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지식기반사회론의 허실(임홍빈)

나뭇잎숨결 2017. 2. 27. 20:09

임 홍 빈(고려대)

1. 지식개념에 관한 매우 간략한 고찰과 정체성의 문제



지식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의 방식과 실천적 맥락에서의 평가방식이 항상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알려졌다. 즉 실용적인 지식으로서의 기술 및 실천적 지혜(phronesis)와 이론적 지식 내지 형이상학적 인식의 구별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지식에 대한 태도나 가치평가의 방식은 역사적, 문화적 조건에 따라 상이하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식을 그 자체로서 추구하고, 지식의 추구하는 주체의 인격적 조건들로부터 분리해서 지식의 의미를 인정하려는 태도는 지식에 대한 역사적 계몽의 첫 번째 단계로 간주될 수 있다. 서구의 경우 그리스의 철학적 문화에서 태동한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의 구별은 학문의 자율성과 제도적인 독립성을 견지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했다. 반면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인 삶의 지혜를 하나의 통합적인 연관 속에 설정하거나 전자를 궁극적으로 후자에 의해서 포섭, 수렴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지식에 대한 또 하나의 대안적인 이해의 방식으로 관철되어왔다. 따라서 지식에 대한 태도의 근본적인 정향성과 관련해서 실천적 관심이 지배적인 통합모형과 분석적인 모형이 구별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구별은 특정한 사회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문화적 특성을 판별하는 하나의 유용한 기준으로 채택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식기반사회론이 지식의 다양한 유형들 중에서 실용적이며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지식을 선호한다는 것은, 지식의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지식유형들간의 위계질서를 해체,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이 무용하다는 암묵적 전제 자체가 이미 지식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지식의 성격은 맥락의존적임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지식의 성격과 위상은 인식주체의 주관적인 인식능력이나, 학습능력, 개인적 효용을 떠나서 광범위한 의미의 사회적 맥락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지식의 맥락 의존적 성격을 부각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주의적 관점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은 체계 이론적 분석을 통해서 드러나다. 실제로 체계이론에 따르면 지식은 행위자의 능력이나 세계이해의 방식으로 파악되기보다는 근대적인 사회 구성의 기본적 단위인 다양한 하부체계들의 작동방식을 가리키는 코드 및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즉 학문과 종교, 기업, 정치에서 지식은 제각기 다른 원리들에 의해서 관리되고 생산된다. 지식은 학문과 같은 특정한 하부체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식은 그 지식이 재생산되고 관리되는 하부체계 자체의 고유한 작동을 가능케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험적 지위를 부여받으며, 지식의 정당성이나 유용성에 대한 메타적 담론의 방식 역시 제도화된 하부체계의 방식에 준해서 학습되고 이해될 수 있다. 지식의 체계 이론적 서술을 통해서 근대화의 역동성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시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체계 의존적이며 맥락 의존적인 지식론은 일반화된 지식사회론의 한계에서 출발한다. 즉 지식의 개념을 주체성의 이론이나 인간학적 관점에서만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식을 생산하고 정당화하며, 혹은 앞서 언급한대로 자신의 내면적인 정체성의 한 구성적 계기로 삼는 주체의 존재와 달리 체계이론에서의 지식은 사회체계의 기능적 특성을 주목한다. 예를 들면 종교라는 사회의 하부체계에서 지식에 대해 보이는 태도는 비교적 일관성이 있다. 종교에서 지식이 지니는 위상은 근본적으로 역설적이다. 다시 말해 종교에서 지식은 인간적 지식의 한계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거나, 초월적 체험의 세계를 위해 스스로를 부정해야하는 사태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식은 최소한 종교에서 그 자체로서 성립하는 완결된 세계해석의 방식으로 수용될 수 없다.

반면에 과학에서 지식은 그 자체가 의미를 지니는 인식활동의 결과이며, 종교와 달리 그 정당성의 논변과 절차가 투명해야한다. 과학적 지식은 효율성이나 기술적 생산성이 지식생산의 목적으로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구되는 일반화의 정도가 높은 수준의 이론적 인식활동인 것이다. 물론 과학적 지식의 생산양식에 이미 항상 기술적 지식이 실험장치나 언어의 특성으로 개입하지만 일단 과학적 행위의 지향성이 효율성의 관점, 즉 부가가치를 직접적으로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식생산의 핵심 조건이 개인의 의식이나 태도보다는 제도적 관점에서 보다 자세히 논의 되어야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기능적으로 분화된 사회 체계들은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법과 자율성에 의거해서 작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지식생산의 조건과 정당화의 방식은 획일적으로 논의될 수 없다.

