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자기의식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과 관련해서
김 정 주**** 호남신학대 교수
【주제분류】존재론, 인식론
【주 요 어】자기의식, 현존재, 형이상학, 초월, 주관성, 시간, 구상력, 자기촉발
【요 약 문】
칸트의 자기의식(통각)은 논리적 판단형식들과 존재론적 범주들의 궁극적 근거이며 인식의 근원적 원칙이다. 그것은 주어진 표상들에 대한 동반 의식으로서, 언제나 경험적 객관들의 객관성에 대한 구성적 의식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관계할 수 있는 유한한 사유의 능력이다. 이것은 칸트가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원칙적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기 하이데거는 새로운 주관성 이론을 전개하여 그 자신 세계-내-존재로서 칸트에게는 자기의식이라 불린 현존재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사이의 공통된 지반을 발견함으로써, 칸트의 주객 분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는 기초존재론의 이념에 따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 정초로 해석한다. 이 형이상학 정초는 존재론의 내적인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서 동시에 존재이해의 초월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인간적 주관의 주관성에 대한 해명이다. 이때 생산적 구상력, 자아의 자기촉발, 시간 자체에 대한 현상학․존재론적인 해명을 통해 그는 칸트의 자기의식 개념을 변형하고 발전시킨다.
1. 머리말
칸트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이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이성, 자기의식, 주관성이란 말은 인기 없는 주제가 되었다. 현대의 적지 않은 철학적 사색들은 현대의 예술처럼 이성이나 자기의식의 능력과 역할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으며 그러기에 이성이나 자기의식 대신에 실존이나 언어와 같은 구체적 사태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칸트 철학이 오늘날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만일 칸트 철학이 단순히 바로 위기상황으로 내몰린 근대의식철학의 산물로서만 철학사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칸트의 동시대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보여주기 위해선, 현대의 새로운 지성적 문제상황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진지한 철학적 통찰에 그것은 중요한 실마리(개념, 도식, 방법 등)들을 제공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피히테가 칸트 인식론의 전제들, 다양한 인식능력들의 정태적 배열, 주관과 객관의 분리 혹은 주관의 자기의식과 주관의 객관구성의 분리를 비판한 이래, 독일관념론은 라인홀트(K.L. Reinhold)가 맨 처음 제시한 자기의식 모델, 즉 주관과 객관의 관계 혹은 주관과 객관의 통일이라는 자기의식 모델을 체계화했다. 그 후 이러한 모델은 코헨(H. Cohen)과 나토르프(P. Natorp) 등과 같은 반형이상학적 신칸트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다. 그들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근대적인 수학적 자연과학들의 철학적 정당화로 해석하는 가운데 감성적 직관의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범주에 귀속시킴으로써 감성적 직관과 오성, 더 정확히 말하면 시간과 자기의식(통각)의 통일을 추구했다. 그들은 인식의 모든 근본적 규정들을 자기의식적 통각에서 도출시킬 수 있으며 통각의 논리적 판단에서 주객의 관계 혹은 통일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신칸트주의적 칸트 해석을 이중의 의미에서 비판했다. 칸트에게는 첫째 “존재론이 문제이지 인식론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 둘째 “자연의 이런 존재론은 질료적 자연의 존재론이 아니라 사물존재자(Vorhandenes) 일반의 존재론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었다(PIK 66).
칸트의 초월철학을 계승한다고 주장한 후설의 현상학은 주관과 객관의 의식초재적 실재성에 대한 판단중지를 통해 주관과 객관 사이의 지향적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고전적 초월철학의 모델인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후설의 지향성 개념이 여전히 주관과 객관의 이분법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통해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사이의 공통된 지반을 발견함으로써 칸트의 주객 분리를 극복하고자 했다. 초기 하이데거는 결코 주관성 이론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전적 독일철학, 신칸트주의, 현상학이 완수하지 못한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주관성의 개념을 해석학․현상학적으로, 존재론․실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그는 “‘역사적’ 주관의 주관성”, “주관의 주관성의 선행적인 존재론적 분석론”, 혹은 “주관의, 더구나 유한한 주관의 주관성의 순수한 현상학”을 제안하여 “초월하는 주관 자체의 주관성에 관한 물음”을 제시함으로써 전통적 인간학과 심리학에 얽매인 칸트의 주관성 이론을 극복하고자 했다. 하이데거에겐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대립이 해체되었다.
