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서 /담장을 보았다 /집 안과 밖의 경계인 담장에 /화분이 있고 /꽃의 전생과 내생 사이에 국화가 피었다 / 저 꽃은 왜 흙의 공중섬에 피어 있을까 / 해안가 철책에 초병의 귀로 매달린 돌처럼 / 도둑의 침입을 경보하기 위한 장치인가 /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나눈 자가 / 행인들에게 시위하는 완곡한 깃발인가 / 집의 안과 밖이 꽃의 향기를 흠향하려 / 건배하는 순간인가 / 눈물이 메말라 / 달빛과 그림자의 경계로 서지 못하는 날 / 꽃철책이 시들고 / 나와 세계의 모든 경계가 무너지리라
- 함민복,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중에서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
"종교의 실현(Religiöse Verwirklichung)"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경계선은 앎을 얻기에는 가장 좋은 곳이다." 나의 생각들이 나의 삶에서 전개되어 나온 과정을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마다 나는 경계선의 개념이야말로 나의 인간적, 지적 발전의 전체를 보여주는 적절한 상징이라 생각했다. 거의 모든 순간마다 나는 실존의 두 갈래 가능성 사이에 서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어느 하나에 안착할 수도 없었고 또 그 어느 하나에 순전히 반대입장을 취할 수도 없었다. 생각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런 입장은 사고를 위해서는 생산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있어서 어렵고도 위험한 것이며 끊임없이 결단을 요구하고 그리하여 두 갈래의 기로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이 입장과 그에 따른 긴장이 나의 운명과 나의 행적을 결정해 왔다.
두 기질 사이에서
아이의 성격 형성에 있어서 그 부모의 성격에 너무 큰 비중을 두어서 설명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아이들과 후손들에게 훨씬 충격적으로 되살아나고 때로는 그들 내면에서 깊은 갈등을 유발시키는 부모와 조상의 기질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이 보다 유전적인 것인지 혹은 유년기에 받은 영향에 의한 것인지는 아무래도 좋다. 그렇지만 나는 브란덴부르크(Brandenburg) 사람인 아버지와 라인란트(Rhineland) 사람인 어머니의 결합이 나에게 동부독일과 서부독일 사이의 긴장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동부 독일에는 우울함과 뒤섞인 사색적 경향과 의무와 개인적 죄에 대한 높은 의식, 그리고 권위와 봉건적 전통에 대한 강한 존중이 여전히 살아 있다. 서부독일은 삶에 대한 정열, 즉 구체성, 융통성, 합리성 그리고 민주주의 등에 대한 사랑으로 특징지어진다. 비록 어느 쪽 특성도 다른 쪽에 대해 배타적인 자질은 아니었지만 이 상충하는 특색들이 나의 내적, 외적 삶의 과정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부모를 통해서였다. 그 같은 부모의 유산이 가진 중요성은 그것이 어느 누구의 삶의 과정을 결정했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망을 마련해 주고 비판적 결정이 태어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있다.
이 두 유산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의 경계선적 위치는 이해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나의 아버지의 영향은 얼마만큼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더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나의 어머니의 세계의 특성은 나의 아버지의 그것과 부단하고도 깊은 투쟁을 거친 후에야 발현되곤 했다. 나의 체질 중 어머니의 측면이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파격이, 때로는 아주 극심한 파격이 필요했다. 고전적 체계와 조화는 나의 유산에는 없었다. 이 점이 왜 괴테의 고전적 특색이 내게는 낯선 것이었는지 그리고 왜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 고전시대보다 고전 이전과 고전 이후 시대가 내게는 더 흡수력이 강했는지 하는 것을 설명해 준다. 이 긴장은 또한 나의 역사해석의 바닥에 깔려 있는 어떤 전제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주는 바가 있다. 곧 자기폐쇄적 순환구조라는 고전적 전제보다는 앞으로 향해서,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는 노선을 택한 것이라든가 또 두 대립하는 원리들 사이의 투쟁이 역사의 내용을 구성한다는 생각, 그리고 진리는 플라톤이 가르친 바와 같이 불변의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쟁과 운명의 한가운데에서 발견된다는 역동적 진리관 등이 그것이다.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
