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황정은, 파씨의 입문

나뭇잎숨결 2012. 9. 2. 07:41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창작과비평, 2012

 

 

 

 

'단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은 날이 365일 중에 298일이나 되는 이 세계는 줄곧 부서져 내리는 섬이고, 이 섬의 한 모퉁이에서 매일 소수점 아래를 정리하며 살고 있다. 그냥 내버려두면 물도 잘 마시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이것저것 만들다가 소설도 쓴다."(황정은)

 

그대는 이 기록을 눈 속에서 발견할 것이다. 나는 눈에 갇혔다. 그대가 부르고 싶은 대로 나를 부르라. 그 남자, 그 기록, 그 물건, 그것, 나는 즉 그다. 그는 이미 많은 얼굴들을 잃어버린 뒤 그 집에 당도했다.(황정은, '뼈도둑' 중)



한국문학에서 황정은은 지금 평단과 독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젊은 작가 중 하나다. 그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결합으로 그 개성을 인정받았고, 첫 장편 [百의 그림자]로 단숨에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고도의 윤리성을 바탕으로 새롭고도 완성도 높은 소설미학을 구축했다’는 고평을 받았다. 그의 발표작들은 사회정치적 관심과 소설적 미학이 성공적으로 합치된 사례로 즐겨 거론되며, 편편이 소재와 소설적 관심에서 다양하고 의미 깊은 변화를 보이며 눈 밝은 독자들을 사로잡아왔다. 그런 9편의 단편이 묶인 이번 소설집 [파씨의 입문]은 그가 받는 주목이 합당함을, 나아가 그가 2010년대 한국소설을 이끌어갈 유력한 작가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소설은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와 함축적인 대화가 먼저 눈길을 끈다. 한밤에 벌어지는 친지들 간의 갈등을 그린 소설집의 첫 단편 [야행(夜行)]부터 그렇다. 소설은 정황에 대한 구구한 설명 없이 간결한 행동 묘사와 생생한 대화만으로,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사건을 낯설고 강한 여운을 남기는 한 편의 부조리극으로 만들어낸다. 그뿐 아니라 모든 소설이 그렇다. 무심한 듯 능청스러운 듯, 간결하고 리듬감있게 흐르는 문장과 대화에 압축된 단단한 긴장감이야말로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다.

내가 언제요.
박씨가 말했다.
마음이 짠하다고 했지, 망가졌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그거예요.
그게 어째서 그게 아닌가. (…)
아니, 글쎄, 그걸로 치자면 말입니다, 하고 한씨가 말했다.
제수씨 쪽이 훨씬 예전부터 망가져 있지 않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 '야행' 중에서)

그러한 긴장은 그의 확연한 특징이라 할 이른바 환상성과 어울려 더욱 두드러진다. [대니 드비토]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죽은 원령(怨靈), 떠오르거나 흐르거나 달라붙거나 매달리거나 하는 유령이다. 그는 생전에 “어쨌든 죽으면, 나는 틀림없이 유도 씨한테 붙을 거다. 난 죽어서도 쓸쓸할 테니까, 유도 씨가 반드시 붙여줘야 돼”라고 말하고, 죽어서 원령이 되어 유도 씨에게 붙어 그의 여생을 지켜본다. 나아가 [낙하하다]의 화자는 아무것도 없는 무한한 시공간 속을 하염없이 낙하하는 중이며,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실은 낙하하는지 상승하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소설은 그 기이한 상황을 부연하거나 치장하지 않고, 다만 담담하게 그들이 내뱉는 나직한 독백을 전할 뿐이다. 그리고 단순해 보이는 문장의 연속 아래 쌓여가던 어떤 묵직한 정서가, 어느 순간이랄 것도 없이 불쑥 터져나온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래서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결국 서서히 사라져가는 이들의 목소리가 말할 수 없이 쓸쓸하고 슬프게 다가온다.

어디든 충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삼년째 떨어지고 있으니 슬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이다. 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엔 뭘 할까 뭐라고 말할까 고마워요 정도면 친절할까. 친절하게 충돌해주어서 고마워요.
(/ '낙하하다' 중에서)

사라져가는, 잊혀져가는 것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작가의 일이다. [옹기전(甕器傳)]은 어느날 무심코 주워온 항아리가 “서쪽에 다섯 개가 있어”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외면하지만 항아리가 점차 사람의 얼굴 형상을 띠어가자 결국 무작정 항아리가 말하는 서쪽으로 가보기로 마음먹는다. 그 길에서 그는 항아리를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만나고, ‘항아리만 보고 있다가는 사람이 못쓰게 된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와, 항아리를 구덩이 속에 파묻는 데 몰두하는 인부들을 만난다. 그러면서 소설은 기이한 존재에 관한 이야기에서 점차 현 시대상황에 대한 선명한 우화이자, 망각되고 묻혀버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탁월한 알레고리로서의 면모를 띤다.

