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인식론과 베르크손의 형이상학

나뭇잎숨결 2024. 2. 11. 11:22

인식론과 베르크손의 형이상학 *


차건희 서울시립대 철학 교수


요약문



본 논문은 화석화, 정형화되어 그 운동성을 상실한 베르크손주의와 철학자 베르크손의 사유가 갖는 원초적 생동감 사이의 차이를 부각시켜서, 그를 지금 여기에 되살아 움직이게 하려는 시도이다.

베르크손 철학의 중심개념인 '지속'과 '직관' 중에 어느 것이 우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소위 '후기베르크손주의자'에 속하는 들뢰즈는 '베르크손주의'를 '방법으로서의 직관'에 의거하는 철학으로 간주하였지만,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의 '지속의 직관'은 인식대상에 선행하는 일종의 인식방법이 아니라, 존재와 인식이 만나는 ― 인식이 형이상학이 되는 상황으로서 이른바 '형이상학적 경험'이다.

철학이 경험에 근거한다는 것은 실제적이며 살아있는 것이 갖는 복잡다단함의 질서에 근접함을 뜻한다. 이와 같이 실재에 도달함, 다시 말해 형이상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방법이라는 도구가 먼저 구비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존재 자체에 근접하려는 구체적 사유는 전진하는 그 운동이 스스로의 보증이 되기 때문에 대상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지만, 존재와의 접점이 전혀 없는 철학은 인식론으로 비대해질 수밖에 없다. 요컨대 베르크손에 있어서 철학적 방법은 실재에 대한 사유에 내재적이므로, 방법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이다.

베르크손 철학에서 '직관'은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을 통해 체계적 단일성이 아닌 실재의 단일성, 다시 말해 '실제적 지속'의 단일성에 도달한다. 결국 철학함이란 '직관의 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 안에 자리잡는 것이며 실재를 그 본질인 운동성 안에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이 때 '직관'은 우선 내적 영역을 대상으로 삼는다. 스스로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는 내부적 정신세계야말로 '직관적 사유'가 목표로 삼는 '실제적 지속'의 세계이며 베르크손이 창조와 자유의 세계라고 규정하는 철학의 고유영역이다.

끝으로 '직관'을 플라톤적인 '나눔의 방법' 으로 보고 칸트의 '초월적 분석'과도 연결시키는 들뢰즈의 입장에 대해서 본 논문은 직관이 '일치'이며 '합일'임을, '인식'은 '거의 존재'일 수 있음을 보인다. 인식과 존재가 분화되기 이전의 '단일성'이란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절대'의 단일성이며, 이와 같은 절대적 현전이 바로 최초 직관의 순간에 해당한다. 결국 '직관적 인식'은 '직접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며, 그로부터 출발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운동이 바로 베르크손의 형이상학이다.



※ 주요어 : 인식론, 형이상학, 지속, 직관, 인식, 방법, 존재, 실재





I. 베르크손주의



철학사는 제각기 동일한 철학들이 연속적으로 다양한 모습을 하고 등장하는 무대와 같다. 특히 플라톤 철학, 토마스 철학, 칸트 철학 등은 동시대적 시각과 요구에 의해서 재평가되고 채색된 후에 '신(新)'자를 앞에 붙이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가! 물론 베르크손(Bergson, Henri, 1859∼1941)의 철학도 다양한 국면들을 거쳤음이 틀림없는데, 그 최초의 국면은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소르본에서 박사학위논문을 발표할 때나 대중 앞에 『창조적 진화』를 내놓을 때, 베르크손은 철학에도 분명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있음을 통감하였다.1) 실재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을 찾아 나서는 철학자에게 소위 신칸트학파와 신토마스주의자들의 소극적 또는 적극적 저항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 잠시 어려웠던 '오해와 갈등의 시기'를 지내고 베르크손은 철학사상 초유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영예의 시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철학자의 말년에 이미 '망각의 시기'는 시작되어서 비록 그에 관한 학문적 연구들이 아직까지 꾸준히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한 때 혁명적인 '신(新)철학'으로까지 불리었던 '베르크손주의'는 그 운동성을 상실하여 화석화되고 '지속의 철학자'는 살아 숨쉬지 않는 철학자들의 그 영원한 회랑(回廊)에 자리잡게된 듯 보인다. 최근에 철학자의 유언을 재고하면서까지 그가 금지시켰던 '강의록'의 출판을 시작하게된 것은 그가 이미 '역사적 철학자'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를 지금 여기에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려는 취지로 이해해본다.

1959년에 개최된 베르크손 탄생 100주년기념대회를 마치면서 메를로-뽕띠는 철학자를 기리는 짤막한 글을 낭독하였다. 거기서 자신은 이미 잊어져가던 베르크손만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세대에 속한다고 회고한 후 당시에 나타나고 있는 일종의 '후기베르크손주의(un post-bergsonisme)'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확립된 베르크손주의는 베르크손을 왜곡한다"고 일갈(一喝)하고 있다.2) 여기서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은 베르크손주의의 제 1원천은 바로 베르크손 자신이며 그 '후기성'은 그의 철학정신의 망각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화석화되고 정형화된 베르크손주의와 베르크손의 철학함 사이의 차이, 다시 말해 지식의 대상과 근원으로서 정교한 구조를 지니게 된 철학체계와 철학자 자신의 원초적인 철학정신 사이의 차이, 바로 이것을 본 논문에서 드러내보려는 것이다.

