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무관심한 사랑 혹은 소유하지 않는 사랑도 사랑인가?

나뭇잎숨결 2008. 11. 9. 06:15

 

 1923년 경 Rainer Maria Rilke와 그의 친구들인 Moodie 및 Reinhardt와 함께사진이 시다. <시론>  표지로 코팅해서 쓰고 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그 누구의 잠일 수도 없는 기쁨이여.”  - 릴케가 스스로 쓴 묘비명

 

 

 

 

 

 

 ... 그는 자신의 고독 속에서 사랑하곤 하였다. 매번 혼신을 다하여, 그리고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하여주기 위한] 말할 수 없는 조바심 속에서 사랑하곤 하였다. 그는 서서히, 사랑하는 대상을 그 자신의 감정의 광선으로 불태워 버리는 대신에 그 대상을 투명하게 비쳐보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점점 더 투명하여지는 연인의 형체를 투시하여 저 광활한 곳, 그의 무한한 소유욕에다 이 투명한 연인의 형체가 열어 준 저 광활한 곳을 알아보는 환희에 젖어들어 갔다

Denn er hat geliebt und wieder geliebt in seiner Einsamkeit; jedesmal mit Verschwendung seiner ganzen Natur und unter unsäglicher Angst um die Freiheit des andern. Langsam hat er gelernt, den geliebten Gegenstand mit den Strahlen seines Gefühls zu durchscheinen, statt ihn darin zu verzehren. Und er war verwöhnt von dem Entzücken, durch die immer transparentere Gestalt der Geliebten die Weiten zu erkennen, die sie seinem unendlichen Besitzwollen auftat.

 

 

- 『말테의 수기』중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를 읽기 전에-----릴케의 시 몇 편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한 편, 그리고 릴케 문학에 대한 서언 두 편을 먼저 읽어 본다. 릴케 문학을 읽다 보면 장미의 시인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린 것이 원인이 되어 죽은 것이 아니라 사랑에 찔려 죽었구나,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소유하는 사랑은 상대를 찌르는 것이요, 소유하지 않는 사랑, 무관심한 사랑은 내 심장을 찌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 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 주십시오.//마지막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어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날을 베푸시고, /완성으로 이끄시어 무거운 포도 송이에/ 마지막 단 맛을 넣어 주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는 짓지 않습니다. / 지금 호올로인 사람은 오래도록 호올로 남아서 깨어나,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뭇잎 떨어져 뒹굴면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 <가을 날>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 별 헤는 밤> 에는 공통적으로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등장한다.  릴케의 무엇이 두 시인의 시 속에서 견고한 고독과 동경과 그리움의 이미지로 남을 수 있었을까? 먼저 백석의 시를 읽어 보기로 한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어쩐지 쓸쓸한 것만 오고 간다/이 흰 바람벽에/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이 흰 바람벽에/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젖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눈 짓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슬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곷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 윤동주의 <별 헤는 밤> 중에서

 

 

릴케의<사랑하는 여인 Die Liebende> 과 <두이노의 바가>를  읽어본다.

 

저것은 나의 창문, 방금
나는 가만히 깨어났다.
내가 둥실 뜨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어디까지 나의 삶은 가 닿는 걸까,
그리고 밤은 어디서 시작되는 것인지 ?

주위 모든 것이
아직도 나 자신일 거라고 생각해도 될 듯,
水晶 깊숙이처럼 투명하고
어둡고 고요하다.

아직 별들까지도 나의 내면에
품을 수 있을 듯, 그만큼이나
나의 심장이 크게 보인다. 그렇게 기꺼이
그것은 그이를 다시 놓아주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기 시작한,
마음 속에 간직하기 시작한 그이를.
생소하게, 한 번도 씌어진 적 없었던 듯
나의 운명이 나를 응시한다.

어이하여 나는 이 무한대 아래
놓여져 있을까,
초원처럼 향기를 풍기며
이리저리 일렁이면서,

부르며 동시에 누군가가
그 소리 들을까 조바심하며,
그리고 다른 사람 속에서
파멸하도록 운명지어져.

 

Das ist mein Fenster. Eben
bin ich so sanft erwacht.
Ich dachte, ich würde schweben.
Bis wohin reicht mein Leben,
und wo beginnt die Nacht ?

Ich könnte meinen, alles
wäre noch Ich ringsum;
durchsichtig wie eines Kristalles
Tiefe, verdunkelt, stumm.

