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베르크손의 哲學觀 (La notion de philosophie chez Bergson)

나뭇잎숨결 2024. 2. 11. 11:19

베르크손의 哲學觀 (La notion de philosophie chez Bergson)


차건희 서울시립대 철학교수


1. 머리말



이 글은 베르크손1) (Bergson, Henri, 1859-1941)의 全 철학을 개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고, 다만 '철학자 베르크손이 생각하는 철학은 어떤 것일까'라는 물음을 갖고 그의 전 저서를 통해 그 대답을 수집한 글일 뿐이다.2)



"철학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이다" (PM 1363).3)

"철학의 정수는 단순성의 정신이다" (PM 1362).



베르크손은 한 강연에서 버클리 (Berkeley)의 철학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말한 적이 있다 : "진정 그 이름에 걸맞는 철학자라면 단 한 가지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만, ... 이 세상에 그 어떤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는 사고도 그것이 만나게 되는 기존의 개념을 통해서 표현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PM 1350). 다른 모든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베르크손 자신도 스스로의 철학적 직관을 가진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이 직관을 표현해야 하는 철학 저술가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에 의하면 우리는 이 철학자의 직관을 많은 경우에 놓치고 만다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철학자는 그의 철학적 직관을 끝없이 달리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낱말과 문장 너머에 의미가 존재하는 것처럼, 개념들로 이루어진 이론의 복잡함 너머에는 "정신의 단순성"이 있는데 (PM 1345), 이것이 바로 철학자의 직관이 갖고 있는 단순성인 것이다. 그 어떤 하나의 생각도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 사이의 관계만 일정하다면 여러가지 다른 단어들로 구성된 문장들로 번역될 수 있듯이, 한 철학자의 직관을 우리가 무수히 다르게 번역할 수 있는 바, 이는 단지 개념들을 모아 놓는다고 그것이 철학이 될 수는 없으며 철학은 유기체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PM 1358, 1349). 그렇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유기적으로 구성된 이 철학자의 직관은 도대체 이해될 수 없는 그 어떤 것인가 ? 그러나 어쨋든 우리는 철학자 베르크손이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지 않는가 ?

우리는 개념과 이미지라는 두 가지 표현 수단을 갖고 있는 바, 철학자가 갖는 직관의 단순성과 그것을 번역하는 추상적 개념들의 복잡성 사이에 그 어떤 <매개상 (媒介像, image intermédiaire)>을 세워야 한다 (PM 1347). 베르크손이 자신의 철학적 직관을 설명하기 위해 의존해야만 했던 개념적이며 상징적인 표현들 전부를 수집해 나가다 보면, 그의 직관과 그 표현 수단 사이에 하나의 <매개상>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매개상>의 정립을 위한 사전 준비 작업인 자료 수집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이 글은 결국 베르크손에 있어서 철학의 일반적 정의를 살펴보고 그가 생각하는 철학의 대상과 방법을 과학과의 비교를 통하여 밝혀 보는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2. 철학의 점진적 발전



우리가 경험에 의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우리에게 철학은 필요 없을 것이다. 즉 우리의 지각 능력들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철학은 태어나게 되었다 (PM 1368). 인간 지성이 아직 유치한 수준에 있을 때에는, 철학 체계는 우리 지각의 연장이었고, 인간은 감히 모든 것을 알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형이상학은 엘레아의 제논이 인간 지성이 표상 하는 바의 운동과 변화에 내재하는 모순들을 지적했을 때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PM 1259). 철학자들은 그 후 이 난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실제 그들이 한 일은 이 표면적 모순들을 피하기 위해, 사물의 실재를 시간 위에서,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을 넘어서, 즉 우리 감각과 의식이 지각하는 것 밖에서 찾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철학자들은 개념들을 조작하여 나름대로 하나의 가설적 체계들을 만들게는 되었으나, 이때부터 철학은 경험을 넘어선다고 자처하기 시작하였다.