파지(把持 Retention)와 예지(豫持 Protention)를 포함하는 생생한 현재(lebendige Gegenwart)라는 시간성을 담지하는 후설의 현상학적 자아를 초기 하이데거는 자발성으로, 즉 시간화(Zeitigen)로, 현존재의 인식과 학문 태도에 있어서는 현재화(Gegenwärtigen)로 해석했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근원적 시간화를 통해 현존재의 근본 구조를 파악하여 현존재를 단적으로 근원적 시간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존재시간성(Temporalität)의 차원을 향해 탐구하는 과정을 한 걸음 나아가고 더욱이 현상 자체의 강요에 의해 그리로 떠밀려간 최초이자 유일한 사람은 칸트이다”(SZ 23), 그리고 “존재와 존재성격들에 대한 이해의 시간과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를 감지했던 유일한 사람은 칸트이다”(L 194)라고 하이데거는 말했다. 그는 후설보다 칸트가 더 명확히 자아의 시간성을 보았고 존재론을 시간과 자아에서 정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자아론으로서의 초월철학의 역사적 선구는 그에겐 칸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칸트가 시종일관 자아의 시간성을 사물존재성(Vorhandenheit)에 대한 전통적 존재론의 지반 위에서 탐구했다고 비판하며, 이에 따라 『존재와 시간』에서 다루어진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의 이념을 기반으로 칸트의 자아론을 변형하고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구성된 칸트 사유를 전통적 존재론의 주관적 정당화로 간주하면서 자기 자신의 기초존재론의 본래적 선구자로 파악했다.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하는 초기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은 기초존재론의 이념을 확증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완성되었다.
칸트 철학이 단순히 근대적 이성철학 혹은 의식철학으로만 폄하되지 않고 역사적 제한을 뛰어넘는 생명력이 있음을 보여주면서 또한 동시에 칸트의 인식비판의 측면에서는 주객 분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에 관한 이 글에선, 주관과 객관에 대한 인식론적 분리의 전제 아래 인식의 궁극적 원칙으로서 수용된 칸트의 자기의식 개념이 먼저 다루어질 것이고, 그리고 나서 칸트 철학의 존재론적 해석에 대한 고찰을 통해 칸트에겐 자기의식이라 불린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살펴볼 것이다.
2. 칸트의 자기의식 이론
경험적 개체가 아니라 어떠한 존재의 규정도 없는 순수한 자기의식을 인식비판의 최종적 원칙으로 받아들이는 『순수이성비판』에 있어서 초월적 연역의 초판에 따르면 감성과 구상력과 오성은 각각의 독립적인 인식능력들이며, 이때 초월적 구상력은 독립적으로 오성과 감성을 매개하는 자발성이다(특히 A 124 참조). 그러나 초판의 이론은 감성과 오성에 대한 칸트의 본래적 능력 이원론과는 배치되며, 이 본래적 주관성 이론은 초월적 연역의 재판에서 비로소 전개된다. 여기선 순수오성만이 유일한 자발성으로 인정받는다(B 129-131). 이때 오성의 본질은 칸트의 통각 개념에서 나타나 있다. 통각은 이미 자체 내에 자기의식을 포함하고 있는 용어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내 자신에 대한 의식”(Das Bewußtsein meiner selbst), 즉 자기의식의 또 다른 명칭이다. 칸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통각의 분석적 통일이라는 개념들을 통해 오성의 본질적 구조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초월적 통각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규정에서와는 달리 사유하는 실체가 아니라 논리적 판단형식들과 존재론적 범주들의 근원적 원칙이다. 나의 모든 표상들에 관하여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은 초월적 통각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A 106-107). 다양에 대한 의식의 가능 조건으로서 이 근원적 통각, 그 자체가 통일인 초월적 통각, 혹은 통각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은 “나는 사유한다”라는 명제로 표현되며, “나는 사유한다는 것(das Ich denke)은 나의 모든 표상들에 동반될 수 있어야 한다”(B 131-132). 이 “나는 사유한다”라는 의식이 동반 의식인 이상, 그것은 표상의 내용들을 직관적으로 산출하는 신적 오성이 아니라, 표상의 내용들이 미리 주어질 때 비로소 그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유한한 지성적 능력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표상들에 대한 단순한 동반 의식이 아니라 이 표상들의 객관과의 연관성을 규정짓는 근거가 된다. “통각의 초월적 통일은 직관에 주어진 모든 다양을 객관[더 정확히 표현하면 객관성]의 개념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객관적이라 불린다”(B 139). 결국 통각의 종합적․객관적 통일은 경험적 객관들의 객관성의 의식, 그리고 또한 경험적 객관들의 의식 없이 단적으로 순수한 사유의 자족적 가능성만을 포함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한 마디로 말해서 경험적 객관들의 객관성(주어진 표상들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을 구성하는 지성적 종합의 초월적 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오성의 또 다른 구조를 보여주는 개념인 통각의 분석적 통일은 통각의 종합에 있어서 명료한 반성을 수행하는 초월적 주관이다(B 130, 132-135, 138 참조). 통각의 종합에 있어서 의식되고 있는 것은 사유(지성적 종합)가 포함하는 모든 요소들, 말하자면 다양한 표상들의 지성적 종합을 수행할 때 이 종합의 규칙들로서 사용되는 순수범주들, 이 범주들에 따라 종합하는 사유활동, 그리고 이런 사유를 수행하는 주관의 자기동일성이다. 칸트는 통각의 분석적 통일을 특히, 표상들의 지성적 종합에 있어서 주관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의식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또한, 명료한 자기의식은 있는 그대로의 자아이든 현상하는 대로의 자아이든 자아에 대한 어떤 인식도 줄 수 없다는 점도 드러난다(B 157). 그러나 칸트는 통각의 종합적 통일과 통각의 분석적 통일 사이의, 객관의 객관성의 지성적 구성(종합)과 명료한 자기관계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머리말에서 본 것처럼 피히테 이래 줄곧 제기되어오고 있다.