최소한 프랑스 철학에서 볼 때 베르크손에 의해 시작된 20세기를 마감하고 도래할 새로운 세기 아니 나아가 새로운 천년의 사유틀을 마련한 철학자로 꼽히는 들뢰즈(Deleuze, Gilles, 1925∼1995)는 『베르크손주의(Le bergsonisme)』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1966년 세상에 내놓았다. 물론 모든 독창적인 사상가들이 그러하듯이 그를 엄밀한 의미의 철학사가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는 '베르크손주의'를 일거에 '방법에 의거하는 철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방법으로서의 직관'이란 장으로 그의 책을 시작하고 있으며, 바로 이 대목에서 들뢰즈는 좋은 논쟁 상대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독특함은 회프딩(Höffding)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3)

베르크손 연구가들이 자주 인용하고 있고 또 들뢰즈도 예외가 아닌 그 문제의 편지에서 베르크손은 자신의 사유중심인 '지속의 직관'에 우선 자리잡고 또 끊임없이 거기로 되돌아오지 않는 한 그의 철학을 요약함은 결코 불가능하며 설령 요약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의 사상의 본질을 변형시키게 될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많은 비판이 발생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다. 그는 회프딩이 '지속' 보다는 '직관'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지적하고 자신의 철학의 알파이자 오메가가 바로 지속, 즉 '지속의 직관'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4) 이는 베르크손의 철학을 전통적인 개념과 논리로 분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잘 알려진 일화인 동시에 '방법으로서의 직관'을 말하고 있는 들뢰즈를 비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요컨대 베르크손의 철학은 많은 철학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또 하나의 철학, 또 하나의 '주의(主義)'가 아니다. 고대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의 철학이 '지성의 도식'과 '행위의 논리'로 진정한 사유인 형이상학적 사유를 대체하려는 노력이었으며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은 순수사유를 왜곡시킨 작업이었다는 경이로운 발견으로부터 베르크손은 출발하였다. 그는 진정한 철학적 작업에 새롭게 착수하려 했으며, 그의 시도는 또 하나의 새로운 '주의'의 출현이 아닌 철학 자체의 탄생 또는 그 부활을 의미한다. 칸트가 철학을 끝내려고 했다면 베르크손은 다시 시작하려고 한 셈인데, 이렇게 새롭게 출발하는 철학에 있어서 모든 심오한 인식은 바로 형이상학이 된다. 바꿔 말하면 형이상학만이 심오한 인식이며 여타의 인식은 상징적 인식, 즉 피상적인 인식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칸트 철학을 염두에 두면서 기존의 인식론적 틀을 빗겨가고 있는 베르크손의 사유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것이며, 그 논의는 결국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인식은 형이상학임을 명백히 드러내줄 것이다.





II. 베르크손의 '인식론'



우리는 과연 '베르크손의 인식론'을 말할 수 있는가? 베르크손에 있어서 '인식론'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 텍스트는 두 종류가 있다. 우선 철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한 텍스트와 또 한편 직관과 지성에 관한 텍스트가 그것으로 이들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는 '베르크손의 인식론'에 대한 정의를 시도해볼 수 있겠다. 베르크손 스스로 '인식론(théorie de la connaissance)'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이 때 '인식론'은 인식된 대상과 동시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창조적 진화』에서 저자는 "인식론과 생명이론(théorie de la vie)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5)

우리가 베르크손에서 '인식 이전의 인식론'을 찾을 수 없다면 그것은 그의 철학이 실재에 대한 철학이자 구체의 철학 또는 충만의 철학, 한마디로 '존재(l'être)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베르크손 철학의 대표적인 입문서의 저자인 장껠레비치(Jankélévitch)는 그의 책 제 1장의 제목을 '유기체적 전체(totalité organique)'라고 달아 베르크손 철학을 명쾌하게 규정지으며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 "베르크손주의는 연구이론과 연구 그 자체가 혼동되는 몇 안되는 철학 중에 하나이므로 인식형이상학(les gnoséologies), 예비과정(les propédeudiques), 방법들을 낳는 일종의 반성적 이중화(dédoublement réflexif)를 배제한다".6) 다시 말해서 사유 방법이 사물에 대한 사유에 "내재적"이며, "따라서 방법 그 자체가 이미 진정한 앎(le vrai savoir)"인 것이다.7)

베르크손의 철학은 이렇게 '반성적 이중화'와 회고적인 분석을 거부하는 철학이다. 따라서 인식기능으로서의 직관으로 출발하는 철학에서 직관의 내용을 직관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는 것은 오해의 소치인 것이다. 구체적인 사유는 결코 스스로를 비판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며,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전진하는 사유의 운동이 스스로의 보증이 되어 주고 있으니 만큼, 사유와 그 대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구체적 사유가 전진함에 따라 그것은 변화하고 진화하므로 그것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현재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출발부터 자신의 상태와 장비를 점검하느라고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존재 그 자체에 근접하려는 사유는 그 사유의 행위로 자신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그 어떤 전제나 준비운동 없이 데카르트(Descartes)는 코기토(cogito)로부터 그리고 맨 드 비랑(Maine de Biran)은 볼로(volo)에서부터 그리고 이제 베르크손은 바로 '지속하는 자아'로부터 곧바로 그들의 사유의 운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대목에서 맨 드 비랑은 '나는 원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였으며 이제 베르그송은 '나는 지속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존재와의 접촉점이 전혀 없는 철학은 인식론으로 비대해질 수밖에 없으니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베르크손도 '인식론'을 말하며 직관이라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사유와 운동체(La pensée et le mouvant)』의 머리말에서 베르크손은 이 논문집은 그가 "철학자에게 권해야만 한다고 믿는 방법에 대한" 글들의 모음이며 여기서 "이 방법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연구과정에서 이 방법이 새겨 놓은 방향을 정의 내리려는" 목적을 갖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8) 그리고 이어서 시기상 먼저 쓰여진 서론에서는 바로 '직관'을 '철학적 방법'으로 내세우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9) 들뢰즈은 바로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10)

