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존재론적 살에 대한 연구

나뭇잎숨결 2017. 3. 2. 06:06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존재론적 살에 대한 연구


- 김 병 환*

[한글 요약]


이 글은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신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사이에서 존재론적 살의 본질을 밝히는 데 있다. 메를로-뽕띠의 존재론적 탐구는 그의 현상학적 작업과 대립의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의 존재론 속에서 살적 존재를 통하여 현상학의 진정한 형태를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메를로-뽕띠는 고유한 신체에 대한 엄밀한 현상학의조건이 살의 존재론이고, 존재를 참되게 할 수 있는 의미이다는 것을 지시한다. 신체-주체에 있어서 최초의 것은 자기에 대한 현존으로서 코기토가 아니라, 신체화된 주체가 세계 속에서 자기를 투사하고, 그래서 세계를 의식에 나타나게 하는 운동이다. 세계는 신체-주체와 상관관계로서 나타나고, 세계를 나타내는 이 주체는 본질적으로 세계의 투사 혹은 열기로서 정의된다.

우리는 메를로-뽕띠가 고유한 신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에서 살의 특성으로서 교착배어법을 펼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교착배어법은 지각함과 지각됨의 교착을 특징화한다.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의 가족유사성과 이 교착은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 촉감하는 자와 촉감되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의 가역성 속에서 그것들의 더 좋은 삽화를 얻는다. 이 가족유사성과 가시성은 살의 특징들이다. 우리는 신체-주체가 세계의 대상임과 동시에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의 역할들이 연속적인 전도에 있는 곳인 선택적 운동에 따른 지각하는 주체이고, 자기를 보는 세계이다고 말하고자 한다.

요소로서의 살은 인간과 세계,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이 동등하게 생겨나는 '공통적 원형'(존재)이고, 그것은 대상과 주체의 형성적 환경이다. 공통적이고 익명적인 이러한 살은 인간을 다른 인간들의 총체에 연결하고, 또한 모든 존재자들 사이에서 친밀 관계의 참된 연결고리를 확립하면서, 인간을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세계에 연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체와 세계의 교착적 의미에서 신체는 세계의 존재론적 조직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세계는 신체의 현상적 조직으로부터 이루어짐을 말할 수 있다. 언어의 세계 속에서 참된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고, 언어의 본질은 존재의 표출을 수행하는 것이다. 끝으로 존재론적 살에 대한 함축적인 의미를 표현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존재의 들숨과 날숨, 존재 속에 숨쉬기가 있음을 말하고자 할 것이다.



주제분야 : 존재론, 현상학. 신체이론

주 제 어 : 존재론적 살, 신체-주체, 가역성, 존재, 언어

Ⅰ. 들어가는 말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신체-주체가 세계로 지향하여 획득하는 경험 자체의 사실성을 기초로 하여, 그 경험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하면서 신체-주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의 본질적 모습을 밝히는 철학이다. 그는 신체-주체의 삶의 세계에서 현상들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운데 신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의 참된 의미를 존재론적 살(la chair ontologique)에 의해서 나타낸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존재론이 현상학적 작업과 대립되어 단절되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의 존재론은 신체와 세계가 상호 침투되어 있는 체험의 세계 자체를 보여주는 현상학의 참모습을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존재론을 현상학적 존재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에서 감각, 지각, 살, 표현의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접근을 행하고 있으며, 객관적 사고를 넘어서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펼치고 있다. 여기서 존재는 객관적 존재의 규약으로부터 충족되는 것이 아니고 의미 혹은 의미화의 옷을 입는 것이며, 의미 혹은 의미화는 신체적 존재론의 징표를 나타내는 살과 세계의 접촉 가운데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메를로-뽕띠가 {지각 현상학}에서 제시하고자 한 기본적인 것은 지각의 원초적인 환원할 수 없는 특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각 활동에 있어서 봄이 봄의 사고가 아닌 것과 같이, 지각은 지각적 장 속에서 신체-주체의 실천적 종합에 의해 그 대상의 의미를 형성하는 것으로서, 우리의 모든 인식의 기반이다. 지각은 신체화된 주체의 고유한 존재적 성격으로서 세계-속에로의-존재의 기초적 방식이다.

지각의 주체는 자기를 인식하는 사고도 아니고 단순한 의식적 주체도 아니다. 이 주체는 자기의 주변에서 자기의 세계, 즉 지각의 세계를 펼치는 존재로서 고유한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의 눈은 그 주위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보는 가운데에서 직접적으로 자신을 볼 수 없다. 그 눈은 자신의 관점을 제외할 수 없고, 외부로부터 자신의 관점을 생각할 수 없다. 눈을 세계에 다시 연결하는 결합점은 눈 자신의 바라봄을 빠져나가 버린다. 세계와 우리의 최초의 관계 이후에 성립되는 반성은 모든 사고의 출현에 앞선 사건을 다시 흡수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나의 태어남의 출현을 다시 흡수할 수 없다.

의식의 최초의 표출들이 나타날 때, 나는 이미 거기에 있고, 세계 속에 던져져 있다. 나의 태어남의 사건은 나 자신을 파악하는 의식을 이미 앞서 있고, 그래서 코기토의 주체는 이미 태어난 존재 혹은 아직 살아있는 존재로서 결코 자기를 발견할 수 없다. 반성하는 주체는 그 자신의 기원과 결코 일치할 수 없고, 순수한 이성적 사고 속에서 그 자신의 실존과 세계의 실재성의 사실을 다시 흡수할 수 없다. 참된 반성은 인격 이전이고 반성 이전인 실존에 자신이 의존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우리가 신체와 세계의 대립적인 측면에서 그것들의 존재를 밝히고자 한다면, 이 일은 신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의 진정한 형태를 기술하지 못한다. 자연과 정신, 주체와 객체, 신체와 세계의 대립은, 존재자를 존재의 형태로서 그리고 존재를 존재자의 승화로서 생각하는 실증주의적 존재론에 예속한다. 이러한 존재론에서는 우리는 신체와 세계의 참된 의미와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나타낼 수 없다.