현대적 지식의 성격과 관련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지식의 이중성이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은 세계에 대한 해석에 어떠한 변화를 초래했는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은 기존의 지식과 상식, 일반화된 견해 등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과 반성을 통해서 혁신의 과정을 반복해왔다. 이점에서 지식의 역사가 바로 인간의 본질적 특성중의 하나인 반성적 사유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같은 비판적 정신은 학문의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에서 가장 중시되는 덕목이다. 반성적 사유에서 비롯한 지식의 성격은 그러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질서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즉 계몽적 비판 정신에 기초한 지식의 자율성은 바로 지식 자체가 항상 새로운 도전과 혁신에 의해서 유지되며, 지식의 발전은 반성적 문화가 사회적으로 제도화됨으로써 가능하다. 이점에서 지식의 의미는 검증가능성이 아니라 반증가능성에 의해서 드러난다고 보았던 포퍼(Popper)의 견해는 변화와 개방성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의 본질에 상응하는 철학임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과학을 필두로 한 현대의 지식은 끊임없이 자신의 객관성을 의심하고 부정함으로써만 지식으로 성립할 수 있다는 정황은 바로 현대적 삶의 불안정성을 반영한다. 현대 사회에서 지식은 단순히 존재하는 사태나 현상에 대한 이론적인 명제의 성격을 넘어서 그 자체로서 권력의 가능성이자 지배의 조건이다. 또 현대 사회에서 지식은 자연을 재구성하거나 해체하고, 사회적 삶의 방식을 효율성의 원칙 하에 설정하는 제도화된 합리성의 조건이기도하다. 특히 과학적 지식은 ― 그 본래의 자유로운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 ― 기술적 효용의 원칙 및 산업적 생산의 체계와 연계됨으로써 대량소비사회를 현실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모든 변화를 간과한 채 현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지식중심사회의 이 같은 역동성이 바로 세계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만든 요인으로도 작용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지식은 사회적 자원과 자연의 위기를 초래하는 생산요소이자, 보다 근본적으로는 삶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조건들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무엇보다 현대 과학들은 삶과 생명, 자연에 대한 보다 많은 앎을 제공해 주었으나, 그 같은 성과는 항상 예측이 불가능한 위험들이나 위기들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지식은 존재의 불확실성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탁월한 가능성이다. 물론 현대 과학이 특히 기술적 사용가능성으로 인해서 삶 자체의 불안정성을 증폭시키는 복합적 위험요인의 하나로 간주된다. 20세기의 과학이나 과학화된 기술은 전통적인 존재론을 일관되게 해체해왔으며 존재의 상황은 그 어느 시기보다도 지식에 의해서 불안정해졌다. 과학은 실재하는 세계 그 자체의 본질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동기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그 결과로서 실재의 개념 자체가 모호해진 것이다.

또한 지식중심의 사회는 탈규범적이며 윤리가 불가능한 사회를 지향한다는 경향성이 있다. 지식의 일탈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방법에 관한 또 다른 지식이 아니라 도덕이며 사회적 규범이다. 그렇지만 도덕적 규범이나 윤리의 구속력은 변화하는 것과 변화하지 않는 것의 구별이 어느 정도 보장되는 고대사회나 공동체사회에서만 온전하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식에는 국경이 없다. 정보기술과 통신기술의 결합으로 가능해진 매체사회의 탄생은 정보와 지식이 공간적 한계를 넘어서 세계를 요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사회를 가상이 아닌 실재하는 현실로 경험하게 해주는 요인 중의 하나는 서구의 문화적 지배를 강화시켜주는 매체의 편재성이다. 매체사회의 체험들은 현대인들의 심리적 내면세계를 점령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매체를 통한 자본주의 문화의 확산이, 개별적 역사의 경험에 뿌리를 둔 공동체의 전통이나 아니면 성숙한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에 뿌리를 둔 규범의 토대를 오히려 와해시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무엇보다 매체사회의 근본적인 특징중의 하나는 생활 공동체의 자연적이며 물리적인 공간과 시간을 분리시킴으로써 삶의 구체성으로부터 추상된 ‘체험의 비현실적 공간’을 창출한다.

현대의 지식은 스스로가 빚어내는 결과를 근본적으로 예측하거나, 감당할 수 없다는 점에 서 ‘무책임’하다고도 볼 수 있다. 지식사회의 주요 행위자들이나 정책 결정자들 못지 않게 현대의 지식 자체는 종종 그 결과를 감당할 수 없으며 무책임하다. 세계사회와 국가는 현재 유전공학이나 핵기술처럼 그 부작용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지식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혹은 미래의 세대들에게 미칠 부작용이나 불이익에 대한 합리적 예측은 원래 불가능하며, 따라서 일반 대중들은 그 위험에 거의 무방비상태로 방치되는 경우도 많다. 윤리적,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지식으로부터 파생되는 위험은 전문가 집단에 대한 의존의 정도를 심화시키지만 전문가들 자신이 핵심적 사안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러나 인류는 지식의 근원적인 이중성이나 위험성을 고려한 나머지 지식의 추구나 사용자체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국경을 초월한 지식의 생산방식이나 세계사회의 자본주의의 경쟁체제는 지식의 윤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그 본래적 이유는 지식이 가공성(加工性)의 원칙에 종속되어있기 때문이다.

