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언어철학적으로 살펴본 정신과학의 의미(김창래)

나뭇잎숨결 2017. 2. 27. 11:33

언어철학적으로 살펴본 정신과학의 의미

- H.-G. Gadamer를 중심으로 -


김창래 (고려대)



I. 문제의 제기: 정신과학의 본질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 Humanities)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정신과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다. 철학적으로 본질은 본질적 차이(Wesensunterschied)를 의미하고, 차이(종차 spezifischer Unterschied)는 비교 대상으로서의 최근류를 전제한다. 정신과학의 본질을 규명하기 위해 우선 고려해야 할 정신과학의 최근류는 무엇인가? 정신과학의 역사는 과학을 유개념으로 하고, 자연과학을 최근류로 하여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본질적 차이를 물어온, 그리고 이 차이에서 정신과학의 독자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해 온 역사이다. 따라서 정신과학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자연과학과의 차이로부터 규정되어 왔다. 물론 정신과학의 이와 같은 자기이해의 배면에는 이른바 두 과학간의 "동등성 Ebenb rgigkeit"이 전제되어 있다. 즉 과학의 내부에는 두 개의 하위과학이 있는데, 그 하나는 자연의 일양성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과학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간의 역사적-사회적 현실성을 대상으로 하는 정신과학이다. 그리고 이 두 과학이 각각 자신의 대상에 적합한 방법을 - 설명과 이해를 - 취하는 한 (vgl. GS. V, 143f.), 두 과학은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과학론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 이 《두 과학》이라는 개념이야말로 G.B. Vico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의 정신과학에 관한 대부분의 철학적 담론을 주도해온 근본도식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방법론적 과학이원론(methodologischer Wissenschaftsdualismus)이라는 도식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나의 물음은 다음과 같다: 정말 두 개의 과학이 있는가?; 자연과학이 과학으로 여겨지는 바로 그 의미에서 정신과학 역시 과학일 수 있는가?; 두 개의 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과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과학 그 자체는 과학이 아니고, 그보다 더 폭 넓은 의미에서의 인식 내지 지의 (episteme, Wissen) 일반개념이 아닌가?


이하에서는 정신과학에 대한 가다머의 입장을 중심으로 정신과학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수행코자한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정신과학의 정체성은 자신을 자연과학에 대비해 독자적인 방법을 소유한 하나의 자립적인 과학으로 정립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방법(Methode)이란 과학의 특성인데, 정신과학은 과학이 아니며 (VII/383),,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기" (I/13) 때문이다. 정신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다른 어떤 과학이 아니라, 과학과는 다른 어떤 인식이다. 여기서의 다름은 매우 철저한 의미로 쓰인 것이다. 즉 과학이라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 두 개의 상이한 하위과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식(Art)과 의도 (Absicht), 그리고 학문적 지위(Rang)에 있어서도 상이한 두 가지의 인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태를 정확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과학적 (szientische) 인식이며, 나머지 하나는 정신과학적 (geisteswissenschaftliche) 인식이다. 이 둘은 물론 인식론적 지위와 지적 기원을 달리한다.


전자가 17 세기의 자연과학의 붐과 R. 데카르트 이후의 방법적 이상에 고취된 비교적 현대적 현상이라면, 후자는 "고대 이래로 고양되어온 특수한 인간적 의미에의 [진리]요구의 정당화"(I/494)라는 과제에 의해 추동되어 온 오랜 전통의 산물이다. 이 전통은 서구의 지성사를 통하여 다양한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예를 들면 "형성개념의 전통과 … 인문주의의 전통" (I/23, vgl. auch 14f.), "낭만주의와 독일관념론의 정신" (II/38), "헤겔의 정신철학" (VII/383, X/181 u. UF. 132f.), 그리고 고대 희랍의 "실천적 학문 scientia practica"(II/433)의 이념 등. 이상의 단초들은 가다머가 자신의 저작의 여러 곳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정신과학의 뿌리들이다. 나는 이 뿌리들이 최소한 다음의 공통점에 의해 묶여 있으며, 그리고 바로 이 공통점에서 - 자연과학과의 유비에서가 아니라 - 정신과학의 본질이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주어진 객체에 대한 주관(오성)의 관찰, 파악, 조작과 다룸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경험과 삶의 실천, 그리고 이를 통한 인간 정신의 형성과정이 문제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 다소간 거칠게나마 - 두 인식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이 "우리의 활동을 통한 대상영역의 조작"을 문제시하는 "지배지 Herrschaftswissen"의 성격을 띤다면, 정신과학은 "역사적, 문화적 전승에 의해 매개되어지는, 인간 자신에 대한 지식"(IV/265)이다. 이러한 인식은 매개지(Vermittlungswissen)라 불리울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는 주어진 객체에 대한 인식주관의 대상적 파악이 문제이지만, 후자에서는 죽은 객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너(Du)의 구체적 경험, 그리고 이 타자경험을 통한 자기매개의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가다머는 전자의 절차를 술어적으로 "방법"이라 칭하고, 후자의 과정을 "이해"라 부른다. 그러나 이 때의 이해는 설명(이라는 방법)에 대립된 이해가 아니라, 넓은 의미의 대화, 정확히는 인간적 현존재의 타자경험 일반의 형식을 의미한다. 정신과학의 수행방식(Vollzugsweise, und nicht Methode)은 통제된 탐구절차로서의 방법이 아니라, 삶의 실천, 즉 타자경험의 실천이며, 이를 통한 자기인식의 확장과정으로서의 이해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라는 것이 이 가장 일반적 의미의 타자경험(이해)의 한 결성적 양태이고, 바로 여기에 근대과학의 기초가 놓여있다는 것이다. 즉 방법은 인식에로의 보편적 통로가 아니라, '타자를 하나의 주어진 객체로 간주하는 한에서의' 근원적 타자관계의 변양이며, 과학 또한 인식의 보편개념이 아니라, 이 변양된 타자관계를 통해 얻어진 변양된 인식, 즉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의' 타자에 대한 이론적 (betrachtende) 인식일 뿐이다. 가다머의 정신과학론의 핵심은 방법은 근원적 타자관계로서의 이해의, 그리고 과학은 근원적 인식으로서의 정신과학적 인식의 한 파생태 (Derivat), 그것도 결성적 양태(defizienter Modus)라는 것이다.


이하의 글은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본래적 타자경험]과 이것이 [대상화라는 관심에 입각해 변질된 파생태] 간의 관계로 보고, 이를 언어철학적으로, 즉 말(verbum)의 본성으로부터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접근이 필요한 것은 가다머가 정신과학의 수행양식으로 인정하고 있는 이해가 물음과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대화, 즉 언어적 타자경험 이상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적 현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타자경험의 형식으로서의 언어적 대화는 - 바로 이를 통해 근원적 정신과학적 인식이 얻어지는 것인데 - 어떤 탈락과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과학적 인식(진리의 결성태)의 처소로 바뀐다. 그러므로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는 언어철학적으로 볼 때 다음과 같이 규정될 수 있다: 과학이 주어진 대상에 대한 방법적 탐구활동의 결과로서의 진술(logos apophantikos)들의 체계라면, 정신과학은 이 같은 죽은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언어 - 즉 제 3의 중성적 대상에 대한 말이 아니라, 바로 너(Du)에게 던져지는 말(Anrede)들의 오고 감의 실천, 언어적 대화의 수행이며, 이를 통한 상호적 매개와 형성의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일상적 대화의 말이 - 흔히 생각하듯이 - 과학적 엄밀성을 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과학의 표현형식인, 진술이 이 근원적 말의 변양이라는 것이다. 즉 [대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기술 betrachtende Beschreibung]이라는 관심에 이끄리는 오성이 근원적, 본래적 말에서 그 역사성과 현실성을 탈락시킬 때 과학의 중성적 언어로서의 진술이 생겨난다. 따라서 진술은 진리의 본래적 처소가 아니라, 다만 진리의 결성적 양태로서의 과학적 인식의 처소일 뿐이다. 그리고 그 근거에는 이들의 본래적 모태로서의 상호적 대화의 언어와 정신과학적 인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이하의 논의는 다음의 단계적 과정을 거쳐 진행될 것이다. 우선 정신과학의 본질에 대한 반성은 자연과학과의 유비를 통해 수행될 수 없다는 사실, 즉 방법론적 과학이원론의 부당성을 보이고 (II 장),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가 본질상 존재론적 우선의 관계임을 일단은 (정신과학적) 진리와 (자연과학적) 방법의 관련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III 장), 나아가 이를 대화의 언어로서의 던지는 말(Anrede)과 대상에 대한 말로서의 진술(logos apophantikos)에 전용하여 구체화 시킨 후 (IV 장), 끝으로 정신과학의 문제가 본질상 이론적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실천의 문제임을, 따라서 정신과학은 그 본성상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철학 자체임을 밝히고자 한다 (V 장). 출발점은 물론 《두 개의 과학》이라는 개념적 혼란에 대한 정리 작업이다.