신체-주체에 있어서 최초의 것은 자기에 대한 현존으로서 코기토가 아니라, 신체화된 주체가 세계 속에서 자기를 투사하고 그래서 세계를 의식에 나타나게 하는 운동이다. 세계는 신체-주체와 상관관계로서 나타나고, 세계를 나타내는 신체-주체는 본질적으로 세계의 투사 혹은 초월(열기)로서 정의된다.

이러한 사실은 신체와 세계가 우리의 오성적 파악에 의한 관념으로서 규정되지 않고, 신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적 사태 그 자체에서 그것들의 본래적 모습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 신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적 사태는 의식-대상이라는 도식이 아니다. "우리가 주체 가운데에서 발견하는 존재론적인 신체와 세계는 관념으로서의 세계나 관념으로서의 신체가 아니며, 세계는 총괄적 붙잡음에 맺어진 세계 그 자체이고, 신체는 인식하는 신체로서 신체 그 자체이다." 이와 같이 신체와 세계의 본질적 상관관계에서 우리는 메를로-뽕띠가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확립하고자 하는 원천이 신체화된 주체와 세계의 단순한 연결이 아님을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원천은 인간 주체와 마찬가지로 의식에 주어지는 것들을 가져오는 존재(l'Étre)이다. 이 존재 자체에 대한 밝힘은 메를로-뽕띠의 존재론의 근본 과제로서 살에 의해서 드러나게 된다. 이제 우리는 신체-주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의 침투적 상관관계를 통해 존재론적 살의 본질적 특성을 밝히고자 한다.


Ⅱ. 신체와 세계의 교착배어법과 살


메를로-뽕띠는 신체-주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에서 교착배어법을 드러내어 살의 특성을 밝히고 있다. 그의 존재론에서 살은 교착적인 특성을 띠면서 가시성으로서의 살이 됨과 동시에, 관념성을 산출하는 주체로서 모든 것들의 핵(le noyau)이 되어, 핵의 바탕인 존재에로 항상 관계맺음을 한다. "그의 철학에서 교착배어법은 지각함과 지각됨의 교착을 특징화한다. 그는 보는 자가 그 자체 가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신체의 사고와 동시에 사고의 신체가 있고, 그래서 의식과 세계는 두 가지 외부적 항들로서 간주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의 가족유사성과, 지각함과 지각됨의 교착은 보는자와 가시적인 것, 촉감하는 자와 촉감되는 것, 간단히 말하자면 지각하는 자와 지각되는 것의 <가역성>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서 그것들의 더 좋은 삽화를 얻는다." 여기서 신체-주체는 세계의 대상임과 동시에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의 역할들이 연속적인 전도에 있는 곳인 선택적 운동에 따른 지각하는 주체이고, 자기를 보는 세계이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착배어법의 의미에서, 나의 신체와 세계 사이, 특히 서로 감각하고 감각되는 나의 두손 사이에는 가족유사성이 있다. 이 말은 그 양자들 사이에 공통적 토대가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은 신체화하는 자와 신체화될 수 있는 것이 그 자체들의 공통적 기원을 취하는 살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라는 터전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지구는 우리의 삶의 원천으로서 모든 신체들에 근원적인 장으로서 주어진다. 이것은 지구의 존재가 근원적으로 나의 신체의 존재에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사실은 메를로-뽕띠가 "지구의 존재와 나의 신체의 존재 사이에 가족유사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존재들의 가족유사성은 그 존재적 근원성에 있어서 살의 의미가 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그 가족유사성이 기원적이고 발생적인 지평에서 존재론적 살이 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신체의 존재가 지구의 존재이다는 의미에서 신체화되는 고유한 신체는 살로서 세계이다. 신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의 상관관계 속에서 살이 근원적인 뿌리박기를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내가 뿌리박혀진다는 것은 내가 신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뿌리박혀지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이 원초적인 뿌리박기는 신체의 존재의 의미를 기술한다. 그래서 신체와 세계의 존재론적 연속성은 그들의 차이에 의해서 뿌리박기를 가져오고, 더욱이 신체와 세계의 구별 자체가 의미를 취할 수 있는 여기로부터 출발하여, 신체화는 여기의 출현이고 절대적 사실이다. 물론 신체와 세계 사이에는, 분리가 존재한다. 예컨대 세계 속에서 사물들의 질서와 다른 여분의 질서를 갖고있는 신체, 즉 부분들 밖의 부분의 질서로서 있는 신체와 사물들 사이에는 분리가 있다. 그러나 신체와 사물들의 분리(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의 분리, 촉감자와 촉감할 수 있는 것의 분리, 감각자와 감각되는 것의 분리 등)는 근원적인 교착으로 말미암아 극복된다. 결국 신체가 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의 감각 현상은 감각된 세계의 출현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메를로-뽕띠의 관점에서 신체와 세계의 교착적 의미에서 신체는 세계의 존재론적 조직으로부터 이루어지고, 세계는 신체의 현상적 조직으로부터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감각하는 신체임과 동시에 감각 가능한 신체라는 두 차원으로 설정된다. 이러한 두 차원에서 살의 절대적 '여기(l'ici)'는 신체-주체가 가지는 권리의 기초이고, 이것은 감각 가능한 모든 것들이 방향지워질 수 있는 토대이다. 즉 살의 '여기'는 실제로 모든 것이 의미와 방향을 가지게 하는 권리로서 공간적-시간적 조건들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살은 세계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힘과 감각들이 설정되는 지역의 장이 된다. 메를로-뽕띠는 살의 '여기'와 감각 가능한 사물의 '저기', 가까운 사물과 먼 사물, 나의 감각 가능한 것과 타자의 감각 가능한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한다. 즉 '여기'와 '저기'는 근원적인 것과 변경된 것의 관계 속에 있고, 더욱이 그것들은 이 두 층이 상호 침투하는 이행 과정 속에 있다. '여기', '가까운 곳', '나라'는 이 세 항들의 체계는 살적 체험에 의해서 기초지워진다. 여기서 외부적인 것이 살에 의해 절대적으로 체험된 것이 되는 그 변경은 바로 살의 체험과 더불어 동시적으로 확립된다. 바르바라에 따르면, "살은 '거기'(là-bas)로 전환될 수 없는 어떤 '여기', 즉 물리적 공간에 앞서는 절대적 '여기'이다. 이 '여기'라는 용어는 우선 주어질 어떤 존재를 규정짓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의 본질 자체를 가리킨다. 살은 모든 가시적인 것을 이중화하는 비가시적인 것의 형태 아래에서 전도된 혹은 간접적 방식으로부터 자신의 뿌리의 증거를 이룬다." 세계로 지향된 살의 절대적 현존은 동시적으로 살이 자신을 확립하면서 획득하는 차이성의 세계로 열려진 현존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살의 원초적 체험은 공간적-시간적인 구분적 체계를 가지면서 살 자신을 확립하게 한다. 즉 살은 체험을 통해서 공간적-시간적인 부분들의 다양성을 확립함과 동시에 그 자신을 확립한다.

