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帛書)

[사순 시기]2023년2월22일 재의수요일부터

나뭇잎숨결 2023. 2. 19. 10:06

[1]사순절이란?http://blog.daum.net/m-deresa/1238979

[2] 기사1(가톨릭신문)
[3] 기사2(평화신문)
[4]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2023 사순 메시지 
[5] 2023년 사순절 프란치스코 교황 메시지-사순절 참회와 시노드 여정


 

[2]기사1

 

 

2020년 2월 26일 뉴욕 맬번 루르드의 성모 성당에서 열린 학생들을 위한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한 소녀가 재를 받고 있다. 사제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창세 3,19 참조)을 상기시키며 신자들의 머리에 재를 얹는다. 재를 받는 신자들은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속죄할 것을 다짐한다.CNS 자료사진


2월 22일은 사순 시기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다. 사순 시기는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시기다. 동시에 주님의 부활을 합당한 자세로 맞이하기 위해 죄를 씻고 내면을 정화하는 은혜로운 때다. 사순 시기를 여는 재의 수요일. 이날의 의미는 무엇이며 재의 예식을 거행하는 전례에는 어떤 뜻이 담겼을까.

재의 수요일 기원과 의미

성경에서 재(灰)는 참회를 상징한다. 구약에서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자 백성들과 임금이 단식을 선포하며 잿더미 위에 앉았다.(요나 3,4 참조) 신약에서 예수님도 죄인들에게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마태 11,21)하는 일에 대해 언급했다.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께 죄를 지으면 머리에 재를 뒤집어쓴 후 예를 갖춰 참회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이를 받아들여 사순 제1주일 전 수요일, 머리에 재를 바르는 일을 참회 예식으로 거행했다. 여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이름이 비롯됐다. 성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재의 수요일을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사순 시기 첫날로 제정했고, 복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모든 신자가 재의 예식에 참여토록 권고했다.

재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다. 재는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오게 된 ‘슬픔’을 상징한다. 물질이 타고 남은 잔재물인 재. 이는 인간이 지은 죄의 잔재로서, 지은 죄에 대한 ‘보속’ 행위도 기억하게 한다. ‘열정’을 뜻하기도 한다. 불로 단련 받아 자신을 모두 태워버린 재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항한 열정으로 자신을 온전히 태워야 한다는 의미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남은 재에는 불순물이 없다. 재를 머리에 얹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빚었던 처음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게 정화돼야 한다는 의미도 함축한다.

성 바오로 6세 교황 때, 교회는 재의 수요일에 금식과 금육을 실천하도록 규정했다. 신자들은 이날 두 가지를 동시에 지켜야 한다. 금식은 하루 한 끼 식사만 거르면 된다. 금육재는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금식재는 만 18세부터 만 60세 전날까지 지킨다. 금식과 금육은 절제와 극기로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아울러 단식과 금육으로 절약한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봉헌하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실천 과제도 내포한다.


 
재의 예식에 사용되는 재는 전년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신자들에게 나눠준 나뭇가지를 다시 거둬들여 태워 마련한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회개 이끄는 전례 구성

각 본당은 전년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신자들에게 나눠준 나뭇가지(聖枝)를 다시 거둬들여 태우고 재의 예식에 쓸 재를 마련한다. 사제는 재를 축복하고 성수를 뿌린 뒤, 신자들의 이마에 십자 형태로 바르거나 머리 위에 얹는 예식을 거행한다. 이때 신자들은 사제에게서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또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을 듣는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되새기고, 삶과 죽음이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며 회개를 요청하는 말씀이다.

교황청 경신성사부의 「대중 신심과 전례에 관한 지도서: 원칙과 지침」은 재를 얹는 행위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한 운명, 하느님의 자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상징한다고 강조한다.(125항) 이처럼 재의 예식은 인간 존재의 허약함을 드러내며 회개를 촉구하는 의미도 있지만, 우리의 죄보다 더 큰 하느님의 자비를 부각한다.

사제는 재의 수요일부터 통회와 속죄를 나타내는 자색 제의를 입는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시기인 이날부터는 기쁨을 상징하는 대영광송과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다. 말씀 전례는 참회, 단식, 자선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제1독서(요엘 2,12-18)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강조하며 회개를 촉구한다. 제2독서(2코린 5,20-6,2)는 성찰과 회심으로 하느님과 화해할 것을 권고한다. 복음(마태 6,1-6.16-18)은 자선과 기도, 단식에 담긴 올바른 정신을 배우도록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0년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우리의 비참한 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며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께 용서를 청하며 먼지에서 생명으로 가는 여정을 거칠 것”을 요청했다.

