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인간의 조건- 한나아렌트

나뭇잎숨결 2017. 3. 14. 10:03

 

 

인간의 조건- 한나아렌트

 

철학적 사유만이 유일한 대안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과, 인간에게 부여된 필연적인 조건이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본성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때문에 필연적 조건들을 통해 인간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녀는 노동-작업-행위를 구분하고 이 요소들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고 또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켜왔는지 사유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생각하게 된 이유는 결국 인간의 사회가 아주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고대와 현대의 문명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현대문명에는 우수함이 있지만 그늘도 깊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하는 현대문명의 문제점은 과학기술의 급진적 발전에 그 원인이 있다. 우주과학과 생명공학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지구’라는 ‘인간의 조건’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종국에는 지구를 버리고 새로운 터전을 선택할는지도 모른다. 생명을 스스로 창조하려는 생명공학 역시 주어진 조건을 탈피해 인간이 스스로의 조건을 새롭게 만들려는 시도를 가능케 한다. 기계문명의 발달로 많은 일들은 자동화되었고,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면서 인간의 노동은 무엇도 증명할 수 없게 됐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실존을 증명했지만 현대에 들어 노동은 더 이상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아렌트는 이런 변환기에서 인간의 조건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의 세 가지 근본활동은 노동, 작업, 행위이다. 노동은 인간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삶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활동이며 작업은 인공적 세계의 사물들을 제공하는 활동이다. 또한 행위는 사물,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정치적’인 활동이다. 세 가지 활동과 각각의 조건들 모두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실존의 가장 일반적 조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고대의 노동이란 인간의 필연성을 대표하는 것이었지만, 한 차원 높은 ‘관조’를 삶의 태도로 삼는 사람과 노동하는 사람을 구분 지었다. 노예 노동이 경제를 유지하고 정치와 철학에 몰두하는 시민들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노동은 그 자체로 상품이 되고 인간의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즉, 노동의 결과물 뿐 아니라 노동력 자체도 상품화되어 팔린다. 그러나 어떤 노동의 결과도 노동하는 동물을 노동의 반복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며 그것은 자연이 부과하는 영원한 필연성이 된다. 또한 근대에 있어서의 소유의 확립을 위해서는 이 끊임없이 소비되는 노동이 예찬되어야 했다. 이 노동사회에서의 노예적 삶은 노동계급이 더 이상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노동계급의 해방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생산성이 극적으로 발전하여 노동자가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도래 하면, 인간은 자유로워질 것인가?

육체의 노동과 작업은 구별된다. 작업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물들은 인공세계를 구성하며 지속성과 가치를 소유한다. 이 객관적 인공세계는 상당 기간 동일성을 유지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정체를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원래 인간은 ‘객관적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알맞은 도구들을 만들어왔다. 그러나 근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계에 스스로 적응해야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계의 운동이 육체의 운동을 강요하며, 기계는 인간 실존의 조건이 된다. 자동화가 더욱 촉진한 이러한 변화는 기계가 세계와 그 사물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지배하고 파괴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계의 세계는 실재세계의 대체물이 되었다.

행위는 인간사의 필멸성의 법칙을 방해한다. 행위는 인간은 반드시 죽지만,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탄생에 대한 인식은 인간을 자연적인 황폐화로부터 구원한다. 근대에 나타나는 두 가지의 세계소외 -지구로부터의 탈출, 공적 영역의 확대와 개인의 내면화-로 인해 근대철학의 흐름은 바뀌었다. 인간은 자신 이외의 어떤 것이나 그 누구와도 직면하지 않는다. 자기 내부에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가지는 것이 근대철학이다. 과거보다 인간이 '행위'하기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성은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책의 말미에는 노동하는 인간이, 작업하는 인간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종교적 색채가 들어있어서 그런지 별로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인간의 조건으로 상정하고 유의미한 분류와 분석을 선보인 점은 훌륭하다. 최근에 읽은 책 중에 제일 어려운 축에 속해서 그런지 독서 후의 뿌듯함도 꽤 크다. 그러면 좋은 책이지 뭐.

 

 

인간은 선한 존재로 태어나 악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악한 존재인가? 왜 어떤 사람은 악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선하게 사는 것인가? 인간이 악해진다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 것인가? 이따금 끔찍한 악행을 접할 때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생각들이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살다 자유를 찾아 18년간 무국적자로 떠돌았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직접 겪었던 전체주의라는 악(惡)을 철학적으로 성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악을 분석했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은 테크놀로지의 시대를 살고 있는 21세기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나 아렌트는 악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하기에 앞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전제 조건을 살피고 인간이 활동하는 삶의 양태를 역사적으로 구분한다. 악 또한 역사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왜 인간은 악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악이 인간의 어떤 부분에 해를 끼치는지,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살피기 위해서다. 저자는 “인간조건은 인간본성과 다르다”고 전제하며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인간조건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아마 지구로부터 다른 혹성으로의 인간의 이주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 노동, 작업 그리고 행위>


저자는 인간 실존의 세 가지 조건을 생명, 세계성 그리고 다원성으로 정의한다. 생명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유기체를 의미한다.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고 있어야 한다. 반면 세계성은 생성과 소멸 즉 태어남과 죽음을 반복하는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벗어나 영속할 수 있는 자기 세계를 말한다. 이것이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는 첫 번째 차이이다. 그러나 세계성은 다원성이 없다면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다원성은 언어와 행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존재, 즉 다른 인간을 의미한다. 종합하면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동시에 자신만의 정신 세계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이를 나눌 수 있어야만 ‘인간’으로서 살아 있다는 뜻이 된다.