들뢰즈가 '방법으로서의 직관'으로부터 '베르크손주의'를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회프딩에게 보낸 베르크손의 편지에서 드러나듯이 직관은 지속 다음에 논의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들뢰즈가 '방법론'을 먼저 이야기했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들뢰즈도 그 편지를 제일 먼저 인용하면서 베르크손에서 직관은 이미 지속을 상정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들뢰즈는 인식대상(지속)이 결코 인식방법(직관)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다.



"지속이나 기억에 비해서 직관이 이차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개념들이 그 자체로 실재들과 체험들을 지칭한다 해도, 우리에게 그것들을 (과학의 정확성과 유사한 정확성을 가지고) 인식하는 그 어떤 수단도 이 개념들은 제공하지 않는다. 기묘하게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베르크손 고유의 의미에서 방법으로서의 직관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지속은 단지 일상적인 의미에서 직관적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11)



들뢰즈는 그야말로 '기묘하게(bizarrement)' 직관이 예비적 인식틀, 즉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 '방법으로서의 직관'이 있다면 직관의 또 다른 기능은 과연 없는가? 우선 직관은 '일상적 의미'를 포함하여 베르크손 철학 안에서도 '방법'으로만 전부 환원되지 않는 '다수의 의미들'을 갖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자세한 검토는 다음 장 이후로 미룬다. 거기서 들뢰즈의 '방법으로서의 직관'이라는 주장에 대한 논의도 함께 이루어질 것이다. 들뢰즈는 '차이화'를 '방법으로서의 직관'의 제 2규칙으로 삼고 이 '나눔의 방법(méthode de division)'을 '플라톤주의'로 보는 동시에 심지어 칸트의 '초월적 분석'과도 연결시키고 있다.

하지만 지금 문제되는 것은 베르크손의 '방법'이 들뢰즈가 생각한 것처럼 인식대상보다 먼저 구비되어야할 인식방법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예비적인 틀이 아닌 방법, 즉 '방법론을 거부하는 방법'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베르크손의 '인식론'에 대해서 정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 '방법'의 특이성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아니면 인식방법과 인식대상의 이분법 또는 더 간단히 말해 인식과 존재의 구분이 항상 틈입하기 때문이다. 존재와 인식이 만나는 곳, 다시 말해서 인식이 곧 형이상학이 되는 상황인 '직관적 인식'은 우선 '형이상학적 경험'으로 이해될 수 있다.





III. '형이상학적 경험'의 방법



베르크손의 철학적 '방법'은 과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가 『창조적 진화』의 서두에서 생명과 연관하여 '방법'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철학적 방법이 과학과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결국 그것이 당대의 과학적 사유의 총체 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그와 같은 근거를 설립한 것은 베르크손 자신이며, 이 때 '근거(le fondement)'가 뜻하는 바를 우리는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는 수학의 논증적인 확실성에서 생물학적 경험의 확실성으로 이행하여 '보편 수학'의 희망을 포기함으로써 철학적 인식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생물학이라는 실증과학이 그 어떤 철학적 법칙을 제공하였다고 생각할 수 없다. 물론 베르크손이 자신의 철학적 발견을 당대의 과학적 사유의 틀에 맞게 객관적인 언어로 표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철학적 운동에 대하여 스스로 주석을 붙이기 위해서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그의 사유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코 그와 같은 과학적 틀에 힘입어 '베르크손주의'가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베르크손이 무슨 특별한 비법을 갖고 있어서 그의 전체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지속(la durée)'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데카르트나 맨 드 비랑이 그들의 코기토(cogito)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코기토나 지속이 살아 있는 법칙 노릇을 하며 '가지성(可知性, l'intelligibilité)'과 명석함의 범형이 된다. 이렇듯 위의 세 프랑스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지속이나 코기토 위에 가지성이 근거하고 있지만 칸트에게 있어서의 가지성은 수학에 준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다음과 같은 베르크손의 텍스트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순수이성비판』을 자세히 읽으면 칸트의 비판은 이성 일반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습관의 요구와 데카르트적인 기계론이나 뉴우튼 물리학의 요구에 익숙해진 이성에 대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12) 요컨대 오직 수학에만 연결되어 있는 칸트의 방법과는 달리 베르크손의 방법은 동시대의 전체 과학 위에 근거하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적 방법과 과학 사이에 성립하는 '근거'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철학이 수학이 아니라 전체 과학에 근거한다는 것은 철학이 수학적 도식이 아니라 제반 과학들이 각기 다루고 있는 바로 그 경험 그 자체에 의거함을 뜻한다. 그런데 이 때 경험은 가지적 경험, 즉 자연과학적으로 관찰되고 수학적으로 번역되는 질서의 경험이 아니라 또 다른 질서의 경험을 지칭한다. 실제적이며 살아있는 것이 갖는 복잡다단함의 질서와 접촉함이 곧 철학적 경험 내지 '형이상학적 경험'이다. 이렇듯 실재에 도달하는 것, 즉 형이상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방법이라는 도구가 먼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있는 상태 그대로 얻어내는 철학적 경험 자체가 곧 그 방법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적 방법이 실재에 대한 사유에 '내재적'이므로, 방법 그 자체가 이미 형이상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며, 형이상학과 제반 과학과의 연관은 곧 형이상학의 경험과의 밀접성을 뜻할 뿐이다.

