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칸트- 거리의 파토스와 사이의 로고스 -
최 소 인
1. 들어가는 말
최후의 근대인이며 최초의 현대인 - 이는 서양 사상사에서 니체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적절한 기술일 수 있다. 니체는 근대의 뿌리로부터 나와 현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사상가이다. 마치 데카르트가 마지막 중세인이며 최초의 근대인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러므로 근대의 사상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그 정신적 모태를 발견하는 것처럼 현대의 사상가들은 니체로부터 그들 사상의 뿌리를 찾아낸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니체 르네상스는 이러한 현대사상의 자기 뿌리 찾기에 힘입고 있다. 바로 이러한 지적 풍토로 인해 우리에게 니체는 언제나 현대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있는 철학자로 부각된다. 니체철학의 현대성에 대한 열렬한 환호 때문에 니체의 사상이 지닌 근대성은 망각되어 무대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니체는 근대인이며 넓은 의미에서 근대적 사상의 프로그램 안에서 탄생하고 호흡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가 지닌 현대성은 바로 그 배면에 자리한 근대성과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특히 칸트와의 관계 속에서 니체철학을 살펴볼 경우, 어떤 점에서 니체가 여전히 근대적이며, 어떤 점에서 그가 근대로부터 벗어나 현대성의 기초를 마련한 사상가인가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근대인으로서 니체는 바로 칸트의 비판철학의 대전제를 수용하고 있는, 칸트의 사유프로그램에서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칸트의 후예에 불과하다. 니체는 칸트의 그 많은 추종자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니체는 철저한 칸트 비판가이며, 칸트를 넘어서서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담아낸 사상가이다. 니체가 내뱉은 칸트 철학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경멸적인 조소들은 바로 칸트가 몸담고 있던 철저한 근대성에 대해 니체가 쏘아 올린 화살들이다. 그 점에서 니체는 너무나 현대적이며, 그의 철학은 근대의 지반을 떠나 현대에로의 문을 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니체와 칸트의 사상을 그들의 고유한 형이상학적 세계구상이라는 큰 틀 하에서 반성적으로 비교하고 조망해 봄으로써, 양 사상가가 지니는 사유의 근접성과 그 사이의 메울 수 없는 거리와 간극이 무엇인지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탐구는 바로 니체가 몸담고 있는 근대성의 지반이 무엇이며 근대성으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할 수 있는, 니체에 의해 기획된 탈근대성으로서의 현대정신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그려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2. 전통 형이상학 비판과 현상주의 - 칸트와 니체 사유의 근접성
니체의 철학은 자신 이전의 모든 철학적 전통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출발한다. 니체가 철저하게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플라톤주의의 모습으로 체현된 전통 형이상학이다. 플라톤적 사유방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전통 형이상학은 실재(존재)와 가상(생성)의 세계를 구분하여 세계를 이중화하고, 존재의 세계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분법적 세계이해의 틀이다. 니체는 생성하는 현상의 세계를 존재의 세계에 비해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비판한다:
“A. 인간은 ‘진리’를 찾는다: 모순되지 않고 거짓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세계인 하나의 참된 세계를 - 그 안에서 사람들이 괴로워하지 않는 세계를: 모순과 기만과 변화 - 괴로움의 원인들! 인간은 존재해야만 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찾고 싶어한다. (....) 지나가고 변화하며 바뀌어 가는 모든 것을 경멸하고 증오한다: - 지속하는 것이 가치있다는 이런 평가는 어디에서 오는가?“1)
플라톤에 따르면, 자연적 세계의 너머에 있는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불변하고 지속하는 그 자체로서의 존재의 세계이다. 바로 이러한 초감각적인 세계, 초자연적인 세계만이 진리의 세계, 참된 존재의 세계이며 이와 대비되는 변화하는 가멸적인 현상의 세계는 참으로 있지 않는 세계, 가상의 원천일 뿐인 세계로서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는다. 불변하는 이데아는 자연적인 세계의 이면에 놓여 있는 자연적 세계의 궁극적 근원이며, 자연적인 현상세계가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를 지닌 궁극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변화하는 현상의 세계(차안의 세계)를 넘어서서 이데아의 세계(피안의 세계)에로 나아가야 하며, 이데아의 세계를 통해서 비로소 현상세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로 대변되는 절대불변의 무제약적인 진리의 세계에 대한 긍정과 그에 반해 생성하는 세계에 대한 “경멸과 증오”의 시각에 대해 니체는 의문을 표한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변화하는 세계 이면에 참된 불변의 세계가 있다고 믿고 그 세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가?
니체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불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믿음과 추구는 바로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본다. 플라톤의 인식론에서부터 출발하는 이성(정신, 혹은 영혼)의 무제약성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성의 순수개념을 통해 실재하는 세계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확신이 불변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존재의 세계에 대한 믿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 형이상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비판은 참된 진리의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인간 이성에 대한 잘못된 믿음에 대한 공격으로 드러난다. 니체는 “이성이야말로 지속적인 것에 이르는 길이다”2)라는 이성에 대한 잘못된 신뢰가 우리에게 불변하는 진리의 세계를 상정하도록 하고, 그 세계에 모든 가치를 부여하도록 유도한다고 보았다:
“철학의 혼동은 우리가 논리학과 이성범주에서 세계를 유용성이라는 목적에 맞게 정돈할 수 있는 (...) 수단을 찾는 대신에 그 속에서 진리 내지는 실재성의 규준을 가진다고 믿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 순진함은 사물의 척도로, ‘실재’와 ‘비실재’의 판단기준으로 삼으려는, 짧게 말해 제약성을 절대화하려는 인간중심적인 병이다. 그리고 보라, 거기서 세계는 한순간에 참된 세계와 ‘가상‘의 세계로 나뉘어진다.”3)
니체에게 있어 세계의 구분은 이성의 잘못된 사용에서 기인한다. 단지 이성의 형식에 불과한 것을 세계 자체의 진리를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이성과 이성의 개념을 통해 무제약적인 참된 세계의 모습이 파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인간 이성의 “순진함”에 불과하며 “인간간중심적인 병”이다. 이성의 사유형식이나 이성의 개념들은 세계 자체를 잴 수 있는 규준이나 척도가 아니라, 우리 이성의 제약된 도구들에 불과하다. 제약된 이성의 범주를 절대화하여, 그것을 통해 절대적인 세계 자체를 정립하고, 불변하는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은 제약된 이성의 능력을 절대화하는 오류일 뿐이다. 그것은 비판적으로 의심하고 검사하지 못하는 소박한 이성의 오류이다. 니체는 바로 이러한 이성의 잘못된 믿음을 파기함으로써, 이분법적 세계해명의 오류를 지적하고자 한다.
