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언어비판과 근대인식
임 홍 배
머 리 말
니체는 인류의 진보를 약속하는 근대 과학의 환상에 누구보다 미심쩍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진보’의 크기와 의의는 그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던 모든 것의 양에 의해 측정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신이 견지하는 “역사적 방법론의 기본 관점”이라고 밝히면서, 더구나 그런 관점이 “오늘날의 지배적인 본능과 취향에 반대되는 것이기에 더더욱 강조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1) 니체가 말하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본능과 취향’이란 “모든 사건의 절대적 우연성과 기계론적 넌센스를 결합하려는” 그것이다. 말하자면 역사의 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해석’하고 ‘평가’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인간의 역사적 행위는 어디까지나 역사적 인간의 주관적 자의에 바탕을 둔 것이면서도 그러한 행위에 과학의 ‘법칙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자기기만을 통해 자기 행위의 보편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배리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리를 살아 있는 역사로 작동시키는 원리가 다름 아닌 권력의 증대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인간의 ‘본능’이고 또 그 본능을 충족시켜 주는 ‘의미’있는 것에서 느끼는 쾌감이 곧 ‘취향(Geschmack)’의 원천이라면, 그러한 배리는 예컨대 논리적 모순이나 한낱 관념의 허상이 아니라 삶의 기본조건이자 어쩌면 삶 자체에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러한 본능 혹은 취향이 어떻게 그 ‘무의미함’을 꿰뚫어보는 인간의 의식과 삶을 지배할 수 있으며 더구나 그 지배적인 의식이 어떻게 ‘진보’의 시대정신으로 격상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니체의 비판적 사유는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생존이 더욱 임의적이고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간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초월적인 해결을 덜 바라게 된 것은 아닐까? 인간의 자기멸시, 자기멸시에의 의지는 코페르니쿠스 이래 끊임없이 증가해온 것이 아닐까? 슬프게도 인간의 고유성과 품위에 대한 믿음은 이제 흘러간 과거의 일이 되었다. 인간은 문자 그대로 동물이 되었다. 과거에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 ‘신과 동등한 인간’이라 믿었는데 말이다. 코페르니쿠스 이래 인간은 경사면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인간은 점점 더 빨리 중심에서 멀어져가고 있다. 무엇으로? 무로? 뼈저린 허무감 속으로? 그렇다.(5, 404f.)
코페르니쿠스와 더불어 근대인이 발견한 우주의 무한함은 근대인에게 또한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가능성의 공간을 현실성으로 채워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무한한 가능성은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실천적 요청인 동시에 벗어던질 수 없는 짐도 된다. 미리 말하면 니체가 보기에 근대인은 그 자유의 공간을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 즉 ‘무(Nichts)’로 가득 채움으로써 스스로의 존엄과 주인된 지위를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중세적 미망과 혼돈에 빠져 있던 삶의 공간을 이성적 사유에 의해 인간적 질서로 새롭게 창조하고자 했던 근대인은 자신의 약속을 저버리고 본연의 인간에서 가장 멀어져 있는 것이다. 자유의 약속과 함께 다시 동물로 퇴행하는 인간, 그것이 니체가 진단하는 근대인의 실상이며, 니체의 비판철학은 이 역설을 해명하려는 시도라 볼 수 있다. 오늘날 역사적 근대의 공과(功過)를 문제삼는 논의에서 니체의 문제제기가 각별히 주목받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의 극복 또는 ‘탈’근대를 지향하는 다양한 사상적 모색에서 거의 예외없이 니체의 영향은 확인되거니와, 그것은 무엇보다 서구적 형이상학의 전통에 대한 니체의 근본적인 비판적 성찰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니체적 사유의 철저성은 단순히 전근대적 유물로서의 종교적 형이상학과 결별했다는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니체 당대의 19세기인들이 극복했다고 자부하던 낡은 관념들이 오히려 얼마나 집요하게 ‘현대적’ 의식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그 뿌리에까지 파고드는 철저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전근대적 형이상학의 논리를 전복․대체한 것으로 자임하는 근대 과학의 패러다임이 오히려 자신의 비판대상과 깊은 친화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니체의 비판적 사유는 오늘날 탈근대론자들의 방법적 회의에 바탕이 되는 것으로 보이는 ‘해체’적 사유의 중요한 계기들을 대부분 선취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2) 말년의 니체가 ‘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저작에 일관된 생각이었음을 거듭 밝히고 있듯이, 세계에 대한 인식과 가치평가는 ‘객관’ 세계에 내재하는 그 어떤 ‘법칙성’의 재현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주체의 ‘구성물’(Konstruktion)로서 얻어지며, 나아가서 그 ‘주체’ 역시 흔히 유기체의 통일성으로 표상되는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의 집합적 구성물로 이해되는 것이다.3) 그럼에도 ‘객체’와 ‘주체’를 전통적 형이상학의 고정관념인 ‘실체’로 상상하는 것은 앞서 말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본능’ 탓이다. 니체가 보기에 그러한 본능은 근대 과학에서 극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최고도로 조직화되었으며, 그것이 곧 근대적 이성의 영예로 받들어지기까지 한다. 이러한 지배적 본능과 취향에 맞서는 니체의 ‘해체’(De- Konstruktion)는 우선 그러한 구성물들의 발생과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때 전통적 형이상학이나 근대 과학의 인식범주들을 모두 피해 가고자 하는 니체의 비판적 접근방식은 삶의 추진력인 동시에 인식의 구조를 이루는 그러한 본능에 대한 ‘생리학적 해부’에 비견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니체의 해체가 결코 해체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다. 지식과 가치의 본래적인 생성과정에 대한 망각을 통해 ‘진리’에 도달했다고 믿는 이중의 환상에 힘입어 근대인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어진 낯선 존재가 되어 있다면,4) 니체의 해체는 그런 의미에서 철저히−자기 자신으로부터, 또한 자신의 구성물인 이 세계로부터−소외되어 있는 인간을 그 동물적 상태로부터 구제하여 본연의 존엄을 되돌려주려는 실천적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해체적 사유는 역사적 근대에 대한 비판적 극복의 시도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우선 니체의 언어비판과 결부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우리가 아직도 문법을 믿고 있는 까닭에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6, 78)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니체에게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과 가치판단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결정적 준거점이 된다. 이 글에서는 먼저 언어에 대한 니체의 기본적인 생각을 살펴보고, 이어서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여 의미와 무의미 혹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언어의 논리가 어떻게 언어 사용자인 인간 주체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가를 검토한 다음, 마지막으로 언어비판을 매개로 하는 니체의 비판철학이 시사하는 실천적 의의를 근대적 허무주의의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1. 비유로서의 언어
