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사이버시대의 존재론적 이해를 위하여(김상환)

나뭇잎숨결 2017. 3. 23. 06:07

사이버시대의 존재론적 이해를 위하여



- 김 상 환(서울대 철학과)



한 시대의 역사적 현실은 과거에 뿌려진 사유의 씨앗으로부터 유래한다. 현실의 변화에서 과거의 통신을 읽을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안에는 미래로 향하는 새로운 통지문이 타전되곤 한다. 현실은 끊임없이 새로운 파종의 필요성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실 안에 이질적인 토양이 확장되어 갈 때 그런 요구가 커진다. 지금의 시대가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사이버 공간이 그 영토를 넓혀 가고 있는 테크놀러지 시대를 살고 있다.


왜 테크놀러지 시대인가? 기술에 대한 도구적 이해가 타당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기술은 도구의 지위를 넘어 역사적 현실을 조직하고 재분할하는 중심의 자리에 진입했다. 이제 자율적 진화의 논리를 획득한 첨단 기술, 특히 첨단 정보 기술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문화적 영역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자본의 창출과 집중, 사회의 조직과 편성, 인간의 감각 사용 비율과 감수성, 심지어 과학적 탐구의 방향마저 기술로부터 시작된 발전의 논리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궁핍한 시대일 수 있다. 기술이 확장시켜 가고 있는 이 시대의 특이한 토질에서 과거의 사상, 과거의 사고 방식은 고사되어 가고 있다. 테크놀러지 시대는 과거의 사상이 번식하기 어려운 황무지인 것이다. 이 황량한 현실을 다시 개간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런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 낯선 현실은 어디서부터 유래하는가? 이 이질적인 토양이 우리에게 주어진 경작지라면, 이 땅에 적합한 종자는 무엇인가?


지극히 하이데거적인 이 물음에 다시 하이데거적으로 답하자면, 테크놀러지 문명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테크놀러지는 이론적 사유를 근간으로, 이론적 사유는 플라톤 이래의 서양적 형이상학을 모태로 한다. 그러나 테크놀러지 시대에 형이상학적 존재 이해는 그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실현하는 동시에 새로운 존재 이해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과거화된다. 플라톤주의적 전통에 대하여 테크놀러지 시대는 고비의 지점, 위기의 지점, 전환의 지점을 형성하는 것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을 모태로 하는 첨단 기술이 마침내 그 형이상학의 울타리를 넘어선다는 것은 이 시대의 가상 현실과 시뮬라크르들에 의하여 가장 탁월하게 예증된다. 그것들은 기존의 존재론이 해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한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실재가 아니면서 비실재로 치부할 수도 없다. 형이상학적 이분법의 구도에서 가상 현실의 가상성은 규정 불가능하다. 그 규정 불가능성은 어떤 고정된 의미의 실재성을 전제하는 과거 존재론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한계의 지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것은 그 한계적 사태를 포괄하는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원근법과 관점을 쌓아 올릴 때만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사유의 파종,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가상적 공간이 무한대로 뻗어가고 있는 이 시대가 기존의 철학에 대하여 황무지라면, 이 이질적 토양을 개간하고 거기에 적합한 사유의 씨앗을 키우는 일이 사상사적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나는 이 글에서 그런 과제에 부응하는 철학자로서 데리다를 소개하고, 사이버시대가 초래할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존재론적 관점을 그의 해체론을 통해서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1. 사이버시대의 유령: 해체론에서 유령학으로





황무지. 나는 앞에서 기존의 사상사적 전통을 자연스럽게 도태시키는 테크놀러지 시대를, 특히 거기서 끝없이 확장되어 가는 가상적 공간을 황무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 정보화된 공간을 폐허가 된 집, 귀신이 출몰하는 건축물로 비유한다. 귀신 혹은 유령, 그것은 일단 테크놀러지 시대의 가상 공간에서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유를 교란시키는 한계적 사태를 지시한다.



“그 한계는 오늘날 과학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따라서 첨단 미디어 기술의 차원에서 그리고 따라서 공공적이거나 정치적인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상적이고 유령적인 것에 의하여, 합성적이고 보철물적이며 가상적인 것에 의하여 말할 수 없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 한계는 현실적 행위와 잠재적 능력 사이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가상성의 속도를 사건의 공간 안에, 사건의 사건성 안에 내면화시키는 것들을 통해서 볼 때 더욱 명백해진다.”



가상적 현실과 사이버 공간은 개념적으로 규정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또는 실재성과 관념성의 이분법으로 잡히지 않는다는 점에서 탈형이상학적이다. 데리다는 그런 탈형이상학적 성격을 ‘유령적’이라 표기한다. 그러나 유령적인 것은 무엇보다 정보화 시대의 공공적 질서를 지배하고 조직하는 미디어들이다. “즉 미디어들 자체(뉴스 보도, 신문, 텔레커뮤니케이션, 텔레테크놀러지에 의한 언어 전송과 영상 전송, 일반적으로 공적 장소의 공간화뿐만 아니라 공공성(res publica)과 정치적 현상의 가능성을 담보하고 결정하는 것들)의 매체, … 바로 그 매체라는 요소적 지반은 살아 있는 것도 죽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현전하는 것도 부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유령화되고 있다.”(SM, 89)



정보화 시대를 조직하는 다양한 미디어들과 원격 통신 기술은 기존의 형이상학적 존재 이해를 이탈하는 유령적 차원을, 더 정확히 말해서 ‘환원 불가능한 유령적 차원’(SM, 92)을 산출하고 있다. “첨단 미디어의 권력은 여러 가지 권력들의 집합체이고, 이것은 그토록 많은 유령적 효과들을 고려하지 않고서, 시뮬라크르의 출현이 보여주는 새로운 속도를 고려하지 않고서, 합성적이거나 보철물적 의사성의 이미지, 가상적 사건, 사이버 공간의 … 속도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분석할 수도 투쟁할 수도 없으며 시인하거나 공격할 수도 없다.”(SM, 93)



이렇게 말할 때 데리다는 하이데거로부터 이어지는 해체론적 테크놀러지 분석을 이어가고 있다. 테크놀러지는 해체론의 중요한 주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적 현실의 탈형이상학적 전회를 알리는 구체적 징후이기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테크놀러지의 헤게모니가 극도에 이르는 시대이다. 테크놀러지의 지배력은 정보화 시대에 절정에 이르고, 이 시대의 정치경제학적 권력 그리고 군사 기술적 권력은 정보 기술에 집중되거나 그것에 의하여 재편성된다.