지식의 생산이 자본집약적 산업이 되어버린 오늘날 지식은 가공성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이든 만들 수 있는 것은 모두 만들어 질 수 있다는 가공성의 이데올로기는 전형적으로 기술중심주의와 지식의 결탁을 가능케했다. 자연적 소재를 가공한 공산품에서 자연적 진화의 산물인 생명의 합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기술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가공성의 원칙은 세계사회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혁신의 구호와 맥락을 같이 한다. 존재의 연속성과 안정성이 아닌 변화와 혁신에 대한 열정이 지배하는 사회는 당연히 유목민적인 삶의 방식을 채택하도록 요구한다. 특히 과학기술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이 축약됨으로써 미래와 과거의 균형이 상실된다. 그 결과 전통에 뿌리내린 생활세계는 더욱 더 현대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거나 해체되어간다. 과학기술은 전통적 사회의 특수한 맥락으로부터 추상된 형식적 보편성의 세계에 근거함으로써, 일반적으로 민족과 인종의 특수성을 초월해서 수용될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렇다고 특정한 사회집단만이 공유하면서 상대적으로 타집단과 구별될 수 있는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기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근대화된 지식의 세례를 받은 거의 모든 민족들은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와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문화적 정체성의 형성에서 기술이나 과학이 수단적 매체 이상의 의미를 지니거나, 전통적인 상징체계가 공존할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지식의 속성은 사회 전체에 변화와 혁신의 이념을 전파한 서구적 근대화과정에서 명료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식은 결과적으로 삶의 안정성을 가능케 해주는 사회 문화적 제도들의 정당성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기능적 사회체계들의 분화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체계들 자체가 직면한 정체성의 위기들로 인해서 더욱 가속화되었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다가오는 위험과 도전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체계 자체의 혁신을 강요받음으로써 현대의 과학과, 기술, 경제, 학문 등은 혁신의 논리를 체계 자체의 ‘자연스러운’ 문법으로 내면화했다. 또 그 체계에 속한 행위자들의 의식에도 변화나 혁신은 일종의 규범적 덕목으로 각인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대 사회의 모든 기능적 체계들이 보여주는 유연성이나 역동성은 지식의 내부로부터 촉발된 정당화의 담론에 대한 연쇄반응으로 간주된다. 결국 정치, 경제, 종교, 전통 등은 모두 지식의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찾아 볼 수 있는 자기정당화의 부담을 함께 짊어지게 되었다.

자기정당화의 부담은 자본주의적 경쟁체제하에 놓인 지식사회의 모든 주체들이 경험하고 있는 사태다. 근대인은 성숙하고 판단력을 지닌 온전한 개인들이 아니라 지속적인 학습을 요구받는 부족한 존재들이다. 지식사회는 습득해야할 지식이나 정보의 총량을 과도하게 부가할 뿐만 아니라, 지식 자체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회의 총체적 지적 역량이 제고된다고 해서 세계에서 벌어지는 복합적 사태들에 대한 개인들의 판단력이 자동적으로 비례해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기존의 정보와 지식 등의 수명이 단축되는 속도와 새로운 지식이 창출, 유통되는 속도가 서로 비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숙함의 주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행위의 동기에 대한 자기이해와 함께 가능한 결과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지만 지식체계의 본질에서 파생되는 현대 세계와 미래의 불투명성, 예측불가능성 등은 성숙한 자아의 존재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식과 정보의 관계에 대한 검토가 요청된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단순하고 투명한 정보와 달리 지속적인 해석과 재구성의 기회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서 지식을 학습해서 인격적 정체성의 한 중요한 구성요인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은 상당한 시간이 요구될 수 있으며, 나아가서 기존의 지식의 해석하고 비판하거나, 독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지적 훈련과정이 선행되어야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세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차원이 지식을 역동적으로 만들지만 정보사회에서 기술은 지식의 가공과 처리과정에 심층적으로 그리고 다양한 차원에서 개입한다. 가령 시장이나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는 정보화의 담론은 현실적으로나 가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경쟁자들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동기에서 출발하는 경우, 주로 통제와 조절, 조직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정보기술의 집중적 투입이 정당화된다. 따라서 최소한 정보화사회의 담론은 ― 특히 기업과 국가에 의해서 주도되는 경우 ― 행위자중심의 성숙한 자기정체성의 가능성과 관련해서 전개된다기보다 개인들의 지식을 사회적, 경제적 자산으로 객관화시켜 조직전체의 효율성을 제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다. 살아있는 지식주체의 앎은 정보기술의 매개과정에 의해서 객관화, 표준화됨으로써 주체성과 해석의 다양성을 소거한 ‘정보들’로 재구성된다. 그러나 정보의 중앙 집중적 관리가 항상 전통적인 지식이나 판단력의 역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의 대량축적이 조직의 생산성이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 추구될수록 정보의 성격과 의미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의 고도화가 요구되기 때문에 정보와 지식의 차원이 실제 삶의 현장에서 엄격하게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정보화담론이 행위자중심의 관점이 아니라 조직과 체계의 개인에 대한 통제와 관리를 용이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일반적 경향성이 세계이해의 대안적인 방식들보다 선호하도록 만든다고 여겨진다.

또 종종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이 지나치게 확대해석 했지만, 해석과 의미, 사용의 차이들에 의해서 기존의 지식체계가 진화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지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해석된다면 그것은 이미 정보와 구별되지 않거나 투명한 정보로 변형된 지식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보화사회는 해석학적 차원이 소거, 지양한 빈약한 평면적 세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보는 지식과 달리 그것을 소유하는 주체들의 자기정체성에 상당한 기간동안 내면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등의 구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차이를 이처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정보의 효력이나 수명이 과거의 그 어느 시대보다 단축됨으로써 ― 당대의 문명발달단계를 전제한 ― 포괄적이며 궁극적인 세계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기회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점에서 지식기반사회/정보화사회는 성숙함이나 판단력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발시키는 하나의 간과할 수 없는 요인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같은 경향은 분석적이며, 개별자에 대한 경험의 일반화를 추구해온 탈형이상학적 세계관의 필연적 결과로 해석된다. 세계화가 일면적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인문적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이유는 여기서 발견된다.





