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무한에 관한 편지
(Louis Meyer에게 보낸 7번째 편지)
Ⅰ. 무한한 것의 문제와 실체의 불가분성(indivisibility)의 문제는 “에티카”의 1부에서 다루어진다. 정리 12는 무한을 증명한다. 정리 13과 그것의 보충과 주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리 15는 불가분성(不可分性)을 증명한다. 무한과 불가분성은 실체의 기본적인 성질 즉 자기 원인(causa sui)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따라나오는 실체의 두 가지의 독특한(unique) 성질들이다. 사실상 스스로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것은 무엇이든 모순 없이는 그것의 현존의 어떤 부분도 제거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필연적으로 무한하며 어떤 분리(partitioning)도 배제한다. 무한과 불가분성은 같은 성질의 두 가지 측면이기 때문에 무한과 가분성(可分性) 사이에서 심각한 모순(antinomy)이 야기된다. 만약 우리가 그중 하나를 확증(affirm)한다면 다른 하나는 거부해야 한다. 교조주의자는 가분성을 확증하면서 무한을 거부한다. 스피노자는 무한을 확증하면서 가분성을 거부한다. 이것은 우리가 실체의 본성을 모르는 한 해결될 수 없는(irreducible) 논쟁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실체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현존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시 해결될 수 있는 논쟁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에티카”에서 실체의 차원에서 가분적인 것을 배제함으로써 해결된 무한과 가분성의 대립되는 모순은 우리가 무한한 가분성 즉 무한과 동시에 가분성을 확증해야만 하는 양태의 차원에서 다시 나타난다. 만약 문제의 두 번째 부분에 대한 해결이 첫 번째 부분의 문제에 포함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에티카”는 그것을 분명하게 전개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문제를 전체적으로 다루면서 이들 난점들-다른 문제들과 함께-에 대답하고 있는 것은 Louis Meyer에게 보낸 12번째 편지에서 였다. 스피노자와 메이어는 이 편지를 무한에 관한 편지(Letter on the infinite)1)라고 불렀다.
간결하고 철저한 그것(그 편지)의 특징은 저자 자신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는 마지막에서 “나는 간략하게 당신에게 ... 이 무한에 대한 의문을 다루는 문제에서 발생해 왔던 오류와 혼동들의 원인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이들 오류들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설명했다. 즉 만약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내가 다루지 않고, 그것의 해결(해답)이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아주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무한에 관계된 의문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2)
우리는 이 마지막 구절에서 이 편지가 무엇보다도 추정적인 특질(refutative quality)을 제시하며, [그것이 그것의 모호함을 여기에 빚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 이론은 직접적이지 않게(간접적으로) 설명되는(expounded) 것이 아니라, 오류의 원인을 밝힘으로써 지시된다.
이들 원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물들 사이의 혼동들이고, 둘째로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혼동인 그러한 혼동들의 원인이며 단지 우리의 정신들(cognitions) 사이의 혼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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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무한에 관련된 난점들은 우리가 여섯 개의 다른 경우들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야기되는 세 가지 종류의 혼동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들 여섯 가지 경우들은 세쌍의 대립되는 용어들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쌍
1. 그것의 본질에 의해 혹은 그것의 정의에 의해 무한한 사물.3)
2. 그것의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에 의해 한계가 없는 사물.4)
두 번째 쌍
3. 한계가 없는 한에서 무한한 사물.5)
4. 그것의 최대와 최소를 알지만 그것의 부분들을 수로도 나타낼 수 없는 한 무한한 사물.6)
세번째 쌍
5. 상상(표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성(understanding)의해서 나타낼 수 있는(representable) 사물들.7)
6. 이성과 상상 모두에 의해서 나타낼 수 있는 사물들.8)
각 쌍들의 두 가지 경우들을 혼동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즉 (a) 어떤 무한이 부분들로 분리될 수 없고 부분들 없이 존재하는가, (b) 반대로 어떤 것이 모순 없이 분리 가능한가, (c) 어떤 무한이 난점 없이 다른 무한보다 큰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가, (d) 반대로 어떤 무한이 그렇게 파악될 수 없는가.9)
우리는 이들 여러 경우들을 이 순서로 살펴볼 것이다. 끝에까지 이들 네 번째 경우의 토론이 근거하고 있는 기하학적 예의 분석을 간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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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그와 같은 혼동을 피하기 위한 예비적인 조건은 자연 속에는 영원 속의 실체와 지속 속의 양태들만이 현존한다는 기본적인(토대적인) 진리를 염두에 두는 것이다.10)
Ⅳ. 경우 1. 그것의 본질에 의해 무한한 사물.
이것은 실체의 경우이다. 그것의 본질에 의해 필연적으로 현존하는 실체는 모순 없이는 유한한 것으로 파악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그것의 본질에 의해 실체가 그 자신의 현존을 그것의 존재의 전체적 확장(expanse)속에 필연적으로 위치시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가분적인 것으로 파악될 수 없는 데, 왜냐하면 분리(partitioning)는 유한성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본성상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이다. 이것은 영원성에 대해서도 동일한데, 왜냐하면 영원성이란 필연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현존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11) 그리고 크기도 그것이 물질들의 연장으로서 파악되는 한 그렇다.12)
Ⅴ. 경우 2. 그것의 원인에 의해서만 제한이 없는 것.
이것은 양태의 경우이다. 양태는 그것의 본질의 이유에 의해 무한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의 본질은 그것의 현존을 필연적으로 감싸지(envelop)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영원성의 개념(the concept of eternity)13)아래에서 사유될 수 없다. 모순 없이 현존하지 않고 존재하기 시작하며 그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그것의 현존은 유한과 양립할 수 있고, 이러한 이유로 가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속의 개념 14)아래에서만 사유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에 의해 산출될 때 그것은 그것의 원인의 이유(reason of its cause)에 의해 무한하다고 해야만 한다. 사실상 신의 능력은 그것이 한 양태의 단일한 본질을 통해 알려지는 한 조금의 내적인 제약(restriction)도 없이 그것의 양태의 현존을 확증 즉 산출하고 보존한다.15) 이런 방식으로 무한은 감싸지는(enveloped) 데, 왜냐하면 무한은 “모든 본성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 확증(the absolute affirmation of the existence of any nature whatever)”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16) 결과적으로 모든 양태는 그것의 신적인 원인과의 관계에서 “제한이 없는” 혹은 무한한 것으로, 최소한 그것을 확증하는 내적인 힘에 관련된 것으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그것의 현존을 감싸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절대적인 확증을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파괴할 수 없게(invincibly) 그것의 실무한을 감싸지 않으며, 그것의 확증의 가능성을 부분 속에만 열려 있게 내버려둔다. 따라서 내적인 힘의 무한은 현존하기 위한 그리고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비한정적인 경향(indefinite tendency)에로 환원된다(resolved).17)
그래서 만약 양태의 현존 혹은 지속이 모순 없이 제한되거나 나누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얻게되는 한계는-양태의 본성에 의해 배제되지 않은 채- 그것의 외부에 있는 사건들과 같이 우연적이고, 외부의 사물들-즉 이것 없이는 그것이 그 자체로 무한하고 불가분적인 것으로 보이는-에 의해 야기된다. 사물은 여기에서 한계를 가질 수 없는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 데, 왜냐하면 그것은 한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그것이 왜 시간을 철저히 배제하지 않고, 따라서 “무한정적인 시간”18)을 감싼다고 말해져야만 하는지의 이유이다. 이런 방식으로 그것은 “그것의 본성의 귀결에 의해 혹은 그것의 정의에 의해”19) 선천적으로(a priori) 절대적인 모든 제한을 배제하는 무한과 본질적으로(essentially) 구별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데카르트적 무한정과 유사한데, 이 무한정은 제한의 설정(positioning) 혹은 배제를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데카르트적 무한정과는 다른 데, 왜냐하면 데카르트적 무한정이 무엇보다도 사물의 유한성 혹은 객관적인 무한성 사이에서 결정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서 결과되는 우월적으로 주관적인(eminently subjective) 것인데 반해, 그것은 원인의 무한성과 본질의 유한성에 의해 존재하는 객관적인 무한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부터 지속은 이중적인 측면에서 제시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A. 만약 우리가 양태를 그것의 현존을 산출하고 유지하는(지탱하는) 내재적 원인의 내부로부터 고찰한다면, 그 현존의 지속은 무한하고 불가분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무한성에 의해 그것의 현존하는 능력이 현실화되든지(actualized) 혹은 그렇지 않든지간에 지속은 언제나 양태의 내부에서 그것의 근원(root)에 있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즉 제한 없는 절대적 혹은 무한한 확증일 것이다. 이것이 왜 신이 그 자신과 모든 사물들을 창조하는 능력의 무한성에서의 분리하면서, 그것의 지속이 그것을 무한정적이고 불가분적인 경향성(conatus)으로 위치 지우고 구성하는 것 속에서부터 파악할 때 나타나는지의 이유이다.20)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속 속에서 경험하는 것이다.21)
B. 만약 우리가 양태를 그것 속에서의 현존의 절대적인 원리가 아니라, 그것의 본질 속에서- 비록 무한하고 불가분적인 능력의 감쌈을 통해 현존해 나갈 수 있지만, 동시에 이 능력이 그것을 현존케 하도록 만들 필연성을 감싸지 않는-고찰한다면, 그것의 지속은 유한하고 가분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미래적 현존(future existence)이 그것의 현재적 현존으로부터 언급되지 못하는 것처럼 그 현존은-우주 속에서 그것으로 하여금 이러저러한 하나의 장소를 필연적으로 가지게 하는 유한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서의 추상 속에서 고려된- 그 자체로 우연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즉 거기에서처럼 쉽게 여기에서도 임의적으로 존재할 수 있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양태의 본질과의 관계에서 우연적인 것이다. 즉 그것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이 양태의 현존이 그것을 필연적으로 결정하는 외부의 사물로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오로지 우주적인 맥락 즉 자연의 공통적인 질서만이 그것을 연쇄(series)속에서 이러저러한 하나의 위치를 필연적으로 가지게 하는 것이다.22) 본질과의 관계에서의 이러한 우연성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것의 개념을 최소한 손상시키지 않고 (양태의) 지속과 현존을 위치 지울 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것을 더 크거나 혹은 더 작게 그리고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실체 혹은 영원성을 가지고 수행하기 원하는 것과 반대되며,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불가분적인 필연성을 가진 조작(operation)이다.23) 따라서 지속은 “한 종류의 양(quantity)으로 추상적으로 파악된 것”24)이다.
