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라쇼몽 (羅生門)

나뭇잎숨결 2008. 12. 29. 00:36

 라쇼몽   (羅生門)

              -아쿠다가와 류노스께 (芥川龍之介)

 

 

 

        1. 하인배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하인배처럼 보이는 사나이가 라쇼몽(羅生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였던 교토의 남쪽 정문) 아래서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문 아래에는 이 사나이밖에 아무도 없다. 군데군데 단청이 벗겨진 굵은 기둥에 귀뚜라미가 한 마리 앉아 있을 뿐이다. 라쇼몽이 스자꾸(朱雀) 대로에 있기 때문에 이 사나이 말고도 비를 피하기 위한 장돌뱅이 여자나, 삿갓 쓴 사람들이 두셋 정도 더 있을 법하다. 그런데 이 사나이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2,3년 동안 교토에는 지진이나 회오리바람, 화재라든가 기근 따위 재난이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래서 교또 시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던 것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불상이나 사찰의 기구 등을 쪼개서, 단청이나 금은박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채 한길 가에 쌓아놓고, 땔감으로 팔았다는 것이다.

수도 장안의 형편이 이러했으니 라쇼몽의 수리 같은 것은 누구 하나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결국 내버려둔 채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어져 계속 황폐해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것을 틈타 여우와 너구리가 기어들고 도둑이 숨어 살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고자 없는 시체를 이 문으로 떠메고 와서 버리고 가는 풍습까지 생겼다. 그 뒤로 날이 어두워지면 누구나 꺼림칙해서 이 문 근처에는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 대신 까마귀가 어디선가 떼로 몰려왔다. 한낮에 보면, 수많은 까마귀들이 원을 그리며, 높은 지붕 끝 기와 주변을 날면서 울어대고 있다. 특히 문 위의 하늘이 저녁놀을 받아, 벌겋게 밝아지면 그 모습이 마치 들깨를 뿌린 것같이 뚜렷이 보였다. 까마귀는 보나마나 문 위에 버려진 송장의 살을 쪼아 먹으려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시간이 늦은 탓인지 까마귀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허물어져 가는, 그 허물어진 틈새로 풀이 기다랗게 자란 돌층계 위에 까마귀 똥이 드문드문 하얗게 말라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하인은 계단이 일곱 개인 돌층계 맨 위에 앉아 있었다. 색이 바랜 감색 옷자락을 깔고 앉아, 오른쪽 볼에 도드라진 커다란 여드름을 만지작거리며 멍하게 비가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자는 위에서 '사나이가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하인은 비가 멎었는데도 딱히 어떻게 하겠다는 작정이 없다. 보통 때 같으면 당연히 주인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으로부터 4,5일 전에 해고를 당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당시 교토의 거리는 이만저만 황폐한 것이 아니었다. 이 하인이 오랫동안 고용되어 있던 주인으로부터 해고를 당한 것도 실은 이러한 현상의 작은 여파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나이가 비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비에 쫓긴 사나이가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게다가 이 날의 날씨도 헤이안 시대의 이 사나이의 센티멘탈리즘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신시(申時, 오후 4시 경)가 지나면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아직 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인은 만사 제쳐놓고서라도 당장 내일 생계를 어떻게 마련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마음 속으로 더듬고 있었다. 말하자면 어떻게도 해볼 수도 없는 일을 어떻게든지 해 보려고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아까부터 스자꾸 대로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는다고 할 것도 없이 듣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라쇼몽을 둘러싸고 쏴 하는 소리를 휘몰아온다. 하늘은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점점 낮아진다. 위를 쳐다보면 문의 지붕 비스듬히 내민 기와 끝이 뿌옇고 검은 구름을 무겁게 떠받치고 있었다.

어떻게 해도 할 수 없는 일을, 어떻게든지 해 내야 한다. 그러려면 이것저것 선택의 여유란 있을 수 없다. 그랬다가는 축대 밑이나, 한길 바닥에서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서 이 문으로 실려와 개처럼 버려지게 될 것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면 - 하인의 생각은 몇 번이나 같은 길을 헤매다가는 결국 이 막다른 고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않는다면'은 언제까지나 '않는다면'으로만 남아 있었다.