그런 권력 집중과 재편성은 물론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교란하고 파괴하기 마련이다. 사실 미디어 권력은 텔레비전이 나오기 이전인 1920년대부터 “공적 공간을 심각하게 변형시켜왔고, 당선자들의 권위와 대표성을 위험할 정도로 약화시켜왔으며, 의회적 차원의 토론과 숙고 그리고 결정의 장을 축소시켜 왔다.” (SM, 132) 그런 미디어 권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갈수록 정교화되고 장거리화되는 정보 전달 기술이다. 이 기술의 발전이 가속화됨에 따라 미디어가 초래하는 의사 소통의 변형과 교란은 “오늘날 한도를 모를 정도로 증폭되고 있다.”(SM, 132)



테크놀러지는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 기존의 형이상학적 존재 이해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 위협은 무엇보다도 위상학적이고 장소론적인 성격을 띤다. 텔레테크놀러지는 종래의 공공적 공간의 구속력을 약화시키고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또한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의회적 대표성을 위축시킨다. 정보화 시대의 첨단 기술은 다만 공간이 아니라 시간적 차원에서까지 혼란을 초래한다. 일상적 시간에 탈을 내고 예측 불가능한 정보 교환의 속도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정보화 시대의 시간은 탈구되어 있고, 그런 의미에서 잘못 가고 있으며 궤도를 잃어버리고 있다. 거기에서는 공간 착오적 사건이 발생할 수 있고 시간 착오적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



데리다가 정보화 시대의 유령성을 말하면서 염두에 두는 것은 단지 가상 현실의 가상성이라기보다 일차적으로는 바로 그런 시공간적 탈구와 착오적 사건의 발생이다. 정보화 시대는 궤도 없는 시공간적 일탈의 시대이다. 여기서 벌어지는 시공간적 착오는 인간의 손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 이 시대는 유령적 효과가 공공적 질서 자체를 지배하는 시대이다. 이 모든 유령적 효과는 정보화 시대를 뒷받침하는 첨단의 텔레테크놀러지의 산물이다. 그러나 유령적 효과, 그리고 그것이 수반하는 탈구와 착오는 단지 혼돈과 무질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 무질서한 현상에서 우리는 고착된 질서의 개방화, 헤게모니로부터의 해방, 미래적 사건의 도래를 예감할 수 있다. 정보화 시대에 일어나는 시공간적 탈구와 착오는 위험인 동시에 기회인 것이다. 데리다는 유령성을 그런 이중적 시각에서 되새기면서, 그리고 그런 이중적 의미의 유령성을 존재의 심층 안으로 내재화하고 ‘선험화’하면서 정보화 시대의 기원과 미래를 재서술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데리다적 의미의 유령성은 첨단 정보 통신 기술의 고유한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보화 시대에 국한된 특이 현상도 아니다. 해체론의 시각에서 유령성은 정보화 시대보다 오래된 것이며, 정보 통신 기술의 영역보다 넓은 범위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역사보다 먼저 있었던 것이고 존재하는 것들보다 일찍 존재하였다. 언어, 의식, 사물, 시공간은 유령성을 감추고 있고, 그 유령성과 더불어 비로소 성립하거나 존재할 수 있다. 다만 그런 사실이 전통 형이상학과 신학에서 잊혀져왔을 뿐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의 존재 망각은 데리다에게서 유령의 망각과 같다. 그 망각되어온 유령성은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 공공적 공간에서 표면적으로 정체를 드러내면서 고전적 형태의 존재론을 의심하는 경험적 실마리를 형성한다. 즉 “만일 유령성과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면, 현전하는 것들의 안정된 질서를 의심할 만한 이유들이 있는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 현실적 실재성과 그에 대립될 수 있는 모든 것(부재, 비현전성, 비사실성, 비현실성, 가상성 혹은 시뮬라크르 일반) 사이의 경계를 의심할 만한 이유들이 있다. 먼저 현전하는 것들이 시간적으로 자신과 일치하고 동시대적 현전성을 구가하는지 의심되어야 한다. … 유령적 효과의 본성이 그러한 대립 즉 사실적 현전과 그 반대항 사이의 그러한 변증법을 좌절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닌지 물어야 할 것이다.” (SM, 72)



유령적 효과는 현전적 존재 이해와 변증법적 사유를 교란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기존의 형이상학을 의심하고 해체하는 단초에 그치지 않는다. 데리다는 그 유령적 효과를 어떤 해체 불가능한 사태로서 증명하고, 나아가서 바로 그것이 경험 자체의 조건, 역사의 조건, 책임 있는 판단과 정의의 조건, 나아가서 세계 생성의 조건임을 주장한다. 데리다는 자신의 해체론을 유령학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인간과 세계 그리고 역사를 긍정적이고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문턱에 이르는 것 같이 보인다.



해체론은 해체 불가능한 것(l'indeconstructible)을 구한다. 이는 데카르트가 회의를 통하여 회의 불가능한 것을 발견하고자 한 것과 같다. 데카르트가 회의한 것은 사유(관념)와 외적 대상의 일치 관계이다. 데리다가 해체하는 것은 동일성의 사유, 즉 동일률에 기초한 사유의 내재적 일관성이다. 이 일관성은 구체적으로 안과 밖,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 실재와 비실재, 진리와 오류 등을 배타적으로 구분하는 이항 대립적 체계이다. 데카르트는 회의 끝에 회의 불가능자로서 사유하는 자아를 발견하였다. 데리다가 해체를 통하여 해체 불가능자로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차연, 파르마콘, 코라, 이멘, 그라메, 에크리튀르 등, 경우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불린다. 데카르트의 회의 불가능자, 즉 코기토는 사유와 존재가 일치하는 지점이다. 이 지점은 진리와 거짓, 이성과 광기, 내면과 외면 등, 모든 이항 대립적 요소가 등가적으로 교환될 수 있는 장소,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어떤 임계점이다. 데리다의 해체 불가능자는 이항 대립적 체계를 무력화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의 회의 불가능자와 일치한다. 그것은 이론적 구분법을 통해서 포착할 수 없는 것, 그러나 그 구분법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 조건이다. 가능 조건으로서 그것은 이항 대립의 시작에 있으며, 그 불가능 조건으로서 그것은 이항 대립의 끝에 있다. 그것은 이항 대립적 질서를 있게 하면서 없게 하는 것, 구성하면서 탈구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이중적 성격의 해체 불가능자를 유령이라는 말로 통칭한다. 그것이 이론적 시선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적 사유에 내재하는 것, 그러나 그것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 조건으로서 내재하는 초월론적 사태가 유령이다.



이론적 사유의 역사적 유래와 본성은 유령의 추방에 있다. 유령의 배제, 유령의 푸닥거리를 통해서 이론적 사유는 자신의 장소를 넓혀 왔고, 그렇게 탈주술화된 공간에 집을 설계하고 건축해 왔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고스가 탄생할 때, 그리고 근대 과학이 형성되고 발전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런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적 건축물에는 여전히 유령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데리다의 논점이다.



동일성의 사유에 출몰하는 일탈적 사태로서의 유령, 그것의 특징은 분산적이고 착오적이라는 데 있다. 유령은 제 시간에, 일정에 따라 오지 않으며 예상되는 장소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질성을 초래하는 틈과 균열은 유령 출몰의 징표이다. 동일성의 사유는 순수성·균질성·규정성·추상성·일반성을 생산하고 내면화하는 자기 확장적 경제이다. 차이를 수용하되 해소하는 것, 이질성을 감소시키는 것, 다양한 것들을 한 자리에 모으되 어떤 질서 안에 통제하는 것이 로고스가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지나쳐 폐쇄와 감금, 고착화가 일어날 수 있다. 경험, 의미, 역사, 사회적 질서는 어떤 탈출구 없는 회로에 갇힐 수 있다. 모든 것이 결정론적 법칙 아래에서, 새로운 사건에 대한 기대 없이, 예정된 궤도에 따라 진행될 수 있다. 그런 일은 이론적 사유의 생성과 심화 과정을 특징짓는 탈주술화의 마지막 귀결이다. 이론화는 귀신 쫓는 푸닥거리와 더불어 시작하고, 그 푸닥거리는 언제나 우연과 애매성, 혹은 특수성과 타자성을 내모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게 쫓겨나고 살해되는 것은 다시 돌아온다. 그것이 초월적 기의에 붙들린 해석이든 닫혀진 체계나 결정론화된 역사이든, 거기서 추상되고 부정된 것들의 잔영은 되돌아오고 그곳에 열림 작용을 낳는다. 그 유령이 만드는 틈과 균열은 개방성과 미래성이 도착하는 구멍일 수 있다. 이 개방성과 미래성은 이론적으로 계산하거나 예상할 수 없던 타자가 도래하는 사건에 의하여 열리게 된다. 타자 혹은 이론적 공간의 ‘바깥’은 유령을 앞세우면서 혹은 유령을 매개로 현재의 질서 안으로, 상투화되고 굳어져 가는 장소 안으로 밀치고 들어온다.