철학에서 분석은 소위 '분석철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베르크손도 분석의 방법을 말하고 있으며, '직관'의 여러 속성 중에는 분석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본디 프랑스 철학의 고유한 특성 중의 하나가 명석·판명한 요소들로 분석하는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베르크손도 그 전통 안에 있음이 분명하다. 베르크손이 보기에 분석을 포함하여 무릇 철학의 방법은 "실증과학에 준하는 객관성을 확보해준다".13)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가 철학의 객관성이 과학의 객관성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외적 경험의 확실성에 근거하는 과학과 내적 경험의 확실성에 의거하는 철학이 분명 별개의 영역임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도 자신의 영역에서 분석적인 작업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자연과학적인 분석과는 다른 성질의 것으로, 겉보기에 모순되어 보이는 이른바 '직관적 분석'일 것이다.

이렇게 베르크손의 직관적 사유는 본디 분석적인 방법을 거부하지만 또 한편 직관적 사유를 포함한 모든 사유는 분석, 방법 그리고 객관성 등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직관적 분석'이라는 딜레마는 어떻게 돌파될 수 있는가? 철학자는 지름길을 찾지 않고 가야 할 길을 전부 다 간다. 단숨에 주어지는 형식의 명석함이 있는가 하면 점진적으로 도래할 명석함이 있으며, 기존 철학 학파의 엄밀히 정의된 개념들이 있는 반면 사실에 접하여 그 선을 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빚어내어서 거의 실재 그 자체와 같이 된 유동적인 개념들이 있다. 베르크손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당연히 이 둘 사이에 전자에서부터 후자로의 이행이 가능함을 깨닫게 되며, 역시 겉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이행은 『창조적 진화』에서 극명하게 보여진다.

베르크손의 뒤를 이어 '프랑스 철학'을 개관하는 글에서 에드와르 르 르와(Edward Le Roy)는 『창조적 진화』의 저자의 철학적 기도(企圖)를 요약하기를, "형이상학을 경험의 영역과 연결시키고 일반적 이론들뿐만 아니라 개별적 사실들의 구체적 설명들을 제공할 수 있는 철학을 과학과 의식에 호소하고 직관의 능력을 발전시키면서 세우려는" 시도로 규정하였다.14) 르 르와에 따르면 이런 철학은 "실증과학과 같은 정확성"을 갖고, "과학처럼 간단없이 진보할 수" 있을 것이지만 과학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와 같은 철학은 "점점 더 오성의 범위를 넓혀" 나가서 "인간 사유를 무한히 확장시킴"에 그 목표를 둔다는 점이다.15) 이것이 바로 베르크손의 '경험주의 철학'의 이념이고 그 철학의 '진보적' 양태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진보적 철학의 대상적 측면은 이미 다른 글에서 살펴보았고 이번에는 주체적인 측면에서 인간사유의 확장이라는 주제, 이른바 베르크손의 '직관의 철학'을 규명해야 하겠다.16)





IV. 직관 개념과 지속의 직관



베르크손이 말하는 '직관'은 다양한 의미들 ― "수학적으로 서로서로 연역되지 않는 의미들"을 갖는다.17) 따라서 단순한 기하학적 정의 속에 '직관'을 담아내려는 섣부른 시도는 다시금 비(非)철학적 사유방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하기 때문에, 비록 그 규정에 성공한다해도 임의성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된다.

비단 '직관'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하나의 철학 용어가 갖는 의미를 단번에 정의하려는 시도는 "마치 철학적 사유가 고정되어 있고 철학함이 기존개념들의 선택인 것처럼 작업하는 것"인데,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철학함이란 개념의 선택이 아니라 그 창조작업인 것이다.18) 따라서 '직관적 인식'도 '개념적 인식'일 수 있다면, 그것은 개념적 사유를 개념의 '선택'이 아닌 '창조'로 이해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창조'라고 해서 단순히 전문용어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개념들이 처하는 특수한 경우마다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이른다.

우선 부정적인 기술로 시작한다면, 베르크손에 있어서 '직관'은 "단번에 영원 속에 자리잡을 수 있음을 자부하지" 않으며, '실체' 개념과 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고 모든 것이 그것으로 환원될 수 있는 '하나의 개념(un concept)'을 제공하지 않는다.19) 따라서 '직관'은 출발점의 역할을 하는 '하나의 원리(un principe)'가 아니다. 어떤 철학이든지 간에 '개념들의 개념'인 하나의 원리 안에 모든 현실태와 심지어 가능태까지를 부여한다면, 그와 같은 철학은 쉽사리 모든 것을 연역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겠지만 이때 '하나의 원리'란 모호한 가설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직관'은 세계의 체계적 단일성 ― 그러나 인위적일 수밖에 없는 단일성을 지칭하는 '하나의 단어(un mot)'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나의 원리나 단일성으로 시작하는 철학은 우리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부정확한' 철학의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된다.20)

