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老子의 생태학적 자연관
양해림(강원대학교)
Ⅰ.들어가는 말
21세기에 들어선 우리 현대인에게 니체와 노자의 생태학적 자연관은 어떤 화두를 지니고 있는가? 서구에서 대표적으로 디오니소스적 자연관을 언급하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와 동양적 사유에서 무위자연을 말하는 노자(老子, Lao Tzu, 약 기원전 4C~?)1)
는 어떻게 서로 연결가능한가? 니체와 노자의 관계는 시기적으로 봐서 상당한 연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양자간의 관계를 다루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현시점에서 니체가 아시아의 사상을 어떻게 이해하여 보았는가에 따라 니체의 문헌 속에서 드러난 아시아적 사유의 영향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니체와 아시아적 사유2)
, 특히 노장사상을 현시점에서 그들의 유령을 불러들이고 있는가? 그 이유는 현대인의 과학문명에 지친 심신을 그들의 사상 속에서 위안을 찾고 현대의 관점에서 그들이 언급한 내용을 돌이켜보아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보는데 있을 것이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노자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봐서 환경을 의식하여 단지 그의 무위자연사상을 전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단지 현재의 관점에서 노자가 환경 친화적인 의식을 가졌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의 사상을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니체도 그 시대의 분위기로 미루어 보아 환경에 그다지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는 도구화 되어가는 인간의 오염되고 퇴락(頹落)한 정신을 질타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하였다는데 있다. 즉 니체와 노자의 사상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가 그들의 사상을 통해서 공통점을 끄집어 낼 수 있는 요소는 시기적 간격으로 봐서 많은 차이는 있지만, 그중 공통적인 요소를 찾는다면 무엇보다 자연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이 자연이라는 요소는 인간이 과학기술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커다란 분기점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과학을 "자연의 지배를 목적으로 하려는 자연개념의 변화는 수단의 부류(KSA 1.1, 194)3)
"를 이루면서 "자연과 세계 속의 인간으로서 느끼는 것(KSA 2, 689)"이라 말한다. 또한 "자연의 영적인 설명, 즉 형이상학은 교회나 학자들이 성경에서 행하는 것처럼 정령적으로 자연을 기술하는 것(KSA 2, 28)"이라 언급한다.
따라서 필자는 니체의 광범위한 저서 중 생태계의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한정하여 다루고, 노자에게서는 그의 사상의 기본적인 골격을 이루고 있는 무위자연의 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보아 그들의 메시지가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Ⅱ.계몽의 변증법의 선구자로서 니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 에서 계몽의 본질은 양자택일인데 이 양자택일의 불가피성은 지배가 불가피하다는 것과 똑같다고 본다. 즉,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자연에 굴복시킬 것이지 아니면 자연을 자신의 지배하에 둘 것인지를 선택해야 했다4)
. 계몽은 계몽 이상의 것, 즉 소외된 자연5)
에서 인지되는 자연이다. 자연의 함몰은 자연지배에 원인이 있지만, 정신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스스로 지배임을 고백하고 자연 속으로 퇴각하는 결단을 통해 정신은 자신을 바로 자연의 노예로 만들어 지배하려는 요구를 분쇄할 수 있다.
(DA, 46)6)
. 다시 말해서 계몽은 자연의 지배로 이해하고,결정적으로 왜곡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따라서 자연은 객관화로서 이성 속에 나타나 있으나, 자연의 관계를 방치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7)
.
우리가 『계몽의 변증법』 에서 계몽과 신화와 관련된 언어의 양자택일을 배제시켜 버린다면, 계몽과 신화로부터 동일성의 동일성 및 비동일성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첫째로 계몽은 신화를 통한 역사와 세계의 언어적 입장과 만난다. 즉 "이미 신화는 계몽이다(DA, 6)." 두 번째로,『계몽의 변증법』은 계몽과 신화의 동일성에 근거를 두고 나타난다. 즉 계몽을 단순히 신화와 대립하여 파악하였을 때, 계몽은 신화로 되돌아간다(DA, 6). 즉 하버마스가 파악한 바와같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신화와 계몽은 은밀한 공범관계를 형성하고있다는 것이다. "이미 신화는 계몽이고, 계몽은 신화로 변한다." 그런데 호르크 하이머와 아도르노에게서 계몽이 신화로 퇴보하게 된 원인은 이러한 퇴보의 목적을 위해 고안된 민족주주의적, 이교도적, 그 밖의 근대적 신화론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경직된 계몽자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DA, 3).
먼저 계몽의 과정은 자연의 탈사회화와 인간세계의 탈자연화를 야기한다8)
. 계몽의 과정은 그 시초부터 자기보존의 충동에 힘입고 있기에, 이 충동은 이성을 불구로 만든다. 왜냐하면 자기보존의 충동은 이성을 오로지 목적 합리적인 자연지배의 본능적 지배의 형태로서, 즉 도구적 이성으로서만 요청하기 때문이다9)
. 『계몽의 변증법』 은 어떤 의미에서 계몽의 계몽10)
을 위한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으나, 그러한 계몽의 계몽은 역설적이게도 자기 모순적 이다. 왜냐하면 계몽의 계몽은 바로 그 계몽의 고유한 수단을 통해서만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11)
. 계몽의 프로그램은 세계의 탈마법화12)
였다. 계몽은 신화를 해체하고 지식에 의해서 상상력을 붕괴시켜 버렸다 이러한 견해는 실험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베이컨(Francis Bacon)에 의해 계몽의 동기들을 형성하였다(DA 9). 베이컨에 의하면, 미신을 정복한 오성은 탈마법화된 자연 위에 군림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과 인간을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DA, 10). 여기서 니체는 베이컨적인 의미에서 힘의 의지를 근대적 인간을 자연과학과 자연의 기술을 받아들이고 특성화시킨다. 즉 학문은 자연의 변화에 대해 자연을 지배하려는 목적의 개념이라는 것이다13)
. 니체에게서 "학문이란 자연을 보다 쉽게 계산 가능하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만들 목적으로 모든 현상들에 대한 공동의 기호언어를 만들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기호는 관측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나, 생기적 사건에 대한 간략한 기술일 뿐이다(KSA 11, 209)."
