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개인적 인권과 집단적 인권(문성원)

나뭇잎숨결 2017. 3. 13. 10:57

개인적 인권과 집단적 인권
--자유주의 인권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


- 문 성 원 (부산대·철학)

1. 인권의 운동과 인권의 보편성

여기서 나는 '인권의 운동'이라는 말을 '인권 운동'과 그 의미를 좀 달리해서 쓰려고 한다. 후자가 인권의 신장과 보호를 목표로 삼는 사회 운동을 일컫는 것이라면, 전자는 인권이라는 개념과 그 제도적·물질적 영향력이 움직여 온 추이를 지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권의 운동이란 말 그대로 인권의 변화, 운동 과정을 가리키는 표현인 셈이다. 그리고 이럴 때 인권의 운동은 인권 운동을 그 현상의 한 부분으로서 포함하게 된다.
이처럼 '인권의 운동'이라는 표현을 내세우는 이유는 우선 인권의 역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인권'(human rights 또는 rights of man)이라는 용어 자체가 등장한 것이 18세기말부터이고 보면, 인권의 역사는 이제 2세기 남짓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지평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의 현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은 영원하고 보편적인 가치나 문젯거리였다기보다는 한 특정한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또 한 가지, '인권의 운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인권과 결부된 사회적 역학 관계의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서이다. 인권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운동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운동의 이면에 어떠한 힘들이 작용해 왔으며 또 작용하고 있는지를 따져 물을 수 있다. '인권'이 서구의 근대 질서를 확산하고 그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해 왔다는 지적은 오늘날에도 그리 드문 것이 아니다. 나아가 몇몇 강대국이 '인권'을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약소국을 압박하는 자의적 방편으로 이용한다는 비판도 흔히 들리는 일리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인권의 운동'을 운위하는 의도가 인권의 상대적이고 부정적인 면모에만 초점을 맞추어 인권 자체를 공박하겠다는 데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인권을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전제할 때 생겨나는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인권 논의에서 흔히 간과하기 쉬운 면을 보완해 보겠다는 것, 특히 원자론적 사회관에 입각한 자유주의 인권관의 문제점을 밝히고 그럼으로써 인권의 운동 방향을 제대로 정립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해 보겠다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인권의 운동'이라는 설정은 궁극적으로 '인권 운동'의 바람직한 전개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인권이 운동, 변화해왔다는 관점에서 바라볼 경우, 인권의 보편성을 단적으로 내세우기는 힘들어진다. 무엇보다도 자연권 사상에 바탕을 둔 인권의 보편성 주장은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가능한 방식 가운데 하나는 헤겔 식의 보편성 또는 후쿠야마 식의 보편성을 통해 인권을 이해하는 것이다. 비록 처음부터 보편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전개 과정을 통해서 드러나고 발전하여 마침내 완성에 이르는 보편성. 이런 종류의 틀을 적용해 본다면, 인권은 근대 이후에 비로소 개화하여 현대에 이르러 완성 단계에 도달한, 그렇지만 애초부터 이런 발전의 싹을 역사 안에 가지고 있었던 보편적 규정이나 원리가 된다.
물론 이 같은 파악 방식은 도달점을 미리 설정해 놓은 목적론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목적론적 도정 대신에 규범성을 강조하는 것도 보편성의 근거를 마련하는 한 길이다. 인권을 우리가 도달해야 할 규범적 목표로 본다면, 인권의 등장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해서 그 보편성을 주장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 다만, 그 경우 보편성 문제는 규범적 정당성의 차원으로 옮겨갈 것이다.
