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서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의 사순 시기와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부터 성토요일까지를 포함한다. 교회는 성주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하고 죽음으로써 이룩한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기념한다.
성주간은 가톨릭교회 전례 주년 전체의 정점을 이루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가장 경건한 때로 주님 부활 대축일을 온전히 맞이하도록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성주간 전례의 특징과 의미를 소개한다.
■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는 죽음에 처할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사건을 기념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죽음이 극복될 것을 미리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예루살렘인 교회의 왕으로 오실 것을 기념하는 것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의 본질적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이날 예식에서 신자들은 축복받은 성지(聖枝)를 들고 성당으로 이동하는 행렬을 하고 수난 복음을 봉독한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은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마태 21,9)를 외치며 환영한다. 그러나 군중들의 환성은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외침으로 돌변한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극적으로 대비되는 두 가지 주제를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날 전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신비를 묵상하고 그분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
■ 성주간 월~목요일
성주간 월~수요일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사건들로 구성되면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분위기가 계속된다.
성주간 목요일 오전에는 각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제들은 사제품을 받을 때 했던 사제직에 대한 서약을 공적으로 새롭게 하는 ‘사제 서약 갱신’을 한다.
축성 성유는 세례와 견진, 성품성사 때 그리고 성당 축성 때에 사용하고 병자 성유는 병자성사를 위해서, 예비 신자 성유는 입교 예식 중 예비 신자에게 도유할 때 사용한다.
■ 주님 만찬 성목요일
성목요일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를 봉헌한다. 재의 수요일에 시작한 사순 시기는 주님 만찬 미사 직전에 끝나게 된다. 가톨릭 전례의 정점인 파스카 성삼일은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로부터 시작한다. 주님 만찬 미사의 특징은 대영광송을 부를 때 종을 친 뒤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에서 대영광송을 부를 때까지 종을 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따르기를 결심하며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말씀 전례 끝에는 발씻김 예식을 거행한다.
주님 만찬 미사가 끝나면 성체를 수난 감실로 옮기고 제대포를 벗기며 제대 중앙의 십자가를 치우거나 천으로 가린다. 신자들은 수난 감실에 모신 성체 앞에서 조배하며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한다.
■ 주님 수난 성금요일, 성토요일
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로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성찬 전례를 거행하지 않고, 말씀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이어지는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한다. 이날 주님의 죽음을 묵상하며 금육과 단식을 한다. 신자들은 성금요일 전례에 참여하며 주님 수난 사건을 생생하게 상기하고 예수님께서 수난하고 죽었듯이 우리도 우리의 욕망과 이기심에서 죽어야지만 비로소 예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토요일에는 전통적으로 고해성사와 병자 도유를 제외하고 모든 성사를 거행하지 않는다. 임종자를 위한 노자성체(路資聖體
·Viaticum)는 행해질 수 있다.
■ 파스카 성야
파스카 성야는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된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밤을 기념하는 이날 예식은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전례, 성찬 전례로 구성된다. 빛의 예식에서 인류가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됐음을 기억하고, 말씀 전례에서는
부활 신비가 보여 주는 구원사를 담고 있는 구약과 신약을 읽는다. 신약 독서 후에는 사순 시기 동안 절제했던 알렐루야를 노래한다. 파스카 성야에서 세례 예식을 거행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을 맞이해 교회의 새 지체들이 태어나는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다. 마지막 성찬 전례는 그리스도 부활의 정점을 이루며, 마침 예식 때 주례자는 신자들에게 성대한 축복을 베푼다. 박지순 기자 beatles@catimes.kr
[1] 주님 수난 성지 주일-파스카 신비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손희송 주교(서울대교구 총대리)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함께 성(聖)주간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의 정점인 이 기간에 교회는 성삼일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를 장엄하게 거행합니다. ‘파스카’는 ‘지나가다’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지나서’ 부활에 이르신 사건을 파스카 신비라고 합니다. 파스카 신비에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사랑의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분’(마태 5,45)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선포하신 바를 행동으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의인만이 아니라 죄인까지도 품어주십니다. 