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은 2024년 12월 24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 성년 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을 알린다. 이어 12월 29일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 2025년 1월 1일 성모 대성전, 1월 5일 성 바오로 대성전의 성년 문이 열리며 본격적인 희망의 여정에 나서게 된다. 각 지역 교회 역시 2024년 12월 29일 주일에 모든 주교좌·공동 주교좌 대성당에서 장엄 개막미사를 봉헌하며 다 함께 ‘희망의 여정’의 출발을 알린다. 이어 약 1년간 이어지는 희년은 2026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닫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각 지역 교회의 여정은 이보다 앞선 2025년 12월 28일 주일에 끝난다. 교황은 칙서에서 “성년 동안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 은총에 대한 희망의 선포에, 그리고 그 결실을 증거하는 징표들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며 “이 성년 동안 희망의 빛이 모든 이에게 전하는 하느님 사랑의 메시지로 모든 사람을 비추고 교회가 세계 각지에서 이 메시지를 충실히 증언하자”고 당부했다.(정현민 기자)
그리스도 강생의 신비의 신학적 소고
칼· 라 너 / 최 창 무 옮김
칼· 라너 (Karl Rahner)는 1904년 3월 5일 독일의 Freiburg 에서 출생했다. 1922년 그가 19세 되던 해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Munchen-Pullach, Freiburg, 화란의 Viilken-burfer 등지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특히 Heidegger의 제자로서 철학을 연구했으며 신학박사 학위를 얻은 후 1937년에는 오지리의 Innsbruck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마치고 그곳의 부교수로 있었다. 1938년 독일군이 오지리를 점령하면서부터 교편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Wien 과 Bayern 지방에서 사목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8년에 Innsbruck의 신학대학에 정교수로 초청되어 강의해 왔으며 1963년부터 Mtinchen 대학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관과 종교철학 교수로 있게 되었다. 1967년 4월부터는 MiinsLer대학교의 교의신학 교의사 담당 교수로 있다.
그의 큰 입적으로서는지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신학전문가로서, 주교님들의 고문으로서 다대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전환기에 처해 있는 현대 교회를 이론과 실천을 통해 이끌어주고 있는 유수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적 저서로는 Schriften zur Theologie (I--VII) 가 있는데 이 책은 그가 지금까지 하여 온 강의, 강론, 강연 등을 수집해 놓은 것이다. 다음 글은 이 책 제4권의 137-155면의 그리스도 소고 (Zur Thculogic der Mcnsdiwcrduiu;) 에서 발췌 번역한 것이다. <편 집 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이거야말로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의 신비도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으며,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도 이 신비를 이해함으로써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된다. 교회의 신비성도 이러한 신비의 연속이다(우리의 신앙은 모두 이러한 신비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다른 교리보다도 이 신비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해야할 것이다. 왜냐 하면 이 신비가 무궁무진한 데 비해 다른 교리들은 비교적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심오하고 광대한 신비에 대해서 신학 또는 교회의 강론이 지루할 정도로 초라한 형식과 기성의 표현만을 반복하고 있음은 한심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신비를 이해하려는 끊임 없는 노력만이 신앙의 진리를 보존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을 알아야 과거를 안다는 것은 옮은 말이다. 신학이 이 어려운 진리의 해결에 제 구실을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그들의 삶과 죽음을 신앙과 희망과 사랑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으로 위로를 어느 정도 받을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 신자들이「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을 믿고 또 이를 고백할 때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했느냐고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을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새로운 대답을 탐구하는 것이 「그리스도학」(Christologie)의 전 과제이며,이는 아마 끝장을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커다란 문제를 단번에 대답하기란 너무 벅차다고 생각하면서 이 기본적인 문제를 내 놓아 보았다. 그래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줄 수가 없어,그 중 몇 가지 문제만을 추려서 대답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교회의 교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겠다 (이런 태도는 결코 옛 형식이 이 물음에 충분한 해답을 못 주거나,너무 낡아서 설명에 적합하지 않다고 도외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교회나 교회가 믿는 진리들은 그의 고유한 역사 속에 항상 동일하게 남아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교회도 또 교회가 믿는 불변의 신앙의 역사도 없을 것이며,원자시대의 특별한 종교사가 생길 법도 하다. 그러나 불변의 교회가 동일한 역사 안에 남아 있다고 해서 지난 날의 표현이 단순히 최종적인 것은 아니며,이것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며 따라서 정신적 발전과 반성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런 까닭이 새로운 생각을 하는 데 조심성을 가지게 한다. 한 가지의 지식에 집착되어 있지 않고 모든 인식을 종합하고 있는 미지의 세계로 계속해서 옮겨지는 데서 모든 새로운 인식이 이루어지듯 교리에 있어서도 과거의 가르침을 제대로 인식하면서 새로운 것으로 발전할 여지를 주는 것이다. 자기가 알아 들을 수 없는 신비에 대해서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 진정한 인식의 과정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이해되도록 마련된 데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당연하다. 