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1월1일천주의성모마리아대축일]신약성서 안에서의 마리아

나뭇잎숨결 2023. 12. 31. 08:49

 

포천 왕방산에서 사진작가 분이가 탱큐!

 

 

 

 

신약성서 안에서의 마리아

 

 

 

- 조규만바실리오  주교

 

 

 

1.2 신약성서 안에서의 마리아

 

성서에서 마리아에 대한 것을 자주 찾아 볼 수는 없다. 이미 살펴 보았듯이 구약성서에서 특히 그렇다. 신약성서에서도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 복음이나 서간에서도 그 초점은 항상 세례에서 부활에 이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전기, 또는 역사의 예수를 그려내기가 쉽지 않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의 전기, 또는 역사의 마리아를 소묘하기는 더욱이 어렵다.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예수님의 유년시대에 관한 기록을 이차적 요소로 전하는데 덧붙여져 나오거나,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련된 상태에서만 마치 부록식으로 등장하는 까닭이다.

어떻든 간에 구약성서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 숨어 있었고, 또 신약성서 안에서도 겸손하게 뒷전에 머물러 있지만 마리아에 대한 중요한 언급들을 비중 있게 다루면서 마리아에 대한 개략적인 면모를 그려볼 수는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마르코는 예수의 유년 시대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만 두 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3,31-35; 6,3).

마태오는 예수의 유년시대에 대해 기록하고는 있지만 그 중심은 마리아라기보다 요셉이다. 천상 메시지를 받는 사람도 요셉이요(1,20-21; 2,13.20.23), 동정 마리아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도 요셉이요(1,18-25), 예수의 족보도 요셉 편을 따라서 아브라함과 다윗으로부터 내려온다(1,1-16).

마리아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소묘는 바로 루가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 루가는 그의 복음 첫 부분에서 마리아를 주인공으로 그리고 있다(1,26-56). 사도행전에서는 교회가 탄생할 때, 마리아가 제자들과 함께 다락방에서 기도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사도 1,14).

한편 요한은 예수의 공생활 시작과 마지막에 마리아의 등장을 그려내고 있다. 즉 가나의 혼인잔치와 갈바리아 산상의 십자가 아래서이다(2,1-12; 19,25-27).

이처럼 복음사가들이 점차로 마리아의 역할의 비중을 의식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뜻을 점차적으로 깊이 깨닫게 되면서다. 또 예수 자신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길 원하셨으며 그에 따라 예수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계신 분(갈라 4,4)임을 절대로 간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했으리라 본다.

 

1.2.1 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마리아

 

1.2.1.1 갈라디아 4,4

 

이방인들의 선교를 담당했던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 전체를 십자가에 죽으셨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하고 있다. 그의 서간에서 예수의 모친에 관한 언급은 단 한번, 갈라디아 4,4이다.

“때가 찼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셨으니, 그분은 한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아래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모친에 관한 성서의 언급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본다. 갈라디아서는 약 50년경(53/57) 쓰여진 것으로 추정한다. ‘여인으로부터의 탄생’은 예수의 진정한 인성을 의미하고, 또 한편 동정녀 출산에 관한 착상과 연결해 볼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고 있다. 어떻든 교부들과, 심지어 칼빈과 루터까지도, 또 현대의 많은 신학자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입장에서 이 구절을 동정출산을 위한 첫 증언의 자료로 보고자했다. 하지만 사도 바오로가 아기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만으로 그가 동정 출산을 암시하고자 의도했다는 결론이 쉽게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바오로의 관심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인간성을 지니고 태어나셨으며, 따라서 참 인간으로서 율법의 지배하에 자신을 낮춤으로써, 율법의 지배를 받는 인류를 구원 하셨다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오로 사도가 마리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순히 ‘여인’이라는 용어만을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간에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에게 인간적 육체를 지니게 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실 다윗의 후손이라는 연대성을 지닌 존재가 되게 하였다는 점이다.

구약의 욥기를 보면, 한 인간의 인간적 조건을 드러내는 히브리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사람이란 결국 여인에게서 태어나는 것”(욥 14,1).

- “죽을 인생이 어찌 깨끗할 수 있겠는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죄 없을 수 있겠는가?”(욥 15,14).

- “하느님 앞에서 그 누가 죄가 없다 하겠는가? 여인에게서 난 사람이 어찌 순결할 수 있겠는가?”(욥 25,4).

신약성서 복음서에서도 비슷한 용법을 찾아 볼 수 있다.

-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마태 11,11).

-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어느 누구보다도 요한보다 크지 못합니다”(루가 7,28).

이외에도 이러한 표현은 팔레스티나에서 꿈란 문헌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의 인간적 조건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구절로부터 사도 바오로가 마리아의 동정출산을 의도하거나 의식했다는 것에는 신빙성이 없다. 바오로는 단순하게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모성적 역할에서의 어머니이심을 이야기한다. 바오로에게는 루가에서 보듯 ‘첫아들’(2,7)이라는 암시도 없고, 예수의 모친이 동정녀였다는 힌트도 없다. 바오로는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바오로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러한 바오로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명이 그리스도론에서 동정잉태를 고수하게 되는 그 이후의 신약성서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바오로는 동정잉태에 관한 한 중립적이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교부는 로마서 1,3(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과 더불어 이 갈라디아서 4,4을 동정잉태의 근거로 내세운다(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1,1).

“육으로는 다윗 가문으로, 하느님의 뜻과 권능으로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처녀로부터 태어나신다.”

이처럼 이 구절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마리아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귀중한 바오로의 증언으로서 마리아론이 여기서부터 뒤이어 발전하게 된다.

M. Shumaus는 그의 교의신학에서 바오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예수의 모친에 관해서 구세사적 관점에서 언급한 점에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바오로 사도가 언급한 바에 따라서 그 이후의 모든 언급들이 발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Dogmatica Cattolica II, 391 쪽).

Gaiselmann 같은 경우, 갈라디아서의 해석과 더불어 마리아의 성서적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교의 신학 관점에서 갈라디아 4,4의 언급은 신약성서안에서 가장 중요한 마리아에 대한 텍스트이다. 비록 과거 또 오늘의 일부 신학자들에게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바오로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신적 모성에 관한 증언을 통하여 마리아론이 그리스도론과 변형되어 나타나고 구세사 안에서의 그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1.2.1.2 로마 1,3-4

 

바오로 서간 중에서 직접적으로 마리아에 관련된 언급은 아니더라도, 예수의 탄생에 관한 진술을 통해서 바오로 사도가 간접적으로나마 마리아에 대하여 지니고 있는 의도를 살펴볼 수 있다면, 로마 1,3-4; 필립 2,6-11; 갈라 1,19; 4,28-29에서 일 것이다.

 

“이 복음은 성서에 있는 바와 같이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로마 1,2-4).

 

상당히 긴 편지에 속하는 로마서는 바오로 이전에 전해지고 있던 케리그마들이 바오로에 의해 해석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로마서 1,3-4은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점이 대비되고 있다.

a. 태어나다. a. 책봉되다, 계획되다.

b. 다윗의 후손으로 b.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로서

c. 육을 따라서 c. 거룩함의 영을 따라서

d.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신 분으로서

많은 주석가들은 댓귀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형식은 바오로 이전에 이루어진 형식이라고 말한다. 이 형식에 바오로가 그리스도의 명칭으로 사용하는 ‘그분의 아드님’, ‘우리 주님’이라는 것이 첨가되었고, 육을 따라서(κατα σαρξα), 영을 따라서(κατα πνευμα αγιονεσ)라는 바오로의 대조법이 첨가되었다고 본다. ‘육을 따라서, 영을 따라서’라는 대비는 바오로에게서 종종 찾아 볼 수가 있다(로마 8,4-9; 갈라 3,2-3; 5,16-25; 6,8; 필립 3,3). ‘육을 따라서’라는 로마서 1,3-4의 용법은 적어도 간접적으로 마리아를 다루면서 예수의 다윗 혈통과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바오로에게서 예수가 다윗의 혈통, 또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의 관심사는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분이라는 데 있기 때문이다.

 

1.2.1.3 필립 2,6-11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구절을 초기 그리스도인의 찬가라고 말한다. 아마도 바오로 이전부터 전례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바오로가 그의 편지 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한다. 예수의 선재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마리아의 예수 동정출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마리아의 동정출산에 관한 한 개방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1.2.1.4 갈라디아 1,19 와 4,28-29

 

“그 때 주님의 동생 야고버 외에 다른 사도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αδελφος)라는 표현은 마리아의 동정에 관한 논쟁으로 자주 등장한다. 과연 예수의 형제 야고버는 마리아가 낳은 것일까? 마르코 6,3에서도 야고버를 예수의 형제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문제는 마르코 6,3을 언급하면서 다루게 될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야고버는 예수의 두 제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 즉 요한의 형제 야고버, 그리고 마리아 막달레나와 구별되는 또 한 명의 마리아의 아들 가운데 하나로서 요세의 형제 야고버가 아니다(마태 27,56; 마르 15,47; 루가 24,10). 예수의 형제 야고버는 사도 12,17에 등장하고 사도 21,17에서는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로 나타난다.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버는 사도 12,1 에 의하면 이미 헤로데에 의해 치명당한 것으로 나타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이사악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 입니다 ”

 

아브라함에게는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과 사라를 통하여 이사악이라는 자녀들 두고 있다. 이 두 아들을 유대인의 예형과 그리스도인의 예형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즉 육을 따라서 태어난 자녀와 영을 따라서 태어난 자녀로 설명하고 있다. 과연 바오로는 이사악이 아버지의 개입없이 성령에 의해서 잉태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또 만일 바오로가 이사악의 탄생을 그렇게 이해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에 적용하고 있는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바오로의 이 구절은 동정잉태로서의 이삭악의 탄생에 관한 기적적 설명과 루가가 전해주는 성령의 활동을 통하여 이루어진 예수의 잉태되심에 관한 이야기 사이에서 중재적 역할을 하는 하나의 발전 단계로 제시될 수 있는지 질문될 수 있겠다.

Dibelius는 바오로 시대의 유다이즘 안에서 이사악 탄생에 대한 두 가지 전통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첫째는 팔레스티나의 유다이즘에 있어서 보수적 랍비계의 사상이다. 이 사상은 하느님이 자연적인 과정을 기적적으로 도우셨다는 점에서 이사악의 탄생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부성을 제외시키지 않는다. 둘째는 그리스계 유다이즘인데 이들은 그리스 신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아브라함의 개입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되었다고 설명한다. Dibelius는 알렉산드리아의 Philo를 따라서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창세기 21,1을, 하느님께서 사라가 고독하게 있을 때 그녀를 방문한 그 순간에 잉태하였다고 설명한다. ‘그녀가 고독하게 있을 때’(Philo의 번역)라는 말마디에 중점을 두고 성령의 창조적 활동으로 이사악을 잉태한 것이고 남편 아브라함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이다.

 

 

 

 

 

 

 

 

 

 

1.2.2 마르코 복음

 

복음서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복음서는 60년경 또는 7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이 복음 저자는 복음의 중심을 예수의 공생활, 죽음, 부활에 두고 있다. 이 복음안에서 예수의 모친에 관한 두 가지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이 두 가지 자료는 마리아에 대해 부정적인 경향을 띠고 있어서, 혹자는 ‘반마리아적’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1.2.2.1 마르 3,31-35 (참조 마태 12,46-50; 루가 8,19-21)

 

“‧‧‧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입니까? ‧‧‧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예수의 답변은 외견상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찬미 내지 찬양의 소리로는 결코 들리지 않는다. 예수는 새로운 형제관계 내지 친척 관계를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르코는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을 악평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데 있었을 뿐이다. 마르코에게서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비로소 부활을 통해서만 계시되기 때문에, 부활 이전에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자들까지도 예수의 정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3,21에 예수의 친척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 나갔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갔다는 것을 전하는 점에서 그 의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3,35의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사람”이란 구절에서 마리아야말로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에서 예수가 ‘결혼’과 ‘가정’, 그러한 평범한 행복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고 그려내고 있지만. 결국 복음에서 보듯이 마지막 희생으로서의 죽음을 놓고, 자신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라는 쓴잔을 마시기를 수락한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르 14,36; 마태 26,42). 바로 이 구절을 대하면서 우리는 예수의 철저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신뢰, 신앙이 그의 모친 마리아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루가 1,38; 대조 22,42). 루가 복음에 의하면 성자의 육화, 말씀의 강생은 바로 마리아의 ‘하느님 말씀에의 순종’에서 가능했음을 전한다.

이런 문맥에서 마르코 3장의 이야기는 피상적으로는 마리아에 대해 불경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예수는 오히려 마리아의 이러한 방문을 이용하여,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점에 착안해서, “믿음으로 잉태하시며, 사람들 가운데 우리의 구원을 낳게 해 주실 여인으로 간택되시고, 그리스도가 그 안에 창조되기 전 그리스도께서 창조해 주신 동정 마리아께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께서 분명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셨다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셨기 때문에 복되십니다. 마리아는 태중에 모신 육신보다 마음에 지닌 진리를 더 열심히 간직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육신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마음 속에서 진리이시며,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이십니다. 그러나 태중에 있는 것보다 마음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11월 2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축일 제 2독서의 독서기도; 강론 25,7,8; PL 46,937-938).

 

1.2.2.2 마르 6,1-6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 가셨다. ‧‧‧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을 행하는 것일까? ‧‧‧ 저 사람은 목수가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버,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

 

고향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메시아라는 사실에 눈이 가리워진 상태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진실,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적이 많을 것이다. 사실 예수가 처형된 것도 메시아에 대해서 백성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 하는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 사제들, 율법학자들, 경건한 신앙인들에 의해서였다.

 

1) 목수, 마리아의 아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는 일종의 격언이 예수의 가족 관계를 설명하는데 도입되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당신의 가족과 친척들, 고향 사람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의미가 3,20-35에 확대되어 나타난다: “한 집안이 스스로 갈라지면 그 집안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1-3절은 전승부분이요, 5-6절은 현실을 드러내는 부분이며 4절은 이 두 가지를 잇는 부분으로 격언이 이용된 것으로 본다. 고향인들의 놀라움, 또는 몰이해가 예수의 출신성분의 비천함과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의 격차로 설명되고 있다.

마르코 6,3을 다른 복음과 비교해 보면,

- 마르 6,3 : 목수, 마리아의 아들

- 마태 13,55 : 이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부르는 사람이 아닌가?

- 루가 4,22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 요한 6,42 :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첫째로 마르코는 예수를 목수라 부르고, 예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시 말해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로 나타날 뿐, 목수 요셉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우선 이 구절에서 왜 예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앞서 본 3,31에서도 아버지 요셉을 등장하지 않는다.

이점에 대해서 L. Raurantin은 ‘이 마르코 복음의 표현은 예수의 동정 탄생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고 설명한다. 한편 D. Edwards는 마르코 복음은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탄생이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방법들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표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예수의 아버지로서 어떤 남자를 언급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특별한 상태일 수밖에 없는 그의 탄생에 대한 설명을 오해의 소지를 안고 그의 텍스트에서 다루어야만 했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 혹자는 요셉이 이미 사망한 후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 왜 마르코는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만 이야기하는가?

설명 1. 마르코는 예수를 인간으로서 특성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과장적이고 초자연적인 요구들을 거부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마르코에게 있어서 예수는 초자연적 기적을 일으키는 괴이한 존재라기보다 십자가에 처형된 한 인간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설명 2. 예수의 동정잉태를 암시하기 위해서다. 루가나 마태오와 비교할 때, 어느 것이 원천적인 표현인지 가려내는 일이 어렵다. 그런데 루가나 마태오는 ‘목수와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는데, 마르코는 ‘목수, 마리아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마르코는 의도적으로 예수의 부친을 언급하는 일을 회피하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가는 이미 복음 첫머리 부분에서 예수의 동정잉태를 말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서슴없이 예수의 아버지로서 요셉, 목수를 이야기하고, 예수를 목수의 아들, 또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반면에 전혀 예수의 동정잉태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마르코로서는 예수를 요셉, 또는 목수의 아들로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점에서 동향인들의 입을 통하여 동정잉태와 동정탄생을 암시하도록 했다.

의문 1. 마르코가 단순히 표현만을 바꾸면서 동정잉태에 대한 언급을 전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논리가 아닌가?

의문 2. 만일 마르코가 예수의 동정잉태, 동정 탄생을 알았다면 왜 그가 그의 친척들에 대해서 언급하였는가?

의문 3. 마리아가 예수를 아버지 없이 잉태했다면 왜 마리아가 당신의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을까?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받아들이고 있을까?

