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다자이 오사무를 다시 읽는다

나뭇잎숨결 2008. 12. 23. 03:41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살아남은 자의 슬픔 (1944)> 중에서 

     

     

     

    혜안을 가진 열 명을 포함한 천 명의 학자가 있습니다.
    그들중에는 한 명의 천재, 한 명의 발명가, 한 명의 창조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식을 가진 사람은 몇 천 명이나 됩니다.
    이 세상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훌륭한 사람과 앞으로 훌륭하게 될
    사람들이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나의 훌륭함이 마음에 듭니다.

    - 에곤 쉴레, <페슈카에게 보낸 편지, 1910 > 중에서

     

     

     



    이중자화상 / 1915 / 종이에 구아슈 / 수채와 연필 / 32.5 x 49.4cm / 에곤쉴레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한 장은 그 사나이의 유년 시절이라고나 해야 할까, 열 살  전후로 추정되는 때의 사진인데, 굵은 줄무늬 바지를 입은 아이가 여러 여자에들에게 둘러싸여(그 아이의 누나들, 누이동생들, 그리고 사촌 동생들로 생각된다.) 정원 연못가에 서서 고개를 왼쪽으로 삼십 도쯤 갸우뚱 기울이고 보기 흉하게 웃고 있다. 보기 흉하게? 그렇지만 둔감한(미추 따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귀여운 도련님이군요."라고 적당히 사탕발림을 해도 그것이 괜한 공치사로는 들리지 않을만큼은, 말하자면 통속적인 '귀염성' 같은 것이 그 아이의 웃는 얼굴에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미추에 대한 감식안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뜻 보기만 해도 금방 몹시 기분 나쁘다는 듯이 '정말 섬뜩한 아이군." 하고 송충이라도 털어내듯이 그 사진을 내던져 버릴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 아이의 웃는 얼굴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하고 으스스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애당초 그건 웃는 얼굴이 아니다. 이 아이는 전혀 웃고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아이는 양손을 꽉 쥐고 서 있다. 사람이란 주먹을 꾁 쥔 채 웃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그저 보기 싫은 주름을 잔뜩 잡고 있을 뿐이다. '주름투성이 도련님' 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만큼 정말이지 괴상한, 왠지 추하고 묘하게 욕지기를 느끼게 하는 표정의 사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표정의 소년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두번째 사진 속의 얼굴, 이건 또 깜짝 놀라 만큼 변해 있다. 교복 차림이다. 고교시절 사진인지 대학시절 사진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미남이다. 그러나 이 것 또한 이상하게도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교복 왼쪽 가슴에 있는 주머니에는 하얀 손수건을 꽂고 등의자에 걸터앉아 다리를 꼭고,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웃고 있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움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소로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ㅏㄹ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ㅔ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겉멋이 잔뜩 들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경박하다고 하기도 그렇다. 교태를 부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멋쟁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부적합하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여자 같은 미모를 가진 이 학생한테서도 역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이상한 미남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또 다른 한 장의 사진이 가장 기괴하다. 이제는 나이를 짐작할 수도 없을 정도다. 머리는 히끗히끗하다. 그런 남자가 몹시 더러운 방(방 벽이 세 군데 정도 허물어져 내린 것이 그 사진에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작은 화로에 양손을 쪼이고 있는데, 이번에는 웃고 잇지 않다. 아무런 펴정이 없다. 말하자면 쭈그리고 앉아 화로에 양손을 쪼이다가 그냥 그대로 죽우간 것 같은 정말로 기분 나쁘고 불길한 냄새를 풍기는 사진이다.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다. 그 사징에는 얼굴이 비교적 크게 찍혀 잇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잇엇는데 이마도 평범, 이마의 주름도 평범, 눈썹도 평범, 눈도 평범, 코도 입도 턱도......아아,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뿐만 아니라 인상조차 없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예컨데 내가 이 사진을 모고 나서 눈을 감는다 치자, 나는 이미 그 얼굴을 잊어 버렸다. 방 벽과 작은 화로는 생각나지만 방 주인의 얼굴은 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져서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않는다. 그려지지 않는 얼굴이다. 만화조차도 안된다.ㅣ 는을 뜬다. 아아, 이런 얼굴이었지. 이제 생각났다. 이런 기쁨조차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눈을 뜨고 사진을 다시 봐도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다. 그저 무턱대고 역겹고 짜증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어진다.