2. 지식기반사회와 자본주의적 근대화



주로 북반구의 선진국가를 중심으로 진행중인 세계화의 과정은 지식기반사회라는 정치적 지표를 축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지식/권력, 혹은 지식과 정치의 문제는 비단 선구적인 푸코의 연구가 아니더라도 여러 관점에서 논의되어 왔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세계의 다양한 질서들 속에 내재화된 복잡성을 독해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세계화된 경제체제에서 지식은 주로 그 자체가 상품이거나 생산요소, 혹은 효율성의 제고를 위한 인적, 물적 관계들은 조정과 조율하는 원리로 간주된다. 지식의 편재성은 개인이나 사회가 본질적으로 학습하는 존재이며, 이는 일종의 진화론적 명제로까지 격상됨으로써 실현된다. 혁신 지향적인 문화와 안정성을 추구하는 문화의 갈등은 지식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지식이 단지 새로운 기술적 혁신에 힘입어 생산, 유통될 뿐만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해석의 근본적 변화를 추동하는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신경제’나 ‘정보화사회’는 포괄적인 의제로 부각된다. 지식의 편재성은 지구적인 수준에 상응한다기보다 기술적, 사회적 여건이 주어진 선진 산업국가들에 국한되는 양성을 보인다. 물적 자원이나 주로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과 달리 지식은 거래비용의 절감은 물론 Cyber세계의 Networking을 통해서 영향력을 확대한다. 지식의 거래비용이 기술적으로 최소화될 수 있다는 것은 심지어 완전시장을 향한 중요한 혁신으로까지 해석된다. 이러한 경제의 상징화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지식기반사회론’을 단순한 정치적 의제나 정책적 지표 이상의 사태로 이해하고 싶어할 것이다. 이제 나는 종래의 기능적 관점과는 구별되는 ‘지식기반사회론’의 가능성을 검토할 것이다. ‘지식사회론’이 문명사적이며,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검토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보사회론, 자본주의적 근대화론 등과 함께 체계적인 관점에서 논의되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담론들은 세계를 해석하고,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주축적인 경향성들을 그 대상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이들간의 체계적인 관계가 항상 투명하게 이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지식기반사회론은 경제적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도출된 것으로 간주된다. ‘지식기반사회론’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연계성이 약화됨과 아울러 경제의 통합이 진행중인 자본주의의 새로운 발달단계에서 구체화되었다. 금융자본주의의 특징적 경제행위인 파생상품과 환거래, 신용평가 등은 경제의 상징화라는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연적 소재나 노동력, 구체적 소비자를 축으로 전개되는 실물경제와 달리 상징적 경제는 불가피하게 사변적(spekulativ)일 수밖에 없다. 상징적 경제에서는 구체적 사태로서의 경제지표에 대한 해석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일차적 경제지표에 대한 행위자들 ― 주로 게임에 참여한 ― 경쟁자들의 (가능한) 태도들이다. 지식과 상징의 의미를 새롭게 창출함으로써 새로운 가치가 창출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 경제의 상징화는 일견 경제의 탈물질화라는 현상으로도 해석된다. 실제로 경제는 토지와 살아있는 인간의 구체적 노동과 같은 경험적 조건을 넘어서 새로운 형태의 부를 창출하고 재분배하는 단계로 이행함으로써 국가간, 개인간의 불평등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국민국가의 주권이 초국가적 집단과 국제적 조직들에 의해서 위협받거나 최소한 위축당하고 있는 시점에서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세계화와 정보화, 지식기반사회로의 이행이 동시에 진행되는 일련의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결과들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계화 자체가 국민국가의 주권을 상대화하거나, 개별국가 수준에서 공동체적 연대나 분배정의와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현을 지향하는 데 복합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반면에 기존의 ‘지식기반사회론’을 둘러 싼 우리의 논의는 주로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해야한다는 전략의 일환으로만 전개되어왔다. 우리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지표가 원칙적으로 타당하다는 인식을 공유하면서도 그 같은 담론 자체의 규범적인 함축이나 메타적 의미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은 거의 수행되지 않음으로써 ‘지식기반사회’의 본질과 역사성, 그리고 무엇보다 대안적인 지식사회의 가능성들이 폭넓게 검토될 수 없었다고 간주한다.

‘지식기반사회론’이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발달단계에서 어떠한 역사적 위상을 부여받는지 분석하기 위해서는 정보기술이나 매체기술, 근대적 질서 등의 성격에 대한 포괄적 인식과 함께 이에 대한 시민사회 내부에서 행위자들이 보일 수 있는 태도가 함께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분석은 '지식기반사회론‘이 시민들을 단순한 정책 수요자나 수동적인 학습대상자로서가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로 간주해야한다고 전제한다. 특히 정보기술과 매체기술이 단순한 도구적 차원을 넘어서 현대인들의 삶과 행복, 건강, 사회적 관계에 대한 자기해석에 심층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개인적 정체성의 변화와 사회구조적 변동의 관계는 지식기반사회론을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어야한다. 이러한 전제하에서만 지식기반사회론은 기능주의적 차원의 경쟁력 논리를 시민들을 비롯한 사회의 주요 행위자들에게 설득하는 차원을 넘어서 규범적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대안적 ‘지식사회론’으로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론이 자본주의적 이윤축적의 새로운 단계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규정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단계에 대해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과학기술이나 경영기법으로 이해되는 지식을 이윤창출의 핵심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생산성의 고도화를 달성할 수 있었다. 즉 공정과정에 기존의 지식과 기술을 투입하는 단계를 넘어서 지식자체를 생산하고, 기업 전체를 학습하는 사회체계로 조정함으로써 이윤 창출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연자원과 에너지의 효율적 투입이 감소하거나, 이에 대한 의존도가 최소화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즉 물질과 자연 자원의 가공 못지 않게 상징적 의미와 같은 정신적 자산의 가공과 소비의 위상이 보다 중시된다. 이미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생산성을 보이게 되었는데, 이제 그 생산성의 영역이 자연적 사물과 소재가공을 넘어서 정보와 지식의 생산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의 산업적 생산과 생산공정에 대한 과학기술의 투입은 노동의 과학화, 기술화와 동일한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즉 과학기술은 단지 생산부문 뿐만 아니라, 지식과 노동, 심리적 자원을 동원하는 데 처음부터 동원되었던 것이다. 결국 지식기반사회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단계에서 이미 가시화된 지식과 노동, 생산의 연계성을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담론으로 규정할 수 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혁신은 과학과 기술적 지식이 20세기 초반 이후부터 생산공정에 본격적으로 대거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계기는 지식자본의 인식에 근거해서 경제적 의미가 있는 지식의 산업적 생산이 가능해졌다는 사실이다. 지식은 이미 자본주의의 진화과정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지식기반사회는 과학적 지식의 창출과정이나 기술적 지식이 그 어느 시대보다 철저하게 자본과 국가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말한다.