II. 정신과학의 위기와 방법론적 왜곡


오늘날 정신과학의 위기(Krise der Geisteswissenschaften)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실은 이 위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대 자연과학의 성공적인 출범과는 대조적으로 이 학문은 초창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단 한 순간도 "안전한 학문의 길"을 걸어본 적이 없었고, 늘상 과학성의 위기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늘 동일한 위기상황 속에서 과학으로서의 정신과학에 대한 다양한, 그러나 허망한 자기방어가 반복되어 왔다. 심지어 정신과학의 역사는 정신과학의 위기의식의 역사로, 그리고 이 위기상황에서 행해진 자기변명의 역사로 기술될 수 있을 정도이다. 이 위기의 기원과 본성은 무엇인가? 테제의 형식으로 나의 입장을 먼저 밝히자면 정신과학의 위기는 과거에도 없었고 오늘날에도 없다는 것이다.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정신과학 자체의 위기가 아니라, 잘못된 자기인식을 갖고 있는 정신과학자들의 위기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위기의 기원이 정신과학의 내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외부에 있다는 점이다. 즉 위기를 언급하는 자들은 정신과학자들이 아니라, 항상 실증주의자들이었고, 이를 통해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은 정신과학 자체가 아니라, 잘못된 자기인식을 갖고 있는 정신과학자들이었다. 문제는 자연과학의 현실적 성과를 근거로 한 실증주의자들의 공격 앞에 정신과학의 정체성은 너무도 쉽게 무너졌고, 그 결과 자연과학을 모범으로 한 정신과학의 자기변신이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기변신은 정신과학의 자기정체성의 포기를 대가로 해서만 얻어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초기의 정신과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D. Hume은 그의 {인간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도덕철학과 자연철학을 구별한 후, "자연철학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도덕철학 특유의 약점", 즉 이 학문의 영역에서는 실험과 관찰이 용이치 않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흄은 "이러한 학문에서도 인간의 삶에 대한 신중한 관찰로부터 실험을 수집할 수가 있으며, … 그 실험을 기초로 하나의 학문을 정립할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고, 동시에 "이 학문은 확실성에서도 조악하지 않을 것이며, 실용성에서는 다른 어떤 인간 이해보다 훨씬 더 우수할 것"이라는 기대를 표하고 있다. 같은 생각이 J.S. Mill의 {논리학 체계}의 제 6권 {On the Logic of Moral Science}에서 반복되고 있다. 일단 밀은 "인간의 사고, 느낌, 행위"에 관한 과학으로서의 "도덕과학 moral science"을 자연과학으로부터 구분하고, 이에 대한 논리학을 언급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두 개의 과학을 인정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밀은 "마음의 법칙과 … 사회의 법칙"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워낙 다양하고 복잡하여 … 행위자들이 놓이게 될 상황 전체를 예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각 개인의 사고, 느낌, 행위의 양식이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쓰고 있다. 즉 외적 자연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내적, 정신적 영역 역시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있고, 따라서 이 두 대상영역은 모두 인과적 설명이라는 한 가지의 방법에 의해 탐구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본질적 차이, 즉 다른 방법을 요구할 정도로 본질적인 차이가 아니라, 다만 일양성(uniformirty)의 정도차일 뿐이고, 이 차이 역시 지양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은 아니다. 과학으로서의 도덕과학이 채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과적 설명이다. 이렇게 자연과학적 방법에 입각해 진행된 인간연구는 "이론적으로 봤을 때는 완벽한 것이고, … 실천적 목적을 위해서도 … 충분히 정확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학적 탐구방법이 "일반화되어 … 도덕과학에 적용"되어야 하고, 도덕과학은 궁극적으로 자연과학에로 환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도덕과학은 "과학의 얼굴에 묻은 얼룩[이라는 자신의 오명]을 blot on the face of science 결코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끝없는 과학성의 위기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두 위대한 경험론적 실증주의자의 위협에 대한 딜타이의 반응은 일단은 신경질적이다.

"편견에 가득찬 독단적 경험론을 대신할 참된 경험적 과정은 오로지 독일에서만 나올 수 있다. 밀은 역사적 교양이 부족했던 탓에 독단적일 수밖에 없었다" (GS. V, LXXIV).

딜타이는 흄과 밀의 《하나의 과학》이라는 전략이 자연과는 본성상 다른 - 즉 정도에 있어서 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도 상이한 - 인간의 "정신적 삶을 …훼손하는" (GS. V, 4)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인간을 자연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 자신으로부터 파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이는 "삶을 그 자체로부터 이해해야" (GS. V, 4; 강조는 필자) 한다는 그의 철학의 모토에 잘 반영되어 있다. 잘 알려진 데로 여기서 사용된 개념, 이해는 딜타이가 자연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설명에 대립해 정신과학의 고유한 방법(Methode)으로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으로서의 해석학은 정신과학의 방법론으로 구성된다 (vgl. dazu GS. V, 331, 333f., VII, 191f. u. 217f.). 여기서 딜타이의 의도는 명백하다. 밀의 고전적 통일과학주의의 위협에 대해 정신과학 고유의 방법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구획짓는 것, 즉 방법론적 과학이원론을 정립하는 것이다 (dazu vgl. GS. V, 265, 274, 317f., VII, 79, 81, 86, 196 u. .). 딜타이에 대한 나의 비판적 물음은 '[하나의 방법, 하나의 과학]이라는 실증주의자들의 공세에 대한, 딜타이의 [두 개의 방법, 두 개의 과학]이란 대응이 과연 정신과학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었는가?'하는 것이다.


딜타이는 자신의 정신과학론의 근본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 바 있다: "어떻게 한 개별성이 자신에게 감성적으로 주어진 생소한 개성적 삶의 표출을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이해의 수준에로 이끌어 올릴 수 있는가?" (GS. V, 334; 강조는 필자) 여기서 이해는 일단 인식의 객관성의 이상에 의해 고무되고 있다 (vgl. GS. V, 331f. u. VII, 137f.).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 바로 근원적 체험의 반복으로서의 추체험이다. 객관성과 반복가능성(Nachvollziehbarkeit) - 이 둘은 딜타이에 있어서의 과학적 방법으로서의 이해를 지탱하는 두 기둥이다. 문제는 이 두 가지가 곧 근대 자연과학의 본질적 특성의 반영이라는 점에 있다. 가다머는 데카르트의 확실한 인식의 이상에 고취된 근대 자연과학의 특성을 "《방법》과 《객관성》의 개념"(X/191)으로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객관적'이란 물론 주관이 아니라 객관에 관련하는 인식의 태도를 의미한다 (vgl. II/410). 그리고 이것은 딜타이가 정신과학자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정신과학적 탐구자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생겨난 전제들에 의해 … 제약되어서는 안 되고, … 전제 없는 탐구를" (GS. VII, 137) 수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대상은 단지 그것이 속해있던 전체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학자는 주어진 대상(Text)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모든 주관적 왜곡의 요소들을 - 이것은 물론 인간실존의 근원적 역사성 때문에 생겨나는 것인데 - 제거하고, 그 객관을 객관 자체가 속해있던 지평으로부터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객관적 이해의 이상은 딜타이로 하여금 모든 주관의 구성과 종합을 배제하고 객관을 있는 그대로 (das Objekt, wie es ist) 받아들이게끔 하는데, 이러한 절대적 수용성의 태도는 바로 실증주의의 고전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딜타이는 이 둘[자연과학과 정신과학] 사이에 어떤 참된 공통성을 감지하고 있었다. 관찰의 주관적 우연성을 넘어선다는 것은 실험적 방법의 본질이며, 이것에 힘입어 자연의 법칙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 진다. 정신과학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과학자는] 자신의 고유한 입장의 주관적 우연성과 그에게 접근 가능한 전승을 방법적으로 넘어서기를 추구하여야 하며, 이를 통해 역사적 인식의 객관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I/240).

정신과학적 인식의 방법적으로 통제된 객관성이라는 문제에 관한 한 딜타이는 근대 자연과학과 실증주의의 노선을 그대로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더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가 정신과학의 방법으로 제시한 이른바 [추체험]으로서의 이해의 개념이다. 방법이란 무엇인가? Methodos란 '뒤에', '후에', '나중에'를 의미하는 meta와 '길', '통로'등을 의미하는 hodos의 합성어이다. 이 개념은 어떤 길을 걸어갈 수 있음과, 그리고 나중에 다시 걸어 갈 수 있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근대 과학의 형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 방법의 사고이다. 방법의 개념에 의해 규정된 인식의 이상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인식의 길을 우리의 통제하에 걸을 때, 이 길을 다시 걷는 것이 항상 가능해야만 한다. >Methodos<란 >다시 걸어가는 길 Weg des Nachgehens<을 의미한다. 누군가 걸어갔던 것처럼 항상 다시 걸어갈 수 있음 (Immer wieder Nachgehen-k nnen, wie man gegangen ist) - 바로 이것이 방법적인 것이며, 과학의 [탐구]과정을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이다" (II/48).

