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음: 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Le rire: Essai sur la signification du comique. 1900)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
- 이 창 익
살아가면서 우리는 타인을 보고 웃음을 짓기도 하고 우리 자신이 타인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타인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때 그것은 즐거움을 주지만, 의도하지 않게 우리 자신이 세인의 웃음거리가 될 때 그것은 아마도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물론 웃음은 호감의 표시일 수도 있고 비웃음의 질책일 수도 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우리는 우스꽝스러운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저 우리가 웃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스꽝스러운 것의 근원에 어떤 공통적인 원리가 있는지, 웃는다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웃음의 기능이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순간, 우리는 금세 당혹감에 빠져들게 된다.
생명의 약동성과 유연성의 회복을 강조했던 생명철학자인 앙리 베르그송은 1900년에 출간된 『웃음: 희극성의 의미에 관한 시론』에서 바로 이러한 질문들을 직접적으로 던지고 있다. 이 저서에서 베르그송은 탁월한 인간적 속성인 웃음을 분석함으로써 인간 자체에 대한 보다 심오한 이해에 도달하고 있다. 웃음은 언제나 우리의 안면근육을 수축시키면서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우리는 도대체 웃음의 정체를 투명하게 알지 못한다. 얼굴에 나타나는 웃음의 신기루는 우리가 분석하려고 하자마자 그 모습을 곧장 감추고 만다. 그러므로 베르그송의 『웃음』은 웃음을 만드는 원리와 웃음의 기능을 해명하는 ‘웃음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우리의 흥미를 끄는 책이다.
베르그송은 이 책에서 주로 웃음을 유발하는 ‘희극성의 창출 기법’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즉 웃음을 유발하는 대상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웃음의 원인과 효과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길거리를 달리던 남자가 돌멩이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면서 땅바닥에 넘어진다. 이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 베르그송은 이를 두고 신체가 드러내는 ‘기계적인 경직성’이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남자는 유연성의 부족이나 몸의 경직이나 정신의 방심 상태로 인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며, 바로 이런 뻣뻣함과 기계적인 경화 현상이 웃음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새로운 변수들에 적응시켜야만 한다. 생명을 지닌다는 것만으로도 부단한 집중력과 주의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집중은 피로감을 발생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말과 행동을 공식처럼 판에 박힌 듯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고자 한다. 게으름으로 인한 바로 이러한 방심의 순간에 생명의 지속성 안에서 ‘기계적인 경직성’과 ‘자동주의’가 돌출하게 된다. 인간이 기계처럼 동일한 말과 동일한 동작을 반복하게 됨으로써,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기계가 될 때 희극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본래 웃음이란 기계장치가 되어 버린 인간을 조롱하고 교정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베르그송에게 희극성은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에서 유래한다. 베르그송은 “살아있는 생명은 결코 반복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반복이 있는 곳에서, 그리고 완벽한 유사성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살아있는 것 뒤에서 기계적인 것이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라고 말한다. 전혀 우습지 않은 어떤 몸짓이나 말이라도 다른 사람이 흉내를 내게 되면 우스꽝스러워진다. 흉내를 통해서 우리는 그 사람의 몸짓과 말 속에 숨어서 반복되는 기계주의와 자동주의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개그맨들은 자기만의 ‘캐릭터’와 ‘유행어’를 통해 웃음을 준다. 캐릭터란 기계적으로 반복 가능한 성격을 의미하고, 유행어는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언어를 가리킨다. 캐릭터와 유행어는 생명을 기계장치로 환원시키는 효과적인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이 자유를 반납한 채 ‘꼭두각시’나 ‘자동인형’이 되는 모습은 우리에게 항상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캐릭터는 “우리의 인격 속에 있는 기성적인 것, 우리 내부에 있는, 마치 조립 제작된 기계장치와 같이 자동적으로 작동 가능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미리 준비된 어떤 틀에 자기 자신을 끼워 넣거나,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이 삽입될 수 있는 틀이 될 때, 이러한 상황은 희극을 불러일으킨다.
이와 같이 “생명적인 것에 덧붙여진 기계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베르그송은 희극성이 확산되는 세 가지 방향성을 제시한다. 첫 번째로 ‘자연 속에 끼워 넣어진 기계주의’와 ‘사회에 있는 자동적인 규칙’은 희극적인 효과를 창출한다. 예컨대 카시니라는 천문학자로부터 월식을 관찰하러 오라고 초대받았던 부인이 늦게 도착하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카시니 씨, 저를 위해 다시 한 번 월식을 시작해 주세요.” 한 철학자가 그의 추론이 완벽하게 논리적이기는 하지만 경험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을 당하자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경험이 틀린 것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주는 희극성은 마치 자연을 기계처럼 반복 가능한 것으로 취급하거나, 철학의 논리와 규칙에 갇혀 그 밖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기계주의에서 비롯한다.
두 번째로는 우리의 주의력이 내용에서 형식으로, 정신적인 것에서 신체적인 것으로 돌려질 때 희극성이 분출한다. 독일의 어느 철학자가 추도사에서 “그는 고결하고 무척이나 뚱뚱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의 주목은 고결한 정신에서 갑자기 뚱뚱한 신체로 향하게 된다. 또한 비극의 주인공이 긴 독백을 하는 중에 허기를 느껴 음식을 찾거나, 피곤함을 느껴 의자를 찾거나, 화장실에라도 간다면, 이때 비극은 희극으로 전환된다. “정신을 제압하고 괴롭히는 신체”는 곧잘 희극을 만들어낸다. 또한 의사, 변호사, 재판관 등이 직업적인 자동주의에 매몰되어, 사람이 죽어나가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식에 매달릴 때, 이러한 광경은 희극을 머금게 된다. 세 번째로는 어떤 사람이 사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언제나 웃게 된다. 어릿광대의 몸이 고무공처럼 서로 부딪히며 튕겨 나가기를 반복할 때 이 장면은 희극이 된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웃음이란 인간이 사물이나 기계처럼 딱딱해져서 유연성을 상실함으로써 ‘비사회적인 낱개’가 되는 현상에 대한 사회적 징벌이다. 사회는 개개 구성원의 유연성을 확보할 때 새로운 사태에 잘 적응하면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딱딱하게 굳어진 인간은 사회성을 저해하는 인물이 된다. 베르그송이 강조하는 웃음의 기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웃음의 역할은 경직성을 유연성으로 교정하고 각 개인을 다른 모든 사람과 조화할 수 있도록 재적응시키며,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의력과 사유만으로는 살 수 없다. 피곤해진 인간은 휴식을 갈망한다. 즉 일정한 틀 속에 안주하고, 기계처럼 자동화되고, 감수성이 없는 딱딱한 사물이 되기를 갈망한다. 우리가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도 바로 일시적으로나마 무대 위의 개그맨처럼 사물과 기계가 되어보는 휴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머릿속에서 개그맨들의 몸짓과 말을 따라하다가 곧장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사물과 기계가 된 인간에게 잠깐 동화되었다가도, 이내 사물과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경직성을 조롱하며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생활세계는 결코 희극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웃는 웃음은 결국 기계와 사물이 되어 휴식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조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웃음이 사라져가고 있다. 웃음의 상실이란, 그만큼 사회 자체가 기계적인 것이 되어버렸으며, 따라서 인간이 기계가 되는 편이 사회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방법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할는지도 모른다. 사회가 더 이상 기계가 된 인간을 보고 웃지 않게 된 것이다. 기계는 기계를 보고 웃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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