이 신비는 우리가 아직 해득하지 못한 어떤 미지의 부분이 아니고 우리가 알고 또 알게 될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계속 무한한 신비 안에 숨겨져 있는 것을 뜻한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이 짧은 시간에 위의 문장내용을 설명하려면, 미리부터「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이냐」는 점은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이렇게 함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이 되신 Γ하느님의 말씀」이란 주어에 대해 서 어렴풋이밖에 모른다면 진정한 강생 의 신비를 알아 들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 아우구스띠누스 이래 신학계에서는 만일 원하신다면 세 위이신 한 하느님께서 한 분이 강생하실 수 있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과 같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생각을 통해서 볼 때우리가 말한 문구 중의「하느님의 말씀」은 세 위 중의 한 분이라는 것 외에 더 깊은 뜻을 말해주지 못하며「친주성삼 중 한 분이 사람이 되셨다」란 내용밖에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것을 통해 보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 이 신비의 주인공이 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띠누스 이전의 전통을 따라 이 전제조건을 의심하고,먼저 주어를 잘 이해하고 그 다음에 술어부알아들어야 한다면 오히려 더 어려워질 것이다. 만일 하느님의 이 말씀만이 그 의미로나 성질로 보아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게 하시고 시작할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들어 내신 하나의 작품으로서만의 세상은 아니고 세상이 바로 당신의 한 실존으로,즉 세상은 하느님의 뜻에 맞는 본성 또는 이와 함께 주어진 조건으로 마련하셨다는 것도 알아 듣게 될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하느님의「말씀」이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강생의 신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고, 또 반대로 강생의 현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만이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이상의 논술을 피하고,우리가 처 음 이야기한 술어 부분 즉「사람이 되셨다」라는 말만을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 I ]
하느님의 말씀이「사람이」되셨다.「사람이」「됐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여기서「됐다」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사람이」무엇인지를 보기로 하자.
사람이 무엇인지 우리는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이는「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문장 안 에서 사람이란 단어가 가장 이해하기 쉬운 거라고 할 것이다. 바로 우리가 사람이며 매일 매일의 생활을 통해서 또 수천년의 역사 안에 담겨 있는 이야기들,그리고 나와 나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밖에 한 가지 여기에 덧붙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부수적인거나 이해 관계와는 구별되며,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근본바탕이 됨을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문구는 하느님은 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고 이로써 사람이 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무엇이 사람이고 또 무엇이 사람의 본성인지 알아 들었는가? 물론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고 있다. 수시로 과학자들은 이것에 대해서 새로운 발표를 하고 모든 예술들은 그들대로 이 끝없는 문제를 표현하고 해설하려 한다. 그러면 이렇게 이야기함으로써 사람이 무엇인지 정의 되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다. 무엇을 정의한다는 것은 무엇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를 통털어 표현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요약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이것은 그 대상의 전체적 근본적 구성요소까지도 알 수 있는 어떤 물체라야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그 자체가 어떤 한정된 것이라야 정의란 것이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식의 정의가 사실로 가능할 수 있 는지 그 여부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어쨌든 인간에 대해서는 이런 정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인간에 대해서는 정의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도 있다.
예컨대 그를「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간단명료한 정의에 대해 만족을 표시하기 전에「이성적」(rationale) 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알아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결국 문제가 다시 끝없이 이어나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이 누구시냐를 말하려면 그분은 어떠하신 분이시고 무엇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 분은 끝도 없고 이름도 없는 분으로 남으신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그의 본질에 있어서나 존재에 있어서 신비이다. 그는 무한한 신비를 자신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의 본성에 있어서나 그의 시초를 보아 초라한 상태에서 무한한 충족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에게 대해서 관찰할 수 있고 정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결국 붙잡을 수 없는 하느님께로 향 하고 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남지 않는다. 그래서 무한으로 향하고 있는 우리의 본성을 인식할 수 있는 길이란 결국 우리 자신이 이 무한에 의해서 자신이 포착되도록 바치는 길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무한한 완성으로의 지정됐다는,즉 신비를 받아 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는 바로 우리의 실존의 성질을 결정지어 준다. 무엇에 대해 우리가 수락하고 거절하는 그 대상 자체가 신비이니, 결국 우리가 살고 행하는 것에 초자연성 자체가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우리 안에 하느님의「현화」(顔化)를 결정 짓는 데 있어서 이 양자 도 다 신비이다. 이럴 때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신비라는 것,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어떤 미지 (未知)의 것으로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렇게 알아듣지 않는 자들은 신비와 미지를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비란 아직 알아내지 못한 어떤 부분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의 모든 인식을 가능케 하고 이 인식된 것 안에서 알아 들을 수 없는 침묵 중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비란 찰나적이거나 어떻게 처리해버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특징이며 우리에게 완성으로서 약속된 것으로, 하느님을 뵈옵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아직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초자연으로 향해 가는 데 있어 우리의 현실조건은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에 잠겨서 바라보는 신비는 피조물에게 있어 이미 환희이며 신비로서 받아 들인 신비는 영원한 사랑의 불길 속에 타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가시덤불과도 같다(출애급 3. 1-2 참조).