재의 수요일 전례 참여는 의무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는 우리가 이 회개의 날을 거쳐 엄숙한 마음으로 사순 시기에 들어가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쁘게 기다리도록 초대한다. (가톨릭신문 염지유 기자 gu@catimes.kr)

 

 

 

 

 

 

 

 

[3]기사2

 

 
▲ 사순 시기는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드러내는 주님의 파스카를 준비하는 때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기간에 회개와 보속·절제와 희생의 삶을 살며 어려운 이웃에게 자선을 실천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20년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고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 시기다.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 40일간 이어지는 기도와 참회의 기간이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중요한 상징 의미를 가진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나이 산에서 준비한 기간이 40일이고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에서 40년을 살았다. 엘리야 예언자는 호렙 산으로 가면서 40일 동안 단식했다. 예수님 역시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했다. 전통적으로 40이라는 숫자는 하느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정화와 준비의 기간을 상징적으로 의미한다.

사순 시기는 이마에 재를 얹는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된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참회와 속죄의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다. 참회와 속죄를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5주간 지낸 후 사순 제6주일에 해당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맞이한다. 전례력 중 가장 거룩한 주간인 성주간이 시작되는 시기다.

성주간 중 성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이르는 신비를 기념하는 파스카 성삼일로 전례력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목요일에는 미사의 유일성과 사제직의 일치성을 드러내는 성유 축성 미사와 성체성사 제정을 기념하는 주님 만찬 미사가 거행된다. 성금요일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집중적으로 기억하며 성사 거행도, 미사 집전도 하지 않는다. 말씀의 전례와 십자가 경배, 영성체로 구성된 수난 예식만 거행한다. 성토요일에는 예수님 무덤 옆에 머물러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한다. 제대도 벗겨진 상태이고 미사도 없지만, 곧 다가올 파스카 성야 예식에서 마침내 이뤄질 주님 부활을 기다린다. 이날은 1년 중 유일하게 시간전례 외에는 아무런 전례가 없는 날이다. 성토요일 해가 진 후,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 성야 예식이 거행된다.

1955년 비오 12세 교황은 이러한 성삼일의 특별함을 살리기 위해 사순 시기에서 파스카 성삼일을 제외했다. 따라서 오늘날 사순 시기는 주일을 제외하고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 전까지 정확히 40일이 아닌 38일이다.

사순 시기 전례의 특징은 그리스도 수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기쁨을 노래하는 알렐루야와 대영광송, 사은 찬미가를 바치지 않는다. 제의는 회개를 의미하는 보라색으로 바뀌고, 성인들의 축일도 이 시기에는 삽입하지 않는다.

교회는 이 기간 동안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 미사 전례를 통해 신자들에게 신앙을 심화하도록 이끈다. 특히 그리스도의 수난을 집중적으로 묵상하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자주 바치도록 한다. 또 하느님과 화해하며 교회 공동체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다시 결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고해성사를 자주 보도록 권고한다. 재의 수요일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는 금식재와 금육재를, 사순 시기 중 모든 금요일에는 금육재를 지켜야 한다.

이러한 고행과 단식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자선과 나눔, 수난과 죽음 끝에 위치하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희망과 깊이 연결돼 있다.

가톨릭대 신학대학 사목연구소장 윤종식 신부(전례학 박사)는 “특별히 올해 사순 시기에는 유대감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까지는 코로나19라는 전 세계적인 재난 상황 속에서 서로 자연스럽게 의지하고 연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지구 반대편에서 전쟁과 지진 등 참혹한 재난이 일어나고 있어 그냥 불쌍하다는 마음만 가지고 넘어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럴 때일수록 더 의지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는지 깊이 고민해 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윤 신부는 “이렇게 유대감을 가지고 사랑의 과제를 찾아 나가는 것이 오늘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순 시기를 보내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라 생각한다”고 밝혔다.(평화신문 박민규 기자 mk@cpbc.co.kr)
 
 
 
 
 
 

 

 
 

 