 

생명과 세계성, 다원성이라는 조건에서 출발하여 한나 아렌트는 각각의 조건에 고유한 활동 양식이 있음을 주장한다. <인간의 조건>의 주된 내용을 이루는 세 가지 활동양식은 노동(labor), 작업(work) 그리고 행위(action)이다.

 

노동은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자연과 소통하는 기초적인 활동으로, 따라서 자연의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다. 작업은 인간이 만든 세계가 영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일체의 활동을 말하며 수단의 범주에 속하는 도구성의 지배를 받는다. 행위는 각자의 정신세계를 공유하고 교류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인간이 작업을 통해 만들어내는 세계의 목적을 논의하는 기초적인 활동이라고 정의한다. 행위는 노동의 필연성과 작업의 도구성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도록 한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생명과 세계성, 다원성은 인간의 보다 근본적인 조건, 즉 탄생성과 사멸성으로 환원된다. 삶과 죽음이 존재해야만 세 가지 조건이 가능하다는 뜻에서다. 탄생성과 사멸성은 유일하게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인간의 조건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지구는 인간의 조건 중에서도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조건이 된다.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과학과 기술>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과 종교개혁, 망원경을 비롯한 과학의 발전이 동시에 일어난 근대 이후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노동과 작업, 행위라는 활동양식에 담긴 의미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인간은 노동과 작업, 행위를 동시에 행하는 존재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지만,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이루어지면서 노동은 인간의 다른 활동들에 우선하게 되었다. 인간의 노동은 더 이상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소통하는 생산활동이 아니라 소비와 각종 향락을 즐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결과 인간은 스스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갈망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 조건상 결코 노동 없이 유지될 수 없다.

저자는 인간의 고유한 조건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기술을 근본적인 악으로 정의한다. 근본악은 한나 아렌트의 철학이 시작하는 지점으로 이상을 건설하겠다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자기 통제 아래 두고자 하지만 오히려 인간을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모든 것이 여기에 속한다. 과학과 기술 외에 전체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저자는 근본악을 “결코 이해될 수도 없으며 또 자기이익, 탐욕, 시기심, 권력욕, 원한 등의 악한 동기들에 의해 설명될 수도 없다. 이에 대한 인간의 모든 반응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한나 아렌트는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기술적 전체주의가 자신의 전작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비판했던 정치적 전체주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무모하고 어리석다고 지적한다. 한나 아렌트는 “현재 위대한 과학적 연구의 상당수는 인간생명을 ‘인공적’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자녀로 속하게 만드는 마지막 끈조차 제거하고자 한다”고 비판한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인한 인간 실존 조건의 훼손 혹은 상실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선이 사라졌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공적 영역은 단순히 장소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인간이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고 공동의 관심사에 대해 의견을 표하는 행위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인간의 탄생성과 사멸성이 지구라는 공간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공적 영역의 상실은 곧 지구의 파멸을 뜻한다.


또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적 영역의 소멸은 사적 영역의 소멸로 이어지는데 과거 소유를 기본적인 정치적 조건으로 했던 사적 영역이 사유로 대체된 결과 근대의 탈소유화는 새로운 소유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더 많은 탈소유화를 야기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신 세계를 상실했고 한나 아렌트는 이를 자기소외와 대별되는 개념으로 ‘세계소외’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계 소외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 분석한다.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세계 소외는 노동계급의 물질적 빈곤과 정서적 비참함에 기반한 잔인성을 특징으로 하며 개인을 보호하던 가정의 역할을 대체하는 민족 국가의 등장을 가져왔다. 근대 이후 더 이상 인간은 “자기 나라의 시민이지 세계의 시민이 될 수는 없게” 되었다.

 

<철학적 사유만이 유일한 대안>


이처럼 과학과 기술이라는 새로운 근본악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스스로의 조건을 지켜내야 하는가? 한나 아렌트는 근본악을 정의하고 그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극복해야 할 방도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한다. 그리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과 구체적인 실천철학을 제시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편리함에 기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짜 근본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내재한 악한 충동들이 이 생각 없음과 결합할 때 인간세계에 엄청난 재난과 불행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한나 아렌트는 강력하게 경고한다. 전체주의 또한 각 개인들의 정치적 행위능력을 상실케 하는 동시에 정신적 차원에서도 사유하지 말 것을 강제했던 사회였다.

 

인간의 미래에 있어 사유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사유가 활동적 삶 내의 모든 활동들을 능가한다는 확신에서다. 한나 아렌트는 기독교 전통에 근거한 서구사회가 근대로 넘어 오면서 생명을 대신하는 삶을 최고선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삶이 아닌 세계와 세계성을 회복하는 일이 최고의 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삶을 관조할 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행위할 것을 주장한다. “활동적 삶은 자신의 유일한 준거점인 삶에 구속되어 있다는 오로지 이 이유 때문에 인간과 자연의 노동하는 신진대사인 삶 자체는 능동적으로 될 수 있고 자신의 완전한 다산성을 펼쳐 보일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역사적으로 20세기 초반 나치를 경험한 인간 사회가 전체주의라는 공통의 공포를 나누어 갖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에 대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사유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사실이 인류 전체가 공유할 만한 공포이며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할지 사유하는 것이야말로 미래를 위한 가장 깨달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지구와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기술적 전체주의를 제어할 수 없다. 지금부터라도 인간의 조건과 인간들 사이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행위가 가진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이야기하는 결론이다.

히틀러와 나치 시대를 경험한 유대인으로서 근본악을 직접 겪고 철학자로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사유했던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또 다른 형태로서의 과학 기술을 지적한 그의 사상은 철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강한 울림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