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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8 일 마르치아의 성 야고보, 사제, 제1회 / 성녀 가타리나 라보레

나뭇잎숨결 2009. 11. 29. 20:42

축일:11월28 일 마르치아의 성 야고보, 사제, 제1회 / 성녀 가타리나 라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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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일:11월28 일

마르치아의 성 야고보, 사제, 제1회

San Giacomo della Marca Sacerdote

ST. JAMES of the Marches

St. Jacobus de Marchia, C

Monteprandone, Ascoli Piceno, 1394 - Napoli, 28 novembre 1476

(1391 at Monteprandone, March of Ancona, Italy

- 28 November 1476 at Naples, Italy)

Beatified:1624 by Pope Urban VIII

Canonized:1726 by Pope Benedict XIII

 

 

 

마르치아의 야고보(1391 - 1476)는 이탈리아 몬떼 브란도네에서 태어났다.

페루지아에서 3년간 수학하고 피렌체에서 가르치다가 뽀르치웅꿀라에서 작은형제회 착복을 하였다.

그리고 수련기를 까르첼리의 은둔소에서 보냈다.

 

그의 수도 생활은 엄격한 보속의 연속이었고

모든 점에서 사부 성 프란치스꼬를 본받으려 하였고 선교사로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독일에서 성공하였다.

 

십자군 원정때 투르크인들을 거스려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와 함께 설교하였다.

5 만 여명의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고 20만 여명의 무신론자들을 영세시켰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여러가지 합당한 은총을 허락하셨다.

 

그는 여러 교황의 사절로 유럽 제국을 여행하며 기도하였다.

베네딕또 13 세가 시성하였으며 그의 썩지 않는 유해는 나폴리에 보존되어 있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1403번,1369번

*성 요한 카페스트라노 축일:10월23일.게시판1434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St. Francis and the Porziuncola in Assisi

포르치운쿨라의 천사들의 복되신 동정마리아축일:8월2일.게시판1297번

 

야고보는 1394년 9월 Ascoli Piceno 가까이에 있는 Monteprandone에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도미니코였다. 그는 그가 아직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었다. 그래서 목동으로 일해야 했다.

 

그 후 그는 Ascoli의 프란치스칸 수도원과 도미니칸 수도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페루지아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Bibbiena와 Porziuncola에서 작은 형제들과의 접촉을 갖게 되면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였다(1415).

 

그는 플로렌스 외곽에 있는 Monte alle Croci 수도원에서 인문학과 신학을 계속 공부하였으며 1422년 그곳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1431년에서 1458년 사이에 야고보는 이태리의 많은 도시에서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

 

그는 또한 프란치스코 수도회 내에서의 개혁 운동(Observant 개혁 운동)에 있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교황들은 좀 복잡한 선교를 해야 할 때면 야고보를 그 선교지에 자신들의 대사로 보내곤 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가 간 곳은 헝가리,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폴란드이다.

그는 1450년 로마에서 거행되었던 성 보나벤투라의 시성식에 참여하였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은 이태리의 도시들에서 설교를 하는 데 소비하였다.

 

야고보가 주창한 일들 중 한 가지는 “Monti di Pieta”라는 것을 창립한 것인데,

이것은 중세의 은행의 일종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저렴한 이자로 대부를 받아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태리에서 Observant들이 했던 위대한 사회 개혁들 중의 하나로서,

고리대금을 근절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야고보는 1476년 11월 28일 나폴리에서 설교를 하던 중 죽음을 맞이하였다.

베네딕도 13세가 1726년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작은형제회홈에서)

 

성 보나벤투라 축일:7월15일.게시판1274번

 

 

1394년 이탈리아의 몬테브란드네에서 태어난 성 야고보는

법학박사가 된 후 24세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하여 성 베르나르디노 문하에서 수련을 마쳤다.

 

자신을 단련하기 위하여 고행과 기도생활에 엄격하였고 사제가 된 후에는 지방순회설교로 많은 이들을 감화시켰다.

기적을 행하고 성공과 명성을 날렸음에도 언제나 겸손과 가난을 실천했던 성인은 1476년 85세에 선종했다.(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축일:5월20일.게시판1169번

 

 

그는 간갈라 집안이지만 부모는 매우 가난한 서민이었다.