지식의 산업적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원인을 기업적 조직의 효율성이 정신노동과 접목되었다는 사실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식기반사회의 특징은 무엇보다 정보통신기술의 중추적 역할에서 드러난다. 정보통신기술은 단지 새로운 상품의 개발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가치창출의 방식 자체의 혁신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지식기반사회의 핵심기술인 컴퓨터와 통신은 지식의 전달과 가공의 효율성을 제고해줄 뿐만 아니라, 물질적 재화와는 달리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상품으로서의 정보를 대량 복제, 판매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치를 창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정보의 대량복제는 희소성의 원칙에 따라 점차 그 생산의 단가와 함께 가치를 동시에 하락시키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지식기반사회에서 생산성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인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 다만 지식기반사회가 사회적, 생태적 가치를 지향하는 정치적 기획에 대해서 우호적인지 아닌지의 여부 역시 불투명하다. 노동의 유연성과 지식기반사회의 관계를 검토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통합의 가능성이 논의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그다지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특히 지식이나 기술, 정보의 지배력이 강화될수록 자연자원의 잠식이라는 산업자본주의의 경향성이 완화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이나 거대기술 자체의 불확실성에서 비롯하는 세계위험사회의 결과를 고려할 때, 지식기반사회 자체에 대한 규범적 평가에 대해서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세계화의 시대에서 지식과 기술,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질서가 통합됨으로써 개인은 물론, 공동체나 개별국가가 독자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생태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여지가 축소되었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와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사회가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본질로부터 파생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자본축적의 주기적인 위기를 통해서도 예상할 수 있었으며, 이점에서 다음과 같은 산업사회학적 분석은 주목할만하다. “첫 번째 전략으로서 지식은 생산과 이윤획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동원된다. 생산의 과학화는 가속화된 작업과정과 생산품의 혁신을 통해서 투자와 소비의 재화와 관련한 새로운 시장들을 창출하고 경제발전의 침체와 위기국면을 극복한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의미는 일부 지식경영론에서 강조하는 방법지에만 의존해서는 설명될 수도 없으며,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대량생산체제가 왜 포스트포디즘적인 생산양식으로 변형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없다. 방법지의 차원은 보편적 타당성보다는 구체적 대상이나 사태의 변형, 가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기술적 행위나 혹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도구적 합리성을 공유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전의 수공업적 노동에서도 방법적 지식은 작업공정이나 사물들에 대한 일반적 관점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유독 자본주의적 생산체제와 수공업적 생산체제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적합하지 않은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방법지 중심의 논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윤축적 방식이 보여주는 역사적 특수성을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인구의 증가와 수요의 확대, 분화 등에 따른 생산공정의 변화는 과학에 근거한 산업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열역학과 재료공학, 화학, 물리학 등의 과학적 지식을 기술공학적으로 적용한 수많은 산업분야들이 등장한 것이다. 물론 단순히 지식을 생산요소로 보는 관점 자체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16세기 서구의 르네상스 이후 전개된 제국주의적 국가들,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이 앞다투어 왕립 아카데미와 같은 연구기관을 설립한 것도 그 때문이다. 실상 지식인의 이념보다 더 근대적 표상에 맞는 것은 공작인, 기술인(Homo Faber)이다. 즉 유용성과 효율성의 관점은 이미 근대 이후 지식 자체를 위한 지식이나 사변적 지식의 개념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이며, 이 같은 혁명적 전환이 근대 과학의 정신으로 체계화되었다. 노동력이나 토지보다 지식이 중요한 생산요소로 간주되어야한다는 생각 자체는 이미 19세기의 초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지만, 현실적으로 지식이 중요한 생산요소로 기여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발전한 과학에 근거한 산업들(Science-based Industries)은 정보사회로의 이행을 촉진시킨 주축적인 계기이다.

이미 마르크스는 수공업적 생산양식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과학기술의 진보가 노동시간의 증가보다 가치창출의 핵심요인임을 강조했다. 지식기반사회가 평생학습사회를 교육지표를 지향해야하지만 이는 당연히 지식처리 능력의 격차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이 때문에 역동성과 유연성을 보이는 사회는 진화의 관점에서 다른 경쟁적인 사회들에 비해서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같은 진화의 특성으로 인해서 진화의 발전속도에 미치지 못하는 계층과 개인들을 배제하는 체계의 양상을 보이는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는 과거 진보적인 사회이론의 계층적, 계급적 구별의 기준을 상대화시키거나 지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인 자본과 노동의 대립을 대신해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가의 여부가 계급적, 계층적 대립의 준거로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지식이란 바로 인간적인 능력 가운데 상징들의 의미를 파악하고 가공,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중시된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러한 경향은 탈물질주의적인 세계구성의 계기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식기반사회가 등장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지닌 지식을 소유, 창출할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사이의 격차가 자본과 노동의 격차보다 더 중요하다는 분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는 것은 무리이다. 왜냐하면 지식기반사회는 자본과 노동의 대립에 새로운 대립을 중첩시키고 있는 자본주의적 이윤축적의 구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체제가 안고 있는 모순들과 규범적 문제들이 지식기반사회가 등장함으로 인해서 자동적으로 해소되거나, 후자가 전자를 자연발생적으로 함축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미 금융위기나 노동의 문제, 환경의 광범위한 파괴와 자원의 고갈 등은 지식기반사회의 도래가 오히려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함을 말해준다.

