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라이프니츠 의지의 자유문제와 단자론

나뭇잎숨결 2023. 8. 26. 08:51


라이프니츠 자유론: 의지의 자유문제와 단자론


윤선구│서울대 . 라이프니츠 자유론

인간이 도덕을 실현하려 간절히 소망할 경우, 신은 인간의 의지를
수용하기 위하여 자연의 운행법칙까지도 변경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완전성이 점진적으로 증대될 수 있다.



시작하는 글

라이프니츠 철학은 흔히 단자론이라고 불린다. 단자란, 플라톤이 가시계와는 별개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가시계의 원형이 된다고 본 것을 이데아라고 불렀듯이, 라이프니츠가 그 자신이 실체라고 본 것에 붙인 이름이다. 데카르트 이래 근세 합리론자들은, 그들이 무엇을 실체라고 보는가 하는 점에서는 철학자들의 입장에 따라 크게 차이가 있었지만, 실체를 통하여 정신 및 현상 세계를 설명하려는 공통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실체는 그들에게 있어 현상 세계와 정신의 작용 내지는 인식과 도덕의 원리를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적 수단에 다름아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실체론의 도구적 성격은 그가 실체론을 윤리학적 입장과 독립적으로 먼저 정립하고 이를 통하여 인식과 도덕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에 있어서 의지의 자유에 근거한 도덕의 가능성 및 인식과 도덕의 동시적 가능성을 먼저 전제하고, 이를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그의 실체론을 점진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사실에서 명확해진다.1) 라이프니츠 철학의 목적은 그가 인간의 이성을 괴롭히는 󰡒양대 미로󰡓라고 부른 󰡐연속합성의 문제󰡑 내지는 물체의 무한분할 가능성 문제와, 자유와 필연의 조화 가능성 문제를 해명하여, 궁극적으로 현상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자연과학의 가능성과, 이성을 가진 단자, 즉 정신의 내적 활동으로서의 도덕의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데 있다. 그 중에서도 도덕의 가능성과 그 근거인, 인간에게 있어서 의지의 자유 가능성을 밝히는 문제는 그의 주저인 《변신론》의 핵심 과제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단자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의 철학의 형이상학 또는 방법론적 측면을 강조한 것일 뿐이다.

라이프니츠 도덕철학의 주요 과제는 인간이 도덕법을 실천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와 인간에게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밝히는 것이다. 전자는, 나에게 미래의 어떤 범죄 행위가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죄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고, 또 어떤 선한 행위가 안 일어나도록 예정되어 있다면 내가 아무리 도덕적인 행위를 하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는 이른바 󰡒게으른 이성의 궤변󰡓에 대한 반론이며, 후자는 인간이 저지른 모든 죄는 인간을 창조한 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고 도덕의 가능성을 정당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인간에게 의지의 자유가 주어져 있음을 밝히는 일이다.

라이프니츠의 자유의 개념은 이중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는 이것을 󰡒의지는 강제로부터 뿐만 아니라 절대적 필연성으로부터도 자유이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강제로부터의 자유란 정념으로부터의 자유로서, 의지가 순수이성의 판단에 따르면 그것은 정념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절대적 필연성으로부터의 자유는 의지가 결정 또는 행위를 스스로 선택할 가능성이 있을 때의 자유이다. 의지의 자유를 전자의 의미로만 규정하면 스피노자 식의 자유가 되는데, 이는 필연성과 대립되지 않는다. 즉 인간의 운명이 필연적이라 해도 그것을 이성으로 인식하여 이에 순응하면 의지는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명령의 실행 가능성이나 귀책 가능성을 위해서는 이러한 의미의 자유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선택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는 것이다. 즉 그에 의하면 의지는 정념의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한 자전적 진술에서 그가 한때는 스피노자 식 자유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따라서 나는 모든 것을 절대적 필연으로 간주하며, 자유를 위해서는 사건이 필연에 종속되어 있더라도 강제에 종속되지만 않으면 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와 가깝게 되었다.󰡓2) 그가 이러한 자유의 개념에서 벗어나 선택의 자유개념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 준 것이 바로 가능성 개념에 대한 반성이다. 이러한 반성은 메가라 학파의 가능성 개념 비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현존하지 않고,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고, 결코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런 가능성의 고찰이 나를 이러한 심연에서 구출했다.󰡓3)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라이프니츠의 자유론은 단자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가능성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성찰은 그의 단자론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글에서는 먼저 라이프니츠의 메가라 학파 비판과 가능성 개념의 논리적 정의를 고찰한 후, 단자론의 주요 부분인 가능적 세계와 현실 존재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능성 개념과 의지 자유와의 관계를 고찰하고자 한다.