니체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5)라는 글에서 언어의 발생과정을 다층적인 ‘비유형성’의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 대한 사물들의 관계를 나타내는 비유로서의 언어는 첫째, 인간의 감각기관에서 촉발되는 신경자극을 우선 하나의 형상 내지 이미지(Bild)로 옮기고, 둘째로 그렇게 얻어진 이미지를 다시 하나의 소리(Laut)로 고정시키는 이중의 비유화 과정을 거쳐 형성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은 언어가 가리키는 의미영역들을 수시로 건너뛰어 새 영역으로 진입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인식과 가치판단을 동시에 수행한다. 니체는 이 모든 과정이 극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가령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자는 음향진동판의 떨림에 의해 그려지는 음상(音像)을 촉각으로 더듬어서 유추해내며, 그런 식으로 촉각에 의해 재구성된 음향감각을 근거로 어떤 악기가 특정한 음향의 원인이라고 상상할뿐 아니라, 어떤 음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믿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지성은 직접적인 감각의 단계에서부터 감각의 실상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감각적 지각을 해석하는 일차적 비유화의 과정에서부터 실제 사물과는 전혀 다른 어떤 이미지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니체는 “인식의 가장 일반적인 효과는 착각”(1, 876)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착각’에 의존하는 ‘비유’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을 지칭하는 말(‘소리’)로 고정되어 구속력을 갖기 시작하며, 마치 사물에 대한 ‘보편타당한’ 인식을 보증하는 듯이 통용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니체에 따르면 ‘착각’의 효과에 의존하는 비유적 언어의 의사소통 능력은 인간 개개인의 자연스럽고도 의식적인 삶의 현상에 속한다. 인간은 지성의 ‘소유자’와 ‘생산자’임으로 해서 마치 이 세계가 인간의 지성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그러나 이처럼 숭고한 지성도 인간의 자연적․사회적 실존의 제약을 결코 벗어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삶을 유지하고 가치있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만일 ‘모기’들조차도 인간과 의사소통할 능력이 있다면 모기들 역시 그들의 내면에서 이 세계의 중심을 느낄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니체는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하는 지성 혹은 이성의 특권적 지위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로써 이성적 존재로서의 보편적 인간이라는 가설은 니체의 비판적 사유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자연의 세계에서 ‘개별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무시함으로써만 ‘이미지’와 ‘개념’이 도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6) 보편적 인간이라는 가정 역시 개체적 차별성을 무시한 바탕 위에서나 가능한 ‘이미지’ 혹은 ‘개념’에 해당된다. 따라서 개체로서의 인간은, 니체의 비유를 그대로 빌리면, 모기나 파리 혹은 맹수일 수도 있는 그런 존재들이다. 동물들이 나날의 생존투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위장’을 해야 하듯이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도 사정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사물을 사물의 본래 모습과 무관하게 표상하는 인간의 비유적 언어 역시 그런 ‘위장’의 절박한 필요에 의해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지성은 자신의 주된 힘을 위장을 통해 펼친다. 왜냐하면 위장은, 뿔을 지녔거나 날카로운 맹수의 이빨을 가진 자들과 생존을 위해 투쟁할 능력이 없는 약하고 건장하지 못한 개체들이 스스로를 보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 위장술은 인간에게서 정점에 이른다.”(1, 876) 사물에 대한 비유적 인식 즉 ‘표상(Vorstellung)’은 그런 의미에서 ‘위장(Verstellung)’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이 비유의 언어를 통해 사물에 부여하는 질서는 사물의 본성과는 거리가 멀뿐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의 필요와 관점에 따라 그때마다 사물의 의미와 위상을 다르게 매기는 ‘자리바꾸기(Ver-stellung)’의 연속일 따름이다. 자기의식을 지닌 존재인 인간에게서 그런 ‘위장술’이 가장 발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간의 의사소통 능력이 의사소통의 필요성에 비례하여 증대된다면, 역으로 의사소통의 필요성을 더욱 고도로 의식할수록 사물을 최대한 다양한 위치에서 묘사하는 ‘자리바꾸기’의 기술 역시 그만큼 고도화될 것이기 때문이다.7) 이리하여 애초에는 실제 사물과는 무관한 임의의 ‘이미지’를 임의의 ‘소리’로 옮겨놓은 것에 불과했던 비유로서의 언어는 인간들 사이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사물을 하나의 실체로서 가리키는 ‘기호’로 자리잡게 된다. 그 기호의 성격을 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에 감각적 인상이 생겨나고 그 인상들을 고정시키거나 외부로 표출하는 능력은, 그 인상들을 기호(Zeichen)에 의해 타인에게 전달할 필요성이 증대한 것에 비례하여 늘어났다. 기호를 고안해낸 인간은 동시에 자기 자신을 더욱 날카롭게 의식하게 된 인간이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스스로를 의식하는 법을 배웠다.”(3, 591)
2. 언어의 규약
이처럼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생존의 필요에 의해 의식적으로 고안해낸 언어적 기호는 그러한 발생조건을 뛰어넘어 거꾸로 인간의 의식을 규제하기에 이른다. 기호들의 의사소통 능력을 인지한 인간은 그만큼 더 의식적으로 기호화된 언어의 규범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니체는 “의식적인 사유는 말을 통해, 즉 의사전달의 기호를 통해 발생한다”(3, 592)고 말한다. 이리하여 사물의 질서 혹은 법칙들은 다름아닌 ‘언어의 입법’에 의해 확증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서 언어의 입법에 의거한 언어적 규약들이 사물들에 대해 구속력을 행사하면서 ‘거짓’과 ‘진리’의 대비가 생겨난다면, 결국 “언어의 입법은 진리의 으뜸가는 법칙을 제공한다”(1, 877)는 주장까지도 가능해진다. 사물에 대한 ‘위장’된 비유로서 생겨난 언어적 기호가 이처럼 우리가 ‘진리’라고 믿는 것의 제 1의 법칙을 제공한다면 그런 식으로 언어에 의해 보증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니체는 이렇게 답한다.