이야기가 빗나간 것 같다. 이것으로 우리는 문제점에 조금 가까이 왔다고 본다. 만일 이런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하느님께서 인간의 이런 본성을 당신의 본성으로 취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명확해졌다고 본다. 무한한 신비로 채워지도록 만들어진 이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은 이것이 곧 인간 본성의 정의 전체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본성으로 취하셨으나 그의 능력으로 보아 항상 이 사실로 향해가고 있어 아직 실현되지 않는 이 특성은 우연히 노력해보는 하나의 취미가 아니고 자기를 무한에 내맡김으로 자신의 완성을 도모할 수 있고 계속적으로 이 형용할 수 없는 신비에로 자신을 몰입시키는 것이 그의 본래의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남김 없이 자신의 본성을 완전히 바쳐 하느님의 것이 되도록 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고 또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바친다는 행위는 물론 첫째로 창조주의 사업이다. 왜냐 하면 창조주께서는 우리 본성을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창조해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본성과 이 본성에서 인간의 행위와의 관계를 보면 전자는 후자를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고 그 본성은 행동을 통해서 계속 유지되고 있다. 이 점에 있어 인간은 하급동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자기의 행동을 본질에 맞게 행하도록 불리움을 받았으며 본성에 맞는 행 동으로 자신을 완성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본 결과 우연의 개념만으로는 넉넉히 설명해 낼 수 없는 정도로 본질과 정신적 자아완성 이 본체론적 의미에서 합일되고 있다. 이상의 말을 바로 알아 들었다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원으로서 정신적 피조물인 인간에게 하신 일은 어떤 수동적으로 남아 있을「물체」(物體)가 아니고「본성」(本性)은 완성할「actus」 로서다.
왜냐 하면 하느님께서는 항상 현존하시는 분이므로 이는 계속 자기의 작 용을 확대시키고 자신의 완성에로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창조된 힘이다(actus). 이러한 상호관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지성적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창조해 주신 그 힘으로 자신을 바친다라는 표현밖에 달리할 수가 없다. 피조물이 자기의 행위로 하느님을 배신할 때 자기를 송두리째 다 잊어버린다는 것도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 보면 더 깊이 깨달을 수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죄나 잘못만이 벌을 받아야지 왜 변화될 수 없는 본성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건지 알아 들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인성 안에서 자신을 희생으로 바쳤다는 그 정도는 바로 하느님께서 Γ로고스」(Logos) 안에 받아 들인 인간「본성」의 근본적 행위에 상응하는 것으로 그 본성(本性)이 하느님께 취해졌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바쳤다는 것 과 같다. 이런 의미로 봐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 실존의 유일한 최상의 완성이라 볼 수 있다. 왜냐 하면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완전히 바쳤기 때문이다.
제 2위이신 하느님의「말씀」이 인성을 취하심으로 한 그리스도가 되신 데 있어 인성 안에 있는「순응성」(順應性 Potentia obedientiae)이 무엇인지를 신학적으로 바로 알아 들은 사람은 이 순응성이 인간의 다른 어떠한 특성과 같이 하나의 능력이 아니고 바로 인간의 본성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이렇게 알아 듣고 나면 스콜라학파적 신학으로도 이 본성을 이상과 같이 한 능력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정당할 것이고 가능한 것이다. 이로써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해 보고자 노력해 봤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 안에 천주성과 인성의 일치가 계시로써가 아니고도 이해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도 아니고 모든 인간에게 다 이 가능성이 주어졌다거나 또는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초자연으로써 이전 (移轉) 가능의 우리 능력이 유한성으로 제한을 받게 되며 이도 증명될 수 없는 가설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초월성이 신비 앞에 자신을 내 맡겨야 하는 태도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신에서 당위성을 연역(演禪)해낼 수가 없으며 따라서 구체적 인식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진 것으로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동시에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현실화되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그 뿐더러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우리의 초라한 피창조성과 죄악과 위험성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실현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성이 그 본질상 개방적이고 수용적(受容的)이며,초자연성이 없는 어떤 제한적인 것과는 달리 인성만이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 속에서 그 포착될 수 없는 의미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것이다.