메가라 학파 비판과 라이프니츠의 가능성 개념

라이프니츠의 가능성 개념은 메가라 학파의 비판을 통하여 형성되었는데, 메가라 학파의 가능성 개념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능성 개념 비판에 근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정한 조건 밑에서 현실적인 것으로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것을 가능태(dynamis)로 규정한다. 따라서 가능한 것은 현실적인 것(energeia)이 될 수도 있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도토리는 참나무의 가능태인데, 도토리는 참나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참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고, 참나무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모든 가능태는 동시에 그 반대의 가능태󰡓4)라고 한 그의 말의 의미이다.

메가라 학파의 디오도로스는 현실적인 것만이 가능적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가능성의 의미가 현실성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현실화되었거나 언젠가 반드시 현실화되도록 되어 있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오도로스에 의하면 가능적인 것은 반드시 현실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도토리가 참나무의 가능태라면 도토리는 반드시 참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오도로스의 가능성 개념은 그의 결정론적 세계관의 토대가 되고 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디오도로스는 과거에도 존재한 일이 없고,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 중 언젠가는 한 번 현실적으로 존재했던가 존재하게 될 것만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5) 이러한 규정은 가능성의 개념을 시간 계기에 의해 규정한 것으로, 칸트의 양상 범주에 있어서 가능성의 범주에 대한 도식의 규정과 유사하다.6)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고,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중에도 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양상 개념을 시간 계기를 통하여 규정하는 것을 거부함을 의미한다. 그의 양상 개념은 논리적으로 규정되는데, 그가 형이상학적 개념인 실체를 논리학적 개념인 완전 개념을 통하여 규정하기 때문에 그의 형이상학적 입장이 범논리주의로 불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7), 양상 개념의 규정에 있어서도 범논리주의의 경향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고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8) 메가라 학파는 과거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지만,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어느 시간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모두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메가라 학파 사람들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즉 모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과, 신에 의한 선택의 대상으로서 적절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 것 사이의 구별을 간과한다고 비판한다.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 중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존재해야 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모순율에 저촉되기 때문에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이유율에 저촉되기 때문에 존재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 개념에 따르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당연히 모두 가능한 것이 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거나 우연적으로 존재한다. 라이프니츠는 우연과 필연의 양상 개념도 논리적으로 규정하는데, 그에 의하면 그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여 불가능한 것은 필연적인 것이고, 그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으므로 가능한 것은 우연적인 것이다. 필연적 존재는 신뿐이다. 신은 영원히 존재할 뿐만 아니라 신 존재를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데, 이것이 전통적으로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논거가 되어 왔다. 유한한 존재들은 그 존재를 부정해도 모순이 되지 않으므로 모두 우연적인 것들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외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가능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한 것들 중의 하나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 대신에 존재한다고 상정해도 모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가라 학파의 양상 개념에 의하면 무한한 절대적 존재뿐만 아니라 유한한 현실적 존재도 모두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언젠가 현실화될 수 있는 것만이 가능적인 것으로 정의되므로, 가능적인 것은 언젠가 현실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고, 또 다른 것으로 실현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즉 현실화된 가능적인 것 대신에 현실화될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존재하거나 발생하는 것은 모두 필연적이다. 예를 들어 후보가 의원으로 선출되는 사람 한 명뿐인 경우, 이 후보가 의원으로 선출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경우에는 의원으로 선출되는 한 사람의 후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낙선한 다수의 후보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당선된 후보는 그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도 존재하므로 필연적으로 당선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당선된 것이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메가라 학파의 가능성 개념이 이러한 결정론에 빠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가능태가 반드시 현실태가 되지 않을 가능성도 인정했다. 따라서 현실화되지 않는 가능성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에 있어서 라이프니츠의 양상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양상 개념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도 라이프니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현실태의 존재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우연성의 개념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토리는 성장하면 참나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어느 특정의 도토리는 성장하여 참나무가 될 수도 있고, 참나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참나무의 현실태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어느 특정의 도토리가 성장하여 참나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우주의 창조 이전부터 확실하다. 따라서 현실태로서 참나무의 존재는 필연적이다. 이미 존재하는 것의 변화 내지는 자연 상태의 변화가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메가라 학파의 입장과 가까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유한한 현실적 존재는 그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우연적이라는 그 자신의 주장과도 모순되어 보인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절대적 필연성󰡑과 󰡐조건적 필연성󰡑을 구분한다.9) 󰡐절대적 필연성󰡑은 󰡐논리적 필연성󰡑 또는 󰡐형이상학적 필연성󰡑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그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어떤 것의 필연성이다. 이에 대해 󰡐물리적 필연성󰡑 또는 󰡐도덕적 필연성󰡑이라고도 불리는 󰡐조건적 필연성󰡑은 그 자체로는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우연적이지만, 특정의 조건하에서 필연적인 것을 의미한다.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그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우연적이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모든 자연의 변화는 사실상 그 반대의 변화가 발생하지 않는 필연적인 변화이다. 그 이유는 신이 이러한 변화를 포함하는 세계를 선택하였기 때문인데, 이렇게 그 자체로는 우연적이지만 신이 이 세계를 선택했다는 조건하에서 필연적인 것이 바로 조건적 필연성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필연성을 󰡐확실성󰡑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의 모든 사건이나 변화는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발생이 확실하다는 의미에서만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자연의 변화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인간의 미래 행위도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필연적이라고 한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리라는 것은 그의 창조 이전부터 확실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 행위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의지의 자유 및 행위의 자유와 조화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라이프니츠는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 것의 가능성을 통하여 자유의 가능성을 확립했다고 주장하는데, 그에게 있어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가능적 세계에 관한 견해를 살펴보아야 한다.