그는 1416년에 아씨시의 프란치스꼬회에 입회하여, 까르체리에서 수련기를 마치고,

피에졸레에서 성 베르나르디노 디 시에나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29세의 나이로 사제가 된 그는 즉시 투스카니, 움브리아 그리고 마르카 등지를 돌며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을 더욱 단련하기 위하여 하루에 3시간만 잠을 잤고,

대부분의 시간을 책 사본하는데 보냈으며, 항상 다 헤어진 의복만을 입고 지냈다.

 

또한 그는 프란치스꼬회와 꼰벤뚜알 프란치스꼬 간의 화합을 위하여 활동한 적도 있다.

또 밀라노의 주교로 천거되었으나 거절하였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THE SAN DAMIANO CROSS

 

마르키아의 성 야고보는 그의 사업과 언변에 있어 위대하고,

교회를 위한 활동과 기적에 있어 많은 이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 성공으로 유럽 제국에서 유명해진 분이다.

그의 고향은 이탈리아의 안코나 주 몬테 브라드네이다. 양친은 매우 열심한 신자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친척되는 한 신부에게 양육되어 초등 교육을 받았으며,

이어 아수코리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고, 후에 페루지아 대학에서 법학을 연구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같은 성공에도 야고보는 결코 마음을 놓지 않고 언제나 겸손하며 경건했다.

이 점을 기특하게 여긴 어떤 부호는 그를 자기 집 가정 교사로 초청하는 한편 피렌체 시청에 좋은 근무처를 알선해 주었다.

이리하여 그의 앞날에는 입신출세의 길이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시 수도생활을 동경해 카르투시오 수도원에 들어갈 것을 마음먹었다.

그런데 몬테 아트베르나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생활을 보고는, 거기에 마음이 쏠리게 되어 마침내 수도원에 입회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아시시 근방인 빈한한 카르첼리 수도원에서 수련을 시작한 것은 1416년이며 나이 24세 때였다.

그곳은 성 프란치스코가 가끔 세속을 피해 홀로 조용히 기도하던 곳이다.

 

야고보도 될 수 있는 한 사부(師父)를 본받아 기도와 묵상과 고행을 했다.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원장인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가 그의 극기 금욕의 혹심함이 건강에 해로움을 줄까 염려해 완화하기를 엄명할 정도였다.

 

야고보는 첫 서원을 발한 후 신학을 연구했는데, 그의 선생은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며,

동료는 카페스트라노의 성 요한 사제로서 한 지붕 밑에서 세 명의 성인이 기거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 세 성인은 교회를 위해 큰 일을 이룩한 분들이다.

 

 

Compagni di San Francesco

 

야고보가 1420년에 서품되자 곧 지방 순회 설교의 명을 받았다.

그로부터 50년 동안 이탈리아,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덴마크,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보스니아, 달마시아, 알바니아 등지를 무대로

맹활악을 하며 죄악과 폐풍을 규탄하고, 이단 사설을 공박하며 각국으로 하여금 십자군에 참가하도록 권유했는데, 한 가지도 실패함 없이 성과를 거두었고,

밀려드는 수많은 군중을 성당에 수용할 길 없어 야외 대 광장을 사용함이 보통이었다.

 

그의 열변에 감동되어 귀화하는 이단자, 이교 신자를 각각 5만 여명에 달했으며, 새로운 영세자 수는 헤아릴 수도 없었고, 특히 북 유럽은 더했다.

또한 북부 유럽 각국에는 초빙되어 간 일도 있고, 또는 교회가 위기에 당면해 교황의 파견으로 간 일도 있었다.

한편 그때문에 많은 신도를 잃게 된 이단자 측은 때로 그의 생명을 빼앗으려 했으나,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충실한 종을 구해 주셨다.

어떤 때는 원수들이 그의 음식에 독약을 타 놓았는데 그가 성호를 그으며 강복하자 그 그릇이 떨어져 두 조각이 되어 위기일발, 생명을 구한 때도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이 외에도 그의 손을 거쳐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한 예로써 아들이 살해되어 비탄에 잠긴 아버지에게 그 아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이 같은 기적을 본 유다인의 하수인은 크게 감동해 온 가족이 천주교로 개종했다.

그는 지방 순시 때 먼 거리도 가급적이면 걸어서 갔다. 그런 노고는 다만 하느님께서만 아실 일이다.

가끔 단식재를 지키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성공과 명성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겸손했다.

