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들의 재해석
기호에 관한 도제수업을 하면서 마르셀은 사교계・사랑・감각의 물질적 기호들에서 예술의 비물질적 기호들로 나아가게 되고, 뒤이어 예술에 대해 완전하게 이해하게 됨에 따라 감각적인, 사랑의, 사교계의 기호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특히 비자발적인 기억의 기호들의 경우 맞아떨어지는바, 단지 『찾기』의 마지막 권에서 적절한 분석이 이루어질 뿐이다. 우선, 비자발적인 기억은 단순히 생각들(ideas)의 무의식적인(unconscious) 연상의 문제(matter)이며, 현재의 감각과 과거의 감각 사이의 유사성이다. 그러나 마르셀이 경험하는 엄청난[압도적인] 기쁨은 어릴 적 회상(reminiscence)과 마주쳐서 생기는 결과 이상의 것이다. 첫째, 그것은 다른 시간 형태, 즉 “과거라는 존재 그 자체”(PS 72; 56)가 드러나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점에서 프루스트가 베르그송주의자라고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현재란 만약 그것이 시간 속의 하나의 단순한 점이라면 결코 흐르지(pass)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가 미래를 향해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현재의 순간과 그것에 바로 앞서는 순간 사이에 하나의 연속성이 있어야 한다. 즉 전진적인(ongoing) 운동 내부에 현재와 과거가 공존(coexistence)해야 한다. 이로부터 베르그송은 현재의 모든 순간마다에는 공존하는 과거 순간이 존재한다고 결론짓지만, 그는 더 나아가 과거 순간이 모든 과거 순간들을 하나의 연속적인(continuous), 공존적인 전체로서 포함하는 단일한(single) 과거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과거는 원뿔과 같아서 그것의 바닥(base)은 시간 속에서 뒤로 무한히 확대되고 그것의 꼭대기(tip)는 현재와의 공존 지점이다. 그렇지만 과거가 현재와 공존한다면, 그 둘은 질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과거가 가상실효적[잠재적](virtual) 실존을 갖는 반면 현재는 현실적(actual) 실존을 갖는다. 둘 다 실제적이지만(real) 가상실효적 과거는 결코 현실적이었던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무언가를] 기억할 때 한때 현재였던 그리고 이제 막 과거로 빠져 들어간 순간의 자취를 현재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는 가상실효적 과거의 장 속으로 질적 도약을 하고, 거기에서 모든 과거 사건들은 단일한 시간적 차원 속에서 서로 공존한다. 들뢰즈의 주장에 따르면, 이러한 베르그송적 가상실효적 과거는 마르셀이 비자발적인 기억을 통해 탐험하는 과거와 매우 유사하다. “과거의 순간, 내가 그렇게 말했나요? 어쩌면 그것이 정말 훨씬 더 대단하지 않은가요? 과거와 현재 둘 다에 공통적인, 그것들 둘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무언가가 말이지요.”(Proust III 905) 단일한 현재에서 의미들은 빈약하다(languish). “그러나 예전에 들었거나 맡았던 어떤 소음이나 어떤 냄새(scent)를 현재에 그리고 동시에 (현실적이지 않고 실제적인, 추상적이지 않고 이념적인) 과거에 다시 듣거나 맡아 보라. 그러면 즉각 사물의 영구적이면서 관습적으로 은폐되어 온 본질이 해방된다.”(Proust III 905-6) 비자발적인 기억은 베르그송적 과거처럼 “현실적이지 않고 실제적이며, 추상적이지 않고 이념적이며”, “현재에 그리고 동시에 과거에” 존재하는 시간적 차원을 경험하는 것이다. 비자발적인 기억을 통해 1분은 “시간의 질서[명령]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Proust III 906), “순수 상태 속에서의 시간의 파편(fragment)”(Proust III 905)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에는 가상실효적 과거의 드러남(disclosure)보다 더 많은 것이 존재한다. 감싸지면서 펼치는(enfolded and unfolding) 차이들로서의 본질들의 계시(啓示)(revelation) 역시 존재한다. 비자발적인 기억은 두 가지 감각들 사이의 유사성을 단순히 만들기보다는 “엄격한 동일성 - 두 가지 감각들에 공통적인 질이라는 동일성, 즉 현재와 과거라는 두 순간들[계기들]에 공통적인 감각이라는 동일성”(PS 74; 58)을 드러낸다. 