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나뭇잎숨결 2017. 2. 28. 09:14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 양운덕 (고려대 교수, 서양철학)


I 문제제기

 

지젝은 '라깡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는 그가 속했던 슬로베니아 라깡 학회의 다른 구성원들처럼 라깡의 틀로 전통적인 근대철학(독일 관념론)을 재해석하고, 문화, 예술(특히 영화)을 라깡주의적으로 분석하고, 라깡의 틀로 이데올로기, 권력 이론을 구성하는데 몰두했다. 지젝은 이들 가운데 이론적 성과가 두드러진 인물이다.


흔히 지젝을 라깡의 난해한 개념들을 대중문화 현상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이론가로 본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단순히 라깡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는 것만은 아니고 라깡 이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라깡이 '프로이트주의자'이기를 고수하면서 구조주의 언어학 등을 원용하여 '프로이트의 진리'를 일정하게 보완, 수정하고 '다르게' 반복하는 것처럼, 지젝 역시 라깡을 '다르게' 해석하면서 그 이론의 가능성을 자신의 문제 영역(대중문화에서 이데올로기 이론에 걸친 영역)에 펼친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 사회 현실과 정치적 영역은 욕망-현실의 다채로운 얼굴들로 나타난다. 프로이트가 제기했던 무의식의 문제틀이 주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욕망, 사회적 증상,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는 틀로 발전된다.


지젝은 초기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에서 자신의 이론적 지향을 제시한다. 그는 흔한 오해(라깡을 '포스트 구조주의자'로 보는 점)에 맞서서 라깡이 합리주의의 계보를 이어서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얘기하는 근본적인 계몽주의자임을 밝히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 구조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라깡의 틀이 차이 철학이 지닌 공허함을 보완하는 다른 길임을 강조한다.


또한 지젝은 '헤겔로 돌아가기' 위해서 라깡 틀로 헤겔 변증법을 재해석한다. 그는 헤겔이 '관념론적 일원론'이 아니라 차이와 우연성을 중시한다고 본다. 그의 부정의 부정, 반성 논리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그것을 이데올로기 이론으로 연결시키는 점은 눈길을 끌만하다.


또한 그는 상품물신성 같은 고전 사회이론의 주제들과 (이데올로기와 무관해 보이는) 라깡의 주요개념들--고정점, 숭고한 대상, 잉여-향유 등--을 재해석하고 연결시켜서 새로운 이데올로기 이론을 마련하고자 한다.


그는 이런 작업이 '이데올로기 이후'에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포스트 모던의 덫에 걸리지 않으면서 현대 이데올로기 현상들(냉소주의, 전체주의,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파악하려는 것이라고 본다.


지젝은 라깡 후기 이론이 (예를 들어서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욕망에서 충동으로) 초점을 옮겼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흔히 라깡을 상징계 이론가로 볼 때 주체가 상징계 안에서 기표들에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고 기표들이 마련한 자리를 부여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래서 라깡을 '양처럼 순하게' 늘어서 있는 주체들을 질서의 이름으로 길들이려는, 주체들에게 욕망의 허망함을 가르치려는 이론가로 여겼다. 지젝은 이런 해석에 반대하고 라깡의 '실재계'를 전면에 부각시켜서 새로운 방식으로 주체와 사회적 관계의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그는 실재계와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재해석해서 이데올로기 이론, 사회적 환상, 전체주의적 욕망 만들기를 나름대로 이론화한다.


지금까지 개인의 주관적 욕망과 사회 현실을 접맥시키려는 시도들이 별달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지젝은 나름대로 프로이트와 맑스를 '라깡을 매개로' 삼아서 결합시키려고 한다. 그의 욕망의 사회철학이 현재의 사회, 정치적 현실에 참여해서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지젝이 21세기의 이론가가 될 수 있으려면 이런 오래된 시도를 보다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작업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프로이트와 맑스를 잇는 작업의 중요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지젝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시도 가운데 이데올로기 비판과 관련된 몇 가지만 살펴보려고 한다. 

 

II '나는 알아, 하지만...'의 논리--증상을 고안한 맑스?