이와 같이 살은 체험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길의 흔적들을 새기게 되고, 이것은 가능적 세계에 대한 기호자로서 존재한다. 기호자로서의 살이 자신의 체험으로 형성하는 의미 그 자체는 살의 흔적으로서 기호에로 지향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살의 의미에서 메를로-뽕띠는 "고전적 철학에서 살과 그 의미를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말이 없다"고 지적한다. 그는 살(chair)의 개념을, 신체적 사물로 간주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나타남들이 산출되는 지각장에서 항상 현존하는 신체-주체의 감각적 활동을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살이란 촉감들의 총합도 아니고, 또한 촉감들과 근육운동 감각들의 총합도 아니며,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우리들에 있어서 지각적 믿음은 인간에 개관적이고 현존적인 것의 활기와 더불어, 근원적으로 자연적 인간에게 열려지는 모든 것을 원천-경험(une expérience-source) 속에 끌어넣는다." 이 원천-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계층들이 구성된다. 원천-경험이란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지금 여기 있는 것'과 우리들의 일차적 만남이고, 살의 고유한 특성이다. 원천-경험으로부터 파생하는 모든 개념들은 살에 의해 드러날 존재(l'Être)에 들러붙은 차이성들에 의해서 형성된다. 엄밀히 말하면 원천-경험으로부터 시작하는 살의 모든 활동 가운데 차이성에 의해서 존재(l'Être)의 열림이 가능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살의 특성인 원천 경험과 이것이 안고 있는 차이성에 의해 존재의 열림이 가능하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신체의 움직임에 기초하고 있다. 신체가 움직인다는 것은 의식이 기하학적 연장 속에서 펼쳐지는 운동을 촉진시킨다는 것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신체의 운동은 의식의 결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체의 운동은 신체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운동은 정신이나 표상에 의해서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의 운동은 신체가 움직인다는 한도 내에서 신체 자신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다. 즉 신체의 움직임이란 표상이 아니라, 신체가 세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진행이다. 신체의 운동은 사물들의 운동과 다르고, 사물들의 운동과 현상적 신체의 운동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이 신체의 움직임이란 자신에 들어감과 자신으로부터 나감의 동일성이다. 신체의 움직임, 즉 현상적 신체의 운동에 있어서 신체의 두께는 신체 자신에게 세계를 형성하고 사물들에 살을 형성함으로써, 신체 자신이 사물들의 중심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지는 그 자신의 유일한 방식이다. 달리 말하자면, "보는 자와 사물 사이에서 살의 두께는 사물에 대한 보는 자의 신체성과 같이, 사물에 대한 보는 자의 가시성을 구성하며, 이 두께는 보는 자와 사물의 의사 소통의 방식이다."

우리의 눈 운동이 거리(la distance)를 두고서 받아들이는 차원과 촉감 운동들이 가시적인 것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차원 속에서 사물들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살의 두께는 바라봄과 사물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드러나고 있음을 나타낸다. 신체의 살은 결코 본다는 것과 보여진다는 것 이상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두께에 의해서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은 상호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메를로-뽕띠가 말하는 가시성이다. 그의 가시성의 원리는 사물들의 실증적 바탕으로 있는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세계는 지각적 믿음을 통해서 있는 것의 영역과 사물들이 의심될 수 없는 실존의 영역 속에서 현존하게 되고, 사물들은 이 세계가 우리에게 현존적으로 지속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보고 있는 신체는 보고 있는 존재의 양식에 따라 보고 있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봄(la vision)이란 봄 자체에 대한 가시적인 것에로 돌아감이다. 즉 살의 봄은 가시적 신체의 깊이 패임 속에서 완성된다.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서 교착장식(l'entrelacs)은, 세계가 오로지 인간 주체가 세계에 부여하는 의미화들에 따라서 단지 기술되는 것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세계는 유아론적 관점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주체와 교착적으로 상호 침투되어 구성되는 것이다. 즉, 우리의 고유한 신체가 다양한 형태의 교착 상태에서 사물들과 세계에 의미화를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교착적인 양식에 의해 부여된 의미화들에 따라서 단지 세계가 기술되거나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교착적인 살과 세계는 항상 이미 상호 침투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교착적인 나의 신체는 사물들과 다른 신체들에 열려 있고, 나의 신체와 그러한 존재자들 상호 간에는 거대한 내적 열림(l'entrouverture)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교착배어법의 구조가 역동적 구조라는 것을 드러낸다. 살과 세계 사이에서 살이 여는 세계와 세계에 의해 열려지는 살은 상호적으로 총괄함-총괄됨(englobant-englobé)의 구조를 가진다. 총괄함은 총괄됨이 되고, 총괄됨은 총괄함이 된다. 교착배어법은 의식에 의해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존재자들의 세계와 살에 의해서 형성된 존재론적인 구조, 즉 존재의 세계로부터 분리된 요소에 의해서 형성된 존재론적인 요소적 체계이다. 이 교착배어법의 부분들은 실제로 살과 세계의 교착적 작용으로부터 생성되는 계기들이다. 또한 살의 교착배어법의 내적 역동성은 살 자신에 대한 내적 활동과 비교된다.