바로 이점에서 니체의 전통 형이상학 비판은 바로 이성비판으로 수행된다. 이성의 제약성을 깨닫는 것 - 그것이 참된 세계를 정립하려는 무제약적인 형이상학적 충동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니체의 이성비판은 칸트의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칸트의 비판적인 사유체계는 바로 독단적 형이상학과의 싸움으로부터 얻어낸 성과라 할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전통 형이상학의 오류는 이성의 능력에 대한 과신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이성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사해보지 않은 채, 마치 존재하는 것 자체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처럼 이성을 독단적으로 사용한 결과일 뿐이다. 독단적인 이성사용을 비판함으로써 칸트는 인간 이성이란 실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무력한 것임을 증명한다. 절대적인 것, 그 자체의 것, 무제약적인 것은 우리의 이성이 다가설 수 없는 것이므로, 칸트는 이러한 절대적인 존재의 세계에 대한 이성의 월권을 경고한다. 이성의 범주들은 우리가 자연적인 현상의 세계를 해석하고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범주를 통하여 자연적인 현상세계와 구분되는 세계 자체와 그 세계의 불변하는 진리를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적 세계와 구분되는, 그것을 넘어서 있는 초험적인 것은 인간 이성의 저편에 놓여 있다. 칸트의 이성비판은 현상계를 넘어선. 형이상학적인 절대적인 세계는 이성이 다가설 수 없는 세계,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가상과 오류의 원천일 뿐인 세계이며, 오직 현상의 세계, 우리의 감각에 드러나는 경험의 세계만이 이성의 유일한 대응물임을 확인한다.4)
이와 마찬가지로 니체도 전통 형이상학이 전제하고 있는 이분법적 세계해명과 이성을 절대화하는 사유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는 “영원히 동일하게 유지하는 것의 가치에 맞서서(gegen den Werth des Ewig-Gleichbeibenden)”5) 생성하는 세계, 가상의 세계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니체는 이분법적 사유 자체를 폐기한다:
“우리는 ‘세계 그 자체’를 현상으로서의 세계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어떠한 범주도 갖고 있지 않다.”6)
“(...):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세계와 현상세계를 분리하는 우리의 권리에도 이의가 제기되어야 한다.”7)
니체는 우리 이성은 그 자체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를 분리할 수 있는 어떠한 도구나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 니체는 이성비판을 통해 절대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러한 세계 자체를, 현상하고 생성하는 세계와 분리하여 정립하는 것 역시 부정한다. 즉 존재 그 자체의 세계는 단지 인식불가능한, 불가해한 세계일 뿐 아니라, 아예 그러한 자체적인 세계는 생성의 세계의 배후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존재와 생성, 물 자체와 현상의 구분은 그 자체로 지지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현상하는 생성의 세계 너머는 없기 때문이다:“진리란 없다는 것. 사물의 절대적 성질이란 없다는 것, 물 자체란 없다는 것”.8) 그러므로 있는 것은 오직 생성하는 현상의 세계뿐이다. 니체 철학은 존재의 세계를 지우고 오직 생성만이 유일한 세계로서 인정한 생성의 철학이다:“모든 것은 되어간다. 영원한 사실이란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이 없듯이”.9)
니체가 물 자체와 절대적 진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오직 생성하는 현상세계만을 긍정한 이유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관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라는 것은 게다가 모순된 개념이다. ‘속성 그 자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우리는 ‘존재’나 ‘사물’이라는 개념을 단지 관계개념(Relationsbegriff)으로서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10)
“한 사물의 속성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작용들이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물들’을 빼고 생각한다면, 한 사물은 속성을 갖지 못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물들 없이 존재하는 사물이란 없다. 즉 ‘물 자체’란 없다”11)
“‘물 자체’란 불합리하다. 내가 한 사물에서 모든 관계들, 모든 ‘속성들’, 모든 ‘활동들‘을 빼놓고 생각하면, 사물도 남아있지 않는다: 물성(Dingheit)이란 논리적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 의해 사물에 덧붙여 날조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시나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지 ..... 은 아니다(...)”12)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사물을 오직 관계성을 통해서만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 만일 관계를 떠난다면 어떤 것도 우리에게 이해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다른 것과 관계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를 고립적으로 독립적으로 있는 사물의 자체성이란 우리 이성에게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사물과 존재란 우리 인간에게는 단지 관계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관계개념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생각한 우리 이성의 한계이다. 오직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계, 그것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세계의 전부이며,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사물인식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물 자체란 단지 날조된 이성의 고안물에 불과하다.