Ich könnte auch noch die Sterne
fassen in mir; so groß
scheint mir mein Herz; so gerne
ließ es ihn wieder los

den ich vielleicht zu lieben,
vielleicht zu halten begann.
Fremd, wie niebeschrieben
sieht mich mein Schicksal an.

Was bin ich unter diese
Unendlichkeit gelegt,
duftend wie eine Wiese,
hin und her bewegt,

rufend zugleich und bange,
daß einer den Ruf vernimmt,
und zum Untergange
in einem Andern bestimmt. (SWI. 621f)
 - <사랑하는 여인 Die Liebende>

 

 

  
하여 그리움이 북받치거든 사랑의 여인들을 노래하라, 오래도록
아직 그들의 유명한 감정이 미처 충분히 不滅이 못되고 있음이니.
저들, 그대가 거의 질투를 느끼는 배신당한 여인들, 그대가
충족된 여인들보다 훨씬 더 사랑 많은 이들로 생각했던 여인들을.
끊임없이 새로 시작하라, 결코 다 함이 없을 찬미를.
생각하라, 영웅은 계속 존속해간다는 것을, 몰락마저도 그에게는
존재키 위한 구실에 불과했음을, 최후의 탄생이었음을.
그러나 탈진한 대자연은 이 사랑하는 여인들을
제 안으로 거두어들인다, 이 일을 해내기 위해
두 번 다시 쓸 기력이 없다는 듯이. 그대는 가스파라 스탐파 여인을
충분히 기억해 보았는가,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어느 처녀가 이 사랑하는 여인의 승화된 본보기에서
나도 그분처럼 되었으면 하고 느낄 것을?
마침내 이 가장 오랜 고통이 우리에게
보다 보람 있게 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때가 되지 않았는가,
화살이 힘을 모았다가 飛翔할 때 저보다 더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시위를 견뎌내듯, 우리가 사랑하면서도 연인으로부터 벗어나 떨며
그 일을 견뎌내야 할 때가. 왜냐하면 머무름이란 어디에도 없으므로.

Sehnt es dich aber, so singe die Liebenden; lange
noch nicht unsterblich genug ist ihr berühmtes Gefühl.
Jene, du neidest sie fast, Verlassenen, die du
so viel liebender fandst als die Gestillten. Beginn
immer von neuem die nie zu erreichende Preisung;
denk : es erhält sich der Held, selbst der Untergang war ihm
nur ein Vorwand, zu sein: seine letzte Geburt.
Aber die Liebenden nimmt die erschöpfte Natur
in sich zurück, als wären nicht zweimal die Kräfte,
dieses zu leisten. Hast du Gaspara Stampa
denn genügend gedacht, daß irgend ein Mädchen,
dem der Geliebte entging, am gesteigerten Beispiel
dieser Liebenden fühlt : daß ich würde wie sie ?
sollen nicht endlich uns diese ältesten Schmerzen
fruchtbarer werden? Ist es nicht Zeit, daß wir liebend
uns von Geliebten befrein und es bebend bestehn:
wie der Pfeil die Sehne besteht, um gesammelt im Absprung
mehr zu sein als er selbst. Denn Bleiben ist nirgends. (SWI. 686f.)
                                                        -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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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한 편을  읽어보자.

 


 

  당신이 보내 주신 편지는 며칠 전에야 받아보았습니다. 편지의 내용에 담겨 있는 커다란 친절에 뭐라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나는  글에 어떤 비평적인 견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평을 통해서 예술작품에 다가서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비평을 가하면 다소의 오해가 생기게 마련이지요. 모든 사물은 우리가 믿고 싶어하는 것 이상으로 이해할 수 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사건들은 대부분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역 안에서 발생하며, 무엇보다도 예술작품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릇 예술작품이란 우리의 목숨과 달리 영원한 것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한가지만은  꼭 말하고 싶군요. 당신의 시에는 은밀하게 숨어 있는 개성적인 싹은 있지만, 독자적인 양식은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나의 영혼 속에서>라는 시에는 그 점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시에는 언어와 운율로 독자적인 무언가가 나타나고 있으며, <레오파르디에게 부치는 헌시>라는 시 속에도  그 위대하고 고독했던 분과의 친근감이 나타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 시들 자체가 독자적이지 못합니다. <나의 영혼 속에서>나 <레오파르디에게 바치는 헌시>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동봉해 주신 편지는 당신의 시를 읽으면서 느낀 막연함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내게 자신의 시가 어떠냐고 묻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물어보았겠지요. 또 잡지사에 보내거나 당신의 작품을 되돌려 주면 당연히 불안감도 느꼈겠지요. 내게 충고를 해도 좋다고 했기 때문에 감히 말하는데. 앞으로 그런 일은 되도록 삼가세요. 당신은 자신의 내면이 아닌 바깥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그러지 마세요.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 충고를 해주거나 도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제 생각엔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 속으로 한번 파고들어가 보세요. 그럼으로써 당신에게 자꾸 글을 쓰라고 명령을 내리는 그 근거를 캐보세요. 그런 다음 쓰고 싶은 욕구가 당신의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뿌리가 뻗어 나오고 있는지 또 쓰는 일을 그만두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수 있는지 본인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조용한 밤중에 자신의 정말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스스로 확인해 보십시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글을 쓰지 않으면 차라리 죽을 수  밖에 없다고 그 진지한 의문에 대한 명확한 답이 내려진다면, 주저 없이 당신의 생애를 그 필연에 의지해서 만들어 가십시요.