철학사를 훑어보면, 전통 철학은 항상 체계적이며 어떤 문제든지 그 해결책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런 철학 체계의 정립에는 천재성이 요구되며 일단 천재에 의해 세워진 체계는 전체에 대한 유일하며 총체적인 견해로 찬미된다. 그러나 이런 류의 철학은 언제나 양자택일 즉 취해지거나 또는 버려짐을 당한다. 여기에서 학파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고, 천재 스승의 뒤를 이어 제자들은 그들의 추상적 개념들을 극도로 발전시켜 타 학파와 대립한다 (M 477). 이렇듯 철학은 추상적 건축에만 즐겨 전념했지만, 이렇게 세워진 체계는 항상 속은 비어 있었으며 때때로 상식과 경험에 어긋나는 터무니없는 것이기 일쑤였다 (M 1314). 그러나 철학은 가상적이지 않은 절대적 실재를 <선험적으로> (a priori) 인정했기 때문에 이런 부조리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고, 철학자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땅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고 앉아서 경험과 사실이라는 흙에 손을 더럽히려 하지 않았다 (ES 843).

그러나 베르크손에 의하면 철학은 구체적이며 완전한 실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La science qui étudie la réalité concrète et complète", M 1201). 여기서 철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구체적이며 완전한 실재> (la réalité concrète et complète)란 무엇인가 ? 이는 다양한 과학들이 제각기 나름대로의 추상적 관점 하에서 연구하고 있는 실재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다만 철학은 그 동일한 실재를 추상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자연과학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오히려 철학이 추상적이지 않은가 의문하게 되지만, 각 과학은 실재의 한 양상 즉 하나의 추상작용만을 고찰한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예를 들어 과학자들은 크기, 열량 등 결코 그것만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들을 실재로부터 추상하여 즉 따로 떼어 내어 연구한다. 반면에 철학은 실재를 도막내지 않고 통째로 즉 그 완전한 상태로, 개념이란 베일을 통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주시하는 학문이다 ("la science qui s'efforce de contempler la réalité intégrale toute nue, sans voiles pour la couvrir", ibid).

물론 이 제반 과학의 관점들로부터 이론을 세우는 것도 철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 철학의 전부일 수는 없다고 베르크손은 본다 (M 571). 왜냐하면 이 이론들이 부분적으로 포착한 실재는 그것이 정신적 실재이든 물질적 실재이든 간에 항상 이 이론들을 넘어서는데 이 부분적 관점들을 빗겨 나가는 실재가 바로 철학의 고유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철학은 이 모든 실재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가 ? 베르크손은 철학을 무엇보다도 정신의 영역으로 국한시켜, 영혼의 삶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생각한다 ("étudier la vie de l'âme dans toutes ses manifestations", ES 842). 따라서 그에게 있어 철학은 자신의 내면과 주위를 있는 그대로 잘 살펴보려 함으로써 시작된다 ("la résolution une fois prise de regarder naivement en soi et autour de soi", M 735).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regarder naivement)> 하는 것인데, 이는 <행위하기 위해 보는 (voir pour agir)> 것이 아니라 <보기 위해 보아야 (voir pour voir)>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신으로 정신을 직접 바라보면 모든 실재는 하나의 "끊임없는 생성 (perpétuel devenir)"으로 나타나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해 실재는 우리가 "지속의 상하에서 (sub specie durationis)" 모든 것을 볼 때, 즉 "지속이 실재의 바탕임을 보게 (voir dans la durée l'étoffe meme de la réalité)" 될 때야 비로소 제대로 파악된다.4) 과거가 파괴나 변질됨 없이 현재 안에 끊임없이 연장되는 내적 경험을 통해, 실재는 분할될 수 없이 전체적으로 불어나는 점진적인 새로움, 이른바 지속 그 자체임을 알게 된다.5)