하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않는다면'의 결단을 내릴 용기가 없었다. 이 '않는다면' 뒤에 당연히 따라오게 되는, '도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할 용기가 아직 생기지 않았던 것이다.

하인은 크게 재채기를 하고, 힘겨운 듯이 허리를 폈다. 저녁이 되어 서늘해지는 바람에 교토는 벌써 화로가 그리울 만큼 춥다. 바람은 문 기둥과 기둥 사이를 저녁 어둠과 더불어 사정없이 불고 지나간다. 단청을 칠한 기둥에 앉아 있던 귀뚜라미도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하인은 몸을 움츠리면서, 누런 여름 윗도리 위에 겹쳐 입은 웃옷의 자락을 추켜올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다.

비바람이 들이치지 않고, 사람의 눈에 뜨일 염려도 없는, 하룻밤 편히 잠잘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여하튼 거기서 잠을 지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다행히 문 위 다락으로 올라가는 사닥다리가 눈에 띄었다. 폭이 넓은, 역시 단청을 칠한 사닥다리였다. 그 위에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미 죽은 사람일 뿐이다.

하인은 거기서 허리에 찼던 긴 칼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짚신을 신은 발을 그 사닥다리에 올려 디뎠다. 장식도 없는, 나무 손잡이의 초라한 칼이었다.

그런 다음 몇 분인가 지난 뒤였다. 라쇼몽의 다락 위로 올라가는 폭 넓은 사닥다리 한가운데에, 한 사나이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여 가며 다락 위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다락 위에서 비치는 불빛이 희미하게 이 사나이의 오른편 볼을 비추고 있다. 짧은 수염 속에 벌겋게 곪은 여드름이 드러나 보였다.

하인은 처음에, 이 위에는 사람 시체가 있을 뿐이라고 마음을 완전히 놓고 있었다.

그런데 사닥다리를 두서너 칸 올라가보니, 위에서 누군가가 불을 지펴 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그 불은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흐릿한, 누런 불빛이 구석구석 거미줄이 쳐진 천장을 비치면서 흔들리는 것을 보면 곧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비 내리는 이런 밤에, 라쇼몽 위에서 불을 지피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인은 도마뱀처럼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조심 가파른 사닥다리를 맨 위까지 기다시피 올라갔다. 그리고 몸을 되도록 납작 바닥에 엎드려서 목을 최대한 앞으로 뽑아 슬금슬금 다락 안을 살펴 보았다.

다락 위에는 소문처럼 송장이 몇 개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다만 불빛이 비치는 범위가 생각보다 좁아서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희미하게나마 그 속에 벌거숭이 송장과 옷을 입은 송장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여자와 남자 시체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 송장들은 모두 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처럼 입을 벌리기도 하고 손을 뻗치기도 한 모습으로 디굴디굴 마룻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한때나마 그것이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깨나 가슴의 불룩 솟은 부분이 희미한 불빛을 받아서, 낮은 부분의 그늘이 한층 더 짙어 보였다. 시체들은 영원한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인은 시체들에게서 풍기는 썩은 냄새에 얼른 코를 가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손은 벌써 코를 가리는 것조차 잊어 버렸다. 강한 호기심이 이 사나이의 후각을 전부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사나이의 눈은 그때야 비로소 시체들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본 것이다. 짙은 자주빛 옷을 입은 노파였다. 몸집이 작고 비쩍 마른, 머리가 하얀 원숭이처럼 생긴 노파였다. 노파는 오른손에 관솔불을 들고 어떤 시체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머리가 긴 것으로 보아 아마 여인의 시체이리라.