생산적 구상력은 초판과는 달리 재판에서는 자기촉발(Selbstaffektion)로 규정된다. 그것은 오성에 의한 감성의 촉발, 정확히 말하면 순수한 통각(자기의식)에 의한 내감의 규제를 의미하는 자기촉발이기 때문에, 직관에 관계하는 오성의 활동일 따름이며 따라서 독립적 매개 능력으로서의 자발성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오성은 초판에서처럼 협의의 오성, 즉 구상력의 직관적 종합과 대립해 있는, 그 자체로는 공허하기만 한 사유능력이 아니라, 광의의 오성, 즉 협의의 오성에 생산적 구상력의 기능까지도 포괄하는 인식능력이다. 이제 오성은 자기촉발의 작용에 의하여, 즉 생산적 구상력이라는 이름 아래, 내감을 촉발하여 시간의 다양에서 시간규정들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을 산출하고, 이를 근거로 시간 속의 경험적 다양에서 자연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을 산출한다. 이처럼 구상력과 자기촉발의 이론에서도 통각(자기의식)과 내감은 원칙적으로 서로 다른 인식원천들이지만, 인식의 형성을 위해선 결코 각자가 자족적으로 분리될 수 없고 단지 주관의 자기촉발 활동 내에서만 작용할 수 있다. 칸트의 자기의식(통각)은 주어진 표상들에 대한 동반 의식으로서, 언제나 경험적 대상들의 대상성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 관계할 수 있는 유한한 사유의 능력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상들의 인식을 위해서는 자기의식(통각)과 감성적 직관 사이의 매개가 필요하며, 이 매개를 유일한 자발성으로서의 자기의식적 사유가 직접 수행한다. 이런 사유의 직관과의 직접적 매개가 바로 주관의 자기촉발인 것이다.
3. 칸트의 자기의식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로
주관성의 이론으로서 칸트의 초월철학은 초월적 방법을 사용해 선험적 종합판단의 내적인 가능성을 인식주관성의 본질로부터 정당화하고, 결국 인식주관성의 근원적 원칙을 순수한 자기의식에서 찾는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새로운 주관성의 이론으로서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은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해 현존재를 구체적인 세계-내-존재로 밝히고, 현존재의 인식연관성을 추상적이며 비근원적인 태도로 여기며, 모든 존재적 경험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 연관된 여타의 이론들도 정초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기초존재론의 이념을 전제로 칸트를 해석한다. 그는 바로 칸트의 시간론과 도식론을 “존재시간성의 문제점의 전단계”로서, “존재론의 역사의 현상학적 해체”의 첫 단계로 간주한다(SZ 40; 39).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칸트에겐 “주관의 주관성의 초월적 ‘분석론’”(K 210)이 결여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존재의 물음도, 시간의 물음도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칸트는 “주관의 진정한 틀”(SZ 109), 즉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특징을 간과함으로써, 어떤 것을 사유하는 주관의 존재론적 전제, 곧 “세계라는 현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SZ 321).
기초존재론의 이념을 결정적으로 확증하는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하이데거는 『순수이성비판』을 “형이상학의 정초(Grundlegung)”로 해석한다(K 1). 그는 철학사에서 불투명하게 규정되어 온 것으로 생각한 형이상학을 특수형이상학과 일반형이상학, 즉 존재론으로 분류한다. “본래적 형이상학” 혹은 “형이상학의 궁극적 목표”로서 특수형이상학은 논증적 원칙들을 매개로 해서 초감성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이론적 초월(Transzendenz)이다. 칸트의 형이상학 정초는 이러한 초감성적 존재자로 향한다(K 8). 이때 “특수형이상학의 내적 가능성에 대한 기투는 존재적 인식의 가능성에 관한 물음을 넘어, 존재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의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소급된다. … 특수형이상학의 정초의 시도는 그 자체로 일반형이상학의 본질에 관한 물음으로 되돌려진다”(K 10-11). 그러므로 형이상학 정초는 우선 “존재자에 대한 태도의 본질의 해명”이다(K 9). 이런 태도는 ”존재적 인식“이라 불린다(K 10). “존재자의 학문들의 정초는, 이 학문들에 언제나 이미 필연적으로 놓인 전존재론적인 존재이해를 존재의 탐구와 학문으로, 즉 존재론으로 형성하는 것이다”(PIK 36). 존재론은 존재틀의 인식으로서 “특수한 것과 부분적인 것에 관한 경험이 순간순간 제공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K 9). 그러므로 ”형이상학 일반의 정초는 존재론의 내적인 가능성의 개현(開顯 Enthüllung)이라 불린다“(K 11). 그것은 존재적 인식의 내적인 가능성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인식의 내적인 가능성, 말하자면 선행적 존재이해의, 즉 존재론의 본질에 관해서도 물어본다. 이에 따라 하이데거는 『순수이성비판』을 존재론에 관한 학문, 즉 "존재자의 부여(Gebung)의 가능 조건들”에 대한 연구로 해석한다(L 307).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정초는 일반적으로 초월철학이나 존재론의 정초일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순수이성의 가능한 선험적 인식에 대한 한정과 제한, 즉 비판이기도 하다”(PIK 61). 확실히 존재론은 “철학의 중심을 형성하는 기초존재론”(PIK 39)에 근거한다.