따라서 모든 이가 크게 감동하고 그가 설교하는 곳마다 프란치스코회 지망자가 다수 생겼으므로 여러 곳에 수도원을 건립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웅변, 고덕을 겸비한 야고보는 성스러운 친구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이 사망 후 교황의 특명으로 그의 사업을 인수했다.

그 사업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십자군에의 참가를 권유하는 일이었다. 야고보는 카페스트라노의 요한의 사망지인 헝가리로 가서 그 사명을 실행했다.

그 후 그는 사업 보고차 로마로 향했는데, 이탈리아 영토에 발을 딛자 각지에서 그의 설교를 간청해 왔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이들의 청을 듣고 열변을 토해 그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주었다.

야고보는 미래를 통찰하는 은혜를 받았다. 1464년 그 회의 총장 선거 때의 일이다.

사람들은 그를 최적임자로 지명했으나 야고보는 대답하기를

"사본느의 프란치스코 신부가 좋을 것입니다. 그는 후에 추기경이 되고 교황이 될 위대한 인물입니다"했다.

과연 그의 예언이 적중되어 사본느의 프란치스코는 7년 후인 1471년에 교황에 당선되어 식스토 4세가 되었다.

 

야고보는 그 뒤 몸이 허약해져 때로는 완전히 기력을 잃을 정도였으나 최대의 힘을 다해 맡은 바 임무를 이행했다.

1472년에 나폴리 왕이 교황께 청해 야고보로 하여금 자기 나라에 와 설교를 하도록 했는데, 그는 마치 자기 몸을 채찍질 하듯이 이끌고 나폴리에까지 갔다.

그리고 동반자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왕은 예의를 갖추어 환대하고 왕궁 안에서 머물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왕의 후대를 겸손되이 사양하고 프란치스코의 형제들과 함께 수도원에 기거했다.

 

야고보는 그 후 4년간 나폴리와 국내 각 교회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프란치스코회 수사로서 60년, 야고보는 천명이 다해 1476년 11월 26일에 85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유해는 나폴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성당에 안치되어 오늘에 이르며, 아직까지도 안색이 마치 산 사람 같다고 한다.

그 묘에서 여러 가지 기적이 일어났으며 1726년에 시성되었다.(대구대교구홈에서)

 

 

 

 

 

 

 

축일:11월28일

성녀 가타리나 라보레

ST. CATHERINE LABOURE

Santa Caterina Laboure

2 May 1806 at Burgundy, France as Zoe Laboure

- 31 December 1876 at Enghien-Reuilly, France

Canonized ; 27 July 1947 by Pope Pius XII

 

 

성모님과 다정하게 대화하는 성 가타리나 라보레(첫번째 발현)

 

라부레는 프랑스의 팽-레-무티에르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났고, 조에라고 불렀다.

그녀는 학교에 다닌적이 없고, 8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녀는 소위 소녀 가장이 되었다.

1830년, 그녀는 샤티이용에 있는 성 빈첸시오의 애덕 수녀회에 입회하여,가타리나 본명을 얻었고, 파리의 뤼 뒤박 수도원으로 갔다.

 

그녀는 수도원 성당에서 일련의 성모 환시를 보게 되었는데,

이 환시에서 성모님은 무염시태를 표시하고 공경하는 메달을 만들라는 부탁을 여러 차례 하셨다.

 

그녀의 고해신부인 알라델 신부는 이 메달을 만들어도 좋다는 허가를 파리의 켈랑 대주교로부터 받고,

1832년에 처음으로 1500개의 메달을 만든 것이 즉시 백만 개의 메달로 불어나면서부터 저 유명한 기적의 메달이 된 것이다.

 

가타리나의 환시는 대주교가 임명한 특별 위원회로부터 1836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었고,

이 결과 메달은 급속도로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가타리나는 1831년부터 죽을 때까지 앙기앙 요양원에서 천한 일을 하면서 수도생활에 전념하였고,

고해 신부에게만 자신의 환시를 늘 말씀드리고 지도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그녀는 1947년에 시성되었다.(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성 가타리나 라보레의 살아 생전의 모습입니다.

’침묵의 성녀’라 불리웁니다

 

성 가타리나 라보레는 1806년 5월 2일 프랑스 볼르강디 지방 한 농가의 10남매중 여덟 번 째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윈 그녀는 가사일을 도우며 어린 시절부터 새벽 미사를 다니며 신앙심을 다졌다.