네 살에서 열 네 살 나던 해까지 나는 엘베강에서 가까운 한 조그마한 읍에서 살았는데 나의 아버지는 그 곳 교구의 주임목사이자 감독이었다. 독일의 여러 지역의 소읍들에 있어서 전형적인 주민은 영농주민(farmer-burgher) - 읍에 거주하면서 제법 큰 농토를 경영하는 대체로 부유한 읍민 - 이었다. 이런 류의 소읍들은 순전한 시골 풍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집들은 딸린 마당과 곳간, 정원을 가지고 있으며 들까지는 얼마 떨어지지 않았다. 가축과 양들은 아침저녁으로 거리를 떼지어 지나가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중세시대와 마찬가지로 낡은 시민적 권리와 전통을 가진 순수한 소읍이었다. 마을 성문은 집과 상점이 빽빽이 늘어선 좁은 도로를 향하여 열려 있었다. 밤의 숲이라든가 침묵에 잠긴 들판, 그리고 졸린 듯한 마을이 주는 무서운 느낌에 대조적으로 분주하고 소란한 가운데 어딘가 칩거적이고 방어적인 마을 생리가 나의 어린 시절의 영상 중에서 가장 이르고도 인상적인 것의 하나다. 베를린을 방문하자 철로 자체가 내게는 반쯤 신화적이 것처럼 충격적이었는데 그 방문은 그 기억을 생생히 해 주었고 또 나로 하여금 때때로 큰 도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동경을 갖게 하였다. 그것은 그 후 여러 가지로 내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은 나의 글 "기술의 합리성과 신화성(Logos und Mythos der Technik)" 및 "상징으로서의 기술도시(Die technische Stadt als Symbol)"에 철학적으로 표현되었다.
도시에 대한 이 같은 끌림은 나로 하여금 기술 문명에 대한 낭만적 배척에 빠지지 않게 하였으며 지적, 예술적 삶의 비판적 측면의 발달에 있어서 도시가 가지는 중요성을 깨우쳐 주었다. 그 후에 나는 대도시에서만 가능한 움직임이었던 보헤미안주의에 대해 생동적이며 동정적인 이해에 도달했다. 나는 또한 도시의 환상적인 내적 활동성과 물리적 크기 양자를 심미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배웠다. 결국 나는 대도시에 집중된 정치적 운동과 사회적 운동에 대한 직접적 지식을 얻었다. 이 체험과 내게 있어서 이 체험이 가지는 지속적 효력 - 말하자면 도시의 신화 - 는 나의 책 "종교적 상황"이 널리 읽히게 된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에 대한 나의 인연은 여전히 강했다. 나의 생애의 거의 모든 큼직한 기억과 동경은 풍경과 흙과 기후와 가을의 논밭과 감자 냄새, 구름의 모양 그리고 바람, 꽃, 나무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후에 내가 독일과 남부 유럽, 서부 유럽을 여행 다니는 중에서도 땅에 대한 인상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자연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채 감명 깊게 읽은 쉘링의 자연철학은 나의 자연에 대한 감정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 되었다.
내가 여덟 살 되던 때부터 몇 주일씩(후에는 몇 달씩) 바닷가에서 지냈던 것은 나의 생애와 활동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유한의 위에 무한이 접경해 있는 경험은 경계선적 상황에 대한 나의 성향에 부합되었고 또 그것은 나의 사고에는 창조성을, 나의 감정에는 기반을 주는 한 상징을 나의 상상력에 가져다주었다. 이 같은 체험이 없었다면 "종교의 실현"에서 표현된 바와 같은 인간의 경계선적 상황에 대한 이론은 제대로 전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다에 대한 관조에서는 또 하나의 요소가 발견된다. 땅의 고요한 부동(不動)에 대조적인 바다의 다이내믹한 침노와 그 질풍과 파도의 열광이 그것이다. "대중과 정신(Masse und Geist)"이라는 글에서 "역동적 대중"에 대한 이론은 거친 바다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바다는 또한 역동적 진리의 바탕이자 심연으로서의 절대적인 것에 대한 교리와 유한한 것에 무한한 것이 뛰어드는 것으로서의 종교의 본질에 대한 교리에 필요한 상상적 요소를 가져다준다. 니이체는 어떠한 사상도 그것이 노천(open air)에서 생각된 것이 아닌 한 참이 아니라고 말했다. 나의 사상 중에서 많은 것들은 노천에서 배태된 것이며 나의 저작의 많은 부분은 숲 사이나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다. 도시의 요소와 시골의 요소 사이를 규칙적으로 갈마드는 것은 항상 내가 나의 삶에 있어서 없을 수 없으며 침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 부분으로 있어 왔고 또 지금도 남아 있다.