존재론적 인식은 존재자의 존재틀의 개현으로서, 즉 “존재론적 진리”로서 초월을 형성한다. 말하자면 존재론적 인식에 있어서 이성은 존재자로 넘어간다. 이 초월은 “존재자에 대한 선행적 관계”이다(K 14). “따라서 초월적 인식은 존재자 자체를 연구하지 않고 오히려 선행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을, 즉 동시에 존재자의 존재틀을 연구한다. 그것은 순수이성의 존재자에로의 넘어섬(초월)에 관계하며, 그러므로 지금 비로소 경험은 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존재자에 합치할 수 있다. 존재론의 가능성을 문제로 삼는 것은 존재이해의 이런 초월의 가능성, 즉 본질에 관해 묻는다는 것, 초월적으로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K 15). 이처럼 칸트의 형이상학 정초는 존재론, 존재론적 진리의 내적인 가능성에 대한 물음으로서 존재이해의 초월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다. 따라서 형이상학 정초는 본질적으로 “초월의, 즉 인간적 주관의 주관성의 개현”(K 196)이다.
칸트의 “초월적 연역은 초월의 내적인 가능성에 관해 물으며 이 물음의 답변을 통해 대상성의 지평을 개현한다. 가능한 객관의 객관성에 대한 분석은 연역의 ‘객관적’ 측면이다. 그러나 대상성은 순수한 주관 자체에서 생기하는, 지향하면서 대립화하는 활동에서 형성된다. 이러 지향에 본질적으로 참여한 능력들과 이 능력들의 가능성에 관한 물음은 초월하는 주관 자체의 주관성에 관한 물음, 즉 연역의 ‘주관적’ 측면이다. …… 초월적 연역은 그 자체 필연적으로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주관성에 있어서 객관성 일반으로의 지향을 비로소 형성하는 초월의 개현이기 때문이다”(K 157). 여기서 하이데거는 초월적 연역의 목표를 주관성의 초월에 대한 해명을 통해 “범주 일반의 근원적인 존재론적 본질의 개현”으로 삼는다(PIK 305). 그러면서 그는, 칸트가 범주를 통한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에 지나치게 구속되어 시도만 했을 뿐 결국 완수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는 주관적 연역을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의 초월적 개현”(K 158)으로 해석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초월철학은 선행적 존재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탐구를 통한, 초월의 본질의 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유한한 인간적 주관의 주관성의 새로운 현상학인 것이다(K 82 참조). 사실 초월은 『존재와 시간』에서 밝혀진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의 또 다른 명칭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내-존재는 겨우 주관과 객관의 관계가 아니며, 오히려 초월이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기투를 수행하는 한에서 그런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K 225). 이처럼 초월과 현존재의 세계-내-존재는 동일한 것이다. 초월은 바로 “현존재의 본질적 틀”이다(PIK 319).
형이상학 정초, 초월, 유한한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또한 동시에 칸트의 주객 분리 모델을 극복하려는 하이데거의 시도는, 칸트가 근본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한, 시간과 자기의식(통각) 사이의 필연적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나아간다. 오로지 초월, 즉 인간적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을 형이상학 정초의 본래적 목표로 생각하는 하이데거는, 칸트가 ”바로 감성과 오성의 통합에 대한 문제의 핵심적 특성을 완전히 은폐한다“고 비판함으로써(PIK 168), 피히테처럼 여러 자발적 인식능력들에 대한 칸트의 정태적인 배열을 극복하기 위해 주관성의 통일적 구조를 현상학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순수오성을 순수직관으로 해석하고 사유도, 직관도 “생산적 구상력”에서 생겨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유와 직관의 차이에 대한 칸트의 가정을 거부한다. 그에겐 ”인식은 본래 직관이다.“ 초월적 연역의 초판의 중심 개념인 생산적 구상력을 그는 독일관념론자들, 특히 피히테처럼 감성과 오성이라는 서로 다른 인식원천들의 공통된 뿌리로 해석한다. ”초월적 구상력은 순수직관과 순수사유 사이에 나타나는 하나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 이 양자의 근원적 통일 및 이와 함께 초월 전체의 본질적 통일도 가능하게 하는 '근본능력'(Grundvermögen)이다”(K 127). 