사물들의 지속에 대해 성립하는 것은 물체들의 크기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그것이 그것을 야기하는(cause) 신적인 능력을 감싸는 한, 모든 개별적인 물체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는 내적인 경향성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것의 본성은 그것의 현존을 제한하거나 나눌 수 있는 어떤 것 속에도 없다. 따라서 이것은 그 자신에 동일한 것으로 남겨지고 외부적인 원인들이 그것을 제한하거나, 파편화 시키거나 파괴하기 위해 간섭하지 않는 한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그것의 현존을 필연적으로 감싸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마음대로(at will) (외부의 장소에서 필연적으로 결정하고 그것의 현존을 유한한 것들의 우주 내부에로 제한하는 자연의 질서를 고려하지 않고) 존재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혹은 제한 되거나 파편화되거나 더 크게 혹은 저 작게 그리고 부분들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서 크기는 실체로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이고 추상적으로 연장의 양태 모두에 공통적인 성질로서 파악된다.25) 그래서 그것은 무한하게 분리 가능한 양으로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불가분성과 무한은 양태 속에서 실재적인 것이고 우리가 그것의 존재의 핵심에서 영원성의 주요한 불가분성과 신의 무한한 능력 즉 그것의 내부에서 그것을 현존하게 하고 지속하게 하는 내재적인 힘의 직접적인 원인을 보기 위해 그것의 내부에로 들어가자마자 나타난다. 분리에 대해서처럼 이것은 그것에 대해 외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아무 것도 없이 우연에 의한 것처럼 양태가 생기게(befall) 한다. 마지막으로 무한한 시공간의 가분성(,determinable ad libitum)은 단지 내적인 힘의 우연적인 제한성에서 나온 상상에 의해 서서히 나아가게 되는(forged)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고, 그 자체로 가분적인 것은 양태의 현존을 계속되게 하고 지탱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 제한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의 유한성 속에서 그 진정한 기초를 가진다. 반면에 그것은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불가분적이면서 그것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실체 속에서 기초를 갖지 않는다.
Ⅵ. 경우 3. 제한이 없는 한에서 무한인 사물
앞선 쌍의 두 번째 경우의 사물은 그것의 원인에서 무한하기 때문에 제한이 없다(nullos fines habet vi suae causae)라고 말해졌다. 이제 그것은 제한이 없기 때문에 무한하다(infinitum quia nullos habet fines)라고 말해진다. 무한은 여기서 그것의 원인 혹은 이유와는 독립적으로 그것이 외적으로(externally) 표현하는 것에 의해 무한으로 지각된다. 그리고 사물들의 질서의 역(reversal)에 의해 그것의 표현-그것의 제한이 없는 존재의 특성-이 그것의 이유(quia, 등)로서 제시된다. 실재로 사물은 그것이 무한하기 때문에 제한이 없는 것이고, 그것의 본질이 어떠한 제한도 절대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에(실체) 혹은 그것이 제한을 포함하지 않는 무한인 한에서 그것의 원인이 그 자체로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들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양태) 무한이다. 이 무한은 그것이 그것의 실재 이유의 외부에서 외적으로 보여지는 한 상상이 그것을 지각하는 대로의 무한이다. 상상은 사실상 무한을 그것의 제한이 실재로 파악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엄격하게 말해 제한을 발견해 낼 수 없는 우리의 주관적인 무능력에서만 결과되는 무한정이다. 따라서 이 개념은 상상이 그것의 제한에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인 크기의 무한에 적합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그러한 제한이 불가능하다라고 확증할 수 있는 어떠한 이유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제한이 없는 한 우리에게 상상에 의해 드러난(represented), 그리고 오로지 우리가 그것에 어떠한 제한도 분명하게 할당할 수 없기 때문에 무한인 이 무한 이외에, 그것 자체로 필연적으로 제한이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그리고 우리의 외부에서 현행적으로(in act) 현존하는 것으로 놓여지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다른 무한이 존재하는 데, 이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본질에 의해 무한인 무한은 아니다. 즉 그것은 신의 절대적인 본성(그것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으로부터 나온 양태의 무한이다. 이것은 유한 양태들의 본질 혹은 우주 전체의 얼굴과 같이 유한 양태의 현존의 전체를 포함하는 실체 자체의 무한과 정확하게 같은 무한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실체인 그 자체와는 다른 사물을 통해 무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자신의 본성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제한을 배제시키는 실체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실제로 그것이 재한되었다면 실체의 부분은 변용들을 박탈당했을 것이고 따라서 소멸 되었을 것이다(annihilated). 이 부분적인 소멸에 의해 실체는 그것의 본질에 상충되는 무한이 되었을 것이다.26) 따라서 이 양태의 무한은 주로 제한이 없다는 것 혹은 무한한 넓이(immensity)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에 의해 현존하는 것에서 다른 양태들과 같이 무한히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그것의 분리는 실재로 그것의 본성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그것의 가분성은 실체의 본성에 의해 그것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다. 반대로 후자는 양태가 내부적으로(interiorly) 무한까지 나누어질 수 있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것의 무한한 넓이(immensity)를 제약할 절대적인 제한에 의해 유한으로 바뀔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무한한 넓이(immensity)인 그것의 무한은 다른 모든 종류의 무한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현존에 대한 절대적으로 내적인 확증인데, 왜냐하면 모든 무한은 “그것이 무엇이든 임의의 현존의 절대적인 확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일 양태들의 경우에 발생하는 것과는 반대로 외부로부터 아무것고 그것의 실재화(actualization)를 제약할 수 없는 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체의 절대적인 본성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변용 되기 때문이다.27) 따라서 이것은 그것의 원인의 이유-신의 능력-에 의해 무한일 뿐 아니라 무한 그 자체인 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의 유한한 결과일 뿐인 그것의 원인으로 인해 무한인 단일한 양태와는 반대로 이 무한한 원인의 결과인 무한이기 때문이다.
Ⅶ. 경우 4. 그것의 부분이 최대와 최소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에 의해서도 나타내어질 수 없는 한에서 무한인 사물.
경우 3의 경우의 무한의 정의가 이성뿐 아니라 상상도 지시하기 때문에 우리 외부의 무한의 실재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것은 무한이 우리가 그것의 많은 부분들을 결정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큰(nimia magnitudine)28)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셀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지나치게 큰 것은 어떤 경우든 무한 그 자체를 함축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의 부분들이 아무리 많다고(numerous) 해도 그것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수를 가진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크기에 의해서 지시할 수 있는 그러한 무한은 매우 큰 어떤 것일 뿐 실재로 무한인 어떤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왜냐하면 수에 의해 모두 세어질 수 있는(totaled) 것은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유한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이 사물의 부분들은 그들의 수를 할당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넘어설 뿐이다. 그들 자체로는 모든 수들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상 수에 의한 이 무한의 부정은 상상에서 나온 오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오류는 공간에 의해 분명해진다. 즉 비록 극한과 극소의 경계 안에 포함되고 원하는 것만큼 작아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각각의 것은 무한이고 그들의 크기의 매우 큰 크기에 의해 따라서 그들의 부분들의 매우 큰 크기에 의해 무한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무한도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에 의해 설명될 수 없다라고 주장된다. 즉 만약 모든 무한이 수를 넘어선다면 그것은 매우 많은 부분들을 포함하기 때문이 아니라 본성에 의해 수에 의해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뒤에서 다루어질 기하학적인 예에 의해 설명될 것이다.29)
Ⅷ. 우리는 실재로 네개의 질문 a, b, c, d에 대해 필수적인 대답을 했다.
a) 부분들로 나누어진 채 존재할 수 없고 부분들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실체의 무한으로 그것의 본질에 의해 그렇게 존재하는 것으로 언제나 현행적(actual)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제한, 분할 혹은 분리도 그것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b) 모순 없이 가분적인 것은 양태의 무한으로, 이것은 그것의 본질이 아니라 원인에 의해서 무한으로 존재하며 제한과 분리에 의해 그것의 본질이 파괴되지 않는다.
c) 어려움 없이 다른 것보다 더 큰 것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가분성을 배제하지 않고 모든 단일한 양태들에 포함되는 모든 무한이다.
d) 그렇게 파악될 수 없는 것은 1) 절대적으로 모든 가분성을 배제하는 실체의 무한, 2) 그 자체로 무한히 분리 가능한 것이지만 그 위에서 실체가 그것의 제약(restriction)을 배제하면서 immensity를 부가하는 실체의 직접적인 양태 혹은 유한 양태들의 총계(합)의 무한이다.