  당신의 일상에서 비록 쓸모없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그 절실한 충동에 대한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연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런 다음에 보고 겪고 사랑하고 그리고 잃게 될 것을 모방만 하지 말고 직접 표현해 보세요. 가능하면 사랑의 시는 쓰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요. 그리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함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힘든 부분입니다. 왜냐면 훌륭한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들이 허다한 지금 독자적인 것을 표현하려면 무엇보다 힘차고 성숙한 역량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주 선택하는 일반적인 주제는 피하는 것이 좋으며 자신의 평범한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주제를 택하십시오. 당신의 슬픔과 열망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해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나 믿음을 묘사하세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사물들이나 당신 꿈의 영상이나 추억을 적극 활용해 보십시오.


  당신의 생활이 비록 빈곤해 보일지라도 그것을 탓하는 대신 차라리 평범한 생활에서 풍요로움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세요. 창조하는 사람에게 결코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냥 지나쳐버려도 좋을 진약한 장소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신이 감옥에 갇혀 바깥세상을 보지 못하고 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어린 시절의 그 소중한 추억의 보물창고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관심을 기울여 보십시오. 지나가버린 아득한 과거의 사그라든 감정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개성은 더욱 굳어지고 고독은 넓어져 어둠의 공간이 형성될 것입니다. 주변의 시끄러운 소음도 사그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변모된 내명으로부터, 또 가라앉은 자기 세계로부터 진정한 시가 나온다면, 지금처럼 그 시가 어떤지 누군가에게 물어볼 생각은 절대로 하지않을 것입니다. 또한 잡지사에 작품을 보내 관심을 갖도록 애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당신은 오로지 자신의 작품 속에서 보물처럼 소중하고 자연스런 한 조각 생명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내부로부터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예술작품은 매우 훌륭한 것입니다. 또한 시가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따라 그 평가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정말이지 다른 판단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신에게 파고들어 당신 생명의 그 깊은 근원을 느끼도록 하십시오. 그 근원으로부터 창작을 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대답이 어떻든 간에 그대로 받아들이세요. 아마도 당신이 예술가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진실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다음, 외부로부터 그 어떤 보답도 염두에 두지 말고 무겁고 힘든 짐을 기꺼이 지고 가세요. 


창조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의 세계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것을 자기 자신 속에서나 그 자신과 하나가 된 자연 속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고독 속으로 파고든 다음에는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음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생활이 어떠하든 거기서부터 독창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훌륭하고 풍요로우며 넓은 길이 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할 말은 다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충고 한마디 하겠습니다. 부디 일관되고 진지하게 자신 안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 나가세요. 가장 조용한 시간에 당신의 마음 깊은 느낌을 통해서만 답을 구할 수 있는 의문에 대해 절대로 외부로부터 대답이 오길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보다 당신의 발전에 방해되는 일은 없으니까요.


  당신의 편지를 읽던 중에 호라체크 교수님의 이름을 보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습니다. 수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그분에 대한 변치않는 존경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나의 마음을 그분께 꼭 전해주세요. 그분이 아직까지 나를 기어하고 있다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나를 믿고 보내준 당신의 시들을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를 믿어준 그 마음과 진심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나도 낯선 사람을 믿어준 것에 대해 정성껏 보답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변함없는 관심을 가지고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정순 선생 논문 중에서)

 

 

 

 

 

  『말테의 수기』종결부에 릴케는 성서 속의 탕자(蕩子)der verlorene Sohn의 우화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내리고 있다. 탕자의 이야기가 사랑을 거부했던 한 남자에 대한 전설이라는 것이다. 탕자는 사랑 받는 일을 곤혹스럽고 수치스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상대가 “어떤 사람이 되었던 그가 사랑 받는다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자신은 결단코 사랑하는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한다. 탕자에게 사랑이란 “관찰과 관심의 눈길”을 의미하며, 그것은 결국 상대방을 탐욕하는 일이고 자기 자신의 뜻에 유리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훗날 그가 진정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이런 식으로 사랑하고자 한다.