진리란 유동적인 한 무리의 비유, 환유, 의인적 형상들(Anthropomorphis- men)들이다. 요컨대 시적․수사학적으로 전용되고 치장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에게는 확고하고 교의적이며 구속력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이다. 진리들은 환상들이다. 진리들은 마모되어 감각적 힘을 잃어버린 비유들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망각해버린 그런 환상들이며, 문양이 사라질 정도로 표면이 닳아버려서 이제는 동전이라기보다는 그저 쇠붙이로만 여겨지는 그런 동전들이다.(1, 881f.)
진리의 문제를 언어적 구성물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하고 있는 이러한 견해는 언어의 비유적 성격에 대한 비판적 가치판단을 함축하고 있다. 먼저 언어적 비유로 표상되는 ‘진리들’이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라는 주장은 니체적 언어관의 자연스런 귀결인 동시에 다시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비유로서의 언어가 표현대상의 ‘자리바꿈’과 스스로의 ‘위장’을 함께 필요로 하는 인간적 욕구의 소산이라면 그러한 언어적 구성물에 대한 해체적 인식은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가 어떤 성질의 것인가 하는 의문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하나의 비유적 해답은 위 인용문의 후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인간적 관계들의 총계’에 대한 언어적 인식과 그것이 지닌 구속력은 다름 아닌 보편적 진리성을 주장할수록 인간관계의 생생한 감각적 현실성을 잃고 마치 ‘동전’의 원래 교환가치마저 상실한 ‘쇠붙이’처럼 통용되는 그런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 환상은 당연히 언어적 비유들을 고안해낸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며, 이때의 인간의식은 사물의 본래 가치와는 무관한 ‘쇠붙이’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인간들의 의식, 그것도 ‘무리’지어 그런 ‘환상’을 일삼는 인간들의 의식이다. 여기서 니체는 비유들의 ‘체계’라는 말 대신 ‘한 무리의’ 비유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19세기 이래의 ‘변증법’과 결부된 ‘전체(성)’이나 ‘총체(성)’이라는 개념어 대신 질적인 가치부여가 철저히 배제된 ‘총계’(Summe)−말 그대로 ‘숫자들의 합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처럼 계산된 수사적 어법에서도 짐작되지만, 인간 공동체의 규약으로서 가치를 획득하는 언어적 규약은 경험의 직접성과 결부된 사물의 본래적 가치를 박탈함으로써 ‘쇠붙이’에 비유되는 ‘몰가치적 가치’들의 교환체계를 성립시킨다. 폴 드 만이 설명하듯이8) 언어적 표현대상으로서의 사물은 언어 사용자의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위장’에 의해 사물 자체의 고유성을 희생하는 대가를 치름으로써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언어는 사물을 본래의 자리에서 밀어내고 스스로가 중심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태가 무엇보다 ‘언어적 사건’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는 폴 드 만의 주장은9) 언어와 사물 각각의 고유성을 희생시키는 ‘교환’의 성격이 해명되지 않는 한 공허한 것이 되기 쉽다. 물론 폴 드 만은 언어적 비유가 ‘무리’의 언어로서 집단성을 띠는 사태가 ‘폭력’에 관계될 거라는 단서를 덧붙이긴 하지만, 니체의 경우 비유적 언어가 유발하는 ‘환상들’은 그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인 문맥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전’의 비유가 시사하듯이 그런 환상들은 적어도 인간적 생존의 기본조건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자발적 관심과 목적의식까지도 동반하는 인간활동과 결부되어 있다. 단순히 폭력적인 사태만으로 환원될 성질은 아닌 것이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언어의 중심성이 강조되는 만큼 양자의 연관성은 단순화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니체의 언어관과 유사해 보이는 구조주의적 언어관 역시 니체의 문제의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예컨대 롤랑 바르뜨는 구조주의 언어관과 인식론의 중요한 인식소인 ‘시뮬라크룸’이 인식대상의 작동원리를 드러내는 유효한 장치라고 설명한 바 있다.