율법에 따라 벌을 받아 마땅한 죄인에게도 선뜻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봄바람이 얼음을 녹이듯이 따뜻한 자비로써 죄인의 마음이 변화되어 회개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모두가 형제자매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이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예수님의 기적에는 열광하였지만, 회개의 요구에는 미지근하게 반응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을 무시한다고 비난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죄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달리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결집하였고, 이들은 예수님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쓴 잔을 안깁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쓴 잔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십니다. 제1독서의 말씀처럼 어떤 저항이나 원망도 없이 묵묵히 모든 모욕과 매질을 받아들이십니다. 마치 ‘너희들의 그 못된 증오와 폭력은 내게서 끝내도록 하라’는 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십자가상에서는 자신을 못 박아 죽이는 이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하십니다.(루카 23,34) 예수님은 당신 백성이 거부한 하느님의 깊은 사랑, 죄인까지도 품는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제2독서), 하느님 사랑의 심연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예수님이 죽음을 넘어 부활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매해 전례를 통해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건너감’에 함께하기 위해, 곧 자신을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피하고 영광만을 추구하려는 이들, 반대로 세상의 고통만 확대해서 보고 부활을 희망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며 기쁨을 누리는 신앙인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2]주님 수난 성지 주일 - 지치지 맙시다, 주님 사랑이 있으니…
제1독서 이사 50,4-7 / 제2독서 필리 2,6-11 / 복음 마태 26,14-27,66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원장
은돈 서른 닢에 예수님 배반한 유다 신앙생활마저 저울질하는 우리 모습 굳센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하고
삶 봉헌하며 십자가 사랑 채워가길
발행일2023-04-02 [제3337호, 19면]
시린 바람 속에서 꽃을 피운 매화에 감탄한 게 어제 같은데, 어느새 앙상한 가지에 돋아난 여린 잎이 눈에 익숙합니다. 봄이네요.
글머리가 풀리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다 봄볕이 녹아든 뒤뜰을 걸었습니다. 새삼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음악을 짓는 모든 예술인에게 부러움이 솟구쳤습니다. 그들의 재주가 샘났습니다. 정확히 표현해서 질투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래전, 선배 신부님과 동행했던 피정 길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지루함을 라디오를 들으며 달래던 때, “가사가 꼭 우리 마음 같네”라는 신부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솔직히 저는 신부님의 뜬금없는 고백이 ‘어른스럽지 못한 것’ 같고 사제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약간 충격이었달까요? 가사가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정말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었습니다. “약속해요….” 핑클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후 저에게 변화가 생겼습니다. 될 수 있으면 클래식을 듣고 될 수 있으면 미술관을 찾으며 ‘애써서’ 고급문화인이 되려던 제 허세를 벗을 수 있었달까요? 부담 없이 유행가를 들었고 가사에 ‘심쿵’했으며,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듣는 연속극 대사를 마음에 품기도 했습니다. 진정한 품위는 이해함이며 너른 포용이며 하나로 어우러짐임을 다시 느꼈습니다. 오늘 약간의 민망함을 밀치고 제 마음에 꽂힌 드라마 주제가를 베껴 전합니다.
어떤 힘든 일도/ 막다른 길도 내겐 없어/ … 그대를 만나서 살아갈 의미를 찾아/ … 너를 보는 게 지친 하루에 내게 얼마나 힘이 된다는 걸 넌 알까/ 마음에 새겨진 그대가 있기에/ 몇 번이고 넘어지고 부서진다 해도 / … 모든 게 두려워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그때/ 그대가 저 멀리 내게 미소 지으며 다가와/ 내 손을 잡아 줘/ 일이 있어도 그 어떤 모습이라 해도 알아볼 게/ 널 찾을게/ … 곁에 있을게 가까운 곳에 내가 언제나….
사순 시기가 시작될 무렵, 우연히 들려 온 노랫말, “너를 보는 게 지친 하루에 내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순간, 세상살이에 지쳐 지내는 우리, 우리보다 더 지치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향한 고백 같았습니다. 예수님의 쓰라린 상처를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혼탁한 세상을 향하여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토로하시는 주님의 음성 같았습니다. 소소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감사와 사랑과 믿음으로 채워 지내는 것이 예수님의 고통을 위로해 드린다는 걸 새삼 깨달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우리 모두가 힘든 주님 사랑과 고뇌와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해 드릴 때,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라는 귀한 칭찬을 들을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심의 고통을 살펴 살아가는 우리 모습 모습이야말로 힘든 주님을 응원해드릴 수 있다는 진리를 유행가 가사를 통해서 다시 새긴 겁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사람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향해서 목청을 높여 환호했지만 이내 돌변하는 모습에서 제 모습을 봅니다. 무엇보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야비함마저 낯설지 않아서, 간이 철렁합니다. 주님을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난 수석 사제들을 찾아가서 주님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는 그 초라한 모습도, 주님의 몸값을 흥정했던 비굴한 행색도, 그리고 겨우 ‘은 서른 닢’을 받아 주머니를 채웠던 모습마저도 흉보기가 어렵습니다. 양심에 찔리는 겁니다. 갖은 변덕으로 주님을 지치게 만드는 제 허접함과 마주한 것입니다.
