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나타나엘이여, 이제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앙드레 지드

나뭇잎숨결 2008. 12. 22.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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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에 기꺼이 붙이기로 한 이 엉뚱한 제목을 나타나엘이여, 오해하지 말라. 제목을 '메날크'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메날크는 그대 자신이 그러하듯 이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인물이다. 이 책에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름은 이 책의 겉장에 나붙은 나 자신의 이름뿐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이 책의 저자로 이 책에 감히 서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허식도 부끄럼도 없이 이 책에 내 마음을 담았다. 그리고 나는 때로 본적도 없는 고장들, 맡아보지도 않은 향기들, 하지도 않은 행동들---혹은 아직 만나본 적도 없는 그대 나타나엘이여---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위선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것들도, 내가 쓰는 이 것을 읽게 될 나타나엘이여. 장차 그대가 어떤 이름을 가지게 될지 알지 못하기에 내가 지금 그대에게 붙여주는 이 이름과 마찬가지로 거짓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는 이 책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밖으로 나가라. 나는 이 책이 그대에게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어느 곳으로부터든, 그대의 도시로부터, 그대의 가정으로부터, 그대의 방으로부터, 그대의 생각으로부터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바란다. 만약 내가 메날크라면, 그대를 인도하기 위해서 나는 그대의 오른손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왼손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고, 우리가 도시들에서 멀어지는 즉시 나는 되도록 빨리 꼭 잡았던 손을 놓고 말햇을 것이다. 자 이제 나를 잊어버려라.

 

나의 이 책이 그대로 하여금 이 책 자체보다 그대 자신에게 --그리고 그대 자신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에- 흥미를 가지도록 가르쳐주기를.

 

- 앙드레 지드,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07, pp. 15~16.

 

헌정하는 말

 

  나타나엘이여, 이제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너 스스로를 해방시켜라. 나를 떠나라. 나를 떠나라. 나는 이제 네가 귀찮다. 너는 나를 붙잡는구나. 너를 위해서 내가 과대평가했던 사랑이 너무 거추장스럽다. 누군가를 교육시키는 체하는 것도 지쳤다. 네가 나를 닮기를 바란다고 내 언제 말했더냐?--- 나는 네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너를 좋아했다. 나는 너에게서 나와 다른 점만을 좋아했다. 교육시키다니! --- 나 자신 이외에 내가 대체 대체 누구를 교육시킨단 말이냐? 나타나엘이여, 네게 말해줄까? 나는 나 스스로를 끝없이 교육시켰다. 지금도 계속이다. 나는 나 자신에게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을 존중한다.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집어던져라. 거기에 만족하지 말라. 너의 진실이 어떤 다른 사람에 의하여 찾아진다고 믿지 말라. 그 점을 그 무엇보다도 부끄럽게 생각하라. 내가 너의 양식들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너는 그걸 먹을 만큼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침대를 마련한다 하더라도 너는 거기에서 잠잘 만큼 졸리지 않을 것이다.

 

   내 책을 집어 던져라. 이것은 인생과 대면하는 데서 있을 수 있는 수많은 자세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라. 너 자신의 자세를 찾아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하지 말라. 너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말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말하지 말고-- 글로 쓸 수 있었을 것이라면 글로 쓰지 말라. 너 자신의 내면 외외의 그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지는 것에만 집착하고, 그리고 초조하게 혹은 참을성을 가지고 너 자신을 아! 존재들 중에서도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할수 없을 존재로 창조하라

 

- 위의 책,  pp. 201~202  

   

 지금부터 1백여 년 전, 국경 너머에서는 한편으로 천계론과 초인의 철학이, 또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가 각기 새로운 세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불안감에 휩싸인 세기말의 파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심미주의 베일 뒤로 드러나는 살로메의 관능적 몸매에 넋을 잃고 있었고, 감각적인 드뷔시의 인상주의 음악과 고행의 시인 말라르메의 상징세계를 통해 무아의 경지를 헤매고 있었다.