실재를 본뜨는 직관철학은 단숨에 모든 것들의 전체를 포함하려는 대신, 각각에 맞는 정확한 설명을 추구한다. 여기서 '직관'은 '정확성'을 기하는 노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들에 꼭 맞는 개념적 설명들이 축적되어감에 따라 직관철학은 '풍요롭고 충만한 단일성', '연속의 단일성', 다시 말해 '실재의 단일성'을 제공한다. 대상에 꼭 맞게 재단된 개념은 그 대상에 맞추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 대상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굳이 '개념'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대상에 꼭 맞게 새로이 창조된 개념들은 그것이 진정 새롭다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이해한다'는 것을 이미 아는 것들로부터 새로운 것을 재편성하는 지성적 작업이라 본다면, 새로운 개념들은 불가해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상황은 바로 베르크손의 '직관' 개념 자체가 처한 것이기도 하다. '직관' 개념의 용이한 이해를 위해서 이를 고립된 한 두 마디로 정의하고 시작할 수는 없지만, '직관'의 다양한 기능과 양상에 대한 서로 '보충적인 관점들' 중에서 우선 '실제적 지속'의 관점으로 시작해야만 한다.21) 왜냐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직관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지속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지속 안에서 사유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 지속은 무엇보다도 '흐름'이며 '지나감'이다. 흐르고 있거나 지나가고 있는 것은 그 어느 한 부분과 또 다른 부분이 결코 동시에 나타날 수 없고 따라서 그 부분들을 중첩시켜 비교해볼 수 없다. 그러나 과학적 필요 때문에 움직이는 것의 궤도로써 측정된 선형적인 시간은 최소한 그것이 재어지고 있는 동안만은 움직이지 않아야 됨에 반해서, 실제적 지속은 움직임이다. 과학은 전개되는 시간 또는 전개될 시간을 이미 다 전개되어 완료된 것처럼 취급하지만, 지속은 "되어가고 있는 것"이며 더 나아가 "모두가 되어가게 만드는 것"이다.22)

지속 자체가 아니라 그 측정에 관심을 갖지만 결국은 공간화된 시간밖에는 잴 수 없을 때, 우리는 상식의 요구에 응하고 있는 것이며, 상식은 바로 과학의 출발점이 된다. 예측을 위한 과학은 물질세계로부터 '반복과 계측이 가능한 것', 결과적으로 '지속하지 않는 것'을 추출하여 연구대상으로 삼는다. 이렇게 순간들만을 포착하는 과학의 방법을 베르크손은 '영화적 방법'이라 명명한다. 과학은 생성을 일련의 상태들의 연속으로 표상하는 바, 이 상태들이라는 것 각각은 영화필름처럼 하나 하나 정지된 동질적 요소들이기 때문에 결코 변화하지 않는 것들이다.

하지만 물질의 경우에 지속의 흐름 자체가 무시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은 그 고유영역인 비활성 물질세계에서 언젠가 실재를 완벽하게 파악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정확히 정신과 물질로 배분하는 베르크손의 이원론에 있어서 과학이 갖는 위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성의 요구와 언어의 필요 그리고 과학의 상징주의에 부합하도록" 철학도 역시 시간이 낳는 중대한 결과들을 적당히 회피해야만 하느냐에 있다.23) 왜냐하면 철학의 고유영역은 정신의 세계이며 정신 또는 의식은 곧 지속 자체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베르크손에 의하면, 만약에 실재를 인식하는 도구로 지성 이외에 다른 것이 없다면, 정신의 영역에서 절대적인 실재에 도달함, 즉 철학함이 애당초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을 파악함에 있어서 지성의 불능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금방 지성의 상대성을 넘어 절대에 근접하려 시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성이 시간 안에서 그 능력을 발휘했더라면 지성을 넘어섬은 곧바로 시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옴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성화된 시간은 공간이며 지성은 결코 지속 그 자체에 미치지 못한다.24) 그러므로 우리는 지성을 넘어서기 위하여 시간 밖으로 나올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다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베르크손의 생각이다.

물론 이렇게 순수 지속에 자리잡을 수 있기 위해서는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지성을 벗어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잠정적이라 한 까닭은 우리는 언제라도 다시 지성으로 돌아와 상식의 세계에서 생활하거나 과학적 사유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지성을 벗어나 보려는 노력이 바로 '직관의 노력'이다. 따라서 철학함이란 '직관의 노력'에 의해서 지속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대상 자체 안에 자리잡는 것 외에 다름 아니며 결국은 실재를 그 본질인 운동성 안에서 파악함을 의미한다.

베르크손에 있어서 직관은 무엇보다 내적 영역을 겨냥하며, 거기서 성공적으로 대상을 붙잡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여타의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는 외적이고 피상적인 파악을 하는 반면 스스로는 내적으로 깊게 지각하기 때문이다.25) 이렇게 우리가 자신을 내부에서부터 들여다 볼 때, 우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것이다. 의식적 존재에 있어서는 동일한 두 순간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의식이나 정신은 그것이 현재 포함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창출해낼 수 있고 내부로부터 점점 더 풍부해 질 수 있는 실재, 다시 말해 스스로를 창조하고 끊임없이 재창조할 수 있는 실재이다. 이와 같은 실재는 근본적으로 측정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히 결정된 적이 전혀 없으며 한 번도 무엇으로 고정되어진 바 없이 항상 활동 중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내부적 정신세계야말로 '직관적 사유'가 목표로 삼는 실제적 지속의 세계이며, 베르크손이 창조와 자유의 세계라고 규정하는 철학의 고유 영역이다.26) 내부로부터 증가하는 실재에 걸맞게 인간의 사유가 확장되어 갈 것이라면, 이것이 바로 주체의 측면에서 본 철학 ― '직관철학'이 갖게 되는 '진보적 양태'인 것이다.