이로써 결국 인간에게는 이에 대해 선택의 자유는 없을 것이다. 결국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닌 빈 병과 같은 느낌과 자기 자신이 충족할 수 없고 무한한 것을 통해서 더욱 자신의 초라함을 깊이 깨달으며 결국 하느님의 넘치는 풍부성에 자신이 뛰어 들어야만 만족함이 있게 된 다는 것도 알게 된다. 만일 이런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면 결국 자기 본질의 완성은 이 처지대로 이러한 어떤 것이 하느님 안에 존재한다고 믿으며 흠숭하고 이것에로 계속 향하고 있어야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대답해야 될 분이 자기의 대답을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러한 사실이 일어났다는 것은 그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보다는 이러한 것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게 된 그분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떻게 어디서 언제 했는지를 알아 내는 질문이 더 큰 문제이다. 만일 누가 이런 영원한 신비를 자신에게 완전히 이룩한 분인가 하고 개끗한 마음으로 찾는다면 결국 나자렛 사람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즉 예수님 안에서 이 신비가 이루어지고 있고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우리가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증거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때문이다. 왜냐 하면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신비는 성부께서만 아시고 이를 통해서 자기만이 성부를 알고 계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2025. 12. 25일 새벽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 앞마당에서 '아기 예수'가 말 구유에 안치돼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오해가 없기 위해서 몇 가지 유의할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다. 이상에서 말한 그리스도론은 결코 천주성과 인성 (人性) 이「로고스」(Logos) 안에 완전히 일치되어 있다는 본체론적 그리스도론에 대당되는 의식론적 그리스도론 (BewuBtseins Christologie)은 아니라 는 점이다. 오히려 이러한 것이 진정으로 본체론적 형이상학의 관점이며 전통적 그리스도론의 총체적 표현에 비해 본체론적으로 표현을시도해 본것이며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론을 더 낫게 이해해보기 위한 것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 가 르친 표현들이 어떤 신화적 인상을 주 지 않게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천상에서 이를 성취할 수 없어 인간의 탈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으로 마치 하나의「가현」(假現)으로만 생각해버릴 위험성이라든지 강생의 신비를 역사적으로 단 한 번만 있던 기적으로서가 아니고 인간이 있는 곳에 항상「신인성 」(神ㅅ性)이 있어 마치 신성이 지상에 충만하다는 신화적 생각들을 말한다. 그리고 보면 이런 생각 외에 다음 사항을 간과해서는 안되니 하느님의 인성은 모든 인간 하나 하나를 위해 있으며 그래서 이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시지 인간성을 천주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는 (그리스도의 인성) 모든 인성에게 주어진 하느님을 뵈올 은혜 외에 그 자체로서 하느님께는 그보다 더도 덜도 가깝게 느껴볼 수 없었다고 봐야 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우리 가롤릭 신학 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천주성과 인성의 합일에 있어 그리스도의 인성을「로고스」(Logos) 안에 천주화되었어야 한다고 믿고, 이는 본체론적으로나,수의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는 그리스도의 단일성에서 나오는 필연적 결론이기도 하다, 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자신이「성화」(聖化)하고 천주화한다. 그러나 이는 그의 정도와 내밀성에 있어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이루어졌지만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의화」(義化)의 은혜도 결국 같은 것이다.