의문 4. 예수의 동정잉태를 알고 있는 두 복음 사가는 마르코에서 볼 수 있는 부정적 태도(예수가 미쳤다)를 찾아 볼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설명 3. 동향인들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아는데, 예수의 아버지는 모른다. 동향인들은 예수를 아버지를 모르는 사생아로 취급한 것이 아닐까? 사마리아나 중동지방에서는 사생아일 경우 어느 여인의 아들로 말하였다. 그러나 성서의 용법에서는 이것을 증명할 길이 없다. 만일 마르코가 예수를 사생아로 이해했다면 왜 그의 형제들을 계속해서 열거하고 있는가?

설명 4. 요셉이 사망한 이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의 아들을 어머니의 아들, 즉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부르는 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루가 7,12에 보면,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동네로 가시는데 ‧‧‧ 때마침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과 마주치시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이었고 동네 사람들이 큰 떼를 지어 과부와 함께 상여를 따라 오고 있었다.‧‧‧’ 여기서는 분명하게 과부임을 밝히고 있다. 어떻든 이 설명도 만족한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2) 예수의 형제, 자매들

마르코 6,3에는 4명의 형제의 이름이 나온다.

: 야고버, 요셉, 유다, 시몬 그리고 누이들.

이 언급은 적어도 마리아의 예수 탄생 이후 동정문제와 관련된다. 만일 이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라면 마리아의 예수 탄생 이후의 동정은 부정적이다. 만일 반대로 그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니라면, 마리아의 예수 출생 이후의 동정을 지지할 수 있게 된다.

문제의 초점은 첫째로 형제(adelphos)라는 단어다. 둘째로 형제들의 이름으로부터 추론해 낼 수 있는 결론이다.

설명 1. 마르 6,3의 형제(adelphos)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혈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친척들의 관계까지도 의미한다. 예컨대, 로마 9,3에서는 동족의 의미로서 adelpho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마태오 5,22에서는 이웃의 의미로서 adelpho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르 6,3은 적어도 동족이나 이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 가지 중요한 용법은 이 단어가 이복형제, 사촌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마르 6,17-18에 헤로데가 동생(adelpho)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 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필립보는 헤로데의 이복동생이였다. 그리스어본(70인역) 창세기 29,12에서 야곱은 라헬에게 자신이 그녀의 아버지의 adelphos 친척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 ah가 혈족, 또는 친척을 의미하는 바 adelphos로 번역하고 있다(창세 24,48에서도).

아울러 열거된 4명의 형제들은 왜 마리아의 아들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가? 이것은 그들이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2세기 중엽에 쓰여진 ‘야고버 복음’(9,2)이라는 외경에는 이 형제들이 마리아 이전에 결혼해서 낳은 요셉의 자녀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마태오 1,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지냈다”, 루가 2,7: “그 해산 할 날이 차서 첫 아들을 낳았다”라는 표현들이 마리아가 예수 이후 자녀들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점을 마태오와 루가를 취급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설명 2. 야고버, 요셉(요세), 유다, 시몬이라는 이름이 복음서에서 어떤 여인들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 마르 15,47 :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모신 곳을 지켜보고 있었다.”

- 마르 16,1 :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버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의 몸에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 마태오 28,1 : “안식일이지나고 그 이튿날 동틀 무렵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 마태오 27,56 : “그 중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 마태오 27,61 : “그때에 무덤 맞은 편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 루가 24,10 :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버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 요한 20,1 :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무덤에 가보니 ‧‧‧”

- 요한 19,25 :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클레오파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서 있었다.”

 

공관복음에서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하고 세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제베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살로메만을 언급한다. 요한 복음은 예수의 모친을 언급하고 이어서 세 여자를 이야기 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 마리아 막달레나 - 모든 리스트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 살로메 - 마르코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버와 요한의 어머니로 나타난다(마태 20,20).

* 예수의 이모 - 요한 복음에만 나타난다.

* 다른 마리아 - 야고버와 요세의 어머니요,클레오파의 아내로도 나타난다.

* 요안나 - 루가 복음에만 나타난다.

(마리아라는 단어는 미리암, 마리암, 마리안마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이다. 60개의 의미가 있는 만큼 매우 정확하지 않은 이름이다. 귀부인, 고행, 바다의 별, 희망, 계시 ‧‧‧ 등. 에집트에서는 미르함 야우, 또는 므리티암 이라는 단어로서 하느님의 총아라는 뜻을 지니고, 메소포타미아에서 마르라는 용어는 귀부인을 의미한다. 현대어에서 Notre Dame, Nostra Signora, Madonna, Our Lady는 귀부인, 우리들의 부인, 우리들의 주인 마님의 뜻을 지닌다).

 

두번째 문제는 이렇다. 이 야고버와 요셉(마르 15,40)은 6,3의 야고버와 요셉과 동일한 인물인가? 동일이라면, 예수와 배다른 형제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또 다른 두 인물 유다와 시몬은 누구의 아들인가? 왜 마르코는 한번은 두 사람만을 언급하고 또 한번은 4명을 언급하고 있는가? 더욱이 마르코는 15,40에서 작은 야고버(미크론)라고 수식어를 붙이고 있는가?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마르 15,40에 열거된 작은 야고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 인물이라면, 예수의 친형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마르코 복음에서 그의 어머니, 선생님의 어머니로 나타나고, 야고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다른 공관복음에서 다른 마리아로 나타난다. 또 만일 이 다른 마리아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동일시 될 수 없다면 이 야고버와 요셉이 예수의 형제 야고버와 요셉과 동일인물인가? 그렇다면 adelphos라는 용어는 친척, 또는 이복형제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1.2.3 마태오 복음 (80년경)

 

마태오 복음은 바오로계 문헌이나 마르코보다 더욱 상세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마태오는 그의 복음을 예수의 족보로 시작하면서, 예수가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에게서 동정잉태됨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마태오는 예수의 유년기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그와 관련된 마리아의 모습을 전해 주는 것 이외에도 마르코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구절들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마태 12,40-45(마르 3,31-35), 마태 13,53-58(마르 6,1-6)이다.

 

1.2.3.1 예수의 족보 (마태 1,1-17)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는데 이분을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

 

우선 마태오는 예수의 족보를 14대씩 셋으로 나눈다. 그의 댓수 계산이라든가, 족보에 나타나는 이름이라든가, 또 일부 빼먹은 이름 등 문제가 많이 있다. 어떻든 마태오 1장의 족보를 창세기 21,3; 25,26; 29,35; 38,28-30; 룻기 4,18-22; 역대 3,10-19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아브라함 - 이사악/ - (에사오와) 야곱/ -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베레스와 (제라)/ - 헤즈론 - 람 - 암미나답 - 나흐손 - 살몬 - 보아즈 - 오벳 - 이새 - 다윗/ - 솔로몬 -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요람 - 아하지야 - 요아스 - 아마지야 - 아자리야 - 요담 - 아하즈 - 히즈키야 - 므나쎄 - 아몬 - 요시아 - (요하난) 여호아킴, (시드키야, 살룸) - 여고니야와 그의 동생들 - (시드키야, 스알디엘, 말기람), 브다야, (세나쌀, 여카미야, 호사마, 느다비야) - 즈룹바벨, (시므이) - (므술람), 하나니야와 다섯 아들 - 블라티와 여사이야 - 르바이야 - 아르난 - 오바디야 - 스가니야 - 느아리야와 다섯아들 - 엘요에네와 두 아들 - 호다와후를 비롯한 다른 여섯 아들. 이 상이한 차이점은 우리의 관심이 아니다.

신약성서의 주석에 의하면, 14 X 3 = 42는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메시아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풀이한다. ad. c = mb에서 첫 글자 ADM은 아담을 뜻하기도 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메시아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족보에서 우리의 문제점은 왜 마태오는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을 기점으로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갑은 을을 낳고 을은 병을 낳고 하는 식으로 전개하다가 1,16에서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다섯 번이 나타난다.

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제라를 낳고(창 38장참조)

②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여호수아 2장)

③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으며(룻기 2-4장)

④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바쎄바)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사무 하11)

⑤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

우선 구약성서에 있어서 4명의 여인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여인들로서 성서에서 장황하게 긴 이야기로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여인들이 족보에 등장하는 일이 좀처럼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이 여인들의 중요했던 역할에 주의를 기울이게 한다.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의 족보는 첫 번째 14대, 두번째 14대는 구약의 족보와 동일하다. 문제는 세번째 14대에서 차이가 있다.

 

족보에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여인들의 이름의 등장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론들이 있다.

① 이 여인들이 이방인이다. 하느님은 이방인들을 위해서도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고자 하셨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이론에는 문제가 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은 이방인이지만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방인은 그의 남편이었던 우리야가 히타이트족이었을 뿐이다. 두번째로 후기 유대문학에서는 이들을 이방인이라기보다 개종자, 귀화자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번째로 이방인의 의미로서 마리아와 공통점이 없다.

② 구약성서의 4명의 여인들은 다윗 가문의 메시아에 대한 유대인들의 쟁점의 초점이 되고 있다. 따라서 마태오는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생아였고, 그는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한 다윗의 후손이 아니다’라는 유대인들의 반대 주장에 대해서 옹호론적으로 증명을 시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마태오가 족보와 유년기를 옹호론적 동기로 자신의 복음의 서문에 놓았다는 이론이다.

③ 여기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죄인들이다. 특히 성적인 면에서. 따라서 마태오는 이런 죄들이 어떤 신학적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즉 예수는 그의 백성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다말은 창녀처럼 분장해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베레스와 제라를 낳았고(창 38), 라합은 원래 이방인 창녀 출신으로서 이스라엘 간첩을 도와 이스라엘로 귀화하여 살몬에게 보아즈를 낳아주었다(여호 2,1). 룻은 전 남편, 나오미의 아들이 죽은 후, 보아즈를 유혹하여 그에게서 오벳을 낳았다(룻기2-4). 바쎄바는 다윗과 비정상적인 부부관계로 시작되어 솔로몬을 낳았다(사무 후 11).

여기에도 어려움이 있다. 우선 성서는 이들의 행동을 죄로, 그래서 그들을 죄녀로 지적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다말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창세 38,26). 룻의 저자도 룻의 행위를 죄스럽다기보다 영웅적 행위로 묘사하고 있다. 라합 역시 이스라엘 구원의 지대한 공로자로 나타난다. 한편 바쎄바의 간음행위도 랍비문학에서 항상 단죄되었던 것은 아니다. 솔로몬의 경우 이미 정상적인 부부가 된 다음에 출생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이들 여인이 죄녀로 인식되었던 것이 아니다. 또 마태오가 죄인들을 그리고자 했다면, 너무 멀리서 죄인들의 모범을 이끌어 내고 있다. 예수가 죄스러운 민족과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충분한 죄인들은 가까운 시대에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의심스러운 것은 죄스러운 여인 4명을 지적한다고 해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의심스러운 기원이 해명되느냐 하면 그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④ 이 여인들은 비정상적인 결혼을 하였으며, 이 비정상적 결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주장이다.

정확하게 말해서 바쎄바의 경우를 제외하고 이들의 결혼이 죄스러운 결합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타인의 눈에 경멸시될 수 있는 비정상적인 결혼내지는 결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결합은 때때로 영웅적 모습으로 비추어지기까지 한다. 그리고 하느님은 이러한 결합을 통하여 자신의 약속과 계획을 수행하신다. 다말은 유다에게서 메시아의 계보를 형성하도록 하는 하느님 은총의 도구로 나타난다. 라합의 용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룻의 주도적 행위는 보아즈로 하여금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바쎄바의 중재는 솔로몬으로 하여금 다윗 왕권을 계승하게 하였다.

이 이론의 장점은 마태오 1,18-25에서 묘사한 것처럼 마리아가 하느님의 도구로서 비정상적인 결혼을 통하여 메시아가 탄생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인의 카테고리에 공통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또 이 여인들은 마태오에 의해 선택된 인물로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여인들이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사실 성서에는 하느님의 도구로서 더 잘 알려진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예컨대, 사라나 레벡카, 라헬 등의 여인들이 그렇다. 이러한 선택은 그의 족보에서 야곱, 유다, 베레스, 여고니야 등처럼 무작위적이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선택이 자유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세가지 이론이 어떤 진실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이 4번째 요소는 상당히 개연성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만일 이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마태오는 1,18-25의 이야기를 이미 앞질러 말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마태오는 하느님이 메시아의 계보를 위해 마리아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주의 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다.

 

어떻든 예수의 족보는 확실한 사실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마태오 자신이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메시아임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마태오 1,1(예수의 족보는 다음과 같다)과 창세기 2,4(하늘과 땅의 족보(생겨난 순서)는 다음과 같다); 5,1(아담의 계보는 이러하다)과의 두드러진 연관은 마태오가 예수의 출생을 마치 둘째 창조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이고 마리아의 자궁은 새롭고 순결한 땅으로서 하느님의 성령이 그 땅으로부터 새 인류의 시조를 지으신 것이다.

 

1.2.3.2 마리아의 예수 잉태 (마태 1,18-25)

 

성령으로 말미암아 약혼녀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에 요셉은 당황한다. 이런 당황스러운 사건을 통해 마태오는 구약을 다시 한번 끌어들여 이사야 7,14의 성취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1,18 이하의 족보와 관련해서 마태오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요셉을 통하여 증명하고자 한다. 그런데 족보의 형식을 보자면, ‘갑은 을을 낳고, 을은 병을 낳고’의 도식대로 ‘요셉이 예수를 낳고’가 아니라,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고’이다. 왜 마태오는 갑자기 문체를 바꾸었을까? 이 이유는 중요하다. 그리고 1,18-25에서 설명되고 있다. 실제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요셉의 아버지 야곱에 이르는 예수의 조상들은 자연의 통상 법칙에 따라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경우에는 특유할 뿐 아니라 전례 없는 예외가 있다. 즉 예수는 인간적 부친을 갖지 아니하며 마리아의 태중에 그분이 잉태되신 것은 요셉의 씨앗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와 요셉 사이에서의 예수 잉태에 관해서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첫째로 마리아의 임신은 요셉의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음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두번째로 요셉의 의한 것이 아닐지라도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후자가 바로 크리스챤적 해석이다.

마리아의 이러한 잉태는 족보에 나타난 4명의 구약의 여인처럼 어떤 비규칙적, 비정상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공통적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그들의 상황을 메시아 탄생을 목적으로 하는 데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마태오는 바로 마리아가 하느님이 이루시려는 구원 계획의 결정적 도구로서, 이미 이사야가 예언한 바의 성취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오의 우선적 관심은 예수의 탄생이 다윗의 후손이며, 메시아라는 것을 전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이 메시아 성취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마리아보다 요셉으로 등장시킨다. 요셉은 어려운 상황에서 늘 하느님의 계시를 꿈속에서 받고, 그 분의 지시를 따라 행동한다. 아내를 맞아 들이는 일, 피신하는 일, 또 귀향하는 일에 있어서 요셉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루가의 경우 천사가 나타나서 예고를 받는 것은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이기 때문이다(마태오가 유태인으로서 당시 사회 관습을 따라 남녀의 구별을 분명히 하고 있는 데 비해서, 루가는 여성에게 더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다루고 있다는 점이 드러난다).

 

1,18-25에는 마태오의 상당한 의도적 경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아울러 전승적 요소 역시 들어 있다고 보여진다.

전승의 요소로서 ① 요셉의 꿈 (창세 37,19).

② 에집트 피난 (모세의 파라오로부터의 피신, 모세가 파라오가 죽은 후 되돌아 옴 : 출애 4,19).

③ 동방박사 이야기와 발람의 이야기 : 동쪽으로부터 (민수 23,7).

④ 꿈을 통한 천사의 메시지 (요셉의 꿈과 환시 참조).

⑤ 성령을 통한 하느님 아들의 탄생.

⑥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하셨다. 마리아가 예수를 동정으로 잉태하셨다는 전승만 직접적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복음 이전의 교회)와 관련된 전승으로 보인다. 다른 전승은 구약과 긴밀한 관련을 지니고, 마태오가 자신의 신학적 견지에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꿈이나 천사를 통한 탄생 예고는 구약 성서에서 거의 상투적인 표현으로 자주 만나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이 성령에 의한 잉태된다는 사상은 성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또 이 놀라운 사실은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과 관련되고 있다.

- 사도 13,32-34 :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그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하러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다시 살리셔서 자녀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제이편에도,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다시는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언서에,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축복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하신 말씀과 또 다른 시편에서 ‘주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를 썩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 로마 1,3-4 :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그분은 인성으로 말하면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분이며 거룩한 신성으로 말하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권능을 나타내어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신 분입니다.