그러나 이들 대답들, 특히 질문 c에 관한 대답은 설명을 더 필요로 한다. 이 보충은 우리를 존재론적 단계에서 gnoseological 단계로 옮겨 놓은 경우 5, 6의 연구에서 발견될 것인 데,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식들(cognitions) 가운데의 혼동 속에서 지금까지 비판되어(denounced) 온 사물들 사이의 혼동의 이유들 혹은 ‘원인들’을 발견하도록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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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 경우 5와 6 : 이성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사물들과 이성과 상상에 의해 알려지는 사물들.
그들의 자명성에도 불구하고 위의 네 가지 진리들은 보통 무시된다. 이 사실은 그들의 대상들의 본성보다 그들을 인식하는 우리의 앎의 방식에 의해서 설명된다. 그것은 사실상 우리가 이들 대상들을 이성이 아니라 상상에 의해 인식할 때 발생한다. 그래서 이들 두 종류의 앎을 구분하고, 그들의 대상들에 대한 관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성은 본질들을 안다. 상상은 오로지 현존들만을 알뿐이다. 이성은 사물들을 그들 자신 속에 있는 것으로(as they are in themselves, ut in se sunt) 안다. 상상은 우리의 육체에서 결정하는 변용들만을 파악할 뿐이다. 따라서
1. 실체는 상상에 의해 알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육체의 변용들의 지각에 한정된 상상은 양태들만을 알뿐이다. 따라서 그것(실체)은 이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 그것의 inseity와 perseity를 파악할 수 있는 이성만이 실체를 원인 그 자체, 본질에 의해 영원하고 무한한 것 즉 필연적으로 무한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불가분하다. 따라서 이 절대적인 불가분성은 영원한 것에 그리고 연장된 실체에 속한다.
2. 양태는 이성과 상상에 알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에 의해서는 혼동되게 이성에 의해서는 바르게 알려질 수 있다.
상상은 양태를 그것이 양태들인 육체의 변용들을 지각하기 때문에 지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양태들을 실체의 양태들로 지각하지 않는 데, 왜냐하면 그것은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양태들을 혼란스럽게 아는 데, 왜냐하면 양태의 명석 판명한 앎은 오직 실체의 앎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앎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양태를 알고 그것들은 실체의 양태들로 지각하는 데, 왜냐하면 이성은 실체를 알기 때문이다. 이성은 양태들을 올바르게 아는 데, 왜냐하면 이성은 양태들을 실체 속에서 그리고 실체를 통해서 알며 “어떻게 양태들이 영원한 사물들에서 나오는 지”30)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성은 양태들의 지속의 본성을 원리에 따라(on principle)(lived duration) 무한하고 불가분적인 것으로 옳게 알며, 동시에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불가분적인 동일한 연장된 실체의 다양하고 연속적인 변용들(modifications)로서 지각하는 사물들의 본성과 그들의 다양한 크기들을 안다.
Ⅹ. 따라서 만약 상상될 수 없고 오직 파악될 수 있을 뿐인 사물을 상상할 수 있는 사물들과 혼동한다면, 그리고 한 사물 속에서 상상되는 것과 파악되어야만 하는 것을 혼동한다면, 자연의 앎은(자연을 아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류에 빠지게 된다. 상상에 의해 이성의 빛이 어두워진 정신에 피할 수 없이 발생하는 이 오류(perversion)는 두 가지의 근본적인 오류들(이 중 하나는 3중적이다)로 변하고, 이것들로부터 무한한 것과 가분적인 것에 관계된 해결할 수 없는 모든 문제점들이 발생한다.
1. 양태들은 상상에 의해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알려진다. 왜냐하면 양태들은 오직 실체 속에서 실체를 통해서만 연합되기 때문이고, 이것은 바로 상상이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상은 불가피하게 양태들을 실재로 분리된 것 즉 실체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상상은 양태들 속에 적절한 연속적인 것의 가분성(the divisibility of the continuous) 대신에 불연속적인 것의 가분성(the divisibility of the discontinuous)을 도입한다.
이것이 첫 번째의 오류이다.
2. 무한 실체의 양태들을 실재로 분리된 실체들로 변형시키면서 상상은 실체를 그것이 양태들을 지각하는 것만큼 많은 유한 실체들로 쪼갠다.
이것이 두 번째의 오류이다. 그리고 이 오류는 3중적이다.
a) 오직 양태들에만 속하는 가분성이 절대적으로 그것을 배제하는 실체에 주어진다.
b) 게다가 이 가분성은 양태들에로 적절하지 않게 부여된 불연속적인 것의 가분성이다.
c) 마지막으로 모든 실체는 무한한 것으로 가정되는데, 이것은 사각형의 원을 가정하는것 만큼이나 불합리한 것이다.
직접적으로 무한과 가분적인 것에 관련된 모든 전통적인 난점들이 따라나온다. 왜냐하면 실체의 무한이 유한 실체들 즉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들의 무한에로 환원되는 한 우리는 그것을 유한한 사물들 혹은 부분들의 첨가로부터 결과된 것으로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파악하도록 강제된다.)그래서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인 무한(실체의)을 가분적인 것에 의해 그리고 부분들이 없이 존재하는 것을 부분들에 의해 설명해야만 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무한하게 가분적인 무한(양태의) 역시 이들 양태들을 무한히 첨가함으로써 설명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것이 실체의 불가분적인 무한에 대한 질문이든 양태의 가분적인 무한에 대한 질문이든 간에 무한은 어디에서나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에서부터 언급(지시)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해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한을 유한에 의해 설명하는 주장이고 삼각형 혹은 사각형을 원으로 구성하기 원하는 것만큼 혹은 본질을 그것을 부정하는 본질에 의해 구성하려는 것만큼 의미없는 노력이다. 이것으로부터 유한 대신에(on behalf of) 무한의 부정에 의해서만 피할 수 있는 많은 불합리한 결론들(consequences)이 야기된다.
Ⅺ.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것에서 이 정리가 따라 나온다. “무한은 그것의 부분들로부터 지시된다.” 이 정리는 다음의 두 가지 근본적인 오류들의 공통된 원인이다. 그 하나는 실체의 불가분성을 부정하여 그것이 유한하다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의 양태들의 무한한 가분성을 부인하여 그들의 크기가 유한하다라고 주장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의 반박은 사실상(ipso facto) 다른 하나의 부정이거나 혹은 더 낫게는 이들 두 반박들이 그것의 부분들로부터 무한이 지시될 수 없다는 것을 즉 불연속성이 허구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는 하나의 반박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예를 들어 실체가 하나의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인 무한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선(point)이 무한하게 가분적인 무한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반대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양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불합리성(absurdity) 즉 실체가 부분들로 구성되고 선이 점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가정(postulate)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에 의해 철학자들이 습관적으로 연장된 실체가 유한하다는 것을 보이려고 한 이들 모든 논증들의 혼란이 스스로를 망쳤다. 이들 모든 논의들(discourses)은 부분들로 구성된 물질적인 실체를 전제한다. 같은 방식으로 다른 저자들은 선이 점들로 구성되었다라고 확신한 후에 선이 무한히 가분적이지 않다라는 것을 보이는 많은 논증들을 발견하려고 해 왔다.”31)
양태의 연속성을(혹은 무한한 가분성을) 증명하는 것은 실체의 절대적인 불가분성을 증명하는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양태에 의한(qua modes) 양태와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실체의 동일성과 공통성(community)을 통해서만 그들에 속하는 단순한 양태적 구분은 오직 실체를 통해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연속적인 것의 끝없는 가분성, 즉 양태들의 가분성 역시 참으로 분리된 부분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분리를 필요로 하는 불가분적인 절대의 [그것들] 속에서 파괴될 수 없는(indestructible) 생존(subsistence)을 통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성되거나 절대적으로 무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태들 속에 내재하는 이 절대적인 불가분성은 그들의 실체의 절대적인 불가분성이다.