V. 직관적 인식과 형이상학



철학의 역설, 그 기구한 운명은 상대적인 것에서부터 절대적인 것으로 진입하려는 데서 비롯한다. 상대성의 영역에 머무를 수밖에 없으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그것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바로 철학인 것이다. 이와 같은 철학이 가능하려면 철학에게만 고유한 방식이 필요하며 이는 사유의 일반적인 방식과는 다른 그야말로 순수하게 철학적인 방법이어야 한다.

베르크손은 이와 같은 철학적 방법으로 '직관'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개념이 갖는 의미의 풍부함 앞에서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직관'은 '철학적 사유', 다시 말해서 '사유를 위한 사유'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며, 베르크손은 이를 "사유의 형이상학적 기능"이라 부르고 있다.27)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철저히 실재를 본뜨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정한 사유' 또는 '철학적 사유'의 기능으로서의 '직관'은 실재의 변화무쌍한 굴곡을 본뜨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그 실재만큼이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직관을 단적으로 '나눔의 방법'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 직관이 '일치(coïncidence)'이며 '합일'임을 말해야하며, 인식과 존재를 극구 나누려는 입장에 대해서 '인식'은 '거의 존재'일 수 있음을 보여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베르크손에 있어서 '직관적 인식'은 '직접적인 것(l'immédiat)'에 대한 인식이며, 그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끊임없이 그곳으로 회귀하는 운동이 바로 베르크손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들뢰즈는 '방법으로서의 직관'을 '나누는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직관은 "정도의 차이들 밑에 숨어있는 본성의 차이들을 찾아내며", 그렇게 하면서 직관은 "진정한 문제들과 거짓된 문제들을 구별하게 해주는 기준들을 지성에게 전해준다".28) 따라서 들뢰즈에 의하면 '방법으로서의 직관'은 "나눔의 방법(méthode de division), 즉 플라톤적 정신의 방법"이며, 본성상의 차이를 찾아내기 위해서 "복합물을 자연적 마디들에 따라 나누는 것"이 '방법으로서의 직관'의 '제 2규칙'인 것이다.29)

들뢰즈는 이 '나눔의 방법'을 베르크손에 있어서의 일종의 플라톤주의라고 본 후 "나눔의 방법으로서의 직관은 초월적 분석과 어떤 유사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나눔의 방법으로서의 직관'을 '초월적 분석'과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나눔의 방법으로서의 직관'에 의해서 우리는 "경험의 조건들을 향해 경험을 넘어서기" 때문이다.30)

혼합물들이 사실들을 표상한다면 그것들을 단지 권리상으로만 존재하는 경향들이나 순수현전들로 나누는 작업은 경험을 넘어서 경험의 조건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칸트식으로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 다시 말해서 개념적 아프리오리(a priori)를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경험을 결정짓는 실제 경험의 조건들 ― 들뢰즈 나름의 독특한 개념인 '지각들(percepts)'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들뢰즈가 말하는 '방법으로서의 직관'은 크게 3가지 규칙을 가지므로 그에 따라서 구별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거짓문제들을 비판하고 진정한 문제들을 창조해내는 '문제화의 방법(méthode problématisante)'이자, 자르고 교차시키는 '차이화의 방법(méthode différenciante)'이며, 동시에 지속의 관점에서 사유하는 '시간화의 방법(méthode temporalisante)'이 바로 직관인 것이다. 베르크손 철학의 출발이자 전체인 '지속의 상하에서(sub specie durationis)' 사유함이 결국 직관이라는 방법의 제 3의 규칙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은 '지속에 대한 직관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베르크손 연구가 바르텔르미-마돌(Barthélemy-Madaule)은 1968년에 출간된 『베르크손 연구(Les études bergsoniennes)』 제 8권에 실린 그녀의 논문 「베르크손 독해(Lire Bergson)」에서 들뢰즈가 주장하고 있는 '지속에 대한 직관의 우위'를 비판하고 있다. 그녀에 따르면 '지속에 대한 직관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는 회프딩에게 보낸 베르크손의 편지를 들뢰즈가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은 중요한 한 줄을 빠뜨렸다는 것이다 ― "직관의 이론은 지속의 이론으로부터 유래되며 오직 지속의 이론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31) 이 빠진 문장을 고려에 넣는다면 지속은 직관적 방법에 의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바로 지속이 직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32)

그렇다면 직관이 지속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일상적' 또는 '심리학적' 의미의 직관이 아닌 '베르크손 철학에서의 직관'은 이미 지속에 현전하고 그것이 의식화됨에 따라 점점 더 명백해지면서 결국 방법으로 세워지고 합리적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바르텔르미-마돌은 이와 같은 직관의 전개 순서를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구별하고 있다. 지속에 국한시키지 않고 일반적으로 표현한다면 우선 직관은 실재에 내재적이다 ― 직관은 존재(물론 생성으로서의 존재)와 의식이 합치되는 곳인 실재와 구별되지 않고 함께 섞인다. 그 다음에 직관은 실재의 풍부하고 역동적인 중심으로서의 그 현전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밝히게 된다. 그리고는 직관은 반성으로 나타나서 '직관적 반성'에 대한 '개념적 반성'인 '자기의식'을 초래하게 되고, 결국 직관은 로고스(logos)로 전락하여 무한히 많은 개념들로 다양화된다. 하지만 그 개념들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이 유래한 실재를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33)