이러한 반복은 딜타이의 이해개념의 핵심을 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란 근원적 체험의 길을 뒤따라 걷는 추체험(Nacherleben)이며, 동시에 텍스트 형성의 근원적 길을 다시 걷는 추형성(Nachbilden)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GS.VII, 214 참조). 이는 이해는 "작용과정의 [근원적 체험과 표현과정의] 역조작 eine dem Wirkungsverlauf inverse Operation"(GS.VII, 214)이라는 딜타이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 적어도 내게는 - 딜타이가 근대 자연과학의 방법적 이상에 상당히 충실했다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간접증거로 보인다. 자연과학자는 그의 탐구 대상에 나타난 사태가 (자연의 법칙성이) 적절한 조작과 통제를 거쳐 실험실에서도 반복될 것을 기대한다. 딜타이에 의하면 정신과학자 역시 자신의 탐구 대상(역사적 전승)에 나타난 사태가 (근원적 체험내용이) 자신의 탐구공간(해석자의 정신) 속에 반복하여 구현될 수 있는 방법적 통제와 조작을 꾀한다.


반복, 그리고 이 반복을 가능케 하는 주관의 조작과 통제(방법)는 근대과학과 딜타이가 함께 지향했던 보편타당한 인식의 가능조건이다. 다시 말해 지금, 여기에서 발생한 사건은 -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넘어 - 언제라도, 그리고 어디에서나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반복을 가능케 하는 주관의 조작과 통제의 흔적을 딜타이의 이해 모델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나의 생각에 의하면 이런 흔적은 딜타이의 체험-표현-이해의 삼각관계에서, 정확히는 '표현'이라는 개념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딜타이의 이해 모델은 본질적으로 체험과 추체험의 관계에 대한 모델이며, 그 요지는 근원적 저자의 체험내용은 해석자의 정신 속에서 반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해는 개념적 인식의 과정인데 반해, 체험은 전개념적 현실성이라는 것, 즉 양자는 불가공약적이고, 따라서 어떤 연결 고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때 도입되는 것이 바로 표현이다. 부유하는 현실성으로서의 체험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내 사라져 가는데 반해 (vgl. GS. VII, 194f.), 보편타당한 개념적 인식으로서의 이해는 이 사라져 가는 체험을 언제라도, 어디에서라도 반복해서 추체험할 수 있어야만 한다. 즉 체험은 표현 속에 고정되어, 보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해는 … 확실하게 각인되고, 명료한, [그리고] 사용가능한 정도로 윤곽 지어진 표현이 고정되어 있는 경우에만 성취될 수 있다. … 통제가능한 정도의 객관성이 보장되는 그런 기술적 과정[기술적 이해로서의 해석]은 단지 삶의 표출이 고정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가 항상 다시 그리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경우에만 성취된다" (GS. V, 318f.; 강조는 필자; vgl. auch VII, 231).

혹자는 딜타이에 있어서 표현의 해석학적 의의를 전개념적 현실성으로서의 체험과 개념적 인식으로서의 이해의 매개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의 생각은 훨씬 단순한데, 여기서 매개되어진다고 하는 두 항은 논리적으로 "갈등 Zwiespalt" (I/235 u. 246) 관계에 있는 것이고, 논리적 모순은 전혀 중재될 수 없어서 방치되거나, 또는 변증법적으로만 매개될 수 있다. 그러나 딜타이의 경우는 명백히 그 어느 것도 아니다. 나의 판단이 옳다면 딜타이는 보편타당한 인식의 이상을 위해 전개념적 삶의 현실성을 개념적 인식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 관찰의 대상도 아니고, "이성의 법정에 소환될 수도 없고", 또 우리가 결코 그 "배면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nichthintergehbar" (GS. VII, 359) 생생한 현실성으로서의 삶이 반복 가능한 인식이라는 관심에 이끌리는 딜타이의 오성에 의해 이론적 파악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 수반되는 하나의 전제는 대상화된 표현은 체험의 완전하고도 빈틈없는 대행자(Repr sentant)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이 표현이 위임자의 명을 충실히 대행하는 자일뿐 그 이상은 아니라는데 바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전승은 항상 원래의 저자 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 대상화는 물론 앞서 언급한 객관적 해석을 위해 해석자의 주관적 요소들을 제거하던 방법적 절차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자면 이런 대상화는 역사적 전승의 고유한 역사성과 현재성의 - 바로 이것의 경험에 정신과학의 고유한 과제가 성립하는 것인데 - 탈락과 사상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어진 역사적 전승은 - 가다머의 적절한 표현을 빌자면 - "해독되어야 할 zu entziffernder, 그리고 그 자신의 의미에 있어서 [정확히 표현하면 단지 mens auctoris로서] 파악되어야 할 텍스트"(I/244; 강조는 필자)이다. 이러한 텍스트는 "그것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 in dem, was er [uns] sagt" (I/396),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게 말하는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단지 거기에 쓰인 데로 in dem, was einfach da steht" (IV/15)만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면 그것은 하나의 사실(근원적 저자의 체험내용)을 자신 안에 보관하는 기호복합이지, 결코 말하는 전승으로서의 역사적 타자, 즉 현재지평의 매개자로서의 과거의 지평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다머의 정신과학론에 있어서 역사적 전승은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이다. 이 경험의 본질은 나와 나의 타자가 함께 나누는 대화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 있어서 매개되어지는 형성의 경험이다. 따라서 가다머가 생각하는 본래적 타자관계에 있어서의 역사적 전승은 침묵하는 "대상이 아니라, … 마치 하나의 타자처럼 자신의 입장에서 말을 걸어오는 … 참된 대화상대자인 것이다" (I/364). 그리고 나 역시 그때 그때마다 나에게 주어지는 그의 물음(Frage)에 나의 대답(Ant-Wort)으로 응해야만 한다 - 그것도 이 대답이 또 다른 하나의 되물음을 유도할 수 있도록…. 상호적 타자관계로서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 대화의 말을 - 즉 [단지 특정 개별성의 (근원적 저자의) 소유물로서의 텍스트가 아니라, "다른 기원과 증거들과 어울어 이룬 전승전체의 통일성"(I/345)으로서의 텍스트가 내게 던지는 말], 그리고 [내가 전승에게 던지는 말] -, "이 모든 주관적 계기들을 … 방법적으로 제거할 때", 역사적 전승은 "대상이 되고" (I/364), 역사적 전승과의 상호적 대화의 실천이어야 할 정신과학은 사실확정 및 원전비판의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 때에는 "역사적 경험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해독으로서의" (I/244) 정신과학만이 남게된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딜타이에 있어서 이른바 [이해되어야 할 삶의 표현]은 [역사적으로 매개되고 현재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역사적 전승]으로부터 - 객관적 인식의 이상을 위해 - 이것이 갖는 역사성과 현재성을 방법적으로 사상할 때 나타나는 결성적 양태이며, 또한 이 변양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정신과학은 [상호적 대화관계의 실천으로서의 역사적 경험]에서 상호적 매개성을 방법적으로 제거할 때 남게되는 추상, 즉 근원적 정신과학적 인식의 결성적 양태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추상화 과정의 근저에는 지금껏 살펴 보았듯이 근대 과학을 근본부터 규정해온 객관성과 방법의 이상이 자리잡고 있다.


딜타이의 의도는 자연과학과는 - 그의 말에 따르면 - 본질상 다른 인식인 정신과학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정신과학의 독자성을 추구하기 위해, 이 학문을 자연과학과 구분하고 있지만, 이 구획의 노력은 여전히 다시 "자연과학의 방법적 이상에 종속되어" (X/218) 있다는 것이다. 딜타이는 "경험의 역사적 본질과 과학의 인식양식간의 차이를 은폐하고, 정신과학의 인식양식과 자연과학의 방법적 기준간의 조화를 꾀한다" (I/244, vgl. UF. 138).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정신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도 "과학내재적 기능"(II/239)의 분석에 제한되고, "과학이론적 에소테릭의 틀"(X/181)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정당하게 제기된다: 정말로 정신과학이 자연과학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학문이라면, 왜 딜타이는 학 일반의 특성이 아니라, 근대 자연과학의 특성인 [방법]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이고, 정신과학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자연과학의 철학의 특성인 [방법론]으로 구상하였던 것일까? 정신과학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설명이 아닌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방법이 아닌 무엇]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때 정신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으로서의 해석학은 방법론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의 철학"(UF. 132)으로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정신과학의 정체성을 추구하면서, 이 정체성을 바로 자연과학과 자연과학적 방법에의 유비적 관계로부터 고려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과학의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오는 것이 아닌가? 학문의 위기에 처한 정신과학이 필요로 하는 것은 O. Marquard의 재미있는 표현처럼 "과학이론적 성형수술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로 향할 수 있는 용기"이다. 왜냐하면 정신과학은 과학이 아니며, 정신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 또한 과학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정신과학을 근대과학의 방법적 이상에서 해방시켜 (X/218), 원래 자신의 뿌리(근원적 타자관계의 실천)에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 질 수 있을 때, 즉 "과학의 얼굴에 묻은 얼룩"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신과학은 "은밀한 실증주의" (하버마스) 또는 "계몽주의의 완성"(I/280, vgl. auch 244)이라는 치욕스러운 이름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다.