오히려 노동의 위기는 지식경제의 확산으로 인해 더욱 심화됨으로써 사회적 통합성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쟁점화되거나 민주주의 자체의 체제위기로 발전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중첩된, 그리고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사태들에 의해서 설명된다. 먼저 정보화, 세계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기업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보조하기 위해서 국가는 이에 상응하는 사회간접자본을 제공해야하는 데 이는 거의 예외 없이 국가재정에 부담을 줄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공성의 한계를 넘어선 방식으로 추진되기도 한다. 게다가 경제적 세계화는 지구적 수준에서 움직이는 기업들이나 국제기구 들에게 국민국가가 경제주권을 일부 양도해야하는 상황으로 발전한다. 정보기술이 시장에 대한 기업을 적응력을 높여주고, 자본의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전략을 제공하는 핵심적 중요성을 지닌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보기술의 창출과 상품으로서의 정보 및 지식을 소비하기 위한 국가적 투자의 정치적 성격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국가는 정보화를 위한 간접투자시설의 확충으로 전문가 지배의 가능성을 제고해줄 뿐만 아니라, 세계화 시대의 표준화된 법적, 정치적 제도들을 정착시킴으로써 자본의 운동을 보장해준다.





3. 비판적 지식기반사회론의 단초들





즉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과 경쟁적 관계에 돌입한 것이나 다름없는 세계화, 정보화사회의 현실 앞에서 이 같은 유형의 발전전략이 종래 근대화 초기단계의 ‘국가동원체제’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일면 불가피하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경제적 세계화는 곧 국가의 경제 주권을 세계시장의 다른 행위자들이나 간정부간 조직들(transgovernmental organizations)에게 부분적으로 양도할 것은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지식기반사회론’이 한국의 사회경제적 맥락에서만 검토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과거 근대화 초기 단계의 대중주의적인 의식운동의 유형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식기반사회론’은 경제적 생존단위로서의 국가의 ‘자기보존’이라는 논리에서 출발하는, 기본적 타당성을 수반한다. 당연히 국가의 일차적 목표는 사회경제적 단위로서의 자기보존이기 때문에 원론적 수준에서 지식기반사회론에 대해 유보적일 이유를 발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지식기반사회론에 대한 비판적 이해는 현정부의 정책이 지니는 원칙적 타당성을 단순히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다만 본 연구는 ‘지식기반사회론’이 자본주의의 발달단계에서 지니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주요 행위자들이 대안적이며 규범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선택의 보다 폭넓은 기회를 ― 일단은 최소한 이론적 차원에서라도 ― 확보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비판적 이해의 의미를 이 같이 규정할 때, 지식기반사회론에 대한 논의는 기존의 담론에 대한 내재적 비판과 대안적 전망을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 관점에서 지식기반사회론의 문제성은 무엇보다 방법론적 환원주의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방법론적 환원주의란 다름 아니라 경제논리나 시장의 원리를 중심으로 시장(경제)외적인 사태들을 설명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종종 시장주의는 일종의 가치에 대한 획일적 해석의 체계로 작용한다. 즉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존재자들이나 삶, 자연 등이 그 자체로서 ― 시장에서 통용되는 교환가치나 사용가치를 초월해서 ― 가치와 목적을 지닌다는 사실이 온당하게 고려되지 못하는 것이다. 시장주의는 결국 세계와 존재에 대한 포괄적 신념의 토대를 구축하기 때문에 일종의 類似형이상학과 같은 사고틀로 작용한다. 시장주의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관철된다. 예를 들어 ‘경쟁과 협동’이 서로 어우러져 작동하는 사회적 관계에서도 ‘경쟁’의 원리가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으며, 행위의 동기보다는 업적과 정량화가 가능한 가시적 결과가 중시되는 일반적 사고의 관행에서도 시장주의의 이념은 어김없이 관철된다. 심지어 국가의 정치적 행위의 타당성은 사회정의나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앞서 그 효율성과 관련해서 검증되기도 한다.