모든 구조주의적 활동의 목표는 (...) 어떤 ‘대상’이 어떤 규칙에 따라 기능하는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그 대상을 재구성하는 데 있다. 구조라는 것은 말하자면 오로지 대상의 모상(模像, simulacrum)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목표와 ‘관심’에 의해 얻어지는 모상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모방된 대상은 자연적 대상에서는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 아니, 어쩌면 인식될 수도 없는− 무엇인가를 전면에 드러내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이러한 의미에서의 ‘모상’은 인식대상의 작동규칙 또는 기능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유효한 수단일지 몰라도 그 유효성은 대상을 익명의 기능들로 환원시키는 한계에 갇히고 만다. 또한 ‘자연적’ 대상이 인식될 수 없다는 말은 인간의 의식(‘목표’와 ‘관심’)에 의해 재구성되지 않는 대상은 인식될 수 없다는 식의 동어반복이 되며, 이는 다시 대상을 그 언어적 ‘모상’(Ab-bild)ꠏꠏꠏ폴 드 만이 말하는 ‘비유의 비유’와 마찬가지로ꠏꠏꠏ으로 대체할 가능성을 예고하는 것이다.11)
다시 니체로 돌아오면, 니체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서 언어에 대해 그와 같은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니체가 보기에 사물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실재론적’ 관념들은 “우리가 절대로 상상할 수 없는 눈[目], 즉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도 향하지 않는 눈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활동적이고 해석적인 방향을 통해서만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러한 방향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III, 12) 이처럼 특정한 방향성을 지닌 해석활동이 앞서 말한 ‘무리’의 언어로서 ‘환상들’을 산출하는 경위를 니체는 일단 비유적 언어의 발생조건에 해당되는 ‘무리의 의식’에서 찾는다.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인간의 행위 자체는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그 행위가 의식에 투영되는 순간부터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는 ‘무리의 본능’이 발동한다. 이 ‘무리의 본능’은 사회적 유용성을 최고의 척도로 삼기 때문에 서로간에 ‘교환’될 수 없는 일체의 것은 배제하며 최대한 ‘평균적인 것’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이러한 ‘동물적 의식’의 본성에 연유하는 필연적인 결과를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세계는 단지 표면의 세계, 기호의 세계에 불과하며, 일반화된(verallgemeinert) 세계, 범속화된(gemeinert) 세계일 뿐이다. 의식되는 모든 것은, 다름 아니라 의식됨으로 인해, 평면적이고 얄팍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인 것이 되며, 기호가 - 다시 말해 무리의 표식이 - 된다. 따라서 모든 의식화는 엄청나게 철저한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와 결부되어 있다. 결국 증대하는 의식은 위협이 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틈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것이 질병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3, 592)
‘무리’가 공유하는 의식의 징표이자 산물인 ‘기호’의 세계는 의식적으로 보편성을 주장할수록 그만큼 더 천박한 세계의 표현이 된다. 언어적 기호는 더 이상 가치와 의미의 표현매체가 아니라 보편성을 참칭하는 허구적 가치들의 발생지점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의식의 증대는 기호의 피상화와 가치의 타락을 동반하는 위협적인 현상이며 건강한 삶을 갉아먹는 질병으로까지 진단된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을 언급하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진단은 언어적 기호 일반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니체 당대의 시대정신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띤다. ‘평균적인 것’이 마치 등가의 가치인 것처럼 교환되는 지배적 현상을 니체는 그의 시대가 앓고 있는 거대한 질환이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니체의 언어비판은 언어 자체에 대한 비판의 차원을 넘어 언어적 기호들로 표상되는 ‘가치들의 가치’를 되묻는 작업이 된다. 이에 대해 니체는 근대 과학의 인식범주 자체가 언어를 살아 있는 삶으로부터 유리시켜 삶에 대립시키고 종국에는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단죄하는 주범이라는 것을 그의 저작 도처에서 역설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장에서는 인식의 범주들에 의해 사물에 부여되는 ‘의미’들이 어떻게 해서 생생한 삶을 억누르며 체계적으로 ‘무의미’를 낳는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주체’의 신화
언어가 사물에 대한 비유의 형성을 통해 사물에 대한 환상적이고 허구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니체에게 있어 사물에 대한 대상적 인식은 인식 주체에 의한 구성물일뿐 아니라 무엇보다 주체라는 관념 자체가 그러한 허구화의 출발점이다. 이때 니체가 문제삼는 ‘주체’는 근대적 주체 개념의 핵심으로 이해되어온 ‘사유하는 주체’이며, 의식적 사유능력의 증대를 인간적 자유의 확장이라고 상상하는 주체, 나아가서 그런 관념의 바탕 위에 이 세계를 인간적 자유의 실현공간으로 상정하고 실천하는 주체이다. 그러나 니체에 따르면 근대 과학의 기본적인 인식틀로 자리잡은 이러한 주체/객체의 순환적 체계는 ‘통속화된 형이상학’인 ‘문법’의 체계를 실재의 세계로 간주하는 언어적 관습에 불과하며, 그런 언어적 관습을 과학적 인식의 기본범주라고 믿는 논리학자들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유명한 명제 속에 그런 사유체계의 원형이 들어 있다고 본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관습에서 가령 ‘번개가 친다’(es blitzt)는 식의 표현은 그 자체로는 어떤 대상과도 동일시될 수 없는 단순한 문법상의 주어(es)를 특정한 자연현상의 유일무이한 원인이자 주체인 것처럼 가정하는 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의 명제는 어떤 사건 혹은 행위에는 반드시 그 행위의 원인 또는 주체가 불변의 실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형이상학적인 요청ꠏꠏꠏ“행위에 행위자를 부가하는 문법적인 관습”(II, 616)ꠏꠏꠏ의 결과인 동시에 역으로 어떤 ‘사건’(Geschehen)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마치 특정한 행위자의 단일한 의지에 의해 유발된 하나의 ‘행위’(Tun)인 것처럼 해석하려는ꠏꠏꠏ‘사건’을 실체적 ‘존재’(Sein)로 확증하려는ꠏꠏꠏ이중의 허구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문법적 ‘주어’/‘술어’와 실체적 ‘주체’/‘존재’를 혼동하는 것은 어떤 사건을 특정한 ‘의도’와 ‘기원’에 종속된 것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무능력의 결과일뿐 아니라 일상화된 ‘문법’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뿌리깊은 신앙의 결과이다. 그 신앙이란 “고도의 실재감정을 유발하는 모든 다양한 계기들 사이에 통일성이 있을 거라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중심축인 ‘주체’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처한 수많은 대등한 상태들이 유일무이한 실체의 결과인 것처럼 여기는 허구”이다(III, 627).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계기들은 무수히 다양하며, 우리는 삶의 매 순간마다 제각기 대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그 다양한 계기들의 복합적인 작용을 경험하지만, 의식적인 사유의 차원에서는 그 계기들 사이의 단일한 질서 즉 ‘통일성’을 상정함으로써 종교적 믿음이 주는 것과 흡사한 안도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궁극적인 존재근거를 인식주체에서 확증하려는 의식적 사유는 스스로 쳐놓은 의식의 덫에 걸려들어 ‘신화’의 세계로 회귀한다.12) 세계의 혼돈을 견딜 수 없어하는 공포심에서 신화가 생겨나듯이, 그런 맥락에서 니체는 “우리에게 인식을 명령하는 것은 ‘공포의 본능’이 아닐까?”(3, 594)라고 묻는다. 공포의 본능은 그 속성상 공포심을 유발하는 낯선 경험과 기억을 의식에서 몰아내려고 애쓰게 마련이며, 그 과정에 모종의 인식론적 비약이 개입한다.