- 루가 3,22 : 성령이 비둘기 형상으로 그에게 내려 오셨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말해 성자성은 성령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나타남을 본다. 예수의 성자성은, 바오로(예수 부활), 마르코(예수의 세례), 루가와 마태오 (예수의 탄생, 잉태), 요한 (선재, 태초에)의 순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본다.

성령을 통한 하느님 아들의 탄생이라는 사상은 초기 교회에도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통한 탄생은 신성을 지닌 아들을 묘사하는 신학적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에게는 인간적 아버지가 없다는 표현으로서 동정잉태는 예수의 성자로서의 신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방법이다. 물론 중동지방에서 왕들이 하느님의 아들로 묘사된 곳이 많다. 구약성서도 왕을 하느님의 아들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리스 로마의 신화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마태오는 하느님이 마리아의 파트너로 계산되지 않는다. 그 잉태는 단순히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동정잉태는 성령을 통한 성자의 신성을 재확인 하는 신학적 묘사로서 마태오는 이사야 7,14을 인용하면서 almah를 parthenos로 번역하여 예수가 바로 그 예언의 성취임을 강조한다. 이미 보았듯이 혹자는 사라와 레베카의 경우도 남성의 중재 내지 개입 없이 하느님에 의해서 성조 이사악과 야곱이 탄생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어떻든 동정잉태는 신학과 역사의 혼합물이다. 역사적 사실로서 마리아가 약혼 중에 임신을 한 사실과 임신후 요셉과 결혼을 하였다. 루가 1,27에 의하면 첫 아기를 낳을 때까지 동정이었다. 이러한 사실과 예수의 성자성 내지는 신성이라는 신학과 결합한 것이다.

어떻든 현대과학이나 역사로써 마태오가 전하는 동정잉태의 역사성을 확인해 볼 도리는 없다. 마태오, 루가 뿐 아니라 초세기부터 ‘동정녀 마리아의 예수 잉태’라는 표현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1.2.3.3 동방박사의 방문 (마태 2,11)

 

경배의 대상으로 아기와 마리아만이 등장한다. 즉 요셉이 빠져 있다. 이것은 다른 여인들과 특별한 마리아의 위치 내지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1.2.3.4 예수의 공적 활동안에서의 마리아

(마태 12,46-50: 참조 마르 3,31-35)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는 가족관계 내지 인간관계가 생리적인 것이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의해 성립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종말론적의미의 가족관계를 드러내고자 한다. 마태오에게는 마르코처럼 마리아와 그의 가족들이 예수의 선교 활동을 두고 ‘미쳤다’라는 신랄한 표현이 삭제되었다. 마태오에게 마리아는 예수를 이해하고 예수의 활동을 이해할 수밖에 없는 분으로 묘사되어 나타난다. 마리아야말로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았고, 천사의 중재로 요셉에게 이해를 받았던 일련의 사건을 체험한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친과 형제들이 예수를 찾아 나선 것은 마르코가 말하는 것처럼 그가 미쳐서 붙잡으러 간 것이 아니라 말할 기회를 찾고자 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마르코와 다른 점은 마르코는 군중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제자들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 13,53-58; 마르 6,1-6참조(고향에서의 배척)

이 기록도 마르코와 조금 다를 뿐이다.

① 마르코 :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마태오 :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② 마르코 : 목수, 마리아의 아들

마태오 : 목수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

 

* 왜 마태오는 목수가 아니라 목수의 아들이라고 했을까?

① 예수의 권위 : 예수는 목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존중하고 있다. 마르코가 단지 예수께서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실 수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에 비해서 마태오는 하실 수는 있지만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② 예수의 신성, 성자성 : 마태오는 이미 동정잉태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목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어떤 오해의 소지가 없다.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 요셉을 기준으로 다윗의 후손임을 입증하면서 동시에 즉시로 마리아에 대한 언급으로 오해의 소지를 해명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오는 마리아를 아기의 어머니로서의 기능을 강조한다. 이사야가 언급한 바 있는 메시아에게 생명을 선사하게 될 젊은 여인임을 강조한다. 마리아는 이 역할을 수행한 후, 아들이 있는 곳에 함께 있으나, 그 아들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그 아들 뒷전에 조용하게 머물고 있다.

 

1.2.4 루가 복음

 

전설적으로 루가는 그림을 잘 그렸고 무엇보다도 마리아를 가장 먼저 그린 화가라는 전설이 있는데, 루가복음이 어떤 복음보다도 마리아에 대해서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루가 복음에서도 마태오 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복음 형성과정을 3단계로 볼 때, 루가복음 이전에 있었던 어떤 자료들이 있었다고 본다. 원-루가복음, 그리고 마르코와 다른 자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루가복음이다. 루가복음 안에서의 마리아에 대한 강조는 마지막 단계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지만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신학적으로 루가는 하나의 계획을 구원 역사에의 접근으로서 시도하고 있다. 루가는 세계역사 의식을 드러낸다(3,1). 이러한 그의 역사적 관심안에서 구원의 주제를 다룬다. 즉, 하느님께서 예수 안에서 이루신 업적의 중심은 과거 하느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베푼 자비와의 관련 속에서 찾게 된다. 그리고 그분의 계속적인 활동은 성령을 통하여 교회안에 계속된다. 루가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우주적 차원안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에 관심을 갖고, 마리아를 그 계획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여인으로 등장시킨다. 이것을 자세하게 살펴볼 것이다.

 

1) 예수의 어린 시절과 관련안에서의 마리아 (1-2장)

예수탄생예고 (1,26-38)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1,39-45)

마리아의 노래 (1,46-56)

예수탄생 (2,1-20)

성전에 예수봉헌 (2,22-38)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 소동 (2,41-52)

2) 예수 공생활에서의 마리아의 역할

예수족보 (3,23-38)

나자렛 고향인들의 배척 (4,16-30)

누가 내 어머니며, 내 형제냐? (8,19-21)

당신 젖을 먹인 행복한 여인 (11,27-28)

 

3) 사도행전 1번

제자들과 기도하는 마리아 (1,14)

 

1.2.4.1 예수의 유년기와 관련안에서의 마리아

 

루가는 머리말(1,1-4)에서 말씀의 증인, 목격자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을 순서 있게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루가는 첫 두 장을 요한과 예수 두 인물에 관한 자료를 대조하면서 소개한다.

- 탄생예고 : 요한 (1,5-25); 예수 (1,26-38)

-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1,39-56) : 성모찬송 (46-55)

- 탄생 : 요한 (1,57-58); 예수 (2,1-20)

- 할례 : 요한(1,59-79); 즈가리아의 노래 (67-79) : 예수 (2,1-21)

- 성장과정 : 요한(1,80); 예수(2,39-52: 나자렛으로 귀환, 성장, 12살의 예수, 성장).

이러한 병행대조 안에서 세례자 요한에 관한 것과 예수에 관한 것이 일반적으로 연결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 예수가 요한을 추월하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예컨대 1,41-44 혹은 1,80과 대조되는 2,40. 52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4가지 찬양노래, 약속에 관한 시적 형식, 그리고 성령에 관한 역할의 강조점 등은 사도행전 2장의 분위기와 다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루가는 예수 편에 속하는 마리아의 탁월함을 드러낸다. 이런 측면을 엘리사벳 방문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러한 루가의 입장은 어디서 기인된 것일까? 분명한 것은 1,2에서 목격증인을 언급하고 있으며, 1,26-38에서 마리아는 단순한 인간적 지식을 지닌 사람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루가의 예수의 유년 시절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점을 지니고 있지만(예컨대, Qurinius의 인구조사연대) 목격증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자료라는 점이다.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그 목격 증인이 누군지는 알 길이 없지만, 3,1을 미루어 보아서 세례운동 이전 시대의 사람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의 가정일 뿐이지 정확히 알 길이 없다. 또 한가지는 구약의 조명 아래 유년기 이야기가 쓰여졌을 가능성이다.

 

1.2.4.1.1 예수의 탄생 예고 (루가 1,26-38)

 

마리아에 대한 루가의 첫번째 언급은 가브리엘 천사의 예수탄생 예고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예수의 장차의 위대함을 언급하고, 초기 그리스도론의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다른 성서보다도, 마리아에 관한 언급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이러한 초기 그리스도론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탄생예고의 형식

마리아에게 나타난 천사 가브리엘은 즈가리아에게 나타났던 천사와 동일 인물이다. 이것은 예수와 요한을 비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루가의 탄생예고는 어떤 천사들의 예고보다도 자세하다. 우리는 예고하는 천사의 출현을 루가 2,9-12(목동들에게), 마태오 1,20-23(요셉에게), 창세기 17장(아브라함에게), 판관기 13장(삼손의 부모에게), 출애급기 2장(모세에게), 판관기 6장(기드온에게)에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천사 출현과 예고를 비교하면 어떤 일정한 형식을 지니고 있음과 루가의 탄생예고 형식이 어떤 발전을 보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① 주님의 천사 또는 주님 자신의 출현

즈가리아(루가 1,11), 마리아(1,26-27), 목동(2,9) 요셉(마태오 1,20), 아브라함(창세기 17,1), 삼손의 부모(판관기 13,3.9.11), 모세(출애급 3,2), 기드온(판관 6,11-12)

② 두려워하는 반응과 “두려워 하지 말라”는 천사의 격려

즈가리아(루가 1,12-13), 마리아(루가 1,29-30), 목동들(루가 2,9-10), 요셉(마태오 1,20), 아브라함(창세기 17,3), 삼손의 부모(판관 13,6.12), 모세(출애급 3,6), 기드온(판관기 6,22-23)

③ 아들의 탄생에 관한 메시지

- 메시지 수취자의 이름 호명

즈가리아(루가 1,13), 마리아(루가 1,28.30), 요셉(마태 1,20), 모세(출애 3,4), 기드온(판관 6,12).

- 메시지의 내용으로서 잉태할 여인과 아들 출산

즈가리아(1,13), 마리아(131), 목동들(2,11), 요셉(1,20-21), 아브라함(창세 17,16.19), 삼손의 부모(13,3)

- 아기의 이름

즈가리아(1,13), 마리아(1,31), 요셉(1,21), 아브라함(17,19)

- 아기가 장차 수행할 업적

즈가리아(1,15-17), 마리아(1,32.33.35), 목동들(2,11), 요셉(1,21), 아브라함(17,19), 삼손의 부모(13,5), 모세의 미래(3,10), 기드온의 미래(6,14)

④ 거부반응 내지, 방법에 대한 질문

즈가리아(1,18), 마리아(1,34), 아브라함(17,7), 삼손의 부모(13,17), 모세(3,11), 기드온(6,14)

⑤ 보증으로서의 표징

즈가리아(1,18), 마리아(1,36-37), 목동들(2,12), 삼손의 부모(13,9.18-19) 모세(3,12), 기드온(6,19-22)

 

이러한 형식에 대한 연구도 예수와 요한의 탄생예고의 기원을 알려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구약성서를 모방하고 있으며, 이미 알려진 위대한 인물의 역할이 구세사 안에서 운명적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성서적 표준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 예고 형식이 루가 1,34: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라는 마리아의 질문에 어떤 빛을 던져준다. 이질문을 흔히들 세속적인 설명을 피하기를 바라면서 이것은 마리아가 아기를 어떻게 임신하는지 몰랐던 생리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었다고 해석하였다. 4세기경 교부(Gregorio di nissa, Ambrosio di Milano, Augustino)들은 이 질문을 마리아가 동정허원을 하였다는 것으로 해석 하였고, 후기 신약성서 전승(야고버 복음)들은 마리아가 동정잉태 이후 일생동안 동정으로 남아 있었다고 확언한다. 그러나 마리아의 요셉과의 영적 결혼은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조화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생리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면 1,34의 이의 제기는 역사와 대화를 진전케하는 하나의 문학적 고안으로 표현 될 수 있는 예고형식의 전형으로 설명될 수 있겠다. 이것은 천사로 하여금 동정잉태에 관한 설명의 기회를 주고, 엘리사벳의 임신을 하나의 표징으로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또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할 기회를 마련한다. 이 “어떻게”라는 질문은 예고형식에 있어서 하나의 전형적인 문학적 고안으로서 우리가 왜 그 질문과 천사의 답변이 처녀(동정)잉태와 관련되어 있는가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2) 마리아의 암시적 관련 (1,34-35. 38)

루가의 탄생예고 안에서의 동정잉태의 역할은 마태오에 있어서보다 더 복잡하고 논의 할 것이 많다. 우리는 여기서 학적 논의의 대단히 중요한 관점을 만나게된다.

개작인가? 일부학자들은 예수의 탄생예고 안에 삽입 첨가 된 것으로 본다. 만일 마리아의 요셉과의 약혼상태와 처녀로서의 상태 사이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는데, 약혼상태는 2차적인 것으로 탄생예고는 본래 결혼하지 않은 소녀에게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동정잉태를 지지하는 한 1,34 후반부에서(아직 내가 남자를 모르는데) 발견되는 어떤 첨가부분에 관한 전통적 이해에 도전적이지 못하다. 만일 이 구절이 없다면, 메시아의 탄생은 마리아와 요셉이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탄생에 관련된다. 루가에 의한 첨가 또는 루가 이전에 첨가 된 것이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그리스적 그리스도론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햬야 한다. 한편 “지극히 높은자의 아들”이라는 히브리적 표현과 알력관계를 이루는데, 로마서 1,3-4에서 다윗의 후손으로서의 지극히 높은 자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발전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본다. 게다가 아라메어로 쓴 꿈란의 단편에 이 두 가지 표현이 병행을 이루고 있어서 루가 1,34에 부여된 칭호가 그리이스적 그리스도론으로서 의심스럽다. 아무튼 요한과 예수를 비교함에 있어서 예수를 요한보다 월등한 자로 드러내기 위해서 즈가리아와 엘리사벳의 나이많음에 대해서 그것보다 월등한 종류의 기적적 동정잉태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

 

3) 탄생예고 설화의 주석

① ‘기뻐하십시오’ : 이 인사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하나의 메시아적 기쁨에로 초대이다. 이와같은 인사는 이미 구약의 스바니야 3,14-15이나, 즈가리아에게 했던 인사와 비교해 볼 수가 있다.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 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 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사람이 또한 그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다”(루가 1,14).

②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 글자 그대로 풀이 하자면 하느님의 총애, 호의, 친절로 가득한 상태를 말한다. 하느님의 눈에 귀엽게 보이는 것이 은총의 구약적 표현이다.

③ ‘주께서 함께 계신다’ : 이미 앞서 구약에서 소명을 받을 때 항상 사용되는 형식문임을 보았다.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모세에게 출애 3,12), “힘센 장사야, 야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기드온에게 판관 6,12),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예레미아에게, 예레 1,8). 하느님은 항상 누군가와 더불어 행동하시는 분으로서 ‘너에게 사명을 주고 내가 함께 그것을 완성하도록 하겠다’는 표현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④ ‘두려워하지 말라’ : 구약성서에서 천사 또는 하느님 자신이 출현할 때 상투적으로 나타나는 문구다. 여기서 「두려워하다」는 것은 「겁먹는다」는 것과 다른 표현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만날 때, 갖게 되는 당황스러움, 경외를 뜻한다.