III. 진리와 방법의 관계에 대하여


딜타이의 문제중의 하나는 삶과 과학,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를 전도시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 삶의 가능성중의 하나로 전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삶을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가 하면, 자연과학적 인식이 정신과학적 실천의 파생태 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신과학의 모형을 자연과학적 방법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나의 직관에 의하면 이렇게 전도된 관계는 가다머에 있어서 진리(Wahrheit)와 방법(Methode)의 관계를 살피는 중에 수정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다머에게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는 곧 (정신과학적) 진리와 (자연과학적) 방법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 장의 주제이다.


잘 알려진 대로 가다머의 주저 {진리와 방법}, 정확히는 이 제목이 포함하는 "와 und"라는 접속사의 본래적인 의미의 관련하여 그간 적잖은 논란과 오해들이 있어왔다. 그 중에서도 진리와 방법의 관계를 대립적인, 상호배제적인 관계로 해석하는 견해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대립적 해석의 배후에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을 이원화하여 대립시키는 정신과학 초기의 전통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J. Habermas는 이 저서의 제목과 관련하여 "가다머는 해석학적 경험을 방법적 인식 자체와 추상적으로 대립시키는 진리와 방법의 대결 Konfrontation을 오도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적고있다. E.D. Hirsch에 의하면 가다머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매개된 "중핵적" 진리에 어떠한 방법도 병치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의 구성은 "의도된 아이러니" 이상 다른 것이 아니다. 이 이외에도 적잖은 오해와 잘못된 제목 변경의 제안들이 있어왔다: "Wahrheit versus Methode", "Wahrheit contra Methode", "Wahrheit oder Methode", "Wahrheit ohne Methode". 특히 {진리와 방법}이 출간된 지 40년이 지난 후에 발간된 가다머 100회 생일기념 논문집에서조차 이런 오해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특기할 일이다. 물론 - Bubner가 적절히 지적하고 있듯이 - 이 모든 오해들에 대해 가다머 자신이 전혀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다머 자신의 저작들에서도 이러한 오해를 유발할만한 구절들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II/186f., 453 참조). 그러나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을 본질상 같은 위계에 놓인 인식들간의 대립으로 해석하는 모든 시도에 단호히 반대하며, 이를 "유치하고도" (II/453) "단순한 오해"(II/449)로 규정하고 있다.

"{진리와 방법}은 그 제목이 암시하는 대립을 결코 배제적인 것으로 (ausschlie enden) 의미하지는 않았었다" (II/238).

진리의 경험이 결코 방법의 배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진리란 "과학에 대한 비판적 심급이 아니며" (II/459), 따라서 "과학의 엄밀성의 정신과 … 결코 모순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다" (II/449). 심지어 가다머는 진리는 과학의 선이해의 해명을 통해 오히려 "방법적 작업에 간접적으로나마 기여할 수가 있다"(II/248, vgl. 450)고 쓰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정신과학적) 진리에 대한 철학적 해명이 마치 (자연)과학적 방법에 대한 과학론적 정당화를 제공하기라도 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준다. 그러나 같은 곳에서 가다머는 다음과 같은 명백한 제한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해석학적 반성이 그것이 지니는 과학에 대한 의미 속에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II/248). 진리와 방법은 대립된 것은 아니지만 - 이로써 [Wahrheit versus Methode], [Wahrheit contra Methode], [Wahrheit oder Methode]등의 주장들이 논박된다 -, 그렇다고 무관한 것도 아니라면 - 이로써 [Wahrheit ohne Methode]라는 주장 역시 논박된다 - 이 둘의 본래적 관계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가 유비적으로 추론해야 할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는 무엇인가?


가다머가 그의 철학적 해석학을 통해 정신과학에 대해 행하고자 했던 바는 그가 반복하여 명시하듯이 (vgl. I/1, 3, 478, 494, II/394, 427, 439ff., 446 u. X/436f.) 인식의 가능한 조건들에 관한 방법론적 정당화는 아니다. 그러나 철학적 해석학이 방법에 대한 간접적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음과 같은 사태 때문이다. 가다머는 인간적 현존재의 보편적 존재구조를 해명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 근원적 존재구조의 한 파생태가 바로 과학과 방법적 인식이다. 따라서 - 논리적으로 볼 때 - 보편적 존재구조의 해명은 과학론적 해명에 "또한 auch" (II/443) 타당하게 적용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의 가능한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문장들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 이하의 탐구는 정신과학을 단지 과학과 과학적 경험방식에만이 아니라, 인간적 세계경험과 삶의 실천 전체에 관련시킨다" (II/439); "우리는 단지 해석학적 선행조건에 있어서의 현대과학의 원칙뿐만이 아니라, … 우리의 경험적 삶 전체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II/228);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단지 과학의 관심사인 것이 아니라, 명백히 인간적 세계경험전체에 속한다" (I/1: 이상 모든 강조는 필자).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위의 모든 문장들에서 "nicht nur"라는 표현은 보이지만, 그에 뒤따를 것이 예상되는 "sondern auch"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장들은 모두 "방법뿐 아니라, 진리 또한"이 아니라 - 이 경우 방법과 진리는 등치관계에 놓이게 될 것이다 -, "방법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진리를"이라는 형태로 - 따라서 [근원적으로는 진리를, 그리고 다만 파생적으로만 방법에도]라는 형태로 - 표현되어 있다. 이런 미묘한 표현법에 이미 진리와 방법의 관계의 본성이, 즉 진리의 근원성과 방법의 파생성이 암시되어 있다. 일단 해석학적 반성이 방법에도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근원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I/1) 이 반성의 의미는 진리 자체를 향하고 있다. 철학적 해석학은 다만 방법론 내재적으로만 반성 가능한 방법적 인식의 가능조건이 아니라, "진리조건을, 즉 탐구의 논리 내부에 놓인 것이 아니라, 이를 우선하고 있는 vorausliegen 진리조건을" (II/450) 문제삼는다. 이러한 반성이 방법적 인식에도 타당한 이유는 단지 근원적 진리조건이 자신의 파생태로서의 방법적 인식의 조건을 - 물론 추상화와 결성화의 과정을 역행하는 방식으로 이겠지만 - 자신 안에 포함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방법에 대한 철학적 해석학의 반성이 다만 부차적 기능이라는 사실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진리와 방법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이중의 규정을 받는다: 방법은 그 자체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nicht nichts),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nicht alles). 가다머가 보이고자 하는 것은 결코 방법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니다. 왜냐면 방법은 명백히 특정 목적에 - 예를 들면 자연의 지배 (vgl. II/37, X/289f.) - 기여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단으로서의 방법은 항상 좋은 것"이다. 문제는 이 수단이 목적을, 이 파생태가 자신의 근거를 구축할 때, 다시 말해 방법이 자신을 진리와 동일시하고, 과학이 절대적 진리의 이름을 참칭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즉 가다머는 결코 "방법의 개념을 지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상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방법이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nicht nichts" (II/453, vgl. I/263f. u. II/37), 그렇다고 방법만으로는 "진리를 보장하기에 충분한 것도 아니다" (I/494: vgl. IV/265).

"과학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진리란 세계에로의 특정 태도에 관련한, 상대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는 결코 자신이 [세계태도의] 전체임을 주장할 수가 없다" (I/453).

따라서 방법에 대한 가다머의 입장은 방법 자체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라기 보다는 방법적으로 - 그리고 오로지 방법적으로만 - 정위된 과학주의(Szientismus)에 대한, 그리고 이 과학주의적 세계태도의 협착된 세계상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거부되어야 할 것은 그러므로 과학 자체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이상의 절대화" (II/452), 또는 "과학만능시대의 과학에 대한 맹신 Aberglaube wissenschaftsgl ubigen Zeitalters"(II/450, vgl. 452ff.)이다. 그런 한에서 방법이란 결코 전부도 아니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weder alles ncoh nichts). 과학을 지 자체와 동일시하는 과학주의도 문제이지만, 과학을 단순히 지양하는 반과학주의 또한 가다머의 입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의 파생성(Derivatcharakter)과 상대성(Relativit t)을 지적하고, 이를 통해 과학시대에 망각 속에 묻혀진 보다 더 근원적 인식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 근원적 인식이 바로 가다머가 [정신과학]이라 칭하는 것이다.