사회계급들 사이에서
소읍 생활의 특수한 성격은 어린 시절부터 내가 뚜렷이 볼 수 있었던 사회계급들 사이의 경계선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동무들을 사귀었는데 나는 나의 부모와 시장, 의사, 약사, 몇몇 상인들 등의 아이들에 의해 대표되는 상류계급에 대해 그들이 가지는 적의를 함께 하였다. 비록 나는 이 몇몇 선택된 부류의 아이들과 라틴어 개인교습을 받고 그리고 나중에는 그들과 함께 가까운 도시의 김나지움에 다녔지만 나의 실제 동무들은 초등학교의 소년들이었다. 그것은 나와 비슷한 사회적 수준을 가진 아이들과 상당한 알력을 빚게 하였고 우리는 우리의 학창시절을 통하여 외톨이들로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권계급에 속한다는 사실은 나로 하여금 매우 일찍부터 훗날 나의 활동에 매우 중요하게 된 사회적 죄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상류계급의 아이가 보다 낮은 계급의 아이들과 일찍부터 친밀한 만남을 갖게 될 때 거기에는 가능한 두 결과만이 있는 듯하다. 그 하나는 사회적 죄의식의 계발이요 다른 하나는 낮은 계급 아이들의 공격적 원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계급증오다. 나는 자주 그 두 유형에 직면해왔다.
그러나 사회문제와 관련된 나의 경계선적 상황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아버지의 교구에는 토지를 가진 오랜 귀족사회의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교회의 후원자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부모는 그들과 직업적, 사회적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장원(莊園)의 집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이런 가문의 한 후손이자 드문 지적 능력을 가졌던 한 사람은 나의 평생 동안의 친구가 되었다. 이 접경적 상황의 한 결과로 부르주아 계급(나 자신의 계급이기도 한)에 대한 나의 훗날의 반대는 사회주의가 가끔 그렇게 되었듯이 또 하나의 부르주아 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사회주의 속에 사회주의적 노선과 내적 연관성을 가진 봉건전통의 요소를 합류시키고자 시도했다. 내가 "종교 사회주의의 노선(Grundlinien des religiösen Sozialismus)"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전개한 바 있는 종교사회주의의 특수한 윤곽은 나의 그 같은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독일 사회민주당만큼이나 부르주아적이 되어버린 한 정당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고심스러운 결정이었고 단지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나의 젊은 시절의 이 같은 체험을 다룬 글 "힘의 문제 : 철학적 근본확립에 대한 고찰(Das problem der Macht : Versuch einer philosophischen Grundlegung)"은 나의 몇몇 친구들에 의해서까지도 오해되었는데 그 까닭은 그들의 부르주아적 평화주의가 이 특수한 경계선적 상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기서 다른 어느 곳보다 독일에서 그 자체의 특유한 전통을 가지고 별개의 집단을 이루고 있는 공직자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야겠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나 또한 학교 직원인 목사의 아들로서, 또 프러시아 대학의 전직 교수로서 이에 속한다. 프러시아 관료주의가 뜻하는 것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앞선 의무 개념의 우선성, 최고의 규범으로 평가되는 법과 질서, 국가권력의 중앙집권화 경향, 군사적 행정적 권위에의 복종, 그리고 "조직적 전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고집한다. 독일 철학이 철학적 이론에서나 정치적 실제에 있어서 고도로 개발된 체계를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탓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정당한 말이다. 이 프러시아적 이데올로기는 나의 생애와 활동의 여러 군데에서 반영되었는데 예를 들면 "지식체계에 관한 개설(Entwurt einer Systems der Wissenschaften)"에서나 또 내가 전시나 평시나 기꺼이 군사적, 행정적 권위에 복종할 뜻이 있었다는 점에서나 또 결정적인 것으로서 내가 그 정책을 광범위하게 반대하는 정당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데에서 그러했다. 확실히 나는 이 태도의 한계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나의 양심에 무서운 짐을 지웠으므로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결단을 가져왔고 또 전통이라는 새롭고 예기치 않았던 것의 출현 앞에서의 망설임이라든가 개인적 선택의 위기를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싸잡는(all-embracing) 질서를 열망하는 따위를 파기하게 했다.