그런 유령은 해체론의 간판 용어 ‘차연’에 대한 또 다른 명칭이다. 차연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자들이 만드는 관계의 그물망이다. 이 타자들의 관계는 상호 시공간적 차이와 대립의 관계이다. 그 그물망을 형성하는 타자들은 과거와 미래에 속하는, 그래서 부재하는 타자들을 포함한다. 차연은 그 관계의 그물망이자 그 그물망이 성립하는 운동 자체이기도 하다. 데리다는 현재의 현재성, 현실의 현전성과 통일성이 그 차연의 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모든 것들은 각기 타자들이 그것에 남기는 부재의 그림자(흔적)에 빚지면서 현상한다. 이는 관계보다 앞서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타자들보다 앞서는 동일자는 없다. 모든 규정성은 차연적 관계의 타자들이 보내는 선물이다. 그러나 규정 가능성을 조건짓는 타자들의 차연적 관계는 비규정적이고 무규정적이다. 고정된 정체가 없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로 향한다. 새로운 타자로 열려 있고 아직 없는 타자를 기다리고, (재)도래하는 타자의 영접을 통하여 탈바꿈된다. 그런 탈바꿈은 차연적 관계에 의존하는 개체의 자기 동일성에 영향을 미친다. 동일성에 탈을 내고 현전성에 비동시성을 유발하는 것, 체계적 매듭을 분리시키고 내면적 완결성을 다시 보류시키는 것, 그에 대한 이름이 유령이다. 유령성은 현재적 현실성을 있게 하는 동시에 그 현전성을 흩뜨리는 차연적 운동이 출현하는 양태이다. 데리다의 유령학은 차연이 함축하는 타자 위주의 존재론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 새로운 존재론에 따르면, 태초에 차연이 있었고 유령처럼 있었다. 바로 그런 차연적 흔적의 유령적 출몰이 모든 기원보다 오래된 기원이고 모든 시작 이전의 시작이다.(SM, 255-256, 259) 표상되지 않는 타자의 개입이 시작보다 먼저 있었다. 그 개입은 모든 해석과 의미와 역사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의미에서 어떤 선물이자 약속이다. 모든 사건은 이 약속을 통하여 비로소 일어날 수 있다. 시작에나 기원에 있는 것은, 끝과 종말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그런 비표상적 타자의 약속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데리다가 말하는 타자는 ‘메시아적’이다. 이 메시아적 약속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이 약속이 잊혀지거나 추상되지 않는 한에서, 끝은 아직 끝이 아니다. 끝은 여전히 타자와 원격 통신 상태에 있고 새로운 시작을 기다린다.



모든 것은 차연적 관계 안에, 그리고 그 관계의 그물망을 통하여 일어나는 원격 송신 안에, 그 관계적 사태에 빚지면서 존재한다. 차연이란 타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신과 연락의 사건이다. ‘유령적 효과’란 ‘원격 효과’이고, 통신과 우편적 연락은 해체론이 도달하는 궁극의 사태와 이어져 있다. 따라서 차이의 존재론을 펼쳐 가는 해체론은 정보화 사회를 특징짓는 텔레테크놀러지와 가상 현실을 향하여 적극적으로 발걸음을 내디딘다. 데리다는 이렇게 적는다. “해체론적 사유는 타자로의 전송 가능성, 따라서 타자성과 근본적 이질성의 가능성, 차연의 가능성… 등을 현전화의 사건 자체 안에 아로새긴다. 그러한 사건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 현전성을 선험적으로 탈구시키고, 그 현전성 안에 타자의 가능성을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 그러한 해체론적 사유는 환영과 시뮬라크르 그리고 ‘합성적 이미지’ 등의 효과들, 그러니까 첨단 기술이 앞으로 초래하게 될 유래 없는 형식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이데올로기적 요소의 효과들을 고려하고 설명할 수 있는 수단들을 갖추고 있다.”(SM, 126)



유령학은 기존의 존재론뿐만 아니라 목적론과 종말론을 비판하되 자기 안에 포괄하고자 한다.(SM, 31) 유령학으로서의 해체론은 헤겔과 하이데거류의 존재사를 해체하면서 새로운 역사론을 구상한다. 그리고 이 구상은 역사가 어떤 목적을 향한다거나 어떤 의미를 완성해 가는 절차라기보다 타자의 도래를 허락하는 어떤 해체 불가능한 메시아적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천명하면서 시작한다. “… 어떤 특정한 해체론적 절차는 … 그 출발에서부터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혹은 하이데거의 시대 구획적 사유에서까지 엿볼 수 있는 존재-신학적이고 또한 고고학적-목적론적인 역사 이해를 의문시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 이는 이 존재-신학-고고학적 목적론이 역사성을 감금하고 중성화하여 마침내는 소멸시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또 다른 역사성을 사유하는 것이 문제였고 … 메시아적 약속에 대한 긍정적 사유의 길을 열어주는 역사성의 개방, 그 사건성의 새로운 개방을 사유하는 것이 문제였다. 즉 ‘프로그램’ 혹은 존재-신학적이거나 목적론이고 종말론적인 계획으로서가 아니라 ‘프로메스’로서의 새로운 역사성이 중요했다.”(SM, 125-126)



역사의 시작과 끝은 확정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 전송과 계승에는 미리 예정된 절차가 없다. 역사적 시간은 미래를 향하여 열려져 있고, 그 역사적 개방성은 타자가 현재에 개입하는, 그래서 현재 속에 기대와 희망과 명령을 낳는 메시아적 구조에서 비롯된다. 즉 그 개방성은 시공간의 유령학적 구조로부터 유래한다. 때문에 사물과 역사를 지나는 송신과 수신은 프로그램이 내장된 기계처럼 정확하지 않다. 존재와 시간은 타자의 유령적 개입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탈구되어 있다. 탈구와 분리는 질서의 약화와 퇴락에서 비롯되는 잠정적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어떠한 존재론적 선험성보다 앞서는 사태이다. 이 원초적 사태 속에서 시공간은,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멀리 떨어진 타자와 원격적으로 교신하고 있다. 그 교신을 통하여 타자는 어떤 약속을 전하고 당위의 명령을 보내고 있다. 사물의 중심에는 장거리 전화가 울리고 있다. 유령성은 타자가 쉼 없이 보내는 통신의 요구에 대한 이름이다.









2. 원격 통신의 존재론적 유래: 해체론적 전송론



그러므로 태초에, 태초보다 먼저 원격 효과가 있었다. 이것이 유령학을 지나는 해체론의 공식이다. 어떤 주술적 존재론을 암시하는 이 유령학의 관점에서 볼 때, 정보화 시대를 주도하는 원격 기술은 단순한 기술적 현상도, 단순한 물질적 현상도 아니다. 원격 통신은 언어 혹은 의식의 본성에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시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방식 자체에 해당한다.