⑤ 메시지의 내용 ;

a.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이 구절은 이사야 7,14과 대조해 볼 수 있다;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이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엠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란 여호수아와 같은 어원에서 출발한 이름으로서 ‘주님이 구원이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임마누엘이란 성서에서 풀이하듯이 ‘주님이 함께 계시다’라는 뜻을 지닌다. 루가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 4,25에 셋의 이름을 지어주는 자는 이브다. 루가 1,60에서는 엘리사벳이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고, 여기서는 마리아가 예수의 이름을 지어준다. 이 이름의 중요성에 대해서 루가는 사도행전 4,12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분 말고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아야 할 또 다른 이름은 하늘아래 없습니다’(사도 4,12).

b. “그분은 크게 되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의 조상 다윗의 옥좌를 그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원히 야곱의 가문위에 군림할 것이며, 그의 왕권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32-33). 이 구절은 사무엘 후 7,12-16과 비교해 볼 수 있다.

c. 마리아는 이 메시지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자신의 동정성과 관련하여 묻는다. “제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 이것은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겠습니까, 저는 처녀인데?”라고 풀이할 수 있다. 혹자는 이 문구에서 동정허원을 이끌어 내고 있다. 또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는 동정허원에 대한 어떤 기미도 찾아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마리아가 당신의 사명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천사에게 질문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창세기 15,8에서 아브라함이, 판관기 6,15에서 기드온이 질문한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1,18에서는 즈가리아가 의문으로서 질문을 하는 것(저는 늙은 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과 달리 의심이 아니라 그 방법에 대해서 물었다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천사의 대답이 상응한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35). 또 이 35은 출애굽 40,34과 비교된다. “그 때 구름이 만남의 장막을 덮고, 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 찼다.” 이것은 마리아가 마치 우리가 생명을 주는 영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위해서도 높은 분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태초에 하느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으신 하느님, 말씀 자체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여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마리아는 말씀이신 그분을 신앙안에서 수용하신 것이다.

d. 마리아의 응낙 : 그녀의 “예”라는 긍정적 대답은 인격적인 것이요, 자유로운 것이며 겸손한 것이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 순종(fiat)과 더불어 말씀의 육화의 중재자가 된다.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 본성 사이의 일치를 이루는데 있어서 마리아는 어떤 감실보다도 더 귀중한 장소가 된다. 마리아의 신체적이고 인격적인, 인간성 전체를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는데 있어서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온전히 마리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한 것은 당신의 아들로서이다. 그러나 또 한편 결과론적이지만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임신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함으로써 하느님을 인간이 되게 하셨지만 모든 인류 구원을 위한 협조자가 되기도 한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아들을 받는다는 것은 이 아들을 세상에 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마리아의 자유로운 선택으로서의 응낙은 인류의 머리이신 분의 모성을 수락함으로써 구원된 인간성의 어머니가 되시기도 한다. 그처럼 하느님의 구원 경륜안에서 마리아의 과제는 탄생예고에 있어서 “fiat"이라는 응낙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예고 설화는 “fiat”이라는 응낙 이외에도 (1) 다윗 가문의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영원한 통치를 수립할 것에 대한 약속, (2)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아이의 탄생, (3) 남편을 알지 못한 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라는 이사야 7,14 예언의 성취등의 동기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1.2.4.1.2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루가 1,39-56)

 

루가 복음 사가는 마리아를 결약의 궤로 묘사하고 있다(사무엘 하 6,1-11: 역대 상 15,3-16,2 참조).

결약의 궤처럼 마리아도 유다 산골을 향한다(아인 카림으로). 무엇보다도 여기엔 기쁨이 자리잡고 있다. 백성들은 궤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다윗은 궤로 말미암아 춤춘다. 세자요한은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마리아로 말미암아 용약한다. 다윗은 “주님의 궤가 어떻게 나의 집에 올 것인가?”(사무 하 6,9)하며 분에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다. 엘리사벳은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내게로 오시다니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하며 기뻐한다. 결약의 궤가 오베데돔 집에 3개월 머문다(사무 하 6,11).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3개월 머문다(루가 5,26). 결약의 궤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거처라고 한다면, 마리아의 태중은 육화하신 하느님의 신체적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결약의 궤가 나무로 만들어 졌다면, 마리아는 바로 나무보다 훨씬 고귀한 육화하신 하느님의 거처를 이루고 있다.

- 엘리사벳의 찬미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1,42). 이 구절은 창세기 12,2-3과 연관 시켜볼 수 있다.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이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 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마리아도 아브라함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축복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하느님의 축복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성령의 선물로 이해되고 있다. 하느님은 선물을 베풀며 항상 활동케한다. 마리아 “홀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선물의 탁월함, 그녀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 성령의 행위를 의미한다.

- 마리아의 믿음이 마리아의 축복의 원인 :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1,45). 보다 정확한 번역은 “복되십니다. 믿으신 분이여,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떻든 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행복은 믿음이다. 루가는 여기서 마리아를 믿음의 여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오늘날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 가운에 하나가 있다면, 이 방문에서 엘리사벳이 지적하고 있는 바, 믿음이 충실한 여인의 모습으로서의 마리아일 것이다.

이러한 찬미 내지 칭찬은 즉시 「마리아의 노래」에 이어진다. “만세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그 이유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믿었던 그 믿음 때문이다.

- 엘리사벳 방문에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메시아적 기쁨”이다. 루가가 말하고 있는 기쁨, 용약은 메시아적 기쁨, 즉 성령과 기쁨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로부터 엘리사벳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마리아를 통해서 메시아의 선물이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은총은 그분, 메시아의 도래와 연결되고 있음이 표현되고 있다. 이 방문은 마리아의 충실성, 특히 천사가 즈가리아에게서 태어날 요한 세자에게 했던 약속, “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차리라”(1,15)는 약속을 예수로 하여금 성취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방문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예언자로서의 도유를 미리 내다보게 한다. 그리고 두 분의 어머니들이 각각 두 아들을 위한 봉사자로 나타난다.

- 두 사람을 비교하는 표현 중의 흥미로운 표현은, 세례자 요한을 일컬어 예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3,4; 이사야 40,3-5)라고 말하고 있는데 비해서, 우리는 예수를 두고 말씀이라고 말한다. 소리와 말씀의 대조가 의미 있는 듯이 보인다.

 

1.2.4.1.3 마리아의 노래 : Magnificat (루가 1,46-56)

 

이 부분을 우선 셋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하느님께 대한 마리아의 인격적인 감사(46-49). 이 부분에서는 모든 구절이 구약성서의 한나의 노래와 일치한다.

2)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처신에 관한 묘사(50-53). 즉 가난한 자 작은 자를 향하고 계시는 하느님.

3) 약속이 마리아에게서 이행됨을 묘사(54-55). 즉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약속했던 것이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졌다는 것.

 

신앙의 관점에서 마리아는 하느님을 구원 역사의 주인이요, 안내자로 이해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건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 마리아는 자신을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여종으로 생각하고 있다. 마니피캇은 오직 하느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영광은 오직 하느님께만”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오로에게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로마 3,27; 1 고린 1,29-31; 2 고린 10,17; 에페 2,9 등).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마리아의 노래」를 두고 마리아의 가장 뛰어난 기도, 메시아 시대를 위한 가장 훌륭한 노래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한 백성 전체의 노래가 마리아 개인의 기도로 나타나고 있다. 마니피캇은 백성전체를, 백성의 전 역사 안에서 생각하고 묵상하며 선택 받았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노래에서 제기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

첫째로 노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둘째는 노래의 성격은?

 

어떤 라틴어 번역본에 의하면, 46절에 마리아 대신에 엘리사벳을 표기하고 있다. 사실 내용상 엘리사벳이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본래는 이 노래의 주인공은 표기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많은 학자들은 한나의 대응인물로서 마리아 대신 엘리사벳을 생각하였으며, 따라서 엘리사벳의 찬미가였으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점에서 마리아보다 엘리사벳이 더 적임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또 한편 마니피캇의 축복은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아가 말하고 있는 축복과 병행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1,38의 종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마리아를 한나의 대응인물로 만들고 있다. 1,48에서 이 말의 반복은 이 마니피캇이 마리아의 노래임을 확인해 준다.

이 마니피캇은 결코 루가의 창작이라고 할 수 없다. 히브리詩의 평행법의 형식을 지닌다. 꿈란의 노래 형태와 병행되는 점도 없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 노래가 유다적 정황에서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혹자는 마카베오 전쟁의 상황을 채택하였다고 주장하고, 혹자는 1세기 정도 이전에 독립적으로 저술된 것을 약간 수정하여 채택된 것에 룻기 1,20; 2,10의 주제를 가미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 색채가 뚜렷하지 않은 사실은 이 찬미 노래가 마리아 자신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마니피캇은 초기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마리아 공경신심의 발전을 증언해 주는 것이라고 본다.

 

1.2.4.1.4 예수 탄생 (루가 2,1-20)

 

여기서는 마리아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마리아가 세상의 구세주이신 분을 이 세상에 준다. 종말론적인 기쁜 소식이 마리아와 불가분의 방식으로 적극적 역할이 마리아에 의해 수행된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구원자이신 분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이것이 목동들에게는 그 아기가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하나의 징표가 된다. 이와 같이 마리아는 이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주는 도구가 되고 있다.

 

1) 마리아의 임신

마리아가 동정으로 잉태하였기 때문에 임신의 징조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들이 더러 있기도 했지만, 루가 복음사가는 임신의 징조가 있었음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을 거쳤다. 달이 차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2) 미가서 5,2의 간접적 표현

마태오 2장은 구세주가 베틀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데 비해서 루가는 예수가 베틀레헴에서 태어나는 것을 묘사함으로서 미가서를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미가 5,2의 예언를 신약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명백히 메시아와 관련되는 구절로 이해하였다.

 

3) 포대기에 싸인 아기

이것은 천사가 목동들에게 하나의 표징으로 제시되고 있다. 루가가 묘사하고 있는 것은 이 구세주가 우리와 마찬가지로 죽음에 운명지워져 있는 한계와 나약함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조건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루가는 예수의 죽음과 대조 시키고 있다. 이 포대기는 23,53에서 무덤에 안장하기 위해 시신을 싸는 고운 베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루가는 시초와 마지막의 두 상황을 긴밀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 메시아가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루가는 바오로가 필립 2,5-8(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 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에서 묘사하고 있는 바를 또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리아와 관련해서 마리아의 사랑이 넘치는 배려와 보호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4) 마음속 깊이 간직하는 마리아

2,19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아주 간단한 표현이긴 하지만 마리아의 인격에 대한 상당히 중요한 언급이다. 이미 1,29에서 천사의 뜻밖의 인사를 듣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히 생각”할 만큼 마리아가 심사숙고 하는 모습이 암시되고 있다. 경청하고 심사숙고하는 여인으로서의 마리아 모습은 이외에도 루가 복음에서 몇 번 더 나온다. 예를들면 2,52, 이다.

 

5) 아기 예수의 증인으로서 마리아

사도들, 제자들 또는 예수를 추종하는 여인들이 예수의 공적활동을 지켜본 증인이라고 한다면, 루가에게는 아기 예수의 삶의 증인으로서 마리아가 더 없이 분명한 증인이다. 이미 1,2에서 “그들이 쓴 것은 처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말씀을 전파한 사람이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 그대로입니다. 저 역시 이 모든 일들을 처음부터 자세히 조사해 둔 바 있으므로 그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라는 표현을 하고 있듯이, 루가는 이 탄생 설화를 통해서 예수의 생애를 처음부터 목격한 증인으로서 마리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루가에 의하면, 마리아는 갈릴레아에서부터 (루가 1,26) 예루살렘, 나자렛(2,41. 51)까지 예수를 뒤따라 다녔다. 그렇기에 마리아만이 부활 선포가 불러 일으킨 경탄앞에서 예수의 탄생상황을 “마음 깊이 간직한 것”으로부터 재생해 낼 수 있는 증인으로 채택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4세기부터 시작하여 교회의 교부들과 저술가들은 마리아를 최초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가 구세주의 인간적 출생과 초기 생활과 관련된 소식들을 얻어 낼 수 있었던 근원지로 생각하였다.

 

1.2.4.1.5 정결례, 할례와 아기 예수 봉헌 (루가 2,21-25)

 

신생 아기와 관련하여 마리아는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세 가지 예식을 치룬다.

할례 : 모세 율법의 규정에 따라(레위12,3) 이 계명은 탄생 후 여드레째 되는 날에 시행되었다(루가 2,21). 그리고 이 할례예식 중에 아기가 가브리엘 천사가 이미 가르쳐 준(1,31) “예수”라는 이름이 수여되었다(2,21).

봉헌 : 유대인 맏아들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다. 모든 맏아들은 야훼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했다. 맏아들은 야훼께서 사람이나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집트의 맏아들이나 맏배를 멸망시키신 사건을 기념하여 야훼 하느님께 십일조로 바쳐야 하는 자식이었다 (출애 3,1-2; 11-12, 14-16; 민수 8,16-17). 그런데 실제로는 레위인들만 끝까지 야훼를 섬겼다(레위 16-18장). 다른 부족들의 맏아들은 난지 한 달이 되면 대신 다섯 세겔을 바쳐야 했다(출애 1,13).

정결예식: 이것은 여인들에게 해당되는 규정이다. 사내 아이를 낳으며 법적으로 40일간 내내 불결한 자로 간주되었고, 그 기간이 지나면 성전에 사제에게 자신을 보여야 하며, 사제는 속죄예식을 통하여 그녀가 깨끗한 자가 되었음을 선언한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하여 산모는 번제 제물로 1년짜리 양을 또는 속죄와 희생 제물로 산비둘기를 사제에게 바쳐야 한다. 산모가 어린 양을 바칠 형편이 되지 못할 경우에, 산비둘기 한 쌍과 집비둘기 한 쌍을 가기 번제물과 속죄 제물로 대신 바칠 수 있었다(레위 12장; 레위 5,7 참조).

 

물론 할례는 구분하여 전하고 있지만, 정결예식과 봉헌 예식을 함께 전하고 있다. 이 루가의 보도는 정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정결예식은 모친에게만 해당되는 예식이기 때문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함께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봉헌 때문이다. 집비둘기와 산비둘기는 레위기에서 보듯이 속죄 예식과 관련되어 있고(레위 12,8), 맏아들의 봉헌을 위한 다섯 세겔(민수 18,16)은 암시되어 있지 않다.

이렇게 부정확한 보도에 대해서 혹자는 이 작가가 유대교의 분위기에서 자라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편의상 대중들은 속죄봉헌과 정결례의 두 가지 의무가 한데 묶어 실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한가지 추측은 루가가 아마도 사무엘의 이야기로부터 구약성서의 율법 텍스트를 자유로이 변형시킨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다음 4가지가 서로 대조되고 있다.

① 엘카나와 한나는 탄원하여 사무엘을 기적적으로 탄생시킨 후에 이미 젖을 뗀 아기를 야훼께 대한 봉사에 바쳐 드리기 위하여 실로의 성소로 간다(사무 전 1,19-28); 요셉과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던 아기 예수를 성전에 봉헌한다(루가 1,35; 2,22-24.27).

② 엘리는 엘카나와 한나가 야훼께 주년제를 드리러 성소에 나타났을 때 그들을 축복한다(사무 전 2,20); 시므온이 예수의 부친과 모친에게 축복을 내린다(루가 2,34).

③ 실로에서 몇몇 여인들이 만남의 장막 문간에서 봉사하였다 (사무 2,22); 예루살렘에서 안나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없이 단식과 기도로써 하느님을 섬겨 왔다”(루가 2,37).

④ 사무엘은 “야훼와 사람들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사무 전 2,26); “아기 예수는 자라면서 지혜가 가득차서 튼튼해지고 하느님의 은총이 그에게 내렸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엘카나와 한나는 사무엘을 성소의 봉사를 위해 남겨 두고 오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를 데리고 나자렛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작가의 주된 관심이 마리아의 정결례나 맏아들의 속죄 희생이 아니라 봉헌이다. 예수는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요, 즉 하느님께 바쳐진 분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는 참으로 나지르 인으로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가 제물로 바쳐졌다. 그와 같은 동기로 루가는 속죄희생을 위하여 지불되는 은전 다섯 세겔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분이 하느님께 봉헌되기 위해 성전에 들어 오심으로써 온 백성이 깨끗해진다 라는 의미로 봉헌과 정결예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백성을 상징한다. 이 봉헌 예식과 정결예식은 시므온이 아기를 껴안고 그 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이요 하느님에게는 영광을 보는 것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1.2.4.1.6 시므온의 예언 (루가 2,34-35)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할 때에 시므온은 그 들을 축복하고 나서 예언자 정신이 충동으로 다음과 같은 중대한 말을 동정녀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실제로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맞는 중립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들은 그분의 편에 서느냐 그분을 반대하느냐 이 둘 중 하나를 명백히 선택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해치는 사람이다”.

 

1) 예수가 분열의 분수령이다

- 베드 전 2,6-8; 고린 전 1,23-24에 보면 이사야 8,14을 인용 “주님은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지만 걸리는 돌과 부딪히는 바위도 되시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덫과 올가미도 되신다.”

- 마태오 10,34-36)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나는 이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 요한은 7,43; 9,16; 10,19에 보도하고 있듯이 예수는 군중을 분열시키는 동기를 제공한다.

- 또한 9,39은 “나는 심판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소경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루가 역시도 예수가 어떤 분열의 기준점이 됨을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말하면 복음의 전승이 베드로와 바오로의 전승과 비록 사용된 용어들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합되어 핵심에 일치된다는 점이다.

한편 성전의 경건한 노인 시므온의 신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과, 다른 하나는 마리아와 결부된 것이다.

 

2) 그리스도 앞에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이스라엘

예수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하실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분을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될 것이요,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에게는 믿음의 반석이 된다. 예컨대 자신들의 지식과 자신들의 율법 이행으로 구원을 자신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혼인잔치에 초대 받았으나 그 초대를 거절하하는 사람들이 되고 만다. 오히려 비참과 죄악의 상태에 있지만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 소위 말하는 세리, 절름발이들, 소경들, 가난한자들, 죄인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된다.