그런데 이런 실재에 대한 참된 파악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선 우리는 "사고 작업의 일상적 방향을 전환하여" 여러 상징 기호들과 결별해야 한다 (PM 1422, 1334, 1396, 1426). 그러면 철학은 실용적인 결과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요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정신을 계속 확장시킬 수가, 즉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관념들과 단순 논리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거듭할 수가 있게 된다 (PM 1422, 1428). 이런 노력은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인간 정신을 끊임없이 진보하게 한다. 이런 창조의 노력은 우리의 인간성 (l'humanité)을 확장시켜 그 자신을 넘어서게까지 해 준다. 결국 철학은 인간 조건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요, 전체로부터 재단되어 오려 내어진 우리 오성이 그 전체 (le tout)에 다시 합류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PM 1425, EC 658).

언뜻 보아서는 이런 종류의 노력은 순환 논법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은 자신의 유일한 사고 수단, 아니 거의 그 자신인 지성만을 도구로 사용해서는 자신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한다는 것은 우리 사고의 틀을 점차적으로 넓혀 나가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철학 또는 우리 정신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게 되어 현단계가 철학적 인식의 최종 단계가 되어 버리고 만다 (M 434). 한편 동시에, 철학은 경험에 접하여 스스로를 검증하고 무한히 수정해 나가야 한다. 내용이 빈 전문용어들을 꾸며내거나 단숨에 영원(l'éternel) 속에 자리잡았노라 주장하지 말고 철학은 "총체적인 경험 (l'expérience intégrale)"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M 1200, PM 1432).

여기서 우리는 베르크손의 철학관이 철학의 진보성이라는 측면으로 요약됨을 보게 된다. 첫째로, 방법론에서 보면 철학은 직관 철학으로 규정된다. 왜냐하면 직관적으로 철학한다는 것은 비록 실재가 아직 정신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정신 자체를 확장함으로써 실재하는 것을 파악하는, 또는 파악하려 노력하는 점진적인 자세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진보성을 대상의 측면에서 보면 철학은 <진정한 경험론>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철학이 끊임없이 자문을 구해야 할 것이 경험 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 철학이 이렇듯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언젠가 경험 그 자체가 되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분명히 하나의 철학("une seule philosophie")만이 있고 또 있어야만 한다 (PM 1307, 1368). 그런데 이런 철학에 도달하려면 철학자는 우선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한다. 그 어떤 철학자도 철학 전부를 단시일에 건설하도록 강요받은 적은 없지 않는가 ? 철학은 방법론도 아니며 실천적 학문도 아니다. 철학은 단지 있는 대로 보려 할 뿐이며 언젠가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렇듯, 베르크손 철학관의 그 낙관적인 성격을 철학의 대상과 방법의 두 측면으로 나누면 <경험적 철학>과 <직관적 철학>으로 요약되는데 여기서는 전자 즉 철학의 대상적 측면을 고려한 <경험적 철학>에 대해서만 우선 살펴보도록 한다.





3. 경험적 철학



3.1. 사실의 선(線)



"철학에서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며, 철학에서도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그것을 배우고 나서야 알게 된다" (M 1196). 철학자는 무엇이든 척척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에 상관없이 기꺼이 다시 학생이 되어 어떤 연구 업적이거나 과학 자료든지 항상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베르크손의 철학자관일 뿐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철학하는 자세이기도 하다.6)

그러나 철학사에서 보면, 철학자는 대부분 척척박사였다. 그 결과 철학자는 체계를 세웠고, 또 다른 철학자는 자기 나름대로 또 다른 체계를 세우곤 했다. 과학이 진지한 작업이었던 반면 철학은 일종의 "정신의 휴식이며 유희"였다 (Ibid). 이런 식으로 이해된 철학은 "대립하는 학파들이 전부 무대에 올라가 번갈아 박수를 받는 경기"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M 480). 각각의 철학자는 즉각적인 확실성을 보여주려 했지만 그것은 일회적일 뿐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철학에는 발전이 없었고 페넬로프(Pénélope)의 천처럼 항상 다시 시작해야 했다 (ES 817, M 1196). 변증법을 도구로 그들의 상상력을 소재로 건설한 그들 고유의 철학적 건축물을 지키기 위해 철학자들은 순수 변증법이라는 결투장에서 서로서로 무한정 싸웠던 것이다 (M 1197, MM 167).