니체는 한편으로, 계몽은 민족의 내부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거기서 모든 성직자는 속이 검은 족속임을 밝혀내며, 국가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게 폭로한다. 즉 계몽의 과제는 군주나 정치가의 모든 행동이 의도적으로 거짓말 한 것들을 들추어낸다14)
(Vgl. XIV, 206). 다른 한편, 계몽은 예로부터 훌륭한 통치기술이었다. 그러한 예는 중국의 유교, 로마제국, 나폴레옹, 그리고 세속과 권력에 관심을 보이는 교황권에서 볼 수 있다.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왜소한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진보」라는 이름하에 추구되었다. 계몽의 이와 같은 이중성이 역사의 근본원리임이 드러남으로써 진보적인 사유로서 진행된 것이다(DA, 51). 그런데 진보는 자연의 강압을 분쇄할수록 더욱 깊숙이 자연의 강압에 빠져들며, 끊임없는 진보가 내리는 저주는 끊임없는 퇴보(DA, 42)로 나아간다. 니체는 모든 외적인 힘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즉 계몽의 본질로서 규정된 조건이 없는 성숙(M?ndigkeit)을 목표로 삼는다(DA, 123) 니체는 인간의 사회적 본질의 강압적 특성을 관찰하고 종교의 근원과 기능의 방법을 통찰한다. 즉 진보적 사유는 역사적 권력의 종교에서부터 이념의 신화학에 이르기까지 투명하게 하고 있다15)
(KSA 1, 309). 따라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에 따르면, 니체는 유토피아의 겉표피를 벗겨내어 그 본질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는데 있다는 것이다. 즉 그 스스로 더 이상 왜곡하지 않고 왜곡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인간이라는 유토피아를 보여주는데 있다(DA, 127).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16)
』의 "오디세우스 또는 신화와 계몽"의 장에서 니체가 계몽의 선각자임17)
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체는 혜겔이후 계몽의 변증법을 인식한 몇 안 되는 철학자 중의 하나다. 그는 지배에 대한 계몽의 이중적 관계를 형식화시켰다(DA, 50).
니체는, 비판이론이 형성되기 50년 전에 이미 계몽의 역사적 변증법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단순히 18세기의 역사적 현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 대한 고찰까지 확대된다18)
. 비판이론이 형성되기 전에 니체는 이미 계몽의 변증법을 인식했으며, 그렇지만 루소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19)
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그의 초기 저작인 『비극의 탄생』 에서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정신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친 기형적인 삶을 그 본보기로 들어 이를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특히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신화의 개념을 중요한 범주로 형성하고 있다. 거기서 학문적인 사유의 황무지를 "압축된 세계상"으로 제시한다. 즉 개인은 이 세계를 살면서 인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두 개의 통일체는 서로 혼합되어 있으나, 통일체로서 세계의 몰락은 개인의 몰락을 의미하였고, 개인은 니힐리즘을 생성한다.
"그러나 신화 없이 각 문화는 그것들의 건전한 창조적인 자연력을 잃어버린다. 먼저 신화와 함께 바꾸어 놓은 지평선은 모든 문화운동으로 통일되어 완성된다. 모든 환상력과 아폴론적인 꿈은 비로소 신화를 통해서 정처없는 방황 속에서 구출되는 것이다. 신화의 형상은 남몰래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귀신같은 파수꾼이어야 한다. 이 파수꾼의 보호아래 젊은 영혼은 성장하고, 이 파수꾼에 의해서 인도되면서 남자는 자기의 인생과 투쟁의 신호로 이해하는 것이다. 비록 국가라고 하더라도 신화적인 기본요소로서 그렇게 강력하게 서술할 수 없는 법칙을 알지 못한다. 국가는 종교와 연관되어 있고, 국가가 신화적인 여러 관념들에서 성장한 것이야말로 신화적인 토대가 되는 것이다(KSA 1, 145)."
니체는 신화적 세계에 관한 학문적 고찰만 한 것이 아니라 신화와 더불어 지나간 세계와 인간의 통일체를 다시 찾아 계몽화되고 역사적으로 형성된 의식을 잊지 않으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 에서 신화와 통일체의 관계를 개념적으로 파악한다. 그에게서 신화로 변화된 지평은 광범위한 개인적인 의미에서 인간본성의 현실적 조건이 된다20)
.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비극의 탄생』 에서 가장 의미있고 중요한 주제를 신화라는 개념에서 파악한다. 『계몽의 변증법』 에서 계몽은 신화와 이별한 학문에서 파악한다. 게다가 비합리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학문적 신화를 또한 계몽에서 시도한다. 니체의 『비극의 탄생』 에서 신화와 학문의 관계에서 참된 신화는 현실의 전체에서 진행된다. 왜냐하면 신화는 항상 현실의 전체로서 파악하기 때문에, 동시에 인간의 전체이자 인간의 존재인 것이다21)
.
니체에게 있어서, 신화의 규정은 "무한 속을 응시하는 보편성과 진리성의 개별적인 실례로서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참으로 디오니소스적 음악은 세계의지의 보편적인 거울로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직관적으로 느껴진 신화는 음악이라는 거울 속에서 굴절하여 크게 확산되어 우리 감정에 영원히 진리의 모상으로 느껴진다(KSA 1. 112)" 여기서 니체에게서 음악은 도취의 예술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출발점을 이룬다. 디오니소스적 영역의 근본경험은 "전율(KSA 1, 28)"과 격정적 경험의 근원적 고통이나 기쁨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디오니소스적 영역은 기쁨ㆍ슬픔ㆍ인식 속에서 자연의 과도함을 이야기한다(KSA 1, 40: KSA 4, 40∼41)22)
.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마력과 그 정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마력 아래서는 인간과 인간의 결합을 회복시키는 것만은 아니다. 인간에게 소외된 자연이나 적대시되고 혹은 억압되어 온 자연도 그의 집을 나간 탕아(蕩兒)적인 인간과 다시금 화해의 제전을 축하하는 것이다.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서, 인간은 스스로 보다 높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표명한다. (…) 인간은 이제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이제 예술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즉 모든 자연의 강렬한 예술력은 여기에 도취의 전율아래 계시되며, 근원적 일자는 최고의 환희의 만족을 주는 것이다(KSA, 1, 29)23)
."
니체의 초기 『비극의 탄생』 의 저서는 예술의 입장에서 만나는데, 세계는 "단지 미적인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라는 주장은 계몽가를 위한 예술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미학적 형이상학의 주체로 형성되면서 자연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즉 "내가 자연 속에서 강렬한 예술적 충동을 인정하고 그리고 충동 속에는 가상에의 그리움, 가상에 의한 구원의 불타는 그리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할수록, 형이상학적 가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KSA 1, 38)." 또한 니체는 자연의 심장부에서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의 우월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도함은 그 진실로서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모순, 즉 고통에서 태어난 환희는 자연의 심장부에서 나와 스스로를 말했다. 이리하여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젖어 들어간 모든 곳에서 아폴로적인 것은 지양되고 멸망되었다(KSA 1, 41)" 하버마스에 따르면, 니체는 『계몽의 변증법』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평준화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현대는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였고 태고적 삶의 해체와 신화의 몰락과 더불어 시작된 합리화의 긴 역사과정 중 마지막 단계를 형성할 뿐이다24)
. 따라서 하버마스는 니체의 독창성은 단지 디오니소스적 역사고찰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합창이 본래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의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역사적 명제는 초기 낭만주의에서 이미 형성되었던 맥락으로주터 현대성 비판과 관련된 핵심을 획득한다는 것이다25)
.