그러나 상상이 분리된 것으로 즉 비연속적인 것으로 파악된 그것의 양태들의 묶음(aggregate)에로 환원시키는 이 가분적인 실체는 정확하게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우리가 크기를 가장 빈번하고 쉬운 경우인 상상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가분적인 것, 부분들로 구성된 것 그리고 복합적인 것(multiple)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이성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사물이 그 자신 속에 있는 것으로(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지각된다면(이것은 매우 어려운 것인데), 내가 좀 더 쉽게 충분히 증명한 것과 같이 우리는 그것을 무한하고 불가분적이며 그리고 유일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32)
따라서 실체의 앎이 이성에 의해 도입되자마자 무한과 가분성의 동시적인 확증(simultaneous affirmation)에 의해 야기된 문제점들은 사라질 것이다. 어느 하나와 다른 것 사이에 위치하는 그리고 독단주의자들이 후자에 의해 결정하는 대안은 지금부터는 전자에 의해 해결된다. 그것의 필연적인 무한의 결과로서 실체는 모든 가분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가분성을 그 자신의 외부로, 즉 그것의 양태들의 무한으로 몰아낸다(cast).
그러나 따라서 우리는 양태 속에서 무한과 가분적인 것의 동시적인 확증을 재발견하지 않을 것인가? 확실히 이 시대에만 하나의 문제나 대안을 제기하지 않고 정당하게 그랬던 것은 이제는 더이상 실재적으로 분리된 부분들로의 분리의 의문일 수 없다.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양태들이 파악되는 실체의 절대적인 불가분성에 의해 가분성-즉 비연속적인 것의 가분성-은 엄격히 말해비연속적인 것의 가분성에 의해 미리 배제된다. 여기에서 실재로 분리된 것이 아닌 부분들은 결코 그 자신 속에서 하나의 확증된 크기를 구성할 수 없다. 이 크기는 우리에게만 확증할 수 없는 것일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그들의 총체를 지시하거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유한하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에 모든 자기 결정적인 총체화(self-determined totalization)를 벗어나면서 그들의 총체성은 실재하는(in act) 하나의 무한으로 확증되어야만 한다. 요약하면 가분적인 것과 유한은 더 이상 불가분적인 것과 무한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그때부터 그들과 화해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불가분적인 것과 무한한 것의 형식 아래에서 파악되기 때문에 가능한 데, 왜냐하면 연속적인 것은 모든 실재의 분리와 모든 유한한 분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각각 내부적으로(interiorly) 무한한 것으로 파악되고, 모두 함께 무한을 구성하는 것으로 파악된 유한한 사물들은 본성에 의해 무한인 것의 절대적인 가분성의 2차적인 측면 혹은 직접적인 표현일 뿐이다.
Ⅻ. 이들 결론들은 다른 세 가지(의 결론들)를 지지(support)한다.
1. 본성상 절대적으로 무한하고 불가분적으로 존재하는 그리고 본성상 양태들을 산출하는 실체는 무한히 많은 수의 그것들(양태들)을 산출할 수밖에 없다.33) 따라서 양태들은 불연속적일 수 없는 데, 왜냐하면 이 경우 그것들은 유한한 크기의 유한한 부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 무한하게 가분적인 양태들의 원리인 실체는 그 자체로 불가분적인 데, 왜냐하면 가분성은 그것의 변용들의 성질(property)이며, 그것은 그 자신의 변용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a) 그것은 그것들(양태들)에 앞서는 것(anterior)이다.34) b) “그것은 그것의 진리 속에서 파악될 수 있고, 누군가 그것들을 무시하는 경우에만 그 자신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35) c) 그것은 그들의 원인이고, 그리고 원인으로서의 원인과 결과로서의 결과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적인 것이 없다.36)
ⅩⅢ. 모든 양태의 무한한 불가분성이 실체의 절대적인 불가분성37)을 감싼다(envelop)고 말하는 것은 이 실체가 그것의 본성을 고려할 때 각각의 양태들 속에서 완전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이 결론은 바로 불가분성의 개념에서 자명한데, 왜냐하면 본성상 불가분적인 것은 그것이 어디에 존재하든 지간에 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 즉 “부분과 전체에서 동일하게 존재하는 것”38)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그것의 본성을 고려할 때 동일하게 즉 완전하게(entirely) 각각의 양태들 속에 있는 것처럼 그것의 양태들의 총체 속에 존재하며, 그것이 각각의 부분들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각각의 양태들 속에, 그리고 이들 부분들의 각각의 부분들 속에서 처럼 그들 부분들의 각각에 등등으로 무한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두 가지의 다른 방식 속에서 발견된다. 즉,
1. 그것의 본질을 정의하는 속성을 통해서. 예를 들어 물질적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연장은 그들 각각에서처럼 모든 물체들 속에서 완전하며, 이것은 그것에 의해 그들이 자신들 속에서 동일하고 그것과 동일한 한 공통 성질(common property)과 거의 같다. 사실상 연장의 본성은 완전한 것으로 남기 때문에 즉 그것의 분자들(particles)의 가장 작은 것속에서도 그것의 본질(what it is)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에 고유한(proper) 불가분성과 함께 여러 물체들의 모든 부분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다(present).39)
2. 이 본질이 정의하는 실체를 통해-[그것이 그들 각각의 내부에서 그들을 현존케하는 개별적인 원인이며, 실체의 본성을 각각의 양태들 내부에서 이 실체의 관념이 전체와 부분의 관념 속에서 동등하게 감싸진 결과로서 간주될 때 그것의 전체성(entirety)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실체인 한에서.]40)
따라서 그것이 크든 작든 간에 모든 양태는 스스로의 내부에서 완전하게 그것에 주어진 무한 실체의 불가분성을 감싼다. 반면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그것의 정의에 의해 그것은 가분성을 받아들여야만(admit) 한다. 그러나 이 가분성은 무한한데, 왜냐하면 분리는 다른 양태들로부터 혹은 그것(양태)에 내재하는(immanent) 불가분적인 실체로부터 결코 그것(양태)을 실재로 분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각각의 부분(혹은 양태) 속에서 우리는 그것의 완전한 상태(integrity) 속에서 현행적으로(in act) 그것(부분 혹은 양태)에 무한한 가분성을 허용하는 동일한 불가분적인 무한을 재발견한다. 게다가 불가분적인 무한과 함께 이 무한한 가분성은 각각의 양태들의 영역에 한정되는(circumscribed) 그것의 기저를 이루기 때문에(underlies), 구별되는 여러 양태들이 존재하는 만큼 많은 무한하게 가분적인 무한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연장의 속성에 대해 여러 크기의 양태들 혹은 물체들이 존재하는 것만큼 많은 그 자신의 방식으로 무한하게 가분적인 여러 크기의 무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다른 크기의 무한들 아래에는 또한 다른 무한들보다 더 작거나 클 수 없는 동일한 크기(same identical)의 무한이 다시 말해 각각의 무한들 속에서 동등하게 완전한 실체의 무한이 항상 존재한다. :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어떤 무한이 어려움 없이 다른 무한보다 더 큰것으로 알려질 수 있는 지, 그리고 반대로 어떤 무한이 그렇게 알려질 수 없는지를 알게 된다.” 더 크거나 작은 무한은 한 양태의 제한 내에 포함된 것으로 지각된 그 자체로 불변하는(invariable) 실체의 무한이다. 여기서의 제한들은 다른 양태들에 의해 어느 정도(more or less) 제약된 것이다. 서로서로 더 크거나 작은 이들 무한들은 아래에서 언급된 기하학적 예에 의해 제시된다.
이들 결론들은 필요한 변경을 가하여(mutatis mutandis) 모든 속성들과 그들의 양태들에 대해 성립하고 따라서 사유에 대해서도 성립한다. 불가분적인 사유하는 실체(thinking substance)는 그것의 본성들을 고려할 때 그것의 완전성 속에서 각각의 사유의 양태들에 부여되기 때문에, 실체의 관념과 그것의 양태의 관념은 동등하게 즉 그것의 완전성 속에서(in its completeness) 전체와 부분들 속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무한한 이성(understanding) 아래에서 완전한 그것은 또한 그 이성의 각각의 부분들 속에서 즉 모든 영혼들 속에서 완전하다. 이것이 왜 무한을 알고 있는 모든 영혼이 그들의 본성에 따라서 그것으로부터 신이 그들을 알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있는가의 이유이다. 즉 (그러한 모든 영혼이) 모든 사물들은 아니라도 최소한 그것의 유한한 본성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것으로부터(말하자면 무한한 것으로부터) 연역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모든 사물들을 참으로 알 수 있는지, 그리고 타당하게 알 수 있는지의 이유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실체의 불가분성과 그 양태들의 무한한 가분성의 이론이 지식 이론(theory of knowledge)에서 근본적인 것인지를 안다.