방법 내지 방법적 인식은 그러므로 "이해의 한 파생태일 뿐이다. 이는 사물적 존재자를 (Vorhandenes) 그의 본질적 몰이해성에 있어서 합법칙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과제에 몰입해 버린 [비본래적인] 이해"(I/263f., vgl. SZ. 153)의 형식인 것이다. 이렇게 방법적 인식이 이해의 (진리의) 한 형태로 간주되는 한, 진리는 방법에 대립되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또한 방법이 자신의 결성적인 파생태인 한, 방법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 관계는 근원과 파생태간의 존재론적 관계(das ontologische Verh ltnis von Ursprung und Derivat)이다. 그러므로 가다머에 있어서 진리와 방법의 관계는 - 이 관계는 곧 정신과학과 자연과학의 관계이다 - 다음과 같이 규정될 수 있다: 진리는 방법의 "외부에 au erhalb" (I/2, II/238), "저 편에 jenseits", "상위에 ber" (I/3 u. II/52) 또는 "그 배후에 hinter" (II/49) 존재한다. 즉 진리는 방법을 "앞서가거나 vorausgeht" (II/450), 방법에 " 앞서 있거나 vorausliegt" (II/50, 238, 439, 440 u. 454), 그것을 "넘어서 있다 bersteigt" (I/1 u. 3). 진리는 방법적 인식에 비해 보다 "더 근원적인 ursp nglichere" (II/427, X/437: 강조는 필자), 그리고 그런 한에서 전혀 "다른 방식과 다른 지위의 von anderer Art und anderem Rang" (II/37, vgl. 27, IV/265 참조) 인식이다. 반면 방법은 이 근원적 인식의 파생태, 그것도 정확히는 이 우선적 (prim r) 진리의 역사성을 추상시키는 중에만 이차적으로 (sekund r) 얻어질 수 있는 양태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방법의 존재론적 근거이며, 방법은 진리의 결성적 양태일 뿐이다. 존재론적으로 전자는 후자에 앞서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와 방법}이라는 제목은 실은 "{방법에 앞선 진리 Wahrheit vor der Methode}"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J. Grondin과 O. P ggeler의 주장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이미 M. 하이데거는 이 앞섬의 관계를 "존재론적 존재구조로서의 세계-내-존재와" (SZ. 62) 이 세계-내-존재의 "결성적" (SZ. 61) 양태, 즉 "사물적 존재자를 단지 이론적으로 betrachtend 규정하는" (SZ. 61),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이 세계-내-존재에 "기초를 두고 있는 양태"(SZ. 62)로서의 인식의 관계로 (SZ. 61 참조) 해명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진리와 방법, 그리고 이로부터 유비적으로 추론될 수 있는 정신과학과 과학의 관계는 하이데거에 있어서의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의 관계에로 번역되어 설명될 수 있다. 즉 존재적으로는 (정신과학적) 진리가 방법적 확실성을 결하는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 봤을 때는 진리에서 삶의 실천의 역사성이 사상될 때, 방법과 과학적 인식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존재론적 앞섬의 관계는 물론 여러 문제의 맥락에서 달리 표현될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학적 "Als"와 진술적 "Als"의 관계이다. 즉 "돌아보며 이해하는 해석의 근원적 《Als》" (SZ. 158, vgl. 157), 존재론적 해석학적 《Als》가 "사물적 존재자를 단지 보여지게 한다는 구조로 중성화되어" (SZ. 158) 버릴 때, 해석학적 《Als》의 한 "변양"(SZ. 157, vgl. 158 )으로서의 진술적 《Als》가 나타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의 관련을 언어철학적인 차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즉 해석학적 의미관계가 이론적 관심에 의해 변질될 때, 가다머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언어적으로 - 즉 물음과 답변의 오고 감을 통해 - 수행되는 대화가 과학적 참·거짓의 개념에 의해 재단될 때, 진리의 근원적 처소로서의 대화의 말은 과학의 언어, 즉 logos apophantikos로 된다. 그리고 이 진리치를 갖는 언어들, 단지 파생적인 의미에서만 언어로 간주될 수 있는 것들이 우리의 세계상을 주조하는 틀로 제시될 때, 그 때는 우리의 삶의 실천의 공간으로서의 전과학적 생활세계는 부식될 것이고, 거기에는 정신과학이 설 여지가 더 이상 없어질 것이다. 즉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정신과학의 위기가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로고스 아포판티코스란 정신과학의 수행방식으로서의 이해, 즉 상호적 대화를 방법적으로 배제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본질상 제 3의 대상에 대한 말(Wort- ber)이지, 대화상대자로서의 타자에게 던져지는 말(Anrede), 즉 대화의 언어가 아니다. 정신과학에 대한 철학적 반성으로서의 해석학은 Aristoteles와 현대의 논리적 원자론자들에 의해 진리의 처소로 인정된 로고스 아포판티코스(proposition)가 도리어 근원적 언어형식으로서의 '너에게 던져지는 말'의 파생태임을 보여야 한다. 이것은 정신과학의 기초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IV. 말과 진술


말이란 무엇인가? 말에는 물론 여러 형태가 있겠지만, 이 모든 형태의 근원이라 할 원래적인 의미에서의 말, 즉 말의 원형태는 무엇인가? 고대 희랍인들은 우리 현대인이 말이라 부르는 것을 Logos라 칭했다.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 단어로 신의 아들을 지칭했는데, 후에 로마인들이 이를 verbum이라 옮겼고, 다시 루터가 독일어로 Wort라 번역했다. 이 과정에서 로고스라는 개념은 매우 다양한 의미의 층을 얻게되는데, 가다머의 해석학이 말(Wort)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이 장구한 개념사가 늘 함께 고려된다.


희랍적 전통에 있어서 로고스는 일단 "apophansis, logos apophantikos이다. 이것은 문장인데, 그 유일한 의미는 apophainesthai, 즉 말해지고 있는 대상이 스스로를 보여주게 한다는 것" (II/193)이다. 그러므로 로고스의 일차적인 의미는 "제시하는 보여줌"(SZ. 33)이며, "말속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그것을 드러내는 데"(SZ. 32)있다.

"판단[logos apophantikos]은 오로지 존재자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는 사실에 입각해서만 재단될 수 있다. … 말 또는 말속에서 언표하는 지성은 오로지 존재하는 것이 말을 통해 있는 그대로 표현되게끔, 그래서 말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도록 한다는데 정위하고 있다" (II/47).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이상은 희랍의 로고스 개념이 본질상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 intellectus ad rem)로서의 진리기준에 충실한 '말'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로고스란 "이름(onoma)들의 결합인데, 그것도 뭔가를 제시하며 보여주는 결합"이라고 쓰고 있다. 로고스는 바로 이 이름들의 결합(logos als Zuordnung von onoma)으로서 진리의 처소로 인정되게 된다. 왜냐하면 로고스의 보여줌은 단순한 보여줌이 아니라, 보여줌이 검증되거나, 반증될 수 있는 한에서의, 즉 보여주는 말이 진리치를 가질 수 있는 한에서의 보여줌이기 때문이다.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한 로고스는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거짓이 된다. 즉 로고스의 진리여부를 결정짓는 유일한 기준은 사태와의 일치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는 한 로고스는 누가 말하건, 누구에게 말해지건 상관없이 초개인적 진리를 갖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듣기만 한다면 누구에게 듣건 게의치 않고 기꺼이 논박당할 용의가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누구에게 말해지는가?>는 여기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무엇에 대해 말해지는가?>, 그리고 <말해진 것은 사태와 일치하는가?>의 여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로고스란, 그것이 말해지는 구체적인 대화의 맥락(일자와 타자가 서로에게 묻고 대답하는 구체적인 대화상황)으로부터 추상화될 수 있는 "이론적인" (II/193, SZ. 157), "중성적인" 말이다. 이 말은 본질상 대상에 대한 말이기 때문에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간의 인격적 관계는 철저히 사상되고, 그 자리에는 진리의 기준으로서의 제 3의 사태(Sache)가 들어선다.


반면 고대 희랍인들과는 달리 말은 근본적으로 누구를 위한 말이라는, 즉 "누구에겐가 던져진다는 특성 Anredecharakter"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말의 본성을 헤아려온 전통이 있다. 이 전통에 의하면 말이라는 현상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해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말하고, 그리고 누구에게 말해지는가?>의 문제이다.

"사물의 본질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근원적인 말(Ur-Wort)은 로고스였다. [서양문명이 지닌] 다른 하나의 근원적인 말은 유대의 종교가 최초로 꺼냈던 말, 즉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직접 말을 건네는 인격적 신의 >말<이다" (IV/69).