‘지식기반사회론’이 시장주의의 형이상학적 전제 위에서 모색되는 한에서, 여러 형태의 비판이 정치철학적 시각에서 제기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자유주의와 시장주의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다원주의나 정치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지지할 때, 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국가가 특정한 삶의 유형을 위로부터 요구하는 것은 당연히 부당하다. 자유주의 체제하에서 국가에게는 개인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 그것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 보장하거나, 보조하는 역할이 주어지는 것이지, 개인들의 삶의 지도하거나 직접 지배하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식의 생산과 창출에 유리한 환경과 권위주의적 문화가 대립한다는 것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사회가 르네상스 이후 전체주의적 성향의 국가체제보다 더 인간적인 사회일 뿐만 아니라 지식생산력에서도 우위에 놓여있다는 역사적 분석은 간과될 수 없다.지식은 항상 검증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반성적인 문화를 확산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직결되어 있다. 때문에 지식 중심의 사회는 종족과 지역, 전통적 특수성에 근거한 행위와 판단, 규범보다는 그 지식의 유용성과 이론적 정당성에 근거해서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 한 사회가 지식의 생산과 그 확산에 관심을 지닌다면, 그 사회는 불가피하게 관용과 비판을 축으로 삼는 개방적인 사회로 이행하거나, 개방사회의 규범을 존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특정한 국가는 특정한 분야의 지식, 가령 실용적 필요에 따른 지식만을 선별적으로 생산, 관리하고자 시도할 수 도 있다. 그런 사회는 대부분 전체주의적 사회일 가능성이 농후한 데, 그 같은 폐쇄사회의 운명을 예측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따라서 지식기반사회는 이데올로기나 상징조작에 의존하는 사회와 다른 사회통합의 이념을 추구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공리주의적 관점의 지식개념은 보다 포괄적이며 반성적인 지식사회로의 이행가능성을 그 사회자체의 내부에 함축하는 것이다. 다원주의적 사회는 지식의 창출에 유리한 문화적 조건을 제공한다는 역사적 경험에 주목할 때 지식기반사회의 실현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그 정책집행의 방식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조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식창출에 유리한 환경은 바로 세계해석의 다양성이 존중될 뿐만 아니라, 다른 해석에 대한 존중이 일종의 문화로서 자리잡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점에서 국가의 지식사회구성에 대한 역할은 선도적이 아니라, 보조적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적 가치를 국가가 직접 지도적인 생활의 이념으로 설정하고 교환가치가 절대적이지 않은 삶의 영역에 이식하려고 시도할 때, 이는 삶의 개인적 목적에 대한 설정과 관련하여 자율적 시민들의 판단을 존중하는 자유주의 이념과 상충될 수밖에 없다. 즉 특히 지식기반사회론은 제도적 개혁의 차원이 아닌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와 접목되어 고전적 자유주의 이념과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국가주도의 ‘지식기반사회론’이 정치적 자유주의의 원리들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회 이론적 관점에서 전근대적인 문화의 유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도 분석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한 핵심원리로 전제되는 ‘보조의 원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으로부터 보조의 원칙은 무리 없이 도출되고 정당화될 수 있다. 보조의 원칙이란 시민사회나 경제부문에서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안들을 국가가 대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보조의 원칙’에는 자율적 시민들의 판단을 존중하고 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불필요하게 확대하지 않는다는 관용과 다양성의 관념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 즉 지식의 창출과 접근과 관련한 시민들의 자유를 증대하는 제도적인 접근은 일종의 ‘경험적’, ‘귀납적’ 관점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방식이 신지식인과 같은 모범적 사례를 선정, 홍보하는 등의 ‘연역적’이며 권위주의적 태도보다 더 효과적이며 동시에 규범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특히 국가의 다른 삶의 방식들을 용인하는 관용의 정신은 지식기반사회의 한 조건인 셈이다. 반면에 관용의 문화에 대립하는 권위주의적 문화는 획일적 사고와 순응주의적 인간의 유형을 권장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우리 사회적, 정치적 차원에서 모든 권위를 부정하거나, 배제해야한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정당한 권위는 무질서나 무정부주의적 상황을 원하지 않는 한, 역사나 전통, 법과 도덕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다만 권위의 정당성과 의미에 대한 문제가 자유롭게 제기되고 개인들의 이성에 의해서 검토될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경우는 결과적으로 커다란 문화적 차이를 보일 것이다.

반면에 국가의 권위가 합법성의 원칙에 근거하는 법과 정치적 공공성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추구될 때, 우리 사회의 경우 기존의 온정주의적 정치문화는 권위주의적 정책수행과 상응하는 관계에 놓이게된다. 이런 전통적 요인들의 결합은 실제로 국가경쟁력의 제고라는 기능적 목표의 달성을 저해하고 지연시킬 수 있는 문화적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권위주의나 온정주의는 한결같이 삶의 다양한 차원들을 획일적 이념으로 묶음으로써 한 사회의 창조적 혁신의 에너지를 억압하는 문화적 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는 아직 전근대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인간적인 인연이나 관계가 법과 규범에 의한 지배의 방식과 혼재되어 있는 양상을 보인다.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유산과 무관하지 않은 온정주의(Paternalism)의 문화는 사적 영역을 넘어 정치나 경제 등을 포괄하는 영역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그 결과 국가와 시민사회, 개인들간의 관계는 합리적 국가의 질서를 반영하기 곤란한 상황이 지속될 것이다. 경험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70% 이상은 ― 교육수준과 거의 관계없이 ― 국가와 시민들간의 이상적인 관계는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와 같아야한다고 여기고 있다. 물론 우리 사회의 온정주의자들이 국가의 정책이나 이념에 대해 거의 맹목적으로 순종하거나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정주의 정치문화 하에서는 개인들이나 시민사회내의 이익집단이 국가에 대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삶의 문제들을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치의 수준이 온정주의 정치문화 하에서는 당연히 높게 나타날 것이다. 이런 사회의 조직들은 기능적으로 분화된 근대적인 조직에 비해 효율적일 수 없으며, 법과 규범에 의한 관리보다는 사람과 관행에 의한 관리에 상당부분 의존하게된다. 온정주의의 문화는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도 수직적 위계질서에 가까운 조직의 방식에 안주하고 있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 국민들의 의식세계 속에 전근대적인 가치관과 근대적인 의식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성숙한 시민사회의 조건을 논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4. 지식과 기술, 매체