ⅩⅣ. 그러나 다른 무한들에 비해 더 큰 다양한 실무한들의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합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들은 반대하기를 이들 무한들은 그것의 다른 크기에 따라 각각 더 크거나 더 작은 수의 부분들을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 각각에서 이 수는 동일한 것이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각각에서 그것은 어떤 할당 가능한 수도 넘어서야(surpass)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커야 하며, 그리고 모든 수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어느 정도 큰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무한들보다 큰 무한들의 개념은 모순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한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가 너무 커서(nimia magnitudine)41) 우리의 이성으로 하여금 그것에 하나의 수를 할당하지 못한다는42) 이유에서만 그렇게 된다고 판단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사물은 그 자체로 무한하지 않으며, 오로지 우리에 대해서만 무한이다. 즉 실체에서 오직 하나의 유한한 사물일 뿐인 무제약적인 어떤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부분들의 모든 크기들은 언제나 하나의 수를 구성하며, 그리고 확정적인(determinate) 모든 수들은 유한하다.
ⅩⅤ. 이들 반대들은 두 가지의 원리에 근거한다. 첫 번째 원리(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에 의해 무한한 것은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로부터 지시된다. 두 번째 원리에 의해서 수는 그 자체로 모든 크기들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competent). 이들 두 원리들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는 데, 왜냐하면 첫 번째 원리를 확증하는 것은 무한한 것이 하나의 수적인 조작(기호)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를 확증하는 것은 전체가 부분들의 크기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두 원리들은 수(number)가 우월적으로(sovereignly) 자연과 우리의 이성을 지배한다는 공통의 가정로 환원된다. 이것은 반면에 후자(두번째 원리)로 하여금 그것 속에서 부인할 수 없게(invincibly) 확증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부인하도록 한다. 즉 실체가 절대적으로 불가분적이며 양태가 무한히 가분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도록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수의 요구들(pretensions)을 비평하도록 허용함으로서 우리 자신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는 분명한 모순이 결과된다. 이것이 그것의 기원과 본성을 추구하는 것 즉 그것의 창세기(genesis)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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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 용어 번역
infinity : 무한, the infinite : 무한한 것, divisibility : 가분성(可分性), the divisible : 가분적인 것 혹은 나눌 수 있는 것, indivisibility : 불가분성(不可分性), the indivisible : 불가분적인 것 혹은 나눌 수 없는 것, in itself : 스스로 혹은 자신 속에 , limit : 제한, restriction : 제약, definite : 한정적, indefinite : 무한정적, envelop : 감싸다, exist : 현존하다, be : 존재하다, essence : 본질, nature : 본성, perceive : 지각하다, conceive : 파악하다, know(ledge) : 알다(앎), actual : 현행적, in act : 현행적으로, the cotinuous : 연속적인 것, the discontinuous : 불연속적인 것, property : 성질
ⅩⅥ. 수와 그리고 이와함께 측정(measure)과 시간이 대부분의 정신들에 이성의 최고의 관념들이며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들로 제시된다. 그들의 이러한 명성(prestige)은 그것들이 지닌 관계들의 필연성과 함께 그들의 극단적인(extreme) 추상과 보편성, 그리고 유용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지성에 기만적으로(fraudulently) 들어와서 우리의 오로지 앎의 파멸을 재촉하고 완성시키는 침입자이다.
이들 세 관념들[즉 수와 측정과 시간]은 사실은 이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이 존재의 삼중적 성질(quality)를 제시한다.
a) 상상의 산물들 즉 사유의 존재들(Beings of reason)43) 혹은 더 정확하게는 상상의 존재들44).
b) 앎의 결여들(Nothings of knowledge).
c) 단순히 상상된 사물들의 개념을 용이하게 할 수 있을 뿐인 상상의 부가물들(aids of the imagination, auxilia imaginationis).
a) 상상의 산물들 - 상상은 비유적인 과정들에 의해 세가지 모두를 발생하게 한다. 지속을 결정하도록 하는 시간과 양을 결정하도록 측정45)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이 적용되는 대상들 속에서만 다른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지속에 적용된 측정일 뿐인 시간은 양의 한 종류와 (측정에 그것을 단순한 수치를 정하는 것(simple evaluation)과 구별하는 정확성을 주는) 수로 추상적으로 파악된다.46) 따라서 시간, 측정, 그리고 수는 어떤 측면에서 유사한 혼동과 추상, 그리고 제한의 과정들에서 결과된 분리할 수 없는 개념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에 엄격하게 동일한 기원을 주는 오류를 범하게 될것이다. 즉 만약 예를들어 우리가 시간이 운동의 수(아리스토텔레스) 혹은 추상적인 공간을 구체적인 지속(베르그송)에서 찾는 측정에서 나온것으로 상상한다면. 그러나 그것들은 다른 기원을 가지는 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각각 다른 어떤 것, 즉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들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측정은 연장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추상적인 앎으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즉 실체로부터 분리되고 그것들의 공통적 성질로서 양태들 안에서만 파악된 크기는 그들 자체로 가분적이고 구성적이며 복합적인 것으로 추상적으로 알려진 이들 양태들과 함께 위치지워 진다. 따라서 측정에 의해 그것의 한계를 결정할(delimit) 수 있다. 시간은 영원한 사물들을 그것이 나온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자연의 질서로부터 독립적으로 파악되어 마음대로 우연적이고 변화가능하며(variable), 그리고 가분적인 것으로 지각된 양태들의 현존(혹은 지속)에 대한 추상적인 앎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시간에 의해 그것의 결정하는 것이 가능하다.47) 마지막으로 수는 단일한 사물들 사이의 모음(multitude)과 차이들에 대한 혼동된 앎으로부터 나온다. 즉 그것은 우리의 육체에 유사한 영향을 미치게 하는 사물들 속에만 포함될 수 있는 일반적인 특징들(general charactheristics)인 데, 상상은 그것들을 그들이 내재적인(intrinsic) 차이들 없이 세어질 수 있는 연합물들로서만 존속하는(subsist) 부류들로 나눈다.48)
이들 각각의 과정들은 사실상 그 자신의 외면적 특징(physiognomy)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서로에게 종속된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는 불연속성의 기초 즉 분리된 연합물들의 원리를 전제한다. 왜냐하면 만약 시간과 측정이 연속적인 양들 즉 지속과 크기(분리딘 양을 설명하는 수)49)를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면, 이것은 크기들을 불연속적인 부분들로 분리시키는 제한들이 양들 그 자체에 도입된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연속성을 배제하는 실체의 파악과 양태적 구별을 할 수 없는 상상에만 독특하게 속한 무능력에 속하는 것이다.
b) 앎의 결여들 - 이것은 그들의 기원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이다. 뇌에 각인된 인상들(cerebral impressions)의 혼동에서 비롯된 잉여적인 일반적 이미지(residual generic image)의 정신적 상호연결일 뿐인 그들의 일반적인 개념의 감쌈으로부터 다음의 것들이 결과된다. a) 그것들은 관념들이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실재 대상들을 제시하지(represent) 않기 때문이다.50) b) 진리가 관념과 그것의 대상과의 일치에 의해 정의되는 한 그것들은 진리없이 존재한다.51) c) 그것들은 거짓이라고 적절하게 말해질 수 없다. 그것들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52)- 따라서 그것들은 용어의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앎의 결여들이다. 따라서 사유가 그 자신을 앎속에서 본질적으로(essentially) 표현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한, 그것들은 “사유의 양태들이라기 보다는 상상의 양태들”이라고 용어를 붙일 수 있다.53)
c) 상상의 도움들.-본질에 의해 그리고 기원에 의해 지식과 진리와 소원한(foreign) 결코 관념들이 아닌 이들 사유의 존재들(Beings of reason)은 이성의 도구들(instruments)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좀더 용이하게 상상하도록 해주기 때문에 그들은 상상의 도구들이다. 사실상 ‘상상된 사물들’ 즉 육체적 변용들의 질적이고 이질적인(qualitative and heterogeneous)-즉 동일한 연합체(identical unities)들의 유사한 부분들과 분리적 특질(discrete character)의 이질성- 지각에로 도입된, 그것들(상상된 사물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들을 더 잘 ‘보유’(retain)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들을 ‘비교’하고 ‘관계’지움으로써 자신들을 더 잘 ‘설명’하도록 한다.54)
이것들은 우리가 그 가운데 우리의 육체가 자리잡고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며 그리고 육체의 삶과 죽음이 의존하는 지각가능한(sensible) 사물들의 우주속에 우리 자신들을 좀 더 용이하게 지향지울(orient) 수 있게 하는 실용적(pragmatic) 도구들이기 때문에, 만약 그것들이 참이 아니라면(고 해도) 그것들이 참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종류의 도구들에 대해서는 그들 자신의 영역에서 그들이 유효하다는(efficacious)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에 의해 스스로를 탈합리화(deration -alizing)에 전념하도록 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이들 도구들을 그것들이 그들 자신 속에서 존재하는 것처럼 사물들의 앎을 다스리는(presiding over) 관념들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래서 모든 자연 과학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전복(폐지)된다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즉 “따라서 그릇되이 이해된(왜냐하면 그들의 본질과 반대되는 것으로 다시말해 순수한 이성의 관념들로 주장되기 때문에) 유사한 관념들의 도움으로 자연의 과정들을 파악하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자신들이 모든 것을 파괴함으로써만 그리고 최악의 불합리들을 인정함으로써만 나타날 수 있는 것에서 나온 해결불가능한 난점들속에 얽매여 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55)