칸트에 따르면 물론 생산적 구상력에 의한 다양의 직관적 종합이 통일의 감성적 직관을 가능하게 하지만 그러나 이 다양은 우선 감성에 의해 수용되어져야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감성적 직관이 통일성의 표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생산적 구상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순수오성, 더 정확히 말해 자기의식의 능력은 칸트에 따르면 본질적으로 감성 및 시간과 관계없는 논리학의 형식적 법칙들까지도 정초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순수오성도 생산적 구상력에 기인한다. 오성의 지성적 종합은 자기의식에 있어서의 통일과 같은 것을 필요로 하며, 이 통일은 ”자아와 결합된 것으로서“(L 331) 여겨진다. 그러나 자기의식의 통일은 추상적으로만 보면 시간관계적 구상력과, 이에 따라 감성적 직관과도 관계없는 논리적 범주들 및 판단형식들을 정초할 수 있지만, 존재자가 유의미하게 생각될 수 있으려면 논리적 범주들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감성화된 범주들에 의해서 생각되어야 한다. ”순수한 오성개념은 판단의 순수한 형식논리적 기능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직관관계적인, 즉 시간관계적인 구상적 종합에서 생겨난다“(PIK 284). 이 감성화 작업은 생산적 구상력의 임무이므로 유의미한 사유활동의 능력으로서의 오성은 구상력에 기인해야 한다. 생산적 구상력은 ”제삼의 근본능력“ 혹은 ”순수한 인식을 형성하는 중심“인 것이다(K 153, 154). 그런데 오성과 구상력의 관계에 대한 하이데거의 견해는 이미 신칸트주의자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이들에게는 시간도 이미 범주의 그룹에 속해 있으므로 범주 자체는 이미 감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생산적 구상력은 칸트에겐 본래 직관적 자발성이다. 하이데거는 구상력의 직관성을 부각시켜 오성의 “근원적 오성존재(Verstandsein)”는 오성의 직관에 대한 의존성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인식하는 인간의 유한성은 그 “유한한 직관”을 통해서 비로소 또한 사유할 수 있다는 데 있다(K 26). 순수오성은 “추가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즉 순수한 직관”이며, “구조적으로 통일적인 수용적 자발성”이다. 바로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초월적 구상력에서 생긴다(K 146-147). 감성적 직관과 오성의 근원적 통일로서의 초월적․생산적 구상력의 본질적 기능은 하이데거에겐 초월적 도식의 구성이다. 칸트에겐 시간규정이 아니라 바로 시간적 경험대상들의 대상성을 의미하는 초월적 도식은 『순수이성비판』의 초판의 견해를 따르는 개념이다. 칸트는 초월적 도식의 의미를 역시 초월적 연역의 초판에서만 사용되는 초월적 대상의 개념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초월적 대상은 전비판철학적으로 이해되는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로 규정되지만, 비판철학적인 적극적 의미에서는 “순수한 통각의 통일의 상관자”(A 250-251)로서 바로 대상성으로 규정된다. 이 초월적 대상은 인식주관에 의해, 더 정확히 초판의 입장에 따라 말하면 생산적 구상력에 의해 다양한 직관들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자연의 통일]로서 구성된다. 그것은 초월적 연역의 초판에서 초월적 친화성(Affinität)으로(A 114, 122 참조), 도식론에서는 초월적 도식으로 발전된다.
생산적 구상력이 구성한 초월적 도식은 칸트와는 달리 하이데거에게는 시간적 자연의 합법칙적 통일이 아니라 바로 시간 자체를 의미한다. 이 시간은 범주들의 통일적인 “순수한 형상”(Bild)이다. 시간에 의하여 범주들의 감성․도식화가 이루어지므로 그것은 범주들의 직관적 내용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시간내부적(innerzeitig) 존재자의 존재론적 규정이고 대상구성적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견해는 칸트의 실체 범주의 도식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에겐 실체의 도식은 시간 자체를 표상하는 항구성이다. 시간은 순간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지금으로만 존재하며 이에 따라 언제나 자기동일적이다. 그러므로 실체 범주의 도식적 감성화를 통하여 획득된 시간이란 평준화된 동질적인 지금 점(點Jetztpunkte)들의 끝없는 계기를 의미한다. 하나의 지금이 동질적인 또 다른 지금에 뒤따르고 이것이 끝없이 되풀이되어 항구성이라는 시간의 표상이 생기며, “경험을 위해 항구성의 순수한 형상을 선행적으로 주시하는 가운데 변천 중에서도 불변하는 존재자가 그 자체로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K 102). 이처럼 항구적 시간은 그에겐 존재를 대상성으로 이해하는 현존재의 존재이해의 지평이 된다. 이때 시간적 감성화는 존재자 자체를 제공하지 않고 초월의 지평의 형상만을 부여한다(K 86).
