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思惟)

칸트와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 대한 리쾨르의 고찰

나뭇잎숨결 2024. 12. 31. 23:22

행위에서 행위주체로 : 칸트와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 대한 리쾨르의 고찰


김선하(경북대 )


1.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과 행위주체

?타자로서 자기자신?에서 리쾨르는 주체의 복원을 기획한다. 근대적 주체인 코기토의 위상은 니체의 공격으로 이미 실추된 지 오래이다. 현대 니체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학자들에 의해서도 그 사실은 계속 다짐되어왔다. 우리는 해석학의 관점에서 과거의 코기토의 복원이 아닌 그러면서도 언어의 파편 속에서 해체되지 않는 겸허한 주체의 복원을 기획하는 리쾨르의 대안에 주목하고자 한다.
리쾨르가 주체를 다시 이야기하기 위해 처음 단계로 삼은 것은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서 논의되는 주체에 대한 분석이다. 의미가 사용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표어에 따라 스트로슨에게 있어서도 의미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발생한다. 이때 의미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기준은 언어의 동일화하는 지시 기능이다. 그러므로 스트로슨은 언어를 사용할 때, 화자-청자 지시동일성이라는 개념을 그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언어를 사용하면서 대화할 때, 기본적으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물들을 동일하게 지시하는 활동을 수행한다. 스트로슨은 그 행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즉 그 행위가 가능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이란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일상적인 물질로 된 대상들인 소위 ‘기본적 개별자들’과 물질로 된 대상인 신체를 소유한 ‘인격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트로슨에게 있어서 행위 주체는 신체를 소유한 인격Person 개념으로 설명된다. 그 인격이라는 것은 신체의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와 정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들이 모두 귀속되는 개념이다. ?개별자?에서 스트로슨은 인격이라는 개념이 신체 개념과 같이 그것을 전제하지 않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이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논증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든 개념의 기본이 되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인격을 “기본적 개별자”Basic particulars라고 부른다. 스트로슨은 인격을 “의식의 상태에 관한 속성과 물리적인 특징이나 물리적인 상황 등에 관한 속성이 모두 동일하게 특정한 단일 개별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즉, 인격이란 개념은 물리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와 심적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가 모두 귀속될 수 있는 존재 개념이다.
스트로슨에게 있어서 신체와 정신의 속성을 나타내는 술어들이 모두 귀속되는 인격 개념은 ‘순수 자아의식’이나 ‘의식 자체’에 비해 논리적으로 우선한다. 이러한 논증은 스트로슨의 공간-시간에 대한 논증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논증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첫째, 공간-시간 체계는 유일한 것이며 통일되어 있다. 둘째, 공간-시간 구조는 경험이나 사건의 실재성의 조건이다. 셋째, 공간-시간 구조는 개체의 동일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공간-시간 속에 있는 신체야말로 우리의 실재성과 지시의 동일화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신체는 스트로슨에 따르면, 경험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기준이 된다. 다시 말하면, 경험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귀속될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 요구되는데, 경험적으로 주체에 적용할 수 있는 확인 기준이 바로 공간 안에 있으면서 지시의 동일화를 가능하게 하는 신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스트로슨의 인격에 대한 분석에서 리쾨르는 그의 행위주체에 대한 주제를 다음 세 가지 주제로 정리한다. 첫째, 술어들이 모두 궁극적으로 신체에게든지, 인격에게든지 부여된다는 의미에서, 인격은 기본적 개별자이다. 둘째, 우리는 “동일한 대상들인 인격들에게” 심적 술어와 물리적 술어를 부여한다. 달리 말하면, 인격은 두 가지 계열의 술어들이 할당되는 고유한 실체이다. 따라서 심적, 물리적 술어들의 이분법에 따라서 실체의 이분법을 제시할 이유가 없다. 셋째, 의도, 동기와 같은 심적 술어들은 물리적 술어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자기 아닌 타자에게 동시에 부여될 수 있다. 이 두 경우에서, 심적 술어들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정서적이거나 감정을 담은 술어들이 나 자신에게와 마찬가지로 다른 인격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여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인격은 물리적 실재인 신체를 가지고 있고, 심적 술어들이 객관적으로 귀속될 수 있는 공적인 삼인칭 주체로서 드러난다. 리쾨르는 이러한 스트로슨의 세 가지 논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나가면서, 스트로슨의 인격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행위 주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리쾨르의 지적에 의하면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서는 행위를 행위 주체에게 귀속시키기 어려운 난점에 봉착한다. 요컨대, 심적․물리적 술어들이 동일하게 귀속되는 공적인 인격 개념을 주장하는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은 행위주체 귀속에 있어서 개별적인 경우들을 이례적으로 동일한 차원에 두고 있다. 이러한 공적 삼인칭 주체로부터 개별적인 의도와 동기를 가진 일인칭 주체를 되살려내려는 것이 리쾨르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 리쾨르는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는 데 있어서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이 피할 수 없는 아포리아를 지적하고, 객관적 지시 동일화에 중점을 둔 행위의미론이 제시하기 어려운 행위주체의 행위 능력에 대한 문제를 칸트의 이율배반 논증을 통해 풀어나간다.