마르셀이 마들렌을 맛볼 때 그것의 맛은 두 가지 다른 순간들[계기들]에 공통적인 질이다. 그러나 그는 꽁브레의 단순한 연상과 마들렌의 맛 그 이상을 경험한다. 기억의 임의적인[자발적인](voluntary) 실행 속에서, 그 맛과 꽁브레와 연관된 회상들은 서로 인접해 있지만, 외부적이다. 그렇지만 비자발적인 기억을 통해 마들렌이 과거 속에서 맛보았던 맥락은 현재의 경험에 내재적이 된다. 비자발적 기억은 “맥락을 내재화하고(internalize), 이전의 맥락을 현재의 감각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PS 75; 58) 꽁브레는 마들렌의 현재의 맛 안에서 앞으로 휘돌아 나간다(surge). 이러한 의미에서, 공통적인 질이라는 정체성[동일성] - 마들렌의 맛 - 내에서 하나의 차이가 내재화된다. 즉 과거의 꽁브레가 현재로서 내재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꽁브레는 그 스스로가 - 과거에 경험했던 바의 꽁브레가 아니라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바의 꽁브레의 본질인 - 하나의 차이이다. “실재(reality)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진리의 측면에서; 그것의 외적이고 우발적인(contingent) 관계들의 측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내재화된 차이, 그것의 본질의 측면에서.”(PS 76; 59) 그렇다면 비자발적인 기억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쇄(link)가 (그들의 차이를 내재화하는) 공통적인 질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예술과 닮았다. 그 공통적인 질은 하나의 세계를 펼치는 본질로, 그리고 “순수 상태 속의 시간의 파편”으로 판명된다. 하지만 비자발적인 기억의 기호들은 몇 가지 점에서 예술의 기호들과 다르다. 그것들이 [그 안에서] 구현되는 물질(matter)은 예술에서보다 더 불투명하고(opaque), 덜 유연하다(pliable). 그것들은 꽁브레, 발벡, 베니스 등과 같은 장소들(locales)과 특정한 감각적인(sensory) 대상들에 묶여 있으며, 순간적이어서(evanescent)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것들이 드러내는 시간은 예술의 복잡한[주름잡힌], 최초의(originary) 시간을 가리키지만, 비자발적인 기억의 시간은 예술의 “되찾은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배치되고 전개된 시간 속에서 갑작스럽게(abruptly) 나타난다. 그것은 지나가는 시간의 한가운데[심장부]에서 감쌈(envelopment)의 핵심[중앙]을 재발견하지만, 이것은 단지 최초(original) 시간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PS 78; 61) 마지막으로, 예술 작품들 속에서 상이한 요소들의 선택과 관계가 “연성(延性)의(ductile) 혹은 투명한 매체 속에 자신을 구현하는 본질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되는” 반면, 비자발적인 기억에서 관계들은 우발적인 연상에 의존한다. “따라서 본질 자체는 더 이상 그 자신의 구현, 그 자신의 선택의 주인이 아니라, 그것에 외부적으로 남아 있는 소여들(givens)에 따라 선택된다.”(PS 80; 63)
기호들의 진리는 “우연적이고(fortuitous) 불가피하며”(Proust III 913), 자유롭게 선택되기보다는 비자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우발적이기보다는 필연적이다. 예술에서는 기호와 의미의 적실화(adequation)가 존재한다. 본질은 그 자신의 내적 필연성에 따라 펼쳐지며, 그것이 드러내는 세계는 예술가가 선택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술가를 그러한 불가피한 세계의 일부로 펼치는 세계이다. 그리고 기호와 의미의 이러한 적실화 속에서 본질은, 그것이 특이한 관점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개인을 그리고 심지어는 개인화[개별화]를”(PS 77; 60) 특이화한다. 감각적 기호들이 대부분 “우연적이고 불가피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예술 기호들보다 더 우발적이고 보편적이다. 감각적 기호들에 의해 드러나는 본질들은 외부적 환경들에 의존해 선택되며, 그것들이 드러내는 세계들은 두 순간들[계기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세계들이며, 예술의 특이한 세계들보다 좀 더 보편적이다.