베르크손에 따르면, 반박함에 쓰여진 시간은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허비한 시간이다. 철학에서 <가타부타 (le oui ou le non)>는 헛된 것이며, 유익하고 수확적인 것은 <어떤 정도까지인가 (le dans quelle mesure)>이다. 중요하며 끝까지 남는 것은 얼마나 실증적 진리를 가져다 주었느냐는 것이다. 진정한 긍정은 자신의 내재적 힘에 의해 거짓 관념을 대체하며, 어떤 누구도 반박할 필요 없이 반박 중에서 가장 좋은 반박이 되는 것이다(EC 861-862, M 477). 헛된 반박으로 허송세월하는 대신 그 발전을 위해 실증적 진리들을 축적하려는 철학이라면 모름지기 관찰과 경험에 의거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정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식은 경험 외에는 그 어떤 근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진리가 경험적 성격을 갖는다고 해서 곧장 그 진리를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베르크손은 말한다 : "많은 경우에 진리를 모든 각도에서 검토하여 그 진리로 통하는 무수한 길들을 열어야 하지만 그 어떤 길도 끝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그 길들의 수렴만이 우리가 도달할 점을 충분히 정확하게 표지하여 준다. 바로 이런 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점까지의 거리를 도달 가능한 점들에서 차례차례로 그 점을 조준하여 측량할 수 있는 것이다. 개연성의 축적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과학적 확실성이 있는 것이며, 그 자체로써는 진리를 규정하기에 불충분하나 그것들의 교차에 의해 진리를 규정하는 <사실의 線들>이 있는 것이다" (M 482-483). 이런 작업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단숨에 완전한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고 끈기있는 관찰을 통해서 우선 대략의 결과를 얻고 이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하도록 해야 한다. 단번에 확실성을 얻겠노라 자부하지 말고, 잠정적으로 우선 개연성을 얻도록 해보자 (ES 846). 개연성에 개연성이 더해지면서 실제적으로 확실성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PM 1288, ES 817, 860). 앞에서 베르크손이 묘사하였듯이, 이 개연성으로부터 확실성으로의 점진적 이행을 위해서 우리는 건축기사보다는 측량기사처럼 행동해야 한다 (MR 1186). 철학자는 측량기사처럼 몇몇 점들을, 즉 몇몇 문제들을 연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다른 문제들에 대해 내려진 해결책을 가지고 새로운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각 새로운 문제를 대할 때마다 사실에 대한 구체적 연구에 완전히 새로운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M 798, 1197).

이렇게 함으로써만이 철학은 실증과학처럼 얻어진 결과를 점차적으로 쌓아감으로써 발전할 것이며, 처음부터 취해지거나 버려질 운명을 가져 항상 부인되고 항상 재출발해야 하는 <완전한 체계>의 신세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MR 1186). 이것이 바로 베르크손이 생각하는 <실증적 형이상학>의 이념인 것이다.7) 측량기사의 교차의 방법에 의해 철학도 공동연구 (collaboration)를 할 수 있고, 이 공동협력을 함으로 인해 철학의 단일성은 "연속의 단일성, 즉 멈춰진 한 점에서 각 사상가가 연장시키는 그래프 곡선의 단일성일 것이다" (M 1197). 각각의 따라가야 할 <사실의 선>을 따로 취한 후, 각 철학자들은 잠정적이며 개연적인 공식을 우선 세우게 되고, 불완전하고 잠정적인 것이긴 하나 해결책과 결론들이 그들의 공동협력으로 점점 쌓여가는 것을 보게 되며 결국 이 공식들이 서로 교차하는 점, 즉 결정적인 확실성을 가진 진리 자체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하는 개념들, 즉 실재 자체만큼이나 유동적인 개념들을 가지고 실재의 "굴곡있고 변화무쌍한 윤곽들"을 좇아가노라면, 경험으로 충만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유일한 철학에 근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ES 817, M 501).