하이데거는 인간적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해명의 필연성을 칸트도 보았지만 주관성의 해명에 있어서 여전히 전통적 인간학과 심리학에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관적 연역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K 158-159). 그러기 때문에 칸트는 초월적 연역의 재판에서 초월적 구상력의 본질적 기능을 강탈했고 또한 은폐했다는 것이다(K 160). 그러나 시간구성적 구상력의 본질은, 초월적 연역의 재판에서 전개된 자아의 자기촉발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에서도 명확히 드러나 있다. 이 자기촉발 이론은 『존재와 시간』 이전에 이미 『논리학』에서 주제화되었다. 그는 주관성의 본질을 시간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해석한다. “순수한 자기촉발로서 시간은, 직관에 본질적으로 봉사하는 위치에 서 있는 순수개념(오성)을 일반적으로 지탱하고 가능하게 하는 그러한 유한한 순수직관이다. 초월의 가장 내적인 본질을 규정하는 순수한 자기촉발의 이념”은 “유한한 자기 자체의 초월적인 근원적 구조”를 부여한다(K 182-183). 자기의식(통각)의 통일이 요구한, 자기의식과 함께 주어진 통일을 이제 하이데거는 칸트의 자기촉발 개념에서 발견한다. 이 자기촉발은 하이데거에겐 주제화 작용과 이 작용에 의해 주제화된 대상과의 통일을 보여준다. 자기의식의 통일은 시간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순수한 자기촉발”은 “시간 자체(Zeit selbst)”이다. 이 시간 자체는 순수한 자기촉발로서 주관성의 초월적 구조를 이룬다. 그것은 “자아가 자기의식과 같은 것일 수 있도록 유한한 자기성”(K 181)을 형성한다. 칸트에겐 분리된 것들로서 전제된 인식원천들, 즉 감성적 직관과 사유의 공통된 뿌리로서, 또한 “초월의 뿌리”(K 133)로서 생산적 구상력은 이제 “자기의 자기성”(K 179)이라는 특징을 지닌 “근원적 시간(ursprüngliche Zeit)”이다(K 169, 185 등). 이 근원적 시간은 모든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경험에 앞서서 지금 점들의 한없는 계기를 비대상적으로 바라보면서, 존재자를 존재자로 만나게 하는, 바로 존재자의 존재론적 지평을 형성한다. 따라서 시간 자체는 “시간화(Zeitigen)”로서 본질적으로 자발적 활동이다. 이 시간화가 세계내부적 존재자의 이해의 지평을 의미하는 시간규정(초월적 도식)들을 구성한다. 그런데 세계내부적 존재자로서의 자연에 대한 이론적 인식에 있어서 시간화 방식은 “현재화(Gegenwärtigen)”이다(L 400-408 참조). 이 현재화로서 시간은 “순수한 다양성 자체[직관된 것]에 대한 선행적이고 비주제적인 바라봄[직관작용]”이라는 자기촉발의 주객-통일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바라봄은 … 칸트적으로 말하면 자신을 촉발시키는 자아의 존재의 근본적 방식이며,” 이 같은 자아의 방식은 “어떤 것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적합적 조건으로서 자아의 자기 자신과 관계함[자기의식의 자기관계]”이다(L 338-339).
현재화 양상은 하이데거가 해석한 칸트의 실체 도식, 즉 “지금의 계기이라는 순수한 연속”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형성물로서의 시간이 아닌, 순수한 자기촉발로서의 시간이 초월의 근원적 근거이다”(K 191). 자기촉발적 자아는 그 본질적 구조가 시간 자체로서, 존재자는 자신이 부여한 지금의 양상에서 주어질 때 비로소 그것을 대상적인 사물존재자로 이해한다. 현재화는 사물존재성에 대한 존재론의 근거가 되는 자아의 한 근원적 활동이자 실존범주이다. 이처럼 시간은 자기촉발로서 자기의식(통각)의 필연적인 종합적 통일의 근본적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시간은 주관의 항구적 자기촉발, 즉 … 근원적이고 항존적인 촉발자이며, 따라서 이러한 필연적이고 항구적인 것으로서 주관은 자연 자체의 실체를 규정한다. 더구나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통각을 고려하는 가운데 선행적으로 규정한다”(L 354-355). 이때 자연의 실체는 모든 경험적 대상들의 대상성, 즉 존재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런데 “옛날부터 지배하는 존재의 의미”는 “항존적 현존”이며, “그것은 보통 철학사에 지배적인, 실체의 실체성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해석을 통해 바로 은폐되고 심지어 날조된다”(KTh 290-291).
칸트의 “항존적이고 지속적인 자아”(A 123)는, 논리적 의미에서 순수한 자기의식(통각)의 종합적 통일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이 항구성인 것처럼 자기촉발을 통해 시간규정들을 정초하는 순수자아도 항구적이다. 시간 자체로서 순수자아는 시간규정들의 구성을 통해 주어지는 존재자의 이해의 지평을 선행적으로 형성한다. 그러나 시간 자체는 인식하는 자아에게는 현재적 시간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따르면 칸트는 주관성의 존재론을 보았지만 사물존재성에 대한 전통적 존재론의 한계 내에서 자기관계적인 자아의 존재 방식을 불완전한 방식으로 해명했다. “칸트의 분석에서 긍정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 그는 자아를 존재적으로 실체로 환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았고, 둘째, 자아를 ‘나는 사유한다’로서 견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아를 또 다시 주관으로서, 이로써 존재론적으로는 부적합한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왜냐하면 주관의 존재론적 개념은 자기로서의 자아의 자기성을 특징짓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사물존재자의 동일성과 항존성을 특징짓고 있기 때문이다. 자아를 존재론적으로 주관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언제나 이미 사물존재자로 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아의 존재는 사유하는 사물의 실재성으로 이해된다”(SZ 319-320). 이처럼 칸트는 물론 시간의 문제점에 대해 나름대로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고대 존재론의 영역, “실체적인 것의 부적절한 존재론”에 구속됨으로써, 데카르트의 실체론적 자아 규정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아의 존재를 사물존재자인 양 모든 사유들의 기초가 되는 실체적인 것으로, 연장물과 대립된 사유물로 해석함으로써 결국 사물존재성의, 즉 실체의 존재론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SZ 318-319 참조).