내가 명백히 부르주아적인 삶에 대해 느꼈던 뿌리깊은 혐오감은 "보헤미아"라고 불리던 조그마한 사회적 집단에 대한 나의 애착에서 드러났다. 예술가, 배우, 신문인, 작가 등이 매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이 집단은 지적 열정을 순전한 비부르주아적 외관과 결합시켰다. 신학자이자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다시 한 번 경계선 위에 서게 되었다. 이 집단의 성격은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그 어떤 부르주아적 인습도 명백히 없었다는 점, 그리고 지적 급진주의 및 아이러니컬한 자기비판에 대한 놀라운 능력 등으로 특징지어져 있었다. 보헤미안들은 중산계급의 발길이 드문 카페나 아뜨리에나 유원지에서 만났다. 그들은 급진적인 정치적 비판에 기울어져 있었고 그들과 같은 계급의 회원들에게보다는 공산주의 운동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국제적인 예술가 운동이나 문예운동을 추구했다. 그들은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이었고 종교적으로는 급진적이었으며 또 낭만적이었다. 그들은 반군국주의적(反軍國主義的)이었고 니이체와 표현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봉건질서층이나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회원들은 아무도 "보헤미아"회에 반대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은 언제나 보헤미아회에 가입할 수 있었다. 회원으로 가입하는 대가로 그들은 보헤미안들에게 사회적 경제적 특권을 제공했다. 반대는 선입견과 암암리의 요구를 지니고 지적, 특히 예술적인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며 안정을 바라고 지식인을 불신하는 하층 중산계급인 소부르주아 계급(petit bourgeoise)에서 나왔다. 내가 한 번도 소부르주아 계급의 삶에 포함되어 본 적이 없으며 오히려 그 계급 출신의 많은 사람들처럼 명백한 오만함(만약 반의식적이었다면)으로써 그것을 물리쳤다는 사실은 나의 지적 운명과 인간적 운명을 틀잡는 것이었다. 지적으로 볼 때 소부르주아의 옹졸함을 극복하려는 투쟁은 끊임없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주었는데 그것은 이번에는 나로 하여금 지적이거나 사회적인 안주처를 찾는 데에 어려움을 주었다. 나는 중산계급의 반동적 혁명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 곤경을 겪기도 하였는데 그 반동적 혁명은 지식층을 강타하여 결국 파멸시키고 말았다. 낭만적인 중산계급 이데올로기(나찌즘)의 대표자들에 의해 지식인들이 악의에 찬 박해를 받았다는 것은 지식인들의 반쯤은 정당하게 중산계급을 배척한 데에 따른 반응이었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현실과 타협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경험한 어려움은 일찍부터 나를 공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열 네 살부터 열 일곱 살 사이에 나는 바깥 세계보다 더 진실해 보이는 상상의 세계에 곧잘 빠져들곤 했다. 때가 되자 그 낭만적 상상은 철학적 상상으로 변모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철학적 상상은 그 때부터 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에게 범주들을 결합할 능력을 주고 구체적 용어 속에 든 추상적 개념을 파악할 능력을 주고 광범위에 걸친 개념적 가능성들을 시험해 볼 능력을 준 점에서 그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상상적 능력이 상상의 산물을 현실로 착각하거나 체험과 이성적 비판을 소홀히 하거나 대화 가운데에서라기보다 독백 가운데에서 생각하거나 상부상조하는 학문적 노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하는 등의 위험을 가지는 한에 있어서는 의심스러운 가치였다. 다행이었든 불행이었든 간에 이 상상적 경향은 다른 몇몇 조건과 함께 내가 통속적 의미의 학자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20세기의 지성인들 가운데에는 "숙련자"라는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의 학자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 있었다.