 

라깡은 맑스가 증상개념을 고안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떻게 맑스가 그의 상품을 분석하면서 프로이트가 꿈, 신경증 등에 관한 분석에 적용한 증상 개념을 만들었다는 것인가? 자못 궁금하다. 지젝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지젝은 맑스와 프로이트의 해석 방식(상품 분석과 꿈 분석)에 근본적인 상동성이 있다고 본다. 이때 양자의 상동성은 그 내용이 아니라 그 구조나 형식이 동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지젝은 문제가 되는 두 분석에서 형식 자체의 비밀에 주목한다.
그는 프로이트가 꿈을 분석할 때 흔한 해석학적 모델처럼 현재적(顯在的:manifest) 내용에서 그 숨겨진 비밀, 곧 잠재적 꿈 사고Traum-Gedanken를 찾지 않는다. 지젝은 잠재적 꿈 사고의 내용이 아니라 이 꿈 사고가 왜 그런 '형식'을 취하는가에 주목한다. 마찬가지로 맑스의 상품 분석에서도 상품의 숨겨진 핵심(노동)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왜 노동이 상품가치란 '형식'으로 나타나는가가 초점이다.[각주 1-이런 지적은 먼저 프로이트에 대한 흔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 우리 심리 안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것으로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억압에 의해서(Ur-Verdrangung:원-억압) '다른 무대'로 밀려난 무의식은 우리 안에 없다. 무의식은 의식에 들어오기 위해서 의식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꿈 사고는 그 일종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꿈에서 그 내용이 아니라 꿈 작업의 왜곡(전치와 압축) 장치를 무의식적이라고 보았다. 지젝은 이와 관련하여 무의식이 사고가 아니라 '사고 형식'이라고 본다. 이런 사고 형식은 사고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사고 바깥에 있는 것, 주관적이면서 또 객관적인 것이다. 이런 사고 형식은 상징 질서를 구성한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상품 형식의 '무의식'을 찾는다. 그는 상품 분석에 원용된 물신성(物神性:Fetischismus) 논리와 프로이트가 도착증의 한 형식으로 본 물신주의(Fetischismus)를 연결시킨다.


지젝은 상품을 교환하는 주체들에게서 '마치 ...처럼'의 논리를 찾는다. 교환을 하는 동안에 개인들은 마치 상품이 물질적 교환에 예속되지 않는 듯이 행위한다. 물론 그들은 의식적으로는 사정이 그렇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화폐는 다른 물질적 대상처럼 시간에 따라서 변한다. 그런데 시장의 사회적 현실에서는 마치 그것이 변치 않는 실체를 지닌 것처럼 다룬다. 지젝은 이런 점이 '나는 잘 알아, 하지만...'이라는 물신적 태도와 연결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서 '나는 엄마가 팔루스를 지니고 있지 않은 점을 알아. 하지만...[나는 그녀가 팔루스를 지닌다고 믿어]'. '나는 화폐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물질적 대상임을 안다. 하지만...[화폐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특수한 실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Zizek, 1989, 18-9)


이런 화폐의 물질적 성격에 따른 신비화는 화폐가 숭고한 대상이고, 이런 화폐의 다른 몸, 비물질적 신체성, '신체 안에 있는 신체'를 믿는 것이다. 교환행위를 하는 동안 개인들의 행위에는 어떤 '오인'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오인이 교환행위를 유효하게 하는 필수조건이다. (Zizek, 1989, 20)


이런 점에서 이데올로기의 근본 차원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가짜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그 참여자의 비-지식을 포함하는 사회현실을 구성하는데, 이 현실은 개인들이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만 유효하게 작용한다. 지젝은 주체의 비-지식이 포함된 점 때문에 이것을 '증상'으로 본다.


지젝은 이런 틀로 상품물신성을 새롭게 해석한다. 보통 상품물신성은 인간들 간의 사회관계가 사물들간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생산 자본을 투입해서 잉여가치가 산출된 경우에 이 잉여가치가 노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본이 산출한 것이라고 믿는 태도는 자본을 물신화하는 것이다. 자본이란 사물-신이 스스로 운동하고 잉여가치를 창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의 가치는 상품생산자들간의 사회관계의 표지이다. 그런데 이런 가치가 어떤 사물(상품, 화폐)의 준-자연적인 속성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특정한 상품의 가치가 일정량의 화폐로 표시된다.