그런데 이 규범적 정당성의 문제는 규범의 실정성(實定性) 내지 사실성의 문제와도 얽혀 있다. 여기서 이 점을 상론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인권이 거의 모든 국가의 헌법에 명시된 실정적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유엔 인권 선언과 같은 초국가적 차원의 헌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권의 보편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현재에도 인권은 완전한 보편화(普遍化)에 이른 것이 아니며, 게다가 이러한 현실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권의 운동도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에 근대적 인권의 보편성이 지니는 긍정적 의의를 '배제의 배제'라는 틀을 통해 정리해 본 적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근대적 인권의 긍정성은, 배제와 억압의 기제였던 신분적 특권을 다시 배제하고 동등한 권리 설정을 통해 인간들 사이의 평등을 지향했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배제의 배제'는 비록 소극적 형식면에서이긴 하지만 인권의 운동에 뚜렷한 규범적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인권과 관련된 움직임 가운데 부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배제와 억압의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는 힘과 운동일 것이다. 나아가 이 기준은 인권 문제의 조건과 성격을 분명히 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인권이 배제의 배제와 평등의 구현이라는 요구를 채우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따져 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인권은 이런 기준에서 보더라도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인권의 확산과 그 실현 정도라는 양적인 진전의 문제 말고도 인권에 대한 이해 자체와 관련된 개념적 차원의 문제들도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면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서는 주로 후자의 측면에 초점을 두고 몇 가지 사안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자유주의적 인권 개념의 한계

탈북자들의 문제가 신문 지상에 오르내린 지도 꽤 되었다. 그런가 하면 중국 동포나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 체류 문제도 중요한 현안이다. 나는 오늘날 인권의 한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단서를 이런 문제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받은 억압이나 불법 체류 노동자들이 국내에서 당하는 부당한 대우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소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서 짚어보고 싶은 것은 이주와 거주의 자유에 가해지는 제한 문제, 보편성을 내세우는 인간의 권리가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제 장벽의 문제이다.
얼핏 생각하더라도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에는 당연히 이주 및 거주의 자유가 포함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그 같은 자유가 허용되는 것은 대개 제한된 국경 내에서일 뿐이다. 우리는 탈북자의 곤경이나 불법 체류 노동자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이런 문제와 관련된 법적·제도적 제약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그러나 이주 및 거주의 자유가 보편적인 개인의 권리라는 견지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 권리가 국가 내에서만 허용되고 국가간에는 제약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현실 속에서 이주 및 거주의 권리는 한 사회의 시민권 내지 성원권(成員權)과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일정 범위를 넘어서면 국적 전환이나 이민 등의 문제와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우리는 인권의 이름 아래, 생존을 위협받거나 다른 권리가 심대하게 침해받는 상황이라면 망명이나 국적 변경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거주와 이주의 자유가 국경을 넘어가기 어렵다. 나는 이와 같은 현실이 오늘날 통용되는 '인권'에서 우리가 자칫 간과하기 쉬운 문제를 드러내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 인권이란 인간으로서의 개개인이 지닌 보편적 권리라고 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권리를 지닌 개인들이 사회에 우선한다는 관념, 또 이 개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근대적 발상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원자론적 자유주의 내지 절차적 자유주의의 기본 전제도 바로 이런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같은 관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 때, 개인의 거주 및 이주의 자유를 제한할 정당한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을 동등한 권리의 소유자로 보는 관점만으로는 여기에 대한 답을 내놓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특정한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 살기 좋은 환경을 지니고 있다고 할 경우에도, 그 환경을 현 거주민이 독점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비록 그 환경이 주민들의 몇 세대에 걸친 노력의 결과로 마련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거주민들은 그 환경의 직접 조성자가 아니라 수혜자에 불과할 수가 있다. 또 한 사회의 구체적 규약이 다른 사회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주를 원하는 자들이 그 규약을 받아들여 거기에 따른 의무를 행하기로 한다면 이들을 내칠 근거는 없지 않을까 싶다. 한 나라 안에서의 경우에는, 우리의 예를 들어보면, 가령 부산 사람이 서울로 이주하는 것을 막을 정당한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예컨대 멕시코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을 막을 정당한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 까다로운 이민 절차와 심사 기준은 과연 어떤 정당성을 지니는 것인가?
여기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의도는 각 나라의 성원권과 거주권의 배타성을 공박하는 데만 있지 않다. 현재의 논의 맥락에서 보면 오히려 인권과 이러한 배타성 사이의 관계가 관심의 초점이다. 보편성을 내세우는 '인권'의 견지에서는 이런 배타성의 문제를 정면에서 돌파하든지 아니면 인권의 범위 밖으로 밀어놓든지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인권'이 후자의 길을 택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이 경우, 성원권의 문제는 특정한 지역의 특정한 사람들이 그 기준을 정해야 할 '특수한' 문제가 되어버리고 '보편적' 인권의 내용에서는 빠져버린다. 그 결과 '인권'은 실질적으로 중요한 배제의 틀을 자기 밖에 방치하게 되며, 나름의 이해관계를 지닌 구체적인 인간 집단 속의 개인들과 오직 추상적 방식으로만 관계하게 된다. 즉 이때의 '인권'은 각각의 집단 속에서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를 사상한 채, 개체에 부여되는 '보편'으로 취급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형태의 추상적 인권은 개체를 앞세우는 자유주의의 관점과 쉽게 결합한다. '보편적' 인권은 이제 개체 위주의 권리 설정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난관--즉 우리가 예시한 거주와 이주의 자유 문제 따위--을 피해 가면서 다시 추상적 개체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일면 역설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만남은 사실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과 '자유주의적 개체'는 집단적 이해관계와 거기에서 비롯하는 문제들을 도외시한다는 점에서 같은 지평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같은 연결 관계는 두 추상적 항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의 중요 영역을 인식상의 공백으로 남겨 놓음으로써, 이 공백의 자리에서 작용하는 힘이 은폐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준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권에 대한 개체 중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이해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칫 개체적 삶의 터전인 집단적 현실의 문제를 놓치고 말 위험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집단적 현실은 권리를 지닌 개개인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사회의 성립을 계약론적 견지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정치-사회적 구성 원리로서 제시될 경우, 적어도 근대 이후의 세계에서는 분명 큰 힘을 지닌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역사적 실재와 현실의 사회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개인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개체를 넘어서는 집단성의 차원을 비환원적인 방식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인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집단적 지평을 떠나서 인간을 이해하기 곤란하다면, '인간의 권리' 역시 그러할 것이다.