이런 해체론적 통신 이론은 원래 어떤 특이한 접촉 이론에서 시작되었고, 따라서 형이상학적 순수주의에 역행한다. 탈형이상학적 공간론을 전제하는 이 새로운 사유에 따르면, 순수한 실재성, 순수한 자연성과 인간성은 형이상학 시대의 신화이다. 모든 신화는 망각의 확장과 같이 간다. 형이상학적 순수주의는 사물과 언어와 역사를 관통하는 원격 효과를 망각하는 가운데 탄생하고 발전해왔다. 가령 기존의 형이상학에서 ‘언어와 사유를 원초적으로 불순화하는 테크네’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형이상학적 순수주의가 추구되기 위해서 그런 일은 잊혀져야 했다. 형이상학은 언어와 사유의 본성을 초감성적 사태, 물질적 외면과 독립된 정신적 사태로 순화시켜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에서 ‘기술의 환원 불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숙명적 오염’이라 칭하였다. 이는 타자에 의하여 접촉되지 않는 내면은 없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접촉되기 위하여 먼저 접속되어야 하고, 이를 통하여 교신이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접촉은 단순히 직접적 맞닿음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접촉은 타자들 사이의 원격 효과에 빚진다.





이것을 처음 말한 것은 하이데거이다. 가령 그는 의자와 벽을 두고 서로 ‘접촉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그것은…의자와 벽 사이에 틈이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해서가 아니라, 설령 그 틈이 영(零)이라 하더라도, 의자는 원칙적으로 벽에 접촉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접촉할 수 있기 위해서는 벽이 의자를 ‘향해서’ 만난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접촉은 그러므로 단순히 간격이 소거된 상태를 지칭하지 않는다. 접촉은 만남에서, 만남은 거리와 사이를 지나는 원격 효과(‘향하여’)에서 비롯한다.



하이데거적 의미의 ‘세계’는 그런 만남과 접촉으로 귀결되는 원격 효과를 통하여 개방되고 체험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물리적 접촉에 머물러 있는 것들(‘前在的’ 존재자, Vorhandensein), 가령 돌 같은 것들은 ‘무세계적’이라 했다. 돌은 세계의 원격 효과를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본래적 의미의 접촉 능력을 결여한다. 그 접촉 능력은 이 세계의 원격 효과를 파악하는 유일한 존재자, 즉 배려(Besorgen)와 배시(Umsicht)를 통하여 이 세계 내에 거주하는 실존적 존재자인 현존재의 특권이다. 현존재는 사물(‘用在的’ 존재자, Zuhandensein)들 사이의 매개 관계와 도구적 연관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친근한 장소와 원근을 열어간다. 그것이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가 실존하는 방식이고, 세계의 원격 효과에 부응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세계의 원격 효과는 사물들 간의 즉자적 상호 지시와 매개 관계라기보다, 현존재가 체험하는 세계의 공간화 운동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그 안에 거주하는 이 세계의 공간화 운동(‘내-존재’의 공간성)을 두 가지 성격에서 주목한다. 즉 ‘소-통’(Ent-fernung, ‘원-근-화’ 혹은 거리 내기와 거리 제거라는 이중 운동으로서의 ‘원격화’)과 ‘방향 열음’(Ausri- chtung)이 그 두 가지 특징이다.(SZ, 140/153) 하이데거는 이 두 가지 특징을 현존재의 공간 체험으로부터 서술해간다. 그것은 현존재가 세계의 원격 효과를 체험할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원격 효과를 자신의 존재 방식 자체로 하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원격 효과를 스스로 실행하면서 세계와 관계 맺는다. 그러므로 공간화하는 것은 세계만이 아니라 거기에 거주하는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 자신이 세계-내-존재라는 점에서 ‘공간적’인 것”이다.(SZ, 151/139)



그렇다면 공간화 운동을 특징짓는 ‘소-통’이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 따르면, “‘소-통’이라는 것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원거리성(근거리성)이나 간격 따위가 아니다. 소-통은 현존재의 존재 틀이다.(…) 소-통이란 어떤 것의 소원한 원거리성을 소멸시키는 것, 즉 가까이함을 의미한다.”(SZ, 140/153) 문제는 그러므로 물리적 거리의 제거가 아니다. 현존재로서의 실존적 인간은 소원성과 폐쇄성 혹은 단절적 배타성을 제거하고 거기에 친근성이 통하도록 하면서 존재한다. 즉 “현존재 속에는 가까움을 지향하는 본질적 경향이 있다.”(SZ, 141/154) 가까움과 친근성을 열어 가는 이 경향이 현존재가 비로소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 자체이고, 그렇게 열려진 친근성의 장소가 현존재가 체험하는 최초의 공간이다. 모든 공간은 이 최초의 공간에서부터 연역되거나 재해석되어야 한다.



현존재가 ‘공간적’이라는 것은 ‘소-통’을 통하여 세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간에 대한 모든 규정과 이해는 그런 소-통하는 원근성에서부터 비롯한다. 그래서 엄격히 말하자면, “공간이 세계의 현상을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공간은 환경 세계의 탈세계화 [추상적 일반화]를 통해서 비로소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며, 공간성은 일반적으로 [원격 효과에 놓여 있는] 세계를 근거로 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리하여 세계-내-존재라는 현존재의 근본틀과 관련하여,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 공간성에 상응하여 공간이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것이다.”(SZ, 151/ 165) 따라서 세계가 공간적이라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절대적 사태가 아니다. 공간성은 현존재가 세계에 관계하는 방식에서 유래한다. 공간이 세계를 구성한다면, “그 까닭은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거리 제거적 소통이요, 다시 말하면 공간적이기 때문이다.”(SZ, 144/158)


현존재는 어떤 친근성 안에서만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고, 그 친근성을 위하여 현존재는 ‘소-통’이라는 원근화 운동을 실행한다. 그 실행은 현존재의 본성 자체에 속하는 공간화 운동이다. 그 공간화 운동이 현존재에 개방되는 세계 자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이 최초의 공간성은 물리적 공간성이 아니다. 이미 현존재가 구하는 친근성은 계량적 단위의 인접성이 아니다. 계량적 의미에서 가까이 있는 것(가령 안경)은 그것보다 멀리 떨어진 것(가령 안경을 통해서 보는 그림)보다 더 멀 수 있다. 정보 통신 매체와 교통 수단의 발달로 지구상의 거리가 하루가 다르게 극복되고 소멸되고 있지만, 그것이 친근성의 증가를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존재가 친근화하는 “원격성은 결코 [물리적] 간격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멀음이 평정되려면, 그것은 일상적 현존재가 자기를 유지하고 있는 소-통과 상관해서 일어난다.”(SZ, 141/154)



하이데거 공간론의 이런 파격성은 단순히 현존재의 소-통 거리와 물리적 거리를 서로 대립시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물리적 거리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현존재의 소-통과 원-근-화에서부터 풀이하는 데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 자체에 있어서도 ‘원격화’와 간격은 현존재와 관련해서 접근될 수 있다. 두 개의 점은, 두 개의 사물과 마찬가지로, 서로 원격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점이나 사물 중 어느 것도 그 존재 양식상 원격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존재자는, 현존재의 소-통 [거리를 내면서 다시 제거하는 원근화] 속에서 눈에 띄고 측정될 수 있는 간격을 가질 뿐이다.”(SZ, 140-1/154) 사물들 간의 원격 관계와 그 관계의 측정은 현존재의 원격화하고 소-통하는 세계 관계에 기초한다. 사물들 간의 차연적 관계는 현존재의 세계 관계 안에서 비로소 현상한다. 즉 친근성을 구하는 현존재 없이는 사물들 사이의 원격 효과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이 원격화는 어떤 방향성을 지닌다. 하지만 사물들 사이에 원격 효과뿐만 아니라 방향과 질서가 성립하는 것도 현존재가 세계에 거주하는 방식에서 비롯된다. 왜 그런가?


