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질 들뢰즈: 스피노자에 관한 세미나

나뭇잎숨결 2023. 8. 26. 08:50
질 들뢰즈: 스피노자에 관한 세미나


1978년 1월 24일


* 이 글에서는 connaissance를 ‘앎’이라고 번역했다. 물론 역자의 게으름으로 군데군데 이를 지식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이 점 양해 바란다. 흔히 이는 ‘인식’이라고 번역된다. 그러나 이는 프랑스어의 미묘함을 살리지 못한 것이다. 또 ‘affect된다’는 것은 ‘영향을 받는다’ 혹은 ‘촉발된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굳이 영향이나 촉발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 것은 단어의 일관성을 살리기 위해서다.


-- 역자: 김상운(sanggels@hanimail.com)


오늘 우리는 연속적인 변주(variation continue)에 관한 우리의 작업을 잠시 멈춥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세미나 회기 동안에, 철학의 역사로 일시적으로나마 돌아가려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 몇몇이 요청했던 단절(coupure)같은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은 다음과 관련을 맺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관념은 무엇이고 정서(affect)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관념과 정서(affect) 말입니다. 3월에, 여러분 중 몇 사람이 요청했듯이 우리는 칸트에 있어서 종합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서 마찬가지의 단절을 행할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역사로의 복귀라는 흥미로운 효과를 생산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러한 단위의 철학사를 간략하게나마(tout court) 하나의 역사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결국 철학자란 지각함의 방식을 발명해 낼뿐만 아니라 통념들(notions)을 발명해내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대부분 번호를 매기면서(numérotage) 나아갈 것입니다. 우선 용어법상 언급해야 할 것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그 공간이 상대적으로 뒤죽박죽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사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도 스피노자야말로 상당히 예외적인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가 자기 책을 접하게 되는 사람들을 건드리는 방식은 결코 똑같지(équivalent) 않습니다.
여러분이 그의 책을 읽었는가 읽지 않았는가는 하등의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선 몇 가지 용어상 주의해야 할 것을 가지고 논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에티카≫라고 알려져 있고 라틴어로 쓰여 있는 스피노자의 주요저작에서 우리는 두 개의 단어를 발견합니다. AFFECTIO와 AFFECTUS. 아주 이상하게도 어떤 번역가들은 이 두 개를 동일한 단어로 번역해 버립니다. 이것은 재앙스러운 것입니다. 이들은 두 용어, 즉 affectio와 affectus를 affection이라고 번역합니다. 저는 이것을 재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분명 재앙적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철학자가 이 두 단어를 차용할 때에는 원칙적으로, 그가 그럴만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프랑스어는 우리에게 affectio와 affectus에 엄격하게 상응하는 두 용어를 쉽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즉 affectio에는 afffection가, affectus에는 affect가 상응한다는 것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이것은 재앙인 것입니다.] 어떤 번역가들은 또 affectio를 affection이라고 하고 affectus를 감정(feeling/sentiment)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두 단어를 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저는 감정이란 단어에 호소해야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프랑스어는 감정이라는 단어를 affect라는 단어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affect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것은 스피노자의 affectus를 지칭하며, affection을 사용할 때는 affectio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첫번째 요점: 관념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정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관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점에 관해서 스피노자는 독창적이지 않으며, 당시의 모든 사람이 항상 받아들였던 그런 의미에서 관념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합니다. 관념이라고 불리우는 것, 모든 사람이 항상 철학사에서 받아들였던 그러한 의미에서 관념은 어떤 것을 표상하는 사유의 양태입니다. 표상적인 사유 양태말이죠. 예를 들어 삼각형이라는 관념은 삼각형을 표상하는 사유의 양태입니다. 용어법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세 이래로 관념의 이러한 측면이 관념의 ‘객관적 실재’를 지칭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유용할 것입니다. 17세기 혹은 그 이전의 텍스트에서, 우리들은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이라는 것에 마주칩니다. 이것은 바로 언제나 다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것의 표상이라고 간주된 관념 말입니다. 관념은 이것이 어떤 것을 표상하는 한, 어떤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 대해서 관념이 맺는 관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우 단순한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즉 관념은 관념의 표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된 사유양태입니다. 이것이 이미 관념과 정서(affect; affectus)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첫번째 출발점을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정서(affect)란 어떤 것도 표상하지 못하는 사유양태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정서(affect)나 감정(feeling)이라고 부르는 것, 가령 희망, 고통, 사랑 같은 예를 들어 봅시다. 이것들은 표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것이라는 관념이 존재할 뿐이며, 분명히 말해서 희망된 어떤 것의 관념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희망 자체나 사랑 자체는 아무 것도, 엄격히 말해서 아무 것도 표상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유 양태는 이것이 비표상적인 한에 있어서는 affect라는 용어로 사용됩니다. 의욕(volition), 의지(volonté)는 엄격히 말해서 내가 어떤 것을 의지한다는 것,, 내가 의지하는 것은 표상의 대상이라는 것, 내가 의지하는 것은 관념 속에 주어진다는 것을 함축할 뿐입니다. 하지만 의지한다는 사실은 관념이 아니라 affect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작동한다는 것, 바로 이것은 전혀 복잡한 문제(compliqué)가 아닙니다.
따라서 스피노자는 즉각적으로 affect에 대한 관념의 선차성을 추론하며, 이것은 17세기 전반에 걸쳐서 공통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직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특이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받는 것의 관념을, 제 아무리 이 관념이 혼동되고 부정확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가져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에 affect에 대한 관념의 선차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의지하기 위해서는 의지된 것의 관념을, 제 아무리 이 관념이 혼동된 것이든 불명확한 것이든 간에, 필연적으로 가져야만 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나는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에도 대상의 표상이, 이 표상이 아무리 혼동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존재합니다. 혼동된 관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ffect에 대한 관념의 선차성, 이것은 연대기적인 동시에 논리적인 것인데, 바로 이것이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표상적인 양태들에 대한 표상적인 사유양태들의 선차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독자들이 환원을 통해 이러한 논리적 선차성을 변형시키기라도 한다면, 이것은 의미를 완전히 재앙적으로 역전시켜버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affect가 관념을 전제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affect가 관념으로 환원된다거나 관념의 조합(combinaison)에 다름아니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음 지점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즉 관념과 affect는 성격상 다른 두가지 종류의 사유 양태들이며, 이것들은 서로서로 환원되지 않으며, 단순히 affect가 관념을, 제 아무리 혼동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제한다는 관계 속에서만 연결됩니다. 이것이 첫번째 출발점입니다.
이제 관념-affect의 관계를 표상하는 두번째의, 덜 피상적인 방식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관념의 매우 단순한 성격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관념은 이것이 표상적인 한에 있어서 사유이며, 표상적인 한에 있어서 사유의 양태이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관념의 객관적 실재에 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일단 우리가 객관적 실재가 관념의 실재라고 -- 관념이 어떤 것을 표상하는 한 -- 말하게 되면 관념의 형상적 실재는 일거에 보다 복잡해지며, 관념의 실재에 보다 흥미를 갖게 됩니다 -- 관념의 실재가 어떤 것 자체인 한에 있어서 말이죠.