‘나는 생각한다’는 진술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할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순간 나의 상태와 내가 아는 나 자신의 다른 상태와의 비교를 전제로 한다. 이처럼 다른 ‘앎’에의 소급적 관련성으로 인해 어떤 경우에도 그런 진술은 나에게 여하한 자명한 확실성도 지니고 있지 않다.(I, 16)
이러한 인식론적 유보에서 우리는 니체가 어째서 일상적 의식과 과학적 사유체계에서 당연시되는 ‘주체’ 개념을 인식의 허구일 뿐이라고 역설하는지 엿볼 수 있다. 인식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는 나의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으로 인지되는 ‘나’와는 또다른 상태에 있는 다수의 ‘나’에 대한 차별화를 통해 의식적으로 구성된 주체이며, 따라서 결코 어느 순간에도 단일한 주어의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니체는 “주체라는 원자는 없다. 주체의 영역은 말하자면 끊임없이 증대하거나 줄어들며, 체계의 중심은 끊임없이 변동한다”(III, 537)고 말한다. 그렇게 보면 인식과 실천의 단일한 ‘기원’에 해당되는 주체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불변의 ‘기원’을 상정하는 실체론적 가정은 푸코의 말을 빌리면 일종의 “비(非)공간(non-place)”13)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현실 속의 인간은 그 무모한 시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다. 자신이 마주하는 삶의 소재를 유기적으로 조직하여 자기화하지 못하는 주체는 자기분열의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자기보다 약체인 주체들을 자신의 삶에 동화시키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나’라는 가상적 주체의 영역은 확보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의미’의 가상은 그러한 인간조건의 산물인 것이다. 니체는 근대 과학의 주요한 인식범주인 연속성, 인과율, 동일성 등의 범주들이 바로 그러한 ‘의미의 가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연대기적 역전(chronologische Umdrehung)에 의하여 원인이 사후적으로 결과로 의식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고통이 육체의 어떤 부분에 가해지기는 해도 거기에 자리잡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한 외부세계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고 소박하게 가정하는 감각적 지각이 오히려 내부세계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는 사실, 외부세계에서 벌어지는 본래의 행위는 언제나 우리의 의식과 무관하게 진행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 우리가 의식하는 외부세계라는 것은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가해진 작용에 따라 산출되며, 사후적으로 그 작용의 ‘원인’으로 투사된다.(III, 804)
앞서 말한대로 주체의 영역이 끊임없이 축소․확장하고 변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 ‘바깥’에 있다고 가정하는 사물의 흐름 역시 그런 변동의 와중에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의식의 ‘안’과 ‘밖’에 어떤 상응하는 질서가 인과관계로 작용한다고 믿으며, 또한 사물이 운동하는 시간적 흐름을 일정한 순서와 체계에 따라 재구성함으로써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 믿음의 결과 “날조된 인과성의 연쇄”(같은 곳)가 생겨난다. 다시 니체의 말을 빌리면 “원인, 순서, 상관성, 필연성, 수(數), 법칙, 자유, 근거, 목적 따위를 꾸며낸 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 자신이다.”(I, 21) 우리는 그러한 ‘기호들의 세계’를 마치 사물의 ‘본질’인 양 사물에 투사시키고 뒤섞는다는 것이다. 그런 ‘신화’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인식하는 ‘주체’라면 거꾸로 그 주체에 의해 불변의 실체라고 인식되는 ‘원자’(Atom)조차도 ‘물 자체’라는 순수개념과 마찬가지의 허구이며, 주체라는 가상의 ‘기원’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원(原)주체 Ursubjekt”(III, 767)라고 니체는 말한다. 주체의 신화를 완성하는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이라는 가정은 그런 인식론적 허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4. 허무주의
결국 인식 주체의 해체에까지 이르는 이러한 근본적 문제제기는 단지 근대 과학의 인식체계 자체를 비판하기 위함도 아니며, 이른바 ‘주체의 죽음’ 자체를 설파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러한 인식체계가 인간적 가치와 자유의 확대를 보증하는 것 같지만, 종국에는 정반대로 인간 주체를 스스로 만들어낸 그러한 가공물의 포로로 만들어 몰락을 자초한다는 데 있다. 그런 맥락에서 19세기의 지배적 가치규범들은 인식범주들의 허구성에 상응한다. 예컨대 근대 휴머니즘의 원리가 되는 ‘자유 의지’ 혹은 ‘자율성’이라는 관념은 자신의 기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구하는 일종의 동어반복이며, 마치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올림으로써 스스로를 무의 수렁에서 존재에로 끌어올리려는”(I, 21) 무모함이다. 인식의 단일한 주체가 허구이듯이 ‘자유 의지’ 역시 그릇된 인과율의 적용에 불과한 셈이다. 또한 니체 당시 인류의 진보에 관한 믿음에 최대의 자양분을 제공한 다윈주의에 대해서도 니체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자연계에서든 인간에게든 더 많이 발달한 이른바 ‘고급종(種)’이라는 것은 보다 더 복잡해지고 따라서 그만큼 더 통제하기 힘든 혼합적 구성물을 뜻하기 때문에 ‘진화’에 비례하여 해체와 파멸의 위험성도 커지며, 따라서 유(類)로서의 인간이 진보한다는 믿음도 무모하고 위험한 환상인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그러한 환상은 ‘잘 조직된 행복한 사회’에서 ‘사회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와 동일시하는 지배계급’의 논리이기도 하다(I, 19).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 도덕적 선악과 사회적 규범의 형태로 모든 가치의 우열을 나누는 대립 역시 같은 연원에서 발생한다.