ⅩⅦ. 수의 그리고 관련된 개념들의 지고성을 확증하는 것은 사실상 자연을 분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곳에 분리된 것을 세우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것은 실체를 유한한 실체들의 모음으로 환원시키면서 가루와 같이 만드는 것(pulverizing)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한한 실체란 사각형의 원만큼 불합리한 괴물이다. 게다가 이것은 실체를 실체가 절대적으로 불가분하기 때문에 실체와는 상관이 없는 무한한 것과 가분적인 것의 모순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이것은 양태들을 무한한 것과 수가 상호 배제적이기 때문에 그들의 수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무한이 될 수 없는 실재로 분리된 부분들의 모음들로 분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또한 그것의 내적인 무한의 각각의 양태들을 공허하게(emptying)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약 무한한 것이 전체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부분속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그것은 다른 크기의 양태들이 동일하지 않은 무한들을 감쌀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약 무한한 것이 각각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로부터 지시되어야만 한다면, 이들 부분들의 수는 무한과 같이 각각 가장 큰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그것이 동일하다는 것인데 이는 불합리한 귀결이다. 왜냐하면 동시에 그것은 각각의 크기에 따라 달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모든 사물들의 기저(base)에서 그 자체로 불가분적이고 무한한 지속을 조각들로 만드는 것이며, 그것을 그들의 군집에 의해 재구성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속이 어떻게 경과하는 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를들어 만약 우리가 한 시간을 어떻게 둘로 나누고 여기서 나온 두 부분들을 다시 나누는 과정을 무한히 계속한다면 우리는 한 시간은 어떻게 경과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무한정적으로 나누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그것을 불가분적인 경우들의 모음들로 환원할 것인가? 그러나 이것은 지속의 결여들로 구성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우리는 단지 “0들을 더함으로써 하나의 수를 구성하기를 바라는 것”56)과 같은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수도 측정도 시간도 그것들이 단지 상상의 도움들일 뿐이기 때문에 무한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는 더 이상 수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측정도 측정이 아니며 시간도 시간이 아닐 것이다.”라는 이유에서 그러한다. “그래서 왜 많은 사람들이 이들 세가지의 사유의 존재들을 그들이 모르는 참된 본질을 소유한 실재의 사물들과 혼동하면서 무한한 것을 부인해 왔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된다.”57) 그러나 무한한 것을 부인하는 것은 자기-유지적 현존을 부인하는 것이고 따라서 신과 그리고 우주를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사물들을 야기하는(causing) 것은 신안에서 하나의 동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Eo sensu quo Deus dicitur causa sui, etiam omnium rerum causa dicendus est."58) 따라서 수의 기원과 기준은 가장 대담한(drastic)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수의 타당성을 확증하면서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부정주의(negativism)에 찬성한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ⅩⅧ. 인식가능한 것의 높은 곳들에서 상상과 생물학적 유용성의 심연으로 던져진 이러한 수의 엄청난 추락은 스피노자의 수학적 철학과 그 당시의 철학자들 사이에 엄격한 차이를 만든다. 더우기 그것은 산술과 기하학-지성개선론(De intellectus emendatione)에서 형이상학의 한 모델로 제시된, 그리고 에티카에서 그것의 방법을 효과적으로 제시하는-사이의 심연(abyss)을 열어 놓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어떻게 수에 대해 최소한 암묵적으로라도59)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특권들과 함께 영원한 진리로서의 그것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또한 현존하는 물체 이외의 어떤 지지도 갖지 않는 상상의 단순한 산물은 영원성과 관련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과 신의 이성으로 부터 즉 참인 것으로부터 배제되지 않는가? 그러면 우리는 수가 상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유(reason)의 개입을 전제하지 않는다고 의심하지 말아야만 하는 것일까? 사유의 존재는 허구(fiction)가 “사유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 의지에만 의존하는”60)한 허구에 반대되지 않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반대로 이것은 그러한 하나의 존재가 그것의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사유에 의해 인도되는 의지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전제를 허용하지 않는가? 진리는 수의 경우에 부인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의 관념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는 사물에 대한 관념의 일치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영원한 진리들이라는 이름을 특별히 관념들이 아니라 단지 이차적으로 관념들에 일치되는(accorded) 관계들일 뿐인 공리들에 적용하지 않았는가?61) 이것은 우리가 앞으로 다른 곳62)에서 명료화시키려 하는 고민스런(가시돋힌)(thorny) 질문들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지금까지보다 더 “사물들에 보다 말들(words)에 관계된 존재”를 포기해야(refrain from)만 한다.
ⅩⅨ. 수에 반대하여 야기된 이 행동속에서 그들이 명석판명한 관념들을 가졌다고 가정된 수학자들은 흔히 생각되는 것과는 반대로 참된 철학자들에 속한다.63) 그들은 사실상 월권에 의해 사용하는(usurp) 권리를 확증하는 4가지의 명제들을 거부한다.
1. 모든 것은 하나의 수에 의해 표현될 수 있다. 이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수도 표현할 수 없는, 예를들어 무리수적인 크기들과 같은 것을 지각하기 때문이다.
2. 모든 무한은 그것의 크기가 너무 커서(nomia magnitudine) 우리가 그것의 제한들을 지각할 수 없는 혹은 그것의 변형들이 어떤 경계들 속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러한 것이다. 이것은 또다른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으로 파악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변형들의 무한을 포함하는 크기들을 우리가 정확하게 아는- 두가지의 극단적인 값들(최대와 최소) 사이에 포함된 무한한 크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3. 모든 무한은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에 하나의 숫자를 할당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이것 역시 잘못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들 크기들이 그들의 부분들의 크기가 모든 할당가능한 수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수가 그들에 적용된다는 것이 그들의 본성에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이라는 가정에서 따라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동일하지 않은 무한들은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모든 무한이 오직 모든 수들 중에서 가장 큰것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라는 사실에 의해 인정되어진(authorized) 확증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의 근거에서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가 무한한 것에 적용가능하다라는 불합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 * *
ⅩⅩ. 경우 464)를 예증하는 데 사용된 기학학적인 예는 경우 3에 대한 잘못된 해석, 즉 지금까지 열거되어 온 오류들 중 두번째 것을 반박하기 위해 제시되었다.65) 따라서 이 예는 두번째 쌍에 관련된 것이다.
예를 들어(비교 그림 1) 두개의 중심이 다른(nonconcentric) 원들 AB와 BC가 주어졌을 때, 작은 원은 큰원에 내접한다. 양 원들 사이의 거리의 차이(inequality)들의 합(즉 이들 거리들의 變分들(variations)의 합)이 무한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무한은 양원들 사이에 끼인 공간의 ‘지나치게 큰 크기’(nimia magnitudine)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그것의 부분들만을 우리가 원하는만큼 작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거리들의 차이들의 합은 언제나 모든 수를 넘어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쌍곡선의 경우에서처럼) 거리의 변분들이 최대와 최소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따라 나오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와는 반대로 거리의 최대(AB)와 최소(CD)66)가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우리에 대해서 정확하게 결정된 것이다. 이것은 두개의 중심이 다른 원들 사이에 끼인 공간의 본성이 하나의 무한, 즉 거리의 차이들의 한정된(determinate) 수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따라 나온다. 반대의 경우를 주장하는 것은 원을 원이 아닌 것으로 만들기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이들 사물들이 무한정적(indefinite)이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수가 그 사물들이 그들 자체로 참된 무한을 박탈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물들과 동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 사물들을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정’은 여기서 사물들의 본성이 아니라 단지 ‘상상의 무능력’(impotence of the imagination)을 지시할 뿐이다.67)
ⅩⅪ. 그러나 Tschirnhaus는 만약 우리가 이 예에서 무한한 것이 두 원들 사이에 닫힌 공간의 엄청난 크기에 의해 설명되지 않고, 이들 두 원들 사이의 거리들의 무한정적 변분에 의해서도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동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변분들이 최대와 최소 사이에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의 무한이 그것의 부분들의 크기로부터 추론되지 않는지를 증명하는지를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관찰(발견)한다.68)
이것은 그 역이 즉각적으로 분명해지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한 반박이다. 부분들의 크기에서 무한한 것을 추론하는 것은 크기가 어떤 주어진 크기보다(할당 가능한 어떤 수보다) 크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큰 하나의 크기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이 귀결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두 원속에 포함된 전체 공간 속에서 우리는 이 공간의 절반에서 보다 두배가 더 큰 파악하기 때문이다. 비록 가정적으로 전체 공간의 부분들의 크기 뿐 아니라 공간의 절반의 크기마져도 어떤 할당가능한 수보다 큰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69)
그래서 모순은 다음과 같은 것에 있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무한한 것을 추론하게 되는 부분들의 크기의 기저(basis)에서 더 큰 크기를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실재로(현행적으로?) 더 큰 크기를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모순은 부분들의 추정된 수(alleged number)와의 관계에서 조금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물론 스피노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만약 두 원과 이 공간의 전체 사이에 포함된 이 공간의 절반이 모두 무한하다면, 부분들의 수는 양 경우 모두 전체 속에서 더 큰것이 아니게 될것이다. 다시말해 절반 속에서의 부분들의 수는 전체속에서의 부분들의 수에 동일한 동시에 다른 것이어야만 할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신과 다른 것인 동시에 가장 큰것이어야만, 즉 동일한 것이어야만 할것이기 때문이다.