삼각형의 관념의 객관적 실재는 삼각형의 관념이 삼각형 자체를 표상하는 한에 있어서 삼각형의 관념입니다. 하지만 삼각형의 관념은 어떤 것 자체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어떤 것인 한에 있어서 나는 이러한 것의 관념을 형성할 수 있고 관념의 관념을 항상 형성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의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모든 관념이 객관적 실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을 표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또한 관념은 그것이 관념인 한에 있어서 어떤 것 자체이기 때문에 관념은 형식적 실재성(réalité formelle)을 가진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 즉 관념의 형식적 실재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수준에서 더 많은 것을 계속해서 다룰 수는 없으며, 이것을 잠시 옆으로 젖혀두어야만 합니다. 단지 이러한 관념의 형식적 실재성에 덧붙여야만 할 것도 스피노자가 종종 관념이 그 자체로 가진 특정 수위의 실재나 완전함이라 불렀던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 자체로 모든 관념은 특정 수위의 실재나 완전함을 지닙니다. 분명 이러한 수위의 실재성이나 완전함은 이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대상과 혼동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관념의 형식적 실재성, 사물은 관념이거나 그 자체로 이것이 가진 실재성이나 완전함의 수위는 그 내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객관적 실재성, 즉 관념이 표상하는 대상에 대한 관념의 관계는 관념의 외재적 성격인 것입니다. 외재적 성격과 내재적 성격은 아마도 근본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은 상이한 객관적 실재들을 갖습니다. 즉 이것들은 동일한 대상을 표상하지 않지만, 동시에 동일한 내재적 실재를 갖지도 않습니다. 이것들은 동일한 형식적 실재를 갖지 않으며,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듯이, 이것들 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무한하게 큰 실재의 수위를 지닙니다. 신의 관념은 유한한 사물의 관념인 개구리의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수위의 실재 혹은 내재적 완전함, 형식적 실재를 갖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이해했다면 여러분들은 거의 모든 것을 이해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의 형상적 실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적 실재는 관념의 내재적 성격이며, 또한 관념이 그 자체로 전개하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수준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관념을 관념의 객관적 실재 혹은 관념의 표상적 성격에 의해 정의했을 때, 저는 정서(affect)란 어떤 표상적 성격도 갖지 않은 사유양태라고 말했다는 점에서 정서(affect)를 즉각적으로 관념과 대립시켰습니다. 이제 관념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때가 되었습니다. 즉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이며, 또한 어떤 것의 관념일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관념은 그것에 고유한 실재의 수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이 두번째 수준에서 저는 관념과 정서(affect)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해야 합니다. 삶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일어날까요? 두 가지 것[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피노자가 어떻게 기하학적 방법을 차용했는가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다시피 ≪에티카≫는 정리, 증명, 등등...의 형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기하학적일수록 그 책은 더욱더 구체적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모든 것과 관념 및 정서(affect)에 대한 모든 주석들은 ≪에티카≫의 2, 3부와 관련됩니다. 2부와 3부에서 스피노자는 우리들이 우리 삶을 일종의 기하학적으로 묘사하게끔 하며, 그것은 제게는 아주, 아주 확신에 가득차 있는 듯이 보입니다. 이러한 기하학적 묘사는 우리의 관념이 각기 다른 것을 끊임없이 이어받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의 관념이 다른 관념을 쫓고 하나의 관념이 예를 들어 순식간에 다른 관념을 대체합니다. 지각함은 관념의 특정 유형이며, 우리는 왜 그런가를 간단하게 알아 볼 것입니다. 이제 바로 지금 저는 제 머리를 거기로 돌립니다. 그리하여 저는 그 방의 구석을 보았습니다. 저는 돌렸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관념입니다; 저는 거리를 걷습니다. 거기에는 제가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안녕 피에르라고 말하며, 다시 방향을 돌려 안녕 폴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다른 것이 변화합니다. 즉 나는 태양을 바라보며, 태양은 점차로 사라지며, 나는 내 자신이 밤의 암흑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따라서 그것은 연속들의 계열들, 즉 관념들의 공존들, 관념들의 연속들입니다. 또 무엇이 일어날까요? 우리의 일상 생활은 다른 것들을 이어받는 관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자동기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즉 우리는 정신적인 자동기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관념들이 우리에게 긍정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관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관념들의 이러한 연속과는 별도로 일어나는 것은 또한 무엇일까요? 어떤 다른 것들, 즉 나에게 있어서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념들 자체의 연속과는 동일하지 않는 변이의 체제입니다. “변이들”, 바로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난처한 일(ennui)은 그가 이 단어를 차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이는 무엇일까요? 앞의 예를 다시 들어보지요. 거리에서 저는 피에르와 마주치며, 그에게 적대감을 느낍니다. 그리곤 피에르에게 인사를 하면서 지나치거나 혹은 그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매우 매혹적인 폴을 갑작스레 보게 되고, 폴에게 부드럽고도 온화하게 인사합니다. 음, 이것은 무엇일까요? 부분적으로 두개의 관념들의 연속, 즉 피에르의 관념과 폴의 관념입니다. 그러나 그 밖의 어떤 것도 있습니다. 변이는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나에게 작동하는데, 스피노자의 말이 매우 정확하고 저는 이것을 인용하겠습니다: 나의 존재하려는 힘(force d'exister)의 (변이), 혹은 그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또 다른 말 즉 vis existendi, 즉 존재하려는 힘(force d'exister), 혹은 potentia agendi, 즉 작용하려는 역능(puissance d'agir)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이들은 영속적입니다.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은, 스피노자에게는 존재하려는 힘 혹은 작용하려는 역능의 연속적인 변이 -- 와 존재한다로 제가 말하고 싶은 것 -- 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예로 제시했던 어리석은 예, 하지만 스피노자로부터 나온 예, 즉 안녕 피에르, 안녕 폴이라는 예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요? 저를 불쾌하게 하는 피에르를 보았을 때 하나의 관념, 즉 피에르라는 관념이 저에게 주어집니다. 저를 기쁘게 하는 폴을 보았을 때, 폴의 관념이 저에게 주어집니다. 저와 관련되어 있는 이들 관념 각각은 특정 수위의 실재나 완전함을 지닙니다. 저는 저와 관련해서 폴의 관념이 피에르의 관념보다 더 내재적인 완전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폴의 관념은 나를 만족시키는 반면 피에르의 관념은 저를 불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폴의 관념이 피에르의 관념에 뒤이을 때, 나의 존재하려는 힘 혹은 나의 작용하려는 역능은 증가되거나 개선된다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반대로 상황이 역전되었을 대, 즉 나를 즐겁게 하는 누군가를 본 후에 나를 슬프게 하는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저는 나의 작용하려는 역능이 방해되거나 파괴되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런 수준에서 우리는 우리가 용어법상의 관례 내에서 여전히 작업하고 있는지 혹은 우리가 보다 더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이미 이주해 버렸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
저는 관념들이 우리 안에서 서로서로를 계승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는 이들 각각은 자신들의 완전함의 수준을, 그것의 실재성 혹은 고유한 완전함의 수위를 가지고 있으며, 이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관념을 가진 사람은 결코 한 수준의 완전함에서 다른 수준의 완전함으로 넘어가기를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그녀가 가지고 있는 관념에 적합한 어떤 사람의 작용 역능 혹은 존재력의 증가-감소-증가-감소의 형태에는 연속적인 변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고통스러운 실행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어떻게 모여드는지를 느껴보십시오. 실존의 이러한 표상은 이미 나쁜 것이 아니며, 이것은 실제로 거리에서의 실존(existence)입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스피노자를 상상해 보십시오. 또 진정으로 이러한 연속적인 변이의 종류로서의 실존을 살아가는 그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의 관념이 또 다른 관념을 대체하는 한, 저는 아무리 차이를 극소화시킨다고 하더라도 하나의 완전함의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 넘어가기를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속적인 변이의 이러한 종류의 선율(ligne mélodique)이 관념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그리고 동시에 관념들과의 본성상의 차이 속에서 정서(affectus)를 정의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본성상의 차이와 이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그것이 여러분과 적합한다고 말하거나 적합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affectus에 대한 거의 공고한 정의를 얻게 되었습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affectus는 변이 (그는 저의 입을 통해 말을 합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것에 관해 말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너무 젊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존재력의 연속적인 변이입니다. 이 변이가 우리가 가진 관념에 의해 결정되는 한에서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affectus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3권의 말미에 있는 매우 중요한 텍스트에서 스피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affectus가 관념들의 비교에 의존하고 있다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는 관념은 실제로 affect에 대한 일차적인 관계를 가져야만 하며, 관념과 affect는 본성상 상이한 두개의 사물이며, affect는 관념들에 대한 지성적인 비교로 환원되지 않으며, affect는 하나의 완전함의 수준에서 다른 수준으로의 살아있는 이행, 혹은 살아있는 변이에 의해 구성됩니다. 이러한 이행이 관념들에 의해 결정되는 한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로 이러한 이행은 관념들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affect를 구성합니다.
내가 피에르에 관한 관념에서 폴에 관한 관념으로 넘어갈 때, 저는 나의 작용역능이 증대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폴에 관한 관념에서 피에르에 관한 관념으로 넘어갈 때, 저는 나의 작용역능이 감소했다고 말합니다. 내가 피에르를 보았을 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슬픔으로 affect되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폴을 보았을 때, 나는 즐거움으로 affect됩니다. 그리고 affect에 의해 구성되는 이러한 연속적인 변이의 우울한 선상 위에서 스피노자는 두개의 극들을 지정합니다. 즐거움-슬픔,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인 정념들일 것입니다. 슬픔은 나의 작용역능의 감소를 포함하고 있는 그러한 어떤 정념들일 것입니다. 또한 즐거움은 나의 작용역능에 있어서의 증대를 포함하는 정념일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개념화 때문에, 예를 들어 자신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문제들을 설정하는 그의 방식이 되었던 매우 근본적으로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들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영역에서이든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우리에게 슬픈 방식으로 affect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필요한 것으로서의 슬픈 정념들. 슬픈 정념들을 고무하는 것은 권력의 실행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신학정치학논고≫에서 이것은 자신들의 신민들의 슬픔을 필요로 하는 전제군주와 성직자 사이의 연관관계의 심오한 지점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그가 모호한 의미에서 슬픔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 그는 오히려 자신이 이 용어에 부여할 줄 알았던 엄격한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즉 슬픔은 이것이 나의 작용역능의 감소를 포함하는 한에 있어서 affect인 것입니다.