고급의 지배종족이 하급의 종족 즉 하층민에 대해 느끼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근원적인 감정의 총체, 그것이 바로 우열이라는 대립의 기원이다. 명칭을 부여하는 지배자의 권리가 아주 멀리에까지 미쳐서 언어 자체의 기원을 지배자의 권력 표시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이것은 이러이러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사물과 사건을 한 마디 소리로써 봉인하고, 그리하여 점유해버리는 것이다. (5, 259)
니체가 언어적 기호의 자의성을 ‘언어의 입법’이라는 맥락에서 강조한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그 자체로는 명목에 불과한 언어에 규범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현실의 입법자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허구로서의 인식의 범주는 언어적 입법의 ‘기원’을 찬탈하여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동기에 유력한 수단을 제공하는 셈이다.14) 니체가 이해하는 인간 역사는 그런 의미에서 “장악의 드라마(play of domination)”15)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그 장악의 게임에서 사물의 입법자가 되는 언어는 “말과 개념이라는 현대의 유통화폐”(1, 330)로서 위력적인 도구가 된다. 지배의 논리가 각인되어 있는 그런 ‘유통화폐’의 ‘효용’을 절대적 가치로 섬기는 ‘무리의 본능’은 공인된 가치를 자신이 소유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어 마치 주인의 자리에 오른 듯한 노예의 환상을 공유한다. 근대적 개인이 사회 속에서 누리는 자유의 최대치는 바로 그런 성질의 것이다. “도덕 속에서 개인은 ‘분할될 수 없는 개체(individuum)’가 아니라 ‘분할된 개체(dividuum)’로서 행동한다”(2, 76)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니체의 문맥에서 ‘도덕’이란 ‘무리의 본능’에 가장 충실한, 즉 가장 널리 공인된 가치규범의 대명사이다. 그런 뜻의 도덕을 자신의 가치라고 확신할수록 ‘나’라는 존재는 그만큼 더 깊숙이 ‘장악의 게임’에 말려들게 마련이며, 그 게임의 성패에 관계없이 더욱 더 지배적인 힘들의 도구로, 토막토막 조각난 몰개성의 존재로, 요컨대 소외된 존재로 전락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니체에게도 이러한 소외는 사회적 노동의 과정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16) 인간의 인격적 성숙과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이 양립할 수 없는 사회체제에서 한 인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분할될 수 없는 개체’로 성숙하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대량의 노동력을 빼앗는 사치’로 간주된다는 것이다.17) 여기서 국가라는 것은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기 위해 새의 눈을 멀게 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체제, 그 과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명령과 책임과 실행의 분담체계’로 작동한다.18) 결론적으로 니체는 “인간이 국가에 봉사하여 행하는 모든 일은 인간의 본성에 위배된다”(III, 658)고 단언한다. 그러나 집단의 공유물로 교환되는 가치에서만 자신의 존재근거를 찾고 안도감을 느끼는 개인들은 ‘기세등등한 국가주의’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순응하며, 그런 소외의 극치에서 최대의 희열감을 느낀다.19) 자신이 타자에 의해 ‘분할된 존재’이기를 적극적으로 갈망하는 이 역설이 허무주의(Nihilismus)의 기원이다. 요컨대 “비어 있는 상태에 대한 공포(horror vacui)”(5, 339)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무’(Nichts)를 갈망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통찰하였듯이 이 세계 속에 환상의 가치들을 주입하는 행위 자체가 허무주의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이다.20)
니체 당대의 지배적 환상들ꠏꠏ진화론, 공리주의, 국가주의 등등ꠏꠏ은 모두 그런 허무주의의 다양한 변종들이다. 그 허무주의에 감염되어 있는 개인들은 “생각하는 기계, 글쓰는 기계, 계산하는 기계”(1, 282)로 전락해 있다. ‘말과 개념이라는 화폐’를 쉽게 내던지지 못하는 인간에게 그것은 너무나 친숙한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친숙한 것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을 문제라고 느끼기 힘들기 때문에, 의식의 ‘안’과 ‘밖’을 나누고 꿰어 맞추는 데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의식의 ‘바깥’에 있는 낯선 상태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처럼 친숙하게 믿는 가치들의 공허함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자신의 철학적 탐색을 ‘능동적 허무주의’라 불렀던 니체는 ‘회색의 인식’과 ‘푸르른 삶’ 사이에서 방황하는 파우스트처럼 이렇게 탄식한다.