 
[4]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 2023 사순 메시지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에페 5,8)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축복이 여러분 한 분 한 분께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 이제 조심스럽게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교구 공동체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에 따라 시노드를 개최함으로써, 움츠러들었던 신앙생활의 ‘어두운 터널’에서 ‘친교, 참여, 사명(선교)’이라는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어둠 속에 머물던 지난날에서 벗어나 빛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빛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맞이한 사순 시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구원의 기쁨을 우리 삶 안에서 다시 체험하고 참여하는 가운데 파스카 부활의 신비를 잘 맞이하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 곧 온 존재를 통해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면서, 죄인인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피 흘리시고 돌아가신 하느님의 그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묵상하고 그 사랑, 자비, 용서를 체험하고 만나면서 사랑이신 하느님께 다시금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서 ‘지금의 나’를 차분하게 직시하고, ‘지금까지의 나’를 돌아보면서 하느님 아닌 다른 가치들을 하느님 자리에 두고 살아온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받고 하느님을 향해 새롭게 정향(定向)하는 시간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함께 희망찬 미래를 내다보는 은총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얻어주신 것처럼, 우리 삶 안에 있는 여러 형태의 부정적인 체험들이 그저 암울한 끝이 아님을 믿음 안에서 묵상하고 다시금 신앙 안에서 힘을 길어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 시기는 역설적으로 희망의 시간입니다. 고통과 절망으로 보이는 현실, 우리 스스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상황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저 ‘어둠’으로만 보이는 사건이나 상황에서도 절망과 좌절로 끝맺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자비의 하느님께 의탁해야 합니다. ‘고통의 신비’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느닷없이 찾아오는 원치 않는 여러 모습의 실패, 좌절, 이별, 병고, 단절, 죽음 등의 힘든 시간들이 그저 의미 없는 형벌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주시는 다른 답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둠이 짙어가는 것은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이 부활로 귀결되었음을 믿기에 우리는 이 사순 시기가 희망의 시간임을 압니다. 어둠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려운 사람끼리 손을 맞잡아야 합니다. 아픔 중에 있는 가족을 따뜻이 손잡아 주고, 혼자 있는 이웃을 찾아주고,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분들에게 열린 눈과 따뜻한 마음으로 손을 맞잡을 때, 빛을 향해 함께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특히 미사성제를 통해 믿음의 힘을 길어냅시다. 하느님과 우리가 만나는 장(場)이요 시간인 미사 전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그저 이천여 년 전의 역사적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힘을 길어내는 은총의 자리입니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으로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떨치고, 교회의 전통 안에 있는 다양한 신심 활동을 통해 믿음에 활기를 불어넣는 시간으로 만들어 갑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도 이번 사순 시기 동안 일상 속의 참회와 속죄로 그분 십자가에 동참합시다.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오히려 적극적인 미사 참례와 다양한 신심 활동으로 꺼져가는 신앙생활의 불씨를 새로이 지핍시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

 

 

 

 

 

 

 

 

 

 

 

 

[5] 2023년 사순절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사순절 참회와 시노드 여정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은 모두 예수의 변형 에피소드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주님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주(主)와 시몬 베드로 사이에 실제적인 충돌이 있었는데, 그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예수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공언한 후에, 수난과 십자가에 대한 그의 예언을 거절하였다. 예수 그를 단호하게 꾸짖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당신은 하나님에 따라 생각하지 않고 사람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스캔들입니다!" ( 16장 23절) 이어 "엿새 후에 예수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끌고 가니라"( 17장 1절).

 

변형의 복음은 매년 사순절 둘째 주일에 선포됩니다. 이 전례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분과 함께 따로 떨어진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우리의 평범한 약속은 우리가 평범한 장소와 종종 반복적이고 때로는 지루한 일상에 머물도록 강요하지만, 사순절 동안 우리는 예수 함께 "높은 산"에 올라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영적 훈련의 특별한 경험 인 금욕을 살도록 초대받습니다.

 