이 말은 초개인적, 초시간적 사물의 질서(Kosmos)를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지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바로 너(Du)에게 "던져지는 말 Anrede", 바로 나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신의] 명령"이자 "요구"이며, 나에 대한 신의 "보복과 징벌, 그리고 약속"(IV/69)의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초개인적 [무엇에 관해서 Wor ber]가 아니라, 인격적인 [누구의 Wessen], 그리고 [누구에게 Wem]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스적 로고스가 "누구에게나 f r jedermann" (II/110) 무차별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말하고, 그런 한에서 "익명성"(II/54)에 의해 특징지어질 수 있다면, 기독교적 말은 모든 인간, 즉 익명적 인간 일반에게 타당한 말이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 듣는 자, 바로 그의 실존에 던져지는 말이라는 의미에서 이 말은 그 특유의 인격성에 의해 특징지울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적 로고스론에서와, 기독교적 말의 이론에 있어서의 언어적 대화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대조를 보인다: 그리스적 대화상황에서는 말(로고스)을 말하는 자와 듣는자(이를테면 소크라테스와 그의 대화상대자)로부터 분리해내는 것이 항상 가능할 뿐 아니라, 필요하기조차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이 또는 저 존재자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존재자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익명의) 진리가 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대화상황에서는 이러한 분리가 전혀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말(베르붐)은 무엇에 대한 말이 아니라, 나의 직접적 타자로서의 신이 바로 내게, 그리고 그때 그때 마다 오로지 나에게만 던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즉 이 말의 참됨은 사태와의 일치가 아니라, 그때 그때마다의 "나에 대한 현재성 Aktualit t pro me"(II/80)으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한다. 이런 직접적 대화에서는 대화상대자간의 합의가 마련될 수 있는 제 3의 사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내가 너에게, 그리고 네가 나에게 직접 던지는, 즉 직접적으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두 인격간을 오고, 가는 말(Wort als Frage und Ant-Wort)이기 때문이다. 제 3의 생소한 사태의 매개가 필요없는 일자와 타자간의 직접적인 대화 - 바로 이것이 가다머에 의하면 그 근원에 있어서의 언어의 존재방식이고, 따라서 말의 원형태이다. 즉 근원적으로 말(Wort)은 던져지는 말로서의 베르붐(verbum als Anrede)이다.


던져지는 말로서의 베르붐과 대상에 대한 말로서의 로고스 아포판티코스 - 이 두 말의 관계는 지금까지 본고가 정신과학의 지위와 관련하여 여러 차원에서 살펴온 근원과 파생태의 관계의 언어철학적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형식논리와 과학주의에 의해 양육되어온 추론적 (r sonierender) 오성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이다: 진술 내지 판단만이 보편적 "진리의 장소"(II/47)이며, 우리의 일상적 대화의 언어는 대화참여자의 개인적-주관적 의도가 혼재된 이른바 사이비 진술(Pseudoaussage)에 불과하다; 즉 "논리적으로 통제 가능한" (VIII/358) 순수한 언어, 대상에 대한 참된 말에 화자의 주관적 의도가 개입되면 그것은 비과학적인 말로 바뀐다; 이런 말은 사태에 대한 지(episteme)가 아니라, 단지 말하는 자의 의견(doxa)만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순수한 논리적 언어에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러한 언어파악이 말이 사용되는 실제의 과정을 전도시켜 파악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생각하듯 대상이 무엇이지에 대해 명료하게 [보여주고, 규정하고, 전달하는] (vgl. SZ. 154ff.) 논리적 (logisch) 언어에 말하는 자의 주관적 계기들이 개입되어 말의 본질이 변질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모든 말은 - 그것이 말인 한 - 일단 말이 사용되는 대화상황의 존재론적 계기들에 의해 "동기지워진 것"인데, 이 존재론적 (onto-logisch) 계기들을 방법적으로 제거하여, 말을 "그의 [순수한] 논리적 구조에 입각하여" (II/110) 관찰할 때, 최초로 진술이, 그것도 [근원적인 대화언어의 한 결성적 양태]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객관적 사태가 아니라, 화자의 내적 요구를 나타내는, 따라서 참이거나 거짓일 수가 없는 '부탁'과 같은 말을 로고스 아포판티코스와 구분짓고, 논리학의 - 이 경우 논리학은 곧 진리론인 것인데 - 영역에서 배제하였다는 사실에서도 명백히 보여진다. 이와 같이 대상적 파악과 파악된 것의 명료한 표현을 위해 실제의 말이 오가는 구체적 삶의 맥락을 조작적, 방법적으로 제거하는 것 - 바로 이것이 진술의 발생기재이다.


사물의 진리를 진술하고자 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말을 그것이 사용되는 "화용론적 연관으로부터 [방법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어야" (VIII/358) 한다. 즉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의도와 "모든 가능한 동기들의 관련으로부터 말을 떼어내어 (abl sen) 고립시키고 (isolieren)" (II/194f.), "하나의 규정된, 개념적 의미에 [사물의 규정성에] 고착시킴(festlegen)"(I/419)으로서 진술이 만들어진다. 즉 진술은 "근원적인 언어적 의미의 소외 Entfremdung" (I/III/382) 내지 "제거 Ausschaltung"(I/418)로서의 "추상작용 Abstraktion"(II/194, 193, IV/15, VIII/358)의 산물인 것이다. 이처럼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 필수적인 대화의 모든 구성요소들 중 대상 자체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것들을 대상의 객관적 파악을 위해 방법적으로 제거해 가는 점진적 추상작용 이후에 남는 논리적 잔여물 - 바로 이것이 진술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참된 말로서의 진술이 말의 근원적인 형식인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말로서의 대화언어가 대상화의 관심 때문에 상기 제거와 탈락,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 비로소 차후적으로 진술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술은 말의 "유일한 einzig" (II/46, 193) 또는 "기초적인 prim r" (II/46) 형식이기는 커녕, 오히려 말의 "수다한 형식들 중의 단지 가능한 하나의 특수 형태 eine blo e Sonderform"(I/457: 강조는 필자), "하나의 특수 경우 ein Spezialfall" (II/110: 강조는 필자), 또는 "한 측면 ein Aspekt"(VIII/358: 강조는 필자)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진술은 명백히 추상의 "이차적인 sekund r" (I/418, VI/8)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가다머에 의하면 모든 말은 그것이 말해지는 대화상황 (Gespr chssituation) 내지 동기연관(Motivationszusammenhang) 속에서 발화된다. 즉 말은 단순히 "그의 논리가(logische Valenz)에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II/110), 정확히 표현하자면 특정 "화용론적 연관속에서" (X/79, vgl. II/83) 던져진 물음으로, 그리고 동시에 이 물음에 의해 동기지워진 대답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모든 진술은 동기지워진 것이다. … 이러한 동기의 최후의 논리적 형식은 물음이다. … 그러므로 [어떤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닌 진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II/52).

그리고 이때 대답한다는 것은 물음이 원하는 정보만을 고립시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물음과 답변이 오가는 의미지평 전체를, 즉 대화의 상황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말은 말해진 것(das Gesagte)뿐 아니라, 함께 말해진 것 (das Mitgesagte), 말과 더불어 암시된 것 (das mit der Rede Angedeutete), 그리고 심지어 그 말 때문에 은폐된 것(das durch die Rede Verdeckgte)까지도 함께 말해준다 (vgl. II/178). 그리고 이 모든 의미론적 요소들을 포괄하고 있는 화용론적 "상황이" 바로 대화를, 즉 인간적 현존재의 타자경험 일반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이고도, "보편적인 관계"(II/53)인 것이다. 진술 또는 판단은 다만 이 보편적 관계가 대상세계의 관찰과 그것의 논리적 표현이라는 관심에 입각해 제한될 때 비로소 [근원적 대화언어의 한 파생적 "특수경우"(II/53)]로 가능해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파악이라는 과제에 몰두하는 추론적 오성은 이 파생적 언어가 (판단 내지 진술이) 보편적 언어형식(mathesis universalis)이라고, 즉 유일하게 가능한 진리의 처소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언어만이 대상에 대한 순수한 진술이고, 여기에 "[일상]언어적으로 구조화된 … 자연적 세계경험의 선입견"(I/457)이 섞여 들어가 비로소 진리를 왜곡하는 거울, 일상적 대화의 언어가 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다음의 두 가지 논점에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첫째, 이 입장은 명백히 - 지금껏 상론해 온 바 - 근원적인 말과 그의 파생태의 관계를 전도시켜 파악하고 있다. 둘째, 판단(Urteil)의 논리적 순수성에 대한 이 같은 믿음은 오히려 다음과 같은 하나의 "소박한" (IV/13) "존재론적 선-판단 Vor-urteil"(IV/15)에 근거하고 있다: 말에 앞선 존재 자체, 전언어적 사물의 현존에 대한 소박한 믿음.


일상적 대화의 언어에서 전과학적 요소들을 방법적으로 배제하는 추상작용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물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그리고 이 관심의 배후에는 말은 말에 앞서 (vorsprachlich) 이미 거기에 현존하고 있는 사물 자체의 존재상태를 반영하여야만 (논리적 진리치가) 참인 말일 수 있다는 대상지향적 (대응적 korrespondent) 진리설이 서있다. 그러나 말이란 무엇이고, 물이란 무엇인가? 말은 물 그 자체(paradigma)의 불완전한 모상(ikon)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주장이나, 물이 먼저 있고, 이 물에 대해 내적 표상이, 그리고 이 표상에 대해 말이 (음성과 문자가) 나중에 존립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 모두 하이데거가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른바 실체존재론의 입장들이다. 이 입장의 문제점은 언어적 세계분절을 통해 사물이 최초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사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따라서 [이해되어질 수도 없는] 전언어적 즉자존재(vorsprachliches Sein an sich)를 미리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물은 사물에 대한 언표(Sprechen)속에 [최초로] 현존한다. 즉 세계와 인간의 세계경험은 언표(Sprechen)와 상호적인 대화(Miteinander-Sprechen)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대상화의 과정에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대상화란 일자와 타자간의 의견(Einsichten)의 의사소통적 전달에 직면하여 [이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오히려] 객관성에 관련하는 태도이며, 모든 이에게 타당한 지식이 되기를 원하는 태도이다. 우리가 [대화를 통해] 상호적으로 교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은 말에 있어서의 세계경험의 분절이고, 함께 말함(Miteinander-Reden)이고, 우리의 세계경험의 의사소통적 침전물이다" (VI/7f.).