사랑은 여기서 새로운 특성을 얻는다. 그것은 “상대방의 자유를 [보장해주기] 위한 조바심”으로 정의되는, “상대방을 꿰뚫어 투시하고자” 하는 일이다. 상대방을 투명하게 만들어 그것을 완전히 통과하여 나가는 일이란 곧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그것을 지나쳐 나아감, 즉 초월함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무대상성 ”은 바로 탕자가 소년이었을 때 소망했던 “마음의 진정한 무관심의 획득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 감정의 자유를 부여하는 그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저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이 얻었던 어느 특정한 사람을 위한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무관심의 상태, 즉 마음의 평정으로 옮겨오는 일이며, 이때 제 8비가에서 노래하는 저 “순수한 공간" 이 열리는 것이다. 이처럼 연인의 존재가 지니는 가장 궁극적 의미는 그(그녀)가 “열린 곳”으로의 통로가 되어준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랑 속에서 얻게 되는 참된 무관심의 경지는 숱한 밤을 연인을 향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로 지새워야 하며(1/2행), 온갖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견뎌내며 “서서히 배워갔던” 탕자처럼 우리도 배워 터득하여야만 한다. 진정한 방식의 사랑은 “우리에게 과해진 가장 어려운 작업이며 ... 그에 비하건대 다른 모든 작업은 예비에 지나지 않는 가장 궁극적인 것으로서, ... 우리가 오직 배워서만 익힐 수 있다”는 생각이 릴케에게 이미 진작부터 각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Lieben lernen”는 것은 “시각(視覺)의 획득 sehen lernen”과 함께 말테-릴케의 삶과 예술에 임하는 근본 자세이며 존재방식 그 자체였다. 그리고 “바르게 사랑할 줄 아는” 경지에 이르고자 함은 릴케의 온 삶을 동반했던 숙원이었다. 그래서 촉구되는 것이 참된 사랑을 몸소 실천한 “위대한 사랑하는 여인들”을 모범으로 삼아 그들처럼 사랑을 “생산적으로, 보람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목표를 향해 도약할 때만 그 자신의 존재를 충족시킨다. 화살이 어느 목표를 향해 비상하기 위해 활시위로부터 벗어나야 하듯, 인간도 상대방으로부터 놓여날 때 화살이 시위 줄에서 힘을 받듯 연인으로부터 “덤으로 받은 힘”으로 현재의 상태로부터, 그리고 근접한 것을 뛰어넘어 초월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의 의미는 구체적인 인간과의 결합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인에게만 향하는 사랑을 무한대의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존재한다. 릴케가 사랑에서 궁극적으로 바랬던 바는 그것이 “현존재의 보다 확장된 우주공간으로 진입하는 창문이 되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한대로 향해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인간은 “대지의 거대한 부름에 감응할 수 있으며 “거의 모든 사물로부터 그의 감정으로 눈짓하여 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모든 것과의 “연관 Bezug”이 맺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대한 소유를 포기함으로써 모든 것, 세계전체를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릴케의 경우 그의 사랑에 대한 특유하고 다양한 관념은 어느 일정한 틀에서의 이해를 불허한다. 그런 가운데도 릴케가 일관되게 취하여 오는 태도는 충족된 사랑의 포기라는 “가장 안전한” 방식이다. 릴케가 제시하는 그 같은 사랑의 방식에서 그 궁극적 형태로 이해되는 이른바, “소유하지 않는 사랑”의 관념은 중기 릴케 문학의 중심 주제로 감성적인 “그릇된 사랑”의 허무함을 절감하면서(제1, 2비가), 또 무엇보다 배신당하고도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음으로써 무한대를 향해 자기초월을 성취했던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랑의 여인들die große Liebende”의 사랑의 방식에 대한 깊은 감동과 성찰을 통해 형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사랑관은 그 이후 따라온 “말테 후유증”이라 흔히 일컬어지는, 그의 필생의 대작, 두이노의 비가(悲歌가 완성되기까지 10년이 넘는 긴 창작적 침체기 동안에 전기적, 창작적 위기 속에서 오히려 실제적 연인에 대한 사랑을 갈망하기도 하고 좌절을 겪기도 하는 등, 전향과 반전향을 거듭하며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여러 형태의 실험을 거치면서 계속 “작업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달한 사랑의 방식이 인간의 존재방식 그 자체로서 제시된다. 무상성 그 자체인 온 피조물, 요컨대 삶 전체를 전폭적으로 긍정하면서 그것을 예찬하는 자, 그 연인이 되고자 함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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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테의 수기』에 부쳐(시인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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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여, 시인이란 왜 그대들이 고독한지/그것을 말할 수 있기 위해 그대들한테 배우는 사람들이오.…”