관념과 affect를 구별하기 위한 저의 첫번째 시도(관념은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는 사유의 양태이다?) 속에서 제가 affect란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는 사유의 양태라고 말했을 때, 저는 테크니컬한 용어로 이것은 단순히 명목론적인 정의일 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분이 좋아한다면, 외재적이거나 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시도에서, 즉 제가 다른 한편으로 관념은 그 자체로 내재적인 실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affect는 한 수준의 실재에서 다른 수준의 실재로, 혹은 한 수준의 완전함에서 다른 수준의 완전함으로의 연속적인 변이 혹은 이행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소위 명목론적인 정의의 영역에 있지 않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실질적인 정의를 이미 획득합니다. 즉 그 정의는 사물을 정의하는 것임과 동시에 이러한 사물의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러한 정신적인 automata로 제조되는가를 여러분이 아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automata처럼 우리 내부에는 서로 서로 이어지는 관념들의 전체적인 시간이 존재하며, 이러한 관념의 계속됨에 적합하여 우리의 작용역능이나 존재력은 연속적인 방식으로, 연속적인 노선 위에서 증가되거나 감소되며, 바로 이것이 우리가 affectus라고 부르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한다고 부르는 것입니다.
정서(affectus)는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존재력의 연속적인 변이입니다. 이 변이가 그/그녀가 가진 관념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한에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결정된다는 것은 변이가 우리가 가진 관념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가진 관념은 그 결과를 설명하지 않으며 사실 그것은 저의 작용역능을 증가시키고나 혹은 그와 반대로 제가 바로 그 때 가진 관념과의 관계에서 그것을 감소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교의 물음이 아니며, 그것은 일종의 경사면(glissade)에 관한, 작용역능에 있어서의 쇠락이나 증가의 물음입니다.
어떤 문제도 없으며, 어떤 물음도 없습니다.
스피노자에게는 관념들의 세가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는 더 이상 affectus에 대해서, 즉 정서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정서(affect)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에 의해 결정되며,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가진 관념들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은 어떤 관념들이 정서들을 결정하는 것들인지를 아는 것이며, 정서가 우리가 가진 관념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비환원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다른 질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스피노자가 구별하고 있는 세가지 종류의 관념들은 affectio-관념들입니다; 우리는 affectus와 대립된 것으로서의 affectio가 관념의 특정한 종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affectio 관념들이 존재하며, 두 번째로 우리는 스피노자가 통념들(notions)이라고 부르는 관념들에 도달하게 되며, 세 번째로, 아주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도달하게 되는 것, 즉 본질 관념들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것에 앞서서 관념의 이러한 세가지 종류가 존재합니다.
Affection(affectio)란 무엇일까요? 저는 문자그대로 당신의 얼굴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처음 볼 때, 그리고 스피노자의 텍스트의 문자에 집착해 볼 때, 이것은 관념과 어떤 관계도 없으며, 또한 affect와도 아무 관계없습니다. Affectus는 작용역능의 연속적인 변이라고 규정됩니다. 그렇다면 affection은 무엇일까요? 첫번째 결정에 있어서 affection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다른 신체의 작용에 종속되는 한에 있어서 신체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저에게 쏟아지는 햇볕을 느낍니다. 혹은 일련의 햇살이 당신에게 쏟아집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신체의 affection입니다. 여러분의 신체의 affection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의 작용, 혹은 여러분에 대한 태양의 효과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에 대해 생산하는 효과 혹은 작용입니다. 일단 스피노자가 그의 자연학(Physique)으로부터 온 이성에 근거하여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작용을 믿지 않았으며, 작용은 항상 접촉을 내포하며, 심지어 신체들의 혼합이라고 믿었다는 점을 기억해 두면 될 것입니다. Affectio는 두 개의 신체들의 혼합물이며, 하나의 신체는 다른 하나의 신체의 작용한다고 말해지며, 다른 하나는 첫번째의 추적을 받는다고 말해지는 것입니다. 신체들의 모든 혼합물들은 affection이라고 명명되어야 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로부터 affectio, 즉 신체들의 혼합물이라고 정의된 존재가 양태화된 신체의 성격을, affectionate한 신체 혹은 affected된 신체의 성격을 지시한다고 추론하며, affection은 affecting하는 신체의 성격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affected된 신체의 성격을 지시한다고 추론합니다. 그는 자신의 유명한 예, 즉 나는 태양을 3백 피트 거리에 떨어져 있는 뚱뚱한 디스크라고 생각한다를 분석합니다. 그것은 affectio입니다. 혹은 적어도 affectio의 지각입니다. 태양에 대한 나의 지각은 나의 신체의 구성을, 나의 신체가 구성되어 있는 방식을, 태양이 구성되는 방식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충분하게 지시합니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나의 시각적 지각의 상태에 의해서 태양을 지각합니다. 파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태양을 지각하겠지요.
자신의 용어의 엄격함을 보존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는 affectio는 양태화하는 신체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양태화된 신체의 성격을 지시한다고 말할 것이며, 또한 affectio는 양태화하는 신체의 성격을 전개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첫번째 종류의 관념들이 신체의 affection을 표상하는 사유의 모든 양태이며, 하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의 혼합, 혹은 나의 신체에 대한 다른 신체의 흔적이 affection의 관념으로 명명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것이 affection-관념이라고, 관념의 첫번째 유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념의 첫번째 유형은 스피노자가 첫번째 종류의 앎(connaissance), 가장 낮은 앎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왜 그것은 가장 낮은 앎일까요? 이러한 affection의 관념은 사물들을 단지 그 효과들에 의해서만 알기 때문에 가장 낮은 것이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즉 나는 나에 대한 태양의 affection을 느끼며, 나에 대한 태양의 흔적을 느낍니다. 그것은 나의 신체에 대한 태양의 효과입니다. 그러나 원인들, 즉 나의 신체이며, 태양의 신체이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신체들 사이의 관계들이 원인이기에 하나는 내가 절대적으로 무라고 알고 있는[절대적으로 모르고 있는] 이러한 것들 중의 어떤 다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하나에 대해 특수한 효과를 생산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태양은 왁스를 녹이며 진흙을 딱딱하게 합니다. 이 점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affectio의 관념입니다. 나는 흐르고 있는 왁스를 보며, 즉각적으로 딱딱하게 되고 있는 진흙을 봅니다. 이것은 왁스의 affection이고 진흙의 affection이며, 나는 이들 affection들에 대한 관념을 가지고 있으며, 효과들을 지각합니다. 어떤 신체적 구성에 의해서 태양의 작용하에서 진흙을 딱딱하게 한 것일까요? 내가 affection들에 대한 지각에 머물러있는 한, 나는 그것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우리는 affection-관념들이 그 원인들 없는 효과들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바로 이 때문에 스피노자는 이것을 부적합한 관념들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혼합물의 원인들로부터 분리된 혼합물의 관념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과에 있어서, affection-관념들의 수준에서, 우리가 단지 부적합하고 혼동된 관념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잘 이해됩니다. 그리고 분명히 슬프게도, 우리들의 대부분은 철학을 충분하게 행하지 않았으며 단지 철학을 행한다는 듯이 살아왔을 뿐입니다.
