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바우만, 고독을 잃버버린 시간

나뭇잎숨결 2012. 9. 3. 07:16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미국 고등교육신문의 웹사이트(chronicle.com)에서 한 달에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문자메시지를 많이 보냈다는 것은 그 소녀가 하루 평균 100여건의 메시지를 보냈거나 깨어 있는 동안 매 10분마다 거의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침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주중이든 주말이든, 수업시간이든 점심시간이든, 숙제시간이든, 심지어 양치하는 시간이든’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결국 그 소녀는 10분 이상은 계속 누군가와 이야기한 셈이고, 이는 그 소녀가 혼자서만 지내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생각과 꿈, 걱정, 희망 같은 것들을 고민하면서 홀로 있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사귀는 형태의 만남이 일단 다양한 형태로 서로 화면을 통해 만나는 방식으로 변화되면서, 사람들이 서로 접촉하는 방식도 피상적인 것이 됐다. 마치 생겨나자마자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행운처럼, 매우 급하게 진행되는 우리들 삶의 방식 때문에 선호하게 된 ‘웹서핑’이라는 표현 수단 중 하나인 트위터에 대한 호감은 급기야 인간들 상호 간의 의사소통 수단마저도 장악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 간의 상호 교제와 그 사이를 묶어주던 유대감이 지니고 있던 친밀함과 심원함, 영속성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트위터, 혹은 새들처럼」 중에서

조지 스완이라는 여성은 매주 패션 주간지 두 종류를 읽으며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수집한 구두를 신거나 핸드백을 매보면서”보낸다. 조지는 화장하는 것을 아주 좋아해서 방에다 립글로스를 무려 20개 정도 두었다고 한다. 애플야드가 기사를 쓸 당시에 조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 자, 어쩌면 당신은 분명 조지 같은 여성들이 무척 많고, 그 뉴스가 전하는 소식도 별로 새로울 게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조지가 바로 그 당시에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아이가 아닌 아이」 중에서

그날 밤 모니카는 잠자리에 누워 있으면서도 뜬 눈으로 밤을 꼴딱 샐 수밖에 없었고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가 아니라 일반 거리에서 살았던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느낌을 받았다.” 결국 담장 뒤에 숨는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증대된 셈이다. 그곳의 거주민들이 아무리 위험을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위험에 대한 공포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광고를 해대는 ‘새롭게 개선된’ 첨단 기술 장치에 의존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 상태는 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점점 더 자신의 주변을 더 많은 첨단 보안 장치들로 둘러싸고 보호하면 할수록 점점 더 그 장치들 중의 어느 하나가 혹시라도 ‘고장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낯선 사람들은 위험하다」 중에서

한 달 동안 무려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 카드대금을 또 다른 신용카드로 돌려막는 대학생, 외모 개선을 위해 성형외과를 찾는 여성들, 질병에 대한 공포를 유발하는 제약회사, 회사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으며 해고되는 노동자들, 낯선 사람들을 피해 ‘외부인 출입 제한 주택지’라는 거대한 담을 쌓고 살지만 항상 그 안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 온라인 친구는 많은데 현실 친구가 전혀 없는 청소년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불안하고 피로한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안개 속과 같은 이런 삶의 위기에서, 누군가가 삶의 기술을 알려주는 지혜롭고 통찰력이 가득한 편지를 보내준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 편지의 발신자가 우리 시대의 최고 지성으로 인정받는 현존하는 최고의 석학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면 또 어떨까.

가족과 함께 있어도, 카페에서 연인과 함께 할 때도,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도 우리는 항상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온라인상에서 누군가와 끊임없이 메시지를 주고받고 인터넷 서핑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제 혼자서 고독을 누리거나 사색하는 방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친구를 만나서도 각자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만난 것일까? 트위터 팔로워가 늘어날수록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이 책은 고독, 세대 간의 대화, 온라인과 오프라인, 트위터, 인스턴트 섹스, 프라이버시, 소비, 자유에 대한 변화하는 개념, 유행, 소비지상주의, 건강 불평등, 신종 플루, 예측불가능한 일과 예측불가능하지 않은 일들, 공포증, 운명과 성격, 불황의 끝…… 등,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첨예하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문젯거리를 다루고 있다. 바우만은 그 이슈들의 의미를 짚고, 오늘이 어떤 미래를 빚어낼 것인가를 우리들에게 띄우는 편지 형식으로 들려준다.