[ II ]
이제 우리가 좀 더 깊이 깨닫고자 하던 문구는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되셨다」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되었다」 는 말을 좀 깊이 새겨 보자. 하느님께서 정말 어떤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신을 어떤 역사적 존재로 보고 있는 모든 범신론이나 이와 유사한 철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지금까지 긍정적 대답을 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이나 진정한 유신론적 철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대답하기 난처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을 불변적 실재로서 항상「계시는」분이시며 영원으로부터 절대적 완전과 충만 안에 계시어 아무런 필요를 모르고 변화가 없으신 분으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나 생성의 부담을 하나의 은혜이며 특성으로 알아 들으려는 우리에게는 홀로 무한히 완전하신 분으로서 어떤 의의도 없고 공허로만 돌아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인간 영신과 그 본성의 변화에도 의의를 주실 수 있는 신을 고백하고 싶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변적이며 영원하신 하느님을 고백한다는 것은 단순히 철학적 욕구뿐이 아니고 신앙 개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말씀이 사람이「되셨다」는 진리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 진리를 승복하게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인이다. 이 점에 있어 전통적 신학이나 철학이 난처해지고 주저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은 무엇으로 되고 변화하고 하는 것은 피조물 본연의 현상이며 「Logos」(말씀)의 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해서 모든 것은 명확하게 구분된 것 같다. 즉「로고스」는 자신의 영원한 불변성을 지니면서 피창조적 특성인 생성 즉 모든 변화와 역사와 그 안에 든 모든 노고를 위하셨으며 그리고도 당신의 불변적 천주성을 가지고 계시어 서로 혼동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나「로고스」가 사람이 되심으로 해서 우리의 시간은 영원의 시간이,우리의 죽음은 불멸의 하느님의 죽음이 되기까지 인간적 모든 역사를 당신 자신의 역사로 만드셨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로 남아 있다. 이러므로 해서 얼른 보아 신의 개념들이 적합하지 않아 서로 모순되는 것 같은 즉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본성이) 두 실재의 공통술어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피조물의 운명이 바로 하느님의「로고스」 자신의 운명이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며 따라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겠느냐 하고 새로운 질문이 대두되게 된다. 하느님의 불변성이 예수님 안에서 역사가 이루어지고 변화가 되어 바로 이런 당신 자신의 변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 들어야 할 것인가가 문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강생의 신비를 그대로 솔직히 고백하고 바라본다면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은 절대로 불변적인 하느님께서 직접 다른 것 안에서 변화하신다는 뜻에서 하느님께서도 무엇이 되실 수 있다고, 「로고스」의 인성을 바라보고 그 안에 이루어진 어떤 변화를 자신의 변화로 보면서도 하느님과 창조물을 구별짓는 이 세상에서 일어난 일로만 국한시켜 보고자 할 수 있다. 그러나 세밀히 따져보면 이 변화도 바로 하느님의 변화란 것 을 말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는 천주성과 인성을 혼합치 말라고 하였다고 해서 그 자체를 다 해결지어 준 것 도 아니다. 그래서 여기 문제를 놓고 볼 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이 인간에게 어떤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인데 이것을「변화」란 표현을 쓰기가 안됐다고 생각하여 회피하거 나 사용하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이것을 변화라고 부른다면 하느님께서는 자체는 불변적이시고 다른 것 안에서는 변화되실 수 있다고 (즉 사람이 되실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며,이 표현을 하느님의 불변성에 모순이 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와 반대로 다른 것으로 되어 버렸다고 보아도 안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본체론이 신앙의 가르침에서 배워야 하지 이 신비를 학술적으로 처리해버리려 들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믿고 있는 성삼 교리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한 하느님이심을 고백한다고 성삼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고 이 삼위일체는 우리가 신앙으로 인식할 수 있으되 우리가 성삼위는 어떠해야 된다고 말할 수 없듯이 하느님의 불변성을 고백하면서도 강생의 신비를 부정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를 가지고 전체를 규정해 버리려 한 다면 안된다. 만일 이것을 이해해 보려는 구실로 유한한 세계에 국한해서 설명을 해 버린다면 본래의 신비성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는 유한한 것 안에 는 엄격한 의미로서의 신비가 존재할 수 없으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한 지성이 구상해 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강생의 신비도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어야 하며 따라서 그 자체도 불변적이시면서 타에게도 어떤 것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불변화는 하느님의 유일성과 같이 변증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이신 하느님을 믿으며 동시에 삼위의 하느님이심을 믿듯이, 불변적 천주성을 믿으며 강생의 신비를 알고 있게 된다. 따라서 이 변증적 성격을 그대로 두고 생각해야지 여기에 어떤 선후관계를 두려고 해서는 안되고 실제로 둘 수도 없다. 마치 우리가 삼위일체설에서 하느님의 유일성만이 하느님을 가장 완전히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니고 세 위 분이시므로 더욱 절대적 완전으로알아듣게 되듯이,강생의 신비를 통해 불변화만이 하느님의 속성이 아니고 그의 불변성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무엇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다. 즉 그 분 자신이 인간 안에 들어 오셨다. 이는 어떤 부정에서 오 는 것이라고 생각할 성질이 아니고 최고의 완전을 뜻해 주기만 한다. 