가능적 세계와 현실존재

라이프니츠의 가능성 개념에는 매우 독특한 사상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가능한 것들은 그들의 본질 또는 실재성의 크기 내지는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각각 존재를 얻고자 갈망한다는 주장이다.10) 여기서 실재성(realitas) 및 완전성(perfectio)이란 스콜라 철학의 용어로, 두 개념이 거의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데 각각 현실적 존재 및 결핍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 없이 생각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유 내용을 의미한다. 열이란 모순 없이 사유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성의 하나이며 냉기는 적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열의 결핍, 즉 소극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실재성이 아니며, 오히려 실재성의 결여이다. 그러나 모순 없이 사유할 수 있는 적극적 사유 내용이 모두 실재성 내지는 완전성인 것은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적극적 사유 내용 중에서 그것의 최고 상태를 상정하는 것이 모순되지 않는 것, 즉 최고 정도가 가능한 것만을 완전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장 큰 수 내지는 가장 빠른 속도 등은 수 및 속도의 본질과 논리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완전성 내지는 실재성이 아니며, 최고선 또는 최고의 지혜 등은 선 또는 지혜의 개념과 모순되지 않으면서 적극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완전성에 해당한다.11)

스콜라 철학에서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만이 아니라, 단순히 가능태인 관념들도 이러한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현실적 존재가 갖는 실재성을 󰡐형상적 실재성(realitas formalis)󰡑, 관념이 갖는 실재성을 󰡐객관적 실재성(realitas objectiva)󰡑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에게서는 󰡐가장 빠른 속도󰡑 또는 󰡐가장 큰 수󰡑 등과 같이 단순히 다른 사물로부터 그것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만을 내포하는 개념은 관념이 아니다. 관념이란 그것이 모순을 포함하지 않음을 밝힐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단순히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징만을 지시하는 것을 󰡐명목적 정의󰡑라고 부르며, 한 사물의 가능성을 밝혀 주는 것을 󰡐실질적 정의󰡑라고 부른다.12) 따라서 실질적 정의가 가능한 것만이 관념이며, 이러한 관념은 단순히 가능한 것으로서 실재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단순히 가능적인 것들, 즉 관념들도 모두 실재성(객관적 실재성)을 가지며, 그들의 실재성의 크기에 따라 서로 존재를 얻으려 각축한다. 이것은 그가 메가라 학파와 같이 가능적인 것와 현실적인 것의 외연이 일치한다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에 엄밀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능한 것이 그 자신의 실재성을 통하여 스스로 존재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최고로 완전한 존재인 신에게서뿐이다. 라이프니츠는 안셀름과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불완전하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증명은 신의 관념이 존재를 포함한다는 사실로부터 신의 존재를 도출하는 것인데, 이 증명의 핵심은 신의 관념이 왜 존재를 포함하는가를 밝히는 데 있다. 그들은 최고의 완전성을 매개로 존재가 신의 관념에 포함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즉 신은 최고로 완전하고, 존재는 완전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신 관념은 필연적으로 존재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증명은 최고로 완전한 존재가 모순되지 않는지, 즉 가능한지는 검토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고작 신의 관념이 가능하다면, 신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13)

안셀름­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 󰡒존재를 본질로 갖는 사물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논거에 토대를 두고 있는 데 반하여 라이프니츠의 논거는 󰡒최고로 완전한 존재는 그 관념이 가능하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논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핵심은 신 관념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안셀름과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 비판을 통하여 신은 가능성으로부터 존재를 도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보이고 있다. 신 관념의 실재성은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가능태로서의 신은 그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은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Ens a se)이다. 