우리의 인식을 오직 관계성에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는 칸트철학의 근본노선을 그대로 답습한다. 왜냐하면 칸트 역시 물 자체의 세계, 절대적 존재자의 세계를 가상의 세계라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인식을 오직 관계들과 작용방식에 제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계의 모든 사물을 원인으로서 인지한다. 그러나 원인에서 우리는 단지 결과의 인과성만을 인지하며 따라서 결과만을 인지한다. 따라서 사물 자체와 사물이 결과를 산출하게 되는 사물의 규정은 알지 못한다.”13)
“우리의 인식에서 직관에 속하는 모든 것은 (...) 단순한 관계만을 포함한다. 즉 직관에 있어서의 장소(...), 장소의 변화(...), 이 변화를 규정하는 법칙들의 관계이다., 장소에 무엇이 지금 존재하느냐, 혹은 장소의 변화에는 관계없이 물 자신이 무슨 작용을 하느냐 하는 것은 직관을 통해서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단지 관계에 의해서 물 자체는 인식되지 않는다”14)
칸트가 이성비판을 통해 얻은 적극적 성과는 바로 우리가 생각하고 파악할 수 있는 세계와 사물은 단지 관계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세계와 사물이라는 점이다.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에 의한 이성의 독단적 사용을 비판하면서, 제약된 우리의 이성에게 가능한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라 단지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에 대한 인식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성의 주관적인 형식에 의거한 관계의 틀에 의해서만 세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러한 관계방식을 통해서만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 자체의 내적인 본성(본성 자체)을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자체적인 것이라 이해되는 모든 것 - 실체적인 것, 영혼, 정신, 절대주체, 절대적이고 내적인 원인 등15) - 은 우리의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 이처럼 단지 관계규정들을 통해서만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이성의 본래적 능력이며, 우리 이성이 지닌 범주들은 오직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칸트의 이성비판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니체와 칸트가 제약된 이성을 통해 그리고 있는 세계는 관계들, 작용들, 행위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며, 이 세계는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현상하는 세계일 뿐이다. 현상하는 세계, 우리에게 드러나는 세계는 우리의 제약된 이성능력에 의해 드러난 세계이다. 따라서 현상하는 세계는 다름 아닌 우리 인간에 대한 세계16)이며, 우리 인간에게 관계하는 세계일 뿐이다.17) 칸트에 따르면 우리에게 드러난 세계, 오직 우리 인간에 대해서만 있는 세계인 현상하는 세계는 우리 이성이 자신의 고유한 범주들과 형식들을 가지고 구성한 세계이며, 그런 한에서 오직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왜냐하면 우리 이성의 고유한 범주와 형식들은 바로 관계들을 규정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오직 현상세계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니체가 말한 관계들을 통해 이해된 세계란 사태 자체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관계하는 세계, 제약된 인간에 의해 해석되고 평가된 세계일 뿐이다:
“현상에 머물러서 ‘단지 사실들만이 있다’라고 하는 실증주의자에 대항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아니, 사실들은 있지 않고 오직 해석들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우리는 사실 자체를 확정할 수 없다. 아마도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18)
“모든 생성하는 것들의 해석적 성격. 사건 자체라는 것은 없다. 발생하는 것은 해석자에 의해 해석되고 결집된 현상들의 집합일 뿐이다.”19)
니체에게 현상의 세계는 사태 자체의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자체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제약된 이성에 의해 해석된 세계로서 관계들만을 담지하는 세계이다. 이처럼 인간에 의해 해석된 세계가 생성하는 현상의 세계이다. 오직 해석된 관계들로 이루어진 현상의 세계만이 있으며 절대적 진리, 그 자체의 것은 없다. 이처럼 니체와 칸트 모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사태 그 자체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이성에 드러난 세계이며 우리와 관계하는 세계로서, 우리에 의해 해석되고 구성된 관계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처럼 그 자체의 세계를 지우고, 우리에 대해서 있는 세계, 우리와 관계하는 세계로서 현상세계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니체와 칸트는 현상주의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 서 있다.
사실 인간 이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인 현상에 대한 이해방식은 칸트가 보여준 근대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무제약적 세계로부터, 즉 신적 정신에 의해서나 그려질 법한 그 자체의 세계로부터 세계를 인간에 대한 세계에로 좁히고, 인간이 부여한 관계들의 총체 속에서 세계를 보려는 칸트의 정신은 근대적 이성의 핵심을 이룬다. 현상의 세계는 인간이 구성한 세계, 인간이 해석한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 이외의 세계는 우리 인간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성한 세계의 피안에 놓여있는, 그 이면의 무제약적인 세계에 의해 인간은 더 이상 고통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제약적인 세계에 대한 인간의 무력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 대하여 있는 세계, 현상세계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존재 자체의 세계를 파기하고 오히려 참된 인식의 대응물로서 현상의 세계 인정한 후, 우리 인간은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힘을 당당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바로 니체에게로 이어진다. 니체에게도 오직 있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관계하는 세계인 생성하는 세계, 현상세계뿐이다. 현상세계는 결코 사태 자체가 아니며, 사태 자체를 허용하지도 않는다. 오직 있는 것은 인간이 부여한 해석을 통해 드러난 세계이며, 자체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들과 작용들을 통해서 이해되는 세계, 인간이 해석하고 평가하한 세계이다. 이처럼 관계들로 이루어진 현상세계의 제약성은 바로 그 자체로 존립하는 절대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이성의 제약성을 반영한다. 이처럼 인간 이성의 제약성과, 인간에게 마련된 세계의 제약성을 긍정하고 오직 해석자, 평가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세계만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니체는 칸트와 만나고 있다.
3. 몸주체와 이성주체 - 니체와 칸트 사유의 간극과 거리
니체는 칸트의 현상주의라는 넓은 울타리 안에 같이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현상의 세계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칸트가 그린 현상의 세계는 이성에 고유한 범주들을 가지고 인간이 구성한 세계이다. 이성의 범주적 형식이란 세계를 규정하는 근본틀이며 동시에 세계 자체의 형식적 구조 자체이다. 선천적인 이성의 형식적 범주란 우리에 대하여 있는 세계인 현상세계를 현상일 수 있게 만드는 필연적 조건들이다. 이러한 이성의 범주적 형식이 없다면 현상세계는 성립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성의 범주적 형식들은 현상세계의 존립가능성 및 인식가능성의 근본조건이며 필연적인 조건들이다.20) 그리고 이러한 이성의 범주에 의해 구성된 현상의 세계는 보편타당한 질서(관계틀)를 가진 세계이다. 칸트에게 있어 현상을 구성하는 인간의 이성은 보편적인 이성이며, 이 보편적인 이성은 현상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객관적인 힘을 지닌 이성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칸트가 개별적인 인간을 떠난 보편이성 - 즉 스토아 학파의 세계이성과 같은 보편이성 - 을 부인한다 하더라도, 나라는 개체 안의 이성, 사유하는 나의 이성은 여전히 보편적이며 객관적인 힘을 가진다. 우리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이성의 힘과 보편적인 이성의 활동은 현상의 세계에 대한 구성력을 가지며, 이를 통해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질서를 지닌 현상의 세계가 정립된다. 칸트에게 있어 이성의 능력은 - 전통 형이상학과 비교하자면 - 그 힘이 약화되지만(즉 자체적인 것, 무제약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력하지만), 현상의 세계 내에서는 여전히 하나의 제약된 절대성을 형성하는 조건이다. 즉 이성의 도구들인 선천적인 범주적 형식들은 현상세계의,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불변의 척도이며 규준이 된다. 이성의 범주는 현상의 세계 내로 축소된 진리의 규준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세계는 여전히 불변하는 보편적 질서(관계방식 혹은 작동방식)를 가진 세계이며. 이처럼 고정된 질서의 틀을 통해 파악되는 세계이다. 이 점에 있어 칸트의 현상주의는 현상의 세계에로 축소된 사유와 이성의 기능(개념적 사유방식)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포함한다.