사순절 참회는 우리의 믿음의 부족과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 따르는 것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은총으로 유지되는 헌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심화시키기 위해, 사랑에서 영감을 받아 완전히 자기 내어줌으로 성취된 그분의 구원의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그분께 빼앗기고 평범함과 허영심에서 우리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산악 트레킹처럼 노력, 희생 및 집중이 필요한 오르막길을 떠나야합니다. 이러한 요건들은 교회로서 우리가 헌신하는 시노드 여정에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사순절 참회와 시노드 경험 사이의 관계를 성찰함으로써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볼 산의 "피정"에서 예수는 독특한 사건의 증인으로 선택된 세 명의 제자를 데리고 갑니다. 그분은 우리의 신앙 생활 전체가 공유되는 경험인 것처럼 은혜의 경험이 고독이 아니라 공유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따르는 것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순례자 교회로서 우리는 전례 연도와 그 안에서 사순절을 경험하며 주님께서 동료 여행자로 우리 가운데 두신 사람들과 함께 걷습니다. 예수과 제자들이 다볼 산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우리는 사순절 여정이 한 스승의 제자로서 같은 길을 따라 함께 하기 때문에 "시노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그분 자신이 길이심을 알기 때문에, 전례 여정과 시노드의 여정 모두에서 교회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신비 안으로 더욱 깊고 충만하게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절정에 이릅니다. 복음서는 예수 "그들 앞에서 변형되었다. 그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다"(마태 17,2). 이것은 여행의 목표 인 "정상 회담"입니다. 그들의 상승이 끝날 무렵, 그들이 예수와 함께 산 높이에 서있을 때, 세 제자는 초자연적 인 빛으로 눈부신 그분의 영광 가운데 그분을 보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빛은 외부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서 발산되었습니다. 이 환상의 신성한 아름다움은 제자들이 타보르를 오르기 위해 기울인 모든 노력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격렬한 산악 트레킹 중에 우리는 길을 단단히 고정해야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열리는 파노라마는 우리를 놀라게하고 그 웅장 함으로 우리에게 보상합니다. 또한 시노드 과정이 종종 힘들게 느껴질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는 낙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놀랍고 놀라운 것이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왕국을 섬기는 우리의 사명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볼 산에서의 제자들의 경험은 변형된 예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가 각각 율법과 예언서를 의미하는 나타났을 때 더욱 풍성해졌습니다(마태 17,3 참조). 그리스도의 새로움은 동시에 옛 언약과 약속의 성취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역사하신 역사와 분리될 수 없으며 그 깊은 의미를 드러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시노드 여정은 교회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움에 열려 있습니다. 전통은 새로운 길을 찾고 움직이지 않고 즉흥적 인 실험의 반대 유혹을 피하는 영감의 원천입니다.

 

참회의 사순절 여정과 시노드의 여정은 모두 개인적, 교회적 변형을 목표로 합니다. 두 경우 모두 예수의 변모에 그 모델이 있고 그의 파스카 신비의 은총에 의해 성취되는 변형. 이 변형이 올해 우리 안에 현실이 될 수 있도록, 나는 예수와 함께 산을 오르고 그와 함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따라야 할 두 가지 "길"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길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볼 산에서 제자들이 변형예수 것을 생각할 때 그들에게 주시는 명령과 관련이 있습니다. 구름에서 나오는 음성은 "그의 말을 들으라"( 17장 5절)고 말합니다. 첫 번째 제안은 매우 분명합니다 : 우리는 예수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사순절은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첫째, 교회가 전례에서 우리에게 제공하는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그 말이 귀머거리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면,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매일 성경 읽기를 공부합시다. 경전 외에도 주님은 형제 자매를 통해, 특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얼굴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시노드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또 다른 것을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은 종종 교회 안에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말씀을 듣는 일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단계에서는 그러한 상호 경청이 주요 목표이지만, 시노드 교회의 방법과 스타일에서 항상 필수 불가결합니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제자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예수 와서 그들을 만지며 '일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태 17,6-8). 여기에 이 사순절에 대한 두 번째 제안이 있다: 현실과 그의 매일의 투쟁들과, 그의 어려움들과 모순들에 직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특별한 사건들과 극적인 경험들로 이루어진 종교성에 피신하지 말아라. 예수 제자들에게 보여주는 빛은 부활절 영광에 대한 기대이며, 우리가"그분 홀로"따라갈 때 우리 자신의 여정의 목표가되어야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로 이어집니다: "피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수난을 경험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도록 준비시켜 부활에 도달하도록 준비하는 수단입니다. 또한 시노드 여정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강력한 친교 경험의 은총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가 도착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 왜냐하면 거기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반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일어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러므로 평야로 내려가서 우리가 경험한 은총이 우리 공동체의 평범한 삶에서 "공동합의성의 장인"이 되도록 우리를 강화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성령께서 이번 사순절에 예수과 함께 상승할 때 우리에게 영감을 주시고 지탱해 주셔서 우리가 그분의 신성한 광채를 경험하고, 신앙으로 굳건히 굳건히 그분과 함께 그분의 백성의 영광과 열방의 빛을 인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2월 <17>일, 성 바오로 개종 축일 프란치스코

 

 

 

 

MESSAGGIO DEL SANTO PADRE FRANCESCO
PER LA QUARESIMA 2023

La Penitenza quaresimale e il cammino
sinodale

Cari fratelli e sorelle!