지젝은 상품물신성의 핵심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사물화되는 것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이것을 구조적 효과로 해석한다. 곧 구조와 요소들 간의 관계에 따른 효과가 마치 한 요소의 '직접적인' 속성인 것처럼 나타나는 점에서 찾는다. 곧 한 요소가 다른 요소와 관계 맺지 않고 그 자체로 어떤 속성을 갖는다는 오인을 문제삼는다.


단순한 가치 형식을 살펴보자. 상품 A는 그 가치를 (등가인) 다른 상품B와 관련해서만, 비교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상품 B가 A에 대해서 거울 역할을 한다. 상품B는 A가 그것과 관련되는 한에서만 등가이다. 그런데 B는 A와 관계 맺지 않는 것처럼, B가 그 자체로 A의 등가인 듯이 나타난다. '등가(being an equivalent)'의 속성이 B의 자연적 속성인 것처럼 여겨진다.


비슷한 예를 보자. 한 사람이 왕인 것은 오로지 타인들이 그에게 신하의 관계에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그들은 왕이 왕이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신하인 듯이 상상한다. '왕이 됨'은 왕과 신하간의 사회 관계에 따른 효과이다. 그런데 사회 안에 있는 이들에게 이 관계는 전도된 형식으로 나타난다. 마치 '왕이 됨'이 사회적 관계와 무관하게 (그들이 자신들을 신하로 여기고 그에게 봉사하는 것과 무관하게) 왕 개인의 자연적 속성인 것처럼 오인한다. 왕-신하의 관계의 산물인 왕이 아니라 '왕은 왕이기 때문에 왕이다.' (Zizek, 1989, 24-5)


그러면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어디에서 생기는가? 사고 영역인가 아니면 행위 영역(또는 현실 자체)인가?


지젝은 맑스가 지적한 이데올로기적 착각이 지식의 측면이 아니라 이미 '현실 자체', 개인들의 행위의 측면에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개인들이 화폐를 사용할 때 그들은 그것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없음을 매우 잘 안다. 일상적인 수준에서 개인들은 사물 관계 배후에 인간관계가 있음을 안다. 문제는 그들이 사회적 행위를 할 때 '마치' 화폐가 (사회관계가 아니라) 부 자체를 직접 구현하는 것'처럼' 행위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실제 행위에서 물신주의자이다/물신주의자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사물들의 실제 모습을 잘 알고 있지만 마치 그들이 모르는 것처럼 행위한다. 지젝은 이런 무의식적 착각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이라고 부른다.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차원이 (사물들의 실제 상태를 은폐하는 착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회 현실 자체를 구조화하는 무의식적 환상에 있다고 본다. '개인들은 그들이 행위하면서 착각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그렇게 행위한다.' (Zizek, 1989, 30-3)