모든 가능태가 그의 실재성의 크기에 따라 스스로 존재를 지향하는 힘이 있다는 주장은 다소 신비주의적인 견해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완전한 존재는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므로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안셀름­데카르트의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이나 신은 전능한 존재이므로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스스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새로운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도 단순히 가장 완전한 존재나 전능한 존재로서의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뿐 그런 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데 반해, 모든 가능태가 그 자체로 존재를 지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은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의 진일보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최고로 완전한 존재, 즉 실재성이 무한히 큰 존재의 관념은 가능성으로부터 존재가 스스로 도출되지만, 유한한 존재들은 그들 관념의 가능성으로부터 존재가 필연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신만이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이며 유한한 존재들은 일정한 조건하에서 필연적이긴 하지만 절대적인 관점에서는 우연적인 존재들이다. 우연적인 존재들은 필연적인 존재인 신에 그 존재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즉 신은 모든 사물들의 최후 근거(ultima ratio rerum)인 것이다. 신은 존재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본질 내지는 가능적인 것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신의 오성은 단순히 가능적인 것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14) 유한한 가능적인 것들은 신의 오성 안에서 그들의 실재성의 크기에 따라서 존재에 대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그들의 실재성의 크기에 따라 존재에 대한 요구도 커지므로 유한한 실체들은 그 자체 단독으로서보다는 다른 가능적 실체들과 결합을 하는 것이 존재하기에 유리하다. 다른 가능적 실체들과의 결합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개체적 실체들은 단순히 그 관념이 가능한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다른 실체들과의 공존이 가능해야 한다.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공존 가능성의 원리다. 아래에서는 개체적 실체의 가능성과 공존 가능성의 원리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데카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정신과 물체를 실체라고 보았고, 스피노자는 신만이 실체라고 보았다. 스피노자에 비해 라이프니츠의 실체관은 데카르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다만 데카르트가 물체도 실체라고 주장하는 데 반하여 라이프니츠는 물체와 같이 연장된 것은 실체일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분할 가능한 것의 실재성은 분할된 부분에 존재하는데, 연장된 것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므로 궁극적으로 실재성을 담지할 기본 단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또 데카르트가 이성을 가지고 있는 영혼인 정신만을 실체라고 본 것도 잘못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유한한 정신은 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항상 사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유를 실체의 속성으로 간주하여 실체가 생각하는 동안에만 존재한다고 하면, 이것은 지속적인 존재인 실체의 개념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의식과 사유가 아닌 지각과 욕구를 실체의 본질로 간주하는데, 이러한 속성을 가진 실체는 정신뿐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영혼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실체는 지각과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는 단일한 종류이지만, 지각의 선명도에 따라 구별되는 다양한 등급의 차이가 존재한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자신의 형상을 모방하여 실체를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신은 영원부터 오성 안에 자신의 형상을 닮은 유한한 실체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 외에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실체의 관념을 형성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완전한 실체는 둘일 수 없으며, 그것은 바로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한한 실체들은 유한성의 등급에 따라 차이가 있고, 또 모나드의 내부 상태인 지각에 의해 서로 구별되는 무한히 많은 가능적 실체들이 존재한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어느 두 개의 실체도 절대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모든 실체는 영혼과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단순한 실체이고, 따라서 양적인 차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들은 내적 상태인 지각에 의해 구별될 수밖에 없다. 모든 가능적 모나드들은 그들이 존재하게 될 경우 전개될 미래의 모든 지각을 가능태로서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고, 이 가능적 지각의 총체에 의해 서로 구별되는 개체적 실체이다.