I Vangeli di Matteo, Marco e Luca raccontano tutti l'episodio della Trasfigurazione di Gesù. Lì vediamo la risposta del Signore all'incapacità dei suoi discepoli di comprenderlo. Poco prima, c'era stato un vero e proprio scontro tra il Maestro e Simon Pietro, il quale, dopo aver professato la sua fede in Gesù come il Cristo, il Figlio di Dio, aveva respinto la sua predizione della passione e della croce. Gesù lo aveva rimproverato con fermezza: "Va' dietro a me, Satana! Tu sei uno scandalo per me, perché non pensi secondo Dio, ma secondo gli uomini!" (Mt 16,23). In seguito, «sei giorni dopo, Gesù prese con sé Pietro, Giacomo e Giovanni, suo fratello, e li condusse su un alto monte» (Mt 17,1).

Il Vangelo della Trasfigurazione viene proclamato ogni anno nella seconda domenica di Quaresima. Durante questo tempo liturgico, il Signore ci porta con sé in un luogo separato. Mentre i nostri impegni ordinari ci costringono a rimanere nei nostri luoghi abituali e nelle nostre routine spesso ripetitive e talvolta noiose, durante la Quaresima siamo invitati a salire "un alto monte" in compagnia di Gesù e a vivere una particolare esperienza di disciplina spirituale – l'ascesi – come popolo santo di Dio.

La penitenza quaresimale è un impegno, sostenuto dalla grazia, per superare la nostra mancanza di fede e la nostra resistenza a seguire Gesù sulla via della croce. Questo è esattamente ciò che Pietro e gli altri discepoli dovevano fare. Per approfondire la conoscenza del Maestro, per comprendere e abbracciare pienamente il mistero della sua salvezza, compiuta nel dono totale di sé ispirato dall'amore, dobbiamo lasciarci prendere da parte da Lui e distaccarci dalla mediocrità e dalla vanità. Dobbiamo metterci in cammino, un percorso in salita che, come un trekking in montagna, richiede fatica, sacrificio e concentrazione. Questi requisiti sono importanti anche per il cammino sinodale che, come Chiesa, siamo impegnati a compiere. Possiamo trarre grande beneficio dalla riflessione sul rapporto tra la penitenza quaresimale e l'esperienza sinodale.

Nel suo "ritiro" sul monte Tabor, Gesù porta con sé tre discepoli, scelti per essere testimoni di un evento unico. Vuole che quell'esperienza di grazia sia condivisa, non solitaria, così come tutta la nostra vita di fede è un'esperienza condivisa. Perché è nello stare insieme che seguiamo Gesù. Anche insieme, come Chiesa pellegrina nel tempo, viviamo in esso l'anno liturgico e la Quaresima, camminando accanto a coloro che il Signore ha posto tra noi come compagni di viaggio. Come la salita di Gesù e dei discepoli al monte Tabor, possiamo dire che il nostro cammino quaresimale è "sinodale", poiché lo facciamo insieme lungo lo stesso cammino, come discepoli dell'unico Maestro. Sappiamo infatti che Gesù stesso è la Via, e perciò, sia nel cammino liturgico sia nel cammino sinodale, la Chiesa non fa altro che entrare sempre più profondamente e pienamente nel mistero di Cristo Salvatore.

E così arriviamo al suo culmine. Il Vangelo riferisce che Gesù «fu trasfigurato davanti a loro; il suo volto brillava come il sole e le sue vesti diventavano bianche come la luce» (Mt 17,2). Questa è la "vetta", la meta del viaggio. Alla fine della loro ascesa, mentre si trovano sulle alture dei monti con Gesù, ai tre discepoli viene data la grazia di vederlo nella sua gloria, splendente di luce soprannaturale. Quella luce non veniva dall'esterno, ma irradiava dal Signore stesso. La bellezza divina di questa visione era incomparabilmente più grande di tutti gli sforzi che i discepoli avevano fatto nella salita del Tabor. Durante qualsiasi faticoso trekking in montagna, dobbiamo tenere gli occhi ben fissi sul sentiero; Eppure il panorama che si apre alla fine ci stupisce e ci premia per la sua imponenza. Allo stesso modo, il processo sinodale può spesso sembrare arduo, e a volte possiamo scoraggiarci. Tuttavia, ciò che ci attende alla fine è senza dubbio qualcosa di meraviglioso e sorprendente, che ci aiuterà a comprendere meglio la volontà di Dio e la nostra missione al servizio del suo Regno.