그러나 니체는 칸트의 현상주의의 배면에 놓여 있는 이러한 이성관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현상하는 생성의 세계의 주인은, 해석하는 주체는 더 이상 칸트가 말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이성이 아니다. 니체는 소위 근대적인 의미에서 사유하는 주체(정신)를 거부하며, 이와 함께 모든 종류의 범논리주의를 거부한다:
“우리는 위계질서를 뒤집어야 한다. 모든 의식된 것은 이차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 우리가 가까이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오래된 편견이다. - 주요한 평가에서 다시 배우자! 정신적인 것은 몸의 기호로서 확정되어야 한다.”21)
“감각과 정신이란 도구이자 장남감일 뿐이다. 그들 뒤에는 자기(das Selbst)라는 것이 있다. 자기는 감각의 눈을 도구로 하여 탐색하며 정신의 귀를 도구로 하여 경청한다. 자기는 언제나 경청하며 탐색한다. 그것은 비교하고, 강제하고, 정복하며 파괴한다. 자기는 지배하는 존재인 바, 자아를 지배하는 것도 그것이다. (...) 이 자기는 너의 몸 속에 살고 있다. 너의 몸이 바로 자기다.”22)
니체는 정신, 이성, 사유, 의식, 개념의 틀을 넘어서서 몸주체를 이야기한다. 니체는 칸트가 현상세계를 해명하기 위해 내세웠던 중심축인 의식을 오히려 부차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몸주체는 정신과 육체, 이성과 의지를 구분하는 모든 종류의 이분법적 인간이해를 넘어선 총체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단지 사유중심의 정신적이고 의식적인 것을 넘어서 있는 가장 근원적인 주체이다. 니체가 말하는 우리에게 관계하는 세계는 단지 의식과 정신에 관계하는 사유와 표상의 세계가 아니라 총체성으로서의 우리의 몸에 관계하는 세계, 몸주체에 의해 드러난 세계이다.
니체가 이성주체를 비판하고 부차적인 것으로 보면서 몸 주체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정신으로서의 주체가 가지는 고정성과 불변성을 넘어선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의식활동으로서의 사유란 현상의 세계를 여전히 굳어있는 틀(고정된 법칙)을 통해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그린 현상의 세계는 여전히 이성의 고정된 범주적 형식에 의해 질서지워진 세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보편적인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처럼 고정된 정신의 형식은 결코 생성의 세계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니체의 통찰이다. 현상의 세계, 즉 “지나가고 변화하며 바뀌어가는” 세계는 굳어있는, 화석화된 정신의 추상적인 틀에 의해 드러날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만일 생성의 세계를 고정된 사유의 범주를 가지고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 세계는 범주 사이로 빠져 달아나 버릴 것이다. 생성하는 것은 영원히 되어가는 세계이며, 그것은 그런 한에서 어떤 불변의 지점도, 어떤 종류의 자기동일성도 가지지 않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성주체가 아닌 몸을 이야기하며, 니체가 말하는 몸은 의식과 사유의 고정성과 자기동일성을 넘어서서 생성하는 현상세계를 드러내는 근본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몸의 현상은 더욱 풍요롭고, 더욱 명확하며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현상이다.”23)
니체가 말하는 몸주체란 다양한 힘들과 다양한 충동들의 작용이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장이다:
“모든 생각 밑에는 하나의 정념(Affekte)이 숨겨져 있다. 모든 생각, 모든 감정, 모든 의지는 하나의 특정 충동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총체적 상태, 하나의 전체 의식의 전체 표면이고, 우리에게 구성된 - 지배적이며 또한 동시에 그에게 복종하거나 반항하는 - 충동들의 모든 순간적인 힘 정립(Macht-Feststellung)에서 귀결한다.”24)
니체의 몸주체란 바로 힘에의 의지들이 상호작용하는 장이다. 힘에의 의지란 니체에 따르면 생성하는 세계의 최고의 원리이며 유일한 원리25)이다:“이 세계는 힘에의 의지이고 다른 것이 아니다.”26) 힘에의 의지란 끊임없이 생성하는 진행과정, 즉 활동 속에 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생성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성장하고 지속하는 힘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가 말하는 몸주체는 생성하는 것의 근본원리인 힘에의 의지가 구현되는 장소이다. 몸주체란 성장하고 투쟁하며 더욱 강해지고 다시 약해지는 것 - 즉 힘에의 의지들의 작용이며 이러한 힘에의 의지들의 작용들이 드러나는 장이다.27) 몸주체로서 우리 인간은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다수의 힘에의 의지에 의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되어간다. 항상 더 많은 힘을 얻고자 하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는 힘에의 의지들 사이의 충돌과 상호작용, 힘에의 의지들 사이의 명령하고 복종하고 저항하는 작용방식 속에서 몸주체로서 인간은 살아간다.
이처럼 굳어있는 개념을 통해 세계와 관계하는 이성주체가 아니라, 끝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인간의 역동적 삶을 니체는 몸주체라 명명한다. 몸주체로서 인간은 추상적인 개념의 형식과 놀이하는 자가 아니라 참으로 살아있는 개체로서의 삶을 사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몸주체가 행하는 해석이란 바로 자신의 힘과 생의 고양을 위해28) 만들어낸 의미창조의 작용이며 가치평가의 결과이다. 몸주체의 해석은 힘과 생을 위한 전략 하에서 수행되는 것이며, 부단히 변화하고 되어가는 힘에의 의지들의 작용자체이기도 하다. 몸주체는 힘에의 의지들의 끊임없는 작용에 의해 언제나 활동하고 변화하고 생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주체에 의한 세계해석은 더 이상 하나의 고정된 불변하는, 보편적인 세계해석이 아니다. 몸주체의 세계해석은 언제나 역동적인 변화 속에 있다.