그런데 모든 모나드의 내부 지각이 서로 상이하다고 해서, 이것이 그들 사이의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모나드들의 지각 내용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합할 수 있으며, 서로 다른 모나드들의 결합은 실재성의 크기를 증가시킴으로써 존재를 위한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따라서 세계는 필연적으로 모나드들의 결합체로서 존재하게 된다. 한 모나드가 실재하기 위해서는 그 자체로서 가능해야 할 뿐만 아니라―한 모나드가 그 자체로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의 가능적 지각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다른 모나드들과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논리적 무모순성으로서의 가능성과 함께 공존 가능성은 유한한 모나드의 존재를 위한 전제조건이다.
가능적 모나드들의 결합은 중복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새로운 가능적 모나드를 추가할 수 없을 때까지 지속되는데,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은 무질서하게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모나드들의 가능적 지각을 예견함으로써 모든 모나드들의 지각들이 질서를 이루어 하나의 통일적 세계가 되도록 배열하는 것이다. 신의 오성 안에서 잘 질서 잡힌, 이 모든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의 집합이 바로 가능적 세계이다.

만일 모든 가능적 모나드들이 서로 공존 가능하다면 가능적 세계는 하나밖에 없을 것이며, 현존하는 세계는 필연적인 세계가 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가능적 모나드들이 서로 공존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가능적 모나드는 그 자체의 내부 상태인 가능적 지각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으면 가능하므로, 루비콘 강을 건너는 카이사르의 지각을 내포하고 있는 한 모나드가 가능하더라도 다른 한편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지 않는 카이사르의 지각을 포함하는 모나드의 관념도 그 자체로는 역시 가능하다. 그러나 이 두 모나드는 서로 공존 가능하지 않고, 이들 각각의 모나드와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의 집합들은 서로 독립적인 집합을 이루게 된다. 서로 공존이 가능하지 않은 모나드들의 수는 무한히 많을 수 있으며, 따라서 서로 독립적인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의 집합인 가능적 세계도 무수히 많이 생각할 수 있다. 신의 오성 안에서 서로 존재를 향하여 경쟁하는 가능태들은 이렇게 무수히 많은 가능적 세계들이다. 이들 중에 가장 실재성이 큰, 즉 가장 완전한 가능적 세계는 가능적 모나드의 수를 가장 많이 포함하면서도 이들을 지배하는 질서가 가장 단순한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이들의 실재성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유한한 가능적 존재들의 결합체는 그 자체로 존재에 이를 수는 없다. 즉 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가능성 개념과 의지 자유