현존재가 공간적이라는 것은, 그가 그보다 먼저 존재하는 3차원적 공간의 한 지점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현존재는 ‘배시적 배려’를 통하여 세계와 관계하면서 처음으로 타자들 사이에 소통하고 원근화하는 관계를 산출한다. 현존재는 그런 의미에서 공간적이다. 친근성을 추구하고 거리 제거적 존재 방식에 놓여 있는 현존재는 고립된 실체나 자족적 내면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친근성이 자리하는 ‘환경 세계’(Umwelt) 속에, 그 환경 세계의 타자들이 만드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 존재한다. 현존재의 위치도 그런 관계의 그물망 안에 있고, 그런 한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여기’를 환경 세계의 ‘저기’에 의존해서 이해한다. (…) 현존재는, 그 공간성에 따르면, 우선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다. 그는 저기로부터 자신의 여기로 돌아온다.”(SZ, 144/157) ‘거기’로 향했다 ‘여기’로 되돌아오는 이 배시적 배려의 운동이 거리 제거적 원격 운동에 병행하는 ‘방향 열기’이다. 그런 방향 열음은 거리 제거적 소-통에 속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 소-통과 ‘동근원적’(SZ, 147/161)이다. 현존재가 거주하는 친근성의 공간은 원격적 효과와 차연적 관계의 공간인 동시에 방향성(‘어디로’)을 띠고 있다. 그 방향성은 공간을 회집한다. 그 방향성 안에서 회집되는 공간을 하이데거는 ‘방역’ (Gegend)이라 했다. 그래서 “현존재가 ‘존재’할 때, 그 현존재는 방향을 열면서 소-통하는 자로서, 그때마다 이미 발견된 자기 방역을 가지고 있다.”(SZ, 145/ 159)



만남과 접촉이 돌이나 의자에게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그것들이 위치를 지니지만 ‘방역’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방역을 가진다는 것은 타자와의 ‘친근한’ 차연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방향성을 띤 원격 효과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만남과 접촉 나아가서 ‘교섭’(Umgang, SZ, 143/156)은 그런 친근성과 원격 효과의 공간, 그리고 어떤 ‘거기’를 향하는 가운데 범위를 획득하는 ‘방역’에서만 일어난다. 현존재에 ‘대하여’ 세계가 공간성을 띠고 원격 효과에 놓이는 것은 그가 ‘방역’을 열어놓는다는 조건에서만 세계에 관계하고 그 안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존재가 방역을 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배시적 배려를 통하여 소-통과 방향 열음이라는 공간화 운동 속에 세계와 관계하기 때문이며, 사물들 사이에 친근한 관계를 열어놓는 원격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방역의 공간성을 형성하는 원격 효과와 차연적 매개 관계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 현존재의 세계 내적 거주에서 비롯한다.



데리다가 접촉과 원격 효과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공간론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공간론을 과격화한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원격 효과와 차연적 관계는 더 이상 현존재의 공간성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현존재의 공간성으로부터 사물들 간의 관계를 연역한다는 것은 주관주의 혹은 관념론의 혐의를 받기 쉽다. 데리다는 원격 효과와 차연을 현존재보다 앞서는 사태로, 현존재가 친근하게 이해하는 환경과 방역보다 넓은 범위에서 작용하는 사태로, 그래서 세계의 세계성 자체로 파악한다. 접촉은 현존재로서의 인간 그리고 세계가 이러저러한 공간성을 띠기 이전의 원초적이자 일반적 사태이다. 원격 효과는 현존재의 배시적 배려 이전에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원격 효과는 시원에 있는 것과 파생적인 것의 구분 이전에, 혹은 미래와 과거의 구분 이전에, 그 구분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 조건으로 전제해야 하는 그런 접촉을 낳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적 효과’는 그 접촉을 허락하는 원격 효과를 의미한다. 형이상학 시대에 이 원격 효과는 시공간, 언어, 의식, 사물로부터 추상되었다. 해체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그 잊혀진 원격 효과의 ‘발생적 분리 불가능성’ 혹은 ‘기원적 분리 불가능성’(SM, 92)을 재확인한다.


이런 해체론의 관점에 설 때, 우리는 전통적인 전송과 매개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 과거의 철학은 전송과 매개 이전에 서로 고립된 사물에 먼저 주목한다. 전송과 매개는 고립의 거리 때문에 차후에 요구되는 일이다. 그러나 사물은 매개와 전송 혹은 어떤 관계 이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일까? 데리다에 의하면, 사물은 매개와 전송보다 선행하지 않는다. 사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전송하고 수신하는 것, 매개하고 매개당하는 것, 그리고 그런 매개적 통신 과정에 의하여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즉 타자의 개입이 사물의 존재 가능성과 자기 동일성, 그리고 변화에 대한 선행 요건이다. 타자에 대한 관계가 사물의 규정성과 일탈성을 결정하고, 그런 의미에서 사물보다 앞선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 관계에 대한 해체론적 명칭이 차연이다. 사물들 간의 차연적 관계는 개별적 사물의 성립 조건이자 지각의 조건이다. 매개와 전송은 그런 의미에서 모든 개념 안에, 모든 현상 안에 이미 실행되고 있다. 종래의 형이상학이 구분하던 안과 밖, 자연과 인위, 인간과 기계 등은 서로 교신하고 있다. 데리다적 의미의 ‘오염’은 바로 그 교신 관계에서 비롯되는 ‘접촉’을 지칭한다. 그러나 전송으로서의 차연은 ‘사건적’ 성격을 띠고 있고, 그래서 그것은 사물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이 현상하는 것처럼 나타나지도 않는다. 차연적 관계는 ‘~이다’라는 언어 형식으로 규정되거나 표현되지 않는다.(SM, 87-88) 차연적 그물망에서 타자는 언어를 초과한 채 유령적으로 출몰하거나 접촉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잊거나 의식하지 못할 수 있다.



태초보다 먼저 있어야 할 원격 효과, 탈언어적이자 탈형이상학적 사태인 이 효과는 인간적 표상을 뛰어넘는 전송의 사건이다. 그러나 세계의 유래는 이 사건으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전에 이미 『우편 엽서』에서 이 점을 충분히 개진한 바 있다. 우리는 거기서 이런 구절을 읽는다. “(무엇이) 있게 되자마자, (무엇이) 존재하게 되자마자, 전송과 배달이 일어나고 있고 향방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Dès qu'il y a, dès que Ça donne(es gibt), Ça destine, Ça tend.” 왜 그런가? 타자 없이 존재한다는 것, 타자들이 만드는 원격 통신망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타자로부터 소환되고 타자를 호출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호출기가 모든 인간에게 일반화되고 사물들에까지 장착되었을 때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접속은 떨칠 수 없는 운명이다. 송신과 수신은 이미 “세계이고, 세계가 세계로서 생성되는 운동 C'est le monde, le devenir-monde du monde”(CP, 75) 자체이다.