‘은 서른 닢’은 한 세겔입니다. 당시 시세로 따져서 4데나리온의 가치를 지녔습니다.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나흘 동안의 막노동의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믿음도 사랑도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계량하는 우리에게 말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봉사활동에서 마저 곧잘 마음에 생채기를 얻으니 말입니다. 지금. 주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주님의 값어치는 얼마입니까?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행동이 우왕좌왕하는 우리가 주님을 지치게 합니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라고 하소연하게 만듭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주님이야말로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한 보물이라는 고백이 헛것임이 명백하니 말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바쳤던 ‘호산나’라는 환호가 겉치레에 불과하다는 게 들통이 났으니 말입니다. 주님께 힘이 되어 드리기는커녕 더더더 큰 짐으로 얹혀서 뻔뻔하게 살아가니 말입니다.
제발 유행가 가사만큼만이라도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사랑이 절절하면 좋겠습니다. 지치고 피곤한 삶이지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보다 더 지쳐 계신 주님을 기억해드리면 좋겠습니다. 온 세상을 밝히는 화사한 햇살에서 주님 사랑을 느끼고 주님의 빛에 의지하여 살아갈 힘을 얻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두렵고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 곁에 계신 주님의 손을 잡고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온 힘을 쏟아 채워주고 계시니, 어떤 힘든 일도 막다른 길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믿음을 살아내면, 정말로 좋겠습니다. 우리의 굳센 믿음과 온전한 의탁으로 주님을 위로해 드릴 수 있고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음을 깨달아 “너를 보는 게” 지친 하루에 큰 힘이 된다는 응답을 듣게 된다면 너무너무 좋겠습니다.
사순, 우리를 위해서 고통당하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지친 하루를 봉헌하며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 힘을 냅시다. 복된 사순, 우리 모두가 주님께 “뛰어난 이름”으로 기억되는 은혜인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3]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예수님께서는 복음서에서 자세히 전해 주지 않지만 나자렛에서 또 제자들과 여러 차례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도 예고하셨지만 주님께서는 당신 죽음이 기다리는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시키시지요.
그리고 마지막 만찬을 정다운 제자들과 예루살렘 한 다락방에서 나누시고 바로 수난과 죽음의 시간을 준비하십니다. 고통과 실망 앞에 가려진 부활의 이야기도 사흘 후에 전개 될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에서 성지주일은 주님께서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그분의 수난사를 시작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벳파게에 이르셨을 때에 제자들을 앞서 동네 맞은편으로 보냅니다.
그곳에 가서 암나귀와 함께 그 곁에 있는 새끼 나귀를 풀어 가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마태오는 이 광경이 바로 예언서에서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짐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즈카 9,9; 이사 62,11)라고 예언한 대목을 회상하며 인용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암나귀와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그 위에 겉옷을 펴 놓고 스승을 그 위에 모십니다.
그러나 수많은 군중이 주님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의 겉옷을 또 어떤 이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 위에 깔고 주님을 뒤따르며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시편 118,25ㄱ.26)라고 외칩니다.
온 도성이 술렁거립니다. 그들은 나귀에 타고 오시는 분이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 예언자이신 예수님’이라고 서로 떠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같은 대목을 전하면서도 제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신 뒤에, 이 일이 예수님을 두고 성경에 기록되고 또 사람들이 그분께 그대로 해 드렸다는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요한 12,16)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파스카 축제의 마지막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십니다. 사랑의 빵과 포도주로 당신의 살과 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사도들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교회는 이천년 동안 주님께서 남기신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분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세 번 째 노래 (이사 50,4-11)에서 주님과 함께 하며 수난을 겪는 하느님의 종에 대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종은 양의 모습으로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6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의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시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시편저자가 노래했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시편 22,2)라고 노래했던 그 심정이 되십니다.(마태 27,46)
이어서 시편저자가 “제 옷을 저희끼리 나눠 가지고, 제 속옷 놓고는 제비를 뽑나이다.”(19절)라고 노래한 그대로 군인들은 십자가 아래에서 주님의 속옷을 놓고 제비를 뽑아 가집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다른 옷은 ‘네 몫으로 나누어 저마다 한 몫씩 차지했는데 속옷은 솔기가 없이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기 때문에 찢지 않고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차지하였다’(요한 19,23-24)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27,51-52)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백인대장과 주님의 십자가를 지켜보던 이들은 지진과 여러 일들을 보고 몹시 놀라며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54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을 회상하며 주님의 무덤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이 무덤을 지키게 합니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으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특히 교회의 전례의 성삼일인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을 지내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함께 참여하도록 합시다.