그렇다고 이런 표현을 헤겔의 철학으로 돌릴 필요도 없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이 헤겔을 배위야만 된다면 불행한 일일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는 본체론의 정상에 이르렀다고 보겠다. 이로써 우리 는 순수이론적으로만 추리하는 본체론으로서는 생각도 못할 지식을 갖게 되었으며 모든 표현의 시작이며 원천인 경지에 달했다. 이 절대자는 무한한 자유를 영위하며 이를 보존하면서도 다른 것 즉 유한한 것이 직접 될 수 있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을 나타내 보이시며「자신을 내어버리심」 (Selbstentaußerung) 으로써 자기 아닌 다른 것을 자기의 실존으로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근본적 현상에서「받아들인다」는 개념은 없다. 왜냐 하면 받아들인다는 사실은 이미 받아들이는 자를 전제하고 있고 따라서 받아들이는 자만을 생각하게 된다. 이러면 강생의 신비에 있어 불변적 하느님의 속성만을 생각하게 되고 불변성과 강생의 상호 변증성이 죽고 만다. 신앙으로 고백하는 이 기본 현상은 하느님의「당신을 내어버리심」(Entaußlerung) 이 안에서 그 분은 자신을 내주시어 다른 어떤 것이 되시는 것이다. 이러므로 타(他) 안에로 유출된 것이 되며 이것은 본래의 것과는 달라진 것이다. 불변적이며 무한히 완전하신 분으로서 사랑의 충만 때문에 빈 곳을 채우려는데서 자신을 밖으로 들어내실 때 이 새로 나타난 것은 자기 자신의 새로운 실재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자신과 구별되는 어떤 것이 됨으로 이것을 자신 안에 간직하며 이「타」는 하느님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주의 뜻에 의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실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남에게 내주는 자신의 완전으로 당신을 떠나서 밖으로 나오시나 이것은 바로 자신이시다. 이와 같이 자신이 역사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당위성이 아니다)을 성서는 사랑이란 훌륭한 표현을 쓰고 있다. 사랑이란 인식되지만 정의할 수 없는 것이며 그의 넘치는 자유는 남용이라고 할만큼 자신에게 불필요한 어떤 것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하느님이 자신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으면서 어떤 다른 자기의 현실을 작출(作出)할 수 있게 되는 창조주라는 점과 제 2의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이유가 서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다 더 깊은 진리에 부닥치게 된다.즉 피조물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즉 하느님께서 개입되실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역사의 질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서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을 자기 자신을 발표할 수 있도록 일정한 규식에 의해서 만드시며 이는그렇게 밖에 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침묵을 지키신다면 여기에는 다시 이 침묵을 들을 귀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다른 이가 아니 고 바로 하느님의「로고스」(말씀)가 사람이 되셨고 이 분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충만하심에 내재하시는「말씀」이 당신 밖으로 발음되는「말씀」도 되신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결론이라 하겠다. 그래서 단순히 다른 어떤 것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느님의 위격 안에 있어 차별없이 지적하게 되는 경우 창조는 본체론적으로 제 1차의 것이며 그 이유는 시작이 없으시며 자신이 자신 안에 말씀하실 때 하느님 안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하느님께서 공허로 즉 당신 밖으로 발음하실 때 이것은 당신 안에 들은「말씀」을 내 보내는 것이며 이것은 삼위 중 임의로 어떤 한 분이 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참작할 때 하느님의「로 고스」(말씀)가 사람이「되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 잘 알아 들을 수 있다. 물론 사람이 다 이 「로고스」는 아니다(마치 작은 것은 그보다 더 큰 것이 없이도 있을 수 있는 것과 같이).「로고스」가 사람이 안 되셨을지라도 사람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은 것이 항상 큰 것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은 비열하고 비논리적인 무산계급주의자가 아니라면 모두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이 Γ로고스」가 사람이 되었다면 이 인성은 미리부터 있었던 어떤 것이 아닐 것이고「로고스」가 (자신을 내어 버리시는 때) 비로소 그의 본성과 실존이 생겨 났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내어버리심으로 나타내 보이시는 분이다. 왜냐 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버리실 때만 당신은 나타내 보이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당신의 사랑의 엄위하심을 감추시고 보통 인간의 상을 보이 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들어내신 것과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의 인성은 하느님을 표현해 주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내용이 없는 순수한 가현 밖에 안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로고스」가 사람이 된 것이 아닌 다른 모든 인간들은 다 이와 같다는 것은 아니다. 이유는 사람이란 점,「로고스」에게나 우리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은 조금도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말씀으로서 「로고스」에게도 있고 우리에게는 없는「그것」은 우리와 그와의 무한한 차이를 만든다. 그러나 그의 현실은 우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우리 가 구원되었다는 즉 하느님의 자유로 개방되었다는 내용으로서는 우리가 어떻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둘러 있는 허무에도 사랑으로써 당신을 내 놓으실 때 이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따라서 스스로 내 주시는 가능성의 기적을 보여 주고 계신다. 이런 뜻에서 사랑은 알아 들을 수 없는 자명이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말하고 나면 그의 가장 크고 알아 듣기 쉬운 신비에까지 인간을 이끌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인간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사랑으로 허무에 내 놓으실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축소된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사람이 되신「로고스」라고 한다. 