이적인 것(singulier)이다. 즉, 기계를 구성하는 부품들의 배치 및 기계에 대한 힘의 작용, 그리고 기계를 둘러싼 실천과 힘 관계의 구체적 양상에 따라서 기계는 매번 그 관계에 고유한 유일무이한 효과를 생산한다. 배치가 기계적이라고 하는 의미는 바로 이와 같은 의미이다. 이에 의하면, 특정한 사회적 관계는 부분들을 지배하는 통일된 전체, 대상보다 먼저 존재하면서 대상을 규정하는 법칙에 기초한 기계론적(mecanique) 인과성에 따라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관계들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로 귀착되지 않는 과정의 영속성 속에서 복합적인 인과망을 구성하며, 그 고유한 관계에 따라서 매번 다르게 작동하고 매번 다른 효과들을 생산하면서 확립되어 있는 질서를 변환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따리는 "기계의 본질은 구조적으로 확립된 사물들의 질서로부터의 단절"이라고 말한다.14)
이와 같은 배치의 개념은 분석적으로 어떤 유용성을 갖는 것인가?
그것은 추상화된 전체를 분석적 출발점으로 삼는 것을 문제시한다. 오히려 바로 지금 이 순간 특정한 장 속에서 어떠한 관계들이 구성되고 있으며, 이 관계들은 어떤 복합적 요인들을 구성요소로서 지니고 있고, 어떠한 독특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가가 문제가 된다. 이 때 거시적 단위나 구조는 추상화되거나 물상화된 형태로서가 아니라, 이 특유한 관계망과 복합적 인과망 속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효과로서 분석된다. 또한 지금 새롭게 구성되고 있는 관계들은 단순히 기존 구조의 틀 속에 흡수됨으로써 종결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재편하거나 전복할 수 있는 잠재태로서 다루어진다.
이와 같은 배치의 개념은 권력과 욕망의 미시정치학이라는 개념과 교차된다. 그렇게 보면, 권력 일반에 대한 투쟁의 관념은 부적절하다. 자본주의 일반, 또는 권력 일반에 반대하는 투쟁에 호소하는 것은 그저 수사학적 선동에 불과할 뿐,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에 대한 적극적 개입 전술과는 거리가 멀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형태의 권력, 특정한 형태의 권력 배치, 그리고 특정한 권력의 테크놀로지와 효과에 대한 구체적 투쟁인 것이며, 그 속에서 대중의 이해관계와 무의식적 욕망이 어떻게 서로 뒤섞이면서 대안적 가능성들을 열어 놓고 있는지, 또 이 가능성은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또한 진행 중인 투쟁 속에서 투쟁 주체들이 어떻게 새로운 주체성을 형성하고 있는지를 미세하게 추적하면서 그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미시적 요인까지 분석에 포함시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나 자본에 대항하는 전략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나 자본의 구체적 효과에 맞서 현재 진행중인 국지적 투쟁에 대한 미시정치학적 분석 없이 '총체적 구조 자체를 타파'할 것을 역설하는 것은 공허하고 추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지금까지 <정세 분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다양한 분석 방식에 대해 문제 제기할 수 있게 해주며, 이 분석에 부재하는 '분석대상의 분자화'15)라는 주제에 눈을 돌릴 수 있게 해준다. 누구나 정세분석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체로부터 출발하여 전체를 바꾸는 것만이 대안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되는 지극히 추상적인 분석이 있다. 이 전체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의 한국 자본주의이고, 총자본의 권력이자 자본주의 구조 자체이다. 이것이 분석의 출발지점이자 도착지점으로서 결국 유일한 대안은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것, 혹은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정치투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철폐, 국가권력 타도"를 백날 소리 높여 외친다고 해서 사태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자본과 권력은 정세의 매 국면마다, 그리고 그 대상에 따라서 다른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며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동맥경화증에 걸린 상투적 정치 선동이 아니라, 권력의 이 특수한 효과들에 맞서는 구체적 실천론이다.