이렇게 "철저히 경험을 본떠" 철학하는 방식은 물론 무척 고통스러운 것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은 "그의 탐구 영역을 실제적으로 넓히려 하지는 않고 한가지 결론을 논리적으로 발전시켜 다른 결론에 적용시키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M 964, PM 1330). 그러나 철학에도 발전이 있기 위해서는 베르크손이 철학자들에게 권하는 이 매우 길고 어려운 작업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많은 시간이 요구되기는 하나, 이 작업은 "빛으로의 점차적인 승천일 것이다" (ES 817).

철학이 이렇듯이 경험에 근거하여 <사실의 선>을 좇아야 한다면 도대체 실증과학과는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 이제부터 이 당연한 의문에 대한 베르크손의 답변을 들어 보기로 하자.





3.2. 철학과 과학



경험적 사실을 고려하는 작업은 언뜻 생각하기에 실증과학에 맡기는 것이 신중한 처사인 것 같기도 하다. 물리학과 화학은 물질을 다루고 생물학과 심리학은 생명 현상을 연구하지 않는가 ? 철학자의 역할은 분명 제한되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철학자가 과학자들로부터 사실과 법칙을 인계받아 그것들을 초월하여 그 심원한 원인에 도달하려 하든지 또는 이런 작업이 불가능함을 과학적 인식의 분석 자체로 증명하려는 두 경우 모두 그는 과학이 넘겨준 경험적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 이 과학적 사실 인식 위에서 인식 작용을 비판하기도 하고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우기도 하지만 과학적 인식의 소재인 사실들 그 자체는 과학의 소관이지 철학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EC 660). 그런데 과연 철학자는 경험의 영역에 있어서는 이렇게 실증 과학이 주는 소재와 결과에 의존하고 만족해야 하는가 ?

경험적 사실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성질상 전부 같은 종류에 속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대충 반복 되고 대략 측정되는, 다시 말해 공간화되는 방향으로 펼쳐져 드러나는 사실과 측정 불가능한 순수 지속, 자유 그리고 창조의 영역에 속하는 사실을 구별하게 되는 바, 만약 경험이 이렇게 두 가지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모든 종류의 인식을 과학이나 - 오랫동안 실제로 그러했듯이 - 철학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은 실증과학보다 우위에 있지 않기 때문이며, 다시 말해 철학은 과학이 이미 다룬 대상에 대하여 그 어떤 더 높은 인식을 얻고자 이를 다시 한번 취하여 자신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상하 관계를 철학과 과학 사이에 설정한다면 과학은 상대성에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과학이 취할 것은 당연하므로 철학은 가설적이며 모호한 인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과학보다 더 멀리 가보려고 할 때마다 철학은 항상 확실성을 잃는 대가를 치르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 철학의 확실성이 아니겠는가 ? 따라서 철학이 자신의 고유 영역에서 확실성을 가진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과학과의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을 처음부터 긋고 시작해야 할 것이다 (M 886).

베르크손에 따르면, 철학과 과학은 똑 같이 정확하고 확실하며 적어도 그리 될 수 있는 것으로, 둘 다 실재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PM 1286). 먼저 실증과학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자신의 영역인 불활성 물질 (matière inerte)의 영역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에서 실증과학은 실재 자체에 근거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EC 670-671). 이렇게 실증과학은 실재의 일부만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언젠가 그 밑바닥에 도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무한히 접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고유 영역은 무엇인가 ?