실제로 살의 교착배어법은 살의 본질적 요소들인 비가시적인 것과 살 자신에 대하여 펼쳐지고 그 자신을 휘감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 살이 지각하는 반사운동성-반사성(la réflectivité-réflexibilité)은 살의 구조의 역동적 운동이다.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이러한 교착배어법의 역동적 구조는 우리 신체의 부분적 감각 기관 속에서도 존재한다. 예컨대 나의 손가락들의 살이 그러한 구조를 가진다. 손가락 각각은 상호성에서, 한 쌍이된 능동성-수동성이라는 교착배어법에서 현상적 손과 객관적 손, 손가락의 안과 밖이 된다. 각 손가락은 다른 것들에 침식하고(서로 뒤섞이고) 각 손가락은 손가락의 국소적 자기이다. 여기서 손가락의 공간은 감각함-감각됨이다.

그래서 신체의 살은 세계 속에서 세계에로의 봄과 촉감함이 출현할 수 있는 존재의 살(la chair de l'Être)에 대한 감각 가능한 것의 반사성에 놓여 있는 중심 자체이다. 살은 "논리에 앞선 의미의 장"으로서 항상 생성 중에 있는 살(발생 과정의 살)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살은 가역성과 교착배어법의 열림을 표현하고 세계와 살의 서로 뒤섞임(l'Ineinander)을 표현한다. 이러한 사실에서 존재(l'Être)와 살이 상호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의 의미가 모든 존재들(les êtres)의 의미를 드러내고 살과 존재(l'Être)가 차이성 속에서 동일한 위치를 점유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살에 있어서 교착배어법적 시간을 말할 수 있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어떤 시점의 설립은, 우리가 시간을 교착배어법으로 이해하는 계기로부터 출발하여, 정신에서 형성한 가상적 지지없이 다른 시점들에 옮겨질 수 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는 서로 뒤섞여 있고, 과거와 현재 각각은 둘러싸여지면서 둘러싸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러싸여짐-둘러쌈 (enveloppé- enveloppant) 자체가 살이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메를로-뽕띠의 존재론은 교착배어법에 의해 살과 세계가 상호 침투하고 살이 자신에게 침투하는 특성을 드러내는 살의 존재론이 된다.


Ⅲ. 가역성과 살


나의 신체와 사물들의 상호 관계, 나의 신체에 있어서 신체 기관들의 상호 침투의 관계 등에 가역성의 문제가 놓여 있다. 신체와 세계의 가역성 문제에서 우리는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의 연결, 촉감하고 동시에 촉감되는 두 손들의 경험(연결) 등을 모으는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어떤 같은 존재에서 특별한 모든 것들, 즉 존재자들을 모으는 연결 고리를 생각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연결고리의 일반화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결고리, 즉 신체-주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에서 존재자들을 모으는 바로 이 연결고리는 메를로-뽕띠에 있어서 살의 의미를 나타낸다.

신체와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주체성으로서의 고유한 신체는 개별화되는 반면에, 살은 모든 것이 그 출현의 기원을 얻는 공통적 조직이다. 살이란 인간과 세계,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이 동등하게 생겨나는 공통적 원형이고, 이것은 대상과 주체의 형성적 환경이다. 공통적이고 익명적인 이러한 살은 인간을 다른 인간들의 총체에 연결하고, 또한 모든 존재자들 사이에서 밀접한 관계의 참된 연결고리를 확립하면서, 인간을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의 세계에 연결한다. 무엇보다도 살이란 감각적 신체, 주체로서의 신체, 감각적인 신체-주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살이란 세계 속에서 감각할 수 있는 주체임과 동시에 감각될 수 있는 신체이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속에서 주체와 대상이 불가피하게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살은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 지각함과 지각됨 사이에서 가역성의 요소이고 장소이다.

메를로-뽕띠는 우주적인 살(la chair universelle)로서 세계를 말하고, 어떤 살(un chair)에 적용된 살(chair)을 말한다. 이 점에 대해 띠에리(Yves Thierry)는 "세계가 우주적인 살이라는 것은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들의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시하기 위한 것이고, 어떤 살에 적용된 살이라는 것은 신체와 세계의 상호 침투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띠에리의 주장에서 전자는 약간의 문제의 소지를 남겨 두고 있다. 세계가 우주적인 살이라는 것은 감각 가능한 것으로 존재하는데, 이 세계는 고유한 신체의 살에 의해서 신체화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신체화하는 것과 신체화할 수 있는 것(보는 것과 가시적인 것, 촉감자와 촉감 가능한 것 등)이 상호적이 되고, 그것들이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신체-주체에 있어서 보는 자로서 '나'와 가시적인 대상자로서 '나'는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신체-주체 자신이 보여질 수 있으면서 보는 자인 '가시적인 보는 자(le voyant-visible)'는 '가시적인 자'와 '보는 자'로서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닌다. 그렇지만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들은 존재론적인 동일성을 지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실제적으로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닐 수 없고, 원리상 존재론적 동일성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촉감함과 촉감됨의 가역성이 그것들의 실제적 동일성이 아니라 원리상 그것들의 동일성이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주적인 살로서 세계는 살에 의해서 신체화하는 것과 신체화할 수 있는 것의 존재론적 기반이다.

그러나, 띠에리의 주장에서 후자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살과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속에 놓여져 있다. 이러한 영역 속에서 살과 세계는 끊임없이 서로 침투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세계와 상호 침투 작용을 하고 있는 살의 특징을 살과 그 대상의 관계 속에서 말할 수 있다. 살의 특징이란, 교착적인 신체가 어떠한 대상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함을 아는 존재자라는 점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살의 특성에서 살의 존재에 대해 또 다른 존재론적 의미를 밝힌다. "깊이들의 존재(être des profondeurs), 여러 층들에서 혹은 여러 국면들에서 잠재의 존재(être de latence), 그리고 어떤 부재의 현존화(présentation)로서 살적 존재 (l'être charnel)는 존재(l'Être)의 어떤 원형(un prototype)이다."