이미 밤. 이 몸은 시방 인간들이 둘러놓은 장막 안에서 이 몸을 더럽히는 세계가 완파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묘생猫生 십오년, 인간으로부터 받은 이름은 몸, 나는 인간의 우방이 아니다.
(/ '묘씨생' 중에서)

타자의 목소리, 타자의 시선이라고 해도 된다. [묘씨생(猫氏生)]은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난 길고양이가 들려주는 묘생(猫生)의 일대기로, 인간에 의해 죽음을 맞는 고양이의 처절한 상황과, 그럼에도 결코 의연함을 잃지 않는 목소리가 대조를 이루며 인간이라는 종의 탐욕을 신랄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여기에, 쇠락한 상가에서 노숙자처럼 살아가면서도 자존을 지키려는 노인의 이야기가 덧씌워져 인간 대 동물로만 한정되지 않는 풍부한 함의와 울림을 낳는다.

환상이나 기괴한 존재 없이 생활에 밀착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도 각별하다. [양산 펴기]는 일일 바자회에서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에 나선 주인공의 하루를 그린다. 순정하고 선한 황정은 소설의 인물이 마주하는 생활전선의 현장이 담백하고 생생하게 묘사되고, 어느덧 바자회 장소 건너편에 시위 인파가 등장해 양측의 소리가 겹쳐 울리는 장면에 이르러, 별안간 현실의 부조리가 낯선 모습으로 드러나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비애를 자아낸다.

노조 사무실 야밤 급습이 웬 말이냐 호화청사 웬 말이냐 노점상 철거민 생존권 보장 비리구청장 물러나라.
실크 팔십 퍼센트 스카프 만원. (…)
로베르따 디 까메르노 웬 말이냐 자외선 차단 노점상 됩니다 안되는 생존 양산 쓰시면 물러나라 기미 생겨요 구청장 한번 들어보세요 나와라 나와라 가볍고 콤팩트합니다 방수 완벽하고요.
아줌마 빤스는 국산이 좋아 국산 사세요.
(/ '양산 펴기' 중에서)

현실에 밀착한 또다른 작품 [디디의 우산]의 주인공 디디는 어렸을 때 도도의 우산을 빌려 쓰고 되돌려주지 못한 일을 오랫동안 마음의 빚으로 담아두고 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도도에게 자기 우산을 빌려준다. 주인공은 그 일을 계기로 도도와 함께 생활하게 되고, 비슷비슷하게 팍팍한 현실에 짓눌려 살아가는 동기생 친구들과 어울린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무력하지만 선량한 이들이 함께 모여 웃는 장면은 서글픈 가운데서도 드물게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장면이다.


그 위로와 연대의 바탕에는 “모두의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들에게 나눠줄 우산을 찾아 신발장을 열어보는 주인공의 마음이 있다. 황정은 소설의 온기는 그렇게 표나지 않게, 그러나 어디에나 드러나 있다. 항아리의 말을 끝내 무시하지 않고 나침반을 들고 서쪽을 찾아가는 [옹기전]의 주인공이 그렇고, 치욕을 감내하고 있는 노인의 발치에서 묘, 하고 우는 [묘씨생]의 고양이가 그러하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팻말을 걸고 선 시위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양산 펴기]의 화자 역시 그렇다. 성적 소수자라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스스로를 유폐시킨 [뼈 도둑]의 화자가 온 세상을 뒤덮은 폭설을 헤치고 사랑을 향해 나아갈 때, 그의 결연함과 숭고한 결단 역시 결국 이와 다르지 않다. 이처럼 작가는 간신히, 겨우 존재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차분히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사려 깊게 말을 고르며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의 언어로 완성해나간다. 그의 맑고 단단한 언어는 그 고집스러울 만큼 사려 깊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실린 표제작 [파씨의 입문]은 결국 이 모든 것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씨는 파씨일 뿐, 파씨로서 발생하고 부단히 파씨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사라질 뿐”이라고 선언하는 주인공 파씨 혹은 작가, 언어 혹은 소설의 시작에 관한 인상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가 이 작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파씨의 입문’이란 제목은 그러므로 황정은이라는 이름의 소설세계의 선언이기도 하고 그 세계로의 초대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직 낯설어 보일 수 있겠지만, 그 매혹에 이끌려 초대를 받아들이고 ‘파씨’의 세계로 ‘입문’하는 독자들에게는, 단언코 오래오래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될 것이다.