이미 말했듯이 철학의 영역은 창조되고 또 끊임없이 재창조 될 수 있는 실재, 곧 정신의 영역인 것이다. 정신은 항상 상호 침투의 형태로 나타나는 순수 지속이며, 완전히 결정되지도 끝나지도 않고 활동중이기 때문에 법칙이나 측정에 따르지 않는 실재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실재를 불활성 물질을 통해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아직 삶의 필요에 의해서 재단되지 않은 그의 자연적인 마디 ("articulations du réel")를 따라감으로써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M 367). 그와 동시에 이 영역에서 철학은 내적 경험에로의 길을 열기 위해서 굴착 작업을 행해야 한다. 즉 사고의 새로운 기능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PM 1289). 왜냐하면 인간의 지성은 감각의 연장인 고로 사색하기 이전에 우리는 우선 살아야 했고, 이 삶이 우리로 하여금 무엇이든 보면 먼저 그것을 이용할 생각부터 들게 만들어, 순전히 사색할 때조차 우리는 행위하던 습관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PM 1278, 1279).

이렇게 과학과 철학은 각각 물질과 정신을, 즉 전 실재를 반반씩 나누어 가진 후에, 그들의 이론이 실재를 치밀하게 파악하여 이론과 실재 사이에 어떤 다른 해석도 끼어들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의 과학이 있듯이 하나의 철학만이 있게 될 것이고 철학자나 과학자간의 점진적인 공동 노력으로 철학과 과학은 각각 완성되어 갈 것이다 (PM 1307). 결국 이 노력에 의해 우리는 실재 자체 이른바 절대 (l'absolu)가 우리 가까이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는 우리 안에서 나타남을 보게 될 것이다 (M 490, 1192) : "우리는 절대 안에 있으며 왕래하고 생활한다. 우리가 절대에 대하여 갖는 인식이 완벽하지 못함은 사실이나 결코 외적이거나 상대적이지는 않다. 철학과 과학의 점진적이며 연합된 발전에 의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심원한 경지의 존재 자체인 것이다" (EC 664).

과학과 철학은 이렇듯 그 위상이 같고 또 진보적 양상을 같이 갖고 있지만, 각각 나누어 가진 반쪽만의 절대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이 서로 접해 있듯이 철학과 과학은 공통점을 갖고 있고 이 점에서 서로서로를 검증한다. 일상적 개념들 안에 축적되어 있고 단어들에 의해 전달되는 모호한 인식을 배제한 후 철학과 과학은 결국 경험 안에서 교감하여 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PM 1286, 1287). 한마디로 말해, 철학과 과학은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정확성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정확성에 의해서만이 철학과 과학은 진정한 경험론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언젠가 실재들을 완전히 포착할 것이다.





3.3. 진정한 경험론



"철학에서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 정확성이다"라고 베르크손은 말하곤 하는데 (PM 1253), 과연 이 철학에서의 정확성 (précision)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 과학적 설명의 경우 설명되는 대상에 꼭 들어 맞아서 다른 어떤 설명도 끼어들 틈이 없을 때 이를 절대적 정확성을 가진 완벽한 설명이라 하는데, 철학의 경우는 어떠한가 ? 과학이 한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역시 기성의 개념들을 물리치고 새로이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새로운 문제에는 새로운 노력을 경주하는 정확성, 한 결론이 서 있는 경험적 고찰이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이 경험적 고찰을 넘어서는 결론은 내리지 않으려는 정확성, 바로 이 정확성으로 인해 철학자는 실증 과학의 객관성과 비록 성질은 다르지만 그 양에 있어서는 결코 뒤지지 않는 객관성을 나름대로 갖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M 964).