여기서 살의 존재가 깊이들의 존재라는 뜻은 무엇인가? 이 뜻은 살의 존재가 살을 통해 드러나는 사물들의 존재적이고 총체적인 편에서 산출된다는 것이다. 또한 '여러 층들에서 혹은 여러 국면들에서'와 '잠재의 존재'라는 뜻은 살의 존재가 감각함과 감각됨에서 둘로 나뉘어 활동한다는 것이고, 살의 존재가 대상의 지각 속에서 명백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부재의 현존화'라는 뜻은 사물들에 대한 주체의 붙잡음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조건들(봄에서 가시적인 것으로 돌아감,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것)에 따라 살의 존재가 세계에 대한 신체의 관계를 드러내 놓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살의 존재의 현상에 대해 메를로-뽕띠는 살의 가역성(la réversibilité)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내가 오른 손으로 왼손을 잡을 때, 나의 두 손은 원리상 가역적이다. 즉, 나의 왼손(촉감되는 손)이 대상으로서 도달되는 순간에 그 손은 살이 되고, 동시에 감각성을 명백하게 하기 때문에, 나의 오른손(촉감하는 손)은 거꾸로 대상(촉감되는 손)이 된다.

이러한 가역성은 물리적 사물에 주체성이 덧붙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의 구별이 나의 신체 속에서 뒤섞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해 바르바라(Renaud Barbaras)는 "'감각한다(sentir)'는 범위 안에서 감각이 신체화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살의 가역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나의 왼손은 대상으로서 촉감되고 살이 됨(신체화 됨)과 동시에 주체로서 촉감하고 신체화하며, 그리고 동시에 나의 오른손은 그 역으로 행하고 행하여진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고유한 신체는 나의 두 손의 동시적인 촉감함, 촉감됨을 총체적으로 신체화한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살이란 '우리가 감각하는 것'과 '감각하는 자'의 이중적 의미에서 감각적인 것이다." 또한 살은 감각 활동 가운데 '감각함'과 '감각한다는 의식'에 관한 이중적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손 자체에 의한 손의 의식을, 손(오른손 또는 왼손)이 다른 손(왼손 또는 오른손)을 모델화하는 신체의 의식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손이 촉감하는 것으로서 인식되는 앎은, 손이 신체화된 손으로서 도달되는 앎과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감각한다는 자기 의식과, 감각하는 것에 의한 신체의 의식은 우리에게 잘 분간되지 않는다. 고유한 신체의 경험은 이미 그 자신에 있어서 일반적 가역성의 경험이다. 살의 일반적 가역성은 자기 자신에 있어서 열음을 불러일으키고, 이 가역성은 모든 보는 자들이 붙잡히게 되는 일반적 감각 가능성인 상호신체성(l'intercorporéité)을 불러일으킨다.

살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객관적인 물리적 현상들의 총체의 의미에서 물질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심리적 상태들 혹은 정신적 작용들의 펼침의 의미에서 정신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살은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실체(la substance)도 아니다. 살을 지시하기 위해서, 우리가 물, 공기, 흙, 불을 말하기 위해 요소를 사용하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하자면 일반적인 사물의 의미에서, 우리는 '요소(élément)'라는 오래된 용어를 필요로 할 것이다." 메를로-뽕띠가 살을 지시하기 위해 '요소'라는 용어를 필요로 하는 의도를 말해 보자면, 물리적 요소는 특별한 대상도 아니고 총괄하는 보편적 대상도 아닌 의미에서 일반적인 사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살이 특별한 대상도 아니고, 총괄적인 보편적 대상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살의 요소적 의미에 관해 메를로-뽕띠는 세계 속에서 작은 부분이 발견되는 어떠한 곳이든지, 존재(l'être)의 양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떤 신체화된 원리에 의해서, 살에 대한 요소의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세계 속에서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신체-주체의 신체화가 존재의 양식을 가져온다고 말할 수 있다. 메를로-뽕띠에 의하면, "존재(l'être)는 어떤 사람의 관점에서 물러설 수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만 있고, 존재(l'être)의 밖에서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일 수 있는 그 사람에 대해서만 있다. 그래서 바로 정신은 지각의 주체가 되고 의미(le sens)라는 것은 생각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메를로-뽕띠가 존재에 대한 지성주의적 관점을 부정하는 측면이다. 단지 우리의 살에 의해서만 개별적 존재들이 나타난다. 모든 개별적 존재는 신체와 세계의 상관관계적 침투 작용에서 각각 살이 된다. 이 모든 개별적 살은 지평으로서의 살을 시사한다. 살에 대한 이러한 의미에서 살이 특별한 대상도 총괄적인 보편적 대상도 아님을 지적하는 띠에리(Y. Thierry)의 관점을 제시해 본다.