한편 니체는 이러한 신화에 대해 신화의 상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충족되지 않은 현대문화의 엄청난 역사적 요구, 헤아릴 수 없는 이질 문화, 쓸데없이 소모적인 인식욕, 이것이 지시하는 것은 신화의 상실, 신화적 고향의 상실, 신화적 모태의 상실이 아니고 무엇인가?(KSA 1, 145)" 무엇보다 "계몽은 신화를 종식시키려고 노력하며, 형이상학적 위안이 있던 자리를 현세의 조화, 즉 기계와 용광로의 신으로 대체한다. 다시 말해 이기심을 더 많이 충족할 목적에서 고안되고 이용되는 자연신들의 힘으로 신화를 대체한다. 또한 계몽은 지식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며, 과학이 인도하는 삶을 믿는다. 실제로 계몽은 개인의 인간들을 단지 몇 가지 해결 가능한 과제들만으로 꽉 짜인 틀 속으로 밀어 넣는 힘을 갖고 있다(I, 98)." 바로 여기에 계몽의 변증법이 자리한다. 즉 "계몽은 과거의 신화를 파괴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신화로 빠져든다. 계몽은 이성적이지만, 이성에 대한 계몽의 관계는 맹신일 뿐이다. 이성, 즉 과학을 사용함으로써 계몽은 이 세계를 끊임없이 개선하고, 개개의 인간들을 고결한 존재로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26)
."
Ⅲ.니체의 생태학적 자연관
니체는 그 당시 황폐화되어 가고 있는 인간이성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하면서 그의 저서의 여러 단편들이나 유고집(遣稿集) 등에서 인간의 탈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를 주장하였다. 니체는 황폐화되어 가는 자본주의에 고발을 하는 주요한 이유로서 탈인간화와 탈자연화를 지적할 수 있는 근거와 원칙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니체의 이러한 사유는 현재의 21세기 사유담론에서 널리 언급되고 있는 생태학적 및 환경의식의 사유로 전환하여 고찰할 수 있다. 인간이 자연을 억압하고, 자연의 내면과 외면을 구분하여 전개해 온 근대화의 과정, 즉 근대문명의 진보적인 과정은 오히려 인간의 내면세계를 박약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야만상태의 구렁텅이로 몰고 갔다. "니체는 자연과학적 지식의 절대성과 그에 대한 맹목적 믿음, 자연의 억압에 기초해 기술적 물질문명을 추진해 나가는 문명의 발전과정을 유토피아적 환상27)
"이라고 언급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진보의 미신을 거부하였고, 그의 총체적인 관점은 종으로서의 인간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종으로서의 인간은 어떠한 다른 동물과 비교하였을 때도 결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8)
.
니체는 자연과학적인 이성을 작은 이성이라 비판한다. 즉 그는 "인간의 작은 이성의 도움으로 많은 물질주의적 자연연구가들이 만족해 하는 세계의 믿음, 즉 자연과학적인 진리의 세계에 대한 믿음에 만족을 보내는(KSA 3, 625)" 근대적 사유를 비판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의 자연과학과 기술은 자연에 대해 힘의 우위를 현실화시키면서 줄기차게 지금껏 진행되어 왔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의 대상은 관계의 총체성으로서 자연을 낚아채기 위해서 이성의 그늘 망을 조직하여 왔다는 점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법칙의 관계망 속에서 다른 자연법칙과의 영향관계들을 인식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자유로운 입장을 견지해 왔다. 자연에 대해 근대적인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연을 기술하려는 자신들의 관점과 가능성을 계획하여 왔다. 따라서 근대자연과학의 주체는 족쇄로 채워진 자연의 관점에 대해 입장을 세우고, 자연에 대한 지배의 의지를 수행해 왔다29)
. 니체는 "우리는 다시 자연을 헤아린다(Xl, 250, 272, Ⅲ, 365). 우리는 모든 자연적 삶에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자연과학은 인간을 인간학주의로 이해하는 것이다(X, 272)"라고 말한다.
니체는『도덕의 계보학』에서 자기보존이라는 척도에 지향된 오성은 강자의 법칙만을 통용하게 만들었다고 다음과 같이 질타한다: "자연의 객관적 법칙이라는 것이 편견과 신화임이 드러난 이후, 자연은 단순한 물질의 덩어리로만 남게되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할 뿐만 아니라 우리자신에 대해서도 인식할 수 있는 어떤 법칙도 없음을 안다. 자기보존이라는 척도가 인도하는 데에 따라 성장한 오성이 삶의 법칙을 자각하는 한 그것은 강자의 법칙이다. 인류의 가장 큰 위험은 병든 자들이지 악한 자나 육식동물적인 인간이 아니다. 처음부터 불행한 자, 내팽겨진 자, 분쇄된 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가장 약한 자들로서 인간의 삶을 파헤치며, 삶과 인간과 우리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의문을 제기하고 맹독을 퍼뜨린다30)
."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의 변증법』 의 마지막 장에 걸쳐 니체와 사드를 장식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자연은 결코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복행위를 지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보복행위는 머리속 에서는 가능한지 몰라도 육체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러한 보복행위를 하려면 약자는 그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힘을 사용해야 한다(DA, 107)" 우리는 "강자로 하여금 강자로 나타나지 않기를 요구하고, 정복욕ㆍ제압욕ㆍ지배욕이나 적대ㆍ저항ㆍ승리에의 갈증을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약자로 하여금 강자로 나타나도록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다(DA, 123)31)
." 이와 같이 "우리들이 자연을 관찰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부정확하다. 그리하여 실제로는 정도의 차이일 뿐인데도 마치 자연 속에서는 어디에나 대립만이 지배한다고 여긴다. 이 잘못된 버릇으로 인해 정신적ㆍ윤리적 세계인 내적 자연마저도 항상 그와 같은 대립을 기준으로 이해하고 분리하려고 한다. 인간이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확연한 대립을 보고 있다고 착각함으로써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고통ㆍ교만ㆍ역경ㆍ소외 그리고 혹한이 인간의 감각 속으로 밀려 들어오게 되었다32)
."
니체는 자연을 인간과 대립시키며, 이성ㆍ지식ㆍ자연의 인간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목적 속에 살고, 목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성취할 자연이 있다. 19세기의 지나치게 오만한 유럽인이여, 그대들은 미쳤다! 그대들의 지식이란 자연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대들 자신이 자연을 죽여버렸다(KSA 1. 313)." 니체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잘못을 저질러 왔듯이, 인간은 인간을 대할때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인간화가 바로 그것이다(KSA 10, 376: KSA 12, 17). 니체에게서 "자연적인 것. - 악은 항상 자신에 대해 항상 커다란 효과를 지닌다. 그리고 자연은 악한 것인가! - 우리는 또한 자연적인 것을 본다. 게다가 우리는 비밀리에 너무나 자주 위대한 인간들이 생각해낸 인류의 위대한 성공자들을 추론한다(KSA 3, 510)." 니체에게서 “자연에 관한 학문은 인간의 가장 일반적인 능력과 관련한 인식이다. 우리는 자연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우리 자신을 그 안에 넣고 인간화된 자연을 인식하였다(KSA 11, 115)33)
." 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과 자연지배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에 대한 전체적인 입장을 세우고 자연에 대해 폭행이 자행되고 있는 것은 기계의 도움으로 인해서 그리고 주저없는 기술공학의 발견에 힘입어 행해지고 있는 오만이다(KSA 5, 357)."