 

 

 

 

황정은 소설집 '파씨의 입문', 삼년째 추락하고 있는 '나'.  바자회장 양산 파는 알바…치열한 경쟁사회서 떨궈진 이시대 청춘들과 겹쳐진다. 황정은(35·사진)은 한 권의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와 짧은 장편 <백의 그림자> 두 책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새긴 작가다. 여기에는 한가지 역설이 있다. 그가 소설 속에서 존재감이 희박한 인물들을 창조함으로써 거꾸로 작가로서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는 점이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그의 주인공들은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라 할 법한 존재 방식을 보인다. 성격이 튀거나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씩씩한 것은 황정은 소설의 주인공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은 가만히 숨 쉬고 속삭이듯 말하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희미한 존재들이 독자에게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역설적이다.

 

 새로 나온 황정은의 두 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에서 황정은 소설의 그런 특성은 한층 두드러진다. 가령 <대니 드비토>의 주인공 '나'는 젊어서 죽은 여성 유라의 혼령이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유도 씨가 얼른 죽어서 자신과 같은 혼령이 되는 것."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한 쌍의 원령으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렸지만,(…)확고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유라의 간절한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도 씨는 일찍 죽기는커녕 오래오래 살아남는다.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고, 그 상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으며, 몇십 년에 걸쳐 늙어서는 아내를 먼저 여읜 뒤 스스로는 거동이 불편하게 되어 시설의 신세를 지기에 이른다. 그사이 유라의 혼령은 혼령으로서도 존재감이 희미해져서 급기야는 먼지처럼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그런가 하면 비를 주제로 한 합동소설집에 처음 실렸던 <낙하하다>의 '나'는 어떤가. 삼 년째 어디론가 떨어지고만 있는 그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약없이 떨어지고만 있느니 차라리 "어딘가 충돌해도 좋을 것(…)부서지더라도 충돌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는 그에게는 어쩐지 입사시험에서 낙방을 거듭하는 이 시대 청춘의 안쓰러운 초상이 포개진다.희박한 존재감을 지닌 이들이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란 지난한 노릇이다. 그들의 몫으로 남겨진 사회적 신분이란 철거민이나 비정규직, 노숙자 같은 것이기 십상이다. 황정은 소설의 존재론이 사회적 맥락을 획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창고형 매장의 계약직이었던 <디디의 우산>의 주인공은 "좀더 가벼운 내용의 계약"에 서명하든지 일을 그만두든지 양자택일을 요구받는다. 점장은 말한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인 고용 시스템입니다.(…)회사는 유연하고 여러분은 자유입니다."<양산 펴기>의 주인공은 바자회에서 양산 파는 아르바이트에 나서는데, 바자회장 건너편 구청 앞에서는 노점상과 철거민 등이 시위를 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한 남자가 글자가 적힌 팻말을 목에 걸고 서 있는데, 팻말 글자 중에서 해독 가능한 것은 '생존' 두 글자뿐이다. 그 모습을 가리켜 작가는 이렇게 쓴다: "상당한 기간 목에 걸고 다닌 듯 그의 생존이 너덜너덜했다."

 

표제작인 <파씨의 입문>은

"겨자씨만한 파씨, 파씨의 발생, 조그만 주름의 시작"

을 담은 보고문이다. 춥고 가난한 방에서 생활하는 어린 주인공 파씨는 "연통으로 빨려들어가서 연통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눌어붙어서 연통의 따뜻함의 일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3학년인 그가 국군 아저씨에게 위문편지를 쓰는 대목은 황정은 소설의 존재감 없는 인물들이 존재감 충만한 세계를 향해 던지는 희미한 외침으로 들린다."아저씨도 춥습니까, 거긴 춥습니까, 세계는 춥습니까, 파씨는 세계라는 것은 잘 모르지만 거기가 춥고 아저씨가 너무 추워서 지금 울고 있다면 세계는 빌어먹게 나쁜 곳입니다,라고 씁니다."최재봉 선임기자bong@hani.co.kr사진 창비 제공<한겨레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