갈보리에서는 두 가지 사고 방식이 충돌했습니다. 복음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말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말과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후자는 계속 "자신을 구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가 하느님의 그리스도, 그의 택함받은 자라면 자신을 구원하라"(루카 23,35)고 말했다. 군인들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37절). 마침내, 범죄자 중 한 사람이 그들의 말을 되풀이하여 그에게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너 자신을 구원하라"(39절). 자신을 구하십시오. 몸조심하세요.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복지, 성공, 자신의 이익, 즉 소유물, 권력, 이미지. 자신을 구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세상의 끊임없는 후렴구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맞서는 것이 하나님의 사고 방식입니다. "너 자신을 구하라"는 만트라는 자신을 바치는 구세주의 말씀과 충돌한다. 그의 대적들처럼 예수 오늘 복음에서 세 번 말씀하십니다(34.43.46 참조). 그러나 그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선한 도둑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특히 그의 말 중 하나는 "자신을 구하십시오"라는 만트라와 관련하여 차이점을 표시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34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묵상합시다. 그는 언제 그 말을 했습니까? 매우 특정한 순간 : 십자가에 못 박히는 동안 손톱이 손목과 발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겪으셨을 극심한 고통을 상상해 보도록 합시다. 그 순간, 그분의 수난의 가장 타오르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을 찌르고 있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셨다. 그럴 때면 우리는 비명을 지르며 우리의 모든 분노와 고통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말했다: 아버지, 그들을 용서하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다른 순교자들과는 달리(2마예수 7,18-19 참조), 사형 집행자들을 꾸짖거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형벌을 위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분은 행악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굴욕의 곱찜질에 매달린 그의 베푸는 태도는 용서하는 태도가 되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우리가 행동으로 고통을 줄 때, 하나님은 고난을 겪으시지만 오직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 봅시다. 그의 고통스러운 상처에서, 우리의 죄악의 못으로 인한 피의 흐름에서 용서가 솟아납니다. 십자가에 달리예수 바라보며 더 큰 말씀은 결코 없었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십자가 위의 예수 바라보며 우리가 이보다 더 온화하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읍시다. 십자가 위의 예수 바라보며 우리가 이보다 더 사랑스러운 포옹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이해합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시다: "예수 감사합니다: 당신은 저를 사랑하시며 항상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제가 제 자신을 사랑하고 용서하기 어려운 때에도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예수 자신이 가장 요구하는 계명,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삶에서 우리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기분을 상하게하거나 실망시킨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화나게 한 사람,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나쁜 모범을 보인 사람.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되돌아 보는 데 얼마나 자주 시간을 소비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 삶 자체와 역사가 우리에게 가한 상처를 생각하고 핥습니다. 오늘날 예수 우리에게 거기에 머물지 말고 반응하고 악과 슬픔의 악순환을 끊으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으로 우리 삶의 못에 반응하고, 용서의 포옹으로 증오의 뷔페에 반응합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우리는 스승을 따르는가, 아니면 반격하려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따릅니까?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는지 시험해 보기 원한다면,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느끼는 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방식으로 반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당신이 내 친구라면 나는 당신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주면 내가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정심과 자비를 보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아들이나 딸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선과 악, 친구와 원수로 나누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행하는 사람들이며, 우리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우리 모두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이며, 그분이 껴안고 용서하기를 바라시는 자녀들입니다. 결혼 잔치의 비유에서 신랑의 아버지가 종들을 거리로 보내 "백인, 흑인, 선과 악, 건강한 사람, 병든 사람, 모든 사람을 초대하십시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마태 22,9-10 참조). 예수 대한 사랑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받고 용서받는 동일한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이것을 "계속 말"했습니다(34절 참조).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그의 모든 시간을 그의 입술과 그의 마음에 이 말씀과 함께 십자가에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서도 이해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용서를 구하는 데 지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결코 용서하는 일에 지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한동안 우리를 참으시다가 우리가 유혹을 받는 것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누가복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예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루카 1,77 참조). 결국 성모님은 우리에게 분명한 명령을 주셨는데, 바로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루카 24,47 참조).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데 결코 지치지 맙시다: 우리 사제들, 그것을 집행하는 것;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에 관해서는 결코 피곤하지 않도록 합시다.