 

3) 예리한 칼에 찔릴 마리아의 마음

“당신의 마음을 예리한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2,35). 여기서 칼이란 말은 유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약 성서에 자주 칼이라는 단어가 사용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있다. 가령 묵시록을 보면, “입에서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다”(묵시 1,16; 2,12; 19,15. 21). 에페소서에서도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6,17). 특히 히브리서 4,12은 보다 더욱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 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루가의 이 구절은 히브리서 4,2절과 상당히 흡사하다. 이 두 구절 모두가 ‘마음을 꿰둟고’, ‘마음의 숨은 생각들 밝히 드러내는 칼’이 언급되고 있다. 루가는 시므온을 통해서 예수를 야훼의 탁월한 종으로 예시하면서 그분의 말씀이 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마리아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칼로 상징되어 있는 성자의 말씀을 마주 대하여 할 신앙인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의 마음은 칼에 깊이 찔리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루가 복음사가는 자주 ‘마리아가 예수의 사건들과 말씀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고 간직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지혜의 능력으로써 마리아가 예수의 사건과 말씀이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또한 그녀가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을 때라도 그 가치를 파악하려 애썼음을 보여 준다. 그처럼 암흑의 순간에 예수의 말씀을 끝까지 받드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말씀이 마리아의 존재를 속속들이 꿰뚫어 찌른 관통의 절정이다. 시므온의 이 예언은 마리아가 십자가 곁에서 함께 고통을 겪은 상황에만 국한 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구세주의 모친으로서 특히 갈바리오 산상의 비극적 사건과 결부된 삶 전체일 것이다.

 

1.2.4.1.7 성전에서 다시 찾은 소년 예수 (루가 2,41)

 

해마다 마리아와 요셉은 해방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었음을 전하고 있다(2,41). 예수가 12세 되던 해 역시 그들은 예루살렘에 갔고, 그해는 예수가 따라갔다. 예수의 소년기를 전하는 유일한 자료다. 이 사화도 루가의 의도를 따라 상승, 계시, 하강의 도식을 따라 편집되어 있다.

① 요셉과 마리아와 소년 예수는 야훼의 거룩한 산 위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간다.

② 성전에서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토론 중에 지혜를 드러낸다. 그리고 부모에게는 자신의 고유한 신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원을 드러낸다.

③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온다.

 

유명한 인물들의 경우 흔히 유년 시기가 그들이 나중에 성인이 되어 지니게 될 특징을 미리 앞당겨 지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대문학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14세에 우상숭배가 잘못된 것이라는 신념을 지녔다고 전한다. 모세는 그의 지혜가 나이를 앞지르고 있었다고 전한다. 사무엘은 12세에 예언을 시작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다니엘은 12세에 뛰어난 이해력을 지닌 것으로 전한다. 루가는 예수의 소년기를 전하는데 어떤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루가 이전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루가 특유의 문체들이 있기 때문에 루가가 새롭게 편집한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의견이다.

12살이라고 밝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 사회에서는 12-13세에는 성인이 되고 책임을 지게 된다는 증언의 자료들이 많다. 이 시기부터 모세 율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7세에 이성적 능력을 구비하고, 14세가 되면 비로소 자기정신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나이로 본다. 미성년의 한계는 여자 일 경우 11년과 하루가 지나야 하고, 남자의 경우 12년과 하루가 지나야 성인 취급을 한다고 한다. 또 부권의 후견에 대해서 12세, 또는 13세까지 부모의 책임으로 남는다. 또 어떤 자료에 의하면, 토라의 준수에 관해서, 5세에는 성서공부를, 10세에는 미쉬나를, 13세에는 계명을, 15세에는 게마라의 공부를 시작하고 18세에는 결혼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학파에서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성전의 언덕까지 걸어갈 수 있는 아이들에게만 주요 축일 때 성전을 방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루가 복음 사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는 데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시므온의 예언은 갈바리아 산상을 지향하고 있다면, 성전에서의 소년 예수는 역시 성 금요일에 일어날 사건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사흘이라는 주제는 예수의 죽음과 관련해서 루가에게서 자주 소개되고 있는 주제이다. 루가 9,22; 18,33; 24,7.21.46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과 사흘 동안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사건은 사흘간 죽음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 사실을 요한 복음사가가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내가 아직 얼마 동안은 너희와 같이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너희는 나를 찾아 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있는 곳에는 올 수가 없다”(요한 7,33-35).

‘찾는다- 발견한다’라는 주제는 예언자들에게 친숙한 주제들이였다(호세 3,5; 5,6. 15; 이사 51,1; 65,1; 즈카리야 8,21-22; 예례 29,13 등). 야훼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만 찾을 때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하신다. 회개하지 못한 죄인들은 찾지만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요한 복음사가가 묘사한 유대인들과는 달리 찾을 때 그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곁에 있는 그를 찾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부활과 승천으로 말미암아 살게되는 천상의 예수를 발견하게 될 것임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예수의 숨겨진 의도로서 그분의 사명의 종말론적 결과, 즉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 아버지에게도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루가 24,5에서 “너희는 살아 있는 사람을 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느냐”는 질문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요한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누리시는 일치는 새 예루살렘, 즉 하느님이 사람들과 체결하신 새계약의 참 성전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예수를 찾기 위해 겪은 마리아와 요셉의 고생은 사흘후라는 특유한 표현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받치기 위해 사흘길을 갔다고 전한다. 요나가 고래 배속에 사흘간 머문다. 이스라엘에는 옛부터 하느님께서 의인을 고통스럽게 사흘 이상을 두지 않는다는 해석주가 있었다. 고통의 극한치를 말해준다고 볼 수 있다.

예수의 답변에 대해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사건을 가슴 깊이 간직하였다고 전한다. 따라서 이 예수의 소년기에 대해 정보를 전해 준 사람은 아마도 마리아였을 것이다. 마리아가 언제가 자기 기억을 교회에 넘겨 주기 위해서도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새겨 두었다’고 말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1.2.4.2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의 마리아

 

루가 복음에서는 예수의 공생활안에서 마리아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다. 8,19-21과 11,27-28에서는 예수의 어머니라는 표현으로 등장할 뿐이다. 예수의 유년기에서는 아주 상당한 관심을 보이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루가의 침묵은 놀랄만한 것이다. 어떻든 우리가 알아 채릴 수 있는 것은 루가는 예수의 마리아라는 인물에 관심을 두고 있다기보다 마리아가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의 한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루가의 이런한 변화는 상당히 지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는 예수를 추종하는 유일한 사람으로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가 공적활동을 하는 중에는 여러가지 모양의 추종자들이 있다. 어머니 이외에도 12사도들이 있다. 따라서 공생활 중에는 단 두 곳에서만 마리아의 모습이 전해지고 있다.

 

1.2.4.2.1 요셉의 아들로 제시되고 있는 족보 (루가 4,23)

 

루가가 전하는 족보는 마리아에게 간접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마태오는 예수가 잉태하기 전에 복음의 시작으로 족보가 등장하고 있고,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을 통하여 내려오는 식으로 전하면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비해서, 루가는 예수가 세례를 받은 다음, 다시 말해 하늘로 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계시가 있은 다음에 족보가 소개되고 있다. 또 예수로 시작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식으로 아담에게까지 이르고, 급기야는 하느님께까지 이른다. 가령 마태오는 창세기 5-9에서 홍수의 설화의 서론으로 족보가 소개되는 것처럼, 복음 시작에 둠으로써 예수의 이야기의 서론으로 위치케한다. 여기에 비해 루가는 예수의 족보를 세례와 공생활 사이에 위치 시킨다. 이것은 출애급기 6,14-25에서 이스라엘의 족보를 모세의 소명받은 사건과 본격적인 출애급 활동 사이에 위치시키는 수법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요셉의 아들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서 소개하고 있는 동정탄생에 대해 모순이 아니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 동정 탄생에 관해 설명이 충분하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요셉의 아들이라고 소개할 때 오해할 어떤 소지를 줄 아무런 부담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1.2.4.2.2 나자렛 사람들의 배척 (루가 4,16-30)

 

이미 이 보도에 대해서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 살펴 보았다. 예수는 요르단으로부터 갈릴레아로 돌아오자 마자 바로 공적활동을 개시한다. 루가의 보도는 마태오와 마르코의 것보다 훨씬 길다. 루가가 마르코로부터 자료를 얻어 썼는지, 아니면 다른 자료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히 알길이 없다. 루가 복음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마리아에게 작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는 말마디만 삽입되어 있다. 루가 8,21과 사도 1,14을 보면 루가 역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수, 마리아, 그의 형제들에 대한 것들이 빠져 있다. 또 요한 6,42에 보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구절이 나온다. 따라서 루가는 마르코와는 다른 전승과정을 통해 자료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마르코는 본래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격언에 자신 나름대로, ‘그의 친척들과 자신의 집’이라는 구절을 자신 나름대로 첨가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만 마르코 복음사가가 앞서서 ‘그의 어머니와 친척들이 예수를 붙잡으러 나셨다’는 것, 즉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과 서로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예수가 신체적인 가족 관계보다 종말론적 가족 관계에 더욱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물론 예수가 신체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친척들로 해서 예수의 본연의 모습과 가치가 상실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다. 루가는 마태오와 비슷하게 ’그의 친척들과 그의 집안‘이라는 구절을 삽입하지 않음으로써 예수의 가족들에게 비호의적이지 않았음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마르코나 마태오와 비교할 때,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이다. 가령 1,38. 42. 45; 2,19. 51은 마리아에 대한 일종의 칭송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여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루가는 마리아를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으로 그리고 있다.

 

1.2.4.2.3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 (루가 8,19-21)

 

다른 공관 복음과 마찬가지로 루가도 예수의 종말론적 가족 관계가 하느님과 관련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마르코 3,20-35은 예수의 혈연적 관계의 가족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마태오 12,46-50은 마르코의 형식을 따르고 있긴 하지만, 부정적인 태도는 아니다. 여기에 비해 루가는 오히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마태오나 마르코는 어머니와 그의 형제들이 밖에 서 있다. 그들이 왜 예수에게 갈 수 없었는지 설명이 없는 가운데, 중심에는 제자들, 또는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주변에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있다. 물론 그런 점은 루가도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그에게 갈 수 없었던 것은 군중에게 에워 싸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라는 질문의 내용이 있다. 그러나 루가에게는 이 질문이 빠져 있다. 또 마태오와 마르코는 제자들이나 거기에 있는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내 어머니요, 내 형제 자매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에게서는 그런 지적이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마지막 구절의 두 가지 동사, 하느님의 말씀을 <듣다> 그리고 <계속해서 실행하다>라는 동사로서 예수와 제자의 관계는 날마다 지속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 짐을 보여준다. 루가에게서는 마르코나 마태오보다 분명하게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의 기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3,35이하의 보도는 부정적 신뢰성이 그 문맥안에서 더 잘 드러난다. 마르코 3,21에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그를 미쳤다고 붙잡으로 나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또 군중들은 예수를 베엘제불이라고 부르는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에 즉시 이어 나오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3,35이하에서 대조되어 나오는 것을 다시 반성시켜 주고 있다. 혈연적 가족, 믿지 못하는 율법학자들, 그리고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를 여러가지 씨앗이 자라나는 형태로 비유를 들고 있다.

마태오 12,46-50에서는 부분적으로만 마르코와 비슷하다. 예수가 미쳤다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고, 베엘제불이라고 하는 언급과도 분리가 되어 나타난다. 이어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나오긴 하지만 12장과 13장을 연결시키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전혀 다른 종류의 이야기로 소개된다.

한편 루가는 그 문맥을 완저히 바꾼다. 물론 마르코가 말하고 있는 “그의 집안”이 빠져 있다. 그리고 베엘제불의 이야기는 3장이 지난 다음에나 나타난다.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는 이에 앞서서 나오고 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의 마지막 구절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꾸준히 열매를 맺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에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바로 말씀을 듣고 간직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해야만 루가 1,38의 묘사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문맥속에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사도 1,14에서는 공동체 가운데 속해 있다.

 

1.2.4.2.4 참 행복 (루가 11,2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군중 속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하고 외치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하고 대답하셨다.”

 

이 자료는 루가에게만 고유하다. 예수의 이 말씀은 이어서 소개되는 장면(믿음이 없는 세대)의 결어의 변형인 것처럼 보인다. 육체적, 즉 혈연적이거나 지연적인 것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더 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두 가지 장면이 모두 공통적이다. 루가는 이 자료를 다른 자료들로 부터 얻은 것이거나 아니면 8,19-21을 재편집한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이 말씀은 8,19-21보다도 예수의 모친에 대해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행복의 조건이 표현되고, 이 두 가지가 ‘오히려’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다. 이 접속사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듣느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첫째로 앞의 문장을 부정하는 의미로, ‘그게 아니다, 참 행복은 이런 것이다’라고 알아들을 수 있고, 둘째로 긍정적인 의미로 “물론,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이러한 애매모호성이 우리로 하여금 이 자료를 더욱 세밀하게 조사하도록 하고 있다. 외면적으로는 어떤 여인으로 하여금 마리아를 칭송하는 것으로 보인다. ‘낳다’와 ‘젖을 먹이다’라는 표현은 여인의 자궁과 가슴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표현방식이다. 루가 23, 29에 다시한번 같은 표현들이 나타난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과 ,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하고 젖을 빨려 보지 못한 여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때가 올것이다. 어머니의 행복이란 아이를 낳아 안아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행복의 1차적 대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기다. 또 예수에 의해 대조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28의 행복은 놀라운 말씀이나 악마 추방과 같은 하느님의 축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어떻든 이런 해석은 아기로부터 어머니를 너무 분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1,42(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을 논의할 때 비슷한 축복을 보게된다. 엘리사벳에 의해 칭송되는 마리아의 축복은 바로 예수와 같은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마리아의 행복이다. 여기서 마리아는 분명히 축복의 주체가 되고 있다. 1,45에 의하면 마리아의 축복은 단순히 혈연적인 관계에 의해서만이 아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이와같은 두 가지 대조가 다시한번 11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다시말하면 여기서의 대조는 두 가지 행복에 대한 대조이지, 행복한 것과 불행한 것의 대조는 아니다. 1,42이하와 연결해 보면 마리아의 행복은 단순히 예수를 낳아서 젖을 먹인 것만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고, 간직하였다는 데 있다. 그러한 사실이 사도 1,14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11,28은 어떤 표현들보다도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리아는 바로 모든 제자들의 표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 자신이 “세세대대로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일컬을 것입니다”라고 노래하는 마니피캇의 의미와 상통한다.

 

1.2.4.3 사도행전에 나타난 마리아 (사도 1,14)

 

루가 역시도 마르코나 마태오처럼 예수를 따라다니던 여인들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무덤에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면서 어떤 여인들의 자녀들의 이름까지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요한과는 달리 공관복음서가 모두 십자가 사건에서와 무덤에서 어머니 마리아의 이름을 빼 놓고 있다. 그런데 루가는 놀랍게도 사도행전에서 예수 승천 이후, 그리고 성령강림 이전에 제자들이 모인 다락방에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함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놀랍다.

사도 1, 14은 일반적으로 사도행전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사도들의 활동을 요약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보도는 문맥상 역사적이라기보다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것으로 본다. 사실 마리아의 등장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예수 부활이후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합류하고 있다는 루가의 보도가 역사적인 기억인가에 대해서 다른 신약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자료들과 혼동을 피하면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우선 마리아에 관해서 보자면, 신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으로서 언급되고 있지 않다. 물론 마르 3,20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소문을 믿고 그를 붙잡으로 나선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3,21의 보도에 의하면, 예수가 정신 나갔다고 말한 것은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다. 복음서가 마리아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점은 마리아가 예수의 공적활동 안에서 예수의 제자로, 적어도 활동적인 제자로 묘사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마르코와 마태오에 의하면 예수의 공적활동 중에 마리아는 예수의 형제들과 단 한번 등장하고, 거기서도 예수와 종말론적 관계를 맺고 있는 제자들과 구별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 2,1-12에서도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제자들과 분명히 구별되어 리스트가 작성되고 있다. 그런데 사도 1,14에는 부활과 승천 후에는 제자들과 동반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분명히 놀라운 사실이다.

어떻든 루가는 예수가 잉태하는 순간부터 마리아를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보았지만 8,19-21에서는 마리아가 제자들의 종말론적 가족 구성원의 기준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면서도 십자가 아래에서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을 끈다. 이런 점에서 요한과 루가는 일치하고 있다. 어떻게 마리아가 그 나머지 사도 행전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어떻게 마리아가 제자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참여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조금밖에 알고 있지 못한 까닭일 듯하다. 결코 루가가 자기가 원하는 생각을 그려낸 것을 아니라고 본다.