이런 물신fetish은 도착의 일종이고, 거세를 거부하는 방식의 하나이다. 그런데 지젝은 이 물신주의의 정식('나는 알아, 그렇지만...')으로 도착적인 '전체주의적 대상'을 설명한다. 전체주의적 권위를 지지하는 자는 자신이(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점을 '아주 잘 알지만') 특수하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사람이라고 믿는다. 예를 들어서 당(黨)-물신에 참여하는 개인들은 자신들을 역사 의지를 직접 구현하는 자라고 믿는다. 이들은 사회, 역사 발전의 객관적인 법칙이 지배하며 당은 객관적인 법칙을 직접적으로 구현한다고 본다. (Zizek, 1991, 251-2)[각주 2-라깡은 사드가 칸트의 진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사드적 주체, 희생자에게 가학적으로 행위하는 실행자가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그 자신이 아니라 '큰 타자의 향유'를 위해서 일한다. 곧 그는 타자의 의지의 도구가 된다. 이런 태도는 이른바 전체주의, 또는 (역사) 법칙을 (불법적으로) 실행하는 수단인 당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라깡은 도착이 환상이 뒤집어진 효과라고 본다. 곧 주체가 자신을 대상으로 규정하는 태도이다. 라깡이 환상을 S(빗금쳐진 S) ◇ a 라고 했을 때 기표로 대표된 주체가 그의 욕망의 원인-대상과 만나서 분열됨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데 사디즘적 도착자는 이 구조를 뒤집는다. a ◇ S(빗금쳐진 S). 곧 자기 자신이 대상의 자리를 차지한다. 자신을 큰 타자의 의지를 구현하는 수행자로 만든다. 그는 주체를 구성하는 분열을 회피하고 자기의 분열을 타인에게 옮긴다. 사디스트는 타인을 위하여 대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타자의 향유를 위하여 도착자로 행위한다. 스탈린주의의 큰 타자, 곧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법칙은 최고악의 한 변형이다. 그 자신을 객관화, 도구화하는 것은 오로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가 되려는 확신에 바탕을 둔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역사)의 의지를 실현하는 투명한 수단으로 삼아서 그의 핵심을 이루는 분열을 회피한다. 물론 그 대가로 그의 향유를 전적으로 소외시킨다. 부르조아적 주체가 자유로운 참여의 권리를 내세운다면 전체주의적 주체는 이런 자유가 큰 타자의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과 관련하여 그 자신의 의지는 전적으로 도구화된다. (Zizek, 1991, 234-5)]

 

III 큰 타자의 결핍을 메워라!--이데올로기적 환상

 

1. 이데올로기적 고정점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환상의 틀로 설명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러면 사회적 환상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주체들의 욕망을 틀 지우는가? 라깡은 기표들의 체계에서 기표와 기의가 만나지 못한다고 보았다(S/s에서 /는 양자가 만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므로 의미는 고정될 수 없다). 기표들은 차이 관계에서 기의 없이, 고정된 의미 없이 떠돈다. 라깡은 이런 기표들을 잠정적으로 고정시켜서 의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고정점(point de capiton)'이 필요하다고 본다.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소파의 등받이를 잠정적으로 소파에 고정시킬 수 있는 것처럼 의미를 일시적이나마 고정시킬 수 없다면 의미는 계속 방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담론 공간을 떠다니는 요소들은 차이 관계망에서 고정된 동일성을 마련하지 못한다. '자유'는 무엇이고, 누가 '개혁파'이고, 누가 '민주주의자'인가? 여기에 어떤 이데올로기적 고정점이 개입해서 떠다니는 기표들을 꿰매어서(quilting) 그것들의 의미를 고정시킨다. 이런 꿰매기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을 안정된 전체로 만든다.


지젝은 이와 관련하여 상징질서인 큰 타자가 자체 안에 결핍을 지닌 것임을 지적한다. 그래서 이런 큰 타자의 결핍을 채워줄 환상,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라깡은 상징계가 두 얼굴을 지닌다고 본다. 한 얼굴은 상징 질서가 각 요소를 일정한 자리에 배치하고 나름의 의미와 역할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징질서는 요소를 뛰어넘는 전체이고 의미를 배당하는 우월한 주인이다. 그래서 이런 상징 질서는 그 요소들에게 낯설고 넘볼 수 없는 '타자'(l'Autre)로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처럼 군림하는 상징 질서는 온전한 전체를 이루지 못한 채 어떤 결핍을 지닌다. 기표들의 차이관계에서 각 기표는 다른 기표와 다르기 때문에 자기이다. 그런데 이런 관계가 가능하려면 각 기표의 개별적인 차이들에 앞서는 '차이 자체'가 있어야 한다. '사랑'과 '미움'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랑'도 '미움'도 아니고 '사랑과 미움의 차이'이다. 그러면 이런 '차이'를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이런 '차이 자체'를 나타낼 기호는 없다. '차이'는 고정된 내용을 갖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깡은 이런 점 때문에 상징 질서가 결핍을 안고 있고, 이런 결핍 주위에서 상징질서가 구조화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결핍을 지닌 큰 타자(상징질서)는 완결된 전체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 '큰 타자의 욕망'이란 표현이 어색할 지 모르지만 이런 큰 타자가 전체가 아니므로(pas-toute; not-all) 나름대로 결핍을 채우려 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이 점을 라깡은 "타자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표현한다.