 

2. 노파

 

하인은 6할은 공포, 나머지 4할은 호기심에 이끌려 한동안 숨쉬는 것조차 잊고 있었다. 옛사람의 기록을 본 따 말한다면 '머리칼이 굵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노파는 불이 붙은 솔가지를 마루 틈새에 꽂고 그때까지 들여다보던 시체의 머리에 두 손을 대고는 마치 어미 원숭이가 새끼의 이를 잡아주듯이 그 긴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뽑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손만 대면 그대로 쑥쑥 뽑혀나오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한 올씩 뽑히면서 하인의 마음 속에서는 두려움이 조금씩 사라졌다. 그와 함께 이 노파에 대한 무서운 증오심이 조금씩 치솟았다 - 아니 이 노파에 대한 증오심이라고 하면 모순이 있을지 모른다. 차라리 모든 악에 대한 반감이 순간 순간 강도를 더해간 것이다.

이 때 누군가 이 사나이에게 아까 문 아래서 생각하던 문제 - 굶어 죽느냐 도둑질을 하느냐 하는 문제를 새로 끄집어 낸다면 아마 하인은 아무 미련 없이 굶어죽는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만큼 악에 대한 이 사나이의 증오심은 노파가 마룻바닥에 꽂아놓은 관솔불처럼 무럭무럭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이는 물론 노파가 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것을 선악의 관점에서 어느 쪽으로 해석해야 할지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사나이에게는 이 비오는 밤에 라쇼몽 위에서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악이었다. 물론 이 사나이는 아까 전까지 자기가 도둑이 될 생각이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사나이는 두 발로 사다리를 차며 번개처럼 위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는 장식도 없는 긴 칼 자루를 손으로 잡고 성큼성큼 노파 앞으로 다가갔다. 노파가 놀란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노파는 사나이를 보자마자 마치 활시위에 퉁기기라도 한 것처럼 펄쩍 뛰었다.

"요게 어디로 달아나려구!"

사나이는 당황해 달아나다가 시체에 걸려 넘어진 노파를 막아서며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노파는 그래도 사나이를 떠밀고 달아나려고 한다. 사나이는 또 놓칠세라 노파를 다시 떠민다. 둘은 그렇게 시체들 속에서 서로 붙잡고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나 승패는 처음부터 뻔하다. 사나이는 마침내 노파의 팔을 비틀어 강제로 그 자리에 넘어뜨렸다. 닭다리 같은, 뼈와 가죽뿐인 팔목이었다.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말해 봐. 말 안 하면 이거다."

사나이는 노파를 밀어 넘어뜨리고는 갑자기 긴 칼을 쑥 뽑아 하얀 강철 빛 칼날을 눈앞에 들이댔다. 그래도 노파는 말이 없다. 두 손을 부들부들 떨고 어깨로 숨을 몰아쉬면서,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눈을 부릅뜨고 벙어리같이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사나이는 비로소 이 노파의 목숨이 오로지 자기의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명백히 의식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지금까지 험악하게 불타고 있던 증오심을 어느새 식혀 버렸다. 뒤에 남은 것은 다만 어떤 일을 하고 그것이 원만히 이뤄졌을 때의 편안한 자긍심과 만족감뿐이었다. 그래서 사나이는 노파를 내려다보며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게비이시청(檢非違使廳, 교토 시내의 범죄인 감찰과 재판을 하던 관청)의 관리도 아무것도 아니다. 방금 이 문 아래로 지나가던 나그네란 말이다. 그러니 너를 잡아가거나 어쩌고 할 것도 없다. 다만 이 밤중에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만 말하면 되는 거다."

그러자 노파는 눈을 더욱 크게 뜨더니 뚫어지게 사나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꺼풀이 벌개진, 육식조 같이 날카로운 그런 눈이었다. 그리고는 주름으로 거의 코에 달라붙은 것 같은 입술을 마치 무엇을 씹기라도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가느다란 목에 뾰족하게 솟아오른 울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목에서 까마귀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헐떡이며 하인의 귀에 들려왔다.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말이야, 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말이지, 가발을 만들려고 한 것이야."