한 번, 단지 한 번만 스피노자는 매우 낯설지만 아주 중요한 라틴어 단어 하나를 차용합니다: 코나투스(occursus)가 바로 그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코나투스란 만남(rencontre; 우연한 마주침, 조우)입니다. 제가 변용-관념들을 가지고 있는 한 저는 우연한 만남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저는 거리를 걸으며 저를 기쁘게 하지 못하는 피에르를 봅니다. 그것은 그의 신체와 그의 영혼의 구성의 기능이며 저의 신체와 저의 영혼의 구성의 기능입니다. 누군가가 저를, 신체와 영혼을 불쾌하게 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왜 스피노자가 정신과 영혼에 대해 계속해서 말했을 때에도 유물론이라는 비판을 그렇게 강하게 받았는지를, 신에 대해서 계속 말하고 있음에도 무신론자라고 비난을 받았는지를 여러분에게 이해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사람들이 이것은 순전히 유물론적이다라고 말하게 되었는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것은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바로 이것은 문자그대로 나의 신체에 대한 그의 신체의 효과, 나의 영혼에 대한 그의 영혼의 효과가 저에게 부적합하게 정서(affect)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신체들의 혼합(mixture)이거나 영혼들의 혼합입니다. 영혼의 수준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체의 수준에서도 해로운 혼합이나 좋은 혼합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정확히 이런 것입니다: 나는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치즈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부적합하게 변양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나의 신체와 치즈가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단지 그것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적인 동감들과 신체적인 관계들 사이에서 차이들을 제기할만한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치즈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것 속에는, 또한 영혼의 사태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기쁘게 하지 않는 피에르나 폴의 경우에 있어서는 신체의 사태가 또한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동일한 것에 대해서도 비슷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 이것이 혼동된 관념이자 변용-관념들이며 혼합인 이유는 그것이 불가피하게 혼동되어 있고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러한 수준에서, 피에르의 신체나 정신이 무엇을 구성하고 또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지 못하며, 어떤 것 속에서 그것이 나의 신체와 동의하지 않는지, 혹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의 신체가 나의 신체와 동의하지 않게 되는지를 절대적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순히 그것은 나와 동의하지 않는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두 신체들의 어떠한 구성에 의해서, 촉발하는 신체와 촉발된 신체의 어떠한 구성에 의해서, 작용하는 신체와 종속되는 신체의 어떠한 구성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바로 이러한 수준에서는 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거기에는 그 전제들과 분리된 결과들이 존재합니다. 아니 여러분이 좋아한다면, 그것은 원인들의 지식과는 무관한 결과들의 앎(connaissance)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연한 만남들입니다. 우연한 만남들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지만 신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특별한 강의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신체란, 혹은 심지어 영혼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이론은, 동일한 것으로 귀결되는 이 이론은 <에티카>의 제 2권에서 발견됩니다. 스피노자에게 신체의 개별성은 다음과 같이 정의됩니다: 그것은 운동과 정지의 어떤 구성적(compose)이거나 복잡한(complexe) 관계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상당히 구성적이며 매우 복잡하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변화들을 통해서 신체의 여러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는(affect) 것이 보존될 때입니다. 그것은 고려되고 있는 신체의, 무한성으로 간주된 모든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변화들을 통한 운동과 정지의 관계의 영속성(permanence)입니다. 여러분은 신체가 필연적으로 무한성과 합성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의 눈을 예로 들어봅시다. 나의 눈과 나의 눈의 상대적인 항구성(constance)은 나의 눈의 다양한 부분들의 모든 변양을 통한 운동과 정지의 어떤 관계에 의해 정의됩니다; 하지만 나의 눈 자체는, 이미 부분들의 무한성을 가지고 있기에, 나의 신체의 부분들 중의 하나의 부분이며, 그리하여 결국 눈은 얼굴의 부분이며, 또 다시 얼굴은 나의 신체의 부분입니다, 등등... 그러므로 여러분은 바로 그러한 수준의 개별성을 형성하기 위해 서로 서로 결합되어야만 할 모든 종류의 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각각의 수준 혹은 심급은 운동과 정지로 이루어져 있는 어떤 관계에 의해 정의될 것입니다.
만일 나의 신체가 이러한 방식으로, 즉 부분들의 무한성 아래에 있는 운동과 정지의 어떤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두가지의 것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것을 먹습니다. 혹은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저는 어떤 것을 먹었는데 이것은 붕괴시키거나 독에 중독되게 합니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앞의 경우에 저는 좋은 만남을 했으며, 후자의 경우 저는 나쁜 만남을 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코나투스라는 범주에 속합니다. 제가 나쁜 만남을 했을 때 이것은 나의 것과 혼합된 신체가 나의 구성적 관계를 파괴하거나 혹은 나의 부속된 관계들 중의 하나를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령 제가 어떤 것을 먹고 나서 저를 죽이지는 않지만 복통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하위-관계 중의 하나를, 나를 구성하고 있는 관계의 하나를 파괴하거나 억제하고(inhibé) 위태롭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어떤 것을 먹고 죽습니다. 이것은 나의 구성적 관계를 분해(décomposé)합니다. 그것은 나의 개별성을 정의하는 복잡한 관계를 분해합니다. 그것은 나의 하위-개별성들의 하나를 이루고 있는 나의 부속적 관계들의 하나를 단순히 파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의 신체의 특징적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리고 내가 나와 동의하는 어떤 것을 먹었을 떄에는 이것과 반대의 것이 일어납니다.
악이란 무엇인가?라고 스피노자는 묻습니다. 우리는 이 물음을 그의 편지교환에서 찾아냅니다; 그 편지들은 그가 어떤 것이 악일 수 있을까라고 묻는 젊은 네덜란드인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스피노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스피노자를 계속해서 매혹시키지도 못했던 이 네덜란드인은 스피노자에게 요구합니다: 당신은 악(le mal)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말해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바로 그 때 편지들이 매우 중요해지며, 철학자들이 많은 편지들을 보냅니다. 아주 선량한 사람인 스피노자는 처음에는 이것이 가르침을 원하는 청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점차 그는 진상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네덜란드인이 그의 피부를 벗겨내길 원하는 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편지가 계속되면서 착한 기독교도인 블리옌베르크의 노여움이 커져가고 그는 스피노자에게 말하는 것을 그만두게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악마(devil)입니다! 스피노자는 악은 어려운 것이 아니며, 악은 나쁜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신체와 나쁘게 혼합된 신체를 만나는 것입니다. 나쁘게 혼합되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의 부속적인 혹은 구성적인 관계의 하나가 위협을 받거고 위태롭게 되고 혹은 심지어는 파괴되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혼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 즐거워하면서 자신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스피노자는 아담에 관한 예를 자신의 방식을 통해 분석합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조건 속에서 우리는 관념들, 변용들-관념들의 단지 한 종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절대적으로 비난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기적에 의해서 우리는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 신체들의 이러한 행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어떻게 우리는 원인들에 관한 앎을 발생시킬 수 있을까요? 한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변용의 관념들, 혼합의 관념들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한동안 우리는 태어난 이래로 만남들을 변화시켜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으며 따라서 사물들이 잘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이것이 내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미 데카르트에 반대하는 광신적인 반작용을 내포합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는 2권에서 우리가 단지 우리 자신을 알[connaître] 뿐이며, 우리는 단지 외적인 신체들이 우리 자신의 신체들에 대해 생산하는 변용들(affections)에 의한 외적인 실체들만을 알 뿐이라는 것을 매우 강하게 긍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를 상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기본적인 반-데카르트적 정리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 사유하는 것(chose pensante)의 모든 이해력(appréhension)을 배제하며, 또한 그것은 코기토의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신체들의 혼합물을 알 뿐이며 나에 대한 다른 신체들의 작용을 통해서, 그리고 혼합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 뿐입니다.
이것은 반-데카르트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반-기독교적이기도 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신학의 근본적인 요점 중 하나는 신학에서 아담의 완전함의 이론이라고 불리우는, 최초로 창조된 인간의 즉각적인 완전함입니다. 아담은 죄를 범하기 전에는 가능한 한 최대한의 완전함으로 창조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죄에 관한 이야기는 타락(Fall)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타락은 아담이 창조된 것인 한에서 아담이 완전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스피노자는 이 관념이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립니다. 그의 관념은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초의 인간이라는 관념을 부여받았다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단지 가장 무역능한(powerless) 존재, 가장 불완전한 존재라는 그러한 관념을 부여받습니다. 왜냐하면 최초의 인간은 우연한 만남 속에서 존재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신체에 대한 다른 신체들의 작용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에는 아담은 절대적인 불완전함과 부적합함의 양태로 존재하며, 또한 그는 우연한 만남들에 양도되어 버린 작은 신체의 양태속에서 존재합니다. 만일 아담이 보호받는 환경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너무 많이 이야기해 버렸군요. 보호받는 환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악이 나쁜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스피노자는 그 네덜란드인과의 서신교환 속에서,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항상 저에게 신이 아담으로 하여금 사과를 먹을 수 없게 만든 예를 제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도덕적 법칙에 관한 예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첫 번째 금기. 스피노자는 그에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스피노자는 독과 중독이라는 형태로 아담에 전체 이야기를 연결시킵니다. 실재에 있어서는 무엇이 일어날까요? 신은 결코 아담에게 그 어떤 것도 금기하기 않았습니다. 신은 아담에게 계시를 부여했습니다. 아담은 사과의 신체가 우리 자신의 신체의 구성에 끼치는 해로운 효과를 예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과는 아담에게 독입니다. 사과의 신체는 그러한 특징적 관계 하에서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그것의 구성이며, 그것은 단지 아담의 신체의 관계를 분해함으로써 아담의 신체에 작용할 뿐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가 신의 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잘못을 범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가 이러한 방식으로 불복종했다는 그러한 의미에서가 아니며, 오히려 그가 아무 것도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이 상황은 또한 동물들 사이에서 존재합니다. 동물 중의 어떤 것들은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어떤 것을 피하고자 하는 본능(instinct)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본능을 가지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변양시키고(modifie) 나에게 작용하며 나 자신의 관계와 결합되며 나 자신의 신체의 특징적 관계와 결합되는 그러한 만남을 할 때, 어떤 것이 일어날까요? 저는 나의 작용역능은 증가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것은 이러한 특수한 관계와 관련해서 증가됩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내가 나를 변양시키켜 나의 관계들 중의 하나를 위태롭게 하거나 파괴하는 신체의 특징적 관계와 같은 만남을 할 때, 나는 나의 작용역능이 감소했거나 혹은 심지어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의 두가지 근본적인 affect 혹은 affectus를 발견합니다: 슬픔과 기쁨.