 

어느날 그녀는 "성모님, 이제부터는 당신이 제 어머니이십니다"라고 말한 이후로

성모께 대한 사랑과 꼭 한번 성모님을 뵙고 싶다는 강한 원의을 갖기 시작했다.

그후 가타리나는 마침내 사랑의 딸회에 입회,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수녀 수업에 힘쓰며 성모님을 뵙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은 기도할 때나 일을 할 때나 더욱 강해져 갔다.

1830년 7월 18일 밤 잠을 깨운 수호천사를 따라 그녀는 성당으로 인도되어 그 곳에서 성모님을 뵙게 되었다.

 

성모님 발현후 가타리나는 오직 고해 신부님께 말씀드렸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수련기를 마친 그녀는 파견되어 성모님 발현의 비밀을 지킨 채 45년간의 생애를 기도 속에서 기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바쳤다.

 

임종하기 얼마전 가타리나는 45년동안 지켜온 비밀을 원장 수녀님에게 말씀드리고 1876년 12월 31일 70세의 일기로 평화스럽게 숨을 거두었다.

1907년에 시복을 위한 심리가 시작되었고 1933년에 그녀의 무덤을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56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옷과 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성모님의 무릎에 오랫동안 놓여졌던 손은 더더욱 그랬다.

1947년 7월 27일 로마에서 성인품을 받게 되었고, 교황 비오 12세는 성 가타리나 라보레를 ’침묵의 성녀’라고 부르셨다.

 

성녀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셨기 때문에 시성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의 종으로서 매일 깊은 신앙 안에서 성모님의 표양을 따라 겸손하게 사신 그분의 삶이 성녀로 만든 것이다.

 

 

프랑스 파리 뤼드박에 있는 ’사랑의 딸회’ 모원 ’기적의 메달 성당’ 입구에 있는 상으로

성모님과 대화하는 성 가타리나 라보레의  모습입니다. 성모님의  첫번째 발현모습입니다.

 

첫 번째 성모님의 발현

1830년 7월 18일 밤에 잠을 깨운 수호천사를 따라 그녀는 성당으로 인도되어 그 곳에서 성모님을 뵙게 됐다.

그녀는 성모님의 무릎위에 두손을 모으고 2시간 동안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지구본을 들고 계시는 성모님(두번째 발현)

 

두 번째 성모님의 발현

1830년 11월 27일 저녁 5시 30분경 기도 시간이었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양손에 지구 본을 들고 지구위에서 하느님께 전 인류를 바치고 계셨다.

잠시후 지구본은 사라지고 성모님의 손끝에서 나온 빛은 성모님께서 서계시는 지구를 내리 비추었다.

성모님의 머리 주 위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문구가 나타났다.

십자가와 M자도 보았는데 그 아래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장이 있었다.

이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12개의 별이 빛나고 있었다.

 

성모님께서는 발현의 의미를 설명하셨다.

"하느님께 바쳐진 이 지구는 전 세계와 특히, 한 사람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보석이 박힌 반지에서 나오는 빛은 은총을 바라는 것과 그것을 들어주는 은총을 나타냅니다.

빛이 나오지 않는 보석은 바라는 것을 잊었든지 은총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성모님은 사라지시고 보이지 않게 됐지만 그녀 이외에는 이 발현을 아무도 몰랐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이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기적의 메달’을 만들어 보급하여 사람들에게 성모님의 사랑과 힘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성모님의 발현

1830년 12월. 이때도 기도 시간이었다.

성모께서는 자신의 손에서 나오는 빛은 은총의 상징이며 그분의 은총을 구하는 이들의 청을 들어주심을 의미한다고 하셨다.

그녀는 성모님께서 더이상 발현하지 않을 것이며 기도중에 그분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기적의 메달의 보급은, 성모님 발현후 가타리나 라보레는 고해 신부님이신 알라델 신부님께만 말씀드렸다.

신부님께서는 파리의 대주교님께 달려가 기적의 메달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주교님은 곧 기적의 메달을 보급토록 했으며, 자신이 최초로 몸에 착용했다.

 

이때 기적의 메달은 2천개가 만들어져 보급되어 여러 가지 기적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기적으로 인해 교회는 가타리나에게 성모님이 발현하신 11월 27일을 신비한 ’기적의 메달’ 축일로 정했다.