우리는 니체에게서 자연의 개념을 1881년의 주목할 만한 여러 단편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순수한 자연의 개념을 획득한 이후에 자연의 탈인간화와 인간의 자연화(Vernat?rlichung)는 나의 과업(KSA 9, 525)"이며, "우리는 자연의 인간화를 해석한다(KSA 12, 209)." 우리는 "인간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침해(Bem?chtigung)하였고, 이 세계를 인간화하는 것, 즉 우리를 점점 더 주인으로서 행세하려는 것이다(KSA 9, 92)." 우리가 "학문적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을 정복하려는 의지로 봉사하는 것이다(KSA 11, 209)." 그러나 "인간의 의지와 목적은 전체적(Ganze) 관점의 의도를 갖고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KSA 11, 194)." 니체가 인식했던 것처럼,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려고 하지만, 자연을 억압하여 그 자체를 소외화시켰고, 자연의 탈인간화로 나타난다. 무엇보다 니체의 이러한 적용은, 근대 자연과학에서 요구한 이론적 직관을 통해 자유롭고 선입견없는 삶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와 유사한 적용으로 그 당시 끄적 거린 메모 속에서 자연의 개념을 또한 찾을 수 있다: "새로운 방식의 계획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 가장 최근의 증후군의 첫 번째 명제에 관한 양식의 제 1권은, 인간의 탈자연화로(KSA 9, 519)" 나타난다.
"신을 믿으려는 근대과학의 측면은 유기체로서 모든 것을 믿으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아주 싫다. 우리가 지상의 껍데기에서 지각하는 것, 즉 서구의 일반적으로 영원한 것을 만들려는 것은 아주 좀처럼 드물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연역하거나 유기체적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항상 자연의 탈인간화인가!(KSA 9, 522)."
인간의 자연화에 대해 절대적으로 그리고 갑작스럽게 방해물이 존재하고 있다(KSA 9. 529). 인간과 철학은 태초에 자연 안에서 인간을 생각해 냈다. 우리는 자연을 탈인간화하는 것인가!(KSA 9, 532). 니체에게서 자연의 개념은 비로소 신의 대립개념으로 발견된 이후에 자연적이라는 낱말은 배척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자연과학적 사유의 독단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KSA 6, 181). 니체가 자연의 탈인간화와 관련하여 인간의 자연화나 순수한 자연의 개념을 전향하여 생각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가 이러한 단편들에서 그 개념들을 가능하게 연관시켜 이해하려고 시도하였 때, 니체의 사유과정이 점차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미 초기의 단편들에서 니체는 그 관련성을 제시하고 있다: 자연은 우리와 개인을 속이지 않고, 우리의 기만을 통해서 그들의 목적을 촉진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개인은 개인적인 것에 따르는 모든 현존재를 놓아둔다. 즉 잘못된 처방을 적소에 놓는 것, 따라서 우리는 올바르기를 원하고 계속해서 자연은 거짓으로서 나타난다(KSA 9, 442) 이러한 니체의 자연에 대한 여러 생각들은 서양전통의 영역과 서양적 사유의 한계 내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인간과 자연ㆍ자연과학적 사유의 전환점을 새롭게 제시해 주었다.
Ⅳ.노자의 생태학적 자연관: 무위자연
일반적으로 우리가 노자철학에 주의 깊게 관심을 가질 때, 그의 무위자연관과 유기체적 생태 및 환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언급한다. 현재 21세기 들어 문명의 위기를 몰아넣는 생태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노자의 반문명적 사유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다시 말해서 현대의 관점에서 생태문제의 해결은 문명적이고 인문적인 방식으로 추구해야 하지만, 노자나 초기 도가사상은 반인문주의적, 반문명적 은자들로 규정하여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에게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회귀해야 할 '품'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순종해야 할 '모델'로서의 자연"이라 할 수 있다34)
. 특히 우리는 노자의 무위자연 사상을 정치ㆍ경제ㆍ문학ㆍ예술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게 조망해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그의 "자연관은 환경윤리의 기초를 마련하는 패러다임으로 적용될 수 있다35)
." 우리가 노자를 생태학적 자연관과 관련하여 설명할 때, 그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 그의 자연사상이 환경을 의식하여 자연사상을 크게 염두해 두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위자연사상이 현대의 생태학적 사유를 전개하는데 있어서 친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농업이 기본사업이었던 동양사회에서 인간과 자연36)
의 관계는 서로 친화적이었다는 데서 생태학적 사유의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농업의 번성은 변화하는 자연운행과의 순조로운 화합이 전체의 인간사회가 이루어야 할 과제였다37)
." 노자의 사상은 농부들의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하였기에 원시사회의 단순성을 이상화하고 인간의 문명을 비난하였지만, 농부는 언제나 자연과 접촉하고 있기에 그들은 자연을 찬미하고 사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중국인은 역사상 주로 농민이었지, 목축이나 바닷가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농부는 자기가 심은 작물을 위해 최선을 다한 뒤에는 그것이 자라는 대로 기다리는 데 있다38)
.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농부는 자연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여 자기가 맡은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이다. 농부의 관점은 중국철학상 "되돌아가는 것은 道의 움직임이다39)
"라고 한 것과 같이 철학의 내용과 방법을 한정시켰다. 사물의 변화를 다스리는 법칙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어떤 일이건 "그 일이 극단에 이르면 반드시 되돌아 온다." 즉 物極必反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노자가 한 말은 아니지만, 중국인들은 노자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자는 자연의 법칙의 근본원리를 앞에서 언급한 "되돌아 오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며, 커지면 가고 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되돌아 온다40)
."고 말했다. 이 사상은 어떤 사물이든지 극단에 다다르면 반대로 언제나 되돌아 온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곧 자연의 법칙이다41)
. 이 말은 자연계의 모든 발전이 인간상황에 있어서는 물론 물질계의 발전까지 포함해서 오고 감과 확장과 수축의 순환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상계를 초월하여 우주의 본체에 도달하고 아을러 우주의 영원한 본체(소위 常道ㆍ常名)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선진 각 학파와 다른 점이다42)
. 노자에게서 인간적 행복은 인간의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직관적 지혜를 믿을 때 얻어지는 것이다43)
. 따라서 변화하는 사물들 속에도 항상 변화지 않는 법칙, 즉 反者道之動을 아는 성인은 무위자연의 삶을 추구한다44)
.
노자의 사상은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으로 본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자는 인간을 자연의 흐름에 순응토록 함으로써 환경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상적 모형을 제시하여 생태 중심적 환경윤리가 필요로 하는 현대 물리학 및 생태학의 형이상학적 해석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한다45)
.