그런데 『순수이성비판』을 초월의 내적인 가능성에 대한 해명, 유한한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에 대한 해명으로 해석할 때는 인식 대신에 존재자와의 만남, 존재자의 받아들임 등과 같은 것이 중요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칸트에겐 합법칙적인 자연에 대한 인식적인 접근을 의미하는 경험의 내적인 가능성을 묻지 않고 존재자의 현상함과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초월의 지평의 가능성을 묻는다. 이때 세계가 “존재자의 존재가 선행적으로 간파될 수 있는 지평”으로 주제화된다(K 117). “이러한 하나의 순수한 존재론적 지평은 이 지평 내부에 주어진 존재자가 그때마다 이런 저런 특수한 개방적인, 게다가 존재적인 지평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K 102). 그런데 칸트의 시간규정들(초월적 도식들)과 이 규정들의 정초(생산적 구상력 및 자아의 자기촉발)를 현재와 현재화로 해석하는 하이데거는, 자신의 기초존재론의 이념에 따라 이 현재와 현재화를 언제나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이 존재의 이해가 문제시되는 현존재의 근본적 실존범주 내에서 비근원적이고 파생적인 시간 양상과 시간화 양상으로 규정한다. 현재화는, 세계-내-존재로서 일차적으로 세계내부적 존재자로 향하면서 이런 존재자에 퇴락되어 있는(verfallen) 존재자의 시간화 양상일 따름이다. 이때 만일 현재화가 세계내부적으로 만나는 도구존재자(Zuhandenes)에 대한 직접 둘려보는 배려(Besorgen)에 있어서 퇴락의 시간화 방식이라면, 그것은 “위하여(Um-zu)”의 도식을 형성한다(SZ 365). 그런데 사물존재자는 현재화하는 자아의 시간의 지평 속에서 만난다. 여기서 칸트의 자기의식적 주관을 의미하는 현존재의 이론적 인식은 도구존재자에 대한 모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배려 양상들을 추상하는 가운데 단순히 사물존재자를 이론적으로 관찰하기만 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하이데거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세계-내-존재의 한 양상으로서 입증된, 바로 사물존재자에 대한 “이론적 발견”이 아니다(SZ 360). 말하자면 그것은 “‘경험의 이론’, 심지어 실증과학들의 이론”이 아니며 ”인식론”과 아무 상관이 없다(K 16). 이에 따라 현재화는 세계내부적 존재자에로 퇴락하는 시간화 양상이라는 측면에서, 더욱이 이 퇴락에 있어서 사물존재자에 대한 추상적인 인식의 시간화 양상이라는 측면에서 비근원적이며 파생적인 것이다. 결국 인식은 현존재의 비근원적이고 파생적인 태도라는 것, 이 태도의 시간화 방식은 현재화라는 것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존재, 염려(Sorge)에서 이해된다. 이 “염려를 시간성으로”(K 229) 밝히는 하이데거에겐 본질적으로 자아 자신의 존재와 이 존재의 이해가 문제시된다.
현존재로서 시간적 자아의 자기관계는 하이데거에게는 자아가 존재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관계하도록 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아의 순수한 자기촉발이 유한한 자아의 초월의 본질을 형성한다. 유한한 자아는 자발성과 수용성의 통일로서, 자기촉발의 활동을 통해 대상성의 의미를 갖는 시간규정들을 구성하고 직관할 때 항상 직접적이고도 “비주제적인 바라봄”(L 338-339)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결국 하이데거에게는 자아의 자기의식은 자아가 존재자의 존재를 이해하면서 존재자로 향할 때 비주제․선주제적으로 지평으로서 더불어 개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GP 224).