상상은 다른 여러 방식들 중에서도 놀이의 즐거움에 있어서 스스로를 나타낸다. 이 즐거움은 나의 전 생애에 걸쳐서 게임에서나 스포츠(나는 그것을 놀이 이상으로 취급한 것은 없다)에서나 오락에서나 그리고 생산적 시간을 가져오면서 그것들을 인간 자유의 최고 형태의 표현으로 만드는 유희적 감정에서 내게 수반되었다. 놀이에 대한 낭만적 이론이나 니이체가 "장엄의 정신"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놀이를 좋아한 것이나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심미적 영역"이나 신화학에 있어서의 상상적 요소 따위는 내게 있어서 늘 매혹적인 것이면서도 위험한 것이었다. 아마 내가 더욱 더 예언자적 종교의 타협을 모르는 엄숙성에로 치닫게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위험을 자각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회주의적 결단"에서 내가 신화학적 의식에 대해 언급한 것은 국가주의적 이교주의가 심각성을 궁극적으로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겨냥한 항의였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내 자신 속의 정복되지 못한 신화적-낭만적 요소를 겨냥한 항의이기도 했다.
예술은 놀이의 최고 형태이자 상상의 순전히 창작적인 영역이다. 비록 나는 창작예술의 분야에서 아무 것도 내놓을 것도 없지만 예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의 신학적, 철학적 활동에 엄청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가정에서 나의 아버지는 복음적 목사직과 어울린 음악적 전통을 유지했다. 그는 몸소 작곡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 개신교도들처럼 그는 건축이나 미술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나는 예술적 체질이 아니었는데다가 나중에서야 시각예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나의 예술 동경은 문학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것은 김나지움 교육의 인본주의적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슈레겔이 고전독어로 번역한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특히 내게는 중요했다. 나는 거의 위험할 정도로 나와 햄릿같은 등장인물들을 동일시했다. 실존주의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오늘날 내가 본능적 공감을 갖는 것은 이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한 실존적 이해에 얼마간 맥락이 닿아 있는 것이다. 괴테나 또스또예프스키도 내게 이와 맞먹을 영향을 갖지는 못했다. 괴테의 작품은 키에르케고르적 의미의 경계선적 상황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는 듯했다. 비록 어른이 되어서 그 판단을 바꾸기는 하였지만 당시에 그것은 충분히 실존적인 것 같지 않았다. 한동안 계속되었던 햄릿에 대한 나의 매혹이 지나간 후에도 나는 다른 시적 공상의 산물과 나를 완전히 동일시하는 능력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나의 생애의 어떤 수주일이나 수개월을 뒤덮고 있던 특수한 무드, 말하자면 그 빛깔은 어느 한 문학작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곤 했다. 나중에 이것은 특별히 소설에서 입증되었는데 소설은 내가 자주 읽는 것은 아니었지만 열정적으로 읽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순수한 예술적 관조에 대한 갈망을 시원하게 채워주기에는 너무 많은 철학을 담고 있었다. 미술을 발견한 것은 내게 있어서는 결정적인 체험이었다. 그것은 일차대전 중에 전쟁의 공포와 추악과 파괴성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났다. 군대 책방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보잘것없는 복사판에서마저도 갖게 되는 나의 기쁨은 미술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에로까지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 연구로부터 예술 체험이 발생하였다. 나는 전시의 마지막 휴가기간 동안 베를린에서 있었던 보티첼리의 그림과의 첫 만남 - 그것은 거의 계시였다 - 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체험에 부수된 철학적, 신학적, 성찰로부터 나는 종교와 문화에 대한 철학의 몇몇 기본 범주들, 곧 형식과 내용을 계발하였다. 예술작품의 내용이 어떻게 형식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또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창조적 열광에 눈뜨게 해준 것은 표현주의의 양식이었는데 그것은 금세기 첫 10년 동안 독일에서 출현한 것으로서 전쟁과 몰이해한 하층 중산계급 취미와의 쓰라린 투쟁을 치르고 나서야 겨우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나의 계시이론의 골자를 이루고 있는 "깨고 나감(breakthrough)"이라는 개념은 이 성찰을 활용한 한 예이다.