어느 해 가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속삭이며 나에게 다가왔다.

“무엇이든 저희들에게 일어나게 해 주소서!/보시옵소서. 생명을 향해 저희들이 몸을 떨고 있음을./한 가닥 광채처럼 한 가닥 노래처럼/저희는 솟아오르고 싶습니다.”

프라하에서 나고 유럽을 두루 방랑했던 눈이 큰 시인 릴케는 내가 문학이라는 두려운 문을 돌연히 열고 들어가 그곳에다 주저 없이 생애를 던지게 만든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첼로의 음률처럼 가슴을 파고드는 그의 시편들과 소설 ‘말테의 수기’를 읽으며, 나는 죽음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인간과 어둡고 불안한 도시 파리의 고독한 풍경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랑과 절망, 죽음의 그림자 속으로 함몰해 가며 저 거대한 명제인 ‘인생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나의 미숙한 생 위에다 젖은 옷처럼 얹어 놓았다.

노르웨이의 한 고독한 시인을 모델로 썼다는 ‘말테의 수기’는 일관된 주제 없이 71편의 단편적인 수기 형태로 이뤄진 소설이다.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사물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독한 시혼(詩魂)이 응시한 풍경들을 내면으로 깊이 끌고 가서 쓴 뻐근한 통찰의 기록인 것이다.

개인의 고유한 삶이나 죽음은 없고,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와 절망적인 병원의 풍경, 환멸 혹은 불안의 체험을 기록한 이 소설은 결국 말테라는 이름으로 대변된 시인 릴케의 위대한 예술가적 몸부림의 기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릴케는 그때 조각가 로댕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건너가서 그를 통해 사물을 보는 눈을 배우게 된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이 도시로 몰려드는데, 나는 오히려 사람들이 여기에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소설엔 잿빛 공간에서 미로와 같은 삶을 영위하는 고독한 모습들이 포착된다. 융단의 그림을 통한 회상이나 죽음에 대한 고찰, 원형극장의 묘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빛을 발한다.

불안한 인간상들이 만들어 내는 빈곤과 죽음의 대량 생산을 목격하며 그는 삶의 절망적인 본질을 응시하게 되고 이는 결국 그의 아름다운 시혼으로 승화된다.

릴케는 한국문학에도 어느 시인보다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어디를 다시 펼쳐도 시퍼런 감각과 성찰이 살아 있는 ‘말테의 수기’에서 나는 시간의 덧없음을 견디어 낸 진정한 고전을 목격하게 된다.

“인생에는 초보자를 위한 학급은 없고 언제나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지극히 힘든 일이 있을 뿐이다”라는 대목을 다시 음미한다. 이어서 고트프리트 벤이 그를 향해 터뜨린 아름다운 탄식을 떠올린다.

“백혈병으로 죽어서, 프랑스의 칠현금이 울어대는 론의 청동색 언덕 위에 묻힌 인물, 위대한 서정시의 샘은 우리 세대가 결코 잊을 수 없는 다음의 시구를 썼던 것이다. 누가 승리를 말할 수 있으랴-극복이 전부인 것을!”

릴케는 장미 가시에 찔린 후 그것이 원인이 되어 죽음으로써 51년이라는 길지 않은 시인의 신화를 완성시켰다.

 

 

스스로 쓴 묘비명이 눈부시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이리도 많은 눈꺼풀 아래/그 누구의 잠일 수도 없는 기쁨이여.”

                                                                      

                                                                                                  


 

 

 

 

 

 

 그동안 누군가를 사랑한 세월이 억울하세요? 그럼 릴케의 시를 천천히 읽어 보세요. 릴케의 충고대로 모든 답은 자신이 자신에게 주어야 합니다.- 자료를 주신 이정순 선생과 문정희 시인에게 감사드립니다. 

 

 

 


 쇼팽, Fantasie Impromptu in C# minor, O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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