이 실천론은 '어떻게 총 자본 대 총 노동의 단일한 전선을 구축할 것인가' 라는 단일한 문제틀로 수렴되지 않는다. 국지적 투쟁들은 여기 저기에서 다양한 이슈를 내걸고 벌어지며, 하나의 투쟁 안에도 여러 가지 사안들이 중첩된 채로 제기된다. 가따리에 의하면, "복잡한 배치는 인종 성별 연령 민족성 등과 같은 매개변수들을 돋보이게 한다. 상호작용적 교차는 2×2 계급 대립의 논리와는 다른 종류의 논의를 함의한다. 그것은 상황을 윤곽짓고, 계급 투쟁과 관련된 단순주의적 개념화를 확인하고 피할 수 있는 지도제작법을 따라잡도록 도울 것이다"16)고 말한다. 이것은 추상화된 전체 구조를 출발점으로 삼아, 사회 정치적 장의 다양한 층위에서 형성되는 적대의 지점들을 계급모순이라는 단일한 모순으로 환원시키는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그렇게 문제가 단순화될 경우, 그것은 종종 투쟁 순위를 위계화, 서열화함으로써 여성, 연령, 인종 등의 문제를 언제나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것으로서 취급하여 투쟁 이슈에서 제거해버리는 '폭력'을 낳게 된다. 그러나, 오히려 문제는 현 상황과 국면에서 지배 권력에 의해 가장 배제되고 착취받는 집단이 누구이며, 이 집단은 어떠한 투쟁의 이슈들을 제기하고 어떠한 저항의 동력들을 구성하고 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며, 이러한 분석에 의거해 실질적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체적 상황 속에서 제기되는 구체적 이슈 속에는 언제나 가따리가 '매개변수'라고 불렀던 복합적 요인들이 교차되고 중첩되어 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더불어 '정리해고 철폐'라는 이슈가 제기될 때, 이 사안 속에는 총자본 대 총노동이라는 계급 대 계급의 모순만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가족임금제의 논리를 내세워 기혼 여성을 정리해고 1순위로 올려놓았고, 실제로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해고를 대대적으로 단행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 노동은 급속하게 비정규직화됨으로써 항상적인 저임금, 고용불안, 초과착취에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정규직에서도 여성 우선 해고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가부장주의와 결탁한 방식으로 자본의 권력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소수자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항하고자 하는 집단이라면, 여성 소수자의 위치에 서서 구조조정에 내포되어 있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측면과 그 구체적 효과를 당면한 싸움의 대상으로 삼아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 해고를 투쟁의 동시적 의제로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들뢰즈, 가따리가 말하는 '소수자화(devenir-minoritare)'이며, 배치의 개념은 이와 같은 '소수자화'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진보진영'은 암묵적으로 '맑스주의 페미니스트'의 방식을 따라 흔히 성 모순을 계급 모순에 종속된 것으로 간주하여 자본주의가 철폐되어야 여성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므로 여성운동은 계급운동에 일차적으로 힘을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또는 '여성 문제' 등과 같은 '국지적이고 부차적인 이슈'를 제기하는 것을 '전체 운동'의 단결력을 훼손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공공연하게 존재했다. 예를 들면, 99년 5월의 민주노총 포스터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이 아니라, 소위 '진보진영'안에도 뿌리깊게 존재하는 가부장주의적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이 포스터 속에는 가장인 한 남성 노동자가 붉은 조끼를 입고 투쟁에 나서고 있으며, 뒤편에는 흐릿하게 그의 부인이 아이를 안고 그를 배웅하고 있다. 상단에는 "이제 당신만이 희망입니다"라는 굵은 글자가 박혀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가장 큰 피해자인 여성 노동자들을 투쟁의 들러리로 만들면서 신자유주의의 근간에 있는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의 논리를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대항하는 투쟁세력의 측에서도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온전히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요약하자면, 배치 개념에 입각했을 때, 특정한 정세 속에서 서로 공존하면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국가주의, 가부장주의, 인종주의, 연령주의, 군사주의…등은 자본주의 경제구조라는 단 하나의 중심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관계가 철폐되면 뒤따르는 도미노 현상처럼 점진적으로 변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것은 각각 이질적인 거시 구조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 시기 권력이 행사되는 영역에 내재하면서 상호 중첩되고 상호 침투하는 권력의 특수한 효과로서, 구조가 결정화(結晶化)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따라서 이 기초 자체를 매 시기 구체적 행동을 통해 공략하지 않는 한 구조 자체의 혁명은 영원히 유예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혁명을 모든 국지적 기능들이 변화될 수 있는 전제로 삼을 것이 아니라, 반대로 권력의 특수한 행사와 통제에 대항하는 여성, 청소년, 동성애자들, 생태주의자들 등의 다양한 국지적 투쟁들과, 자본과 권력의 억압에 맞선 노동자운동의 이 투쟁들과의 실질적 연계를 혁명의 전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따리는 "욕망의 미시정치학은 극도로 다양한 사회집단의 직접적 범위 안에서 복수의 목표를 수립할 것이다. 