나는 말이라는 병마에 시달려서 미처 말로써 날인되지 않은 내 자신의 어떠한 감각도 믿지 못한다. 이처럼 생기를 잃고 불쾌하게 활동하는 개념과 말의 제작소인 나는 아마 아직도 내 자신에 대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할 권리는 있을지언정 ‘나는 살아 있다, 고로 생각한다’(vivo, ergo cogito)고 말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나에게 보장되어 있는 것은 공허한 ‘존재’이지 온전히 푸르른 ‘삶’이 아니다.(1, 329)
‘온전히 푸르른 삶’을 희생시키고 ‘공허한 존재’를 허구의 가치들로 가득 채운 인간, 자연의 열쇠를 잃고 의식의 감옥에 갇혀 있는 인간, 그것이 근대적 지식 주체의 초상이다. 그런 지식의 증대가 더 많은 자유를 약속할 거라는 믿음이 니체 시대에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믿음으로 통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좀더 ‘현대적’이라는 데서 희열과 우월감을 느끼는 우리 모두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 니체는 지식의 증대가 자유로운 주체를 구성하지 않으며 오히려 지식의 본능적 폭력성에 갈수록 더 예속시킨다고 본다. 일찍이 종교가 건강한 감각의 삶을 희생시켰다면 이제 지식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실험을 요구하며 지식 주체의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정립하고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던 근대적 주체는 결국 그 이성의 승리에 비례하여 자신에게 적대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니체의 비판철학은 근대의 계몽적 자기의식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시도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21) 어떻든 분명한 것은 니체가 인간의 삶에서 본래의 생기를 박탈하고 인간을 말의 모든 의미에서 노예상태로 격하시키는 일체의 인식체계와 가치규범을 근본적으로 문제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가 시도한 ‘해체’의 핵심은 이것이다. 그렇지만 니체가 단지 ‘해체를 위한 해체’를 의도했던 것은 아니다.22) 그는 인간을 무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저 ‘공허한 존재’의 세계에 맞서 ‘온전히 푸르른 삶’이라 칭한 어떤 상태를 갈망하고 또 어렴풋이 예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생성의 사유
앞에서 살펴본 의미에서 ‘허무’에 탐닉하는 근대인은 자신과 종족의 역사에 대해서도 특정한 ‘기원’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목표’로 이어지는 체계적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렇게 구축된 인과의 사슬에 갇히는 것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스스로 부과한 의미의 사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근대인의 삶에서 과거는 언제나 현재를 위해서만 의미가 있고, 현재는 다시 미래를 위해서만 의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 순간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긍정하지 못하며, 한 순간도 창조적인 삶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근대인의 자랑스런 교양목록에 올라 있는 ‘역사의 과잉’은 ‘삶의 조형력’(die plastische Kraft des Lebens)을 잠식하는 ‘역사적 질병’이 된다(1, 329). 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삶의 매 순간은 무의미한 반복의 연속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니체는 “산다는 것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도록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었다”(6, 217)고 진단한다.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의 등뒤에서 니체의 ‘악마’는 이렇게 속삭인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삶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다시 한번, 아니 수없이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은 없을지니, 일체의 고통과 기쁨, 일체의 사념과 탄식, 낱낱이 열거하기 힘든 네 삶의 크고 작은 일들이 거듭 반복될 것이다. 게다가 모조리 똑같은 순서로. 나무들 사이에 걸려 있는 이 거미와 이 달빛도, 지금까지 흘러온 이 순간도,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삶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늘 다시 되돌려지며, 그와 더불어 한낱 모래알보다 작은 너 또한 그럴지니!’ (…) 이런 생각이 그대를 엄습하면 지금의 그대를 변화시키든가 어쩌면 짓이겨버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이것이 다시 한번, 아니 수없이 반복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이 가장 무거운 무게로 그대의 행위에 얹혀질 것이다! 그런즉 최종적으로 확증되고 영원히 봉인된 이것 말고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려면 얼마나 그대 자신과 삶에 충실해야 하는가! (3, 570)[인용자 강조]
늘 똑같은 삶의 반복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그 굴레에 갇혀 사는 인간은 마치 늘 다시 되돌려놓아야 하는 모래시계의 모래알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런 한에서 니체의 ‘메피스토펠레스’는 우리에게 삶을 등지고 체념하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들린다. 혹은 매 순간을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고 유혹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금욕주의나 쾌락주의 모두 니체의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삶의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의 운명을 ‘가장 무거운 무게’로 짐지고 사는 자는 또다른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다시 한번, 아니 수없이 반복되기를 바라는가?’ 삶의 어느 순간에도 운명의 무게를 느끼는 자는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어도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겠는가’ 하는 실존적 결단의 요청에 직면하는 것이다.23) 더구나 그 요구를 어떤 순간에도 가장 무거운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매 순간의 행위는 자기 자신과 삶에 가장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뜻에서 니체는 ‘염세주의로부터 달아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반대의 이상, 즉 삶의 긍정에 도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삶을 그런 무게로 견뎌낼 때에야 비로소 언제나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외치며 가장 충실한 삶을 바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5, 75). 