칸트가 말한 인간의 이성에 의해 구성된 현상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하나의 세계이며 이러한 세계구성의 질서는 언제나 동일한 이성의 활동방식들에 의거한다. 그러므로 칸트의 현상세계는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이며, 이 세계로부터 우리는 타당한 지식의 체계를 쌓아나갈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몸주체가 해석한 현상세계는 몸주체의 해석이 끊임없이 되어가고 변화하고 지나가 버리듯이 그 자체로 언제나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생성하는 세계이다:
“해석한다는 것 자체는, 힘에의 의지의 한 형식으로, 정념으로서 (그러나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 하나의 생 성 으 로 서) 현존을 가진다.”29)(인용문의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임)
몸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더 많은 힘을 얻고 더 강해지기 위해 언제나 새롭게 세계를 해석한다. 하나의 해석은 또 다른 해석으로 대체된다. 그러므로 몸주체에 의한 세계해석은 하나의 불변적 활동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힘에의 의지들이 끊임없이 활동하고 되어가듯 힘에의 의지에 의한 해석 역시 언제나 끊임없이 생성된다. 해석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해석들은 그때 그때마다 새롭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몸주체에 의한 세계해석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새롭게 이루어지며, 모든 해석주체에게 그때 그때마다 다르게 이루어진다. 니체의 몸주체는 칸트의 보편적 이성주체와는 달리 더 이상 어떠한 보편성도 공유하지 않는 개별적, 개체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몸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 또 다른 몸주체는 그의 몸을 통해 해석한다. 각각의 몸주체의 해석은 서로 투쟁하고 서로 싸우며 더 많음 힘을 얻고 더 강해지고자 세계를 해석한다. 해석하는 몸주체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다:“우리는 몸을 실마리로 하여 부분적으로는 서로 투쟁하고, 부분적으로는 서로 복속하거나 병렬하면서 개체적 존재를 긍정하고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체를 긍정하는 살아있는 존재의 복수성(Vielheit)으로서의 인간을 인식한다.”30) 그러므로 세계해석은 하나의 보편적인 몸주체에 의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라 다양한, 다수의 몸주체에 의한 다양한 해석들이다.
그러므로 각각의 몸주체는 오직 자신이 해석한 세계의 주인일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인 그러한 자가 되고자 한다 - 새로운 자들, 유일한 자들, 비교할 수 없는 자들, 자기 스스로의 법칙 부여자들, 자기 스스로를 창조하는 창조자들!”31)
“우리의 행위들은 근본적으로 모두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개성적이고, 유일하고, 무제약적으로 개체적(unbegrenzt-individuell)이다....”32)
몸주체는 해석하고 가치평가한다. 몸주체의 해석과 평가는 오직 자신의 생의 유지와 고양을 위한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과 평가는 언제나 새롭고, 그 몸주체에게 유일하고, 비교할 수 없이 개성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각각의 해석은 오직 각각의 몸주체에 고유한, 다른 몸주체의 해석과 비교불가능한, 그 자체로 유일무이한 해석이다. 즉 각각의 몸주체는 자신의 해석을 통해 자신에게 고유한 가치를 창조한다. 이처럼 니체가 그린 부단히 변화하고 끊임없이 생성하는 현상세계는 개체로서의 각각의 몸주체가 자신의 삶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그때 그때마다의 관점에 따라 언제나 새롭고 유일무이하게 해석하고 평가하는 세계이다. 몸의 현상은 바로 이러한 해석의 현상이며, 이를 통해 니체는 살아있는 생생한 생성하는 세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가 그린 세계는 칸트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가진다. 니체의 세계는 개체적 주체가 어떠한 고정점도 가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다르게 해석하는 세계이다. 칸트는 이성비판을 통해 우리를 짓누르는 절대적인 것, 자체적인 것의 무게를 지워버렸으나, 다시금 현상세계 내에서의 보편적이고 절대확실한 진리의 규준을 인정한다. 이를 통해 세계의 모습을 잴 수 있는 고정된 기준이 다시 세워지며, 참된 인식과 그렇지 않은 인식을 가늠할 보편적인 불변의 척도가 마련된다. 다시금 세계와 인간의 모든 인식활동은 이러한 기준과 척도에로 향하게 된다. 니체의 철학과 비교하면 이러한 칸트의 사유방식은 오히려 전통적인 사유방식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현상의 세계에서 모든 종류의 고정적이고 보편적인 척도와 기준을 지운다. 그가 말하는 몸주체와 몸주체의 해석은 지극히 개체적이며 지극히 역사적이다. 하나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고정된 불변의 보편타당한 기준은 없다. 모든 해석들은 “비교불가능”하다. 그것은 유일하고 그만큼 개성적이고 그리고 다양하다. 해석의 다양성은 니체의 체계 내에서 무한히 열려있다. 몸주체는 생의 유지와 고양을 위해 해석한다. 언제나 새롭게, 언제나 다르게 그리고 모든 몸주체마다 각기 다르게. 이처럼 언제나 다르게 변화하는 것이 바로 니체가 그린 현상세계이다. 개체성과 역사성을 가지는 해석과 해석된 현상세계, 그리고 몸 주체의 이론은 이성의 보편성과 사유의 객관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이를 통해 자연세계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칸트의 전략과 단적으로 구분되는 세계이해이다. 니체의 세계에는 어떠한 선험적 기의도 없다. 그 세계에는 각각의 몸주체와 그때 그때마다의 몸주체에 의한 해석만이 절대적 기점이 될 뿐이다. 다양성(개체성)과 가변성(역사성)이 니체가 그린 현상세계의 모습이며 몸주체의 본래적 본성이다. 바로 이점이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니체사유가 구현하고 있는 현대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4. 거리의 파토스와 사이의 로고스 - 유한성을 긍정하는 인간의 초상
이처럼 니체의 철학은 전통 형이상학의 비판에서 출발하여 모든 종류의 보편적인 기준과 척도를 거부하고, 몸주체로서의 인간이성의 개체성과 다양성 그리고 역사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그는 칸트 철학에 정면으로 대치한다. 그러나 실제로 니체가 어떠한 보편적인 기준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몸주체들에 의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들은 그 자체로 (상대적인 의미에서) 절대화되고 말 수 있다. 만일 몸주체에 의한 다양한 해석들을 비교하고 평가할 어떠한 기준도 없다면, 모든 해석들은 그 자체로 참인 것, 확실한 것 일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들은 그 자체로 모든 비교를 넘어선 절대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해석들은 그때 그때마다 절대적이며, 각각의 몸주체에게 절대적이다. 니체의 해석이론은 상대적 절대성의 이론이 되며, 몸주체로서의 모든 인간은 각기 만물의 척도(homo mensura)가 된다. 이 경우 니체는 하나의 보편적인 척도를 지우는 대신 많은 보편적인 척도를 인정하며, 각각의 인간은 결국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자신의 세계와 함께 절대화될 것이다.