사랑의 기호들과 사교계의 기호들에서 본질들은 점점 우발적이고 보편적인 형태들을 띠며, 그들의 경계에서는 “법”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본질은 사랑의 기호들 내에서는 하나의 주제(theme)로서, 사랑의 순간들[계기들]을 통해 작용하는 그리고 그것들을 계열들 내에 배열하는 일반적인 모티프로서 자신을 드러낸다. 마르셀이 질베르트, 게르망트 부인, 알베르틴 등을 사랑하는 것은 “각각의 항이 그 자신의 작은 차이를 포함하는 하나의 계열”(PS 85; 67)을 구성한다. 각각의 사랑은 또한 그것 안에 하위분할들(subdivisions)의 계열 - 예컨대 알베르틴의 여러 자손들을 사랑하는 마르셀, 구별되는(differential) 단계들의 계열에 이어지는 그의 호의 - 을 포함한다. 그리고 더욱이 주체횡단적(transsubjective) 계열들은 다양한 사랑 관계들을 연결시킨다. 예컨대, 스완이 오데트를 사랑하는 것은 마르셀, 질베르트, 게르망트 부인, 알베르틴을 포함하는 계열들, 그리고 그 복잡한 계열들에 덧붙여 마르셀과 그의 어머니를 포함하는 계열들의 일부를 형성한다. 그러나 사랑의 일반법, 즉 그것의 가장 광범한 연속적[직렬적] 진리는 성들(sexes)을 제거[추방]하는 것(sequestration)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 세계를 분할하는 것 속에서 드러난다. 사랑의 기호들은 은폐된 세계의 비밀들을 감싸고, 알베르틴의 동성애의 비밀은 마르셀을 위해 고모라의 세계에서의 동성애적인 관계들의 증식하는 계열들을 밝혀 준다. 마찬가지로 샤를뤼스가 쥐피앙과 만나는 것은 소돔의 세계의 평행적[병렬적] 계열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각각의 개인 내에서도 역시 성들의 제거[추방], 즉 소돔과 고모라의 법을 일반화하는(universalize) 최초의(primal) 자웅동체성(hermaphrodism)이 존재한다. 모든 개인은 자웅동체적 식물이나 달팽이처럼 양성(兩性)을 포함하는바, 그것의 수정작용[수태(受胎)](fertilization)은 외부적인, 우발적인 요소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 이성애적 사랑에서조차도 여자는 남자를 위해 남성 역할을 하고, 남자는 여자를 위해 여성으로서 봉사한다.
따라서 일반적(general) 주제는 사랑의 연속(sequence), 동일한 사랑 내의 [여러] 순간들의 계단, 그리고 굴절하는(reverberating) 사랑들의 주체횡단적 네트워크 등을 관통한다. 그러나 보편적 수준에서 그와 같은 주제는 성들을 모두 사회 내부에서 그리고 각각의 개인 내부에서 분리시키는 동성애적 사랑들의 반복적인 계열을 통해 울려퍼진다. 본질은 스스로를 드러내지만, 혼란스럽고 우발적인 형태 속에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사랑에 빠져 있지 않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형태 속에서 그렇게 한다. 질투의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강제적으로] 사랑의 기호들을 해석하지만, 이해의 기쁨이란 사랑이 끝났을 때나 생길 뿐이다. 본질은 사랑 안에서는 무의식적인 주제로 남아 있고, “사랑의 기호들 속에서 스스로를 구현하는 본질을 선택하는 것은 감각적 기호들 속에서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외부적인 조건들과 주체적인[주관적인] 우발성들에 달려 있다.”(PS 93; 73) 실제로 이러한 대(大)주제(Theme), 이데아(Idea)야말로 “우리의 주체적 상태들의 계열들을 결정할 뿐만 아니라, 이데아의 선택을 결정하는 우리의 주체적인 관계들의 우연한(chance) 사건들을 결정한다.”(PS 93; 73)
사교계의 기호들의 경우에, 본질은 그 가장 일반적이고 우발적인 구체화(embodiment)를, 계열들 속에서가 아닌 “집단의 일반성”(PS 100; 79) 속에서 발견한다. 『찾기』의 결말에서 서술자는, 비판가들이 사회적 관습들을 묘사하면서 자신들이 세부적인 내용들을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지나치게 세심하게 고찰한 것을 본다고 생각했으며, “[그리고] 그 때 그와 반대로, 육안으로 보기에는 - 그러나 그것들이 단지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 정말 매우 작은, 그리고 그것들 각각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인, 사물들을 관찰하기 위해 내가 사용했던 것은 망원경이었다. 내가 일반법들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이러한 경로들은 세부사항에 대한 대단한 현학적인(pedantic) 조사를 벌이듯 묘사되었다”(Proust III 1098-1099)라고 언급한다. 사건들의 다수성은 - 그것들이 정치적이건, 역사적이건, 문화적이건, 혹은 가족적이건 - 상류 사회(polite society)의 시간을 차지하지만, 궁극적으로 사교계의 기호들은 공허하다. 그것들은 단지 사유들과 행동들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며, 감정들(sentiments)과 생각들(ideas)을 대신한다. 