<진정한 경험론>은 이와 같은 정확성, 즉 새로이 연구하게 된 대상에는 완전히 새로운 노력을 경주할 때 얻어지는 정확성 위에서 출발하는데, 이는 기성품이 아니라 맞춤품을 만드는 작업에 비유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대상에만 유일하게 들어 맞는 개념을 마름질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사고의 일상적 작용들에나 사용되는 기성품 개념들은 여기서 쓸모가 없기 때문인데, 실제로 우리는 내적 경험에 딱 들어맞는 언어 표현을 찾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래서 베르크손은 "우리의 정신과 사물들 사이에 기존의 개념들이 계속해서 끼어들지만 않는다면 철학함이 쉬웠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M 1591). 이렇게 볼 때 철학함이란 개념들 중에서 선택하는 작업이 아니라 개념들 자체를 창조해 내는 일인 경우가 많은 것이다 (M 503). 그런데 철학에서 '개념을 창조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철학은 언제나 문제를 찾는 노력을 요구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문제를 풀기보다는 문제를 제기해 보려고 힘쓰는 것이 철학하는 기본 자세인데, 이는 바로 문제의 해결과 제기는 별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철학의 주요 문제들은 그것이 해결될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설정되는 것이며 달리 말해서 문제 제기가 제대로 되자마자 곧 해결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문제를 발견하는 것을 넘어서 문제를 발명해 내는 것이다. 발견은 이미 있거나 또는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이어서 조만간 생길 그 어떤 것인 반면, 발명은 존재하지 않던 것에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철학에서의 발명의 노력은 문제 제기 자체를 고안해 내고 결국 문제와 그 해답을 구성하는 용어들을 창조해 내려는 노력인 것이다.

이 노력의 여부에 따라 베르크손은 철학에서 아마추어와 철학자를 구분한다. 통상적인 철학 문제의 용어들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 문제 설정을 결정적인 것으로 믿고 이 문제에 가능한 기존의 몇몇 해결책들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데 만족하는 사람은 철학의 아마추어인 반면, 문제를 새로이 제기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해결의 노력도 동시에 하는 셈이어서 결국 해결책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자라고 베르크손은 구분하고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M 1528).

참된 철학자가 새로운 문제 제기로 새로운 해결책을 발명해 내는 노력은 언어로부터의 초연함이라고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언어는 대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철학을 위한 수단은 본래 아니고 각 단어는 실재의 일부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이 일부분은 인간이 그의 편의와 필요에 따라 조잡하게 마름질한 조각이기 때문에, 실재를 그 자연적 윤곽을 따라 다시 재단하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철학에 있어서 개념의 창조가 절실히 요구된다고 해서 철학자가 자의적으로 전문 용어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철학적 개념은 그것이 아무리 섬세하고 심오할지라도 누구나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며 또 항상 그렇게 되어야" 하기 때문인 것이다 (M 1201).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일상 용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창조한다는 말인가 ?

전적으로 내적 경험에 들어맞는 언어가 없기 때문에 철학자는 어쩔 수 없이 우선 기존 개념에 의존한다. 그러나 이 개념에 이미지를 첨가하여 개념을 끊임없이 확장시키고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개념을 취하여 잠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더 높이 오르기 위한 발판일 뿐이다. 개념들의 외연 (外緣, frange)으로 철학자는 이 개념들이 경험 전부를 포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언어 속에서 식어 굳어져 버린 개념들을 넘어서 그 개념들이 서로 인접하거나 서로 침투하는 경험 자체의 열기와 유동성을 철학자는 찾아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의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개념적 사고와의 관계를 잃어 버리지 말아야 하며 얻어진 결과들을 가능한 한 언제나 개념들로 번역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M 517).