3. 집단적 가치와 집단적 권리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란에 개입하면서 찰스 테일러는, '우리에 대한' 가치와 '나에 대한' 가치를 구별한다. 인간 집단이 공동으로 가지는 가치가 인간 개체 각각이 가지는 가치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에 따르면, '나에 대해 있는 것'과 '너에 대해 있는 것'을 단순히 합한다고 해서 '우리에 대해 있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혼자서 듣는 모차르트와 네가 혼자서 듣는 모차르트를 합한다고 우리가 같이 듣는 모차르트가 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이렇게 일상적인 예를 드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테일러는 개개인의 선(individual good)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이른바 공동선(common good)이 있다는 주장을 편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권리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개인의 권리로 환원되지 않는 '집단적 권리'가 엄연히 존재하며, 이 집단적 권리는 당연히 인권과 관련을 맺는다고 생각한다. 사실 인권이란 다른 어떤 동물의 권리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이며, 그런 면에서 인권은 이미 인간을 집단적으로 문제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인권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 집단에 권리를 부여하거나 인정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애당초 인권이 논의되었던 맥락을 생각해 보더라도 이 같은 집단의 역할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인권의 중요한 의의는 신분 질서를 통해 권리상의 차별을 받던 이들이 자신들도 인간임을, 즉 같은 인간 집단에 속하는 존재임을 선언하고, 이를 통해 그네들도 동등한 권리 행사의 자격이 있음을 내세운 데 있었다. 그러니까 '인권' 주장의 바탕에 놓인 사태는, 일정한 권리를 지닌 개개인들이 먼저 존재하고 이들이 모여 어떤 집단을 이루는 것이었다기보다는, 일정한 권리를 지닌 집단이 존재하고 거기에 개체가 속함으로써 그 권리를 공동으로 누리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릇 권리란 원래 특정한 집단에 속하는 특권으로 출발한 것이었음을 염두에 두자. 이런 점에서 보면 인권의 성립은 사실상 시민권 외연의 확장이었고, "인간 = 시민"이라는 등식의 확립이었으며, 인권 운동의 역사는 이 같은 확장과 확립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권리를 갖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개인일 뿐이고 집단이 권리를 가질 수 없다고 보는 것은 대단히 피상적인 생각이다. 비록 낱낱의 권리 행사 행위가 언제나 개개인들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이 개인들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들이 속해 있는 집단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이 집단이 무엇이냐는 그 각각의 개인들로 환원하여 규정할 수 없다. 이런 점은 우리의 언어 현상과 유비(類比)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는 자는 언제나 개인들이지만, 언어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은 지속적인 교섭이 이루어지는 특정한 언어 공동체 속에서이다. 그런 면에서 특정한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개체들 각각의 언어라기보다는 특정한 공동체의 언어이다. 어떤 경우에 한 개인은 그 언어 공동체에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다. 심지어 그 언어에 얼마간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언어가 그러한 개인들 각각에게 귀속된다고 하기는 곤란하다. 권리의 경우에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개인이 이런 권리 저런 권리를 갖는 것은 그 개인이 이런 집단 저런 집단에 속하기 때문이고, 그 집단 내에서 이런 자리 저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언어에 초개인적인 구조와 질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리에도 초개인적인 틀과 위치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권리란 워낙 집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개체의 권리는 그 집단적 권리를 바탕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는 이 권리의 틀 내지 구조가 내적 집단 및 위치의 구획(區劃)을 줄이거나 없앤 상태에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정치 공동체의 경우 일정 연령 이상의 성원들에게 일단 차별이 없는 위치를 부여하는데, 이 때문에 우리는 자칫 권리의 집단성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적 효과 면에서도 집단의 역할은 분명 남아 있다. 예컨대 지역적 집단은 아직도 중요한 정치적 권리 단위로 작용한다. 이 집단 단위의 권리가 환원적 방식으로 설명되기 어렵다는 점은 그 권리가 단순히 집단을 이루는 개체의 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집단의 생존 조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예를 들어 환경 문제나 인종 문제, 문화적 정체성 문제 등--이 문제될 때에는 공공연히 집단적 권리가 거론되곤 한다. 