아버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한 가지 더 관찰해 봅시다. 예수 그들이 용서 받기를 요청했을뿐만 아니라 그 이유를 언급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그의 살인을 계획했고, 그의 체포와 재판을 조직했으며, 이제 그들은 그의 죽음을 목격하기 위해 갈보리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러한 폭력적인 사람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이 예수 우리와 관련하여 행동하는 방식입니다 : 그는 자신을 우리의 옹호자로 삼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적하십니다. 그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무지입니다.
우리가 폭력에 의존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해, 심지어 우리의 형제 자매인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에 있는 이유를 잊어버리고 결국 무의미한 잔인한 행위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쟁의 어리석음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서 그리스도는 또 다른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스도는 남편과 아들들의 부당한 죽음을 슬퍼하는 어머니들 안에서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는 아이들을 팔에 안고 폭탄에서 도망치는 난민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홀로 남겨진 노인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미래를 박탈당한 젊은이들; 형제 자매를 죽이기 위해 파견 된 군인들에게. 그리스도는 오늘 그곳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아버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많은 사람들이이 특별한 말을 들었지만 한 사람 만 응답했습니다. 그는 예수 옆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범죄자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비가 그에게 마지막 희망을 불러일으켜 "예수 나를 기억하라"(루카 23,42)는 말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잊었지만, 너희는 너희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계속 생각한다. 그러면 너와 함께 나를위한 자리도 있습니다." 착한 도둑은 자신의 삶이 끝나갈 때 하나님을 영접했고, 이렇게 그의 삶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지옥에서 그는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이것은 사형 선고를받은 사람의 마지막 요청을 역사상 최초의 시성으로 바꾼 하나님의 용서의 경이로움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번 주 동안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확신에 매립시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모든 거리를 연결하실 수 있으며, 모든 애통을 춤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시 30,12 참조). 예수에는 항상 모든 사람을위한 장소가 있다는 확신. 그리스도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라면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우리는 항상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분의 용서와 함께 부활절을 향해 여행합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중보하시기 때문입니다(히브 7,25 참조). 폭력적이고 고통 받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분은 결코 지치지 않고 반복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 침묵 속에서, 우리 마음 속에서 똑같이 행하고, 반복합시다: 아버지, 그들이 하는 일을 그들이 알지 못함이니 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CELEBRAZIONE DELLA DOMENICA DELLE PALME DELLA PASSIONE DEL SIGNORE
OMELIA DEL SANTO PADRE FRANCESCO
Piazza
San Pietro Domenica, 10 aprile 2022
Sul Calvario, due modi di pensare si sono scontrati. Nel Vangelo, le parole di Gesù crocifisso sono in netto contrasto con le parole di coloro che lo hanno crocifisso. Questi ultimi continuano a dire: "Salva te stesso". I capi del popolo dicevano: «Salva se stesso, se è il Cristo di Dio, il suo eletto» (Lc 23,35). I soldati dicevano la stessa cosa: «Se sei il re dei Giudei, salva te stesso» (v. 37). Alla fine, uno dei criminali, facendo eco alle loro parole, gli disse: "Non sei tu il Cristo? Salva te stesso» (v. 39). Salva te stesso. Prendersi cura di te stesso. Pensa a te stesso. Non degli altri, ma solo del tuo benessere, del tuo successo, dei tuoi interessi: dei tuoi beni, del tuo potere, della tua immagine. Salva te stesso. Questo è il ritornello costante del mondo che ha crocifisso il Signore. Pensiamoci.
Contro questa mentalità egocentrica c'è il modo di pensare di Dio. Il mantra "salva te stesso" si scontra con le parole del Salvatore che offre se stesso. Come i suoi avversari, Gesù parla tre volte nel Vangelo di oggi (cfr vv. 34.43.46). Eppure non pretendeva nulla per sé; anzi, non si è nemmeno difeso o giustificato. Pregò il Padre e offrì misericordia al buon ladrone. Una delle sue parole, in particolare, ha segnato la differenza rispetto al mantra "salva te stesso". Disse: «Padre, perdona loro» (v. 34).