ⅩⅫ. 따라서 데카르트와 같이70) 스피노자는 다른 이유들에서 다른 크기의 무한들을 인정한다. 그가 이해하듯 수에 관련된 「이것」에서 나오는 불합리들은 무한한 것이 수의 기원인 상상이 아닌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가능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즉 이것은 파악불가능한(incomprehensible) 것이 아니라, 단지 상상불가능한(in -imaginable) 것에 지나지 않는다.71) 결과적으로 이들 불합리들은 무한한 것이 상상불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파악불가능한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유한한 정신에 불합리한 개녕리는 이유로 무한한 수를 거불할 수 있다. 왜냐하면 무한한 것이 의문시될 때, 우리의 이성에 불합리한 것은 그것이 사물 속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72) 유사하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유한한 이성의 능력을 엄청나게 능가하는 신의 무한한 능력을 일깨운다면, 이 힘이 2+3이 5와 같지 않도록 할 수 있거나 산이 골짜기 없이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천재성이 이들 경로들을 탐구하는 것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무한한 것에 관한 모든 수학적 고찰에서 도피가 설명된다.73) 이런 측면에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와는 반대되는, 라이프니츠와는 동일한 입장에 선다. 그러나 그가 수를 상상의 유한한 존재에로 환원할 때에는 라이프니츠와 매우 다른 입장에 선다.74) 이 수, 산술, 모든 기호적 사유에 대한 비하과 기하학적 사유의 상호관련적인(correlative) 「고양」(exaltation)은 -그것이 사물 그 자체의 기원을 결과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매우 높게 평가된- adaequatio, 즉 사물의 이유들 혹은 필요조건들(requisites)의 총체에 대한 직관적인 파악으로서의 참된 관념에 대한 스피노자의 개념과 일치한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적 참된 관념의 개념, 즉 그 자체로 언제나 직관에 접근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 오로지 연산(algorithm)에 의한 맹목적 사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실체의 필연적으로 상징적인 비스듬한(oblique) 표현으로서의 개념에 반대된다.
ⅩⅩⅢ. 이전에 인용된 일반적으로 잘못 이해되어온 기하학적인 예의 의미는 해석에서의 오류들을 통해 오류에 빠져왔다. 주요한 오류와 사소한 오류 두가지가 여기에서 검토된 것이다.
1. “quantumvis parvam ejus portionem capiamus"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아무리 작은 것으로 파악한다고 해도“(However small we may conceive it)라고 해석되어 왔다. 이것은 두 원 사이에 삽입된 공간을 지칭한다.75) 이 공간은 그래서 이들 두 원들 자체가 더 작아짐에 따라 혹은 내접된(inscibed) 원이 더 커짐에 따라 더 작은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해석은 ”우리가 내접된 공간을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However small be the part that we may consider of the interposed space)이다. 즉 우리가 절반, 1/4, 1/1000 등을 보유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편지 82(Tschirnhaus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 의미를 입증해 준다.76)
2. “omnes inaequalitates spatii duobus circulis AB et CD interposit"라는 구절에서 Hegel과 그를 따르는 주석자들은 ”inaequaltates spatii"를 “거리의 차이들”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거리들”(unequal distances)로 해석한다.77) 따라서 이 예는 다은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O'의 원주에 의해 제한된O의 반지름들의 단면들(sections) EF를 고려하는 원주 O와 O'에 각각 종점을 가지는 절편들이 주어진다면, CD<EF<AB이다.(그림 1 참조) ; 단면들 EF의 합은 그래서 최근의 용어법에 따라 초한수(transfinite num- ber)의 절편들의 끝에서 끝으로의 배치이다. 그리고 이 합은 무한하다.
이 해석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확실히 절편들 EF의 합은 무한하다. 그리고 그들의 합은 고려된 공간들이 아무리 작더라도 역시 무한으로 남게된다. 그러나 만약 두 원의 중심이 같고, 모든 절편들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동일하게 무한일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은 절편들 EF의 무한한 합이 그들의 차이(inequalty)에 연결되지 않고, 그들의 변분(變分, variation)들의 최대와 최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반대로 만약 이것이 절편들 EF의 합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차이들의 합의 문제라면, 두 원들은 동심원(同心圓)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절편들 EF 사이의 차이들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두 원의 차이들의 합이 절편들 EF의 변분들의 최대와 최소 속에 반드시 포함된다는 것 역시 자명하다.78) 그래서 우리는 이 예가 공간의 어떤 부분도 수에 의해 표현될 수 없는 무한한 가분성을 감싼다는 주장(thesis)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사실상 최대와 최소 사이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 거리 D'B(그림 2 참조)는 EF에 주어진 유한한 수의 중간 위치들(intermediary positions)을 고려하는 동안 진부한 동동성(banal equality)의 즉 EF : D'B=AB-CD=(AB-E1F1)+(E1F1-E2F2)+(E2F2-E3F3)+(E3F3-E4F4)+(E4F4-CD)의 변분들의 합과 동등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EF가 AB에서 CD로 계속해서 바꿀 때, (E가 원 AC의 호(arc) 위에 있을 때) 변분들의 합 즉 EF의 미분들의 적분은 여전히 그것의 값으로 D'B= 를 가지게 될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유한 양들의 무한한 합의 문제가 아니라, 미분들의 혹은 변분들의 합의 문제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래서 기하학적 예가 직접적으로 물리학에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즉 그것은 “운동하는 물질이 수에 제한되는 (또한 넘어서는) 공간속에서 만날 수 있는 변분들의 (합)이다.”79)
여기에서 스피노자는 사실상 데카르트의 선회하는(vortical) 원을 그것의 압축(된 부분)(constriction)과 함께 추구한다. 여기서 공간(place)의 좁음을 그 공간의 작은 부분들의 더 큰 속도로 끓임없이 보충하는 분할 그 자체의 이 압축(된 부분)을 넘어서기(overcome) 위해 필연성이 부과된다. 두개의 중심이 다른 원들은 데카르트가 그것을 철학의 원리80) 2부 33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그리고 스피노자가 그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81)에서 재산출한 것처럼, 이 선회(vortex) 를 나타낸다. 여기서 데카르트가 사용한 inaequalitates(locorum ant motuum)라는 용어를 새롭게 선택하면서, 스피노자는 inaequalitates spatii와 spatia inaequalia를 구분한다.82) 기하학적 예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물리학의 구체적인 추론을 표현한다. 사실상 1. 물질이 압축(된 부분)들을 구성하는 선회하는 원들 속으로 움직이고, 2. 그 결과 이 물질의 동일한 양이 이 동일한 기간 동안 최대와 최소(가장 크고 가장 작은 나비의 선(canal)) 속에 포함된 다른 공간들(inaequalia spatia)을 가로질러 움직여야만 하고, 3. 공간의 무한한 가분성에 의해83) 이들 공간들의 모음이 모든 수를 넘어서며, 4. 이들 각각의 공간들 속에서 동일한 양의 물질이 계속하여 나아가기 위해 각각의 시간에 선(canal)의 점진적인 좁힘에 대응하는 그 자신의 무한히 작은 부분들을 상실해야만 하고, 이를 그것의 속도로 보충하는 것은 대응하는 무한히 작은 차(次, degree)까지 각 시간 속에서 증가해야만 한다면, - 그러면 우리는 최대와 최소 사이의 inaequalitates의 합 즉 차이 혹은 물질의 부피(volume)의 변화(variation)의 차이와 그것의 속도의 차이의 합, 즉 축적된 속도의 작은 차(次)의 합과 같은 소멸된 연장(diminished extention)의 작은 부분들의 합이 수에 의해 표현될 수 없는 무한이라는 것을 안다.84)
따라서 우리는 “omnia spatia inaequalia"에 대응되는 “동일하지 않는(unequal) 거리들”을 텍스트에 대한 참된 해석 즉 “omnes inaequalitates spatii" "거리의 차이의 합”으로 대치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러한 수정을 할때, 어려움들은 사라진다. 두 절편 AB와 CD를 중점 O 주위를 선회하는(pivot) 하나의 할선(secant) 위에 위치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연속적인 차이들(differences)를 더하고85) 절대값을 얻는다. 즉
텍스트의 모든 특이성들(particularities)은 그래서 설명된다. 이것이 거리들의 합계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그들의 차이들의 합계에 대한 의문이므로, 우리는 최대(AB)와 최소(CD)의 경계들 사이의 무한한 것을 외접시키기(circumscribe) 위해 중점이 다른 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다. 즉 만약 실재로 그 원들이 쌍곡선들에 의해 대체된다면86), 거리들의 변분들(대칭의 비횡단 축선(nontransversal axis))에 평행한 직선들의 차이에 의해 표시된 최대를 가지지 않으면서 제한이 없게 될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여기에서 불가분성의 문제를 재발견한다. 왜냐하면 이 예는 한정된 거리 AB-CD, 즉 D'B가 무한히 작은 거리들의 실무한을 포함하고, 따라서 불연속적인 부분들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됙 때문이다. 혹은 또한 거리 CD가 연속적으로 AB의 무한히 작은 AB의 부분들을 축소함으로써 얻어진 최소량, 하나의 한정된 적분인 이들 축소들의 합, 즉 미분즐의 무한한 가산(summation)에서 결과된 유한량 D'B라는 것을 다시 알게 되기 때문이다.