칸트는 비록 이성주체에 의한 현상세계의 보편적인 척도를 인정하긴 하지만, 현상세계와 현상세계의 입법자인 인간이성을 결코 절대화하지는 않는다. 현상의 세계와 인간이성은 여전히 제약된 것, 유한한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제약성과 유한성을 통해 비로소 이성주체와 이성주체가 구성한 현상세계는 - 제약된 한계 내에서의 -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 뿐이다. 칸트에게 이성 및 이성에 의해 구성된 세계의 제약성에 대한 긍정은 바로 인간이 구성한 세계와 인간이 구성할 수 없는 그 자체로서의 절대적인 세계와의 구분으로부터 생겨난다. 만일 제약되지 않은 것, 관계방식에 불과한 것이 아닌 것(즉 자체적인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정하지 않는다면, 제약된 것의 제약성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약된 것이 자신의 제약성을 알려줄 수 있는 대립물(절대적인 것, 무제약적인 것)과 어떤 의미에서든 맞서 있고 그것과 구분되고 분리되지 않는다면, 제약된 것은 그 자체로 절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 물 자체와 현상의 구분, 초감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의 구분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무제약적인 물 자체의 세계는 단지 ‘제약되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자리이며, 이 자리가 우리의 이성에 의해 지정됨으로써, 현상의 세계는 자체적인 것이 아닌 세계, 우리에 대하여 있는 세계, 단지 관계들로 이루어진 제약된 세계로서 자리 잡게 된다.33)
물론 칸트에 있어 제약된 세계와 무제약적인 세계의 구별은 전통 형이상학자들이 수행해 왔던 존재와 생성, 진리와 가상의 구분과는 다른 것이다. 칸트는 무제약적인 세계의 가치를 인정하고 현상적인 세계의 무가치함을 이야기하기 위해, 혹은 현상세계의 무제약적 세계에의 의존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무제약적인 것을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에 따르면 유한한 이성주체에게 자체적이며 절대적인 세계는 가상과 오류의 원천일 뿐이다. 모든 진리와 의미의 보고는 단지 제약된 현상세계일 뿐이다. 그러므로 자체적인 것과 우리에 대하여 있는 것의 구분은 오히려 보편적으로 참된 지식의 근원인 현상의 세계와 이러한 지식의 원천인 인간 이성의 제약성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일 뿐이다. 이처럼 칸트는 현상세계의 보편적인 척도가 단지 제약된 척도이며 결코 절대화될 수 없는 척도임을 확인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제약성과 그 세계를 구성하는 인간이성의 제약성을 함께 긍정한다. 이성주체로서 인간은 유한하다. 이 유한성을 긍정할 경우에만, 우리는 현상세계를 얻을 수 있으며, 현상세계에 대한 제약되었지만 참된 인식을 얻을 수 있다. 현상적 진리의 세계는 그 배면에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자리를 가지고 있는 세계, 절대적 세계와 구분되는 그 자체로 결코 절대적인 아닌 제약된 진리의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무제약적이며 절대적인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제약된 세계 내의 제약되었지만 보편적인 척도마저도 부정한 니체의 경우는 어떠한가? 니체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절대성을 허용하는가? 물론 니체는 어떤 의미에서도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상대적인 현상의 세계와 개별적인 몸주체가 (상대적 의미에서) 절대화되지 않는 무엇임을 강조한다. 니체의 몸주체는 현상세계의 진리성을 잴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척도나 기준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해석의 오류성과 한계를 알고 있는 주체, 자신의 그때 그때마다의 해석이 절대적이지 않음(즉 제약되어 있음)을 알고 있는 주체이다.
니체의 몸주체는 세계해석을 위한 어떠한 보편적인 척도, 어떠한 궁극적인 목적도 전제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변화하는 다양한 해석들을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주체이다:
“세계의 가치가 우리의 해석 안에 있다는 사실(...) 지금까지의 해석들은 그 덕분에 우리가 삶, 즉 힘에의 의지 속에서, 힘의 성장을 위해 우리 자신을 보존하는 관점주의적 평가들이라는 사실, 각각의 인간들의 고양(Erhöhung des Menschen)은 더 작은 해석들의 극복을 수반한다는 사실, 그리고 각기 도달된 강화와 힘의 확장은 새로운 관점을 열며, 새로운 지평을 믿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 - 이것이 내 저서를 관통한다”34)
이러한 니체의 설명에 따르면 몸주체의 다양한 해석과 평가들은 그 자체로 절대화되지 않는다. 몸주체는 자신의 해석의 제약성을 알고 있다. 모든 해석은 나라는 몸주체가 살아가면서 힘의 성장과 유지를 위해 나의 관점에서 내린 제약된 가치평가에 불과하다. 나의 해석은 나의 힘의 유지와 상승을 위해, 하나의 제약된 관점에서 취해진 가치평가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세계해석은 하나의 관점을 설정하는 것35)이며 그런 한에서 하나의 관점 하에서 이루어진 일면적인 평가, 즉 ‘관점적 평가‘36)에 불과하다. 이처럼 몸주체는 자신의 해석이 하나의 관점에 따른 일면적인 평가임을 아는 주체이며 따라서 이러한 일면성(제약성)을 극복하려는 주체이다. 더 작은 해석을 지양하고 더 큰 해석의 지평을 얻으려고 자신의 지금의 해석을 극복하는 주체, 즉 자신을 극복하는 주체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더욱 새롭고 더욱 확대된 해석의 지평에로 자신의 관점을 열며, 더욱 새롭고 더욱 확장된 지평에로 자신을 개방하는 주체이다.