Riflettiamo sulle parole del Signore. Quando le ha pronunciate? In un momento ben preciso: mentre veniva crocifisso, mentre sentiva i chiodi trafiggergli i polsi e i piedi. Proviamo ad immaginare il dolore lancinante che ha sofferto. In quel momento, in mezzo al dolore fisico più bruciante della sua passione, Cristo chiese perdono per coloro che lo trafiggevano. In momenti come quelli, urlavamo e davamo sfogo a tutta la nostra rabbia e sofferenza. Ma Gesù disse: Padre, perdona loro.
A differenza degli altri martiri di cui parla la Bibbia (cfr 2 Mac 7,18-19), Gesù non rimproverò i suoi carnefici né minacciò punizioni in nome di Dio; piuttosto, pregava per i malfattori. Attaccato alla fessura dell'umiliazione, il suo atteggiamento di donazione divenne quello del perdono.
Fratelli e sorelle, Dio fa la stessa cosa con noi. Quando causiamo sofferenza con le nostre azioni, Dio soffre ma ha un solo desiderio: perdonarci. Per rendercene conto, guardiamo il Signore crocifisso. È dalle sue dolorose ferite, dai rivoli di sangue causati dai chiodi della nostra peccaminosità che sgorga il perdono. Guardiamo a Gesù sulla croce e rendiamoci conto che non sono mai state pronunciate parole più grandi: Padre, perdona. Guardiamo a Gesù sulla croce e rendiamoci conto che non siamo mai stati guardati con uno sguardo più mite e compassionevole. Guardiamo a Gesù sulla croce e comprendiamo che non abbiamo mai ricevuto un abbraccio più amorevole. Guardiamo al Signore crocifisso e diciamo: "Grazie, Gesù: tu mi ami e sempre mi perdoni, anche in quei momenti in cui faccio fatica ad amare e perdonare me stesso".
Lì, mentre veniva crocifisso, al culmine del suo dolore, Gesù stesso obbedì al più esigente dei suoi comandamenti: che amiamo i nostri nemici. Pensiamo a qualcuno che, nella nostra vita, ci ha ferito, offeso o deluso; Qualcuno che ci ha fatto arrabbiare, che non ci ha capito o che ha dato un cattivo esempio. Quante volte passiamo il tempo a guardare indietro a coloro che ci hanno fatto del male! Quante volte ripensiamo e lecchiamo le ferite che altre persone, la vita stessa e la storia ci hanno inflitto. Oggi Gesù ci insegna a non restarci, ma a reagire, a spezzare il circolo vizioso del male e del dolore. Reagire ai chiodi della nostra vita con amore, ai buffet dell'odio con l'abbraccio del perdono. Come discepoli di Gesù, seguiamo il Maestro o seguiamo il nostro desiderio di contrattaccare? Questa è una domanda che dobbiamo porci. Seguiamo il Maestro o no?
Se vogliamo verificare se apparteniamo veramente a Cristo, guardiamo a come ci comportiamo verso coloro che ci hanno ferito. Il Signore ci chiede di rispondere non come ci sentiamo, o come fanno tutti gli altri, ma nel modo in cui Egli agisce verso di noi. Ci chiede di uscire dalla mentalità che dice: "Ti amerò se mi ami; Sarò tuo amico se tu sarai mio amico; Ti aiuterò se tu aiuti me". Piuttosto, dobbiamo mostrare compassione e misericordia a tutti, perché Dio vede un figlio o una figlia in ogni persona. Egli non ci separa in buoni e cattivi, amici e nemici. Noi siamo quelli che fanno questo, e facciamo soffrire Dio. Per lui, tutti noi siamo i suoi figli prediletti, figli che Egli desidera abbracciare e perdonare. Proprio come nella parabola delle nozze, dove il padre dello sposo manda i suoi servi per le strade e dice: "Invita tutti: bianchi, neri, buoni e cattivi, tutti, sani, malati, tutti..." (cfr Mt 22,9-10). L'amore di Gesù è per tutti; Tutti hanno lo stesso privilegio: quello di essere amati e perdonati.