신은 자신의 오성 안에서 가장 완전한 가능적 세계를 선택하여 존재를 부여한다. 따라서 신의 세계 창조 행위는 선택이 가능한 자유로운 행위이며, 현존하는 세계는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이지만 그것의 존재는 필연적이지 않고 우연적이다. 스피노자는 신이 선택의 자유가 없고 그의 본성에 따라 필연적으로 작용한다고 보는 데 반해, 라이프니츠는 현존하지 않는 것의 가능성 개념에 근거하여 신의 선택의 자유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신의 선택의 자유가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라이프니츠의 입장에 대한 반론의 핵심은, 설사 선택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전지하고 가장 완전한 존재인 신이 최선의 대상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신의 본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불가능하므로, 신은 필연적으로 항상 최선의 것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물론 신이 실제로 항상 최선의 대상만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신이 다른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발적 결정에 의해 선택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신이 항상 최선의 대상을 선택하는 것은 필연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대가 모순을 포함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내지는 절대적인 필연성이 아니라 반대가 가능한 필연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필연성이 󰡐도덕적인 필연성󰡑인 것이다.

그러나 신의 본성이 전지하고 절대적으로 선하다면, 무엇이 최선의 대상인지를 알면서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것은 그가 절대적으로 선하다는 본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라이프니츠의 도덕성 개념을 전제함으로써 해명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도덕성이란 달리 행위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행위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를 선택할 때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한다. 또한 어떤 행위자는 그가 도덕적으로 선한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한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가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를 선택하기 때문에 그를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신이 도덕적으로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절대적으로 선한 본성에 근거하여 항상 최선의 대상을 선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최선의 대상을 선택하기 때문에 신을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이 달리 행위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과 그가 도덕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으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라이프니츠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게 될 가능성의 개념을 통하여 신에게 있어 자유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로부터 인간의 자유까지 당연히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신이 가능한 세계들 중에서 최선의 세계를 선택할 때, 그는 자신의 오성 안에서 모든 모나드들의 미래에 전개될 모든 지각 내지는 행위를 예견하고 서로 조화되도록 예정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미래 행위는 이미 신에 의한 창조 시점에 결정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인간에 있어 의지 자유의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라이프니츠의 이론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단계는 신의 예정이 인간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부분이고, 둘째 단계는 인간에게 있어 자유로운 선택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첫 번째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는 현실태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비결정론을 주장한 것과 달리, 현실적인 것들의 미래의 변화는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이미 예정되어 있으므로 현실 세계 안에 있는 사물들의 미래변화가 발생할 수도 있고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은 분명히 발생하고 발생하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종의 결정론 내지 숙명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데 있다. 이러한 입장은 자연의 변화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미래 행위에도 적용된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인 기회원인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신은 그가 창조한 세계에 그때 그때마다 개입하여 사건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창조할 때 이미 미래에 전개될 모든 사건을 예견하고 서로 조화 가능한 사건들만 발생하도록 조정했다. 예정조화론이라고도 불리는 라이프니츠의 조건적 결정론은 현상 세계의 탐구인 자연과학을 정당화하는 데 있어서나 데카르트 이래 쟁점이 되어 온 심신 상호관계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입장은 종종 그가 인간의 행위에 관하여 결정론자라고 하는 오해를 낳았다.

그는 여기서 확실한 것과 필연적인 것은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5) 즉 신이 예견한 것은 발생하게 될 것이 확실하지만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확실한 것에는 물론 결정되어 있는 것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결정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신의 전지한 능력으로 그의 발생을 예견하기 때문에 그의 발생이 확실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론은 자연 사건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까지도 신이 정한 것이라고 오해되어 왔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이 경우 인간이 스스로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착각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신의 예견뿐만 아니라 예정도 어떤 것을 결정적이도록 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결정적인 사건은 신이 그것을 예정하였기 때문에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신이 예견한다는 것이다.16)