집단적 권리가 그 자체로 부각되지 않는 경우라 하더라도, 집단은 권리의 지평으로서 항상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개체의 권리가 초점이 되는 것은 오히려 특수한 경우, 즉 집단의 특수한 상황하에서 나타나는 경우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인권'이라고 해서 사정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권'이 관계하는 인간 집단의 특성이다. 동물과의 대비가 문젯거리가 아니라면 적어도 오늘날 인권이 구획하는 집단적 경계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인권은 그러한 집단적 경계를 넘어서서 그 폭을 최대한으로 넓힌 인간 집단과 관계한다. 이렇게 내부의 집단적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는 점 때문에 인권은 아예 집단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이, 개체들에게만 관련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렇게 인간을 개체들로 취급하는 것조차 인간 집단에 대한 어떤 규정이고, 또 이런 시각이나 규정 자체도 인간 집단의 특수한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특수한 조건이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인간 집단 일부에게만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내적 집단의 경계를 두지 않으려는 발상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배제의 경계선을 배제하려는 평등 지향적인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긍정적인 방향도 현실에 엄존하는 집단적 조건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하면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할 위험을 안고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처럼 보이는 '개인적 인권'에 대비하여 '집단적 인권'을 운위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4. 집단적 인권과 인권의 운동

1999년 노벨상 수상 작가인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최근 내한해서 가진 한 인터뷰에서 남한이 북한을 도와주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북한 경제가 무너져 주민들이 대거 남으로 밀려들면 비극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지적이야 그리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나는 이와 같은 사안을 인권의 문제와, 특히 집단적 인권의 문제와 연결해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북한의 경제와 함께 전체주의적 색채가 강한 정권이 무너지고 나면, 다른 면들이야 어떻든 북한 주민 개개인의 인권 상황은 한결 나아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에 대해 쉽게 고개가 끄떡여지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 개개인이 자율적으로 자신들의 사회와 집단을 선택하고 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주의의 이론적 가정일 뿐이다. 알다시피 이 가정이 들어맞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과 범위는 매우 한정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개인들은 그네들의 사회와 집단을 상당 부분 주어진 것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또 이 개인들의 삶은 이렇게 주어진 사회 내지 집단의 운명에 깊게 결속되어 있기 마련이다. 북한의 현정권이나 체제가 무너진다 하더라도 북한 주민들의 처지는 여전히 주어진 집단적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것이며, 그들의 권리는 그러한 집단적 상황 속에서 규정될 것이다. 남한을 포함하여 다른 사회가 북한 주민들을 그 구성원으로 쉽게 받아들일 리가 없다고 할 때, 이들이 다른 집단에 들어가 그곳의 권리 규정을 받을 가능성은 극히 적다. 인권 상황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권의 개선은 주어진 집단 속에서 그 집단의 처지 개선과 함께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혹시 북한의 주민들이 대거 남한에 편입된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남한 사회 내부의 주변 집단으로 차별을 받을 공산이 매우 크다. 형식상의 권리 규정은 이런 실질적 집단 구획의 영향을 없애지 못할 것이 뻔하다. 요컨대 북한 주민의 인권은 주로 그네들 집단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며, 그러한 한 그들의 인권은 집단적 성격을 지니는 집단적 인권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한 집단의 외부에서 그 집단 내부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권에 대한 논란은 곧 그 집단에 대한 문제 제기나 비판으로 이어지기 쉬운데, 이 문제 제기가 그 집단의 처지와 그 처지의 개선 조건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것일 경우, 자칫 무책임한 논의가 되거나 다른 외적 의도의 수단 역할을 하는 데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집단의 조건을 추상한 개인의 차원만을 기준으로 놓고 비판의 잣대로 삼는 것은, 사실상 특수한 개인주의 사회의 기준을 다른 사회에 보편적인 것으로 덮씌우는 행위가 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타 집단에 인권의 문제를 제기할 때에는 언제나, 어떠한 맥락에 놓인 어떠한 인권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를 분명히 적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두꺼움'과 '얇음'이라는 용어를 통해 '특수'와 '보편'의 관계를 설명하는 마이클 왈쩌의 견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왈쩌는 현실의 모든 사회가 다 나름의 특수함을 지닌 '두꺼운'(thick) 사회라고 본다. 