하느님의 이 축소판「요약」이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인자」와 사람들이 있는데 그도 결국 「인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 아니시기를 원하실 때 다른 것은 될 수 없고 바로 사람이 되신다. 이것 밖에 우리는 다른 것을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함으로 우리 인간의 일상생활까지 다 이야기 한 것은 아니고 단지 알아들을 수 없는 신 비에로 인도한 것 뿐이다. 이 신비는 바로 그분이시다. 하느님께서 직접 사람이시고 또 이 사실이 영원히 남아 있다면 이 때문에 신학이란 결국 인류학으로 남아 있게 된다. 또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 너무 적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신에 대해서도 적게 생각하게 된 것이라고 인간에게 말한다면,그러면서도 이 하느님께서 영원한 신비 안에 남아 계신다면,결국 인간이란 영원으로부터 표현된 하느님의 신비일 것이며 영원 히 그 분의 신비에 참여하고 모든 잠시적인 것이 지나간 후에도 사랑 안에 없어지지 않을 신비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 사랑은 우리가 받아 들여야만 하는 행복이며 이 신비를 알아들을 수 없어 다른 방도로 인간을 알아듣게 하려고 해도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 유한한 것도 결국 무한하신 하느님의 말씀의 유한성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을 허락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론은 인류학의 마지막이며 동시에 시작이다. 그리고 이 인류학이 근본적으로 성취될 때 그리스도론이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신학이 될 것이다. 그 신학이 되는 이 유로서는 (첫째로) 하느님께서 당신이 아닌 죄스러움과 공허 속에 당신의「말씀」을 우리의 살로서 불어 넣으셨기 때문이며, 그 다음은 우리가 사람에게서 그리스도를 또 하느님을 발견한다는 것을 도외시 않고 신앙으로써 학문을 하게 되는 때문이다. 구약 성경을 따라 창 조주께서는 하늘에, 우리는 땅 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고백하고 있는 하느님은 우리가 있는 바로 여기에도 똑 같이 계시고 또 여기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해야 된다. 하느님께서 무한하시다고 하더라도 이 표현이 여기 말고 다른 어떤 곳에 또 계시다는 말이 아니고 유한을 당신의 무한하심에 포함하고 계시어 무한에 대당(對當)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유한이 무한으로 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즉 직접 유한한 것의 일부분이 되심으로 유한한 것 전체가 무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관문을 만들기 위해,아니 자기 자신을 이것의 출구이며 문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이며 이 보잘것없는 것들의 실존이 바로 하느님 자신이 되기 위해서이다.「로고스」(Logos)께서 사람이 되시면서 인성을 받아들이셨고 받아들이심으로 결국 당신 자신을 내어 보이셨으며 이 안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가장 깊이 표현되었다. 즉 피조물의 가장 멀고도 가까운 순응성(順應性)과 능동성 (能動性)을 서로 역비례로서가 아니고 정비례로 똑같이 가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가장 완전한 인간이시며,그의 인성이 가장 능동적이며 자유로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가 완전한 자유와 능동성을 가지시게 된 것은 자신을 완전히 내어 버리심으로써만 바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자체 아무런 의미도 없이 공허나 안개 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현시 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하느님은 직접 실존하시며 이 실존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표현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을 하느님의 현시로만 보거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도구로만 보는 견해는 열교임을 알아낼 수 있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론이 아니며 열교로서). 교회가 배척해 온 도케띠스무스,아뽈리나리스무스,모노텔레스무스, 모노피시 띠스무스 등도 인정할 수 없다. 오늘에는 이것을 신화적으로 해석해서 배척하 고 있다. 여기서 덧붙여 말할 것은 정통적 신앙개조나 신자들의 표현에서 온 결함 때문에 간접적으로 신화적 해석을 할 수도 있어 반신화운동에 부닥치는 경우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 자신이 변화되실 수 없으시니까 인간들이 알아 들을 수 있게 어떤 인간적 실재로 나타나셨다고 생각한다. 즉 한 진정한 인간으로서 자유로운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단지 사람이 그 뒤에 숨어서 줄로써 인형을 놀리고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은 꼭둑각시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물론 그것은 신화이지 교회의 교의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리책에 있는 내용을 이런 식으로 알아듣거나 설명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을「비신화화」 (非神話化 Entmythologiesierung)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자신도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하는 소리가 아닌지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양자는 다 바른 가르침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네들 생각대로 해석하는 데 불과하다. 