         

          소위 '죽을 상'이라는 것에도 뭔가 점 더 표정이라든가 인상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을 텐데. 사람 몸뚱이에대 짐끄는 말의 목이라도 갖다 붙이면 이런 인상이 되려나? 어쨌든 딱히 무엇 때문이랄 수도 없이 보는 사람을 섬뜩하고 역겹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묘한 얼굴의 남자를 역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2004, 민음사, pp. 9~12.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흔살 이상으로 봅니다.

         

                                                                                                       - 위의 책 pp. 133~134

         

         

         

         

       

       

       

      다자이 오사무를 다시 읽는다. 그지없이 편안하고 엷은 미소까지 띤 얼굴을 한 다자이 오사무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 1948년 6월 19일이니, 올해는 그의 사망 6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에서 아직까지 젊은 층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이자, 국내에도 『인간실격』으로 널리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 이 책 『자화상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그의 문학과 삶을 다시 돌아본다.


      다자이의 작품들은 "시대와 자기의 숙명, 자질에 가장 성실하게 살며 그것을 가장 절실하게 표현한 영원한 청춘문학"으로 꼽힌다. 다자이를 읽는 독자들은 자기와 다자이를 동일시하는 경험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다자이 문학이 오랜 사랑을 받는 토대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다자이는 '절망, 자살, 파멸의 작가'와 동의어가 되었다. 저자는 이 단어들에 진짜 다자이가 가려지는 것, 『인간실격』과 『사양』만이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현실 들이 안타까워 이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다자이의 중기 작품에 해당하는 『옛이야기』와 그 외 여러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유머 감각은 "일본 근대 문학사상 가장 탁월한 유머 감각을 지닌 작가"라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잘 쓰인 한 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사근사근한 저자의 글, 다자이의 참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인용문, 『만년』, 『옛이야기』, 『사양』, 『인간실격』 등 대표 작품의 핵심 부분을 발췌 소개한 2부의 글 들을 읽다 보면, 사후 반세기가 넘도록 이 작가의 무덤에 왜 꽃이 끊이지 않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혼슈의 최북단 아오모리현 기타(北)쓰가루군 가나기촌. 우유로 세수하는, 이 지역 굴지의 대지주의 열째 아이이자 여섯 째 아들로 다자이 오사무(본명 '쓰시마 슈지')는 태어났다(1909). 집안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오즈카스(쓰가루 지방에서 삼남이나 사남을 업신여겨 부르는 말)'로서 유모 다케의 손에서 자란 그는, 형제들 중에서 혼자 촌스런 구석이 있는 자신이 "이 슬픈 부모"인 "다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난 것을 "핸디캡"으로 생각한 다자이는, 중학교에 입학해 교우회지에 소설을 발표하면서 작가가 되기를 결심한다. 고등학생 시절 요릿집을 드나들던 다자이는(여기서 게이샤 오야마 하쓰요를 만나는데, 그녀는 훗날 다자이의 첫 아내가 된다),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에 입학한다(1930). 대학생이 된 그는 작가 이부세 마스지에게 편지를 보내 만나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하는데, 둘은 '쇼와(昭和) 문단사에 유례없는 사제관계'로 맺어진다.


      이때까지 다자이는 아직 본명 그대로 쓰시마 슈지였다. 도쿄 생활과 더불어 시작한 2년여 간의 공산당 활동을 접고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필명을 지은 이유란 게 "소설을 쓰면 집안사람들한테 야단맞으니까"였다. 생활비를 전적으로 집안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겠지만, 다자이 연구자 야마노우치 쇼시는 이에 대해 다자이의 의중이 어떠하건 간에 필명 '다자이'의 본질은 ' 루자이(流罪, 귀양)'에 있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다자이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집안사람들의 뜻을 거역하는 '죄'의 길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머나먼 섬의 '귀양자' 처지에 두는 데서 출발한다는 해석이다.