그것들은 결국 어리석음의 기호들이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의 몸짓들, 그들의 소견들, 그리고 그들이 비자발적으로 표현하는 감정들 속에서, 그들 스스로는 지각하지 못하지만 예술가는 그것들 안에서 놀라움을 선사하는 법률들을 드러낸다.”(Proust III938) 의례적인 형식주의가 나타나고, 본질은 그것이 세계에서 스스로를 엉성하고 천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어떤 우스운 힘을 보여준다. 개인들은 서로의 사유들을 반복하고 그들의 상투적인 견해들은 집단 심성들, 즉 예술가/분석가가 추출할 수 있는 은폐된 유연성(類緣性)[친화성](affinities)들을 드러내 보여준다. “일반성을 위한 하나의 감정이 존재하는바, 그것은 미래의 작가에게 보편적이고 그래서 그런 이유로 언젠가 예술 작품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을 스스로 골라낸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그는 사람들이 비록 어리석거나 우스꽝스럽다 해도, 그들이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하는 버릇을 앵무새처럼 반복함으로써 스스로를 점보는 새들에, 심리학적 법의 대변자들에 몰두할 때에만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Proust III 937)
사교계의 기호들은 마르셀의 도제수업을 주도하지만, 그것들의 의의(significance)는 그의 탐색의 끝에서 두드러질 뿐이다. 기호들은 이중적 독해를 필요로 하는바, 그 첫째는 전진적인 이해의 맥락에서의 독해이며, 둘째는 소급적인 이해[터득]의 맥락에서의 독해이다. 들뢰즈는 마르셀의 기호들을 통한 도제수업에서 『찾기』의 통일성을 발견한다. 그가 지루하고 사교적인 언쟁(exchange)의 기호들을, 거짓되고 질투어린 사랑의 기호들을, 비자발적 기억의 흥미로운 기호들을, 그리고 예술의 비물질적인 기호들을 펼침에 따라 그는 점차 기호들을, 함축된 본질들로 이해하게 된다. 그는 기호들의 진리를 탐색하면서 더불어 시간의 다양한 형태들 - 쇠퇴의 시간, 사람들이 낭비하는 시간, 감각적인(sensate) 경험에 풀어헤쳐진 “순수 상태의 파편화된 시간”, 예술의 복잡한 최초의 시간 - 을 발견한다. 그는 다양한 실망들과 환영들[착각들]을 통해 나아가면서 기호들의 진리를 그것들이 가리키는 대상들이나 그것들을 지각하는 주체들에 잘못 위치짓는다. 그러나 일단 예술 기호들이 이해되면 다른 기호들은 변형된다. 모든 기호들은 함축적이며 본질들을 감싸고 있다. 비록 그러한 본질들이 일반성과 우발성의 다양한 단계들의 상이한 기호들 속에서, 가단성(malleability)과 저항의 다양한 차원들을 갖는 물질(matter) 속에서 표현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예술 작품 속에서 하나의 개별화하는, 특이한 차이는 스스로를 변형된 물질 속에서 스스로를 반복하고, 자율적인 세계와 관점을 펼쳐 보인다. 감각적 기호 속에서 공통적인 질은 하나의 본질적인 국부적[지역적] 차이와 가상실효적 과거를 내재화한다. 사랑의 기호들 속에서, 하나의 일반적 주제는 개인의 열정들의 연속 속에서, 특정한 관계 내부의 하위분할들 속에서, 애정들(affections)의 주체횡단적 네트워크들 속에서, 그리고 제거된 성들의 병렬적 계열 속에서 스스로를 반복한다. 그리고 사교계의 기호들 속에서 본질은 의례적인 형태의 일반법들과 광범한 집단 유연성[친화성]들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어떤 점에서 들뢰즈가 기술하는(delineate) 통일성은 주제적 통일성, 『찾기』의 “사유” 혹은 “내용”이다. 하지만, 또 다른 점에서 기호들의 도제수업의 통일성은 그것의 “형태” 그리고 그것의 형태화(formation) 측면에서 『찾기』를 특징짓는다. 기호들의 해석은 감싸이고 함축된 차이를 펼치고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들의 해석은 단지 기호 자체의 운동의 과정을 따른다. “왜냐하면 기호가 해석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전개시키고 [말려진 것을] 풀어내기 때문이다.”(PS 110; 89) 자신의 도제수업에서 마르셀이 기호들을 해설하는 것은 『찾기』의 기호들을, 특이한 세계와 관점을 밝혀주는 예술 기호들을 펼치는 것이다. 본질은 변형된 물질을 통해 스스로를 차이화하면서,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 기호들을 예술 기호들로 변형시키고, 그것들을 스타일의 필연적 연쇄들 속에 감싼다. 소설의 결말에서 마르셀에게 밝혀지는 본질들의 세계는 기호들의 진리를 찾아 나선 그의 탐색 속에서 펼쳐진 『찾기』이다. 그것은 시간 속의 진리, 즉 점진적인 계시(啓示)의 과정이며, 여러[다수적인] 모양을 띠고 나타나는, 시간에 대한 진리이며, 시간의 진리이자, 그 자신의 복잡한 최초의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예술작품이다. “예술로 인하여, 하나의 세계만을, 우리 자신의 세계만을 보는 대신, 우리는 세계가 스스로를 증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우리의 뜻대로 갖게 된다.”(Proust III 932) 그러한 세계 중의 하나가 『찾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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