형제들에 관해서 볼 때, 다른 공관 복음과 마찬가지로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을 구별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요한 7,5에는 예수의 형제들만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예수를 믿지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여기서 요한은 예수의 형제들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전하기 보다는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코린토 전서 15,7에 보면 예수의 형제 중 야고버라는 사람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원으로 나타난다. 그 계기가 예수의 발현으로 소개되고 있다. 루가에게 이상스러운 점은 루가가 1,14의 예수의 형제들을 언급하고 이어서 사도행전에 계속 언급되는 예루살렘의 원로 야고버와 연결시키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사도 12,17; 15,13; 21,18). 오직 바오로만이 갈라디아 1,19에서 야고버를 주님의 동생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도 1,14에서 언급하고 있는 역사적 의문점으로 돌아가서 보면, 거기서 나타나는 등장인물의 주역은 첫째로 제자들이다. 그리고 여인들,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다. 여기서 여인들은 십자가 사건과 빈무덤을 확인한 여인들이다. 루가는 사도행전에까지 복음서의 증인들을 이끌어 들이고 있다. 사도 1,22이하에서 제자들로서는 베드로의 말을 인용하여 마티아와 바르나바라는 인물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물론 이들은 십자가 사건, 부활과 빈무덤의 사건의 증인은 아니다. 그 증인들은 여인들이다. 그리고 유아기의 예수의 증인은 바로 마리아다. 분명하게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은 제자들, 예수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계층이다.

루가는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을 전하면서 마티아를 포함한 모두가 한 곳에 있었다고 전한다. 1,14에는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이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묘사는 루가가 마리아가 새로운 교회의 탄생에 있어서의 기도하는 역할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루가는 마리아의 그 다음의 삶에 대해서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의 잉태라는 사실에서 부터 교회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마리아가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보여진다.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것이 마리아의 첫번 응답이었으며, 사도 1,14의 구절은 이 응답이 그때까지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2.5 요한 복음

 

요한 복음서는 약 90년에서 10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신약성서에서 가장 늦은 까닭에 그리스도에 대해 가장 성숙된 반성들을 보여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요한 복음에서 우리는 두 가지 종류로 마리아에 대한 보도들을 나누어 볼 수 있다.

1) 예수의 어머니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

(1) 가나의 혼인 잔치

(2)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2) 마리아에 관한 질문 사항들

(1) 동정잉태

(2) 예수의 형제들

 

요한 1 - 12장은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 발견되는 보도들이다. 13 - 21은 “때가 차서” 즉 예수의 “때”로 이야기되는 가운데 마리아가 등장한다.

① 하느님으로부터의 출생 (1,13)

② 가나의 혼인잔치 (2,1-11)

③ 가파르나움으로 형제들과 함께 떠남 (2,12)

④ 요셉의 아들 (6,42)

⑤ 예수를 믿지 못하는 형제들 (7,1-10)

⑥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7,41-43)

⑦ 음행으로 태어난 자 (8,41)

⑧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마리아 (19,25-27)

 

우선 서론으로서 학자들이 이 복음의 구성에 관한 일치된 견해를 보면,

① 예수의 관한 자료들의 전 복음 단계의 골격

혹자는 전승들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기록된 원천 자료, 특별히 예수의 징표들을 모은 자료라고 말한다. 대부분 학자들은 요한계 공동체에서 취한 것들이라고 본다. 여기에 반대되는 의견은 요한이 공동체 밖에서 구성된 형태를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출처에 대해서 한가지 입장으로서만 설명될 수 없다.

② 복음사가의 작업

사가 자신이 이 복음의 주요 부분을 구성한다고 본다. 전단계의 전승을 넘어서 그 자신의 의견과 사고가 크게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저자가 제배대오의 아들 요한이냐 아니냐는 그렇게 중요한 질문이 못된다.

③ 재편집의 작업

대부분의 학자들은 복음사가가 남겨 논 작품위에 편집자가 첨가하거나 삭제했다는 것이다. 특히 21장은 재편집자의 작업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이 재편집자가 요한의 제자였었는가 하는 문제는 일부학자들만이 인정할 뿐이다. 복음사가의 교정자로서 복음을 대단히 상이한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마지막 복음서의 기록 연대늘 85년 이후로 잡는다. 그러나 이 연대에 관한 것 역시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 못된다.

 

1.2.5.1 요한 1,13

 

요한 복음 1,13에는 예수의 모친에 관한 중요한 언급이 시사되고 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혈통에서나 육욕에서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그리이스어 본은 자녀들이라는 복수형, 라틴어 본에서는 단수형으로 나타난다). 복수형의 입장에서 볼 때, 이 구절은 에수님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 하느님의 자녀로 입양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선물로 자녀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탄생이 이러할진대 그 모범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수형이 원본이라고 할 때, 이것이 동정잉태를 위한 요한의 표현이라고 보는 것은 거리가 있다. 이런 사상은 요한에게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예컨대 3,1-5(니고데모와의 대화)과 1,12-13을 대조해 보면, 육으로부터의 탄생과 하느님에 의한 영의 탄생과의 대조는 부친의 부재에 관한 언급이 될 수 없다. 1,13은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에 관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왜 단수형을 복수형으로 고쳤는가 의문스럽다. 요한의 일반적인 증언을 재해석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복수형이 원본으로서 이 언어가 예수 동정잉태에 관련된 것을 상기시킨다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 1,13에서 예수 동정 잉태에 대해 간접적인 관련조차도 찾아 볼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과 달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으로서, 성자로서 탄생하심, 더 나아가서 예수의 동정잉태와 탄생을 암시하는 구절로도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마태오나 루가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작가의 지식으로부터 요한 1,13은 동정잉태에 관한 구절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세대를 여는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는, 하느님의 육화가 새로은 창조로서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음과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마리아는 예수를 진정한 어머니로서 잉태하였다. 예수는 참으로 그의 아들이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하느님의 종’(루가 1, 38)으로서, 혈통을 따라서가 아니라, 육욕을 따라서가 아니라, 남자의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잉태하고 출생한 것이다”.

 

1.2.5.2 가나의 혼인 잔치 (요한 2,1-12)

 

1) 요한 20, 30에 예수가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예수의 기적에 관한 수집 자료에서 두번의 기적이 전해진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기적(miracle)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징표(sign)라고 표현한다. 두 가지 기적은 2,1-11의 혼인잔치와 4, 46-54의 고관의 아들의 열이 내린 사건이다.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와 그의 모친 사이의 대화다. 예수의 모친은 아들 예수가 기적적인 일을 행할 수 있고, 행하리라는 것을 기대하였다. 기적은 모친의 중재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처럼 마리아는 예수를 믿고 추종하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최초로 예수의 능력을 믿는 분이었다는 것이다. 더우기 이 이적은 예수의 공생활이 시작하지 않았던 때에 이루어졌다. 그 때 아직 예수는 그의 모친과 형제들과 함께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숨겨진 삶, 즉 사적생활은 외경안에서 특히 야고버 복음에서 환상적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전 복음단계의 경향이 예수의 공생활 안에서의 지혜와 능력과 가족 관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마르코 복음에서 보듯이 어느 단계에 가서 예리하게 대립되고 예수가 혈연적 가족 관계와 제자단을 구별하고 가족관계로부터 결별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2) 복음의 해석단계

우리의 주요관심사는 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의 모친을 등장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학자들의 공통의견은 복음사가가 마리아론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론적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성체성사적 의미가 2차적으로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을 여기서 직접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핵심은 “예수의 때”이다. 물은 유대인들에게 음식 먹기전에 손을 씻기 위해 포도주 옆에 놓여 있었다. 포도주는 그 질로 인해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자들에게 만족스럽게 계시되었음을 드러낸다. 즉 제자들은 이미 예수를 메시아로 인식하는 과정중에 있었다는 점을 드러낸다. 여기에 예수는 “너희는 이것보다 더 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1, 50). 제자들은 이미 가나에서 예수의 첫번째 기적으로 그분이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외아들로서의 영광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가난의 이야기는 무엇보다 이러한 그리스도론적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마리아가 그 이적을 행하도록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① “이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구나” (2, 3)

이것이 기적을 요구하는 마리아의 질문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예수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신뢰, 신앙이 있었읍을 보여준다. 혹자는 마리아가 전혀 기적을 예상하지 않고 단순히 가나의 혼인잔치 집의 상황에 대해 정보제공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일상대화로서, 예수와 그 일행을 떠나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예수의 예리한 대답이 결코 그렇게 평범한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즉 예수에게 어떤 부담을 지워주는 말마디였다.

마리아의 이러한 예수에 대한 기대감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준비해 주는 그리스도론적 목적을 지니고 있고, 그것을 1,29에서(요한 세례자의 외침: 보라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그리고 1,49에서(나타나엘의 고백) 볼 수 있다.

 

② 여인이여(부인이여) (2, 4)

아들이 어머니에게 “여인(부인)이여”라고 부르는 전례가 유대인 사회에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학자들은 이 용법의 의미에 대해서 조사해 본 결과 어떤이는 복음안에서 예수가 여인들과 대화할 때 정상적으로 부르던 명칭으로서 별의미가 없다고 한다. 이 칭호는 다시한번 십자가 아래서 사용되어 나타난다. 혹자는 예수의 어머님에 대한 애정의 결핍의 표시라고 한다. 어떻든 예수는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도(4,1),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20, 13) 같은 칭호를 사용한다. 이것은 예수가 당신 어머니의 혈연적 모친에 대한 강조를 의식적으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공관 복음에서 예수에게는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종말론적 가족관계의 형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점과 일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한 복음사가가 2,1-11에서 4번에 걸쳐 “예수의 어머니”라는 표현은 더우기 십자가 아래서 “어머니”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해명할 길이 없다.

또 한가지 해석은 창세기 3장에 나타나는 “여인”으로서 에와의 역할을 뜻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 에와의 역할로서 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 복음 19,25-27과 요한 묵시록 12장을 함게 보아야 할 것이다. 아직도 여기에는 논란이 많다.

우리가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첫째로 에와는 창세기 설화에서 “여인”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 마치 에와가 아담을 유혹하여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게 한 것처럼 마리아가 예수로 하여금 그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유혹하고 있다는 점이 유사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의 영광을 노출시킬 징표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창세기 3,15에는 여인이 희망을 지니게 된다. 뱀과 원수 관계가 되지만, 뱀의 머리를 짓밟게 되리라는 희망을 지니고 있다. 예수의 수난은 요한 12,31; 14, 30에 의하면 세상의 통치자들을 통치하는 분이 된다. 이러한 승리가 마리아에게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 소급되어 나타나면서 여인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많은 교부들은 마리아를 새 에와로 연결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교부들이 그렇게 해석한 것이지 과연 요한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의문스럽다.

또 한가지 문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도 사용된 “여인(부인)”이라는 말을 꼭 마리아에게만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혹자는 마리아는 요한 복음안에서 상당히 의도적 고안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공생활 첫 부분에, 그리고 공생활 마지막 부분으로서 독자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더더우기 복음은 창세기의 언어로 시작되고 있다. 서론 부분안에서 더욱더 창세기의 메아리를 찾아 낼 수 있다는 점이다(1 29: 이튿날, 1,35: 이튿날; 1,43 이튿날; 2,1에서 제 7일의 도식을 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2,1-11안에서 에와와 비교될 수 있는 어떤 모티브를 인식할 수 있도록 심리적으로 준비하고 있음을 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에와와 비교되는 어떤 상징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부학자들은 이러한 상징주의적 의미를 받아들인다. 물론 요한 복음안에서 어떤 상징주의와 표징으로 향하고 있는 상징주의의 한계의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③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읍니다” (2,4)

나의 때란 무엇인가? 공생활의 직무를 수행하는 때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읍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예수는 어머니의 관심사와 자신의 관심사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는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대답으로 이러한 관심사가 다르다는 그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제자들을 보아서 본격적으로 공적 업무에 들어가는데 더이상 가족들의 관심사가 그의 생활에 관건이 될 수 없다는 의미를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그의 공생활 직무에서 여러번 나타난다(7,30; 8,20).

요한은 분명하게 예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직 수난과 죽음에 이르러서 예수의 때가 왔음을, 즉 예수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음(12, 23)을 이야기한다. 2,4은 이 “때”를 마지막 영광의 “때”로 이해한다면 2,4은 “나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어떻든 그런한 언명으로 예수가 자신으로부터 어머니의 관심사가 상이하다는 것에 적용할 때, 영광의 순간이 오면 그의 모친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로 해석할 수 있다. 그처럼 2, 4은 십자가상 아래 제자들의 어머니와의 관계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인 보십시여, 부인의 아들입니다.” 예수의 때는 바로 이 세상으로부터 아버지께로 가는 순간(13, 1)을 의미하고 예수가 지상의 어머니와 분리되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같이 요한 2,3-4에서 우리는 가족관계가 하느님의 뜻을 대치하고 있는 공관복음의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마르 3, 31-35). 사실상 루가 2,41-52의 이야기 속에서 나타나는 소년 예수의 반응과 특별히 병행되어 나타난다. 2,4에서 요한은 가족관계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적이었다는 주제를 전 복음 전승단계에 삽입한 것이고 이 이야기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보다 더 깊은 그리스도론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④ 그분의 어머니는 시중꾼들에게 “그가 무엇이든지 당신들에게 이르는 대로 하시오”하고 말하였다(2,5).

이 구절은 창세기 41,55(파라오는 에집트인들에게 요셉에게 가라. 가서 그가 시키는대로 하라)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 구절은 요한의 논리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 예수는 어머니에게 거절하는 의미의 답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자신의 계획대로 필요한 포도주를 준비하고 있었을까? 왜 예수는 관심사가 다르다고 하면서 모친의 요구에 응낙했을까?

가톨릭 교회는 이 구절을 두고 마리아의 중재 역할의 능력을 끌어낸다. 예수의 첫번째 기적은 어머니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도록 우리를 가르친다.

다른 한편의 극단적인 해석은 예수가 거절한 후에도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모친 마리아가 예수를 믿지 못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자신들의 설명을 찾는다. 끈질기게 요구하는 기도의 태도는 공관복음에서 좋은 본보기로 소개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마태오 15, 21-28(가나안 여인의 믿음), 요한 4, 46-54(고관의 애원으로 그 아들을 고쳐준 가나의 두번째 기적)에서 보듯이 끈질긴 요구와 기도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어떻든 마리아가 좋은 의도를 지니고는 있지만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이어서 니고테모, 사마리아 여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하나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가 기적과 관련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것이 못된다. 요한에게 표징들은 다의적이다. 가끔 기적을 요구하는 것은 신앙의 결핍으로 드러난다(2,8). 또 예수가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위하여 기적이 베풀어졌다(2,23-24). 그런가 하면 이 징표들의 요구는 순진한 신뢰나 이해 부족 어느 한편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징표들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굳은 신앙으로 이끈다(4,47-53; 20,30-31).

마리아는 물이 포도주로 변한 다음에도 여전히 예수와 함께 그 잔치집에 남아 있었다(2,12). 이 사실은 복음 마지막 부분에, 마리아가 아들이 십자가상에 처형되는 순간에도 십자가 아래 남아 있었다(19,25-27)는 사실과 연결되고 있다. 아들 예수와 함께 하신 마리아는 “주께서 너(마리아)와 함께 계신다”는 천사의 축복의 인사를 들은 마리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요한 복음의 구도에 있어서 가나에서의 마리아는 예수의 영광을 보고, 예수를 믿는 제자들과 구별되는 예수를 이해하지 못한 부류의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고, 십자가 아래의 마리아는 더 이상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과 달리 아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부각된다.

 

1.2.5.3 가파르나움에서 형제들과 함께 있는 마리아 (요한 2,12)

 

“그 후에 그분은 당신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파르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날 머무시지는 않았다.”

 

요한은 가나(2,11) - 가파르나움(2,12) - 예루살렘(2,13)의 여행행로를 그려내고 있다.

2세기경 Boldmer papyri of John에는 ‘당신의’라는 소유격이 빠진 채 ‘형제들’이라고만 쓰여 있다. Codex Sinaiticus에는 ‘그의 제자들’이 빠져 있다. 이런 사본에서 보듯이 계속해서 그의 형제들과 그의 제자들간의 대립문제가 반영되어 있음을 본다.

‘예수의 형제’에 관한 구절로서는 이 구절이 요한 복음에서 처음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는 어머니와 제자들만 언급되어 있다.

 

좀 더 등장인물들을 정리해보자. 마리아, 형제들, 제자들.

1) 요한은 예수의 형제들과 더불어 마리아를 연결시키면서 공관복음과의 입장에 동참하고 있다. 요셉의 이름이 빠져 있는 것은 아마도 이미 사망한 까닭일 것이다.