* * *
실체의 명석판명한 관념에서 기인된 무한한 것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모든 역리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대립을 허용하는 역리들은 유한한 것의 표현인 상상에 의해 무한한 것의 표현인 이성의 상실(Obliteration)으로부터 나온다. 두번째(이성)에 의해 첫번째(상상)를 억누름으로써 그들의 대립은 사라지게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상상은 이것을 돌이킬 수 없는 갈등으로 변형시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잘못 이해된 무한한 것은 바로 그 정도로 참되게 사물 속에서 존속하고, 우리의 불완전해진(mutilated) 앎에 의한 이것(무한한 것)의 부정은 이것(유한한 것)에 무한한 것의 성질을 부여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 자체에 위반(violation)을 허용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것은 상상에 의해 지시된(dictated) 추정된(alleged) 해결책들의 깊이들로부터 그들의 근원에 있는 근본적인 불합리가 발생하도록 함으로써 모든 경우에 자신의 現前(presence)을 완강하게(obstinately) 확증한다. 더우기 무한한 것의 변호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이 불합리의 증거를 제시한다.(예를들어 데카르트와 같이87) 어느정도 그들 자신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들의 정신을 파악불가능한(incomprehensible) 것에 따르게 하는 무한한 것의 실체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을때). 그리고 이들의 불합리한 설정의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이 우리의 이성을 무한한 것을 파악할 수 없다라고 믿는다는 바로 그 사실에서 온다. 반면에 그것은 [그리고 그것의 관념들이 타당한 것, 즉 신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것 속에 있는 무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지는, 그리고 모든 다른 사물의 조건들인 무한한 것의 본래적(original) 파악을 통해서만 이성 즉 진리의 힘이다
그러나 이성이 그것의 진정한 구성에로 돌아간 후, 실체는 같은 힘(stroke)에 의해 그것의 참된 본성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것의 불가분성 뿐 아니라 무한성도 그것의 필연적 현존으로부터 발생적으로(genetically)파악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충분한 명료함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빛이 형이상학에 스며든다.
이런 점에서 이 절대적인 불가분성이 모든 사물들의 기저(base)에 존속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양태들이 무한하게 가분적이고 따라서 연속적이라는 사실을 명석판명하게 안다. 그래서 우리는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적 불연속성에 반대하여 파르메니데스적 공간의 연속성을 변호하는 제논과 같이, 그러나 그것이 발생의(genetic) 이유들과 더 이상 단지 per absurdum이 아니라고 하며 우리 자신을 변호하면서- 불연속성, 원자, 수를 배제한다. 우리는 어떻게 무한한 것이 더 작은 것속에서와 더 큰것 속에서 동일하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선회하는 원들 속에서의 압축(된 것) 속에서 순환해야만 할 떄, 어떻게-데카르트가 그것을 이해하지 않은 채 인정했던 것처럼- 운동하는 물질이 그 자신을 끝없이 가분적인 것인지를 발생적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물질의 가분성에 관련된 역리가 무한한 것에 의해 해결된다. 따라서 빛이 형이상학에서와 같이 물리학에도 스며든다.
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처음 시작에 관한 역리도 해결된다. 우리가 만약 현재까지 발생해 온 물질들 속의 모든 운동들을 특정한 수로 환원시키려 한다면, 그리고 그들의 지속에 한정된 시간을 환원시키려 한다면, 한정된 수에 제한된 실체의 속성들은 무한하지 않은 것이 될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실체 그 자체에서 그것의 현존의 한 부분을 박탈하고, 그것을 유한한 것으로 만들게 될것이다. 왜냐하면 무(無)가 성질들을 갖지 않는다면, 실체는 그것의 성질들 즉 그것의 변용들이 사라질 때마다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실체)은 그 자신을 소멸시킬 것인 데, 왜냐하면 모든 실체는 그것이 유한하다고 가정되는 순간 파괴되기 때문이다. 우주 즉 유한 양태들 전체는 따라서 하나의 무한한 것이 되고 결코 시작되지 않는다.88)
마지막으로 나의 지속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무한과 불가분성은 나머지 다른 모든 것과 같이 그것을 인식 가능하게 만든다.
나의 지속은 실체의 내재적이고 영원한 행동에 의해 설정된 나의 현존이다. 이 행동은 나의 현존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내부에서부터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실체가 그 자신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불가분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현존에서 완전하고, 그것의 각 순간들 속에서 전체적인(entire) 하나의 행위이다. 나의 실재(real) 지속의 각 순간들은 따라서 하나의 실무한이다. 그것은 결코 실재로 그들 속에서 스스로를 나누지 않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속에서 불가분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실재로 가분적인 것일 것이다. 이는 불합리하다. 이것에서 두가지 귀결들이 나온다.
1. 데카르트적인 문제는 역전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불안정한 존재들 그 자체에 의해 존재들이 신적인 전능성에 의해 무로부터 한팔의 거리에서와 같이 각 순간에서 유지되는지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어떻게 그들 자체로 무한정적으로 지속(endure)될 존재가 갑자기 소멸되는지를 설명해야 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또한 만약 각 순간이 그 자신 속에 무한한 것을 에워 싼다면(라이프니츠가 의도한 것처럼), 그것은 다른 의미가 될것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지탱하는 원인의 무한한 것만을 에워 쌀뿐이지 나의 과거와 미래의 현존의 모든 술어들의 무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 용어들과 내 현존 자체의 무한은 신이 나의 본질을 절대적으로 야기하고, 그 속으로부터 내 현존능 지탱하는 한 오로지 신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과 그것의 충분원인을 초월하는 유한한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에 의한 이 신적 원인의 한정(determination)에도 의존한다.89) 그래서 나의 본질은 그것을 영원의 상 아래에서(sub specie aeternitatis)라고 즉 이성으로서 정의하는 것의 이유만을 포함하고(라이프니츠가 말하게 될 그것을 sub ratione generaltatis에 속하게 하는 것의 이유), 그것의 현존의 술어 즉 상상이 지각하는 것의 이유는 포함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의 단일한 본질의 자리에 그것의 모든 술어들의 즉 그것을 sub ratione generaltatis에 속하게 하는 모든 것의 충분 이유인 개별적인 실체들을 대체시키는 라이프니츠와는 반대로]. 그것의 모든 술어들에 대한 이유는 그 자신 속에 있지 않고, 신이 그것을 현존하도록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산출해야만 하는 그것의 외재적인 원인들의 무한한 연쇄 속에 있다. 따라서 내 지속의 모든 순간은 이 현존의 과거와 미래의 순간들의 무한, 즉 그것의 술어들의 무한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영원성이 비록 지속되는 순간들과 공통되는 단위(measure)를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원인의 무한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서 그들에 내재적인 나의 현존의 불가분적인 지속의 동일성들만을 포함한다.
2. 내가 나의 현존 속에서 지각하는 변화들이 그것을 결코 실재로 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양태들의 변화들일 뿐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의 지속은 단지 연속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불연속성을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그것을 측정하도록 하는 상상적인 도움(aid)-과 혼동할 때마다 그러한 불합리를 범한다. 어떤 단위와도 마찬가지로 유한한 시간은 그것을 측정하기 위해 유한한 파편들(fragments) -즉 그것을 현존하게 하는 행위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다시말해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실재로 분리되고 비활성적인(inert) 파편들-의 결합에 의해 재구성하려 한다. 이것은 연장을 하나의 수에 의해 표현하려는 노력만큼이나 실현하기 불가능한 노력이다. 왜냐하면 여기는(here) 우리가 유한한 것과 함께 무한한 것을 야기 시킬 수 없고, 가분적인 것과 함께 불가분적인 것을, 불연속적인 것과 함께 연속적인 것을, 그것의 죽어 있고 분리된 파편들과 함께 한 행위의 결합도, 상상적인 수동성들과 함께 이성적 행위들을, 타당하지 않는 관념들과 함께 타당한 관념을 야기할 수 없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상의 존재들인 일반개념들(general concepts)(분리된 부분들, 원자들, 수, 단위, 시간 등의 집합으로 보여지는 총체인)은 이 문제들을 없애기 위해 몰아내어지는 것은 충분한 것이다. 실체가 명석판명하게 파악된다면, 그것을 우리로부터 은폐하는 베일들에서 자유로운 자연은 단절 혹은 오류없이 무한의 연합, 유일하고 투명한 진리의 대상 위의 이 순간으로부터 그것의 양태들 속에서처럼 그것의 원인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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