세계의 생성 자체로서의 송수신적 사태는 언어를 초과하는 탈표상적 성격을 띠고 있어서 사물처럼 현상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근본적 사태를 표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유추나 은유에 의존하여야 한다. 가령 우편 체계와 전신 기술을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이고, 이런 구체적 사례들을 그 탈표상적 진리에 대한 유추와 은유적 표상의 출발점에 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의하면, “우체국은 더 이상 단순히 어떤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전이(轉移)와 모든 교신의 장소이며, 모든 가능한 수사학의 ‘고유한’ 가능성이다.”(CP, 73) 다시 말해서 우편, 전신, 전화는 차연적 원격 효과가 실현되는 방식들이자 장소들이다. 따라서 그 원격 효과는 우편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일 우편이 그 원격 효과에 대한 은유라면, 이는 우편이 그 효과보다 자명한, 그러나 그 효과와는 다른 종류의 사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오히려 모든 비유와 은유 나아가서 모든 언어적 수사의 가능성은 언어에 깃들어 있는 그 원격 효과에서 비롯된다. 다시 말해서 “유령의 비유는 다른 비유들 중의 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비유들 가운데 숨어 있는 비유일 것이다. 이러한 자격에서 볼 때, 유령의 비유는 어쩌면 다른 수사적 무기들 중의 한 가지가 아닐 것이다. 유령에 대한 메타 수사학이란 없을 것이다.”(SM, 194)



원격 효과로서의 유령성이 모든 비유에 들어 있는 비유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유란 다른 영역에 속하는 표현을 빌리는 것, 차용된 용어로 대상의 직접적 지시를 대체한다는 것을 뜻한다. 은유란 아리스토텔레스이래 ‘다른 것에 속하는 말의 전용’으로서 정의되어왔다. 비유, 은유, 유추는 말의 전용과 전이 혹은 장소 이동을 말한다. 데리다는 이런 언어의 은유적 전이와 이동이 철학적 언어 세계에서마저 말소 불가능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언어의 논리적 사용을 향하는 곳에서마저 환원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바 있다. 개념적 언어의 내면에서마저 은유적 추동의 맥박이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은유적 추동은 단순히 언어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유령학은 그것을 존재하는 것 일반에 내재하는 원격 효과로서 해석한다. 원격 효과로서의 유령성은 존재하는 모든 사태와 언어를 성립시키는 처음의 맥박이자 리듬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령의 비유는 다른 비유와 수사학의 기원에 있다. 그리고 은유가 언어 생성의 원천이라면, 은유의 원천으로서의 유령성은 모든 언어의 기원이 될 것이다.



데리다는 『프시케』에서 이 유령성으로서의 원격 효과가 은유와 유추 안쪽에서뿐만 아니라 의식의 내면에서 박동하고 있다는 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Über, meta, tele: 이 말들은 동일한 형식적 질서와 동일한 전달 사슬을 옮겨 적고 있는데, … 그 목록에는 또한 trans를 덧붙여[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이 텔레파시라는 사유의 과정을 생각하기 위해서 전기 전달 매체나 녹음기 매체를 특권적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러나 텔레마틱[전화와 컴퓨터를 조합한 정보 서비스 시스템] 기술은 텔레파시에 대한 패러다임 혹은 구체적 사례가 아니다. 그것은 텔레파시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모든 것은 서로 전화를 걸고 있다).” 이 구절은 프로이트의 후기 정신분석학 강의집에 실린 ⌈꿈과 신비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이 글에서 저자는 텔레파시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가능성 여부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프로이트가 텔레파시라는 신비한 현상을 “무선 전신에 대한 심리적 대응 짝”으로 묘사하거나 “전화상의 말하고 듣기”에 비유하는 대목이다. 데리다는 이 비유를 비판적으로 발전시켜서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무)의식을 차연적 원격 효과의 산물로서 설명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를 위하여 먼저 텔레파시와 텔레테크놀러지간의 비유 가능성을 여전히 문제삼는다. 왜냐하면 텔레파시와 텔레테크놀러지를 공통적으로 특징짓는 원격 효과(‘텔레’)는 이미 은유적 전용의 운동(‘메타페레인’의 ‘메타’)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원격 효과는 이미 은유적 전용 안쪽에서 작용하고 있다. 원격 효과는 번역(‘translation’ ‘transfer’의 ‘trans’, ‘Über- setzung’의 ‘Über’)과 은유적 이동을 동시에 형성하는 요소이다. 따라서 그 효과는 언어로 번역될 수 없다. 모든 언어는 이미 원격 효과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텔레테크놀러지 혹은 원격 기술은 언어적 장소 이동(번역·비유·유추)과 서로 다른 종류의 현상이 아니다. 텔레파시와 구별되는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텔레마틱은 텔레파시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 텔레테크놀러지와 텔레파시는 동일한 사태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래서 그 원격 기술은 원격적 심리 현상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특권적 사례가 될 수 없다. 단지 원격 기술은 신비한 것으로 간주되는 원격적 심리 현상과 마찬가지로 원격 효과라는 근본적 사태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사례들 중 하나에 속한다.


이에 덧붙여 데리다가 지적하는 것은, 텔레파시가 의식이 우연하게 겪는 특이하고 예외적인 경험이 아니라 의식의 ‘고유한’ 본성을 집약하는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즉 의식은 텔레파시에서 명확하고 결정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것처럼 타자들과 지속적인 소통 관계에 놓여 있다. 데리다는 이렇게 적는다. “나를 항상 괴롭혀온 진리는 텔레파시가 없다는 게 가능할까라는 문제에 있다. 자신의 내면 속에 고립되어 존재하는 어떤 것, 그래서 타자에 의해 놀라는 일도 없이, 그래서 말을 할 때는 마치 자신 안에 거대한 화면을 가지고 있는 듯, 또 리모콘으로 채널을 바꾸고 색상 놀음을 하고 그래서 오해가 없도록 그 화면에 말이 굵은 글자로 나타나는 듯, 누구로부터도 즉각 즉각 통보받는 일 없이 혼자 존재하는 어떤 것을 상상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Psy, 247) 쉽게 말해서 유아론적으로 고립되어 있는 내면, 타자와 단절된 자립적 실체, 밖과 교신하지 않는 안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상하지 못한 타자에 의해서 호출을 받고 엉뚱한 통지서를 받는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의식과 무의식은 다같이 멀리 있는 타자로부터 간섭받고 있다.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지나는 원격 효과는 무의식보다 먼저 있고 무의식과 더불어 있다. 텔레파시는 세상보다 앞서는 사태, 의식보다 선행하는 처음의 사태가 감성적 체험(파테인 pathein)의 수준에서 실현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무의식에 대한 이론을 텔레파시 이론 없이 생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두 이론은 혼동될 수도 분리될 수도 없다.”(Psy, 247-248)



그렇다면 원격 효과를 설명할 때 특권적인 것은 텔레테크놀러지가 아니라 텔레파시이다. 텔레파시가 텔레테크놀러지의 원리에 의하여 설명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텔레테크놀러지가 텔레파시의 자명성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 그 자명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텔레파시가 어떤 느낌(파테)으로서 이미 우리의 (무)의식과 신체를 구성하고 관통하는 원격 효과라는 데 있다. “만일 모든 원격적 사태들(téléchoses) 가운데 우리가 몸소 텔레파시에 간여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전송(일탈적 도착 adestination, 도착란 destinerrance, 밀항 clandesti- nation)의 문제를 취급하는 데 있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Psy, 247) 텔레파시가 전송의 문제를 밝히는 데 있어 우위에 있는 것은 다른 점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텔레파시는 텔레테크놀러지보다 전송의 ‘고유한’ 본성에 있는 그대로 부합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전송의 본성은 정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위의 인용이 충분히 암시하는 것처럼, 전송은 일탈성을 띠고 있고 우회와 우연과 우발을 겪는다. 왜 그런가? 전송이란 타자들 간의 원거리 접촉이자 간섭에서 시작하기 때문이고, 이 타자들 간의 차연적 관계는 고정되어 있거나 예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탈구와 분산에서, 유령적 효과에서 시작된다.