 

2. 큰 타자의 질문--'당신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젝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주체가 동일시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긋남에 주목한다. 라깡-알뛰세르는 (상상적, 상징적) 동일시를 통해서 주체와 그의 욕망이 일정한 사회적-상징적 영역에 통합되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주체는 상징 질서가 위임하는 명령(mandate)을 짊어지고 있다. 곧 그는 상징 관계의 상호주관적 망 안에 주어진 자신의 자리를 갖는다.


당신은 '아버지'/'학생'/'주부'이다. 이렇게 호명된 주체는 그 부름에 답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자리와 의미에 적합한 자기를 만들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름과 응답은 일치하는가?


지젝은 이런 명령이 자의적이고, 일정한 역할을 촉구하는 수행적인 것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동일시가 이루어진 경우에도 항상 틈이 남게 된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이것은 내가 (참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주체는 호명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 큰 타자가 질문한다.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Che vuoi?" 교사는 학생에게,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국가가 시민에게, 엄마는 아이에게 묻는다--지젝은 재미있게 mother를 (m)Other로 쓴다. '너는 나에게 이것을 원한다고 했지만 네가 참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너는 무엇을 목표로 삼는가?'


큰 타자는 마치 주체가 이 질문에 답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묻는다. 그런데 주체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없다. 주체는 왜 그가 상징적 관계망에서 바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모른다. (주체는 이런 상징화가 실패한 빈자리일 뿐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런 타자의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3. 환상이 큰 타자의 결핍을 은폐한다


지젝은 라깡이 환상을 그 답으로 제시했다고 본다. 이런 (사회적) 환상이 큰 타자의 수수께끼, 큰 타자 안에 있는 결핍을 은폐한다. (Zizek, 1989, 118)


(지젝은 환상이 흔히 오해하듯이 단순히 헛된 만족을 주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환상은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이 어떻게, 무엇을 욕망할 지를 가르친다. 그래서 개인적 환상뿐만 아니라 사회적 환상도 나름의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고 주체들에게 완전한 사회를 추구하려면 어떤 욕망의 좌표를 가져야 하고 무엇을 욕망 대상으로 삼아야 할지를 알려준다)


그러면 큰 타자가 환상을 구성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젝은 라깡 이론의 근본적 차원이 (주체의 분열보다는) 큰 타자의 분열, 큰 타자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있다고 본다. 만약 큰 타자에 이러한 결핍이 없다면 완결된 구조를 갖출 것이다. 그러면 꽉 짜인 타자 안에 있는 주체는 소외를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큰 타자의 결핍이 주체에게 숨쉴 공간을 주고 전면적인 소외를 피하게 한다. (같은 책, 122)


그러면 큰 타자는 결핍을 그대로 두는가? 이 결핍을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가족, 회사, 교회, 국가가 메울 수 없는 결핍을 지니고 있다면 큰일이 아닌가? 이때 결핍 없는 타자란 환상이 필요하다.


'환상'이 큰 타자 안에 열려있는 빈곳을 채우고, 그 비정합성을 가린다. 환상은 큰 타자가 상징화될 수 없는 어떤 것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주체는 이런 환상을 통과하면서 마치 큰 타자 안에서 자신들의 욕망이 조화롭게 정해진다고 여긴다.

 

4. 사회적 환상 통과하기


(주체들이 환상을 통해서 욕망 대상을 찾듯이) 사회적 환상을 만드는 큰 타자는 조화로운 전체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을 채우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어떤 환상이 필요하고 욕망을 일으키는 어떤 원인-대상이 필요할까? 이것을 지젝이 종종 드는 반유태주의의 '유태인 형상' 만들기로 살펴보자.