간단히 말하자면, 살과 요소의 관계에 대한 메를로-뽕띠의 입장은, 살이란 존재의 요소(un élément de l'Être)이라는 점이다. 자연대로의 존재(l'être brut)로서 살은 결코 인격체에 나타나지 않지만, 살은 그 자신의 다양한 신체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살은 공간적-시간적 개별자와 관념의 중도에서 일반적인 것, 즉 존재의 양식을 가져오는 신체화된 일종의 원리이다. 이런 뜻에서 살은 존재(l'Être)의 요소이다. 존재의 요소로서 존재의 양식을 가져오는 살은 여기에 지금 있고, 그 살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무수한 각 상황에서 공간-시간적 열림의 사실 자체이고, 세계적인 차원의 개별적 존재이며, 항상 어디서나 무엇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이다. 신체의 활동에 있어서 "신체적 현상화는 신체의 사실이고, 그 현상화는 존재(l'Être)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살이 언제 어디든지 모든 경험에 비결정적으로 숨어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살은 항상 익명의 가시성으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살이 신체화되는 최초의 속성들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체-주체로서의 살에 있어서, 의식은 반성 이전의 의식에 의해서 특징지워지는 것이다. 즉, 반성적 의식은 익명의 가시성으로서 주어지는 전반성적 의식(la conscience préréflexive)에 기초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살을 존재의 요소로서 규정하면서 신체의 살과 세계의 살을 구별한다. 신체의 살은 감각 가능한 것과 감각, 촉감 가능한 것과 촉감, 가시적인 것과 보는 자의 가역성에 의해서 특징화되는 존재이면서 세계의 살로 지향하는 존재이다. 세계의 살은 신체의 살과 같이 자기를 감각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가능한 것이며, 가능적인 것들의 가능성, 즉 세계 가능성(다양한 가능적 세계들)이다. "바로 세계의 살에 의해서 우리는 결국 고유한 신체를 이해할 수 있다. 세계의 살은 보여진 살이고, 즉 그것은 실질적으로 지각되는 어떤 존재이고, 바로 그 살에 의해서 우리는 지각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을 토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체험에 대한 지평인 삶의 세계로 열려지는 세계가 의미 가능성의 세계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신체의 살은 세계에 침투 작용하고, 동시에 세계는 그 살에 침투 작용된다. 그래서 세계의 살과 신체의 살 사이에는 일종의 교착적 동종성이 있을 수 있다. 세계는 신체의 살에, 살의 두께에 새겨지고, 신체는 세계의 살에 자신을 새긴다. 즉 세계의 살과 신체의 살 사이에는 침입(la transgression)과 침식(l'empiète- ment)에 의해 나누어 가짐과 총괄적 참여가 있다.

메를로-뽕띠는 세계의 살과 신체의 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특징을 일종의 감정이입(Einfühlung)이라고 한다. 이것은 요소로서의 살에 대해 일종의 감정이입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감정이입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의 내적 경험을 이해하기 위한 의식 작용이다. 이것은 '여기'의 양상을 지닌 내가 '저기'의 양상을 지닌 타인에 대하여 '저기'(또 다른 '여기')에서 '여기'로 이행하는 지향적 변경 작용에 의해서 타인의 경험을 현존화한다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이러한 감정이입의 측면을 원리적으로 살과 세계의 관계에 적용하고 있는데, 그가 살과 세계의 상호 침투 작용을 감정이입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로서의 신체의 살이 '저기'로서의 존재자들에로 지향하여 그것들을 변경시키지만, '여기'와 '저기'의 존재론적인 서로 뒤섞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살과 존재자들이 교착장식 속에 있으면서, 살이 그것들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들의 발생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이 살은 이중적 징표로서 지각함-지각됨이다.

또한 메를로-뽕띠는 모든 표상들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살의 의미를 드러낸다. 그에 따르면, "살이란 보는 신체에 대한 가시적인 것의 휘감기(l'enroulement)이고, 촉감하는 신체에 대한 촉감될 수 있는 것의 휘감기이다." "살은 우연성, 혼돈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 되돌아가고 그 자체에 적합한 조직(la texture)이다."

이러한 의미로서의 살에 대해, 우리는 그 살의 양식(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 촉감하는 자와 촉감될 수 있는 것 등)이 근본적으로 명확하게 분할될 수 없음을 지적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살의 양식이 분할될 수 없다는 것은 혼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자와 가시적인 것들 사이에서 간격 자체(l'écart même)는 모든 것이 붙잡혀지는 장소인 조직적 체계로 이루어진다. 간격은 나와 세계 사이에서 동등하게 새겨진다. "나라는 보는 자와 나에게 제공되는 가시적인 것 사이에는 가역성이 있는 데, 나는 그 양자 사이에 있고, 나는 그 양자의 가역성이다."

우리는 살의 차별적인 유형들에 따라 감각적인 것들이 달리 주어진다는 사실로부터 그 유형들을 구별해야 한다. 이 차별적인 유형들이란 신체와 대상들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유형들과, 고유한 신체에 있어서 그 자신의 신체 부분과 그 자신의 다른 신체 부분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유형들이다. 세계의 요소적 경험을 결정하는 현상들의 다양한 양상들에 비일치들 즉 어긋남들(les décalages)이 존속한다. 왜냐하면 이 점은 감각적인 것의 탐구가 수행되는 바로 우리 신체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그 다양한 양상들이 각각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살과 언어의 관계 및 살과 존재의 관계적 측면을 고찰하고자 한다.


Ⅳ. 언어와 존재 및 살


나와 세계는 서로 침투 작용 속에서 간격과 어긋남들의 구분을 통해 나의 존재나 세계의 존재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면서 각자의 고유성을 출현시키고 있다. 나의 살은 세계의 살과 침투 관계를 맺으면서 나의 살의 두께를 더해가고, 나의 살과 타자의 살은 상호신체성의 특징 아래에서 상호관계성을 보존하면서 서로 침투하며, 그리고 각각의 살은 자기고유화(l'appropriation)를 발생시킨다. 이제 우리는 살과 관념의 연결 문제와 지평의 특징을 정의하는 비결정성의 영역의 문제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가시적인 것, 촉감 가능한 것, 감각 가능한 것 등을 말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일반성을 제시해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일반성은 지각의 기초가 되어 살과 다른 어떠한 것도 내세워짐이 없이 관념성을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 점은 바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관념의 규정이다. 이 규정은 우리 경험의 가능적인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인가? 만약 관념의 규정이 사실의 비가시적인 것과 잠정적인 것들(사물의 숨겨진 측면들)에 상응하지 않는다면, 그 규정은 가시적인 것에 상응하지 못할 것이고, 또 어떠한 다른 방식에 의해서 가시적인 것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관념은 가시적인 것의 조직으로서 주어지고, 세계의 부분에 대한 구성적인 지향들의 연대성으로서 주어지며, 그 부분에 대한 연결들의 연대성으로서 주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순수 관념성을 현재 우리의 모든 경험의 바탕이 되는 세계 즉, 체험의 세계, 문화 세계 속에서 산출된 관념들의 성질로서 간주해야만 한다. 의미, 의미화, 기호, 말, 언어, 관념은 고유한 신체의 살에서 발생한다. 특히 순수 관념성은 살 없이는 그 자체가 형성되지 못하고, 삶의 지평의 구조들로부터 기초지워진다. 순수 관념성은 살로부터 발생되고 살에 의해서 활동된다. 즉 우리의 관념성은 살에 뿌리내려져 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고유한 신체의 살은 모든 것들에 대한 지평으로서 존재하고, 이 살의 원초적 활동은 본질적으로 표현이다. 왜냐하면 세계 속에서 살의 원초적 활동은 의미를 생성하기 때문이고, 또한 그 활동 자체는 의미이고, 의미는 살 자신에 대한 표현적 내용임과 동시에 의미화로 지향되기 때문이다. 띠에리에 따르면, "관념의 발생은 감각적인 것 속에서 그 발생의 뿌리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가령 순수 관념성의 의미가 어떠한 지각 속에서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형성은 세계의 사물들에 대한 관계와 더불어, 그리고 지평의 관념성과 더불어 이미 흔적이 이루어진 길들을 통과한다."