후에 표현주의가 사라지고 새로운 사실주의가 대두했을 때 나는 그 새 양식의 연구로부터 "믿음 있는 사실주의(belief-ful realism)"라는 개념을 전개했다. "믿음 있는 사실주의"라는 생각은 나의 책 "종교적 상황"의 중심개념인데 그 책은 그런 이유로 인해 한 예술가 친구에게 헌정되고 있다. 서구 미술에 있어서 개인과 집단이 보여준 갖가지에 대한 나의 감명은 "대중과 인간성(Masse und Persönlichkeit)"라는 강의에 영감과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내가 고대교회의 해결책을 점차 좋아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초기 기독교 예술이 준 깊은 감명에 의해서 촉진된 것이었다. 고대 로마 바실리카의 모자이크 작품은 교회사를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알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림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조형예술의 양식과 소재(Stil und Stoff in der bildenden Kunst)"라는 항목에서, 또 1930년에 있었던 베를린 종교미술 전시회의 개막연설에서, "대상과 방법에 대한 학문의 체계(Das System der Wissenschaften nach Gegenständen und Methoden)"의 관련항목에서, 나의 종교철학(Religionsphilosophie)"에서, 그리고 "종교적 상황"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현대 회화에 대한 이러한 생동적 체험은 또한 호프만슈탈(Hoffmannsthal), 게오르게(George), 릴케(Rilke), 그리고 베르펠(Werfel)에 의해 대표되는 현대 독일문학을 이해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나는 릴케의 후기 시편들에 의해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심원한 정신분석적 사실주의라든가 풍부한 신비성 그리고 형이상학적 내용으로 충만한 시의 형식 등은 이 시편들이 내가 종교철학의 개념들을 통하여 추상적으로만 다룰 수 있었던 성찰에 이르는 구체적 수단이 되게 하였다. 내 자신에게 있어서나 내게 시를 소개해 준 나의 아내에게 있어서나 이 시들은 거듭거듭 읽는 한 권의 기도서가 되었다.
이론과 실제 사이에서
나는 내 자신이 실무적인 일보다는 지적인 일에 헌신해 온 생애를 살아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다른 어느 누구도 그 같이 생각할 것이다. 내가 무한한 것에 대한 생각과 처음 씨름한 것은 8살쯤이었다. 학교에서나 전(前)견신례 학습에서나 나는 그리스도교 교의학에 심취했다. 나는 철학에 관한 인기 있는 책들에 몰두했다. 내가 인본주의 전통에서 교육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어 및 그리스 문학에 열중했던 것은 이론적인 것에 대한 이 같은 기질을 강화해 주었다.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나타낸 바와 같이 순수한 명상만이 순수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논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했다. 전통적인 종교의 진실과 내가 내적 투쟁을 겪었던 것은 또한 나로 하여금 관조적 영역에 머무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인 삶에 있어서 명상은 존재에 대한 철학적 암시 이상의 무엇을 뜻한다. 종교적 진실에서 인간의 실존 그 자체는 백척간두 위에 있다. 그 물음은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이다. 종교적 진실은 실존적 진실로서 거기서는 이미 그것이 실천과 별개의 것일 수가 없다. 종교적 진실은 요한복음이 말하듯이 행동되어진다(acted).
그러나 명상에 대한 편중적 몰두는 내가 문학적 공상 속으로 달아나던 것과 마찬가지의 현실 도피에 근거해 있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내가 이 위험을 깨닫고 실천적인 일과 직면하자마자 나는 아주 열심히 그 일에 뛰어들었는데 그것은 나의 지적 추구에 있어서는 일면으로는 유익했고 일면으로는 유해했다. 나날의 업무에 이 같이 뛰어든 첫 번째 사례는 빈골프(Wingolf)라고 불리던 한 학생단체에 직접 참여한 것이었다. 그 단체가 가진 그리스도교적 노선과 현대의 자유주의적 이상 및 실천 사이에서 빚어지는 긴장은 그 단체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기꺼이 불타오르던 그 개인적 긴장과 마찬가지로 실제적 정책에 관한 많은 문제를 야기했는데 그것은 특히 내가 그 단체의 회장으로 있던 동안에 더욱 그러했다. 그리스도교적 공동사회의 원리에 대한 문제는 그 단체에서 너무나도 철저히 논의되어서 행동적 투쟁을 벌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의해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 기간 동안에 나는 종파적 신조와 같이 객관적으로 표방되는 성명의 가치를 이해하게 되었다. 만약 한 공동체가 주관적인 신념이나 회의를 넘어선 의미의 신앙고백적 기반을 가지면서 그것을 광범위하게 인정하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회의와 비판과 불확실에의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뭉치게 될 것이다.