1)먼저 담론 수준에서 '유태인 형상'이 상징적 (중층)결정에 따라 만들어진다. (꿈의 왜곡 작업에서 본 '전치'와 '압축'이 동원된다) 먼저 전치displacement를 통해서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의 자리를 바꾼다. 이 속임수로 사회적 적대를 엉뚱한 곳으로 옮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온전한 전체인) 사회는 불가능한 것'이고, 사회적인 것은 적대에 기초를 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이런 적대가 존속하고 조화로운 전체가 불가능한 이유를 유태인에게 떠넘긴다. 타락의 원천이 사회의 한 부분인 유태인에 배당된다. 적대의 원천인 노동계급과 자본 계급 간의 계급적 적대 대신에 생산계급과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유태인)사이의 가짜 적대가 마련된다.


이와 함께 '유태인 형상'을 만들기 위해서 대립적인 측면들을 압축condensation한다. '유태인 형상'에 경제적(폭리를 취하는 자), 정치적(음모가, 비밀 권력을 지닌 자), 도덕적-종교적(타락한 반 기독교도), 성적(무고한 소녀들을 유혹하는 자) 적대 등을 압축시켜 일련의 이질적인 적대들이 모아진다. 한마디로 유태인의 형상이 증상, 사회적 적대의 암호가 된다. (같은 책, 125-6)
그리고 이런 왜곡에 더하여 열광적인 힘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사회적 환상을 통과'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환상의 틀 안에 들어가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향유를 훔쳐간다."


이처럼 환상은 적대적 분열을 가린다. 라클라우가 지적하듯이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은 항상 비정합적인 것이어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곧 사회는 항상 (상징 질서로 통합될 수 없는) 적대적 분열에 의해서 관통된다.


그런데 이런 적대를 부정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환상은 '완전한 사회'의 비전을 내세운다. 이것은 적대적 분리에 의해서 분열되지 않은 사회, 그 부분들이 유기적인 조화를 이룬 사회를 요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내세운 비전이 실현되지 않는 까닭을 다른 곳에서 찾는다. 어떤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있다면 그것은 건전한 사회를 타락시킨 외적인 요소, 곧 물신fetish이다. 그것은 '마치' 사회의 불가능성을 긍정적이고,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준다. 이런 물신은 사회적 영역에서 향유를 폭발시킨다.


주체들이 환상을 통과하면서 '유태인'에게 귀속시킨 것이 사실은 사회 체제에 불가피한 적대, 무질서이다. 바로 사회에 고유한 적대, 피할 수 없는 내부적 부정성을 '유태인'이란 형상으로 (그 바깥에) 투사한 것이다. (같은 책, 126-8)
이런 점 때문에 지젝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폭로하는 작업으로 보지 않는다. 이 환상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환상은 아무 것도 가릴 것이 없음을 숨기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초점은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IV 마치면서

 

이상에서 부족하나마 지젝의 정신분석학적 이데올로기 이론의 일부를 살펴보았다. 이런 틀에서 지젝은 본질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차이의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며, 동일성의 진리를 추종하지 않으면서도 변증법적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필자는 그의 실천적 이데올로기 이론이 욕망과 현실의 매개, 개인과 사회-역사의 변증법의 모범적인 예가 되길 바란다.


필자가 보기에 지젝은 다양한 작업에서 근, 현대의 서구 이론가들을 라깡적 주제로 재해석하고 그들에게서 라깡적 사고틀을 찾고 라깡적 답을 보충한다. 이것은 새로운 해석의 풍요로움을 낳을 수 있지만 라깡주의가 '이론의 주인'이 되려는 욕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지젝이 앞으로도 여전히 라깡주의자로 머물지, 아니면 독자적인 이론가로 나설 것인지가 궁금하다. 필자는 지젝의 넘치는 '이론 욕망'을 보면서 부러움이 앞선다. 그래서 우리 현실과 문화(의 욕망)에 대한 생동감 넘치는 분석과 정치하고 세련된 논의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욕망 이론가들'이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이 구조화된 현실을 잘 설명할 수 있을 때 그들에게 라깡과 지젝에게 묻고 싶었지만 감히 물을 수 없었던 것들을 물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Slavoj Zizek (1989),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 and New York,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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