예를 들면, 어떤 미술 작품에서 지평(l'horizon)의 관념은 어떠한 것인가? 미술 작품에서 드러나는 형태들이나 구조들은 색의 농도를 통해서 드러난다. 색의 농도가 형태들과 구조들을 있게 하는 지평이다. 우리는 색의 농도라는 지평 속에서 그 작품의 여러 양상들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지평의 관념은 순수한 지적 관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 속에서 형성되는 관념인 것이다. 우리는 순수 관념성이 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실제로 살의 어떠한 양상에 따라 산출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순수 관념성은 살 없이는 순수 관념성 자체가 되지 않으며, 이것은 지평의 구조들에서 벗어나게 되지도 않는다. 즉 다른 살과 다른 지평들이 문제일지라도, 그 관념성은 지평의 구조들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의 살을 떠나서는 관념이나 언어가 존재할 수 없다. 언어 활동에 있어서 말은 어떤 음악의 가락과 마찬가지로 낱말들의 단순한 배열에 의해서 지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낱말들의 그물 속에 단순히 의미를 끌어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살과 그 지평인 지각 세계의 관계 속에서 말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해야 하고, 우리는 살의 언어가 언어의 지평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언어 활동의 주체인 살이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결합을 실재화한다고 말해야 한다.

언어 활동에서 언어의 살(언어화하고 언어화되는 살)은 언어를 현상들(단언된 청각적 현상, 진술된 시각적 현상 등)로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표현된 의미화가 구성된 것으로 더 이상 충당될 수 없는 지각된 것 속에서 등가물 없이 관념으로서 단지 주어지는 만큼, 언어의 살은 언어를, 표현에 새로운 운동성을 주는 신체로 만드는 것이다. 언어의 살과 관념의 신체적 실존은, 언어적 기호들의 감각적 측면을 사고의 단순한 지지를 이루는 것에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사이의 매개적 영역을 고정시키는 것에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감각적인 것과 지성적인 것, 신체와 관념, 지각과 의미, 기호와 의미화, 기표와 기의라는 두 가지 양식들이 그 자신들의 구성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의 살에 있어서 각각의 말은 어느 곳에로(누군가에게로) 보내어진 말이고, 그 말은 새로운 말의 대상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우리의 모든 지각적인 것이 비결정적인 것임과 마찬가지로 비결정적인 것이다.

언어의 살에 대한 이러한 관점에서, 메를로-뽕띠는 "말하는 사람이 그 자신을 제시하고 세계적 말에 모든 말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그의 이러한 진술은 지각 세계의 지평 속에서 우리의 모든 지각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방식을 가리킨다. 결국, 무언적 세계로부터 말하는 세계로 나아가는 이행(le passage) 속에서, 각각의 말이 비결정성으로서 그리고 언어의 살의 특징으로서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비결정성으로서의 언어의 살이 우리의 존재를 표출하고, 언어의 살적 존재가 바로 우리 존재의 참된 존재 양식을 함축하고 그 양식을 제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우리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언어를 가지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니다는 것.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존재이다는 것 그리고 존재를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가 아니다는 것."

우리의 주체들을 감싸고 그 주체들에로 스며드는 말의 관념과 존재의 관념은 무엇에서 일어나는가? 그러한 관념들은 비본질적일 수 있는 상황들로부터 분리된 본질의 전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들의 기술 자체에서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 상황들 속에서 우리 주체들의 삶은 관념들이 되고 관념들은 삶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언어가 우리를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말하고 말해지는 우리가 표현들과 의미화들의 세계를 일으킨다는 것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말하는 주체인 우리가 지각적 세계에 의해서 불려진 표현들과 의미화들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존재가 우리에게 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바로, 기호들의 모든 산출과 논리적인 관념화들에 앞서 감각적인 것이 내적인 것으로 만들어지는 한에 있어서, 감각적인 것이 이미 그 자체 의미이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러한 점은 감각적인 것, 지각적인 것, 언어적인 것 등이 존재의 여러 층들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치 존재의 본질이 펼침(le dévoilement)의 양상들의 다양성에 앞서는 것과 같이, 존재가 현상들 속에서 혹은 작용성 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서만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존재(l'Être)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나는 존재한다'를 말하는 것은 '나는 존재하는 것', 즉 '나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존재 혹은 실존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다. 존재(l'être)는 특별한 모든 결정들을 넘어서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분유하는 일반성을 가리킨다. 내가 한국인이기 이전에 인간인 것과 같이, 나는 인간이기 이전에 있음에 참여한다. 존재(l'Être)는 물질의 분리와 분산의 경향을 피하고 밀도를 부여하고 조성하는 것이며, 모든 것들을 같은 통일성으로 모으는 것이다. 존재는 연결하는 것이다. 메를로-뽕띠는 존재의 이러한 특성을 살이라는 말로 드러낸다. 존재(l'Être)는침식(l'empiètement)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의 감각 기관들의 전달들이 수직적인 유일한 실존과 유일한 세계에 다시 모이는 것을 행하면서 거리를 둔 접합과 같은 것이다.