해체론이 이해하는 존재론적 사태로서의 전송에는 따라서 항구적으로 확정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다. 다만 메시아적 구조, 도래하는 타자에 개방되어 있는 그런 메시아적 구조만이 있다. 예정된 코드와 프로그램에 의하여 작동하는 원격 통신 기술, 의도에 따라 작동하기도 하고 중단될 수도 있는 텔레 장치는 그런 존재론적 원사태에 비하여 추상적이다. 그래서 만일 프로이트처럼 텔레파시와 전화를 비교한다면 다음과 같은 차이를 덧붙여야 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텔레파시는 끔찍한 전화이다…. 텔레파시라는 전화가 걸려올 때 끊을 수 있다고 확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그 전화는 낮이든 밤이든 접속되어 있다). 또한 그 전화선을 뽑아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Psy, 253) 타자로부터 오는 원격 효과와 차연적 간섭은 처음부터 주관적 의도와 무관하다. 통제될 수 없고 예정할 수도 없다. 이는 타자로 향한 발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송은 도착란을 겪고 일탈의 가능성 속에서 타자로 향한다. 전송은 타자의 밀항을 포함하고, 때문에 전송의 도착은 보류와 착오를 수반한다.







3. 정보화 사회의 기회와 위험: 해체론적 메시아주의



이상으로 데리다가 차연적 원격 효과를 존재·언어·의식에 내재하는 선험적 사태로, 그리고 이를 유령적 사태로 기술하는 대목을 차례로 점검해 본 셈이다. 마지막으로 데리다의 유령학을 구성하는 두 개념, 프로그램과 메시아적 구조에 대한 앞의 논의를 보충하면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프로그램과 메시아적 구조 사이의 차이는 데리다의 전송론에서, 특히 역사론으로 이어지는 그의 전송론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데리다는 그 차이를 강조하면서 그 자신이 계승하는 고전적 역사 전송론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전송론은 한편으로는 헤겔과 하이데거에게서 역사-존재론의 형태를 띠고 등장하는 철학적 전송론을 계승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조이스와 같은 작가들에 의해서 발전된 문학적 언어론에 빚진다. 사실 데리다가 차연론을 본격적으로 원격 통신 이론으로 전환시키고 그래서 타자들 간의 관계를 중단 없이 울리는 전화벨을 통하여 표상하는 것은 조이스론에서였다. 데리다는 최근의 대담에서 조이스에 대한 관심이 자신의 청년기 시절(1953-1954)까지 소급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첫 저서인 후설론에서, 나는 조이스가 언어를 취급하는 방식을 후설과 같은 고전적 철학자의 언어 취급 방식과 비교하고자 했다. 조이스는 역사를, 역사에 대한 요약과 총체화를 가능하도록 만들고자 했는데, 은유들과 언어의 다의적 의미들 그리고 비유법들을 집적해 가는 가운데 그렇게 했다. 후설은 반면 역사성이 언어의 투명한 일의성에 의하여, 즉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순수한 언어에 의하여 가능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조이스가 언어의 애매한 의미들을 집적하는 일 없이는 역사성도 없다고 말할 때, 후설은 전통의 투명성이 없다면 역사성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조이스에 주목한 이유는 이 소설가가 누구보다 언어를 다의적으로 활용하고 은유적 연상 기법을 최대한 구현한다는 데 있다. 그 점에서 조이스는 언어를 엄격한 일의성의 이념과 논리적 이상주의 아래서 표상하는 후설과 대조를 이룬다. 조이스가 언어에 숨겨진 다의적 연상과 우연한 회집의 잠재력에 주목한다면, 후설은 언어적 의미의 초역사적 자기 동일성의 가능 조건들을 탐구한다. 데리다는 상호 대립하는 이 두 가지 언어관 중에서 어느 한쪽을 옹호하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다만 양자간의 대리적 보충 관계와 상호 구속적 긴장 관계를 지적한다.(UG, 27-29)후설이 추구하는 ‘의미의 초역사성’이란 ‘역사 내적 무한 반복성’을 말한다. 이 무한 반복성은 역사적 우연과 생성을 가능케하는 가운데 유지되는 반복성, 그래서 다양하게 펼쳐지는 언어의 역사적 자기 변형과 확장을 인정하는 가운데 요구되는 그런 반복성이다. 반면 조이스가 추구하는 언어의 은유적 일탈과 자유로운 상호 연상 가능성은 다시 어떤 총체적 일의성으로 향한 종합 안에서, 그래서 상승적 매개와 통일 그리고 회집하는 기억 안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조이스가 『율리시즈』와 『피니간의 경야』 등과 같은 작품들을 통하여 이룩한 언어의 은유적 연락망은 기억과 의미와 역사를 총체화한다는 점에서 헤겔적 지양이나 백과사전적 체계 구성과 경쟁한다. 데리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예전부터 조이스는 나에게 가장 거인적인 규모의 시도를 대표하는 사례였다. 그것은 하나의 단일한 작품 안에, 즉 대체 불가능한 단독적 작품의 특수성 안에, (…) 다만 한 종류의 문화가 아니라 여럿의 문화들, 다수의 언어와 문학과 종교들을 모조리 엮어내어 어떤 추정된 총체성을 이룩하려는 시도이다. 이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인류의 기억을 총체적으로 회집하고 정확하게 집적한다는 불가능한 과제를 말한다. (…)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는 종종 『율리시즈』를 헤겔에, 가령 하나의 단일한 회상 행위를 통하여 절대지에 이르려는 시도를 담고 있는 『백과 전서』나 『논리학』에 비교하곤 한다.”(DN, 25)



헤겔의 언어와 조이스의 언어는 다같이 의미의 총체적 매개와 역사적 회상을 꿈꾸면서 우위를 다투고 있다. 양자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어떤 유기적 통일성 안에, 그리고 상호 연락하는 원격 통신의 관계 안에 놓이도록 조직해가면서 인간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헤겔이 하나의 단일한 기억 속에 진리에 대한 시야를 확장해온 정신의 역사를 체계화한다면, 조이스 역시 언어의 무한한 상호 연상과 교신 효과를 이용하여 인류의 정신적 유산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 있다. 양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여전히 유사한 원환 운동과 회집의 장소를 연출하고 있다. 통일적 종합의 효과를 산출하는 것이다. 한 쪽은 일의적 기호들 간의 논리적 함축을 통한 매개의 길을, 다른 한쪽은 애매한 기호들 간의 다차적 연상을 통한 매개들의 길을 걷지만, 양자는 다같이 의미의 역사와 역사의 의미를 어떤 순환적 구조의 교통망 안에서 총체적으로 가두어놓는 것이다.