'직관'이 '지속'으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은 결국 실재적 현전의 우위를 의미한다. 베르크손의 '직관'이 실재적 현전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이라면 이것이 실재적이지 않은 것을 거부함은 당연할 것이며, 이 점에서 직관이 '나눔의 방법'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직관이 우선 '나눔의 방법'으로 제공되어야 지속이라는 실재적 현전이 드러날 수 있다는 말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요컨대 직관이 '나눔의 방법' 노릇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직관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직관은 무엇보다도 '일치(coïncidence)'이며, '나눔(division)'이 아니다. 이미 미래로 향하고 있는 현재 속에 또한 과거가 끊임없이 연장되고 있기 때문에 병치가 불가능한 그런 정신상태들의 연속적인 내부증가를 포착하는 것이 바로 직관이다. 이 때 직관은 정신에 의한 정신의 '직접적 투시(透視)'이다. 공간화된 시간과 일상언어의 매개로부터 그리고 측정이나 조작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정신이 정신을 내부에서 보는 작업이 직관이며, 이것이 다름아니라 철학자가 해야할 일인 것이다.

요컨대 직관은 "우선 의식이지만 직접적 의식", 다시 말해 "보여지는 대상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봄(vision)"인 동시에, 인식은 인식이되 인식론적 거리를 취하지 않는 인식, 즉 "접촉(contact)이며 심지어 일치인 인식"이다.34)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식은 바로 존재이며, 아니면 적어도 '거의 존재'일 수 있는 것이다. 인식과 존재가 분화되기 이전의 '단일성(l'unité)'이란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며 살아가는 '절대(l'absolu)'의 단일성이며, 이와 같은 절대적 현전이 최초의 직관의 순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된 이상 직관은 '초월적 분석'과 하등 관련이 없다. 사실상 혼합된 것에서 권리상 구분되는 경향들을 나누어 찾아낸다는 의미로 이해된 '경험에서부터 그 조건들로 넘어서는 작업'을 직관은 수행하지 않는다. 오히려 매개적으로만 실재에 관여하는 경험에서 직접적으로 실재에 도달하는 진정한 경험으로 이행하려는 노력이 바로 직관의 노력, 곧 형이상학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와 마찬가지로 베르크손의 '나는 지속한다'라는 지속의 '형이상학적 경험'은 분명 실재를 파악하는 기준이 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탁월한 인식방법으로도 세워질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으로 '형이상학적 경험' 그 자체, 실재 내지 존재와의 접점 그 자체는 아직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 즉 존재와 인식이 만나있는 상황일 뿐이다. 반성의 차원에서는 그것이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러워지지만 직관의 차원에서는 너무나 실제적이다. 이렇게 혜택받은 경험의 현전과 이제 그로부터 물러나서 그 경험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합리적 반성 내지 초월적 분석이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베르크손은 분명 칸트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직관적 인식은 나눔과 분화를 가능하게 하고 결국 거기에 이르지만 결코 그 자체는 나눔이 아니며, 직관적 인식은 차후에 반성의 조명 아래 설 수밖에 없겠지만 결코 스스로 '초월적 분석'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나눔'과 '초월적 분석'은 분명 직관의 결과이지만 직관은 아니다. 직관적 인식은 우선 그것이 인식인 한 인식대상이 있겠지만 그 대상과의 합일을 사명으로 하는 인식이다. 실재를 닮아서 충만과 긍정을 특징으로 하는 인식, 단순하고 무한히 단순해지는 인식인 베르크손의 '직관'은 들뢰즈가 보고있는 것처럼 인식론의 '방법'이 아니다. 형이상학자 베르크손에게 있어서 '직관적 인식'은 존재와 인식의 일치, 인식이 곧 형이상학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언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차건희, 「베르크손의 철학관(I)」, 『과학과 철학』, 과학사상연구회, 제 4집, 1993년 12월.

Barthélemy-Madaule, Madeleine, "Lire Bergson", in Les études bergsoniennes, Puf, VIII, 1968

Bergson, Henri, Oeuvres, Puf, Paris, 1959.

――――, Mélanges, Puf, Paris, 1972.

Deleuze, Gilles, Le bergsonisme, 2e éd., Puf, Paris, 1968.

Jankélévitch, Vladimir, Henri Bergson, 2e éd., Puf, Paris, 1975.

Merleau-Ponty, Maurice, Eloge de la philosophie, Gallimard, 1960.





Résumé

Théorie de la connaissance et Métaphysique bergsonienne

Tcha, Gun-Hi



Cette thèse se propose de remettre en mouvement la pensée primitive du philosophe Bergson en montrant la différence entre elle et le bergsonisme établi.

Pour éviter la fausse interprétation de la philosophie bergsonienne, tout d'bord faut-il bien déterminer la primauté entre les concepts de durée et d'intuition. Un certain post-bergsonien Deleuze considère le bergsonisme comme une philosophie qui part de la méthode d'intuition. Mais, en réalité, chez Bergson la méthode et l'objet de connaissance ne sont point séparables. L'intuition de la durée n'est pas une sorte de méthode qui précède son objet, mais l'expérience métaphysique dans laquelle la connaissance n'est pas d'autre chose que la métaphysique.