조셉 니이담(Joseph Needham, 1900-1995)은 그의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속에서 노자의 경험적 태도 때문에 노자의 사상이 중국의 과학기술의 기반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니이담에 의하면, 초기의 도가 철인들은 두 개의 기원을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황야나 산림이나 산 속에서 은거하여 거기서 자연의 질서46)
"에 관하여 명상하고 그것의 무수한 현시(manifestation)를 관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중국 초기문화에서 마주치는 고대의 샤먼과 마술가들의 신체들47)
을 보는것이다. 여기서 道의 궁극적인 존재는 모든 일상적인 대상 중의 하나이며, 어떤 직접적인 목적을 갖는 활동성이나 도의 일부분에 관해서도 힘들이지 않는 현시성이다48)
. 또한 중국의 학자들은 자연의 비밀을 풀려고 노력해 왔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물의 기본원소들을 탐구해 왔으며, 그 결과 물ㆍ불ㆍ나무ㆍ쇠ㆍ흙 등의 다섯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 근본원소들은 중국철학자들의 자연과학적인 철학체계의 토대로서 기여했다는 것이다49)
. 니이담은 이러한 요소를 장자의 「회남자」구절에서 무위의 자연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무위는 아무일도 하지 않으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이 자연스럽게 하는 바대로 허용해 주라. 그러면 그 본성은 충족될 것이다50)
."
위 인용문에 보듯이, 노장사상은 인간을 비롯한 만물의 본성이 생성될 때부터 전체로서의 자연과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이른바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이다. 이때 무위는 말 그대로 '행위하지 않음'이 아니라, 자발성에 기초한 '자연스로운 행위'이다. 道는 무위할 뿐 아니라 자연인 것이다. 이때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을 뜻한다. 道는 사물들 처럼 다른 어떤 존재자에 의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道는 무위자연 하지만 그것에 의하여 일체의 사물ㆍ사건들이 생성ㆍ소멸한다. 그래서 노자는 "道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어떤 일도 그에 의해 안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51)
"고 하였다. 그리고 道는 무위할 뿐 아니라 자연스럽다고 말한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무위와 자연은 표리 관계에 있다52)
. 道는 다른 것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며 어떤 감정이나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심(無心)하게 움직인다. 이를 노자는 무위자연이라 부른다. 道는 무위자연 하지만, 일체의 사물ㆍ사건들은 그에 의하여 생성ㆍ소멸한다. 사물들을 그 자체로 보려면 道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道는 사물들의 근원적ㆍ전체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을 道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들을 단편적으로가 아니라 여러 측면 또는 전면적으로 보고 집착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53)
. 그렇다면 道란 어떻게 분화되고, 천상으로서의 일자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노자에게서 道로부터 만물이 생겨나는 과정은 하나(一)로부터 여럿(多)으로 분화하는 과정이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54)
." 즉 道란 개방성의 발현, 그 기원적 사건에 대한 이름이다.
만일 사람이 자연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야 하며, 또한 니이담이 말한 것처럼 '사물의 본성'에 그슬리지 않는다면, 사람은 도와 조화를 이루게 될 수 있기에, 그의 행동은 성공적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당혹스럽게 보이는 "무위로 모든 것이 성취될 수 있다55)
"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관점 및 태도의 전환은 노장사상의 인위와 자연간을 구분하는데 근거한다. 이런 점에서 도가는 자연 天과 인간 인위(人爲)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자연적인 천은 인간행복의 원천이요, 인위적인 것은 인간고통의 근원인 것이다56)
.
노자는 자연으로도 볼 수 있는 "도를 언어로 표현하면 이미 본래의 도가 아니다. 이름을 언어로 표현하면 이미 본래의 이름이 아니다. 무란 만물의 시초이고 유란 만물의 모태이다. 그러므로 항상 무에서 오묘한 본래의 도를 관찰해야 하고 유에서 광대무변한 도의 운영을 살펴야 한다57)
." 노자 『도덕경』 37장에는 "도는 늘 하는 것이 없다(無爲). 그러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無不爲)58)
"라고 하였다. 여기서 무불위(無不爲)는 저절로 두면 저절로 한다는 의미에서 자위(自爲)와 통한다. 그러므로 무위(無爲)는 곧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의미에서 자연이고, 자위는 곧 저절로 말미암는다는 의미에서 자유이다. 그래서 노자는 무위자연을 중시한다59)
. 여기서 위(爲)는 자연적 흐름에 역행하는 인위적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의 행위는 "인위적인 것으로 자연을 파멸시키고 일부러 생명을 파괴시키게 되지만, 道는 늘 자연스로운 행위여서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다60)
." 道는 무위할뿐 아니라 자연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함'을 뜻한다. 도는 사물들처럼 다른 존재자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 도는 무위 자연하지만 그것에 의하여 일체의 사물ㆍ사건들이 생성 소멸한다61)
. 따라서 노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어떤 일도 그에 의해 안되는 것이 없으므로 무불위 하다. 또한 커다란 도는 포용력이 있다. 극단성은 도달하지 않는 곳이 없다. 만물은 그 때문에 생겨난다62)
.
노자는 『도덕경』 25장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63)
." 위의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도는 하늘과 땅과 삶이 모두 본받아야 할 표준이다. 본받는다는 것은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는 뜻이다64)
." 특히 이 문장의 마지막 구절,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는 해석상의 논란거리65)
가 되어 왔다. 문제는 도와 자연의 관계이다. 많은 주석가들은 노자에게서 도가 자연을 동일한 것이거나 자연보다 상위의 개념이라고 풀이했다66)
. 그렇지만 도법자연은 道가 자연을 그 본성으로 한다는 뜻이다. 즉 자연을 표준으로 하여 스승을 삼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자연에 따라 생각하고, 자연에 따라서 말하고, 자연에 따라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연은 무위, 무대(無待), 무집(無執)을 가지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 일종의 자유이면서 자재의 경지가 된다. 따라서 자연과 자유는 노자에게서는 같은 의미이다67)
. 반면 왕필은 노자의 자연에 대하여 "자연은 일컬음이 없는 말이며 궁극의 말이다"라는 주석을 붙였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노자의 문장에 충실하였다. 따라서 자연을 道보다 상위에 두는 것이었다. "노자에 나타나는 자연은 우선 스스로 그와 같다"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도에 내재하는 필연의 힘'이며 도 작용의 자기 전개이다.... 그래서 결국 도에 내재하는 理를 자연이라 했다68)
. 이것은 道가 어떤 외재적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道가 어떤 내재적 필연성에 의한 자기 전개 운동이라는 사실이다69)
.