지식기반사회론이 하나의 담론으로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무엇보다 정보기술의 도입에 따라서 파생되는 조직 내부의 의사소통방식이나, 지배구조 등의 변화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자체가 선행되지 않은 채, 기술적용의 타당성과 시의성에 대한 논의가 압도적이라는 사실이다. 정보기술이 도입되는 조직은 거의 예외 없이 구성원들 상호간의 의사소통의 방식에서도 변화를 경험한다. 정보기술은 예를 들어 기업의 시장에 대한 적응력을 높여주고, 기업내부의 관련 구성원들이나 하부조직간의 상호성을 제고해주지만, 동시에 핵심 정보의 중앙 집중화된 관리를 용이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과정들이 병행, 진행될 수 있기 때문에 정보기술을 도입하는 조직 자체의 투명성과 효율성이 제고됨과 아울러 조직 구성원들에 대한 상층부 관리자의 통제력 역시 함께 강화되는 것이다. 기업조직의 경우 정보기술의 도입은 생산성의 증가와 함께 노동시장의 변화를 촉발시킨다. 즉 고도의 기술력을 지닌 극소수의 인원을 제외한 다수의 고용인들은 정보기술의 도입으로 인해서 조직 내부에서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감소되거나 지속적인 고용의 기회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 따라서 지식기반사회가 노동부문에 미치는 복합적인 영향력을 분석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규범적 관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단지 기업내부의 의사소통구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보화에 따른 사회경제적 위상을 변화는 개별국가 수준에 그치지 않고 지구적인 차원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 정보화의 이중적 의미는 세계화의 문제성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즉 세계사회는 보편적인 언어와 의사소통의 질서가 지배하는 매체공간을 구성함으로써 개별적인 국민국가들이 과거의 자연적이며, 전통적인 차원의 공간적 영토 설정을 통해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계사회의 매체들이 영토와 자연적 공간을 초월해서 초국가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이를 통해서 규범과 관습, 정치, 경제 등에 직접적인 변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사회가 모두 하나의 단일한 문화에 의해서 통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세계화와 마찬가지로 지구적 수준에서 움직이는 매체공간에서도 중심문화와 주변문화의 구별과 함께 문화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이 가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심문화와 주변문화의 경계선은 경제적인 빈부의 차이와 상응하는 데, 그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는 매체의 기술과 문법을 장악하고 문화상품을 생산하는 데, 종종 예외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오늘날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자본이 집약되어야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사회가 최소한 문화적 차원에서도 평등과 기회의 균등히 보장되는 사회일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음이 분명하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매체기술의 중요성은 주요국가들에 의해서 일찍이 인식되었다.. 문화 지배권의 불균형은 상당부분 그 문화적 내용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매체의 지배권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서구적 문화와 가치관, 규범체계 등이 지배적인 위상을 점유할 수 있었던 조건 중의 하나가 바로 매체기술이다. 역사적으로 의사소통의 신속성과 정확성은 개별국가들에 의해서 핵심적인 관건이었다.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관점에서 매체의 세계화는 현대의 디지털 기술체계와 광통신 체계가 등장하기까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자본주의의 선진국들은 전파와 같은 매체공간의 소유권을 관장, 통제하기 위한 국제기구의 창설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이는 분명 국가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구체적인 의도 하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계화 시대가 본격화되고 경제의 통합화 과정이 진척됨으로써 매체에 대한 장악력에서 개별국가와 초국가적 기업들이 상호 경쟁하는 관계에 놓이기도 한다. 예컨대 매체뿐만 아니라, 저작권이나 특허권과 같은 법적 보호의 제도화가 세계적 수준에서 보장되는 현실과 과학기술 연구의 자본집약적 특성을 함께 감안한다면, 정보화가 자본과 기술수준에서 앞선 특정 다국적 기업의 지배적 위상을 더욱 더 공고하게 만들어준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지식의 독점적 지배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옹호, 신장하려는 시도들과 충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는 정보화와 세계화의 동시적 진행으로 인해서 더욱 가속화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우리는 매체사회와 지식기반사회가 모두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연장선상에서 세계사회의 경제적 통합을 강화하면서도, 개별국가 수준에서는 사회적 통합에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과정임을 인식하게된다. 즉 매체사회는 일견 민주주의적 가치를 확산시키고 투명한 거래행위의 규범까지도 제도화 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면서도, 그 정치적 지배권이 문제는 세계사회에서 문화적,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지식기반사회의 성격은 이처럼 기술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을 전제한다. 기술은 단순히 경제적 생산의 효율성을 제고해주는 수단이 아니다. 오늘날 기술은 단지 인간적인 능력을 강화, 보조하는 차원을 넘어서 인간 자신의 정체성은 물론, 사회 정치적인 삶의 조건들 자체를 변화시키는 혁신의 주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보통신기술과 유전공학기술 등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담당한다. 자연적인 시간과 공간의 표상이 가상의 매체시간과 매체공간에 의해 중첩됨으로써 인간적인 경험의 새로운 지평이 열림과 아울러 국가와 시장, 시민사회, 개인의 사이에서 작용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방식까지도 기술에 의해서 매개됨으로써, 기술은 삶을 보조하는 수단의 차원을 넘어서 삶 자체의 내재적 구성의 원리이자 조건으로 인식된다. 지식과 기술, 경제 등의 연계된 요소들을 통합적으로 파악할 때, 비로소 규범적 관점에서도 정당화될 수 있는 대안적인 ‘지식사회’의 조건들이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경제적 환원주의의 방식에 그친 ‘지식기반사회론’은 삶의 전일성을 해체하는 기능주의나 시장중심주의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