“세상의 모든 것은 액체처럼 끊임없이 유동하며 변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대, 우리가 놓쳐버린 고독에 대하여

우리는 인터넷, 트위터나 페이스북, 휴대전화로 누군가와 끊임없이 접속을 시도한다. 우리는 항상 타인들 그리고 세계와 접속하면서 삶을 꾸린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접속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에겐 외로울 틈조차 없다. 우리가 온라인의 가상 세계와 연결되어 동안 놓쳐버린 것은 없을까? 트위터(Twitter)는 새들이 지저귀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140자 이내의 가벼운 물음과 답변을 주고받으며 누군가와 연결을 유지한다. 스마트폰의 자판을 가볍게 터치하며 마치 새들이 지저귀듯 누군가와 재잘거리는 것이다. 온라인의 가상 세계 속으로 들어올수록 우리의 선택은 순간적으로 쉽게 이루어진다. 어깨에 걸친 ‘가벼운 외투’를 벗어버리듯. ‘새들의 지저귐’ 속에 자신을 방임하는 동안에 우리는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들을 놓친다. 우리가 놓친 것은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 꼭 필요한 숭고한 조건이다.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은 이렇게 우리들이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연결된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동안 외로움과 고독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바우만은 ‘근대성’에 관해 천착해온 유럽의 대표적인 사회학자다. 그는 여전히 ‘유동하는 근대(액체 근대)’라는 사유체계 속에 살고 있다. 그는 지금의 세계를 ‘유동하는 근대 세계’라고 명명한다.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는 패션, 유행들, 물건들, 사건들, 꿈과 희망들, 기회와 위협들, 이 모든 것들은 딱딱한 사물처럼 제 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액체로 출렁이며 흘러간다. 어제의 새로움은 오늘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유동하는 근대’는 우리를 자주 놀라게 만든다. 액체로 흘러가는 세계의 변화 속도가 우리 의식의 속도를 간단하게 추월해버리기 때문이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유동적(액체적) 성격과 인간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를 발표해 주목을 받아왔다.

바우만은 제2의 근대를 이야기하면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부정적 개념을 사용하기보다는 ‘유동하는 근대’라는 긍정적 개념을 사용해 현대사회를 분석했다.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란 기존 근대 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ㆍ제도ㆍ풍속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바우만의 독특한 개념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세상은 갈수록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곳으로 변모하고 있다. 기존의 정치·사회 제도는 빠른 속도로 해체되거나 소멸하고 있다. 정해진 형태를 유지하는 견고성(고체성)과 달리 끊임없이 변화하는 성질을 가진 유동성(액체성)에 빗대어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했던 근대에서 벗어나 안정적이지도 않고 확실한 것도 없는 사회가 됐다는 것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나를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세계, 비밀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웬일인지 우리는 점점 더 내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상태로 떠밀려 간다. 내가 누구인지를 말하는 주변의 목소리들이 많아질 때, 혹은 개인의 비밀들이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와 여기저기 나뒹굴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무심코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익명의 대중에게 중계한다. 그렇게 사적 비밀이 서식할 수 있는 시공을 지워버린다. 프라이버시란 한 개인이나 집단의 정보들을 격리시켜 이를 통해 자신들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능력과 연관된다.

프라이버시가 비밀을 유지할 수 있는 권리와 또 이런 권리가 타자에게 승인되고 인정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때 비밀이 비밀로써 지켜질 수 없다면 프라이버시도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바우만은 “프라이버시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그러한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바로 그처럼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지 않으면 안 되는 영역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프라이버시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무심코 익명인들이 관람할 수 있는 공적인 영역으로 퍼다 나른다. 사적인 영역들을 말살하는 이런 일들이 통제할 수 없는 권력들이 아니라, 프라이버시를 방어해야만 하는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심각성을 간과해버린다.

바우만은 [프라이버시라는 기묘한 사건]이라는 소제목으로 세 번씩이나 연거푸 편지를 쓰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는데, 이는 프라이버시의 위기야말로 삶의 위기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 안에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이 시대의 교육,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을 넘나들며, 바우만 특유의 ‘유동하는 근대’라는 사상으로 이 세계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잔혹하고 불안한 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 바우만이 강조하는 부분은 이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태도에 대한 문제다. 우리들 자신이 각자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사실은 함께 해결하지 않으면 완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처럼 공동의 문제라는 걸 인식하고 함께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처한 이 불안한 유동하는 근대라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그렇다면 이런 태도는 또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바우만은 우리가 여러 선택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성격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저 타인들에게 성격 좋고 인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이 유동하는 근대 시대의 요구들에 과감히 저항하려는 선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성격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성격을 형성하면서 타인과 정말로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들에게 띄우는 마지막 편지에서 카뮈의 표현을 빌려 “자신만의 부조리한 상황에서 홀로 무겁게 돌을 굴려야만 하는 시지프스가 이제는 타인들의 비참한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마주할 수 있는 공간”들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