노자의 자연은 우리가 말하는 자연세계의 자연이 아니며, 또한 서양에서 말하는 자연주의도 아니다(Naturalism). 자연주의는 유물론과 서로 가깝고 이것은 일종의 유물주의이며 자연과학이 대상으로 삼은 자연세계를 가리킨다. 자연과학이 연구하는 것은 모두 물리현상이고 그것이 지시하는 바의 자연은 물리세계의 자연이다. 서양의 종교로 말하면 자연은 피조물이다. 즉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된 유한물로서 모두 자연에 속하고 하느님은 초자연이다. 자연과 초자연은 상반된다. 노자의 자연은 정신생활의 관념이며, 자유자재하고 스스로 그러하며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다70)
. 그러하기에 노자의 자연은 결코 외재적 자연 대상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자연스러움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연성과 자연물은 다르다. 자연성은 영원한 반면, 자연물은 유한하다71)
.
노자는 이 세계, 즉 자연을 대립항들 즉, 有와 無, 高와 下, 音과 聲, 長과 短, 難과 易, 前과 後의 사용 존재근거72)
가 되면서 단지 외부에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원래 내재되어 있는 "反"이라는 운동력을 매개73)
로 교직(交織)되어 존재한다고 본다. 자연이 이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원리 내지는 법칙 혹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道"라는 말로 억지로 표현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에게서 만물은 "道"의 근원으로부터 연역적으로 발생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립 항들의 관계형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74)
. 그의 자연에 대한 이해는 "道"라는 범주에 함축되어 있다. "道"에 아무런 본질적 내용이 담겨있지 않은 것은 이 "자연"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노자가 보는 자연은 그 원리상 모든만물이 그 반대편을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한다75)
.
만물은 자연의 흐름에 일치할 수 있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자발적인 요인에 따라 운동을 한다면, 서로 다른 요인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항상적이고 광대무변한 노자의 道의 무위자연은 생명창조의 궁극적인 우주론적 원리이며 생물의 다양성과 희소성을 존중하는 생태학적 원리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Ⅴ.맺는말: 인간과 자연의 조화
우리는 이제까지 니체와 노자의 생태학적 자연관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가 이들의 생태학적 자연관을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러한 생태학적 자연개념의 범위와 깊이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는 그들의 자연과학적 태도에서 자연에 순응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니체와 노자의 자연개념은 역사적 전개과정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서구적인 자연개념은 라틴어의 자연(natura)을 경유하여 그리스의 영혼(physis)에서부터 오늘날 자연과학적 의미의 자연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역사적 의미의 변화를 거쳐왔기에 그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란 쉽지만은 않다. 우리 시대에서 자연과학적 사유방식은 분명하게 객관화된 자연의 개념이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위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니체의 자연파악은 매우 비판적으로 시도하였고, 가능한 방법으로는 기원적인 의미에서 "되돌아가는 것(zur?ckzugewinnen)76)
"이었다. 노자는 道의 자연을 행위의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던 까닭에 법자연 또는 순(順)자연을 말하였다. 즉 법자연은 자연에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의도ㆍ목적ㆍ요구ㆍ선입관 등의 일체를 버리는 것이다. 요구가 있다는 것은 아직도 실현해야 할 것이 있다는 의미이다77)
.
풍우란(馮友蘭)에 의하면, 노자사상은 신비사상의 체계이면서 본질적으로 과학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과학의 발달은 지구의 거리를 단축시켜 놓았고,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사해(四海)에서 고립될 수 없었기에 산업화를 추진해야만 했다. 비록 서구보다 뒤지긴 했어도, 동양이 서양에게 침략 당했다기 보다는 중세가 근대에게 침략 당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는 것이다78)
. 그러나 이것은 노자사상에 한정되어 있는것만은 아니다 고대과학에서 합리적인 것과 신비적인 것이 공존하고 둘이 서로 자극하면서 발전하는 예는 적지 않았다. 즉 노자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신비적인 과학과의 연결은 도교가 성립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79)
.
또한 방동미(方東美, Thom?. Fang, 1899∼1977)는 중국철학의 일반적 특성을 포섭적 화해라고 규정한다. 중국인의 사상은 "자연ㆍ인간ㆍ인간의 문화적 성취"라는 세 가지 주제가 중심이 되어 왔다는 것이다. 동양은 서양인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자연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있어서 보편적 생명의 흐름이 자신을 드러내고 자연의 본래적 가치가 만물에 가득차 있는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세계이다. 자연은 자기 위에 또는 밖에 있는 어떤 것에도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무한하다. 그것을 초자연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자연 그 자체는 무궁무진한 생기이며, 삶의 의지로 충만해 있으나 결코 신의 능력에 손상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기한 창조가 계속해서 자연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생명은 전체적으로 우주생명과 관통되어 있는 까닭에 자연과 인간본성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80)
"
중국인들은 서양인들이 이해한 것과는 다르게 자연을 이해하였다. 중국인들에게 자연이란 생명의 편재적 흐름이 그 자체를 드러내고 만물을 그 내재적 가치로서 실현시키는 무한한 영역이다. 자연이란 초자연이라 부르는 것의 밖에 있거나 위에는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무한한 것이다. 방동미는 16∼17세기에 자연의 이분화와 인간의 자연에 대한 예속화이론이 선언되었을 때, 케플러(Kepler), 데카르트(Descartes), 갈릴레오(Galileo), 뉴튼(Newton) 등과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이 그들의 타이탄적(Titanic)인 지식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유럽문명의 무대에 등장하였다는 것이다. 그 다음 세기에 자연의 정복에 있어서 놀랄만한 과학기술의 섭취는 인간의 완전한 자연정복을 입증하였다는 것이다81)
. 중국문화의 탁월성은 인간사회 뿐만 아니라 자연계에서도 조화를 중시하는데 있다. 오직 이러한 방법을 통해야 비로소 참된 내면적 정신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인간사회에서의 조화는 서양인들이 성취하기 어려우나 중국인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문화적 우수성의 극치이다82)
.
중국의 사상, 특히 노자의 사상은 도와의 합일을 이루게 되어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생을 누리며, 그가 하는 모든 일마다 뜻대로 달성하는 것이다. 도의 길에 순응하고 천지의 자연순리를 따르는 자는 전세계를 쉽게 다루는 법을 알게 된다83)
. 니체는 서양과 아시아의 사유에서 동서의 화해를 다음과 같이 이끌어 낸다.
"나는 러시아와 아시아의 사람들에게서 평온한 요소가 균형을 이루기를 바란다. 이러한 것은 어디 곳에서나 다시 한번 충분하게 인간의 특성을 수정한다. 나는 장래의 사상가에게서 수 백년 동안 지나온 유럽과 미국의 끈기가 아시아적 평온함이 상속되어 결합되기를 상상해 본다. 이러한 결합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이다( IV-2, 17 [53] , 402)."
위 인용문에서 니체는 아시아적인 평온함과 유럽의 끈기를 결합하여 화해하는 것이 이 세계를 극복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앞장에서 언급하였듯이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일치를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하는 것으로 보았고 노자는 자연 속에 순응하여 자연의 삶에 따르는 것이라 보았다. 즉 노자는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는 자연스러움을 따른다는 태도를 취한다84)
. 여기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화해는 다음과 같은 조화를 이루며 나타난다.