이러한 수준에서 모든 것을 요약해 본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변용의 관념들의 기능으로 두 가지 종류의 변용의 관념들이 있습니다: 나 자신의 특징적 관계에 이익이 되거나 이것을 선호하는 효과의 관념과, 두 번째로는 나 자신의 특징적 관계를 위태롭게 하거나 파괴하는 효과의 관념. 이러한 두 유형의 변용의 관념들에는 affectus에 있어서의 두가지 변이의 운동들이, 변이의 두가지 극들이 상응할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나의 작용역능은 증가되며, 즐거움의 affectus를 겪게 됩니다(éprouve). 후자의 경우 나의 작용역능은 감소하며 나는 슬픔의 정서(affectus)를 겪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이들 두가지 근본적 정서들(affects)을 통해로 하여, 모든 정념들(passion)을 일으킬 것입니다: 작용역능에 있어서의 증가로서의 기쁨, 작용역능의 감소나 파괴로서의 슬픔 말입니다. 그리하여 신체이든 영혼이든 각각의 것은 어떤 특징적이고 복잡한 관계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나는 또한 신체이든 영혼이든 각각의 것은 affect되는 것의 어떤 권력(pouvoir)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은 우리들의 각각의 것이 affect되는 것의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듯이 일어납니다. 만일 여러분이 짐승들을 사고한다면, 스피노자는 동물들 사이에서 나열되는 것은 전혀 유도 종도 아니라고 우리에게 확고하게 말할 것입니다: 종과 유는 절대적으로 혼동된 통념들, 추상적인 관념들입니다. 나열되는 것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그리고 그는 유일한 물음은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심지어 알지(savons) 못하다고, 우리는 영혼과 정신에 관해서 다만 지껄일 뿐이며,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고 말함으로써 (그 이전에 홉스와 다른 사람들이 했던) 그의 전체철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물음의 하나를 나열합니다. 하지만 신체는 신체를 구성하는 관계의 전체에 의해, 혹은 affect되는 것의 그 권력에 의해서 정확히 동일한 것에 해당하는 것에 의해 정의됩니다. 여러분이 신체가 어떤 affect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모르는 한에 있어서, 여러분이 우연한 만남에 있어서 그와 같은 것을 배우는 한에 있어서 여러분은 현명한 삶을 살지 못할 것이며, 지혜를 가지지도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은 전혀 도덕적인 물음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신체에 관한 물음으로서, 그리고 영혼에 관한 물음으로서 모든 물리적인 물음입니다. 신체는 근본적으로 은폐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종들에 관해서, 인간의 유에 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의 신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affect) 것, 우리의 신체를 파괴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물음은 affect되는 것의 권력입니다. 개구리를 원숭이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종적이거나 유적인 특성들이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오히려 사실은 이 특성들이 똑같은 affection을 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각각의 동물에게 affect들의 참된 차트를 만드는 것, 즉 짐승이 할 수 있는 affect들을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affect들 말입니다. 바로 이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문화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는 인간은 똑같은 affect들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어떤 정부가 남미의 인디언들을 전멸시켰던 한가지 방법이 인디언들이 지나다니는 길 위에 유행성 감기에 걸린 사람들의 의복을, 감기에 걸려 진료소에 있던 사람들의 옷을 놓아두는 것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은 유행성 감기라는 정서에 저항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총도 필요없이 이들은 마치 파리처럼 나가 떨어졌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숲속에서의 삶이라는 조건 속에서는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살아갈 수 없는 위험에 직면합니다. 그러므로 스피노자는 인간이라는 유(genre humain), 인간이라는 종(espèce) 혹은 인종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누군가가 할 수 있는, 할 수 있다는 말의 가장 강력한 의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질병들을 구성하는 정서들의 목록을 만들지 못하는 한에서 말입니다. 분명 경주마와 수레를 끄는 말은 동일한 종이며 동일한 종의 두가지 다양성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정서들은 매우 상이합니다. 이들의 질병들은 절대적으로 상이합니다. 이들의 affect됨의 능력(capacité)도 완전히 상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수레를 끄는 말이 경주마보다는 오히려 황소와 더 밀접하다고 말해아만 합니다. 그러므로 정서들에 관한 동물행동학적 도표(carte éthologique)는 동물들의 유전적 혹은 종적 결정과는 매우 상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촉발되는 것의 권력이 두가지 방식으로 충족된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독에 중독되었을 때 나의 촉발되는 것의 권력은 절대적으로 충족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작용권력이 영(zéro)으로 향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충족되며, 그리하여 그것은 금지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내가 즐거움을 겪을 때, 이것은 내가 나의 신체와 그 신체를 결합시키는 신체를 만날 때, 나의 촉발되는 것의 권력이 동등하게 충족되며, 나의 작용권력은 증가하며 ...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나쁜 만남의 경우에 나의 모든 존재하려는 힘(vis existendi)이 다음과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 집중화됩니다: 이 신체의 효과를 거부하기 위해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affect) 신체의 효과를 투입하는 것에 적합하여 나의 작용역능은 감소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매우 구체적인 것들입니다: 여러분은 두통을 가지고 있고,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읽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존재력이 여러분의 편두통의 자취에 풍부하게 투입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당신의 부속적 관계들의 하나에 있어서의 변화들을 내포하며, 그것은 여러분의 편두통의 흔적을 풍부하게 투입하기에 당신의 작용역능은 그에 따라 감소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와 반대로, 당신이 나는 정말 좋다고 느껴라고 말할 때, 그리고 여러분이 만족하고 있다고 말할 때, 여러분은 또한 신체들이 당신의 관계에 우호적인 비율과 조건 하에서 여러분과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당신에게 영향을 미치는(affect) 신체의 권력이 여러분 자신의 신체와 결합되어 있으며, 그러한 방식으로 여러분의 작용역능은 증가됩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여러분의 촉발되는 것의 역능은 완전하게 현실화된다고(effectué) 하더라도, 그것은 작용역능이 무한성에 따라 감소하는 혹은 작용역능이 무한성에 따라 증가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무한성에 따라? 정말일까요? 분명히 말해서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준에서 존재하려는 힘, affect됨의 권력(pouvoirs)과 작용하려는 역능(puissances)은 불가피하게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신만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한도 내에서는,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의 기능으로서의 작용역능의 이러한 변이들을 통해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또한 제가 가진 변용-관념들의 기능으로서의 정서(affectus)의 연속적인 변이의 노선을, 제가 가지게 된 만남들을 따라가기를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각각의 순간에는 나의 affect되는 것의 역능은 완전히 현실화되며 완전히 충족될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슬픔의 양태에 있어서, 혹은 즐거움의 양태에 있어서 충족됩니다. 물론 동시에 두가지 모두는, 우리를 구성하는 하위-관계들에서 잘 이해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일부는 슬픔으로 구성될 수 있으며 우리 자신의 또 다른 부분은 기쁨으로 구성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지엽적인 슬픔들과 지엽적인 기쁨들이 있습니다. 가령 스피노자는 간지럼(chatouillement)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지엽적인 기쁨; 이것은 간지럼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기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성(nature)의 기쁨일 수 있는데, 이 기쁨은 또 다른 본성의 공존재적 짜증(irritation coexistante)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 때 짜증은 슬픔입니다: affect되는 것의 나의 역능은 초과(dépass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녀의 affected되는 것의 역능을 초고하는 어떠한 것도 그 사람에게 좋지 않습니다. affected됨의 역능은 실제로 강렬도이거나 강렬도의 문턱입니다.
스피노자가 실재라고 하고자 하는 것은 강렬한 양만큼이나 강렬한 방식으로 어떤 사람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강렬도들을 모르는 한 여러분은 나쁜 만남을 하게 될 위험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분은 그것이, 즉 과잉(excès)과 도가 지나침(démesure) 모두가 아름답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극단도 없으며 거기에는 단지 실패만이, 오로지 실패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잉 복용(overdose)에 대한 충고. 이것이 바로 전체적인 파괴에 있어서 과잉되는 affected되는 것의 역능의 현상입니다.