대규모 집합적 투쟁은 오직 부분적 투쟁(그것은 이미 구성된 어떤 전체의 부분이 아니므로 부분적이란 용어는 모호하지만)의 축적에 기초해서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17)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집중화된 대규모 투쟁에 대한 요구는 국지적 투쟁의 한계를 선험적으로 지정하면서, 눈앞의 투쟁의 미시적 역동성을 간파하지 못하게 하는 부정적 효과를 낳기도 한다. 물론, 시기에 따라서 단일한 저항 전선을 신속하게 구축하여 투쟁을 집중해야 할 때가 있지만, 이것이 상황과 조건을 초월하여 일상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전국적 차원의 전선을 '편집증적'으로 요구하면서 국지적 투쟁의 한계를 미리 규정하고 이 투쟁의 의미를 극소화하는 것은, 때로는 이러한 투쟁 속에 어떻게 거시적 이해관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창조와 구성의 잠재력으로서의 대중의 욕망이 농축되어 있는지를 간과하게 만듦으로써 힘관계의 역전가능성과 대규모 집단 투쟁의 가능성을 오히려 사전에 봉쇄해버린다. 왜냐하면, 국지적 투쟁 속에 투여되는 대중의 욕망과 이를 통해 구성되는 새로운 주체성, 그리고 이를 근간으로 하는 투쟁 동력에 주목하여 이 잠재력을 확장할 때만 주어진 조건은 변화될 수 있고 기존의 불리한 힘관계는 재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이고 불연속적인 투쟁들이야말로 힘관계를 변모시킬 수 있는 에너지의 저장고이며, 이 각각의 투쟁이 구체적인 지점에서 권력의 효과를 부수어 나갈 때 "눈덩이 효과"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배치와 그 미시정치학에 대한 문제의식은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지적인 투쟁들에 주목하여 그 속에서 구성되고 있는 새로운 잠재력과 새로운 주체성들을 면밀히 추적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도출되는 행동방향은 이 국소적 관계들 속에 내재하는 권력의 구체적 효과들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분쇄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배치의 미시정치학은 공식화된 투쟁 노선의 저변에서 흐르는 욕망의 물줄기들과 이 물줄기들의 방향을 굴절시키거나 봉쇄하는 미시권력 혹은 미시 파시즘의 효과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가시적이고 분명한 세력관계와 더불어 대중의 현실적인 욕망의 투여가 이러한 세력관계 및 이해관계들과 어긋나거나 교차하거나 교착하는 지점들을 분석의 주제로 제기하고, 이 과정에서 반대되고 모순되거나 때로는 적대적인 요소들이 출현할 때, 이를 일사불란한 투쟁을 방해하고 단결을 저해한다는 이유에서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그러한 복합적 사안들에 개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미시 파시즘과 관련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3. 왜 미시파시즘이 문제인가
미시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할 때 가장 많이 부딪치게 되는 비판은 한국처럼 거시 파시즘이 공고화되어 있는 곳에서는 거시 파시즘이 일차적이고 주요한 적이라는 것과, 이 경우 미시파시즘에 대한 논의는 자칫 잘못하면 눈앞의 이 가시적 적에 대한 공격을 뒤로 하고, 재귀적 반성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우려는 다음과 같은 대화 속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요즘 논의되는 '자기 안의 파시즘', 일상의 파시즘 주장만 해도 그래요.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입론인데, 문제는 이 일상의 파시즘을 온존시키는 것이 거시 파시즘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극우 언론이라는 '한국적' 실상을 망각하는 것이에요. 그에 대한 견해도 없이, 좌파도 미시적 파시즘의 그물에 갇혀 있다고만 주장하면 '모든 게 내 탓이오'로 끝나버리는 일이 되고 말아요."18)
