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의 철학 / 만프레트 가이어 지음, 이재성 옮김 / 글항아리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 본류선 웃음 추방뒤 엄격함으로 무장
‘원자론’데모크리토스서 출발 유머에 철학적 도전한 칸트
‘웃음’ 출간 베르그송 등 다뤄
추리소설 형식을 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결말은 ‘희극’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편을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고자 했던 수도원 성직자의 음모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비극’을 다룬 데 빗대어, 2편은 ‘희극’, 곧 ‘웃음’을 다룬 것으로 소설은 가정한다. 중세 기독교가 ‘웃음’을 얼마나 금기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서양철학에서 웃음에 대한 억압은 그보다 훨씬 더 전인 ‘소크라테스=플라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덕적 진지함과 인식론적 엄격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웃음을 철학으로부터 추방했다.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脚註)에 불과하다’고 말해지듯, 적어도 플라톤의 저작들이 기초를 닦아놓은 이후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웃지 않는다’가 뿌리내렸다. 이 책은 서양철학의 본류를 벗어나거나 그 틈새에서 웃음의 금기를 거부한 철학자들을 탐색한다. 하노버대에서 언어학과 독문학을 가르쳤고 여러 권의 대중적 철학서를 펴낸 저자는 ‘서양 철학사 속 웃음의 계보학’을 복원한다.
인식론을 다룬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탈레스가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걷느라 웅덩이에 빠지자 트라키아의 젊은 하녀가 ‘비웃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철학을 모르는 무지한 사람들의 단순함, 그 바보스러운 사람만이 철학과 철학자를 보고 웃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본보기로 전해져왔다. 저자는 “그렇다면 철학 안에 웃음을 위한 자리는 없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밤하늘의 별’과 ‘웅덩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데아의 형이상학’과 ‘삶의 철학’을 각각 상징한다. 저자는 “트라키아 하녀의 웃음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획득하기 위해서 생생한 삶과 거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유럽 철학의 근본적인 거짓을 한순간에 꿰뚫어보는 해방적인 웃음”이라고 말한다. 서론에 나오는 이 말이 저자의 결론인 셈이다. 저자가 유물론의 효시라 할 ‘원자론’의 자연철학자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책은 웃음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칸트와 키르케고르를 넘어 20세기의 앙리 베르그송과 희극작가 카를 발렌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철학자들을 다룬다.
원자와 텅 빈 공간들로 이루어진 만물에는 신들이 설 자리가 없다고 본 데모크리토스는 이성적인 절제 속에 ‘유쾌함’ ‘명랑한 태연함’을 도출하며 ‘웃는 철학자’라는 명칭을 얻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의 ‘어두운 밤하늘’을 알고 있었으며 거기에 웃음으로 맞서면서 플라톤이 가장 경계했던 철학자로 남아있다. 칸트는 “횡격막의 움직임이 갖는 웃음의 치유적 효과”를 언급하며, 웃음을 부작용이 없는 가장 효과적인 약으로 처방했다. 칸트는 익살과 유머, 웃음과 기분좋음에 철학적으로 도전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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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라는 책을 낸 베르그송은 모든 것이 자본화·기계화돼 가는 20세기 초에 웃음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정리했다. 인간은 점점 더 장난감처럼 외부권력에 좌지우지되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이고, 직업세계는 동일한 것을 반복하도록 강제한다. ‘생(生)철학’으로 말해지는 베르그송은 진정으로 생동감 넘치는 생은 반복돼서는 안 되며, 인간은 자신만의 개성을 가지고 단조롭고 연속되는 획일적인 중첩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베르그송은 탄력 있는 생동성과 경직된 기제가 만드는 현실의 삶 사이에 존재하는 우스꽝스러운 불일치에 주목했다. 기계적인 것이 생을 딱딱한 층으로 덮어버린 현실을 치료하기 위해 베르그송은 웃음을 처방한다. 그는 웃음을 사회라는 신체의 마디마디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회적인 제스처’로 이해했다.
만물의 근원을 원자와 공허(空虛)로 보고 ‘여기’와 ‘지금’을 긍정한 데모크리토스 처럼 책에 소개된 철학자들은 웃음을, 삶을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으로 본다. 웃음, 곧 행복은 삶의 주요한 목적이다. 웃음이 사라지거나, 억지웃음만 난무하고 마음껏 웃을 수 없는 현대인에게 웃음은 삶의 의미를 찾게 하는 적극적인 실천에서 나온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3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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