확실히 저의 세대의 경우, 평균적으로, 우리가 철학을 행하곤 할 때 훨씬 더 철학적으로 교양을 가지고 있거나 훈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영역들에 있는 문화, 가령 음악, 회화, 영화와 같은 문화들을 놀라울 정도로 결여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 중의 대다수에게는 그 관계가 변화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즉 여러분들은 절대적으로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철학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색채와 같은 사물들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또한 소리가 무엇인지 혹은 이마주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철학이란 일종의 개념들의 합성기(synthétiseur)입니다. 개념을 창조하는 것은 전혀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습니다. 개념은 창조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정의했던 것은 단지 작용역능의 증가와 감소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작용역능이 감소하느냐 증가하느냐에 관한 것이며, 이에 상응하는 정서(affectus)는 항상 정념입니다. 나의 작용역능을 증가시키는 것일 때 그것은 기쁨이 될 것이며, 아니면 나의 작용역능을 감소시킬 때에는 슬픔이 될 것입니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에는 정념들이 있습니다: 기쁜 정념들 혹은 슬픈 정념들. 하지만 또 다시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슬픈 정념들을 유발시키는(affect) 것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플롯을 비난합니다. 성직자는 그의 신민의 슬픔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는 이러한 신민들이 스스로를 유죄라고 느끼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동-변용들(auto-affection) 혹은 적극적 정서들(affects)은 우리가 우리의 작용역능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능동들(actions)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정념들(수동들passions)의 영역에 남겨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변용-관념들을 떠날 수 있으까요? 어떻게 우리의 작용역능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키는 수동적 정서들을 떠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부적합한 관념들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일단 우리의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계에 엄격하게 남겨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듣었을 때에도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조건하에서 우리는 <에티카>를 일종의 극적인 전환을 준비하는 것으로 읽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적극적 정서들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하는데, 여기에서는 더 이상 정념들이 존재하지 않으며 작용역능이 이러한 모든 연속적인 변이들을 지나치는 대신 정복됩니다. 여기에서, 바로 이 지점입니다. 거기에는 윤리학과 도덕성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도덕성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결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우리의 역능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윤리학은 역능의 문제이지 의무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피노자는 심오할 정도로 반도덕적입니다. 선과 악 같은 도덕적 문제를 고려할 때 그는 행복한 본성(nature)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차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파악한 것은 좋은 만남들, 나쁜 만남들, 역능의 증가와 감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윤리학을 만드는 도덕성을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가 니체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용-관념들의 세계와 기쁨과 슬픔이라는 이처럼 정서적인(affective) 연속적인 변이들의 세계에 완전히 에워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때로는 나의 작용역능이 증가하며 때로는 감소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증가하느냐 감소하느냐에 따라 나는 정념들 안에 남아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경우들에서 저는 결코 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전히 저의 작용역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의 작용역능이 증가할 때 그것은 제가 상대적으로 덜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 역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여전히 형식적으로는 저의 작용역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는 제 자신의 affects의 원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제가 제 자신의 affects의 원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affects는 제게 있어서는 어떤 다른 것에 의해 생산됩니다: 저는 그러므로 수동적이며, 정념의 세계 내에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통념-관념들과 본질-관념들이 있습니다. 이미 통념-관념들의 수준에서는 이 세계로부터의 일종의 탈출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절대적인 무능(impuissance)의 세계 내에서 질식당하고 있으며 사로잡혀 있습니다. 심지어 저의 작용역능이 증가할 때에도 그것은 변이의 파편(segment) 위에 있으며, 아무 것도 저를 보증하지 못합니다. 거리의 구석진 곳에서 저는 머리에 커다른 충격을 받지 않게 될 것이며 나의 작용역능은 또 다시 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변용-관념이 혼합물이라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신체에 대한 하나의 신체의 효과라는 관념 말입니다. 통념-관념은 더 이상 나의 신체에 대한 다른 신체의 효과를 관련시키지 못합니다. 통념-관념은 그 대상으로 하여금 두 신체들간의 특징적 관계들의 적합나 부적합을 가지게 하며 또 이것과 관계맺는 관념인 것입니다. 만일 어떤 관념이 있다고 한다면 --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직은 알지 못하지만 항상 우리가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감히 결론내리는 어떤 것을 정의내릴 것입니다 --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명목적 정의라고 부를 것입니다. 저는 통념에 관한 명목적 정의가 그것은 관념이라는 것, 즉 하나의 신체가 다른 신체에 대해 미치는 효과를 표상하기 보다는 즉 두 신체들의 혼합이라고, 즉 두 신체들의 특징적 관계들의 내적인 적합나 부적합을 표상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 만일 내가 비소(arsenic)라고 명명된 신체의 특징적 관계와 인간 신체의 특징적 관계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그 특징적 관계 하에서는 비소가 나의 신체의 특징적 관계를 파괴하고 나를 독에 찌들게 하고 그리하여 내가 죽게 되는 바로 그 지점까지 이들 두 개의 관계들의 부적합한 통념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통념이 변용이라는 관념과는 다르며 오히려 하나의 신체와 또 다른 신체의 외재적 관계 혹은 또 다른 신체에 대한 효과의 seizure이며, 통념은 원인의 파악에 따라 제기되며, 그것은 마치 혼합물이 그러한 효과를 가졌다는 듯 하는 것이며, 이것은 고려되고 있는 두 개의 신체들의 관계들의 성격에 의한 것이며, 신체들 중의 하나의 관계가 다른 신체의 관계와 결합되는 그러한 방식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항상 관계들의 합성이 존재합니다. 내가 독에 중독되었을 떄, 비소의 신체는 나를 나의 신체의 부분들을 특징짓는 것과는 다른 관계 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나의 신체의 부분들은 비소가 이끈 새로운 관계에 들어서며, 이것은 완전히 비소와 결합됩니다; 비소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비소는 저를 먹고 자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소는 즐거운 정념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가 아주 잘 말하고 있듯이, 각각의 신체는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소는 즐겁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저는 즐겁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의 신체의 부분들을 끌어들여 그 자신의 것과, 비소의 신체와 결합되는 관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저는, 저는 슬픕니다. 저는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통념은, 만일 우리가 통념이 도달할 수 있다면, 가공할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분석적 기하학이나 다름없습니다. 통념은 전혀 추상적이지 않으며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이 신체는 여기에 있고 저 신체는 거기에 있습니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의 특징적 관계와 관련해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것의 영혼의 특징적 관계와 신체의 특징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는 모든 것을 파악할 것이며, 원인들에 의해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원인들과 분리된 효과들에 의해서 아는 것 대신에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저는 적합한 관념을 갖게 될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나를 기쁘게 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면 바로 그 만큼 나는 소화를 촉진하는 관계의 예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정다감한(amorous) 관계들을 위하여 하나의 노선을 변화시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스피노자가 사랑을 인식했던 것은 소화를 인식했던 것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그는 소화를 사랑을 인식했던 것처럼 인식하지는 않았습니다. Strinberg에게 있어서의 부부(ménage)이라는 예를 들어 봅시다. 즉 관계들의 이러한 종류의 분해들과, 그리고 나서 또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재결합되는 이 관계들 말입니다. affectus의 이러한 연속적인 변이는 무엇이며, 어떻게 몇몇 부적합이 몇몇 사람들과 적합하게 될 수 있을까요? 왜 어떤 사람들은 무한하게 반복되는 부부싸움(scène de ménage)의 형식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 사람들은 마치 그것이 그들을 위한 신선한 물이 가득찬 욕조라도 되듯이 그곳으로부터 출현합니다(Ils en sortent comme si ça avait été un bain d'eau fraîche pour eux).
여러분은 통념-관념과 변용-관념의 차이를 이해했습니다. 통념-관념은 불가피하게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원인들에 의한 앎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는 통념이라는 이 용어를 관념의 두 번째 종류를 지칭하기(qualifier) 위해 사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공통 통념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그것은 모든 정신들에 공통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것은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매우 조심스런(minutieux)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공통 통념과 추상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는 항상 공통 통념을 이처럼 정의내립니다: 그것은 모든 신체들 혹은 최소한 두 개인 여러 신체들에 공통된 어떤 것의 관념이며, 전체에 공통되고 부분에 공통되는 어떤 것의 관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들에 공통된 공통 통념들이 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공통 통념들은 이것이 모든 신체들에 공통된 어떤 것의 최초의 관념인 한에서만 모든 정신들에 공통적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전혀 추상적인 통념들이 아닙니다. 모든 신체들에 공통되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자면 운동하고 있는 존재 혹은 정지하고 있는 존재. 운동과 정지는 모든 신체들에 공통된다고 말해지는 통념들의 대상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모든 신체들에 공통되는 어떤 것을 지시하는 공통 통념들이 있습니다. 또한 거기에는 두 신체들 혹은 두 영혼들에 공통된 어떤 것,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지시하는 공통 통념들이 있습니다. 또 다시 공통 통념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종이나 유와 어떤 관계도 맺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여러 개의 신체들 혹은 모든 신체들에 공통된 것의 언표(énoncé)입니다; 혹은 여러 개의 신체로 이루어져 있지 않는 어떤 단일한 신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의 신체에는 공통적인 것들 혹은 공통 통념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혼합물에 이르게 하는 이러한 상황에 남겨질 수 있는가?