Fonder sur l'expérience en philosophie, cela veut dire s'approcher de l'ordre du réel et du vivant. Et pour s'approcher du réel, c'est-à-dire pour que la métaphysique soit possible, il n'est pas nécessaire de se fournir d'abord de la méthode philosophique. La pensée concrète en s'approchant de l'être ne doit pas se retourner sans cesse vers soi-même, parce que son mouvement même est sa garantie. Mais la philosophie qui n'a aucun contact avec l'être, grossit des théories de la connaissance. Chez Bergson, au fait, la méthode philosophique est immanente à la pensée du réel, c'est pourquoi la méthode est déjà la métaphysique.

Philosopher consiste ainsi à se placer, dans l'objet même qui dure et change sans cesse, par un effort d'intuition. Mais, la pensée intuitive porte d'abord sur notre esprit qui est capable de tirer d'elle-même plus qu'elle ne contient, de s'enrichir du dedans, de se créer ou se recréer sans cesse, et qui n'est jamais faite mais toujours agissante. C'est ce monde de la durée intérieure et par conséquent de la création et de la liberté qui est l'objet propre de la philosophie.

Contre Deleuze qui voit en l'intuition bergsonienne la méthode platonicienne de division et aussi l'analyse transcendantale de Kant, notre thèse fait voire que l'intuition est la coïncidence, et que le connaître peut être le quasi-être. Cette unité du connaître et de l'être est celle de l'abolu dans lequel on se meut et vit. En somme, la connaissance intuitive qui est celle de l'immédiat ne fait qu'un avec le mouvement métaphysique de Bergson.





※ Key Words : métaphysique, connaissance, durée, intuition, méthode, être, réel





- 주 -



* 이 논문은 1998년도 서울시립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그리고 이 논문은 大同哲學會 제4차 학술대회(1999. 11. 13)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임.

1) Bergson, La pensée et le mouvant, p.33. 앞으로 베르크손의 저서를 인용할 경우에 각 저서명과 낱권의 쪽수를 명기할 것임.

2) Merleau-Ponty, "Bergson se faisant", in Eloge de la philosophie, Gallimard, p.239.

3) Mélanges, p.1146∼1150.

4) Mélanges, p.1148.

5) L'évolution créatrice, p.IX.

6) Jankélévitch, Henri Bergson, 2e éd., Puf, 1975, p.5.

7) Ibid., p.5∼6.

8) La pensée et le mouvant, p.I.

9) La pensée et le mouvant, p.25.

10) Deleuze, Le bergsonisme, 2e éd., Puf, 1968, p.1.

11) Deleuze, Le bergsonisme, p.2. 강조는 들뢰즈의 것임.

12) Mélanges, p.493.

13) Mélanges, p.964.

14) Mélanges, p.1181.

15) Mélanges, p.1181.

16) cf. 「베르크손의 철학관(I)」, 『과학과 철학』, 과학사상연구회, 제 4집, 1993년 12월.

17) La pensée et le mouvant, p.1274.

18) Mélanges, p.503.

19) La pensée et le mouvant, p.26.

20) La pensée et le mouvant, p.1. (cf. ibid., p.27, "세계가 실제로 하나인지 누가 알겠는가? 오직 경험만이 그것을 말할 수 있으며, 만일 그러한 단일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탐구의 끝에 결과로서 나타날 것이다. 출발부터 하나의 원리로 단일성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1) La pensée et le mouvant, p.29∼30, "추상적이며 인습적이지 않고 실재적이며 구체적인 것에 대하여, 더군다나 이미 알려진 구성요소들로 재구성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오성이나 상식, 언어에 의해서 실재 전체로부터 오려내지지 않은 사물에 대하여, 하나의 개념을 제시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대하여 다수의 서로 동등하지 않은 보충적 시각들을 취하면서만 가능하다."

22) La pensée et le mouvant, p.3.

23) La pensée et le mouvant, p.10.

24) La pensée et le mouvant, p.26.

25) L'évolution créatrice, p.1. (cf. La pensée et le mouvant, p.182, "단순한 분석이 아니라 직관에 의해서 우리 모두 내부에서부터 파악하는 실재가 적어도 하나 있다. 그것은 시간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우리 자신이다. 지속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자아이다".)

26) Mélanges, p.887.

27) La pensée et le mouvant, p.1423∼1424, 註 2.

28) Deleuze, Le bergsonisme, p.10∼11.

29) Ibid., p.11.

30) Ibid., p.13.

31) Mélanges, p.1149.

32) Barthélemy-Madaule, Madeleine, "Lire Bergson", in Les études bergsoniennes, VIII, Puf, 1968, p.90.

33) Ibid. Barthélemy-Madaule은 이 단계에 따라 베르크손의 작품들을 구별하고 있다.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1889)에서는 직관이 지속에 내재적이었으며, "Introduction à la métaphysique(1903)"에서 직관은 분석과 대비되어 실재를 포착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Intuition philosophique(1911)"에서는 직관은 '반성'으로 드러나며, La pensée et le mouvant의 첫 번째 서론(1934)에서는 '방법론적인 의식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p.90∼91)

34) La pensée et le mouvant, p.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