그러나, 거시 파시즘과 극우 파시스트 논객들의 권력이 근절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반은 어떻게 구축되는가. 파시즘, 국가주의, 군사주의, 인종주의, 성차별주의는 일상적 관계의 외부에 있는 그저 추상적인 거시 구조들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삶의 영역 속에 내재하면서 특정한 효과를 발휘하는 구체적 권력이며 일상의 미시권력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렇다면, 미시 파시즘이야말로 거시 파시즘의 구조를 뒷받침하고 온존시키는 기초가 아닌가. 그러므로, 미시파시즘론을 제기하는 것은 거시 파시즘이라는 적을 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거시 권력의 효과를 구체적 행동을 통해 분쇄함으로써 거시 권력의 기초를 침식해 들어가자는 것이다. 요는 문제가 발견되고 제기되는 각 순간마다 이 국소적 권력 관계 속에 체현되어 있는 미시파시즘을 공략하지 않는 한, 거시파시즘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거시 파시즘을 존속시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타자들과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미시 파시스트적 요인들을 발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분자적 수준에서 투쟁할 때 우리는 몰적 수준에서 진정으로 파시스트적인, 거시 파시스트적인 구성체를 막아낼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 때문이다".19)
그러므로, 미시파시즘을 지속적으로 발견하고 격파하고자 하는 투쟁은 '내 탓이오'라는 개인적 반성의 문제, 혹은 '좌파에게도 도덕적 오점은 있다'는 집단적 고해성사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는다. 가타리의 표현을 빌리면, "문제는 유죄냐 순수냐가 아니다."20) 이 경우, 정치적 행동에 미시파시즘에 대한 발견과 분석을 결합시켜야 하는 이유는, 거시 파시즘에 대항하는 집단조차도 은연중에 일상 생활에서 파시스트적 삶의 양식과 어법을 존속시키면서 거시 파시즘이 구조화될 수 있는 기초를 공고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활동가 집단 혹은 '진보적' 단체들의 일상적 관계의 수준에서, 활동가와 그의 아내의 관계에서, 남성 활동가와 여성 활동가의 관계에서, 역할 분배와 고정의 다양한 양식 속에서, 커뮤니케이션과 투쟁의 다양한 층위를 포함한 일상적인 활동양식과 권력 관계 속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모든 파시스트적 부르주아적 남근지배적 권력형태, 인식, 태도, 욕망으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집단적 삶의 양식과 윤리학을 창조하는 문제인 것이다.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은 자본 착취와 국가 권력을 철폐하고자 하면서, 그 투쟁의 한가운데서 자본과 권력이 보존해온 모든 분리차별과 위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부활시키는 문제를 정면에 제기한다. 가따리에 의하면, "러시아와 중국 등에서의 계급투쟁은 부르주아 권력을 뒤엎고 나서도 부르주아 권력 형태가 국가, 가족, 그리고 심지어 혁명세력 속에서도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중앙집중적이고 관료제적인 권력이 혁명적 전쟁기계가 포함하는 필수적 조정 역할에 포개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체적 수준에서 투쟁은 여러 단계와 중간 시기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미시적 수준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은 먼저 코뮤니즘으로의 일종의 직접적 이행, 즉 관료, 지도자 혹은 활동가가 권력을 구현하는 한에서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폐지이다."21)
현실 사회주의 국가 속에서 드러난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본에 대한 예속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자가 가정에서 아내에게 자신을 섬길 것을 강요하면서 아내를 예속화한다면, 국가에 맞서 투쟁하는 집단들이 국가의 군대 조직과 동일한 훈육과 위계, 통제를 자신의 조직체에 도입하면서 군사주의를 온전히 작동시키고, 국가의 관료적 조정과 동일한 메커니즘을 활동과 소통 양식 속에 도입하여 대표체나 관료로의 대중 권력의 위임을 고착화하고 대중을 모든 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킨다면, 활동가 집단이 민주적 중앙집중제의 원리를 고수하면서 대중의 혁신 능력을 부정하고 모든 체계를 중앙-전달벨트-대중의 결정 구조 속으로 수직적으로 위계화한다면, 그리고 합의와 조직적 통일, 일사불란한 대응을 이유로 내부에서 제기될 수 있는 다양한 모순과 이견, 차이를 억압, 제거한다면, 남성활동가가 여성활동가를 정복, 지배, 소유의 대상으로 삼아 언어적 성적 폭력을 휘두르거나 자신의 집단 속에 기존의 모든 성별 분업을 재생산한다면, 탈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집단이 보스(boss)의 양식과 배제의 양식을 온존시키면서 위계화의 논리를 내부에서 분비시킨다면, 설사 내일 당장 혁명이 일어나 부르주아 권력이 폐지된다고 하더라도 일상적 관계의 수준에서는 변함 없이 부르주아 권력이 재생산될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안티 오이디푸스}의 주체집단과 예속집단의 개념, {천의 고원}의 수목형 조직과 리좀형 조직의 개념, 그리고 {분자혁명}의 여러 페이지를 관통하고 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투쟁 그 자체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새로운 주체성 양식과 새로운 관계맺음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가따리에 의하면, 자본주의의 전복은 단지 물질적 노예화와 가시적 억압형태에 대항한 투쟁 문제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행동하는 데서, 기능하는(functionning) 데서 완전히 대안적인 방식을 창조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주체성 양식의 창조>는 선결적인 구조 혁명 이후 점진적으로 개조되어야 할 부차적인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자 