띠에리에 따르면, "존재(l'Être)는 현상들을 응집하여 기초지우는 작용 자체, 즉 이질적인 사실들의 변형과 침식에 의해서 세계에서 현상들의 흩어짐을 구성하는 완결된 분절의 활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가 우리의 세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존재는 절대적인 실체가 아니라, 우리가 있는 지금-여기에서 지평(l'horizon)으로서 우리를 기초지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 그 어느 곳에나 존재의 의미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떤 사물들이 여기 혹은 저기에 있고, 어떠한 사태들이 생겨났거나 혹은 생겨나며, 우리 혹은 누군가가 언제, 어디에서, 어떠한 삶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이 모든 것들은 존재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그 모든 것들은 존재의 작용 자체 속에 존재한다.

우리의 세계 속에서 모든 존재자들은 선술어적인(antéprédicatif) '∼임'과 전객관적인(pré-objectif) '있음'으로서의 존재(l'Être)라는 지평에 뿌리를 두고서 작용하고 있다. 그 존재자들이 작용하고 있음이 바로 존재의 특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있다'(Il y a)는 것은 거기서 말해져 끝날 어떤 것의 전시가 아니라, 제시되지 않은 어떤 존재(un Être)의 펼침이다. 왜냐하면 '있다'는 것은 존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침묵적으로 우리의 모든 긍정과 부정 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체-주체와 세계의 침투적 작용 속에서 "참으로 존재의 들숨과 날숨, 존재 속에 숨쉬기가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는 존재가 바로 우리의 살을 통해서 어떤 것이 감각되고 지각됨으로써 우리의 살에 붙잡혀지고, 의미된다고 말할 수 있고, 그 존재가 우리의 신체-주체를 통해서 어떤 것이 말해지고 들려지고 우리의 것으로 됨으로써, 이해되고 의미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메를로-뽕띠의 존재론이 살의 존재론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또한 메를로-뽕띠는 존재를 야생적 존재(l'Être sauvage)이다.고 말한다. 그러한 존재는 그 자체와 일치하는 절대적 기체(le substrat)가 아니라, 소여들의 각 측면에서 투시법들의 다양성이 구성될 수 있는 양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여들에 있어서 무수한 다양성의 투시법들이 존재하는 지각 세계가 바로 야생적 존재이다. 우리는, 모든 존재자들이 그 자신들 나름대로 있으면서 나타나도록, 그 존재자들에 침묵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야생적 존재를 장들의 장(le champ des champs)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장들의 장으로서 있는 야생적 존재는 어떠한 양식으로서 고정되거나 결정될 수 없는 "무정형의 지각 세계(le monde perceptif amorphe)"이다.

무정형의 지각 세계 속에서, 살은 단순히 정신과 구분하는 신체가 아니다. 이 살은 세계와 관계를 맺어 감각적인 요소적 측면들을 형성하는 신체이고, 동시에 세계와 관계를 맺어 언어, 사고와 함께 나아가는 신체이다. 그리고 살의 개념은 신체와 세계가 접촉하여 형성한 관계들(촉감함과 촉감된 것, 말함과 말해진 것, 사고함과 사고된 것 등)이 명백히 경계지워져 확정될 수 있다는 측면을 금지한다.

이러한 사실은, 표상주의적 입장이 '봄과 보여진 사물', '표현과 구어적 의미화들', '지각된 세계와 개념들의 질서의 세계' 등에 대한 두 양식들을 이분한다는 사실에 반대된다. 결국 살의 개념은 발생의 현상들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메를로-뽕띠의 입장에서 보면, 발생의 현상들에 대한 근원적인 것은, 마치 무수한 다양한 투시법들이 서로 침식하는 것과 같이, 그 다양한 투시법들에서 출발되고 뚜렷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신체-주체의 체험 세계 속에 함축되어 있는 '신체-주체와 세계의 공동적 침투 작용에 의한 존재론적 살'은 신체-주체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본질이고, 또한 그 뜻은 신체의 세계와 언어의 세계 속에서 신체의 존재와 언어의 존재에 대한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는 말


지금까지 우리가 메를로-뽕띠 현상학이 존재론적 살의 본질에 대해 고찰한 바에 의하면, 그는 신체의 체험 세계속에서 현상 그 자체가 안고 있는 본질적 구조를 해명하는 가운데, 사태 그 자체의 원초성을 탐구하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근원적으로 살이라는 존재를 밝히고 있다. "메를로-뽕띠는 고유한 신체에대한 엄밀한 현상학의 조건이 살의 존재론이고 존재를 참되게 할 수 있는 의미이라는 것을 지시한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이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존재자들은 각가 그 자체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은 항상 세계라는 그물 구조 속에 존립하고 있음을 생각한다. 그러한 존재자들이 자연에서 그 자체로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그것들로 지향하고 있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느 곳으로 지향하고 있다는 것은 관계의 그물 속에 있음과 지향 작용을 통한 의미가 발생하고 있음을 지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신체-주체가 세계와 끊임없이 관계하면서 자기를 신체화한다(의미화한다)는 것과 동시에 신체-주체에 침투하고(의미화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신체-주체의 신체화함과 세계의 신체화됨의 상호작용 속에서 존재론적 살은 나의 신체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가족유사성, 나의 신체-주체 자체에 있어서의 가역성 등의 양식을 띠고서 지평으로서의 존재가 되고 있고, '할 수 있음'으로서의 신체-주체의 본질적 토대임을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살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존재 자체와 그리고 우리 삶의 터전인 환경세계에 대한 참된 이해의 길을 시사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이상의 상황에서 신체와 세계에 대한 어떤 탐구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앞으로 우리는 살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한 시각에서 고유한 신체와 환경세계에 대한 생명철학적 탐구가 깊이 이루어져야 할 것임을 내다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