Padre, perdonali perché non sanno quello che fanno. Secondo il Vangelo, Gesù «continuava a dirlo» (cfr v. 34). Non lo disse una volta per tutte mentre veniva inchiodato alla croce; Invece, ha trascorso tutto il suo tempo sulla croce con queste parole sulle labbra e nel cuore. Dio non si stanca mai di perdonare. Dobbiamo capirlo, non solo nella nostra mente, ma anche nei nostri cuori. Dio non si stanca mai di perdonare. Siamo noi che ci stanchiamo di chiedere perdono. Ma non si stanca mai di perdonare. Non ci sopporta per un po' e poi cambia idea, come siamo tentati di fare. Gesù – così ci insegna il Vangelo di Luca – è venuto nel mondo per portarci il perdono dei nostri peccati (cfr Lc 1,77). Alla fine, ci ha dato un comando chiaro: annunciare a tutti il perdono dei peccati nel suo nome (cfr Lc 24,47). Non stanchiamoci mai di annunciare il perdono di Dio: noi sacerdoti, di amministrarlo; tutti i cristiani, di riceverla e testimoniarla. Non stanchiamoci mai quando si tratta del perdono di Dio.
Padre, perdonali perché non sanno quello che fanno. Osserviamo ancora una cosa. Gesù non solo ha chiesto loro di essere perdonati, ma ha anche menzionato il motivo: perché non sanno quello che fanno. Com'è possibile? Coloro che lo crocifissero avevano premeditato la sua uccisione, organizzato il suo arresto e i processi, e ora erano sul Calvario per assistere alla sua morte. Eppure Cristo giustifica quegli uomini violenti dicendo: non sanno. Così Gesù agisce nei nostri confronti: si fa nostro avvocato. Egli non si pone contro di noi, ma per noi e contro i nostri peccati. Le sue parole ci fanno pensare: perché non sanno. È l'ignoranza del cuore, che tutti noi abbiamo come peccatori.
Quando ricorriamo alla violenza, dimostriamo di non sapere più nulla di Dio, che è nostro Padre, e nemmeno degli altri, che sono nostri fratelli e sorelle. Perdiamo di vista il motivo per cui siamo nel mondo e finiamo persino per commettere atti insensati di crudeltà. Lo vediamo nella follia della guerra, dove Cristo viene crocifisso ancora una volta. Cristo è ancora una volta inchiodato alla croce nelle madri che piangono l'ingiusta morte di mariti e figli. È crocifisso nei rifugiati che fuggono dalle bombe con i bambini in braccio. Viene crocifisso negli anziani lasciati soli a morire; nei giovani privi di un futuro; in soldati inviati a uccidere i loro fratelli e sorelle. Cristo viene crocifisso lì, oggi.
Padre, perdonali perché non sanno quello che fanno. Molte persone hanno sentito queste parole straordinarie, ma solo una persona ha risposto. Era un criminale, crocifisso accanto a Gesù. Possiamo immaginare che la misericordia di Cristo abbia suscitato in lui un'ultima speranza e lo abbia portato a pronunciare queste parole: «Gesù, ricordati di me» (Lc 23,42). Come a dire: "Tutti gli altri si sono dimenticati di me, eppure tu continui a pensare a coloro che ti crocifiggono. Con te, poi, c'è posto anche per me". Il buon ladrone accettò Dio mentre la sua vita stava finendo, e in questo modo la sua vita ricominciava. Nell'inferno di questo mondo vide aprirsi il cielo: «Oggi sarai con me in Paradiso» (v. 43). Questa è la meraviglia del perdono di Dio, che ha trasformato l'ultima richiesta di un condannato a morte nella prima canonizzazione della storia.
Fratelli e sorelle, nel corso di questa settimana, aggrappiamoci alla certezza che Dio può perdonare ogni peccato. Perdona tutti. Egli può colmare ogni distanza e trasformare ogni lutto in danza (cfr Sal 30,12). La certezza che con Gesù c'è sempre posto per tutti. Che con Cristo le cose non sono mai finite. Che con lui, non è mai troppo tardi. Con Dio, possiamo sempre tornare in vita. Farsi coraggio! Camminiamo verso la Pasqua con il suo perdono. Cristo infatti intercede costantemente per noi presso il Padre (cfr Eb 7,25). Guardando il nostro mondo violento e tormentato, non si stanca di ripetere: Padre, perdona loro perché non sanno quello che fanno. Facciamo ora lo stesso, nel silenzio, nei nostri cuori, e ripetiamo: Padre, perdona loro perché non sanno quello che fan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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