"개별자의 원리는 두 개의 상태에서 허물어뜨리고, 주체를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그리고 일반적이고 자연적으로 돌출한 힘 앞에 완전히 사라진다. 디오니소스적 축제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을 화해시키는 것이다(KSA 1, 554)."
니체가 디오니소스적 축제에서 자연을 노래하고 가무를 즐기는 것을 찬양하고 있듯이, 노자도 자연을 노래하고 찬미한다. 즉 노자는 20장에 "모든 사람들은 희희 낙낙하여 큰 소를 잡아 풍성한 잔치를 벌리는 것 같고 화사한 봄날에 누각에 올라 경치를 감상하듯 기뻐한다85)
." 우리는 여기서 니체나 노자는 자연에 근거를 두고 인간의 오만 불손함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기에 반문명, 반인간을 말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니체와 노자의 생태학적 사유의 출발점을 찾는다면, 역사적 맥락은 다를지라도 인간의 오염될 문명화를 염려하면서 인간의 이기(利器)문명을 비판하고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자연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조화의 원리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그들의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현대에도 여전히 겸허하게 받아들여 경청하고 계승해야할 이론이라 생각된다.
각 주
1) 노자의 출생 년도는 정확히 문헌상으로 제시한 바가 없다. 또한 그 견해도 노자가 실존인물인지 혹은 가상인물인지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의견이 상이하기에 정확히 알 수도 없다. 단지 춘추 전국시대의 공자가 활동한 전후시기로 추측할 뿐이다. 노자라는 책의 저작시기와 노자의 인물에 대해 자세한 견해를 서술한 저서는 다음을 참조: 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 통나무 1989, 125―164쪽:김충열, 『김충열교수의 노장철학강의』 , 예문서원, 1995, 23―36쪽: 이강수, 『노자와 장자』 , 길 1999, 17―20쪽.
2) 니체와 아시아적 사유를 비교한 논문을 다음을 참조: Rycgi Okoch, Nietesches Naturbegriff aus ?stlicher Sicht, in: Nietzsche―Studien, Bd. 17. 1988, 108―124쪽; ders., Wie man wire, was man ist, Darmstadt 1995, 45―64쪽: Johann Figal, Nietzsche's Early Encounters with Asian Thought, in: Graham Parkes(ed.), Nietzsche and Asian Thought,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51―63쪽.
3) Friedrich Nietzsche, S?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anden, M?nchen 1980 (이하 KSA로 생략하여 표기함).
4) Adorno/ Horkheimer, Dialektik der Aufkl?rung, Frankfurt a. M. 1988, 38쪽(이하 DA로 표기함). M.호르크하이머/Th. W. 아도르노, 김유동외역, 『계몽의 변증법』, 문예출판사 1996.
5) 아도르노의 자연의 개념에 관찬 자세한 고찰은 다음을 참조: Thomas Link, Zum Begriff der Natur in der Gesellschaftstheorie Theorie W. Adornos, K?ln 1986.
6) 계몽에서 지배의 원리는 두 측면, 외적ㆍ내적 자연의 지배와 사회적 지배의 두 측면에서 고찰된다. 계몽적 지배는 특히 사회적으로 조직된 체계와 관련되어 있고, 그 체계 아래서 외적 자연은 더욱 효과적으로 지배되었고 내적 자연은 세분화된 노동분업을 통하여 더욱 일방적으로 강력히 억압되었다. "인류의 숙련과 인식이 노동분업과 함께 분화됨으로써 인류는 인류학적으로 더 원시적인 단계에로 되돌려 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기술적으로 생활이 편리해짐에 따라 지배의 지속은 보다 강력한 억압에 의해 본능을 고정시키기 때문이다(DA, 52)."
7) G?nter Figal, Der Sinn der Verstehens, Stuttgart 1996, 98쪽.
8) 하버마스, 이진우역,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문예출판사 1994, 145쪽.
9) 하버마스, 같은 책, 141쪽.
10) 계몽의 계몽은 계몽의 부정성을 인식함으로써 계몽의 신화를 깨는 계몽이다.
11) 장은주, 「계보학적 사회비판을 넘어서」,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 한길사 2000, 463쪽. Vgl. 하버마스, 같은 책, 149쪽.
12) 세계의 탈마법화른 애미니즘을 뿌리뽑는 것이다(DA, 10).
13) Friedrich Kaulbach, Interpretation der Natur, in: Nietzsche―Studien. Bd. 10/11, 1981/1982, 443쪽.
14) Friedrich Nietzsche, Kritische Gesamtausgabe Werke, hg. von Colli und M. Montinari, Berlin 1967 (이하 전집 권수와 쪽수만 표기함).
15) Vgl. Norbert Rath, Zur Nietzche―Rezeption Horkheimers und Adornos, in: Williem van Reijen(Hg.), Vierzig Jahre Flaschenpost: Dialektik der Aufkl?rung 1947 bis 1987, Frankfurt a. M, 1987, 83쪽.
16)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자세한 고찰은 다음을 참조: 양해림, 「과학기술 시대의 오디세우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와 오디세우스의 변증법』, 철학과 현실사 2000, 215―242쪽.
17) 물론『계몽의 변증법』의 선구적 역할은 니체와 세드(Sade)에게서 뿐만 아니라 칸트의 엄밀한 계몽의 수행에서 추정할 수 있다(DA, 10).
18) Peter P?tz, Nietzsche im Lichte der kritischen Theorie, in: Nietzsche―Studien, Bd. 3. 1974. 183쪽
19) 니체는 루소에게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자연의 신화론" 에서라고 말한다(KSA 8, 405). 니체와 루소의 자연관에 관해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Palph―Rainer Wuthenow, Die große Inversion: Jean―Jacques Rousseau in Denken Nietzsches, in: Neue Hefte f?r Philosophie. 29(1989), 60―79쪽.
20) Heinz R?ttges, Nietzsche unto die Dialektik der Aufkl?rung, Walter de Gruyter Berlin 1972, 39쪽.
21) Heinz, R?ttges, 같은 책, 31쪽.
22) Vgl. Barbara Nauman, Nietzsches Sprache "aus der Natur", in: Nietzsche―Studien, Bd. 14, 1985, 130쪽.
23)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예술관의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 양해림,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예술관(Ⅰ), (Ⅱ)―비극의 탄생을 중심으로」, 「디오니소스와 오디세우스의 변증법」, 철학과 현실사 2000, 42―90쪽.
24) 하버마스, 같은 책, 115쪽.
25) 앞의 책, 121쪽.
26) Peter P?tz, Nietzsche im Lichte der kritischen Theorie, in: Nietzsche―Studien, Bd. 3. 1974, 186쪽.
27) 김정현, 「니체와 계몽의 변증법」, 『니체 이해의 새로운 지평』, 철학과 현실사 2000, 253쪽.
28) Alwin Mittasch, Friedrich Nietzsche als Naturphilosophie, Stuttgart 1952, 205쪽.