4. 맺음말
칸트의 자기의식은 경험적 객관들의 객관성에 대한 의식에 있어서 자기 자신과 관계할 수 있는 사유이다. 그러나 그는 통각의 객관성구성과 자기관계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해명하지 못함으로써 주관과 객관의 분리를 극복하지 못한다. 초기 하이데거는 칸트에게는 자기의식이라 불린 현존재를 구체적인 세계-내-존재로 규정함으로써 현존재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 사이의 공통된 지반을 발견하고, 또한 자기의식의 현상학적 모델을 전개하여 칸트의 주객 분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칸트 해석은 그 자신의 철학의 변천만큼이나 변한다. 1925년 겨울부터 1928년 초까지의 여러 강의들, 특히 1929년의 칸트 연구서에서 그는 명확히 칸트의 주관성 개념에 대한 현상학․존재론적 해석을 취하지만, 1935/36년 겨울학기 강의에서는 주관의 주관성 개념이 주제화되지 않고 오히려 사물들의 사물성, 곧 경험적 객관들의 객관성이 주제화된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존재를 주제화하면서 시간성을 유한한 초월의 본질로 간주하고 있다고 그렇게 존재론적으로 해석된 칸트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문헌학적 관점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범주들의 객관적 타당성을 증명하려는 칸트의 본래의 인식론적 의도 자체를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칸트 해석의 이러한 변천은 기본적으로 그의 존재 사유에 있어서 전회(Kehre)에 따른 것이다. 이제 존재의 사유는 『존재와 시간』에서와는 달리 전회에 따라 존재의 역사도 고려한다. 그리고 이 존재사적 사유는 하이데거의 칸트와의 대화에 있어서도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사물에 대한 물음』(Die Frage nach dem Ding)에서 하이데거는 칸트를 철학사적 관점에서 다룬다.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는 제1『비판』을 인식론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거부하고 있지만, 여기선 주관에 의한 대상적 존재자의 인식에 관한 성찰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정초이면서 또한 인식론이다. 이에 따라 『순수이성비판』의 해석의 중심에 1929년의 칸트 해석서와는 달리 도식론이 아니라 순수오성의 원칙론이 놓여 있다. 바로 순수오성의 원칙들이 사물들의 사물성, 대상들의 대상성을 규정하기 때문에 주관성 대신 대상성 및 사물성이 부각된다. 초기 하이데거에게는 순수오성이 바로 순수직관이며, 사유도, 직관도 시간을 구성하는 구상력에, 궁극적으로 주관의 자기촉발을 형성하는 근원적 시간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사유와 직관의 차이는 해체된다. 그러나 이젠 생산적 구상력이 유한한 초월의 뿌리로 해석되지 않으며, 감성과 오성은 칸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기 독립적인 능력들로 간주된다. 오성의 사유는 이제 초월적 구상력과 시간 자체에 근거한 수용적 자발성이 아니라 단적으로 수용성과 대립된 자발성일 따름이다. 『사물에 대한 물음』이 초월의 존재론적 가능성이나 유한한 주관의 주관성의 본질에 관계하지 않고 표상들의, 곧 사유의 객관과의 연관성에서 출발하는 한, 하이데거는 제1『비판』을 근대적인 수학적 자연과학과 전통적 형이상학의 정초로 해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관점은 오히려 바로 칸트 자신의 견해이다. 그러나 초기 하이데거의 칸트와의 대화는 물론 이 대화에 관하여 제기된 비판들이 있기는 하지만, 칸트 철학과 관련해서 말한다면, 칸트 철학을 현대의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합하게 재구성하고 변형함으로써 지성적인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기초존재론의 이념을 확증하는 초기 칸트 해석서의 완성으로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의 물음은 형이상학 정초이며, 이 정초는 존재론의 내적인 근거의 정당화로서 초월의, 즉 유한한 자아의 자아성에 대한 해명이다. 초기 하이데거가 그의 칸트 해석에 있어서 칸트가 “명확히 말했던 것”뿐만 아니라, 특히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던” 것에 주목하여(K 193, 192), 칸트 자신이 정말로 말하고자 원한 것을 올바로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사실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 자신의 이론적 척도, 즉 『존재와 시간』에서 다루어진 그 자신의 기초존재론의 이념에 달려 있다. “현존재의 존재틀에 대한 개현은 존재론이다. 이 존재론에 형이상학의 가능 근거이 형이상학의 기초로서의 현존재의 유한성-가 놓여 있어야 하는 한, 존재론은 기초존재론을 의미한다”(K 222).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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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Von Kants Selbstbewußtsein zu Heideggers Dasein:Im Zusammenhang mit Heideggers Interpretation von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t
Chungjoo Kim
Kants Selbstbewußtsein(Apperzeption) ist der letzter Grund von logischen Urteilsformen und ontologischen Kategorien und das ursprüngliche Prinzip von Erkenntnis. Es ist als Begleitbewußtsein von gegebenen Vorstellungen ein Vermögen des endlichen Denkens, das immer im Bewußtsein von der Objektivität der empirischen Objekte selbstbezüglich sein kann. Das besagt, daß Kant die prinzipielle Unterscheidung von Subjekt und Objekt voraussetzt. Aber der frühe Heidegger entwickelt eine neue Theorie der Subjektivität, entdeckt eine gemeinsame Basis zwischen dem Sein des Daseins, das selbst als das In-der-Welt-Sein, für Kant Selbstbewußtsein heißt, und dem Sein der Welt, überwindet also die Kantische Unterscheidung von Subjekt und Objekt. Er interpretiert nach der Idee seiner eigenen Fundamentalontologie Kants Kritik der reinen Vernunf als Grundlegung der Metaphysik. Diese Kantische Grundlegung ist als Frage nach der inneren Möglichkeit der Ontologie auch die Frage nach dem Wesen der Transzendenz des Seinsverständnisses, also die wesentliche Aufhellung der Subjektivität des menschlichen Subjeks. Hier transformatiert und entwickelt durch die phänomenologische, ontologische Auslegung der produktiven Einbildungskraft, der Selbstaffektion des Ich, und der Zeit selbst die Struktur des Kantischen Selbstbewußtseins.
【Key words】 Selbstbewußtsein, Dasein, Metaphysik, Transzendenz, Subjektivität, Zeit, Einbildungskraft, Selbstaffektion
[출처] 칸트의 자기의식에서 하이데거의 현존재로(김정주)|작성자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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