바로 이 특수함을 바탕으로 해서만 공통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 자리잡을 수가 있는데, 이때의 보편성이 '얇은'(thin) 것이다. 즉 보편이란 여러 사회의 특수한 '두꺼움'들의 일부가 겹쳐서 이뤄지는 공통된 '얇음'인 셈이다. 따라서 우선성 면에서도 '특수'가 먼저이고 '보편'이 나중에 오는 것이다. 또 이 특수들의 공통 부분인 보편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수들이 겹쳐지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변적인 것이다. 이 같은 생각의 바탕 위에서 왈쩌는 다른 사회에 대한 비판은 자신의 특수한 입장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두꺼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상대 집단에 대한 비판은 서로 겹치는 공통 부분을 넘어서서 자신의 특수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러므로 왈쩌에 따르면, 우리가 다른 사회나 집단과 연대하려고 할 경우에는 비판을 앞세워서는 곤란하다. '두꺼운' 비판은 일단 그 사회 내부에 맡기고 서로 겹치는 '얇음'을 통해 협력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물론 한 사회나 집단은 그 자체가 복합적인 것이므로 얇은 연대와 두꺼운 비판을 나누어 생각하기가 쉽지는 않다. 특히 한 사회가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갈등이나 투쟁에 휩싸여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그 사회 내부의 어느 부분과 연대하든, 이 연대는 섣불리 간섭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왈쩌의 생각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인권 문제의 경우도 서로 겹치는 '얇은' 부분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테면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서로간에 공통된 인권 개념에 바탕을 둔 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 겹치는 부분이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공통 부분을 확대해 나가려 노력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며 또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이 노력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져서는 곤란하다. 그 집단에 대한 외적 강요와 간섭으로 여겨질 공산이 큰 까닭이다. 당하는 쪽에서 볼 때에는 이런 강요나 간섭은 특수한 집단적 조건에서 비롯한 관점과 규범을 그 실현 가능성과 관계없이 다른 집단에 부과하려는 횡포로, 그럼으로써 그 나름의 특수한 이익을 추구하려는 술수로 비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권과 관련된 모든 비판이나 간섭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거의 모든 인류 집단에 공통된 규범들도 있기 때문이다. 즉, 대부분의 사회에 겹치는 것이어서 인류 집단 자체의 '두꺼운' 규범으로 작용할 수 있는 규범들도 있다. 이를테면 어느 나라에서 대량 학살이 벌어지는 경우에, 이를 특정 집단의 내적 문제로 두고 방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슬람의 정교 일치 문제나 중국, 북한의 형법 따위를 간섭의 대상으로 삼기는 어렵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일단 '얇은' 연대를 바탕으로 서로의 조건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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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인권의 운동은 자유주의의 확산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진행되어 왔다. 그 덕택에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권의 내용은 자유주의의 특성을, 따라서 개인주의적 특성을 강하게 띠고 있다. 알다시피 이 배경에는 개인적 소유권의 확립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확산과 공고화 과정이 놓여 있다. 자유주의가 개인적 권리 차원의 평등을 확립해 나가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며, 또 이 와중에서 인권 개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유주의와 결부된 인권 개념은 불균등하고 다양한 집단적 조건의 차원을 추상해 버림으로써, 인권의 운동이 인간 집단 내부의 실질적 배제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오늘날에도 인권의 운동이 보여 주는 주된 흐름은 개체 중심의 인권 규정을 확산하고 정착시키려는 쪽이다. 권리의 집단적 성격과 각 집단의 특수한 조건을 인정하고 배려하는 일은 여전히 뒤로 밀려나 있는 상황이다. 의도적으로건 비의도적으로건 이런 점들 때문에 마찰과 갈등이 일어나는 일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인권의 집단적 성격 또는 '집단적 인권'은 이와 같은 면을 바로잡기 위해서 강조되어야 한다. 인권의 실질적 개선을 이루기 위해서도 인권의 운동이 지닌 자유주의적 편향을 교정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