2) 요한은 마리아와 형제들이 제자들과 함께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공관복음과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마리아나 형제들이 예수의 공생활 중에 예수의 추종자였다는 생각은 공관복음과 마찬가지로 어떤 근거도 없다. 7,5에는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의 추종자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이렇듯 예수의 형제들조차도 그분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3) 요한은 예수의 공생활 초기에 가파르나움에서의 마리아를 등장시킴으로서 마르코와 입장을 같이 한다. 마르코는 에수의 모친과 그 형제들이 요르단(마르 1,14)으로부터 갈릴레아로 되돌아 간 후 등장하는 것으로 간략하게 언급되고 있다(3,21; 31-35). 마르 3,20에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표현에서 집은 예수의 본가 였던 것으로 보인다. 3,21은 나자렛으로부터 그 형제들이 붙잡으로 나섰던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31-35은 그분이 오직 제자들에게만 둘러 싸여 있는 분으로 묘사함으로써 예수는 형제들보다 제자들을 더 선호하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 표명은 실제로 그의 형제들이 나자렛에 머무는 동안 그분은 갈릴레아와 유다로 전전하셨다는 것과 일치한다.

 

1.2.5.4 요셉의 아들 (요한 6,42)

 

이 구절은 빵의 기적을 행한 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어떻게 그가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미 마르 6,16에서 논했다. 우리의 관심은 왜 요한이 이 구절을 이곳에 도입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한 복음사가는 또 다른 수준에서의 예수 탄생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대인들이 말하는 6,42은 마치 3,3-5에서 니고데모라는 율법학자가 “어떻게 다 늙은 사람이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서 태어날 수 있겠느냐?”는 질문과 같다. 그러나 제 2의 탄생으로서 물과 영으로부터의 탄생, 또 하늘에서 내려 왔다는 말의 의미는 혈연적 관계의 탄생의 차원을 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요한은 예수가 말씀으로서 육이 되기 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의 아들이심(선재하고 계셨던 로고스)을 다시한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요셉의 아들’이란 구절을 마리아론에서 다루느냐 하는 문제는 해석학사에 있어서 요한사가는 마리아의 예수 동정 잉태를 믿고 있었는지 그 여부를 판가름하는 구절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요한 사가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출신 성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문맥안에서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알아듣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이중적으로 예수의 출신 성분을 잘못 알아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1) 예수가 말하는 하늘로 부터 내려온 분이라는 의미에 대한 이해 부족.

2)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는, 동정잉태에 대한 이해 부족.

어떻든 암시적으로 요한 6,42은 요한 3장의 니고데모처럼 일반적으로는 사실이긴 하지만 더 깊은 차원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촉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유사한 예는 많이 있다. 2,20: ‘40년동안 지은 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만에 다시 지을 수 있다는 말이냐?’, 4,11; ‘당신의 두레박을 갖고 있지 않은데 ‧‧‧ 나에게 물을 줄 수 있단 말인가?’, 8,57: ‘당신은 아직 50세가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인가?’

요한복음사가가 독자들에게 원하는 논점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라고 요구하는 점에서 틀렸다는 것은 방어내지 변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요한은 어디서도 동정잉태에 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선재론 입장의 그리스도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선재론적 그리스도론은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신성을 소유하는 것은 동정잉태와 별개의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요한 6,42은 분명하게 예수를 “요셉의 아들”로 밝히면서 정면으로 루가 복음 1,26-35에 나타나는 동정잉태를 반대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루가 복음은 분명하게 동정잉태를 주장하면서도 예수를 “요셉의 아들”(4,22)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첫째로, “요셉의 아들”이라는 말로써 동정잉태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요한 복음은 마태오나 루가가 알고 있는 동정잉태에 관한 것을 전혀 알고 있다는 기색조차 보이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가 육체적으로 요셉의 아들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인간적인 부모가 예수의 신적 기원을 방해하지 않는다고 이해하고 있다. 6,42의 후반부 “우리가 그의 아버지와 그의 어머니를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구절에서 요셉이 생존해 있었다는 것을 추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적 사실과 요한계 지식과 구별해 야 할 필요가 있다. 요셉은 예수의 공생활 중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가나에서도 십자가 아래에서도, 역사적 추측으로 아마도 요셉이 일찍 사망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다만 요한 복음사가는 유대인들이 예수가 “하늘로부터 내려 온 분”이라는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그 근거가 예수는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아버지, 어머니를 두고 있는 인간이라는 점에 있어서 특별히 아버지 요셉의 사망을 염두해 두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할 수가 있다.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어야 할 점은 요한 복음사가가 마리아와 예수의 가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1.2.5.5 믿지 못하는 예수의 형제들 (요한 7,1-10)

 

이 이야기는 예수를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6,41-52),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아들지 못하여 에수를 떠나려는 제자들(6,60-66), 그러나 예수와 함께 남아 있기를 주장하는 베드로와 11제자들(6,67-69), 배반하게 될 유다(6,70-71)에 이어서 전해지고 있다. 2,12에서는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이 함께 가파르나움에 있었다. 이제는 형제들과 제자들이 구별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보게되는 것은 형제들은 예수의 추종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2,3.5에서는 마리아가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징표를 요구한데 비해서 7,1-10에서는 그의 형제들이 어떤 징표를 요구하고 있다. 예수의 대답은 2,4에서와 마찬가지로 “아직 나의 때가 되지 않았다”(7,6.8)라는 것으로 그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있다. 결국 예수는 어머니의 요구대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고(2,6이하), 또 형제들의 요구에 따라 유다를 향하여 떠났다(7,10이하).

하지만 형제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7,5)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반면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말은 없다. 7장에서 마리아는 불신자의 그룹에 속하는 형제들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나중에 보겠지만 십자가 아래 마리아(19,25-27)는 믿는 자들의 그룹에 속해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리고 바오로 서간이나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의 형제라고 하는 야고버가 교회의 원로로 나타난다. 이 점으로 보아서 적어도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의 공적활동 중에 예수를 추종하지는 않았다고 보여진다.

 

1.2.5.6 메시아는 베틀레헴으로부터 나오지 않느냐? (요한 7,41-43)

 

초막절을 맞아 예수는 유다로 간다. 유대인 가운데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는 “이 사람은 참으로 예언자”(7,40)이라고 고백한다. 또 일부는 갈릴레아에서 왔다는 이유로 다른 편의 의견을 거부한다. 즉 메시아는 베틀레헴에서 출생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도 베틀레헴을 운운하는 것은 6,42에서처럼 ‘천상으로부터 온 분’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다. 요한 복음은 철저하게 예수를 메시아로 간주한다. 그분이 다윗의 후손인지 아닌지, 어디서 태어나셨는지에 관심이 없다. 6,42에서 요한 복음사가가 요셉이 정말 예수의 아버지였는지 아니였는지에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듯이 여기서도 예수가 베틀레헴에서 태어 나셨는지 아닌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초기교회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며, 베틀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한다고 믿었던 것을 알게 된다(마르, 마태, 루가 복음 참조). 초기교회에서 점점 세월이 가면서 다윗의 후손이나, 베틀레헴에서의 탄생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고 있음을 요한 복음에서 보게된다.

이 요한복음을 해석하는 또 다른 방법은 에수의 반대자들의 부정적인 질문으로써 예수가 누구인가를 입증해 주도록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예컨대 4, 12에서 “당신은 우리 조상 야곱보다 위대하시다는 말씀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독자로 하여금 예수가 야곱을 훨씬 능가하는 분임을 시사하는 것처럼, “아니 메시아는 베틀레헴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질문을 던지게 하고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며 베틀레헴에서 출생하신 분이라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요한 복음사가 자신이 예수가 다윗의 후손, 또 베틀레헴에서의 출생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요한 복음사가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은 그러한 역사적 기술들이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 뿐이다. 혹자는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가 베틀레헴에서 출생하였고, 또 동정잉태로 탄생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여기에는 잘못이 있을 수 있다.

첫째로 7,42를 해석하는데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베틀레헴에서의 출생이 예수 동정잉태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가지가 마태오와 루가 복음의 유년기 사화에 나타나는 것이지만, 본래는 두 가지가 따로 따로 분리되어 전승되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즉 동정잉태는 베틀레헴에 대해 어떤 점도 암시해 주지 않고 또 베틀레헴의 탄생 역시 동정잉테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기 때문이다.

 

1.2.5.7 우리는 음행으로 태어나지 않았읍니다 (요한 8,41)

 

예수는 유대인들의 합법적인 사상과 종교에 대해 도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우리말 번역처럼 본문이 단순하지 않다.

 Ἡμείς ἐκ πορνεας οὐ γεγεννμεθα 에서 Ἡμείς는 1인칭 복수 대명사로서 어떤 대조의 음조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음행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너처럼 음행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아니다”라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이 예수의 탄생을 비합법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찾아낸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 구절은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와 상관되는 것이다. 사실 마태오 역시 1,18-20에 보면, 요셉이 마리아를 소박하기로 작정했던 이유가 다분히 마리아가 간음을 통해서 예수를 임신했을 거라는 의심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우선 첫째로 6,41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가 요셉의 아들이요,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알고 있다고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가 합법적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는 그와 반대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사생아로 취급하고 있는 모순을 보기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8,41에서 비합법적 탄생에 대한 약간의 암시가 있다고 한다면 예수 동정 잉태에 대한 요한의 극단적인 도약일 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8,41은 뒷부분과 계속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논쟁의 촛점을 인간적인 부모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아버지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 복음 1,13; 6,42; 7,42; 8,41에서 마리아의 예수 동정잉태를 찾아내려고 하는데,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요한 복음은 마태오나 루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마리아와 예수의 형제들, 또 예수의 아버지 요셉을 다루고 있다. 어쩌면 요한 복음은 예수의 혈연관계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과 구별하는 점에서 마르코의 입장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코와도 다르게 마리아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을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표명하고 있다. 그것은 19, 25-27에 나타나는 바,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의 모습이다.

 

1.2.5.8 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 마리아 (요한 19, 25-27)

 

이 귀절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항변하던 가나의 혼인잔치의 상황과는 달리 예수의 “때”가 이른 순간에 마리아가 예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더더우기 혈연관계의 가족과 제자단을 계속 분리해 오던 요한 복음 전반부와는 달리 마리아와 제자(요한)이 결속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 특이한 점은 공관복음과 달리 마리아가 예수의 수난장면 중심에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처럼 복음사가가 어떤 의미를 추구하기 전에 전 복음 전승 단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전 복음 전승단계로서 공관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십자가 사건에 참여한 여인들을 열거해 볼 수 있다.

마르코 15,40 :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

마태오 27,56 :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배대오의 아들들의 어머니.

루가 23,49 : 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레아 여인들.

요한 19,25-27 : 어머니, 이모, 글레오파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여자 마리아.

이렇게 복음을 비교해보면, 루가복음만을 예외로 친다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요한의 클로파의 아내 마리아는 마태오나 마르코에서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로 보인다. 요한 복음에서의 이모는 마르코의 살로메, 그리고 마태오의 제배데오의 아들들의 어머니로 보인다. 확실하지 않은 단순한 추측이지만, 이렇게 보면 루가가 예수의 친지들과 갈릴레아에서 온 여인들이라는 것이 모두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한 복음에만 등장하는 셈이다. 일단 복음 전 전승단계에서 세 사람의 여인이 고정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마리아의 등장은 요한 복음 사가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공관복음과 또 다른 점은 공관복음에서 이 여인들의 등장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운명하기 이전에 등장하고 있다. 또 공관복음은 이 여인들이 십자가 아래가 아니라 아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바로 십자가 아래다. 또 예수의 대화의 대상이요 촛점은 마리아와 예수가 특별히 사랑한 제자이다. 예수가 특별히 사랑한 제자에 대해서는 부록으로 첨가된 21장에 나타나고, 바로 그가 이 복음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요한 복음사가의 창작일까? 아니면 역사적 정보일까? 역사적 정보일 가능성을 상당히 희박하다. 그 이유는 ;

① 마리아가 예수 수난 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공관복음이 언급하고 있지 않다.

② 마르코 14,50; 마태오 26,56; 요한 16,32에는 예수의 남성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랑받는 제자만이 예외로 남아있다. 이것은 공관복음과 갈등을 빚고 있다.

③ 여성 제자들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 공관복음의 묘사이다.

 

* 복음해석단계

중요한 것은 복음 전 전승단계에 무엇이 있었는가? 또 역사적 출처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복음사가가 주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이다.

첫째로, 사랑받던 제자와 예수의 모친 마리아의 관계다. 우선 십자가상에서 예수의 유언은 사랑받던 제자보다 모친 마리아에 대한 염려가 우선이다. 그래서 제자는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처럼 자신의 집에 모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사가의 주요 관심사는 그것보다는 사랑받던 제자에게 두고 있다.

우리는 사랑받던 제자가 실제로 구체적인 어떤 인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가 과연 요한이었는지, 또는 베드로였는지 상관없이 예수를 따라 다니던 한 제자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가 요한계 공동체 설립자 였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적어도 그 공동체에 있어서 이중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로, 그는 예수의 모범적 제자로, 이상적인 제자로 소개되고 있다. 그는 예수를 버려두지 않았다. 요한 20,8; 21,7에 보면 그는 다른 사람(베드로보다)먼저 무덤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12사도의 대변인 베드로(6,67-68)와 비교하여 자주 특권을 지닌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둘째로, 그는 상당히 중요하고 탁월한 증인이다(19,35; 21,24). 그의 증언이 예수를 이해하는데 유효성을 보증해 준다. 적어도 요한계 공동체 안에서 베드로, 또는 그 밖의 다른 제자들에 뒤지지 않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들을 받아 들일 때, 예수가 그의 모친을 사랑받는 제자에게 맡기는 유언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여인이여, 이사람은 당신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있다. 또 사랑받는 제자의 이름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는 모친을 ‘여인’으로 부르고 있고, 또 따른 여인들에게도 ‘여인’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는 가나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어감을 지닌다. 여기서 새로운 종말론적 가족관계는 혈연적 관계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관계다. 예수가 지상을 떠나 천상의 아버지께로 가는 “예수의 때”에 역할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살아 생전 지상의 활동 가운데 유지되었던 역할이 아니라. 예수의 영광 이후 그리스도교 공동체 시대에 유지되었던 마리아의 역할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요한에게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미 천상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영광의 한부분이요, 성령강림 역시 십자가 사건안에서 미리 참여케 되는 것임을 자주 보게된다.

요한 19,28은 예수는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 완성은 현존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연결 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리아와 사랑받던 제자의 새로운 모자 관계는, 자연적이고 혈연적인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마르 3,31-35; 루가 8,19-21에서 묘사하고 있는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맺어지는 종말론적 가족 관계임을 반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실행하는 사람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자매이다”라는 말씀의 재해석이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가파르나움, 또 그밖에 여러번 등장했던 ‘예수의 형제들’이 여기서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사랑받던 제자가 마리아의 아들이 됨으로써 새로운 차원의 가족관계, 형제관계가 표현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불트만은 요한복음을 상징주의적 표현으로 해석하고 ‘예수의 어머니’는 십자가의 모욕을 극복한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상징하고, ‘사랑받던 제자’는 이방인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니라, 그 기원은 유대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1.2.5.9 요한 묵시록 12장

 

묵시란 영어로 revelation을 의미하고 희랍어 apokalypsis에서 유래한다. 이 의미는 unveiling 신비의 장막이 걷우진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요한계 복음이 상당히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예수를 두고 진리요, 생명이요, 길이요, 착한 목자, 생명의 빵, 샘 솟는 물 등 상징적 표현이 풍부하다. 이제 그 상징적 표현이 요한 묵시록에서는 더욱 첨예화 되어 나타난다. 마리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요한 묵시록 12장에서 찿아 볼 수 있다. 교회는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제 1독서로 바로 묵시록 12장을 택하고 있다.

묵시록은 95년경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파트모스 섬에서 요한이 유배되었을 때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한복음과 언어와 문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요한 계열 작품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작품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격려하고자 하는 데 있다. 박해시대를 배경으로 이단과 거짓 사도의 교리가 유포되어 있었고, 이방인들과 혼합주의 경향을 띤 어려운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을 북돋아 주고자, 신앙의 정도를 걷도록 하고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요한 묵시록과 유사한 묵시적 작품들은 이사야 24-27; 34-35; 다니엘서; 에녹서; 바룩서; 에스드라 4서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첫째로 계시를 꿈이나 현시, 천사의 예고를 통해서 드러낸다. 계시내용은 초자연적인 실재, 미래와 세상 마지막에 일어날 일등이다. 결국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들은 풍부한 상징적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여인, 동물, 괴물, 드럼펫, 숫자(4, 7, 12, 666 등)를 사용한다. 그리고 묵시 문학의 분위기의 특징은 박해나 어려운 상황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곧 도래할 하느님의 구원이 그 중심이 되고 있다. 선과 악의 세력으로 나눈 이원론적 상황을 설정하고 악의 세력이 악마로부터 도움을 얻어 세력을 확장하다가 결국에는 하느님의 결정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악의 세력이 완전히 무너지면서 역사는 끝장나고 새로운 시기, 선의 영원한 승리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희망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많은 점에서 창세기 3,15와 연관을 맺고 있는 묵시록 12장이 마리아와 상관되는 것이냐는 점이다.