      다자이는 총 네 번의 자살 미수 일화를 남겼다. 1929년 고등학교 기말시험 전날 밤, 다량의 칼모틴을 음복하여 첫 번째 자살 기도, 1930년 긴자의 카페 여급 다나베 아쓰미와 가마쿠라 해안에서 칼모틴 동반자살을 기도했으나 여자만 사망, 1935년 가마쿠라로 가서 산에서 목을 맸으나 생존, 1937년 아내 하쓰요의 부정을 알고 나서 칼모틴 동반자살을 기도했으나 둘 다 생존. 여기서, 수차례에 걸친 자살 미수가 모두 1938년 이전 즉, 그의 초기 문학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하쓰요와 결별하고 만년(1936)이 문단에서 주목을 받게 된 이후, 다자이는 재혼과 더불어 안정된 생활 속에서 오직 쓰기 위해서 사는 투철한 작가정신으로 무섭게 창작에 몰입한다. 국회의원에 당선한 큰형이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고, 누나와 조카가 죽고, 고향과 연락이 닿지 않아 더 이상 "남한테 송구스러워해야 할 타고난 특권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전시하에서 다자이는 비로소 살아가기 위한 집필에 본격 돌입한다. "잇따른 고향의 불행이, 엎드려 누운 나의 상반신을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개시되어 다자이도 징용 명령서를 받았지만 신체 병약으로 징용에서 면제된다. 태평양 전쟁하의 3년 9개월 동안 다자이는 최고의 생산력을 발휘한다. 발표한 소설의 전문 삭제, 신작 소설의 출판 불허가 등의 사태 속에서도 "촌놈의 오기"로 소설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아, 다자이가 남긴 전작품의 3분의 1가량이 이 기간에 완성된다. 쓰가루, 옛이야기 같은 다자이 중기의 걸작들도 이 시기에 완성한다.

      패전 후 다자이는 '무뢰파(無賴派, 리베르탄)'를 선언한다. 전쟁 중에 군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소위 문화인이나 저널리즘이, 패전 후에는 순식간에 민주주의 예찬자로 시류에 편승하는 작태에 맞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다자이는 고상한 예술을 자처하는 '살롱 예술, 살롱 사상, 살롱의 위선'에 맞선다. "나는 고상한 예술가에 의혹을 품고, '아름다운' 예술가를 부정했다. 촌놈인 나는, 도저히 그런 건, 아니꼬와서 봐줄 수가 없었다." "고상한 살롱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타락이다."


      이후, 안정된 가정생활을 누리는 소시민으로서 전업작가를 꿈꾸었던 다자이의 평화는 중단되고, 다시금 초기의 재래와도 흡사한 파멸적 숙명의 길로 접어든다. 1946년 사양 연재는 다자이를 인기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지만, 1948년부터 심한 불면증과 흉부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급기야 같은해 6월 13일 심야, 야마자키 도미에와 다마가와 조스이(玉川上水)에 투신 동반 자살하여 6월 19일에 시체로 발견된다.(서평)

       

       

      유작집은 만들지 말 것 --- p.32

      나는 멋지게 배반했다. 졸업할 마음은 없다. 신뢰하는 이를 속이는 것은, 미쳐버릴 듯한 지옥이다. --- p.38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사실, 나는 분노로 타올랐다. 며칠 밤을 잠 못 이루며 생각했다. 작은 새를 기르고, 무용을 보는 게 그리도 훌륭한 생활인가. 찌르자. 이렇게도 생각했다. 대악당이라고 생각했다. --- p.40

      『만년』 한 권이 그대의 두 손때로 검게 빛날 때까지 몇 번이고 거듭 애독될 것을 생각하면 아아, 나는 행복하다. --- p.49

      부잣집 자식이라는 핸디캡에, 그만 자포자기해버렸다. 부당하게 혜택받았다는 언짢은 공포심이, 어릴적부터 나를 비굴하게 하고 염세적으로 만들었다. 부잣집 자식은 부잣집 자식답게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는 신앙을 지녔었다. --- p.58

      모모타로는 일본 제일이라는 깃발을 들고 있는 사내다. 일본 제일은커녕 일본 제이 제삼도 경험해 보지 못한 작가가, 그런 일본 제일의 쾌남을 묘사해 낼 턱이 없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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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발 문학이 아니라, 자신을 부끄럽게 고백하는 반면교사의 문학이 좋다.

      끝까지 가지 않은 길은 가지 않은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