여기에서 스피노자의 텍스트는 매우 복잡해집니다. 우리는 단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 출발을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넓게 말해서 내가 우연한 만남들에 있어서 정서될(affected) 때, 나는 슬픔이나 기쁨의 정서를 받습니다. 내가 슬픔으로 정서될 때 나의 작용역능은 감소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러한 역능으로부터 거의 분리됩니다. 내가 기쁨으로 정서될 때 나의 작용역능은 증가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이러한 역능으로부터 거의 분리되지 않습니다. 좋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슬픔으로 정서된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비참해진다고 저는 믿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더 이상 얘기할 것이 없게 됩니다: 여러분의 작용역능을 감소시키는 슬픔에 있어서는 그 어떤 것도 공통통념을 형성하기 위한 슬픔 내부에서부터 슬픔으로 당신들에게 affect하는 신체들 및 여러분 자신의 신체들에 공통된 어떤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을 꼬드길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여러분에게 슬픔으로 affect하는 신체는 단지 여러분에게 슬픔으로 affect할 뿐이며, 바로 그러한 한도에서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것과 적합하지 않는 관계 속에서 여러분에게 affect합니다.
스피노자는 매우 단순한 어떤 것을 얘기합니다. 즉 슬픔은 어떤 사람도 지적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슬픔에 있어서 우리는 비참해 집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권력(pouvoir)은 주체를 슬프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감(angoisse)은 총명함(intelligence)이나 쾌활함(vivacité)이라는 문화적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슬픈 정서를 가지고 있는 한 신체는 여러분의 것에 적합하지 않는 조건 속에서 그리고 관계 속에서 여러분의 신체에 작용하며, 영혼은 여러분의 영혼에 작용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슬픔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여러분으로 하여금 공통 통념을 형성하게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두 개의 신체들과 두 개의 영혼들 사이에서 공통된 어떤 것의 관념을 형성할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지혜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죽음에 관한 사고는 가장 지저분한(immonde) 것입니다. 그는 죽음에 관한 성찰인 전체 철학 전통에 대립합니다. 그의 공식은 철학이 삶에 관한 성찰이지 죽음에 관한 성찰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말해서 죽음은 항상 나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 여러분은 기쁨으로 정서됩니다. 여러분의 작용역능은 증가됩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즐거움의 정서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은 여러분에게 정서한 신체나 영혼이, 따라서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결합되며 여러분 자신의 신체와 결합되는 관계 속에서 여러분에게 정서를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의 공식과 소화를 촉진하는 공식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즐거움의 정서에서 여러분에게 정서를 미치는 신체는 그 관계를 여러분 자신의 신체와 결합하는 것으로서 지시되는 것이지 여러분 자신의 신체를 분해하는 그러한 관계로서 지시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어떤 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에게 정서하는 신체에 공통된 것, 여러분 자신의 신체에 공통된 것, 여러분에게 정서하는 영혼에 공통된 것과 여러분 자신의 영혼에 공통된 것에 관한 통념을 형성하게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쁨은 우리를 총명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주 흥미로운 것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기하학적 방법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부여하며 그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일종의 살아있는 경험에 대한 명백한 호소가 있습니다. 이미 슬픔 정념들의 증오와 같은 것을 가지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슬픔 정념의 목록은 무한한 것이며, 그는 모든 보상 관념이 슬픈 정념을 감싸고 있다고, 모든 안위 관념이 슬픔 정념을 감싸고 있다고, 모든 자존심(orgueil) 관념이 죄의식(culpabilité)을 감싸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갑니다. 그것은 <에티카>에서 가장 믿기 어려운(merveilleux) 운동의 하나입니다. 기쁨의 정서들(affects)은 도약대(tremplin)와도 같아서 슬픔만이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결코 통과해 갈 수 없었을 어떤 것을 통해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정서하는(affectant) 신체와 정서되는(affecté) 신체에 공통된 것의 관념을 형성하도록 애걸합니다. 이것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총명해집니다. 
라틴어에서 좋게(bon) 되어가는 사람은 동시에 사랑에 빠진 사람입니다... 이것은 세미나 속에서 보았습니다. 그것과 연결된 것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람은 진보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동질적인 선에서 진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속임수는 마치 작은 기쁨이 연결차단장치를 작동시키듯이(déclenché un déclic) 우리가 거기에서 진보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지도의 필요성: 여기에서 잠금장치를 푸는 것에 일어난 것은 무엇일까요? 작은 기쁨이 슬픈 정서들을 일소하는, 혹은 투쟁의 과정에 있는 구체적인 관념들의 세계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이 모든 것이 연속적인 변이의 일부를 구성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연속적인 변이를 다소간 넘어가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적어도 공통 통념의 잠재성(potentialité)을 획득하게 합니다. 이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들은 상당히 지엽적인(locaux) 것들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공통 통념을 형성하는데 성공한다면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사람과의 혹은 그러한 동물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어떤 지점에서든, 여러분은 말합니다: 나는 마침내 어떤 것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입니다. 나는 어제 보다 덜 어리석어졌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내가 이해했다’고 하는 것은 때때로 여러분이 공통통념을 형성하게 되는 계기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상당히 지엽적으로 형성했으며, 그것은 여러분에게 전혀 공통통념들을 주지 못합니다. 스피노자는 전혀 합리주의자처럼 사고하지 않습니다. 합리주의자들 가운데에는 이성의 세계가 있으며 관념들이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를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명백히 그것들 중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성적일(raisonnable)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성적인 존재 혹은 현명한 존재(être sage)가 생성(devenir)의 문제이며, 특이한 방식으로 이성 개념의 내용들을 변화시키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적합한 만남들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어떤 것이 그/녀의 정서되는 역능을 초과할 때 그것이 그/녀에게 좋다(bon)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여백 위에서, 그/녀의 정서되는 역능의 한계에서, 기쁨의 한계와 슬픔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기쁜 한계인 그 조건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정서되는 역능을 초과하는 모든 것은 추합니다(laid). 상대적으로 추합니다: 파리들에게 좋은 것은 여러분에게 불가피하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떤 추상적인 통념도 존재하지 않으며, 거기에는 인간 일반에게 좋은 어떤 공식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열되는 것은 여러분에게 있어 여러분의 역능이 무엇인가하는 것이며, 로렌스(Lawrence)는 직접적으로 스피노자적인 것에 관해 말합니다: 여러분의 정서되는 것의 역능을 초과하는 강렬도는 나쁩니다(사후 저작들). 그것은 불가피합니다: 나의 눈에 너무 강렬한 청색은 나로 하여금 그것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떤 것에게는 아름다운 것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것에게 좋은 것이 있다고 여러분은 제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affect되는 역능들은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체 보편자의 affect되는 것의 역능을 규정하는 affect되는 것의 역능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상당히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관계들은 무한성에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질서속에서도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나의 관계는 비소의 관계과 결합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를 행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명백히 말해서 그것은 저에게 많은 것을 행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나의 신체의 대부분은 또 다시 비소의 그것과 결합되어 있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갑니다. 어떤 질서 속에서 관계들이 결합되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어떤 질서 속에서 모든 우주(tout l'univers)의 관계들이 결합되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전체 우주(l'univers entier)의 affect됨의 역능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 전체 세계는 이제 신체이거나 영혼인 한에 있어서 코스모스, 세계(monde)가 될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전체 세계는 스스로 합성하는 관게들의 질서를 따르는 하나의 신체일 뿐입니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정확하게 말해서 여러분은 affect되는 것의 보편적(universel) 역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은 그가 자신의 원인인 한에서 전체 우주이며 affect되는 것의 보편적 역능을 본성에 의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기이한 방식으로 신의 관념을 사용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여러분은 기쁨을 맛봅니다. 여러분은 이 기쁨이 여러분과 관계한다고, 그것이 여러분의 주요 관계들, 여러분의 특징적 관계들과 관련되어 있는 어떤 중요한 것과 관계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여러분에게 도약대(tremplin)처럼 기능하게 될 때 여러분은 통념-관념을 형성합니다: 신체는 어떤 것 속에서 저에게 정서하고(affecte) 제 자신의 신체에 적합하게 되는 것일까요? 어떤 것 속에서 영혼은 저에게 정서하는 것일까요? 또 어떻게 제 자신의 영혼에 가장 적합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이들의 우연한 만남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이들 관계들의 합성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과는 반대되는 작동을 행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들의 불행을 추스리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경증(névrose)이나 의기소침(dépression)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우리가 총계를 내려고 할 때 말입니다. 이런 제기랄, 거기에는 이것이 있고 거기에는 저것이 있어라고 할 때 말입니다. 스피노자는 정반대를 제안합니다: 우리의 슬픔을 추스리는 대신 그는 우리가 그것이 정말로 우리와 관계한다고 느끼는 조건에서 기쁨에 관한 지엽적인 출발점을 취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공통 통념을 형성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 기쁨을 지엽적으로 획득하려고 하며 이 기쁨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살아간다는 일입니다. 우리는 기쁨의 독자적인 몫과 관련해서 슬픔의 독자적인 몫을 감소하려고 노력하며 다음과 같은 엄청난 충격을 가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신체와 나 자신의 신체간의 적합의 관계들을 지시하는 공통 통념들을 충분히 확신하며, 그 후 똑같은 방법을 슬픔에 적용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슬픔에 기반해서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공통 통념을 형성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이 공통통념들에 의해 우리는 부적합한, 더욱 더 적합하지 않는 신체를 더욱 생생하게 파악하기 위한 방법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연속적인 변주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뚤비뚤한 곡선(courbe en cloche)이 됩니다.