사나이는 노파의 대답이 뜻밖으로 평범한 것에 실망했다. 그리고 실망과 동시에 아까 느꼈던 증오심이 차가운 모멸감과 함께 마음 속에 되살아났다. 그 기색이 노파에게도 전해졌는지 노파는 한쪽 손에 시체 머리에서 뽑은 긴 머리카락을 아직 움켜쥔 채 두꺼비가 중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로 우물거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물론,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뽑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 있는 송장들은 모두 그만한 일을 당해도 싼 인간들이야. 지금 내가 머리카락을 뽑은 이 계집만 해도 뱀을 네 치씩 토막 내 말린 것을 말린 생선이라고 하면서 다데와끼(太刀帶, 동궁을 지키던 무사들) 부대로 팔러 다녔단 말이야. 염병에 걸려 죽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팔고 다녔겠지.

게다가 말이야, 이 여자가 파는 말린 생선은 맛이 좋다고 갈 때마다 다데와끼들이 다투어서 찬거리로 사갔다는 거야. 나는 이 여자가 한 일을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죽게 생겼으니 어떻게 안 할 도리가 있느냐 말이야. 그러니 지금 내가 한 일도 나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도 하지 않으면 굶어 죽게 생겼으니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러는 것을 이 여자도 잘 알 테니까, 아마 내가 하는 일도 너그럽게 생각해줄 거야."

노파는 대강 이런 뜻의 이야기를 했다.

사나이는 칼을 칼집에 꽂고 칼자루를 왼손으로 누르며 차갑게 이 말을 듣고 있었다. 물론 오른손으로는 볼에 벌겋게 고름이 잡힌 커다란 여드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사나이의 마음에는 차차 어떤 용기가 솟구쳤다. 아까 문 아래 있을 때는 찾아볼 수 없었던 용기였다.

이 용기는 또 아까 이 문 위에 올라와 노파를 붙잡았을 때의 용기와는 전혀 반대로 움직이는 용기였다. 이제 사나이는 굶어 죽느냐, 도둑질을 하느냐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굶어 죽는다는 따위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의식 밖으로 멀리 밀려나 있었다.

"정말 그런가?"

노파의 말이 끝나자 사나이는 비웃는 것처럼 다그쳐 물었다. 그리고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오른손을 여드름에서 떼어 노파의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물어뜯을 듯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내가 네 껍질을 벗겨가도 날 원망하지 않겠지.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판이니 말이야."

사나이는 벼락 치듯이 재빨리 노파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는 발목을 붙잡고 매달리는 노파를 거칠게 송장들 위로 걷어차 버렸다. 사닥다리까지는 불과 다섯 걸음 안팎이다. 사나이는 빼앗은 짙은 자주빛 옷을 옆구리에 끼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가파른 사닥다리를 넘어 땅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잠시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노파가 시체들 가운데서 벌거벗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노파는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 같은, 신음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아직도 타고 있는 불빛에 의지해 사닥다리 입구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짧은 머리카락을 거꾸로 하면서 다락 아래를 살폈다. 밖에는 다만 칠흑 같이 캄캄한 밤이 있을 뿐이다.

하인 차림의 사나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끝>

 

 

 

 

일본 문학의 천재로 알려진 아쿠다가와 류노스께의 출세작.

단순한 줄거리와 구성이어서 언뜻 별다른 인상을 받지 못하고 지나가기 쉬운 작품이다.

그러나 작가의 처녀작이자 출세작인 이 작품은 비오는 밤 라쇼몽이라는 음산한 무대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선연하게 묘사하면서 독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의 결말이 충격적이라고 이해하지만, 사실 이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악의 순환이라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고리를 명백하게 단순화해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芥川龍之介, 1892-1927) :  도꾜대학 영문과 졸업. 단편 <노년> <라쇼몽> 등을 발표하며 일본 문단의 귀재로 평가받았다. 35살의 젊은 나이로 수면제를 먹고 자살하기까지 불과 10년 남짓 활동했으나 150편의 소설과 수필, 평론 등을 발표, 일본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