우선 요한 묵시록은 예수의 모친에 관하여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12장은 마리아의 역사적 실재적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여기엔 두가지 상징이 나타난다. 여인과 용이다. 용은 옛 뱀이며, 즉 마귀, 사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12,9). 여기서 분명하게 창세기 3,1-5. 15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이 암시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원죄에 대한 반명제가 제시되고 있다. 창세기의 여인은 옛 인간을 대표한다. 뱀에게 유혹당한 여인, 그래서 죽음에 종속된 인간을 의미한다. 묵시록의 여인은 새로운 인간을 표현하고 있다. 죄와 죽음의 이중적인 면모를 지기고 있는 악의 포위로부터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출된 새로운 인간을 상징하고 있다. 이 새로운 인간은 출산의 고통중에 있는 여인으로 표현되기도 한다(12,2). 그의 아들은 쇠로 된 왕홀을 지니고 모든 나라를 다스릴 다윗 가문의 메시아로 묘사되고 있다(12,9; 시편 2,9 참조). 이러한 상징들은 새로운 창조에 있어서 첫번째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있다. 이 아기는 어머니와 함께 용의 추격을 피해 도주한다(12,5.13-16). 여인의 다른 아이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예수를 증언하려고 하는 자들이다(12,17). 여기서 교회를 의미하는 바를 본다. 이 남은 여인의 후손들을 교회와 동일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아는 여인으로 표현되고 있는 상징 영역안에 들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 역시도 이 영역안에 들어가 있다. 즉 새롭게 거룩하게 된 인간으로서 용과 싸우기로 되어 있는 여인의 다른 자손들(12,17)이라는 상징으로.

따라서 우리는 묵시록 12장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의 두가지 위험으로부터 구추된 교회의 본질적 면모를 조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간접적으로 은총으로 말미암아 조건 지워진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조명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첫 아들이 인간성에 속해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인격화된 악의 미움과 공격 속에 놓여 있다. 그의 어머니의 역할에 근거해서 그들은 구원되었다. 땅은 용의 입에서 뺃어낸 불길을 땅이 삼켰다. 그녀는 태양을 입은 여인(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여인)이며 그녀의 발로 달을 밟고 12별의 화관을 쓴 여인으로 소개된다(달이나 별 역시 하느님의 초월성의 영역과 맺고 있는 관계를 표현한다. 화관은 승리와 개선을 상징한다. 12은 12지파로부터 형성된 옛 하느님 백성의 표상이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가 그녀에게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하며, 그녀는 무죄한 교회의 원형으로서 마리아와 관련시켜 볼 수 있다.

 

* 묵시록 12장의 1차적 의미

묵시록 작가의 총체적 목적은 당시 박해시대 상황에서 마지막 승리에 대한 확신을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점이었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다. 12장의 이야기는 악의 세력을 상징하는 용이 여인의 아기를 손아귀에 넣는 것을 어떻게 실패하는지, 또 하느님께서 용의 추적으로부터 여인과 아기를 어떻게 보호하시는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여인은 과연 무엇을 상징하는지 오늘날 극히 일부의 신학자들만이 이 여인에게서 마리아의 모습을 읽어내고 있다. 반대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의 모습을 읽는다.

이 이야기는 메시아의 탄생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지, 메시아의 죽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메시아의 생애나 행위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이 없다.

Adela Collins라는 신학자는 이 여인이 이스라엘, 즉 구약의 하느님의 백성을 인격화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인에 관한 상징을 그리스도교가 개작하여 메시아적 인물인, 아기의 탄생 이후로 신약의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주요 문젯점은 여인을 “하늘에”(12,1)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문젯점이 해결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이론은 우선 이야기의 원천적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본래 이 이야기는 여인과 용의 대결이 아니라 천사 미카엘과 사탄(12, 7-9)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인에게 관련되어 나타나는 “하늘에”라는 귀절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실재를 동시에 그리고 있는 묵시적 의미의 반영으로 설명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의 줄거리를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예언자와 그의 불충실한 아내로 그리고 있는 호세아에서 찿기도 하고 이사야 54장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스라엘(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찿기도 한다. 비록 그리스도교 작가와 그 공동체가 이 탄생을 예수에 관한 것임을 의도했다고 할지라도, 이 이야기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자세산 소묘에 상응해서 골격을 재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산고나 탄생 자체는 구약 성서의 용어안에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메시아의 탄생은 메시아적 구원의 긴급성을 뜻한다. 그 아기가 하느님께 빼앗겨 가듯 그분의 옥좌로 옮겨갔다(12,5)는 것은 그리스도의부활과 승천을 정확하게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단순히 메시아에 대한 보호의 방법으로 묘사된 것이고 마지막에 하느님은 악의 세력이 그의 백성에 승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다.

두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유대적 이미지가 그리스도교적으로 재형성 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메시아가 직접적으로 용을 쳐부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경험안에서 메시아가 비록 왔지만 그 승리가 모두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엔 마지막 승리에 대한 미래적 기대가 있다. 그러므로 작가는 메시아의 탄생의 결과로서 용이 이미 하늘에서 물리쳐졌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확신시켜 주려고 하고 있다.

유대적 사고방식 안에서 원초적 시대와 연결되어 있는 사탄의 멸망은 다시한번 메시아가 하느님으로부터 납치되어 하늘의 옥좌에 올라갔다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흔적을 제 4복음 사가안에서 찿아 볼수 있다 예를들면 요한 복음은 예수 자신의 때(영광의 시간)를 세상의 통치자들이 추방되는 때(요한 12,27-31)로 보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하늘에서의 승리는 용을 쳐부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상에 계속적인 투쟁을 이끈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과 계속 투쟁하는 그리스도교적 경험으로부터 온 통찰력으로 보인다.

이러한 계속적인 투쟁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예수를 증언하기 위해 견디어야 하는 교회가 구약에서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체험을 만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과 교회 양편 모두를 의미하고 있는 여인에 대한 생각은 만일 우리가 작가의 의도 안에서 교회가 이스라엘의 과거체험의 관점에서 다시 살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상 교회의 로마 제국의 종교들과의 적대적 체험은 이스라엘을 거짓 예배로 이끌려고 시도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 4세와 이스라엘의 투쟁을 환기시킨다. 다니엘서에서 ‘한 해하고 두 해에다 반년’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묵시록은 ‘일천 이백 육십일’로 묘사한다. 이 시기는 반그리스도가 발악하는 기간으로서, 하느님이 세상의 권력 아래 악의 세력으로부터 수난받는 것을 허용한다.

메시아를 출산하는 여인, 이스라엘의 개념은 또 다른 후손을 지니는 교회일 수 있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상 안에서의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그리스도교적 개념의 반영이다(여인은 남은 자손들: 12,17). 많은 후손의 모상은 창세기 3,15에서 뱀과 여인 사이의,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의 투쟁의 관점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묵시록 12장을 이런 또는 저런 관점에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여인의 일차적 의미를 이스라엘 또는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 묵시록 12장의 마리아론적 해석

묵시록 12장의 여인은 일차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 2차적으로 마리아에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묵시록의 상징주의의 유연성은 한가지 상징이 두가지 것에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육체화된 인격성의 성서적 개념은 한 개별인간을 위해 한 집단 공동체로 소개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리아를 위한 상징이라고 주장하기 위한 주요 논거는 이 여인이 메시아의 어머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초세기 말엽 그리스도교인들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생각 없이 “메시아의 어머니”에 대해서만 생각했는지 질문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몇가지 난점을 소개하자면,

첫째로 초기 교회 작가들은 묵시록 12장을 마리아론적 의미에서 해석하지 않았다. 사실상 마리아론적 해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4세기경이다(Efiphanius, panarion 78.11; Andrew of Crete, in Apoc 33). 어떻든 현대적 기준을 따라서 묵시록 전체가 16세기 동안에 잘못 이해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작가의 의도라고 보는 견해와 일치하는 부분은 극히 적었다. 비록 과거 해석이 묵시록 12장의 여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작가의 의도를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묵시록 12장에서 마리아론적 강조점은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마리아론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즉 묵시록 12장은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을 소개하고 있는지 또는 단순히 마리아에 대한 이론을 위한 성서적 지지의 측면으로서의 상징적 신학적 적용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점이다.

둘째로 작가는 그 여인을 마리아로 정확하게 동일시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12,9에서 용에 대해서는 악마라고도 또 사탄이라고도 불리웠던 “옛 뱀”이라는 보조 설명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여인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용이라는 표상은 옛 뱀, 사탄을 알아차리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메시아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침묵을 해도 누구나 다 아는 까딹이었을까?하는 점이다.

셋째로, 탄생의 묘사가 베틀레헴에서 발생한 것과 다르다. 묵시록 12장에서는 땅위에 출생하였다는 것이 불분명하고 또 탄생에 이어서 즉시 천상에로 아기가 납치된다. 즉 예수의 공생활에 대한 흔적도 없다. 만일 아기의 천계납치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설명을 어렵게 만든다. 어떻든 이 의견 뒤에 어떤 전제 가정은 메시아의 탄생은 베틀레헴의 장면과 비교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를 베틀레헴에서 낳았다는 생각은 신약 성서 에서만 나타난다(마태 2장; 루가 2장). 그리고 메시아의 탄생이 반드시 베틀레헴에서 이루어져야 했다고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믿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확인하기엔 시간적으로 너무 간격이 벌어져 있다. 오히려 사도 13,33;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낳았노라”(시편 2,7)는 메시아의 탄생을 부활 사건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루가 3,22: “성령이 형체를 취하여 비둘기처럼 당신 위에 내려왔다. 이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울려왔다. ‘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 따라서 묵시록 12장의 여인을 마리아와 관련시켜 볼 때, 마리아가 관련하고 있는 또 다른 탄생장면이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주장은 묵시록이 제 4복음과 그런대로 연결이 있다는 가정을 제시해 준다. 요한 복음은 베틀레헴 에서의 출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언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탄생에 관한 어떤 이미지는 마지막 만찬안에서 발생하는 무엇으로 나타난다. 요한 16,20-21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현재의 슬픔과 미래의 기쁨을 출산하는 여인의 산고와 출생의 기쁨으로 비유하고 있다. 출산의 고통은 예수가 맞이하고 있는 이별과 죽음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출생은 그분의 승리에로의 귀환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또 예수의 죽음, 그 순간 십자가 아래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등장하고 있고, 여기서 다시 “여인”이라고 불리우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죽음과 이어지는 승리는 예수의 “때”를 이루고 있고, 이 “때”는 바로 사탄이 추방되는 순간(요한 12,27-31)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 복음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들이 묵시록 안에서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만일 메시아의 탄생이 예수가 죽은 다음 당신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묵시록 12,5의 아기의 천계납치와 연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여인-에와의 도식을 요한 복음에서 찿아 볼 가능성이 있다. 묵시록 12,9에서 용을 옛 뱀, 사탄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와 병행되는 것으로서 여인-에와의 동기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묵시록 12장을 마리아와 관련된 것으로 보는 데는 많은 이론들이 있다.

① 묵시록과 요한 복음과의 관계가 의문적이다. 물론 어떤 부분은 공통적이지만 그 유사성과 더불어 그만큼의 비유사성도 보아야한다.

② 요한복음안에서 예수가 어머니를 “여인”으로 부르고 있는 장면이 산고의 용어가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지상에서의 죽음에 부여되고 있다. 마리아는 여기서 예수를 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그녀는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가 되고 있다. 이런 모티브는 묵시록에서도 찿아 볼 수 있다. 즉 예수의 어머니가 12,17에 또 다른 많은 그리스도인의 어머니가 되고 있다. 어떻든간에 묵시록 12장에서 여인은 첫째로 메시아를 출산한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후손들의 어머니가 된다(요한 19.25-27에서는 오직 한 사람, 사랑받는 제자의 어머니로서 언급되고 있다).

③ 묵시록 12장의 여인이 에와로서 언급되고 있다면, 또 요한 2,1-11; 19,25-27에서 예수의 모친이 에와로 소개되고 있다면, 에와-마리아의 대비를 목적으로 하는 바 2세기 교회의 작가들이 이러한 대비를 알고 있었는지 증명할 방법이 없다. 오히려 루가 1,38에서 마리아의 순명이 에와의 불순종과 대조된다. 이런 대조는 가능하긴 하지만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여인이 가리키는 상징은 메시아의 모친이고, 그런 점에서 마리아론적 해석이 가능하고, 이러한 마리아론적 해석이나 관심은 후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발전하였다. 결과적으로 요한 복음, 루가 복음과 더불어 묵시록이 성서의 정경으로 자리를 잡을 때 동정녀의 다양한 이미지, 십자가 아래의 여인, 메시아를 출산하는 여인등이 서로를 해석해 주고 설명을 풍부하게 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

 

 

1.2.6 신약성서의 마리아론의 결론

 

1) 성서는 사실상 마리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아주 적다. 양적으로는 그렇다 할지라도 질적으로는 상당히 중요하다.

 

2) 구약성서 이야기의 절정으로서 마리아가 묘사되고 있다. 창세기 3,15: 원시복음의 성취, 이사야 7,14: 엠마누엘의 성취, 미가서 5,1-2: 베틀레헴의 탄생. 즉 이스라엘의 선택사상 안에서 마리아가 메시아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그 정상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 마리아에 대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뒤늦게 이루어졌다. 바오로-마르코-마태오-루가-요한. 따라서 바오로에게서는 마리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고, 마르코는 친마리아적도 아니요, 반마리아적도 아닌 언급들을 보게 된다. 후기에 가셔야 비로서 마리아에 적극적인 묘사와 찬미를 만나게 된다.

 

4) 마리아에 대한 성서 작가들의 관심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론 중심이었고 마리아는 그리스도론을 위한 보조 수단이었다. 다시말해 마리아론은 그리스도론을 향하고 있다. 과거 종교적 감흥으로 마리아에 대한 감상적 묘사는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성서는 반성케하고 있다. 성서는 마리아가 겸양스럽게 뒷전 머물러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중심과 영광을 양보하고 있다는 점을 되새겨야 할 일이다.

 

5)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서는 마리아가 그분의 아들 에수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신 분, 혈연적으로 모자의 관계일 뿐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신앙의 차원에서 가까우신 분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가 의도했던 새로운 종말론적 관게의 가족의 일원임을 보여준다.

 

6) 또 성서는 마리아가 어머니이심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혈연적 관계에서 모친일 뿐 아니라, 요한 19,25-27에서 보여 주는 것처럼, 마지막에 가서는 교회의 어머니, 믿는자들의 어머니임을 부상시키고 있다. 이점은 요한 묵시록에서 여인이 메시아의 어머니 이면서 또한 남은 자들의 어머니로 묘사되고 있는 점과도 상통하고 있다.

 

7) 성서의 마리아론은 교회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녀는 교회 신앙의 모범으로 나타난다(마르 3,31-35; 루가 11,27-28; 1,39-56; 요한 19,25-27).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분이다.

 

8) 마리아는 메시아의 모성을 지니시면서도, 동시에 동정성을 지니신 분(마태 1장, 루가 1장)이다.

 

9) 마리아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다(루가 1,28. 48; 묵시록 12,1: 태양을 입은 여인). 그리스도와 관련을 지니는 한 마리아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중심에 도구로 선택되었고, 그 계획을 성취하는데 역할을 다했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루가 1,28)는 은총을 입은 분임을 말해준다.

 

19세기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이든 성서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해 거의 침묵에 가까울 정도라는 데 일치한다. 그런데 한편은 마리아론을 거부하려는 데 온갖 구실을 찿았고, 또 한편은 마리아론의 발전을 위해 온갖 방법을 찿았다. 중요한 것은 해로운 것을 걷어치우는 일이다. 이러한 개신교와 가톨릭의 문제를 놓고 한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들은 과연 마리아가 미워서 가톨릭을 미워하는가? 가톨릭이 미워서 마리아를 미워하는가? 후자일듯 싶다. 마리아가 가톨릭을 미워하는데 어떤 정당한 구실을 제공할 것으로 간주한 때문이다. 미움 때문에 진리가 왜곡당하는 일은 정당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