이처럼 니체의 몸주체는 자신의 해석이 가지는 일면성과 제한성을 알고 더 나은 해석을 위해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몸주체의 자기확장과 자기극복이 가능한가? 어떻게 몸주체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협소한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며, 힘의 상승과 고양을 위해 지금의 해석을 극복하고 지향할 수 있는가? 몸주체는 이성주체처럼 자신의 해석을 잴 수 있는 어떤 보편적인 가치기준도 가지고 있지 않다. 또한 몸주체는 해석의 세계로서 생성하는 현상세계 내에 어떠한 보편적인 기준이나 척도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주체는 자신의 각 순간의 해석의 일면성과 제약성을 알고 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몸주체가 하나의 해석에 고착되지 않고,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시키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몸주체가 가지는 영혼 내의 자기거리 때문이다. 몸 주체의 자기창조와 자기극복의 전제를 이루는 것은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이다:
“거리의 파토스가 없다면(...) 또 다른 더욱 비밀스러운 파토스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즉 한 영혼의 내부에서 항상 새롭게 거리를 확장하려는 갈망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며, 항상 보다 높고 보다 희귀하고 보다 낯설고 보다 더 긴장되고 보다 더 포괄적인 상태를 형성할 수 없을 것이다. 초도덕적인 의미에서 도덕적인 공식을 빌려서 짧게 이야기하자면 ‘인간’이라는 유형의 향상, ‘인간의 지속적인 자기극복’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37)
‘거리의 파토스’는 바로 몸주체가 자기거리를 조성할 수 있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떠한 해석에도 고착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해석으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는 능력이 ‘거리의 파토스’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취하며, 나의 세계해석으로부터 거리를 취한다. 이러한 영혼의 자기거리로 인해 나는 나의 한 순간의 힘의 작용에 머물러 고착되지 않고 더 많은 힘을 찾아 한 순간의 해석을 넘어설 수 있다. 영혼의 자기거리를 의미하는 ‘거리의 파토스’는 바로 매 순간마다의 해석을 일면적인 것으로 만드는 몸주체의 근본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몸주체는 자신의 한 순간의 해석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한 순간의 자신의 해석이 가지는 일면성을 알고, 이 협소한 해석을 넘어서서 보다 고양되고, 보다 새롭고, 보다 포괄적인 관점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을 넘어선다.
이러한 ‘거리의 파토스’란 “적대화하지 않으면서 분리하는 기술: 아무 것도 섞거나 화해시키지 않는다. 끔직한 다양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오스와는 정반대의 것”38)이다. 즉 거리의 파토스를 갖는 몸주체는 자신의 일면적인 해석을 절대적 척도나 기준으로 삼아 다른 해석들을 배척하지 않는다. 다양한 몸주체들의 다양한 해석들을 어떠한 기준과 척도에 따라 검사하고 배제하지 않은 채 그 자체로 해석들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이를 통해 모든 해석들의 제약성을 인정한다. 몸주체는 이러한 거리를 통해 모든 제약된 해석들을 뛰어 넘어 더 나은 해석, 더 고양된 해석을 지향할 수 있다. ‘거리의 파토스’를 가지는 몸주체는 다양한 해석들을 인정하지만, 모든 것을 각각 절대화하거나 뒤섞지 않고, 더 나아간 힘의 상승과 고양을 위해 해석들의 가치질서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니체에게 ‘거리의 파토스’는 인간의 궁극적인 원리이며 인간의 궁극의 이념이다. 자기상승과 자기극복의 전제인 ‘거리의 파토스’는 극복되어져야 할 존재로서의 인간을 위한 근본조건이다:
“나는 너희들에게 초인(Übermensch)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39)
“그리고 생은 이 비밀도 내게 직접 말해 주었다. 보라, 나는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는 비밀을,”40)
니체의 생성의 철학에는 초인의 이상이 놓여 있다. 니체에게 초인이란 자기를 부단히 극복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자신을 부단히 극복하는 존재인 초인은 바로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부단히 자신의 해석과 그 해석의 주체인 자신을 극복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자기극복은 자기거리의 조성이며, 이 거리가 획득되면 인간은 살아있는 생성의 세계를 긍정하고, 자신을 끊임없는 극복해 나아갈 수 있다. 니체의 초인은 ‘거리의 파토스’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자이며, 모든 것의 덧없음을 긍정할 수 있는 자이며, 결국 자신의 한계를, 자신의 그때 그때마다의 유한성을 인정할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초인만이 자신의 제약된 해석을 절대화하지 않은 채, 즉 어떠한 해석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다.
‘거리의 파토스’와 초인사상은 이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니체가 몸주체를 정신을 넘어서는 커다란 이성41)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신으로서의 이성주체는 어떠한 절대적 기점, 확실한 진리의 준거점을 찾는 주체이다. 이성주체는 고정되고 불변하는 진리를 구한다. 그러므로 이성주체에게는 생성하는 것, 현상하는 것 이면에 어떤 불변적인 것이 척도와 기준으로 놓여있다. 이러한 이성주체는 결국 쉼없이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을 넘어서서 존재의 세계를 지향하는 자이며, 그런 한에서 부단히 변화하고 지나가 버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못하는 자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을 고정시키고 싶어한다. 이러한 이성주체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아무런 용기도 가지지 못한 주체이다. 자신의 덧없음을, 세계의 덧없음을 인정하지 못한 채 결국 그 자체로 아무 것도 아닌 것(불변하는 것)에 자신을 묶어두고자 하는 작은 이성을 지닌 주체가 이성주체이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이러한 이성주체를 비판한다. 정신으로서의 이성주체를 넘어서는 커다란 이성으로서의 몸주체는 부단히 자신의 영혼 안에 거리를 마련함으로써 자신의 지금을 부정하고 끝없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 즉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자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시키지 않고 그것의 일면성을 인정할 수 있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한계와 유한성을, 그리고 세계의 유한성을 인정할 수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큰 이성으로서의 몸주체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이성, 생성의 덧없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성, 자기 스스로 생성의 굴레 속에 있는 이성이다.
칸트가 그려낸 근대적인 인간은 무한한 것, 절대적인 것과의 거리를 통하여 자신의 제약성을 긍정하는 인간이다.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란 무제약적인 것과 제약된 것 사이의 경계를 그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유한성 자체에 매몰되어 있는 존재라면, 즉 어떠한 의미에서도 저편을 추구할 수도 상정할 수도 없는 존재라면, 그러한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세계의 제약성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직 제약된 것의 저편을 상정하고 추구함에 의해서만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그릴 수 있다. 칸트가 구현한 근대적 인간은 절대적인 것과 제약된 것 사이에서 자신의 유한성과 제약성을 긍정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적인 것과 제약된 것의 경계지움와 구분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양자 사이의 구분과 경계지움과는 구분된다. 근대적 인간의 자기한계는 철저히 유한한 것의 측면에서 그려진 한계이지, 절대적인 것의 측면에서 그려진 한계와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42) 칸트가 구현한 인간의 유한성은 무제약적인 것(즉 신)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고된 인간의 유한성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측면에서 구한 한계이며, 인간 스스로 설정한 한계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저히 인간 스스로가 자각한 한계이며, 양자 사이의 거리와 구분은 인간에 의해 마련된 거리와 구분일 뿐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제약된 세계를 자신의 세계로서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저편을 경계짓고 구분한다. 칸트가 그린 근대적 인간은 이처럼 제약된 것과 무제약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나누는 자이며, 양자의 사이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이에 반해 영혼 내의 자기거리를 통해 자신을 부단히 극복할 수 있는 인간, 즉 초인은 니체가 현대적으로 그려낸 유한한 인간의 초상이다. 니체의 몸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그때 그때마다의 해석의 덧없음을 알고 이를 긍정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긍정한다. 니체가 그려낸 유한한 몸주체는 결코 절대적인 것과의 다름과 간극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그려내는 칸트의 이성주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긍정한다. 니체의 유한성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절대적인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몸주체는 자신의 세계 해석들 중 어떠한 것도 그 자체로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음을, 어떠한 것도 그 자체로 절대화될 수 없음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해석의 제약성과 유한성을 긍정하는 주체이다. 이러한 니체의 유한성은 모든 종류의 절대적이며 자체적인 것의 배제를 통해 확인되는 유한성이지, 절대적인 것과의 구분과 비교를 통해 이루어지는 유한성이 아니다.