의미의 매개와 역사적 회상을 어떤 원환적 운동 속에 총체화한다는 것은 사유의 지평을 목적론적 이념 아래 예정하고 한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데리다는 그런 목적론적 매개와 역사적 전승의 가능성을 의심한다. 나아가서 매개와 전승 그리고 전송을 메시아적 구조를 통하여 표상하도록 촉구한다. 메시아적 구조란 탈구와 탈궤를 항구화하는 구조, 따라서 타자의 소멸 불가능한 흔적인 유령성을 낳는 구조이다. 프로그램의 형식과 메시아적 구조, 이 양자는 원격 효과와 텔레커뮤니케이션의 그물망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양자는 혼동되기 쉽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양자를 대립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다시 데리다의 전언을 흐리게 할 수 있다.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메시아적 구조가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 여전히 유령처럼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메시아적 구조의 유령성은 추상되거나 망각되기 쉽다. 그러나 그 망각은 프로그램의 형식과 그것이 조직하는 원격 통신망의 (불)가능 조건을 잊는다는 것과 같다. 목적론적 · 원환적 존재 사유 안에서, 또는 문학적 언어사용 안에서마저, 메시아적 구조는 사상되거나 증발해버리기 쉬운 형태로 잔재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어 가는 데리다의 전송론은 좁은 의미의 정보통신에 어떤 빛을 던져주는가? 데리다의 해체론이 사이버시대에 가져다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단순한 시각에서 보자면, 데리다는 기술적으로 성취된 원격 통신과 정보 그물망을 존재론적으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우리가 기술적 현상으로 경험하는 원격 효과를 데리다는 사물, 의식, 언어, 역사, 그리고 기술 자체에 깃들여 있는 유사 선험적 구성 요소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로써 원격 효과는 세계의 존재 구조 안으로 내재화된다. 이러한 해석을 따르면, 정보화 시대는 서구 문명이 우연하게 도달한 역사적 국면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존재 내재적 구조에서부터 예상되는 필연적 귀결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물의 비밀로서 감추어져 있던 원초적 사태가 정보화 시대라 불리는 이 역사적 국면에 이르러 경험적 수준에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 비밀의 원초적 사태가 원격 효과이다. 데리다는 그것을 차연이라 했고 또 유령적 효과라 했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그 효과를 낳는 존재론적 구조를 메시아적 구조라 했다.



이런 포괄적 구도 안에 놓고 볼 때, 정보통신 기술은 단순히 기술적 현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 유래와 이어져 있는 어떤 ‘자연적’ 현상이기도 하다. 정보통신 기술은 기술적 현상이면서 자연적 현상이고, 자연적 현상이면서 기술적 현상이다. 우리는 정보통신을 기술과 자연의 공속성, 상호 침투성 안에서 표상하여야 한다. 데리다가 말하는 ‘기술에 의한 자연의 숙명적 오염’은 존재론적 사건으로서의 원격 효과가 궁극적으로 함의하는 사태이다.



데리다의 전송론은 그러므로 맥루한이나 비릴리오 등과 같이 정보화 시대를 환영하는 이론가들의 인공-낙원론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반면 자연적 순수성으로 회귀하는 하이데거의 기술 문명 비판과 멀어지고 있다. 보철물과 기계를 통한 인간의 확장과 변형을 내다보는 인공-낙원론자들은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자연과 기술이 상호 대리적 보충의 관계에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 전제는 데리다의 차연론이 자신에 고유한 방식으로 도달하는 명제이다. 그것은 데리다적 전송론의 바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공-낙원론은 해체론적 세계상과 합쳐질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보화 시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론자가 아니다. 데리다는 정보화 시대가 초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위험성을 부각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전송론을 펼쳐가고 있다. 그 위험성은 지리정치학적 조건을 뛰어넘는 문화적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무한한 확장과 심화, 민주주의적 질서의 교란과 시대착오적 계획의 돌발적 출현, 그리고 ‘프로그램’(코드)의 일반적 지배력이 고착화할 타자 환원적 배타주의와 결정론적 사유 등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데리다의 시각에서 볼 때, 정보화 시대는 기회의 시대이자 동시에 파국의 시대일 수 있다. 정보화 시대에는 새로운 야만의 가능성이 움트고 있는 것이다.



정보화 시대가 안고 있는 파국적 위험성과 그 새로운 야만성을 모면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술적이고 인공적인 것을 폄하하고 자연적 순수성을 추구하는 길을 통해서 회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순수성은 어떤 존재론적 신화 안에서 산출된 범주이다. 데리다가 볼 때, 자신의 해체론에 길을 열어준 하이데거는 그런 존재론적 신화로 돌아가고 있다. 사실 근대의 존재론이 잊어버리게 된 고대 그리스의 자연 개념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이데거가 보여주는 사유의 궤적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자연이 기술에 의하여 접촉되는 한에서, 그러므로 기술과 원격 통신 관계에 놓이는 한에서 자연으로서 현상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관계가 첨예하게 현실화되는 장소가 테크놀러지 문명이다. 이 문명 안에서 테크놀러지의 총아인 정보통신 기술은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조건이 되었고 역사적 현실의 조형성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정보화 시대가 안고 있는 위험성을 극복하는 것은 이 시대에 대한 거부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존재론적 유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모색되어야 한다. 데리다의 전송론은 하이데거의 테크놀러지 비판과 더불어 그런 종류의 반성에 해당한다.



우리는 위에서 데리다의 전송론이 유령학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보았다. 유령학은 테크놀러지가 사물로부터 추상한 것을 다시 살아나게 하고 있다. 테크놀러지가 사물로부터 추상하는 것은 사물 안에 숨쉬는 ‘아우라’이다. 코드화되기를 거부하고 조작 가능한 질서로 환원되지 않는 사물 내재적 유일성과 우연성인 것이다. 사물은 그런 자기 은폐적 요소를 통하여 다양한 국지성과 위상학적 다양성을 창출한다. 그런 아우라가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며 원격 효과이며 또한 유령적 효과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유령학을 통하여 근대 형이상학이 탈주술화한 자연을 재주술화하고, 이를 통하여 일원적으로 규정되어오던 공간을 특수성을 띤 다원적 공간으로 표상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데리다의 유령학은 근대적 자연 개념 안에서 망각된 자연 내재적 운동성(자동성)과 자기 은폐적 성격을 복권시키고 있다. 우리는 그런 유령학적 관점에서만 정보화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마술적 효과를 낯설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정보화 시대와 화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순수주의는 로고스중심주의로서의 플라톤주의에서 유래한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서양의 문화에 대한 플라톤주의의 역사적 지배력을 극복하는 다양한 전략을 통하여 플라톤주의가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역사적 전개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정보화 시대는 이미 플라톤주의가 감당하기 어렵고 긍정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정보화 시대의 기원은 궁극적으로 이론적 진리의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평가해온 플라톤주의에 있지만, 플라톤주의는 자신의 존재사적 귀결점인 정보화 시대에 이르러 도태될 위기에 서 있다. 우리가 정보화 시대라 부르는 현재의 역사적 국면은 이 플라톤주의의 황혼기이고, 새로운 새벽을 기다리는 혼돈의 밤이다. 전망이 불투명한 이 정보화 시대는 패러다임 전환기에 고유한 혼란 속에서 새로운 역사적 조형성을 잉태하고 있다. 이 시대에 철학에 요구되고 있는 과제,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과제 는 이 새로운 역사적 조형성을 파악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는 그 조형성 안에서 움트는 미래적 기회와 위험성이 동시에 유래하는 지점으로까지 소급해야 한다는 과제, 그래서 그 조형성 자체를 어떤 필연적 효과로서 바라 볼 수 있는 해석의 관점을 획득해야 한다는 과제를 말한다. 데리다가 이 시대에 띄우는 통신은 그런 과제에 부응하는 모범적 사례이다. 해체론은 우리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사이버 공간을 개간하고 거기에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파종할 수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