여러분은 기쁜 정념들을, 즉 작용역능의 증대로부터 출발합니다. 여러분은 첫번째 유형의 공통통념들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사용합니다. 그 통념은 기쁨으로 나를 정서(affect)하는 것과 내 자신의 신체 사이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며, 여러분이 여러분의 살아있는 공통통념들을 최대치로 열어놓는다는 것과 여러분이 또 다시 슬픔으로 하강한다는 것 사이에는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공통 통념들과 더불어서 여러분은 그러한 신체가 여러분 자신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는, 그러한 영혼이 여러분 자신의 영혼과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방식을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분이 형성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이 적합한 관념 내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결국 여러분은 원인들의 지식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여러분이 철학 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 하나의 것이 나열됩니다. 살아가는 방식 말입니다. 단 하나의 것이 나열됩니다. 삶에 대한 성찰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죽음에 관한 성찰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서 상대적으로 가장 작은 비율을 단지 마지막에서야 affect하는 죽음을 만들어가는 것에 있는 작동입니다. 즉 그것을 나쁜 만남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것에 있는 작동입니다. 아주 잘 알려져 있듯이 신체가 피곤해 하는 한에서 나쁜 만남의 개연성들은 증가합니다. 그것은 공통 통념, 즉 부적합(disconvenance)의 공통통념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죽음은 진정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것입니다. 죽음은 정말로 내적인 질병(maladie)의 경우를 제외하면 외재적인 우연한 사건(accident)입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공통 통념도 없습니다. 다른 한편 신체가 나이가 들어갈 때, 그것의 작용역능이 감소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가 어제 할 수 있었던 것을 할 수 없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나를 매혹시켰다는 것, 이것은 일종의 작용역능의 감소입니다. 정말로 익살꾼(clown)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확히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형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렇게도 빨리 나이가 들어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너무 빠르게 나이가 들어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익살꾼이 되는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늙은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우리가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나쁜 만남을 행하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하지만 젊었을 때에는 우리는 나쁜 만남의 위험으로 뛰어듭니다. 그의 작용역능이 나이가 들어감의 기능으로서 감소하는 한, 그의 정서(afffect)되는 역능은 변화하며 그것을 행할 수 없으며, 젊은 사람에게 계속해서 작용하는 그러한 유형은 매혹적입니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입니다. 핏제랄드(Fitzgerald)의 어떤 소설([Tender is the Night]에서 수상스키 에피소드)에는 매혹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어떻게 나이가 들어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한 총체적인 아름다움을 열 개의 페이지에 걸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구경꾼들 자신들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결코 아닌 광경들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나이가 들어가는가를 아는 것, 바로 이것은 공통통념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어떠한 방식으로 사물들과 다른 신체들이 여러분 자신의 것과 부적합하게 되는가를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 때, 바로 그 때 도달합니다. 그리고 나서 불가피하게도 여러분 세대의 우아함(grâce)이 될, 무엇보다도 젊음에만 귀착되지 않는 새로운 우아함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종의 지혜입니다. ‘기꺼이 당신이 바라는 대로 삶을 살아가길’이라고 말하게 하는 것은 좋은 건강상태(bonne santé)가 아니며, 또한 삶에 부착되어 있는 의지(volonté)도 아닙니다. 스피노자는 존경스럽게도 죽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철학자들에게 이런 젠장(merde)이라고 말할 수 있는 법을 알았습니다.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의 수고들을 훔쳐내기 위해 스피노자에게 옵니다. 나중에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에 관해서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는 위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라이프니츠가 말입니다.
저는 바로 이 두 번째 수준에서, 우리가 관계들이 결합되는 통념-관념에 도달한다고 말함으로써 끝을 맺고 싶습니다. 또 다시 이것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비범하게도 살아있는 모험이었다고 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정념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작용역능의 형식적 소유를 획득했습니다. 통념들의 형성, 이것은 추상적 관념들이 아니며, 문자그대로 삶의 규칙이며, 저에게 작용역능의 소유(possession)를 부여합니다. 공통 통념들은 두번째 종류의 앎(connaissance)입니다. 세번째 종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두번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단지 스피노자만이 세번째 종류로 들어갑니다. 공통 통념들 위에서...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듯이 공통 통념들은 추상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집합적이며, 항상 복수성을 지시합니다. 하지만 공통통념들은 그것에 못지 않게 개별적입니다. 공통 통념들은 바로 그러한 신체들이 적합하게 되는 방식이며, 바로 그러한 한계에서 모든 신체들이 동의하는 그러한 방식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그것은 개별성이라는 전체세계입니다. 그러므로 공통 통념들은 항상 개별적입니다.
관계들의 합성들 이상으로, 공통 통념들을 정의하는 내적인 적합들(convenances) 이상으로 특이한 본질들이 있게 됩니다. 차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그 때 관계와 나를 특징짓는 관계들이 나의 특이한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나를 특징짓는 관계 때문에...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완전히 텍스트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실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공통 통념들 혹은 나를 특징짓는 관계들은 여전히 나의 신체의 연장적 부분들과 관계합니다. 나의 신체는 무한성으로 확장된 부분들의 무한성으로 합성되어(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나의 본질에 상응하지만 나의 본질과 혼동되지 않는 바로 그러한 관계들로 들어섭니다. 왜냐하면 나를 특징짓는 관계들은 나의 신체의 연장적 부분인 운동에서 그리고 정지에서 결합되어 있는 규칙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특이한 본질은 역능의 수위입니다. 다시 말해 이것은 나의 강렬도의 문턱들(seuils)입니다.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높은 것 사이에서, 나의 탄생과 죽음 사이에서, 이것은 나의 강렬한 문턱들입니다. 스피노자가 특이한 본질이라고 부른 것은, 제게는 강도높은 성질입니다. 이것은 우리들 각각이 그/녀의 본질을 지시하는 일종의 강렬도들의 복합에 의해, 그리고 또한 연장된 부분들, 연장적 부분들을 통제하는 일종의 관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내가 통념들의 앎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이것은 이것의 연장된 부분들의 관점에서, 이것들의 연장의 관점에서 신체들의 적합이나 부적합을 지배하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에 관해서 말할 때 저는 그것이 강렬도인 한에서 나의 본질을 충분하게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 신은 무엇일까요? 스피노자가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역능에 의해 정의했을 때 그는 자기 생각을 아주 잘 표현했습니다. 그가 분명하게 차용하고 있는 모든 용어들: 수위, 라틴어로는 gradus인 이 용어는 중세 철학에서의 오랜 전통을 가리킵니다. 그라두스(gradus)는 강도높은 양(quantité intensive)이며, 연장적 부분들과 대립하거나 이것과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각각의 특이한 본질을 이러한 종류의 강렬도로, 혹은 강렬도의 한계로 인식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유적 공통성이든 종적인 공통성이든 간에, 우리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것과 동일한 강렬도의 문턱들을 가지고 있진 않습니다. 이 세 번째 종류의 지식, 혹은 본질-관념의 발견은, 공통 통념들에 근거하여, 새로운 극적인 전환에 의해서, 우리가 세계의 이러한 세 번째 영역(sphére), 즉 본질들의 세계로 넘어갈 때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상관관계 속에서 스피노자가 후자를 알지 못하면 전자도 알지 못하게 된다고 불렀던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것인 특이한 본질과 신의 것인 특이한 본질과 외재적인 사물들의 특이한 본질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세번째 종류의 지식은 한편으로는 유태신비주의의 모든 전통에 호소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스피노자에게 적합한 일종의 신비적이고 무신론적인 경험을 내포합니다. 저는 이러한 세번째 종류의 지식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만남과 혼합물들의 질서를 넘어서 특징적 관계들을 가리키는 통념들의 이러한 다른 무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특징적 관계들을 넘어서면 특이한 본질들의 세계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순수한 강렬도들 같은 관념들을 형성했을 때, 이 속에서 나 자신의 적합한 강렬도가 외적인 사물들의 강렬도에 적합할 때, 바로 그 때 그것은 세 번째 종류의 지식입니다. 만일 모든 신체들이 서로 적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신체나 영혼의 연장된 부분들을 지배하는 관계들의 관점에서 볼 때, 연장적 부분들, 모든 신체들은 서로 적합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순수 강렬도들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러한 모든 것은 서로 적합해야만 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여러분 자신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듯이, 여러분과는 다른 사물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또한 동시에 신에 대한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입니다, 등등... 이처럼 신비로운 점에서 제가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강렬도들의 세계입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단순히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성취된 방식으로 소유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스피노자가 무한한 기쁨(béatitude)나 적극적 정서라는 신비적인 말에서 찾아낸 기쁨이 아닙낟. 그것은 자동-정서(auto-affect)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구체적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번째 종류, 그것은 순수한 강렬도들의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