자신이 소속한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가의 문제로서 "미시적 수준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직접적 이행"을 즉각 실현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구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안티 오이디푸스적 틀에서 보면, 그것은 주체집단의 배치를 구성해나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들뢰즈, 가따리에 의하면, 이해의 전의식적 투여 속의 혁명적인 것은 무의식적 욕망 투여 속의 혁명적인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혁명적 전의식은 새로운 목표와 새로운 사회적 종합, 새로운 권력을 겨냥하지만, 무의식적 리비도는 계속 권력의 낡은 형태와 그 코드들을 투여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집단은 설사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도 욕망하는 생산을 예속시키고 파괴하기를 계속하는 한 예속집단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이 집단 속에는 초자아화, 집단의 위계질서, 욕망의 억압 메커니즘이 보존되면서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파시스트적 투여가 계속된다. 반대로, 주체집단은 그 리비도의 무의식적 투여 자체가 혁명적인 집단이다. 이 집단은 욕망을 사회적 장 속에 침투시키고, 집단의 초자아도 위계도 없는 횡단적 네트워크를 실현한다.22) {천의 고원}에서는 이와 같은 주체 집단이 수목형에 대비되는 리좀형 집단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단일한 중앙에서부터 상하 수직적으로 계열화되는 위계화된 구조가 아니라, 횡단적이면서 유연한 접속을 작동시키는 열린 체계이다. 여기서 '횡단적'이라는 것은 수직적이고 경직된 위계구조나 하향평준화된 균일성에 입각한 수평적 공동체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집단은 자본의 지배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본과 동일한 방식의 분리차별과 위계화의 메커니즘을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치적 행동을 모든 형태의 단일화와 전체화로부터 해방시키고, 행동, 사유, 욕망을 피라미드적 하위분할과 위계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증식, 병치, 분기에 의해 증대'23)시키는 집단이다.
그렇다면, 미시적 수준에서 이러한 코뮤니즘으로 직접 이행하라는 것은, 단번에 유토피아적 기획을 완성하라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가따리는 "기원, 본성, 초월성으로 소급해 들어가는 모든 형태의 유토피아적 향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라고 말한다. 오히려, 조직적으로 완전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것이 권력의 기호가 아닌지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체집단은 하나의 고정된 집단 유형이 아니며, 언제라도 예속집단으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이후에는 주체집단과 예속집단이라는 집단 범주보다는 배치 개념을 선호한다. 문제는 어떠한 관계를 구성해 나갈 것인가라는 배치의 문제이며, 이 때 배치는 완전한 적대의 소멸이라는 궁극목적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거시 권력의 지주(支柱)이자 구체적 효과로서 집단 속에서 발아하는 모든 파시즘적 권력과 투쟁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관계를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성과 형식적 합의를 강조하면서 활동가와 대중, 남성과 여성, 장년층과 청년층 등 관계의 다양한 수위에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입장들 및 관점들간의 충돌과 모순을 은폐, 억압하고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독특한 상황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다수자의 권력을 분석하고 또 그러한 권력과 투쟁하면서 지배적 전통의 위계나 분리차별을 침식시킬 수 있는 전혀 다른 유형의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권위를 획득하는 미시 파시즘 그리고 '진보진영'내로 끊임없이 이식되는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권력형태들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노동자운동이 노동으로부터 욕망을 단절시키고 내핍과 희생을 강요하는 자본의 금욕주의적 논리를 그대로 자신의 운동과 조직 속에 답습하고 있는 한에서, 활동가 집단이 "금기나 의례를 통해 리더쉽, 자기 동일시, 암시효과, 거부, 희생양 등 집단을 자기 자신 속으로 폐쇄해버리게 하는 현상들"24)을 작동시키면서 규율과 훈육의 메커니즘에 기초한 예속집단의 배치를 재생산하는 한에서, 변혁 주체를 자임하는 남성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남근지배자로 스스로를 확립하는 한에서, 미시파시즘을 끊임없이 발견, 분석하고 이에 대항해서 전투를 벌이는 것은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매 순간 관계 구성의 매 국면마다 부르주아적 권력의 주체성 양식과 단절하고 새로운 주체성 양식을 창조하기 위해서 말이다.