이들은 비신화화한다는 이유로써 자기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해 주는 것이며 진정한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내용을 마치 교회의 가르침의 표현으로 알고 교회 내에 타인들의 숨겨진 열교적 요소를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자들이 하느님이 강생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말할 때 가현설이나「유일성설」(唯一性說)의 색채를 띠운 표현도 있으니 이를 좀 너그럽게 보아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자기들이 교회의 정통 교리를 잘못 알아 들어서 정통적 그리스도론의 표현을 배척하고 있는 이들도 있어 이들도 실제로는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자기의 완성을 이루는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가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실제로 믿으며 하느님께서 그 안에 결정적이며 취소하실 수 없는 전체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서 그를 인간 적 노예지위와 유한한 실존에서 해방시키시고 죄와 죽음에 버려진 존재를 구원시키셨다고 믿는다면 내용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예수께 대한 신앙과 같은 것을 고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추리를 해서 이해하였든지 안하였든지「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데 대해서 믿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바르고 교회 사회학적으로 표현된 교리와 동일한 생각과 신앙을 거부한 것은 아니라고 봐야 한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인이 아닌 프로테스탄트로서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구원의 진리를 믿으려 는 자가 바른 그리스도론을 부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실존의 완성에 있어 아무 것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실제로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누가 예수께서 궁극적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즉 예수님의 죽음에서 하느님은 마지막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자기의 생사를 완전히 그분께 맡긴다면,그는 동시에 교회가 고백하는 하느님의 아들이심도 믿어야 한다. 물론 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 개념과 논리적 방법에 성공은 없을지라도,그보다 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분이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이라는 점을 몰랐으면서도 그의 생명과 죽음 안에 자신을 맡기어 행복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피조물의 자유란 그가 의식했든 못했든 자기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에서 미리 내다볼 수 없는 결과를 향한 모험이다. 인간의 자유란 어디까지나 보고 듣고 아는 즉 규정되고 한정된 것에 기반을 두지 않고는 행동이 불가능한 능력이다. 전연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란 아직 말을 해 보지 않은 것,표현되지 않은 것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인간의 자유가 작용할 수 없다. 하느님 과 그리스도의 은총은 모든 선택의 실재 안에 본질과 같이 신비롭게 들어 있어, 하느님이나 그리스도와 전연 상관 없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있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누가 구체적인 계시진리를 듣기 이전에도 자기의 실재 즉 자기의 인간성을 무언의 인내로 (물론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즉 신뢰와 희망과 사랑으로 신비의 존재를 인정하며 받아 들이므로, 다시 말해서 영원한 사랑을 감싸고 있는 신비로 또 죽음과 삶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순응한다면 그는 측량할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와「말씀이 사람이 되신」데 대해 의식적으로는 아니지만 함축적이며 간접적으로라도 이 신비를 수긍한 것이며,이는 그리스도에게 순응한 것이 된다. 왜냐 하면 누가 깊은 곳으로 뛰어 내린다고 생각해 볼 때 자기가 재 보았거나 생각한 것 만큼만 빠지는 것이 아니고 그곳의 깊이 대로 빠지게 되는 것과 같다· 이는 물론 퍽 어려운 일이고 사실로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나지만 누가 자기의 인간성 전체를 그대로 다 받아 들인다면 그는「인자」(ㅅ子)를 받아들인 것이니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 인간을 받아들인 때문이다. 성경에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을 완전히 지킨 자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것의 참된 이유는 하느님께서 바로 우리 이웃이 되신 때문이고 이 한 이웃 안에서, 항상 가장 가깝게 있는 자 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자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 자체가 하나의 신비다. 아니 인간은 바로 신비다. 그 이유는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신비에 자신을 조금이라도 개방했대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 사람을 당신의 신비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느님께서 허무에로 당신 자신을 내 보이시기를 원하실 수 있었으며 당신 자신의 말씀을 허무와 침묵의 황야에 알리시기를 원하셨으며,또 이렇게 원하셨다고 전제하고 나면 내적으로 의식한 말씀이 아니면 어떻게 이것이 발음(發音)되지 않고 다른 것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자기가 말씀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만을 받아들이실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면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진정 신비라고 할 수 있는가? 신비란 것은 전연 기대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은 것으로 기막히게 황홀하면서 때로는 자명한 일이다. (결국은 신비만이 추상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주면서 반대로 추상적인 것은 신비를 알아듣게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절대적 신비이며 동시에 자명한 신비이다. 이 특이하면서 역사적으로 우발적이고 우연하게 나타난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이 자명하면서도 절대적인 신비가 바로 나자렛의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사실을 알아봐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비록 알아 들을 수는 없으나 다른 모든 일을 감당하도록 해 주시는 하느님과 가까이 있기를 바란다면, 어떤 정신적인 욕구에서가 아니라 육신을 가지시고 이 지상의 한 오두막집에서 사시던 나자렛의 예수님을 빼고선 다른 어느 곳에서도 이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분 위에는 하느님의 별이 빛나고 있었으며,그의 곁에서만 인간은 용기를 가질 수 있었으며, 무릎을 꿇고서 환희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말씀」은 살이 되셨고,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역자? 서울 명동 주교좌본당 보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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