신은 전지하기 때문에 물론 결정적인 사건만을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 결정도 예견한다. 라이프니츠의 예정조화설에는 모든 모나드는 자발적으로 행위한다는 그의 실체개념이 전제되어 있다. 신은 단지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될 모든 모나드들의 미래 행위를 미리 보고 서로 조화되는 모나드들만을 모아 결합함으로써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행위는 신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신은 오히려 인간이 스스로 하고자 한 행위를 허용한 것뿐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은 인간의 의지가 결정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아니고, 다만 신의 예견과 예정이 인간의 의지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의지가 자유로운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자유로운 선택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여부에 달려 있다. 라이프니츠는 신이 모나드를 자신의 형상을 모방하여 창조했다고 한다. 모든 모나드는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다소간에 신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을 가진 모나드인 인간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신처럼 어느 정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이성 안에서 가능한 선택 대상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으며, 여러 가지의 가능적 행위 중에서 항상 자신에게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한다. 이에 대해 신은 최고의 지혜를 통해 참으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데, 이것이 최고로 완전한 자유이다. 이성을 가지지 않은 모나드인 동물이나 그 이하의 존재들이 자유가 없는 것은 신의 예정 때문이 아니라, 가능한 선택 대상들을 생각해 내고 그들 중에서 좋은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 결정은 그것이 행동으로 실현되지 않는 한 자연계의 사건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기 때문에 신의 예견의 대상이 되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사건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예정 조화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의지의 자유는 신의 예정 조화와 관계없이 무제한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예정 조화를 통해 허용한 행위 외에 다른 행위를 실제로 행할 가능성이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자연 사건들과 연관되어 있는 행위는 예정 조화에 의해 자유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의욕한다고 모든 것이 반드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의욕하는 행위 중에서 다른 모나드들의 행위와 조화 가능한 행위만이 실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해서 자기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며, 자연재해 속에서 살아 남고 싶다고 원한다 해서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의욕하지 않는 것을 행하도록 신이 강제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건들에 의해 제약을 받지 않는 행위, 예를 들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인가 따먹지 말 것인가 하는 행위는 전적으로 아담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다른 사람들의 행위나 자연 사건과 연관이 있는 인간의 행위의 경우에도 실제로는 엄격한 숙명론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인간이 도덕을 실현하려 간절히 소망할 경우, 신은 인간의 의지를 수용하기 위하여 자연의 운행법칙까지도 변경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의 완전성이 점진적으로 증대될 수 있다고 보았다.17) 이것은 라이프니츠의 은총 및 진보에 관한 사상으로써 별도의 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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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이프니츠의 실체론은 오랜 기간을 거쳐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한 차례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윤선구, 〈의지의 자유문제와 단자론〉, 《철학》 제52집, 한국철학회, 1997년, 147~184 쪽 참조.
2. 〈자유에 관하여〉 Leibniz, Nouvelles Lettres et Opuscules, ed. by Louis Alexandre Foucher de Careil, 1971, Hilde-sheim. New York, p.178.
3. 같은 곳. 여기서 제시된 가능성 개념은 메가라 학파의 가능성 개념과 대립된다.
4.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050b 8ff.
5. 《변신론》, 170 참조.
6. 칸트는 필연성 카테고리의 도식을 모든 시간에 있어서의 대상의 존재로, 현실성은 특정 시간에 있어서의 대상의 존재로, 그리고 가능성 카테고리의 도식을 그 어떤 시간에 있어서의 대상의 존재로 규정한다. 《순수이성 비판》 B 184 참조.
7. Aron Gurwitsch, Leibniz 219쪽 이하 참조.
8. 《변신론》 173 참조.
9. 《변신론》, 132, 174, 349 참조.
10. 《변신론》, 201;〈사물들의 최초 근원에 대하여〉, Leibniz, F뚸f Schriften zur Logik und Metaphysik, Stuttgart 1987 (5 F뚸fschriften), 41쪽.
11. 최고 지혜나 최고선만이 완전성인 것이 아니라 정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선 또는 지혜와 같은 성질이 완전성이다. 따라서 완전성과 실재성은 사실상 동일한 개념이다. 《형이상학 논고》(DM) 1 참조.
12. DM 24;5 Schriften 12쪽 이하.
13. 《단자론》 (Mon.) 45;DM 23;5 Schriften 12쪽 이하.
14. Mon. 43.
15. DM 13, 《변신론》 36 참조.
16. 《변신론》 38 참조.
17. 《변신론》, 〈신앙과 이성의 조화에 관한 서론적 논고〉, 3 참조.
18. 라이프니츠의 진보이론에 대해서는 윤선구, 〈라이프니츠의 자유이론〉, 박사학위 논문, 쾰른 1997년, 77~94 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