29) Friedrich Kaulbach, Nietzsches Interpretation der Natur, in: Nietzsche―Studien. Bd. 10/11, 444―447쪽.
30) Vgl. Nietzsche, Genealogie der Moral, Ⅶ, 433쪽.
31) Vgl. Friedrich Nietzche, Genealogie der Moral, Ⅶ, 326쪽.
32) Vgl. Friedrich Nietzsche, Ⅲ, 541쪽.
33) Vgl. 김정현, 「니체의 생명사상」, 『생명과 더불어 철학하기』, 철학과 현실사 2000, 54쪽.
34) 최진석, 「도가의 자연관과 생태문제, ―노자를 중심으로―」, 『제34차 한국동양철학회 정기학술회의 발표논문(2000. 2. 10)』
35) 한면희, 『환경윤리』, 철학과 현실사 1997, 232쪽.
36) 노자의 『도덕경』 본문에서 자연이라는 개념은 5번(도덕경 17장: 悠兮其貴言, 成功事遂, 百姓皆爲我自然 : 23장, 希言自然 : 25장, 道法自然 : 51장,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 64장,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밖에 언급되고 있지 않음에 비해 왕필의 노자주에서는 36번이나 언급되어 있다. 36번의 언급가운데 28번은 단독으로 사용되고 있고, 8번은 自然之氣니 自然之道 혹은 萬物之自然처럴 之字를 매개로 하여 앞뒤로 다른 말과 연결되어 있다. 도덕경이나 왕필의 노자주의 나오는 자연을 우리말로 직역할 경우 '저절로 그렇게 됨'인데, 의역한다면 '자연스러움'에 가깝다(김학목, 「王弼의 老子注에서 자연과 명교에 대한 고찰), 『도가철학』, 제2집, 한국도가철학회 2000, 262―263쪽). 여기서 자연의 개념은 무목적, 무의식적으로 일체사물을 생성할 수 있는 도의 기능을 형용한 것이기에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인 것이다(이강수, 「노자의 무위자연사상」,『도가사상의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4, 182쪽).
37) 송영배, 「유기체적 자연관과 동서철학 융합의 가능성」, 『인간과 자연』, 철학과 현실사 1998, 21쪽.
38) 조셉니덤, 「동서의 과학과 사회」, 박성래 편저, 『중국과학의 사상』, 전파과학사 1979, 85쪽.
39) 『도덕경』 40章: 反者道之動. 풍우란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A complete is what the movement of the Tao" (Fung Yu―Lan, Trans. by R. Huges, The Sprit of Chinese Philosophy, Boston 1967, 63쪽).
40) 『도덕경』 25章: 大日逝, 逝日猿, 遠日反.
41) 풍우란, 앞의 책, 131쪽.
42) 방동미, 남상호역, 『원시유가 도가철학』, 서광사 1999, 269쪽.
43) 카푸라, 이성범외역,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사1985, 122쪽.
44) 이강수, 「노자의 무위자연사상」, 『도가사상의 연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4, 189쪽.
45) 한면희, 「자연 환경에 대한 도덕적 고려」, 『철학』46집(1996년 봄호), 304쪽.
46) 자연의 질서를 따르는 자는 도의 물결을 타고 흐른다(J.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Ⅱ, 88쪽). 이러한 행동방식을 도가에서 무위라고 부르며, 이 용어는 비행동을 뜻한다. 니이담은 이것을 자연질서에 어긋나는 행동을 삼가는 것이라 번역하고 있다.
47) J. Needham, 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 Vol, II, Cambridge 1956, 33쪽.
48) Stuart C. Hackett, Oriental Philosophy,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79, 58쪽.
49) J. Needham, 같은 책, 297, Vgl. Song, Du―Yul, Aufkl?rung unto Emancipation: Die Bedeutung der Asiatischen Welt bei Hegel, Marx und Max Weber, Frankfurt a. M. 1972, 13쪽: 양재혁, 『장자와 모택동의 변증법』, 이론과 실천 1989, 44쪽.
50) J. Needham, 앞의 책, 68―69쪽.
51) 『도덕경』 37章: 道常無爲而無不爲.
52) 이강수, 「노장철학의 자연관」,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1996, 86쪽.
53) 이강수, 「도가사상의 새로운 과학」, 『과학사상』, 1992 가을, 163쪽.
54) 『도덕경』 42章: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55) 無爲而無不爲矣. Vgl. F. 카푸라, 이성범외억,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범양사 1985, 139쪽.
56) 풍우란저, 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1994, 39쪽.
57) 『도덕경』1章: 道可道, 非相道, 名可名, 非相名, 無名天之始, 有名萬物之母, 故常無慾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微.
58) 道德經 37章: 道常無爲而無不爲
59) 임수무, 「도와 무위자연」, 『도가철학』, 창간호, 한국도가철학회 1999, 74쪽.
60) 『도덕경』 37章: 道常無爲而無不爲.
61) 이강수, 「도가사상의 새로운 과학」, 『과학사상』1992 가을, 제3호, 156쪽.
62) 『도덕경』 34章: 大道氾兮, 其可左友萬物持之而生而不辭........以其終不自爲大故能成其大
63) 『도덕경』 25章: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64) 이강수, 『노자와 장자』, 길 1999, 77쪽
65)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다음을 참조, 오상무, 「왕필저작의 자연과 명교의 관계에 대한 재고」, 『철학』 제60집, 한국 철학회 1999, 56―57쪽.
66) 大濱皓, 임헌규 옮김, 『노자철학연구』, 청계 1999, 10장 참조.
67) 임수무, 「도와 무위자연」, 77쪽.
68) 大濱皓, 『노자철학연구』, 194쪽
69) 최진석 ㆍ 김상환, 「노장과 해체론」, 『철학연구』 제47집, 철학연구회 1999, 155쪽.
70) 모종삼, 정병석외역, 『중국철학특강』, 형설출판사 1985, 102쪽
71) 정세근,「무의 감응」, 『도가철학』, 제2집, 한국도가철학회 2000, 147쪽.
72) 『도덕경』 2章: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上形, 高下相盈,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73) 『도덕경』 40章: 反者道之動.
74) 최진석, 『도가의 자연과 생태문제』, 3쪽.
75) 최진석, 같은 논문, 4쪽
76) Okochi Ryogi, Nietzsches Naturbegriff, in: derns., Was man wind, was man ist, Darmstadt 1995, 52쪽.
77) 이강수, 「노장철학의 자연관」, 『동양사상과 환경문제』, 모색 1996, 87쪽.
78) 풍우란, 정인재 역, 『중국철학사』, 형설출판사 1994, 46―47쪽.
79) 야부우찌 기요시, 전상운 역, 『중국의 과학문명』, 전파과학사 1983, 77쪽.
80) 방동미, 정인재역, 『중국인의 생철학』, 탐구당 1983, 23쪽.
81) 방동미, 같은 책, 21쪽.
82) 방동미, 같은 책, 36쪽.
83) 카푸라, 같은 책, 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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