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와 詩魂

고백/하인리히 하이네

나뭇잎숨결 2008. 11. 27. 23:03


하인리히 하이네의 <노래의 책>(김재혁옮김, 문학과 지성사)
 
고백

땅거미 앞세우고 저녁은 찾아오고,

물결은 더욱 거세게 날뛰었다,
바닷가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의 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 가슴은 바다처럼 부풀어올랐다.
그때 너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나를 사로잡았다, 너의 아름다운 모습,
그 모습 내 주위 곳곳에서 떠돌고
어디에서나 나를 부른다,
어디에서나, 어디에서나,
세찬 바람소리 속에서나, 거친 파도소리 속에서나,
내 가슴의 한숨 속에서도.
나는 가벼운 갈대를 꺾어 모래 위에 썼다: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하지만 심술궂은 파도가
그 달콤한 고백 위로 덮쳐와
그 말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나약한 갈대야, 먼지처럼 흩어지는 모래야,
사라지는 파도야, 난 이제 너희를 믿지 않겠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욱 날뛴다,
나 이제 이 억센 손으로 노르웨이 숲에서
가장 커다란 전나무를 뽑아
에트나 화산의 불타는 분화구에
담갔다가,
불에 적신 그 거대한 펜으로
캄캄한 하늘에다 쓰리라: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면 매일 밤 그 하늘 위에서
영원한 불의 글자가 활활 타올라,
후대의 자손들이 대대로 환성을 지르며
하늘에 쓰여진 그 말을 읽으리라:

"아그네스, 나는 너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