4. 나오며
이 글을 통해 필자는 들뢰즈, 가따리의 저작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으로 독해하고자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욕망, 배치, 미시정치학, 미시파시즘의 개념들을 우리의 이론적 현실적 지형에 개방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이 글은 특히 미시파시즘에 대한 투쟁이 자본주의, 가부장주의, 국가주의와 발본적으로 단절하는 새로운 주체성 양식을 창조하는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단번의 구조 혁명으로 완수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권력 효과에 대한 매 번의 구체적 행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영원한 개량주의'이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당장 미시적 층위에서 '부르주아적 주체성 양식을 즉각 폐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통상적 의미의 개량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주체성 양식을 창조하는 문제는 단번에 주체들간의 조화로운 삶에 의한 자율적 공간의 창조로 귀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파시즘의 문제는 비대칭적 권력관계 혹은 힘의 불균형 속에서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행사하는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시파시즘의 문제설정은 소수자화의 관점과 연계된다. 이 때 소수자라는 것은 수적으로 소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계에서 권력으로부터 배제되고 억압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는 상대적으로 더 큰 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작은 양뿐만 아니라 더 큰 양도 그것과의 관계에서 소수자라고 말해지는 상태나 표준의 결정을 의미한다. 다수성이 지배의 상태를 전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여성, 아동, 동물, 식물, 분자는 소수자이다."25) 또한 소수자화라는 것은 지금까지 백인, 성인, 남성 등 모든 다수자의 편에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특권으로 유지되어 왔던 모든 권력의 형태를 의문시하고, 소수자의 편에 섦으로써 지배의 효과를 전복하고 기존의 권력관계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비(非)파시스트적 삶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소수자화(devenir-minoritaire)와, "모든 소수자화의 열쇠"가 되는 여성화(devenir-femme)는 반드시 검토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파시즘은 타인에 대한 권력 행사와 지배를 욕망하는 보스(boss) 파시즘, 모든 사안을 '조직 보존 논리' 혹은 '조직력 강화'의 논리에 따라 걸러내면서 다양한 욕망을 억제하는 조직 파시즘, 연령, 성, 능력에 따라 위계를 나누고 이 위계에 불변의 권위를 부여하는 위계주의, 권위주의, 능력주의 등 다양한 얼굴로 나타나지만, 이 모든 것은 종종 '남근지배체제'와 착종되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태도로부터 파시즘의 모든 흔적을 지우는 작업은 지배적 다수에게 부여되어 왔던 모든 특권을 의문시하고 전복하는 행동과 함께 가야하며, 이 전복의 대상에 가부장주의, 남성우월주의와 성차별주의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남성들이 일상적 관계의 수위에서 소수자들의 희생과 예속을 대가로 자신이 누리는 지배적 특권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그 지배 효과의 수혜자나 공모자로서 가담하기를 계속한다면, 그 남성들은 다수자로서의 자신의 남성우월주의적 관점을 자신이 주변으로 은연중에 투사할 것이며, 그 경우, 그는 권력의 파시즘적 극의 일부로서 작동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미 주>
1) M. Foucault, "Preface in Anti-Oedipus", Dits et ecritsⅢ, 1994, p. 134.
2) Gilles Deleuze & Claire Parnet, Dialogues, Editions Flammarion, 1977, p. 96.