L'esperienza dei discepoli sul monte Tabor si arricchì ulteriormente quando, accanto a Gesù trasfigurato, apparvero Mosè ed Elia, a significare rispettivamente la Legge e i Profeti (cfr Mt 17,3). La novità di Cristo è al tempo stesso il compimento dell'antica alleanza e delle promesse; è inseparabile dalla storia di Dio con il suo popolo e ne rivela il significato più profondo. Allo stesso modo, il cammino sinodale è radicato nella tradizione della Chiesa e al tempo stesso aperto alla novità. La tradizione è fonte di ispirazione per cercare nuove strade e per evitare le opposte tentazioni dell'immobilismo e della sperimentazione improvvisata.

Il cammino quaresimale della penitenza e il cammino sinodale hanno come obiettivo una trasfigurazione, sia personale che ecclesiale. Una trasformazione che, in entrambi i casi, ha il suo modello nella Trasfigurazione di Gesù e si realizza per grazia del suo mistero pasquale. Perché questa trasfigurazione diventi in noi quest'anno, vorrei proporre due "strade" da percorrere per salire insieme a Gesù e, con Lui, raggiungere la meta.

Il primo cammino ha a che fare con il comando che Dio Padre rivolge ai discepoli sul monte Tabor mentre contemplano Gesù trasfigurato. La voce dalla nube dice: «Ascoltatelo» (Mt 17,5). La prima proposta, allora, è molto chiara: dobbiamo ascoltare Gesù. La Quaresima è un tempo di grazia nella misura in cui lo ascoltiamo mentre ci parla. E come ci parla? In primo luogo, nella parola di Dio, che la Chiesa ci offre nella liturgia. Che questa parola non cada nel vuoto; se non possiamo sempre partecipare alla Messa, studiamo le sue letture bibliche quotidiane, anche con l'aiuto di internet. Oltre alle Scritture, il Signore ci parla attraverso i fratelli, specialmente nei volti e nelle storie di chi è nel bisogno. Permettetemi di dire un'altra cosa, che è molto importante per il processo sinodale: l'ascolto di Cristo avviene spesso nell'ascolto dei fratelli e delle sorelle nella Chiesa. Tale ascolto reciproco in alcune fasi è l'obiettivo primario, ma rimane sempre indispensabile nel metodo e nello stile di una Chiesa sinodale.

Ascoltando la voce del Padre, i discepoli «si prostrarono e ebbero molta paura. Ma Gesù venne e li toccò dicendo: 'Alzatevi e non temete'. E quando i discepoli alzarono gli occhi, non videro altro che Gesù solo» (Mt 17,6-8). Ecco la seconda proposta per questa Quaresima: non rifugiatevi in una religiosità fatta di eventi straordinari ed esperienze drammatiche, per paura di affrontare la realtà e le sue lotte quotidiane, i suoi disagi e le sue contraddizioni. La luce che Gesù mostra ai discepoli è un'anticipazione della gloria pasquale, e questa deve essere la meta del nostro cammino, mentre seguiamo "Lui solo". La Quaresima conduce alla Pasqua: il "ritiro" non è fine a se stesso, ma mezzo per prepararci a vivere con fede, speranza e amore la passione e la croce del Signore, e così arrivare alla risurrezione. Anche nel cammino sinodale, quando Dio ci dona la grazia di certe esperienze forti di comunione, non dobbiamo pensare di essere arrivati, perché anche lì il Signore ci ripete: "Alzatevi e non temete". Scendiamo dunque in pianura, e la grazia che abbiamo sperimentato ci rafforzi per essere "artigiani di sinodalità" nella vita ordinaria delle nostre comunità.

Cari fratelli e sorelle, lo Spirito Santo ci ispiri e ci sostenga in questa Quaresima nella nostra ascesa con Gesù, perché possiamo sperimentare il suo splendore divino e così, confermati nella fede, perseverare nel nostro cammino insieme a Lui, gloria del suo popolo e luce delle genti.

Roma, San Giovanni in Laterano, 25 gennaio, Festa della Conversione di San Paolo

FRANCES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