나의 대학 친구들은 2년간의 교구 과정과 4년간의 서부전선 야전 군목 과정을 밟았다. 전후에 나는 교회 행정사무를 잠시 동안 맡아보았다. 실무적인 일을 하던 이 몇 년 동안 나의 이론적 연구는 비록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 문제에 뛰어든 이 기간은 이론적 삶을 향한 나의 근본적 몰두를 뒤흔들어 놓지는 않았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긴장은 혁명의 돌발로 더욱 고양되었다. 처음 얼마동안 나는 정치적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되었다. 1914년 이전의 모든 독일 지성인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정치에는 무관심한 편이었다. 사회적 죄악에 대한 우리들의 의식은 정치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 독일 제국의 몰락과 1차 대전 마지막 해의 혁명을 맞아서야 나는 그 전쟁의 정치적 배후가 되는 문제들, 곧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상관관계, 부르주아 사회의 위기, 계급간 갈등 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몰고온 어마어마한 힘은 신의 관념을 뒤흔들고 그 관념에 악마적 색칠까지 할만큼 위협적이었는데 그것은 전쟁에 대한 인간의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인간사회를 다시 뜯어고치고자 하는 소망을 통해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종교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요청이 메아리치자 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또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종교와 사회주의"에 관한 이론적 문제만을 다루었다. 내가 속해 있던 써클은 메니케(Mennike), 하이만(Heimann), 뢰브(Löw) 및 명백히 이론과 관련된 교수들의 집단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적은 정치적이었으며 우리는 이론적 입장과 때로는 마찰을 일으키는 실제적 정치의 문제와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다. 이 마찰은 종교사회주의가 교회나 정당이나 (또 우리가 교수들이라는 점에서) 대학에 대해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가운데에 반영되었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의 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그들의 목적은 교회정책의 변화와 이론적 토론을 통하여 교회와 사회민주당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것이었다. 나는 그 이론적 바탕이 적당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단체로부터 떨어져 있었으며 (변명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리하여 교회정책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때에 이론과 실제 사이에 있었던 긴장은 이론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비록 이로운 것은 아니었을지언정 완전히 해결되었다.
사회민주당에 대한 나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론적 바탕에 대한 노력에 이바지함으로써 그 당에 영향을 주기 위해 입당하였다. 이런 목적 아래에서 나는 "사회주의의 새 장(Neue Blätter für den Sozialismus)"이라는 잡지를 창간하기 위해 종교사회주의 단체의 친구들과 규합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독일 사회주의의 굳어버린 신학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종교적 철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다시 짜만들고자 희망했다. 나 자신은 실제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동료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잡지는 당시의 정치상황의 문제들에 휘말리고 말았다. 물론 나는 특별한 임무에 대해서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론적 작업은 정치의 목적에 이바지하고 정치운동의 개념적 표현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그에 또 한 번 손상을 받아가며 그들의 편을 들지는 않았다. 한편 실제 정치와의 그 비교적 드문 접촉마저도 나의 전문작업이 그토록 절실하게 요청하는 정신집중을 방해했다.
이론과 실제 사이의 긴장은 전후 독일 대학을 다시 조직하는 데 대한 논의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세기 때에는 고전주의의 낡은 인본주의적 이상이 학문의 전문화와 직업적 훈련에 대한 점증하는 질적 양적 요구에 의해 침식되었다. 학생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었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두루 전능한(well-rounded)" 인간이라는 고전적 이상을 치켜드는 척조차도 할 수 없었다. 궁색한 타협안들이 이상과 현실의 엄연한 괴리를 은폐시키고자 고안되었다. 1931년 11월 22일자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실린 나의 글에서 나는 이원적 교육계획안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빗발 같은 찬반양론을 일으켰다. 나는 한편으로는 전문학교의 설립을 주장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에 대한 옛 개념을 대변하는 전문적 훈련에 메이지 않는 교양담당 교수 제도를 주장했다. 양자는 상호 관련되어 있었지만 목적과 방법에 있어서는 달랐다. 교양과목 교수는 로고서(Logos)로서 인간 실존의 문제를 조명하는 임무를 띤 철학정신을 갖추도록 되어 있었다. 정치적이거나 종교적인 충성을 돌아보지 않는 철저한 질문도 있어야 했다. 동시에 교수의 교육철학은 당시 생활의 정신적, 사회적 문제들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어떠한 위대한 창조적 철학도 이 같은 요청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19세기에 있어서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철학이 학교와 "철학과 교수"의 도구로 나날이 전락해 가고 있었을 때에 그 나약성의 징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금세기가 정치적 수단으로 근본적인 질문을 억누르고 정치적 세계관을 강요하려고 애쓸 때마다 그것은 철학을 적지 아니 파괴한다. 오늘날의 "정치적 대학"은 실제를 위해 이론을 희생시킨다. 이것이 그 반대 유형과 마찬가지로 대학의 두 유형 모두에게 숙명이 되어 있다. 현금에 와서 이론과 실제 사이의 경계선은 미래 대학의 운명과 함께 문명세계의 인본주의 문화의 운명이 결정될 전쟁터가 되었다.