지금도 기적, 병의 회복 등 많은 은총을 전달해 주고 있다.

 

그러나 ’기적의 메달’은 수호신같이 그 자체에는 힘이 없다.

성모님의 힘과 ’기적의 메달’을 착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신앙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홈에서)

 

 

’기적의 메달 성당’ 내부 모습(’사랑의 딸회’ 모원). 프랑스 파리 뤼드박.(오른쪽 옆- 성 빈체시오 상)

 

카타리나 수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성모님의 발현과 관련하여 철저한 침묵을 지켰으며,

성모님의 지시에 따라 그 사실을 그녀의 고백 신부님에게만 말했습니다.

 

46년 동안 성녀 카타리나는 그 메달을 통하여 일어난 불가사의와 기적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자신에게 일어난 성모님 발현의 비밀을 신중하게 지키면서 평범한 소임을 겸손하게 수행하였고,

특히 파리 교외의 Enghien에 수용된 노인들을 헌신적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1876년 12월 31일, 성녀 카타리나는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티없으신 여왕을 직접 뵈옵기 위해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그녀의 시신은 57년이 지난 후에 발굴되는데 몸이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때 2시간 이상이나

복되신 동정 성모님의 무릎에 자기 손을 얹어 놓는 특은을 누렸던 이 성녀에게 죽음조차도 경의를 표하였던 것입니다.

 

카타리나 수녀는 1947년 6월 27일, 교황 비오12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카타리나 수녀가 보여준 삶의 단순성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을 위하여 평범한 소임을 잘 해냄으로써 성녀가 되신 분입니다.

이 ’보통 사람들의 성녀’는 우리 모두를 위한 성화의 비결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성 빈센트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www.dcsvp.org

성 빈센트 드 뽈 자비의 수녀회 www.vincent.or.kr

 

 

 

 

이 기적은 1830년 11월 27일 파리에서 일어난 것으로,

우리의 복되신 성모님께서 성 뱅상 드뽈(St. Vincent De Paul)에 있는

사랑의 자매회의 한 수녀인 성녀 카타리나 라부레에게 발현하신 사건이다.

 

 

 

상아빛 흰 비단옷을 입고 계신 성모님께서는 지구 모양의 작은 구(球)를 딛고 계셨으며, 양손을 내려뜨리고 계셨는데,

귀한 보석으로 꾸며진 그 손에선 빛줄기가 딛고 계신 그 구(球)를 향해 뻗혀 흐르고 있었다.  성모님께서 설명하시길,

 

’이 구(球)는 전 세계 특히 프랑스와 각 개인의 영혼을 나타내는 것’이며,

눈부신 빛줄기는 「나에게 구하는 이들에게 부어줄 은총을 상징하는 것’ 이라고 하셨다.

 

 

이 발현 중에 타원형과 같은 후광이 복되신 성모님을 둘러싸기 시작했는데,

그 위부분에는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호소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어소서!』란 글이 적혀 있었다.

 

그 때, 그 수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이 모양대로 메달을 만들어라."

 

이 메달을 지니는 이마다, 특히 목에다 걸고 다니는 이는 은총을 받을 것이며,

은 믿음을 갖고 그렇게 하는 이에겐 더 한층 풍부한 은총을 받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끝나는가 싶더니,

곧 그 메달의 다른 쪽면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면에는 M자가 적혀 있었고, 가로놓인 막대기 위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두 개의 심장이 있었는데, 하나는 가시로 둘러싸여 있었으며(예수성심),

다른 하나는 날카로운 칼에 찔려 있었다. (마리아 성심),그리고 12개의 별들이 이 모든 형상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성모님이 누리신 특은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그 여인은 바로 성모님 당신인 것이다.

성모님은 모든 죄와 허물에서 벗어난 오묘하고 아름다운 여인으로서,

이를 상기하기 위하여 그분은 상아빛 흰옷을 입고 계시며, 원죄 없이 잉태하신 마리아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성모님은 인류의 어머니로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의 온갖 은총을 지니고 계신다.

성모님 손에서 흘러나오는 눈부신 빛줄기는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발아래 지구를 딛고 계신 성모님은 세상의 여왕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메달 뒷면은 M자는 마리아(Maria)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 위에 십자가가 있음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성모님의 위대한 신비가 나옴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들 두 개의 성심 중 하나는 예수님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모님의 것으로써,

그 두분 사이의 깊은 일치와 닮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그 성심은 골로타의 희생 안에서 서로 밀접히 일치해 있는 것이다.