이제 <진정한 경험론>의 의미를 정리한다면, 이는 정확성이 그 바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영역에서 정확성을 추구하는 철학자라면 기존의 개념들을 물리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는 바, 그 이유는 한 개념에 일반성을 부여함으로써, 해당되는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들에까지 이 개념을 적용할 때 바로 부정확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나서, 실재의 마디를 따라가 그 실재에 대한 직접적 통찰 (vision directe)을 얻기 위해서는 그 표현 수단으로써 새로운 개념들을 지어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개념들은 대상에 꼭 맞게 마름질된 개념들이어야 하며 상식에 의해 통제되어야 함은 물론 개념적 사고와도 항상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는 것이다. 경험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문제들, 즉 인위적 개념들을 가지고 경험을 번역해 낼 때 생기는 문제들, 이른바 언어의 농간에 의해 생긴 사이비 문제들을 제거해 버리고 철학은 자기 자신의 고유 영역 즉 내적 경험의 영역에 자리잡아야 한다. 이 영역에서 내적 경험이라는 원본에 가능한 한 가깝게 가려 하며 거기서 생을 깊이 연구하고 일종의 <정신적 청진 (auscultation spirituelle)>에 의해 영혼의 고동을 느끼려 할 때, 철학은 진정한 경험론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이 <진정한 경험론>이야말로 진정한 형이상학이요 베르크손이 생각하는 철학의 장래 모습인 것이다 (PM 1408) : "나는 도래할 형이상학은 그 나름대로 경험적인 학문으로 다른 실증과학처럼 발전할 수 있으며, 실재에 대한 세심한 연구 끝에 얻은 최근 결과들을 내어 놓되 그것을 잠정적으로만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엄밀한 학문이라 생각한다" (M 480).





4. 맺는말



이제까지 우리는 베르크손이 생각하는 <철학>의 성격을 주로 그 대상의 측면에서 규정해 보려고 했다. 그의 입장은 한마디로 말해 "사실에 만족하자 (tenons-nous-en aux faits)"라는 그의 말로 대변될 수 있을 것이다 (PM 1344). 이렇듯이 베르크손에 있어서 철학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사실 (fait), 곧 소여 (所與, donnée)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우리는 만약 모든 사물들이 전부 지각될 수 있다면 철학은 불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지각이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공백을 메우거나 그 범위를 확장시키기 위해 태어난 철학은 지각 (percept)을 개념 (concept)으로 대체시켜 버린 것이다. 개념이라는 것은 그것이 대표하는 지각이 있을 때에만 가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흔히 우리의 감각과 의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구실로 삼아 경험을 초월하는 철학을 고집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반해 베르크손에게 있어서의 철학은 경험을 연구하는 학문, 더 자세히 말해서 내적 경험 즉 우리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임을 보았다. 물론 우리 각자가 내적 실재를 현재 전부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인식은 제한된 인식이다. 그러나 철학함이란 바로 이 한계를 끊임없이 뒤로 물러 서게 하는 노력이며, 이것이 바로 설명되어야 할 베르크손의 <직관 철학>의 이념인 것이다.





- 주 -



1.'Bergson'을 관례상 '베르그송'이라 발음하고 표기해 왔으나, 철학자의 출신지인 불란서에서는 '베르크손'이라 발음하며 로베르 (Robert) 인명 사전에도 /bεRkson/이라는 발음 기호가 분명히 명시되어 있으므로 철학자가 생전에 실제로 불리워졌던 발음에 가장 가까운 표기를 택하여 보았다.

2. 이 글은 본래 불어로 작성된 원고 (『베르크손에 있어서의 철학의 개념, La notion de philosophie chez Bergson』)의 전반부만을 정리 요약하여 실은 것임을 밝혀둔다.

3. 베르크손의 저서를 인용할 때 다음과 같은 약자들을 사용할 것이며, 탄생 백주년 기념판 (1984년 4판)과 잡필집 (1972년 초판)의 쪽 번호를 기재할 것이다.

DI : 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MM : Matière et mémoire

EC : L'évolution créatrice

ES : L'énergie spirituelle

MR :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M : La pensée et le mouvant

M : Mélanges

4. PM 1392 & EC 725 & PM 1365.

5. PM 1335, "la réalité est croissance globale et indivisée, invention graduelle, durée".

6. cf. M 1039, Interview recueillie par Gremil.

7. M 652, 윌리엄 제임스에게 보낸 1905년 2월 15일자 베르크손의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