  제2제정기의 사회상을 실험실에서 해부하던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제3공화정을 탄핵하고 나선 것이 1898년이었지만 이미 그의 현미경 속에 드러나는 세계도 어느새 신비주의로 채색된 모습이었다. 바로 그 시점에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1897)이 자리한다. 그것은 세기말의 청춘이 시대의 질곡과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올렸던 열광적 기도문이다. 그것은 사회와 집단의 가치를 위한 자아의 희생을 거부함과 동시에 일체를 피안의 질서 속에 편입시킴으로써

  자아와 타아 사이의 구분마저 사라지게 하는 환상주의에서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명철한 의식의 비명이며, 태양과 자연의 고장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작가가 체험한 원초적 생명력에 대한 욕구 표출이다. 그것은 작가의 내면에서 요동치는 젊음이 쏟아내는 잠언이며 경구이고 또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육신과 정신의 해방찬가다. 차라투스트라와도 닮은 메날크의 가르침을 미래의 독자 나타나엘에게 전하는 형식의 이 계시서(啓示書)는 교육적 목표를 지니고 태어났지만 모든 교육의 굴레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치는 역설의 교과서이기도 하다.

  "마음 속의 책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내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작가는 책 머리말부터 "다 읽고 나서는 이 책을 던져버려라. 그리고 벗어나라.. 너의 도시로부터, 너의 가정으로부터, 너의 방으로부터, 너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권유할 뿐 아니라 맺음말에서도 "나타나엘이여, 이제는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것에 구속되지 말고 자유롭게 되라. 나를 떠나라"고 소리치고 있다. 지드 자신이 자라온 엄격한 종교적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치열한 투쟁의 궤적인 <지상의 양식>은 성서의 어조를 간직한 채 기독교가 가르쳐온 신의 존재와 금욕의 윤리를 근본부터 부정한다.

  "나타나엘이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신이라 이름했다" 차라리 범신론적 모습으로 묘사되는 신은 육체가 관능으로 열망해야 할 행복한 삶 그 자체다. "신을 행복과 구분하지 말라. 그리고 그대의 행복을 순간에 두라" 모든 피조물이 신을 가리키고 있으되 드러내지 않는다면, 바라다보되 머물지 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라다보는 대상이 아니라 바라다보는 눈길이다" 그리고 그 눈길은 동정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 모든 것을 사랑하고, 모든 형태의 삶을 만끽하려는 욕망과 그 채워지지 않는 허기만이 젊음의 표징인 것이다.

  메날크의 가르침은 지혜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러나 작가는 나타나엘에게 사랑이 아니라 열광을 가르칠 것임을 끊임없이 다짐한다. 사랑이 결국 질투어린 소유욕으로 해서 대상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고 마는 것이라면 열광이란 스스로를 포함한 모든 것을 버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에 탐닉하는 것이다. 오직 망설임 없이 열광하는 젊음만이 모든 형태의 삶을 욕구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채워질 길 없는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것은 <지상의 양식>뿐이다.

  너무도 순수한 사랑이기에 이루어질 것을 두려워해 죽음으로 이상을 간직하게 될 <좁은 문>의 알리사를 비난하듯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행동할 것. 선악에 개의치 말고 사랑할 것'을 드높여 외치는 이 극단주의 작가는 이미 자신의 열광을 위해 헌신적인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넣게 될 <배덕자>의 마르셀의 행동강령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1897년 발표 당시 <지상의 양식>은 별다른 주목을 받은 작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방황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노래하는 이 잠언서는 20세기로 내던져진 젊은이들의 열광적 삶의 지침이 된다. 새로운 시대의 젊은이들이 도덕률을 뛰어넘는 이 청춘예찬을 정신의 자양으로 성장했고, 그들의 삶으로부터 20세기의 모험이 태어난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의 혁명이 지향하게 될 그곳을 바라보며 육신과 개인을 부정하는 일체의 질곡, 종교와 윤리를 포함하는 일체의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부르짖는 이 '도망과 해방의 안내서"는 결국 19세기로부터의 "도망과 해방"의 선언서였던 셈이다.(이건우,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