물이 말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물의 존재구조를 결정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말이 규정한 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물에 적합한 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는 물에 적합한 말은 단지 파생적으로만 말해질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의미있는 물(Ding, das verstanden werden kann)이란 단지 [말속의 물 Ding in einer Sprache], 또는 [말에 의한 물 sprachlich artikuliertes Ding]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에 대한 말 logos apophantikos]이란 표현 자체가 이미 말과 물간의 실재의 관계를 전도시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세계는 언어적으로 분절되면서 비로소 이해되어질 수 있는 (verst ndlich), 생각되어질 수 있는 (denkbar), 언표되어질 수 있는 (sagbar), 즉 우리 언어적으로만 사유하는 유한한 존재자에게도 "현실적인 wirklich" (I/423 u. X/270) 대상이 되는 것이지, 언어가 언어적 분절에 앞서 이미 현존하고 있는 대상들의 질서에 맞게끔 구성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모든 대상과 대상경험에 앞서 이 경험의 가능한 조건으로서 미리 주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전언어적 즉자존재란 "방법적으로 구성된 대상영역일" (VII/434: 강조는 필자) 뿐이고, [물에 대한 말]로서의 진술 또한 실재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허구에] 비추어" 고안해 낸, 역시 하나의 "허구, Fiktioin"(II/195), 즉 물 자체의 질서를 개념적으로 재현해내기 위해 방법적으로 구성된 수단일 뿐이다.


사물이 이렇게 말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물에 대한 언어를 구성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렇게 인공적으로 구성된 언어를 - 이것이 근원적 대화 언어의 "파생적 양태" (SZ. 157) 임에도 불구하고 - 학문의 이상적 언어로 간주하려는 시도 - 바로 이 두 가지의 전도된 시도 위에 또한 전도된 세계관으로서의 근대과학이, 초기의 정신과학이 모범으로 삼았던 방법적 과학이 근거하고 있다. 진술의 논리학과 근대과학은 하나의 공통의 규범적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주관에 대립해 현존하고 있는 대상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대상에 대한 중성적 기술로서의 진술]이라는 개념이나 [대상으로 간주될 수 있는 한에서의 세계에 대한 진술들의 체계로서의 과학]이라는 개념은 모두 대상에 관한 객관적이고도 보편타당한 (따라서 익명적인) 진리를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때의 진리가 표상과 사물의 일치를 의미하는 한, 여기에는 주관과 객관적 세계의 구분이 이미 전제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탐구상황은 명백히 정신과학자의 것이 아니다. 가다머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정신과학에 있어서의 진리는 늘 진술의 진리 "이상의 mehr als" (II/54, vgl. 482, III/382 u. VIII/38) 무엇이며, 정신과학자의 탐구상황은 주객대립이 아니라 상호적인 대화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의 성과를 부러워하여,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인식을 가능케하는 방법적 절차(추체험으로서의 이해)를 개발하거나, 또는 대상(텍스트)의 의미를 구성하는 언어가 아니라, 주어진 대상의 내용(mens auctoris)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진술로서의 언어(이를테면 딜타이에 있어서의 표현)를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면, 이 때 상호적 타자관계와 이를 통한 자기매개의 경험은 주객관계로 변질될 것이며, 정신과학은 주객의 대립을 고정시키는 이른바 외적 반성만을 일삼게 될 것이다. 이는 말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정신과학의 위기이다.


V. 철학으로서의 정신과학


{진리와 방법}의 최초의 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K.O. 아펠은 이 저작이 본질적으로 외적 반성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해석학적으로 구체화시킨 것 이상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나는 헤겔이 {본질논리학}의 서두에서 보여주고 있는 세 가지 반성의 형태와 가다머가 해석학적 경험을 분석하는 장에서 (I/352-368) 제시하고 있는 세 가지 타자경험의 유형이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타자관계인 한에 있어서의 자기관계"로서의 헤겔의 반성이나, 타자와의 상호적인 대화를 통한 자기형성의 과정으로서의 가다머의 이해 모두 궁극적으로는 적절한 타자관계를 통한 자기매개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립적 반성(setzende Reflexion)에 있어서의 타자(가상, Schein)는 다만 정립된, 비자립적 타자로 간주되며, 따라서 여기서의 타자관계는 일자(본질, Wesen)에 의한 타자의 일방적 정립(Setzen)의 관계로 구성된다. 타자의 자립성은 인정되지 않으며, 일자는 다만 홀로 존재하는 자신의 즉자적, 추상적 자기동등성에 만족하고 있다. 외적 반성( u ere Reflexion)은 자립적인 타자를 전제하기는 하지만, 이 타자는 본질상 일자의 외부에 미리 정립된 것(das Voraus-gesetzte, 또는 근거에 놓인 것 Hypo-Thesis)인 만큼, 일자는 자신의 외부에 실재성으로 주어진 타자에 다만 대립할 뿐이다. 그러므로 일자의 자기동등성은 오로지 타자와의 구분, 즉 비동등성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다. 최초로 정립적 반성과 외적 반성의 "통일"로서의 규정적 반성(bestimmende Reflexion)에 있어서 정립된 것이 아닌 자립적인 (따라서 정립적 반성이 아니다), 그리고 일자의 외부에 미리 주어진 타자가 아닌 (따라서 외적 반성이 아니다), "자기 내 타자"에 의한 일자의 자기매개가 가능해 진다. 즉 일자는 자신의 "타자태를 자신 안에 환수함으로서" 비로소 참된, 매개된, 반성된, 즉 "자신을 다시 회복하는 자기동등성"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반성은 일단은 일자와 타자의 (본질과 가상의) 상호적인 매개와 통일의 운동이지만, 동시에 타자의 매개에 힘입어 자신의 참된 자기동등성을 확보해 가는 본질 자신의 자기매개의 운동이기도 하다.


가다머가 제시하는 가능한 세 가지의 타자관계는 상기 반성운동의 구조에 내용적으로 대응한다. 첫째의 타자경험은 타자를 "자아관계의 방식으로, [즉] 자기관련성 Ichbezogenheit, Selbstbez glichkeit"에 있어서 파악하는 태도이다. 이때의 타자는 자립적 인격이 아니라, 일자의 "반성관계에" 비추어본 "변증법적 가상"(I/365)에 불과하다. 두 번째 것은 타자를 하나의 "대상으로" (I/364), 즉 주관에 대립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객관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이때는 외부에서 주어진 객관을 - 주관의 해석 없이 - 있는 그대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과제만이 경험의 본질을 이룬다. 세 번째의, "본래적인" (I/363) 그리고 가능한 한 "최고의" 바람직한 타자관계는 "타자를 타자로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das Du als Du wirklich zu erfahren", 즉 "타자의 요구를 흘려 듣지 않고 타자로 하여금 뭔가를 말하게끔 하는 … 개방성"(I/367)의 태도이다. 이 셋은 물론 각각 헤겔의 반성의 논리의 3 단계에 내용적으로 대응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는 [객관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경험]과 [외적 반성]이 특히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이것이 바로 근대과학과 근대과학주의에 근거한 방법적 정신과학론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외적 반성이란 "직접자와 자기-내-반성이라는 두 극단으로 구성된 추리이다. 이 추리의 중간에는 둘의 관계가 있다. … 이 관계의 한 쪽 부분은 단지 한 쪽 극단에게만, 그리고 다른 한 쪽 부분은 다른 극단에게만 귀속된다". 즉 타자는 본질적으로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일자에게는 "생소한" (I/468) 것이고, 따라서 일자와 타자의 관계는 일단은 대립, 그리고 대립된 상태에서의 외적 관계일 뿐이다. 바로 이 외적 관계가 이른바 객관적 인식이라 칭해지는 것이다. 즉 이렇게 "단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 자신에게는 생소한 직접자(dem Unmittelbaren)로부터 출발하고, 도리어 자신은 하나의 단순한 형식적 행위로만" 간주하는 태도, 또는 가다머의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모든 주관적 계기를 방법적으로 … 제거함으로서, 그것이 [대상이]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확실한 인식을" (I/364) 얻으려는 단순한 수용성의 태도 - 이것이 바로 [외적 반성]의, 그리고 [객관으로서의 타자에 대한 외적 경험]의 본질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 실증주의의 근본 정신이며, 근대과학의 방법개념의 기초를 형성한 것이라는 점이다.


'너'를 현실적인 '너'로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진 생소한 객관으로 변질시켜 파악하는 객관적 타자관계의 전형을 가다머는 역사적 전승에 대한 딜타이의 견해에서 발견한다.