3) 이는 정신분석학자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리가레(Luce Irigaray)의 통렬한 비판 속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만일 무의식이 특정한 역사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역사에 의해 우리에게 부과되는 검열들, 억압들의 결과인 동시에 또한 아직 발생하지 않은 것, 아직 오직 않은 것의 저장고라면, 당신들의 반박이나 검열, 몰인식은 미래를 과거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당신들은 아직 예속되지 않은 것을 이미 예속된 것으로, 언어의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언어가 이미 벙어리로 만들거나 침묵시킨 것으로 계속 환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현존하는 질서의 산물들이자 수호자들, 이러한 질서가 마치 유하게 가능한 질서인 것처럼 존속하는 것을 보증하는 검열과 억압의 대리인들이 아닌가?" 뤼스 이리가레, [정신분석학의 빈곤], {성적 차이와 페미니즘}, 권현정 옮김, 공감, 1997, 225쪽.
4) Deleuze & Guattari, Anti-Œdipe, Editions de Minuit, 1972, p. 453.
5) 펠릭스 가따리, 윤수종 편, [제도적 실천과 정치],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재, {자유의 공간을 향하여}, 92쪽
6) A. Negri, Spinoza Subversif, Editions Kime, 1992, p. 56.
7) 이진경, [공간-기계와 공간적 신체: 공간 기계 이론의 몇 가지 기초 개념]4장 참조.
8) F. Guattari, La revolution moleculaire, Recherches, 1977, p. 20.
9) 이와 관련된 참고 자료로는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열대야>와, 임인애, [실패한 상흔은 오래 지속된다], {진보평론 3}, 2000년 봄호에 수록된 인터뷰 자료들이 있다.
10) Deleuze & Guattari, Mille Plateaux, Minuit, 1980, p. 265.
11) 네그리 & 하트, {디오니소스의 노동 1}, 이원영 역, 갈무리, 1996, 32쪽.
12) Trinh T. Minh-ha, "Difference: A special third world women's issue", Discourse, 8, pp. 15-16.
13) Guattari, Chaosmosis, Indiana University Press, 1995 참조.
14) Guattari, Molecular Revolution, Penguin Books, 1984, p. 114.
15) 들뢰즈, 가따리는 분자라는 개념을 몰의 개념에 대비하고 있다. 몰(mole)은 동질의 입자가 하나의 집계로서 존재하는 단위이며, 분자(molecule)는 최소 단위의 입자이다. 그런데, 들뢰즈, 가따리는 전체화되고 구조화된 것을 몰적인 것으로 개념화하고, 이러한 유기체적 질서를 가로지르면서 그것을 헤치고 빠져나가는 힘들을 분자적인 것이라고 개념화한다. 이렇게 보면, 흔히 미시/거시의 이분법에서 나누는 식으로 미시=개인, 거시=사회가 아니라, 개인 자체도 하나의 유기체로 간주되었을 때는 몰적인 것이며, 집단 속에서 개인들 간에 흐르는 교감과 욕망, 정동들의 소통은 초개인적인 것일지라도 분자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 대상의 분자화라 함은, 계급 투쟁 수준에서 가시적으로 편성되는 세력관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이해관계와 때로는 일치하고 때로는 어긋나면서 그어지는 욕망의 전선까지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16) 가따리, [저는 아이디어 도둑입니다],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재, {자유의 공간을 향하여}, 84쪽.
17) Guattari, La revolution moleculaire, p. 48.
18) 진중권, '인문학 데이트', <한겨레신문> 2000.07.07 인터뷰 중.
19) 가타리, [욕망의 해방],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재, {자유의 공간을 향하여}, 121쪽.
20) 가따리, [분자혁명],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재, {자유의 공간을 향하여}, 147쪽.
21) Guattari, La revolution moleculaire, p. 30.
22) Deleuze & Guattari, Anti-Œdipe, Editions de Minuit, 1972, pp. 415-418 참조.
23) M. Foucault, "Preface in Anti-Oedipus," Dits et ecritsⅢ, 1994, p. 135.
24)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e, Maspero, 1972, p. 53.
25) Deleuze & Guattari, Mille Plateaux, p. 356.
[출처] 들뢰즈,가따리 다시읽기-권혜원|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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