여기서 운명에 짓눌린 수동적 ‘견딤’은 운명을 능히 감당하는 능동적 ‘견딤’으로 반전된다.24)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반복되어도 다시 지금처럼 살기를 바라는 것은 더 이상 반복되는 삶의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마모되는 자신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으려는 자발적인 바램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차라투스투라의 말을 빌리면 “순환에의 갈증은 그대들 속에 있으니, 다시 그대들 자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그러기 위해 순환의 고리는 돌고 도는 것이다.”25) 그런 이유에서 회복기의 차라투스트라는 “가장 큰 일에서 가장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우리 자신과 같아지도록”(4, 276)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이로써 인간의 자아는 새롭게 정립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니체에게 있어 의식주체의 판단은 ‘나에 대한 다른 앎’과의 관련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유보된다. 이때 ‘다른 앎의 가능성’이란 곧 ‘다른 삶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반복되는 삶’의 맥락에서 보면 따라서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바라는 ‘최종적 봉인’에 이르기까지 내가 바라는 삶의 가능성은 무수히 열려 있다는 뜻이 된다. 그것도 매 순간마다, 그 무수한 가능성을 의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니체는 “의지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끊임없이 그 힘이 증감되는, 구두점처럼 찍혀 있는 의지들(Willens-Punktationen)이 있을 뿐”(11, 278f.)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삶의 시간을 문장의 흐름에 비유하면, 우리가 경험하는 자신의 의지란 그때그때 ‘구두점’으로 찍혀지는 점들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구두점의 역할이 단지 문장의 호흡을 조절하는 데 그치지 않고 때로는 한 순간 문장 전체의 의미를 바꾸어놓듯이, 삶의 매 순간마다 우리가 감당하는 운명의 무게에 따라 삶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렇게 보면 흔히 반복으로 경험되는 삶의 매 순간이야말로 삶의 중심들이다. 데리다가 말하듯이 니체적 사유에서 ‘전체’(das Ganze)는 언제나 ‘부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26) 그렇다면 매 순간을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그 무게를 감당해내는 정도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삶의 ‘힘’27)이 ‘증감’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니체가 새로운 인간상으로 예감하는 이른바 ‘초인’ (Übermensch)은 그런 의미에서 반복적 순환의 사슬에 옥죄이는 삶의 매 순간마다, 그 순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의 무게’로 버팀으로써,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인간’(Über-Mensch)이다.28) 삶의 무의미를 견디지 못하는 근대인은 삶의 ‘텅빈 공간’을 인식의 허구들로 가득 채우지만, 그에 맞서 역행하는 존재인 ‘극복하는 인간’은 “대지의 감각/뜻 der Sinn der Erde”(6, 248)에 충실한 자이다. 니체가 열망한 것은 그런 뜻에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인 인간”(3, 37)이다. 그 이상을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존재하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고자 한다! 새로운 인간, 유일무이한 인간, 비교될 수 없는 인간, 스스로의 입법자, 스스로의 창조자!”(3, 563) 누구나 스스로의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 요청에 충실한 삶을 통해 새롭게 일궈질 문화를 니체는 이렇게 상상하고 소망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가를 되새겨봄으로써, 혼돈을 자기 내부에서 유기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 안과 밖이 따로 없고 위장도 인습도 없는, 더 나아진 새로운 자연(Physis)으로서의 문화의 개념이 - 삶과 사유가, 외관과 욕구가 서로 일치된 문화의 개념이 - 우리 각자에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1, 334)
결국 니체가 바라는 창조적 삶은 ‘자연’의 생동하는 힘을 충실히 구현하는 삶이다. 그런 상태에서 비로소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이상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낳는 예술작품”(12, 119)처럼 바뀔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이 그 세계의 유기적 일부로서 다시 그 세계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맺 는 말
우리가 말과 생각의 뿌리깊은 관습에 따라 ‘진리’나 ‘도덕’ 혹은 ‘가치’라고 부르는 것들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으며,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야 할 생성의 힘을 억누른다. 니체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가 가장 과학화된 근대인의 삶에서 그런 억압이 정점에 이르렀음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던 것 같다. 유고로 남겨진 글에서 니체는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생성의 무구함(Unschuld des Werdens)을 입증해 보이고자 애썼다”(10, 237)고 말하고 있거니와,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에 빚지고 살면서 그 ‘부채’ 혹은 ‘죄책감(Schuld)’에 시달리다 끝내는 파산 혹은 자멸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깊이 절감했던 것이다. 그 위기의식은 니체의 시대에 전형적인 이중성을 띤다. 생명을 잃은 공허한 ‘전체’와 ‘원자들의 무정부 상태’가 공존하는 양상은29) 바그너의 음악이나 문학적 데카당스에 관한 진단일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의 시대가 앓고 있던 첨예한 위기의 징후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위기에 대한 니체의 대응 역시 이중적임을 다시금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니체는 ‘전체’의 공허함을 가차없이 드러내 보이고 그 억압성에 치열하게 맞서지만, 그와 동시에 덧없이 사라져 가는 파편화된 삶에 대해서도 못지 않은 열정으로 저항하면서 온전하게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열망하는 것이다. 그 이중적 투쟁의 과제가 매 순간의 삶을 ‘가장 무거운’ 중심으로 감당하라는 요구로 집약된다. 니체적 사유의 실천적 의의를 “계몽적 앙가쥬망”30)이라 평가할 수 있다면 그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짐작컨대 니체는 그릇된 ‘전체’나 ‘원자들의 무정부 상태’에 맞서는 힘의 원천을 무엇보다 문학과 예술에서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31) 가령 종교와 도덕과 철학은 데카당스의 형식이요 그 반대의 운동이 예술이라거나(III, 717) 예술적 아름다움을 가리켜 ‘온갖 위계질서의 바깥에 있는 어떤 상태’(III, 882)라고 할 때 니체는 예술적 창조성에서 생성의 원리가 구현될 가능성을 찾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다루지 못했지만 니체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모더니즘’의 작가들이32) 창작성향의 다양한 편차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근대적 삶의 황폐함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문학사적 사실에서도 그 점은 확인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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