"경험이 전적으로 과학에 입각해서만 정위되어 왔고, 따라서 경험의 내적 역사성이 전혀 고려되지 못했다는 것, 바로 이것이 딜타이를 포함한 지금까지의 경험이론의 맹점이다. 과학의 목표는 경험을 객관화하여 어떠한 역사적 계기도 경험에 섞여 들어가지 않게끔 하는 것이다. 방법적 조작의 방식으로 진행되는 자연과학적 실험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것을 정신과학에서는 역사적-비판적 방법이 가능케 한다. 두 경우에 모두 공통된 점은 근원적인 경험은 누구에게나 (f r jedermann, [d.h. anonym]) 반복될 수 있도록 그 객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I/352, 강조는 필자에 의함).

이러한 객관적 학문의 이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이른 바 [대상 Gegen-Stand]이라는 개념, 그리고 대상에 적합한 표상만이 진리라는 실체형이상학적 진리개념이고, 이 근본개념에 입각해 진행된 학문적 활동이 곧 [외적 반성] 내지 [타자를 하나의 주어진 객관]으로 다루는 수용성의 태도, 이른바 딜타이를 지배하고 있었던 과학적-실증적 탐구의 논리이다. 딜타이에 있어서 역사적 전승은 과거로부터 미리 정립되어 후대의 해석자에게 "주어지는" (GS. V, 334) 하나의 외적 대상이며, 추체험으로서의 이해라는 방법 또한 이렇게 외부에서 주어진 객관의 원래의 모습만을 그대로 복원하길 원하는 외적 반성에 불과하다. 이른바 객관적 인식의 미명 하에 근원적 타자경험에 전제된 타자의 타자성(Andersheit des Anderen)은 외적 대상성으로 변질되었고, 상호적 타자경험으로서의 이해는 일방적 수용과정으로서의 외적 반성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전승은 "대상이 아니다" (I/305). 그것은 침묵하는 객관이 아니라, 자립적인 매개자로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고 uns anspricht" (I/304), 우리에게, 즉 자신의 "타자에게 고유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I/364), 그 또한 하나의 자립적인 타자이다. 그리고 이 전승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 것, 이것이야말로 정신과학자에게 요청되는 적절한 타자경험의 태도이다.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하는 자는 애초부터 텍스트로 하여금 무언가를 말하게끔 하려는 태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해석학적으로 훈련된 의식은 텍스트의 타자성(Andersheit)에 대해 처음부터 수용할 수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수용성이 사상적 중립성이나 자기해체를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고유한 선견과 선입견의 뚜렷한 자기화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자신의 고유한 선견을 내면화하여 텍스트가 자신의 타자성에 있어서 스스로를 표현하게끔 하고, 또 이를 통해 사상적 진리와 고유한 선견이 서로 겨룰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I/273f. u. II/60f.).

그러므로 이해란 텍스트(타자)를 해석자(일자)의 반성의 산물로 간주하는 극단적으로 주관적인 정립적 반성도 아니고, 텍스트(타자)를 해석자(일자)의 외부에 미리 정립된, 따라서 일자와는 무관한 자립태로 간주하는 극단적으로 객관적인 외적 반성도 아니다. 이해란 "주관적인 것도, 객관적인 것도 아니며, 전승의 운동과 해석자의 운동이 뒤섞여 이루어가는 놀이"(I/298)이다. 전승이 "스스로 자신의 입장에서 von sich aus" (I/364) 말을 걸어 오는 한, 그것은 하나의 자립적인 타자이다 (따라서 정립적 반성이 아니다). 그러나 이 자립적 타자가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본질상 나의 실존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의 역사 속에 속해있는 한, 그것은 나의 타자이다 (따라서 외적 반성이 아니다). 즉 이 경우에는 타자가 나를 매개하고 또 내가 타자를 매개하는 상호적 대화, 그리고 이 대화의 부단한 반복을 통해 형성되어 가는 존재의 운동, 나와 나의 타자 모두 함께 실리어 있는 사상 자체의 운동이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정립적 반성이다). 바로 이 사상 자체의 운동,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저자의 것도 아닌, 공동의 사상"(I/392)의 자기규정 운동, 이 운동에의 "참여" (II/323), 그리고 이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해지는 어떤 인식 - 바로 이런 것들이 정신과학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적 반성을 일삼는 방법적 정신과학은 바로 이 "사상 자체의 활동"(I/467, 강조는 필자에 의함)을 [사상에 대한 활동]으로 착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입장은 존재를 대상화했기 때문이다.


정신과학적 이해란 대상적 파악(외적 반성)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이다. 즉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이해하고, 현재성의 빛 속에서 과거를 이해하는 (vgl. II/222), 현재지평과 과거지평의 상호적 매개의 경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 매개를 통한 자기매개의 경험이다.

"역사적 인식은 단순한 현재화는 아니다. 그러나 이해 또한 하나의 의미형상의 단순한 추구성, 무의식적 생산에 대한 의식적 해석인 것도 아니다. 상호이해란 오히려 무엇에 있어서 자신을 (sich in etwas, [타자에 있어서 일자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것은 대응적으로 과거가 우리에게 타당한 것으로 말하려 하는 것에 있어서 듣는 것이다" (II/55).

이러한 상호적인 대화를 통해 얻는 것은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다 (vgl. II/40).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기인식이 오로지 타자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정신과학적] 이해는 궁극적으로 자기이해"이고, 이것은 단지 "사상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Sichverstehen durch Sachverstehen]" (II/130). 왜냐면 근본적으로 유한한 존재자로서 우리 인간적 현존재는 "자신을 통일을 가능케 하는 고정된 기점으로 관찰하는 것을 허락 받을 수 없으며, 오히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움직여지는 것으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왜 정신과학에 있어서 타자의 매개가 중요하고, 타자가 단지 외적 대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는지의 이유가 있다. 역사적 전승은 이론적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의 반성의 매개자이고, 따라서 역사적 인식 또한 생소한 과거의 삶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그것에 비추어 본 나의 삶에 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나의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고, 나의 삶은 역사에 의해 규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로부터 전수된 텍스트는 근원적 저자의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해 말한다: "너의 삶을 바꿔라! Du mu t dein Leben ndern" (VIII/8). 이러한 종류의 인식은 과학적 참·거짓의 개념에 의해 재단될 수 없는 (vgl. II/43) - 따라서 진술에 의해서는 결코 적절히 표현될 수 없는 -, "인간의 형성과 도야 menschliche Bildung und Erziehung"(II/43)의 문제이다. 여기서의 형성은 전혀 계몽주의적 자기개발과 같은 의미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형성은 도리어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존재에로의 … 귀속성"(I/462)을 전제한다. 마치 상(Bild)이 원상(Ur-Bild)에 맞추어 형성(gebildet)되어야 하는 것처럼, 존재자는 존재자로서의 자신의 편협한 현재성을 벗어나 존재의 "보편성에로 고양되어야" (I/18 u. 22)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인간적 현존재는 자신을 대상(Gegen-Stand)에 대립된 기체(sub-strate)가 아니라, 자신의 타자의 타자로 간주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면 본래적인 정신과학적 경험이란 "인간 유한성의 경험"(I/363), 즉 자신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에 귀속되는 존재자라는 자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객관으로 간주되는 한에서의 전승에 대한 방법적 탐구가 아니라, 과거 전체 내지 존재 자체로 다가오는 "전승에의 참여", 그리로 이를 통한 인간적 현존재의 역사성에 대한 근원적인 통찰이 문제인 것이다. 타자와의 대화를 통한 자기인식, 그리고 이 자기인식을 통한 존재인식 - 바로 이것이 정신과학을 통해서만, 그리고 "어떤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예컨대 과학과 방법] 결코 도달할 수 없는" (I/2) 진리이다. 가다머에 있어서 철학은 방법 이전에 (vor) 놓여있는 이 같은 진리의 경험의 이론이고, 이 경험의 그때 그때마다의 실천이 곧 정신과학이다. 따라서 정신과학은 자연과학의 유산이 아니라 "철학의 유산에 속하고, … 그 속에는 철학이 … 숨겨져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정신과학은 오히려 "철학 자체의 문제이며, [또 언제나] 철학의 문제로 남게 된다" (I/13).

"정신과학을 [자연과학이 아니라] 철학과 관련짓는 일 - 이것은 단지 [정신과학의] 논리적 자기해명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이른바 정신과학은 오히려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하나의 문제이다. 자연과학에 대비하여 정신과학의 과학적 자립성을 논리적, 인식이론적으로 정초하고 근거놓기 위해 언급된 모든 것들은 정신과학이란 무엇이고, 그것은 철학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 이후에나 [부차적으로] 제기될 문제이다. 정신과학은 철학에 대해 아무것도 아니거나 또는 모든 것일 수 있다 Es kann nichts - oder alles sein" (UF. 131).

정신과학이 과학과 방법의 이상을 추구하고 따라서 자신을 단지 "과학의 이상의 불완전한 실현으로" (UF. 131) 간주하는 한,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정신과학이 "자연과학적 인식의 이상에 환원될 수 없는 자립적 학문으로" (UF. 131) 여겨지는 한, 그것은 철학에 대해 전부이다. 즉 철학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