회고 : 경계선과 제한
정신적 물질적인 인간 실존의 많은 가능한 양태들이 이 책에서 논의되었다. 어떤 것들은 내 전기의 한 부분이면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있다. 또 상당한 부분은 나의 생애와 사상의 줄거리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취급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논의한 각각의 가능한 양태를 나는 다른 가능성과의 관계, 즉 그들이 서로 대립되는 길이자 서로 상관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한 관계성 속에서 논의해 왔다. 이것이야말로 변증법으로서의 삶의 각각의 가능성들은 저절로 경계선에로 흘러들며 또 그 경계선을 넘어 그 가능성들을 제한하고 있던 무엇과 만나게 되는 곳으로 흘러들게 된다. 많은 경계선 위에 서있는 사람은 동요와 불안정과 갖가지 실존의 내적 제한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평화와 안정과 완성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서 왜 내가 열거한 경험과 생각들이 결국 단편적이고 임시적일 뿐인지를 잘 말해준다. 이런 생각들에 명확한 형태를 주고자 한 나의 열망은 내가 신대륙의 풍토 위에 던져졌다는 경계선적 운명에 의해 다시 한 번 꺾어지고 말았다. 그 같은 일을 최선을 다해 완수할 수 있을 것인지는 나이 50이 가까워지자 더욱 불확실한 희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일이 성취되든 안 되든 인간의 행위의 경계선 - 이제 더 이상 두 가능성 사이의 경계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의 가능성을 넘어서 존재하는 것, 곧 영원의 손길에 의해 모든 유한한 것 위에 내려진 제한 - 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영원, 그것의 앞에서는 우리 존재의 한복판마저도 단지 한 변두리이며 우리들의 성취의 최고의 수준까지도 한 조각의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자 후기
20세기가 낳은 세계 최고의 지성,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1886년 독일 브란덴베르그의 슈탈체델에서 태어났으며 베를린 대학, 튀빙겐 대학, 할레 대학 등에서 공부한 후, 베를린 대학, 마르부르그 대학, 푸랑크푸르트 암 마인 대학 등에서 교수로 활약하다가 나찌 정권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다. 1933년 라인홀트 니이버 형제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이민온 그는 유니온 신학교와 콜롬비아 대학을 거쳐 1955년에는 하바드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교수했으며 그로 인하여 하바드 대학 내에 한때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시카고 대학을 마지막으로 1965년 79세의 나이로 별세한 그는 그리스도교적 전통에 서있었지만 한 종교의 폐쇄적 체계에 빠지지 않았으며 그의 철학적 깊이는 서구 정신사를 그 최고봉에 있어서 관철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의 실제에 걸맞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 있어서는 아직 그가 생존하고 있던 때부터 그를 주목하는 신학자나 철학자들이 있어 간간이 그의 저서가 번역 소개되었는데 여기에 번역 소개하는 그의 철학적 자서전 "경계선에서(On the Boundary)"는 아직까지 국내에 번역, 출간된 바 없는 것으로 필자가 약 20년 전 대학 졸업 직후 공부삼아 번역했던 것이다. 이번에 낡은 스프링 노오트에서 찾아내어 신학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입력, 소개한다. 개인적으로는 틸리히의 온갖 저서들을 젊은 열정으로 탐독하고 번역되지 않은 것들은 원서를 구해 밤을 새워 읽던 시절이 새삼 그립기도 하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에 심취했던 주제들에 다시 한번 몸을 담그어 보고 당시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새로운 깊이로 느껴본 즐거운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직역이 많은 셈이라 난삽해 보이거나 얼른 의미가 간취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은 몇 번 되풀이해서 읽으면 곧 의미가 드러나리라 생각한다. 정리하면서 오역을 더러 바로잡기도 했는데 놓친 오역이 역시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틸리히의 정신적 편력을 개관하는 데에는 크게 부족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자료: 만갑이네 글판세상
국내에 소개된 폴 틸리히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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