12개의 별은 복되신 성모님의 성덕과 12사도와, 특별히 성모님을 영왕으로 모신 수많은 성인들이 받게 된 영광의 왕관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메달에서 성모님의 신심의 내용을 살펴 보았다.

원죄 없으신 성모님의 잉태와 전 인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는 인류를 보살피신다는 사실과, 이 지상의 여왕이 되심을 보았다.

 

이 사건은 위대한 루르드 발현을 위하여, 여러 점에서 미리 마련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난 뒤, 드디어 메달이 만들어져서 전 세계에 보급되었으며,

너무나 많은 기적과 은총이 이 메달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사람들은 자연히 이 메달을 ’기적의 메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메달앞면:"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메달뒷면: 십자가, "M"문자와 사랑의 심볼인 2개의 심장,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심볼인 열 두개의 별

 

 

1830년 11월 27일,가타리나라브레에게 발현하실 당시 프랑스는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가치관의 혼란으로 교회의 신앙이 흔들리고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는 등 사회의 변혁기였습니다.

 

성모님은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활짝 펼친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 주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성모님은 이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고,

그 후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기적의 메달(Medaille miraculeuse)’ 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발현으로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이 고조되었으며,

마침내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한지 4년째 된던 해,

1858년 2월11일부터 7월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에서 베르나데트에게 발현하셔서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셨습니다.

 

 

[루르드]마사비엘 동굴

1858년 2월11일부터 7월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의 동굴에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Bernadette.1844~1879)에게 발현하셨습니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지 4년째 되는 해였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고 속속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모 마리아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고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을 ’원죄 없는 잉태된 자’(Immaculata Conceptio)라고 밝히면서 기도와 보속, 회개를 촉구하셨으며 특히 묵주 기도를 권하셨습니다.

그 후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루르드를 방문하였고 기적도 자주 일어났습니다.

 

 

성녀 베르나데트 축일:4월16일(게시판1093번)

 

사적 계시와 성모 발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

게시판 681번참조

 

성모 발현은

성모 마리아가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을 초월한 특이한 방법으로

어떤 특정인에게 나타난 현상으로 교회에서는 여러 곳의 성모 발현과 그 발현 때 이루어진 사적(私的 )계시를 인정한 바 있습니다.

 

사적(私的) 계시는 공적(公的) 계시의 진설성을 확인하고 재조명할 뿐만 아니라

변천하는 시대의 특수 상황에서 신앙이나 윤리에 관한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보조적인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적 계시가 진실한 것이 되려면

언제나 성서와 전승 및 교회의 가르침에 일치하고,또 그것을 통해 교회에 유익을 주고 하느님의 영광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사적 계시 및 이에 결부된 신비 현상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때 흔히 오류나 기만에 빠져 신앙 생활에 큰 해독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성모님의 발현 때 전해지는 메시지가 바로 사적 계시에 해당합니다.

 

이 사적 계시의 진실성을 증거하기 위해 흔히 기적이나 신비 현상 등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들이 복음 자체는 아닙니다.

교회 역시 그 메시지들이 복음을 대치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모 발현의 어떠한 메시지라도 그것이 공식적인 교도권의 교의에 부합되어야만 진정한 사적 계시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마리아 대축일:12월8일

Immaculate Conception of the Blessed Virgin Mary

Immacolata Concezione della Beata Vergine Maria  

(인창동성당게시판791번,1511번)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공로를 미리 입게 하시어

성모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고 찬미하는 날입니다.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구원의 신비를 다시 한번 잘 살도록 준비시키는 대림절의 핵심적인 신심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Immaculate Heart of Mary

예수성심대축일 다음토요일

(2003.6.28.인창동성당게시판1246번)

 

 

원죄 없으신 성모신심 성인들...

*성녀 가타리나 라브레 축일:11월28일(게시판1495번)

*성녀 베르나데타 축일:4월16일(게시판1093번)

*성 막시밀리안 콜베 축일:8월14일(게시판1315번)

*포텐차의 복자 보나벤투라 축일:10월26일(게시판1437번)

*성 프란치스코 안토니오 파사니 축일:11월27일(게시판1494번)

*복자 둔스 스코투스 축일:11월8일(게시판1460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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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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