그럼에도 니체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은 궁극적으로는 몸주체와 몸주체의 세계해석들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확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는 자신의 해석을 절대화시키지 않는 영혼의 자기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절대적임의 부정과 제약됨의 긍정’으로 드러나는 과정이다. 이러한 니체의 자기거리는 결국 절대적인 것과 제약된 것의 구분과 경계를 통해 유한성을 긍정하는 칸트적 사유와 유사한 측면을 가진다. 왜냐하면 칸트에게서도 유한성의 긍정은 그것이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통해 확인하는 제약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절대성의 부정과 제약성의 긍정은 두 사상가에게서 드러나는 유한성의 정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단지 니체는 칸트처럼 현상과 구분되는, 현상의 저편을 설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절대적이 아님과 제약되어 있음(이 때 양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나 구분되는 두 분지로 설정된다)이 아니라, 오직 이 세계의 제약성을 그것의 제약되어 있음(절대적이 아님)을 통해서만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구분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니체의 유한성에 대한 설명은 칸트의 유한성에 대한 논의를 한층 더 진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칸트의 유한성은 전통적인 방식에서 절대적인 것을 제일 원리로 전제하고 이를 통해 제약된 세계를 이끌어내고, 절대적인 것에 의존하는 제약된 세계의 위상을 설명하는 대신, 유한한 세계와 유한한 이성주체로부터 자신의 저편을 그려내고 경계짓게 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방식에 의한 유한성의 정립과 구분된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니체는 몸주체와 현상세계의 모든 종류의 저편을 부정하고, 즉 어떤 방식으로든지 존재론적으로니 인식론적으로 구분되는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지 않은 채, 단지 몸주체와 몸주체의 해석이 일면적이며 제약된 것임을 확인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칸트와 구분된다. 니체는 유한한 것의 측면에서 조망되고 경계지워진 저편을 이야기하지 않고, 철저히 유한한 세계 내에서 모든 논의를 진행시켜 나간다. 니체는 절대적인 것에로 향해 있는 모든 종류의 형이상학적 충동과 허상을 지워버린다. 이제 니체에게 유한성은 무한적인 것과 대비된 어떤 것(무능력, 허무, 한계)이 아니며, 오히려 자기를 하나의 제약된 해석에 종속시키지 않고 끝없이 자신을 극복하는 초인의 무한한, 적극적인 힘으로 드러난다. 즉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긍정함을 통해 자신을 무한히 극복하고 자신을 무한히 실현시켜 나갈 수 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긍정은 인간의 무한한 실현가능성에 대한 긍정이기도 하다.
모든 해석의 제약성을 알고 그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는 니체의 초인은 어떤 절대적인 것에도 자신을 구속시키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어떠한 해석도 절대화시키지 않고 그리하여 어떠한 해석에도 절대적으로 구속되지 않는 인간, 오직 스스로의 창조자이며 이를 통해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주인인 초인의 이상은 인간의 무제약성(제약되어 있지 않음)을 전제함에 의해서만 가능한 인간의 이상이다. 한편으로는 제약되어 있지만 이러한 제약성을 부정하고 극복하는 인간은 결국 제약되어 있으면서도, 제약되어 있지 않은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상세계와 구분되는 절대적인 세계를 전면적으로 파기한 후, 니체는 생성하는 세계의 주인인 인간 혹은 초인에게 제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떤 절대적 힘을 긍정한다. 즉 초인은 제약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는, 제약을 넘어 설 수 있는 존재, 제약되지 않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니체의 초인의 이상은 제약된 것과 제약되지 않은 것의 사이와 구분을 인간의 영혼 내의 자기거리로서 설정함에 의해 이루어진다. 니체에게서 유한성의 긍정이란 바로 영혼 내의 이러한 자기거리의 조성이다. 인간은 제약되어 있음과 제약되어 있지 않음 사이의 존재이다. 인간은 자신의 제약성을 긍정함으로써 동시에 자신의 무제약성을 획득한다. 사이존재로서 인간의 자기긍정과 자기부정이 곧 무한하지만 유한한 초인의 모습이다. 칸트의 유한한 인간이 물 자체와 현상의 사이에 놓여 있는 존재라면, 니체의 초인은 자기 제약성과 자기극복(자기긍정과 자기부정)의 사이에 있는 존재이다. 물론 칸트에게서도 유한한 인간의 사이성은 인간에 의해 마련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칸트의 근대적 인간은 서로 배타적인 영역들 사이의 존재자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이제 니체에 의해 사이존재로서의 인간의 유한성은 인간의 이중적인 자기관계의 방식으로 내면화된다. 니체의 유한한 인간의 초상은 사이성으로서의 인간의 자기조명이며, 이러한 사이성으로서 인간의 자기조명은 칸트적 유산을 내면화하고 철저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로부터 니체에로 이르는 길은 단절과 파괴의 도정이 아니라, 중단없는 밝힘과 펼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사유(思惟)'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니체와 老子의 생태학적 자연관 (0) | 2024.02.11 |
---|---|
니체의 철학과 동양철학 : 초인의 동양적 조명 (0) | 2024.02.11 |
니체의 Übermensch에 있어서 Über와 Mensch의 의미 (0) | 2024.02.11 |
니체의 ‘도덕 비판의 도덕’에 관한 연구 (0) | 2024.02.11 |
니체의 언어비판과 근대인식 (0) | 2024.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