2. 행위주체 물음의 복원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리쾨르는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행위 대상과 이유에 대한 물음 속에서 배제된 행위주체 물음을 되살리고자 한다. 이를테면 행위에 있어서 ‘무엇이 행해졌는가?’, ‘왜 행해졌는가?’라는 물음에 가린 ‘누가?’라는 물음을 다시 던지고자 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행위주체 ‘누가?’라는 물음의 대답은 ‘무엇이?’, ‘왜?’라는 질문들과 더불어 상호의미화intersignifications의 그물망réseau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서는 인격이라는 대상 지시 동일화가 가능한 공적 주체를 내세우면서, 행위주체에 대한 물음을 행위 대상과 이유의 물음 속에서 희석시키고 있다. 따라서 리쾨르의 주체 복원 작업은 행위의 ‘무엇-왜?’라는 한 쌍의 질문을 통해 ‘누가?’라는 질문을 그 그물망 속에서 다시 끌어내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시작된다.
?개별자?에서 스트로슨은 물리적 술어와 심적 술어가 그러한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는 인격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때 귀속시키기ascription이라는 말은 행위를 행위자인 ‘누구?’에게 되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리쾨르가 보기에, 스트로슨의 행위의미론에서는 ‘무엇을?’, ‘왜?’, ‘어떻게?’ 등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면서 파생적으로 ‘누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결정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요한 것은 ‘누가?’라는 물음이 아니다.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인격이라는 공적 주체에게 언제나 가능하다. 이러한 점에서 리쾨르는 행위의미론의 ‘무엇을-왜?’라는 한 쌍의 질문이 ‘누가?’라는 행위자의 문제를 엄폐한다고 지적한다.
행위를 분석할 때, 행위주체의 의도와 분리시켜서 그 자체만으로 그것이 나에게, 너에게 혹은 그에게 종속된다고 말할 수 있다. 유사하게 의도 자체만 가지고 그것이 누군가 아무나의 의도라고 말하는 것 역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어떤 행위주체만을 따로 분리해서 그가 무엇에 대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한 행위에 있어서, 행위와 행위주체 그리고 의도를 각각 분리시켜서 분석하고 상호적인 의미화 작용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에 대한 일면적인 분석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예컨대, 결국 행위의도를 검증하기 위해서 행위주체와 결부시켜 그 의도를 그에게 부여하게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 따르면, 행위는 행위자 앞에 열려 있는 선택들을 숙고할 때 행위주체 자신이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귀속시키기는 명백히 행위주체가 자신의 숙고를 거쳐 어떤 행위를 재소유réappropriation하는 속에서 구성된다. 이를테면, 결정한다는 것은 고려된 선택들 중 하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갈등을 딱 잘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행위를 종합적인 상호의미화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한다고 리쾨르는 역설한다.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서, 행위주체에 대한 물음과 행위동기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런데, ‘누가 했는가?’라는 행위주체에 대한 물음은 “아무개 누구”라는 대답으로 종결된다. 반면에, 행위동기에 대한 물음은 끝이 없이 계속될 수 있다. 말하자면, “왜 아무개는 그것을 했는가?” 혹은 “아무개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끝이 없이 계속 물음과 대답이 제시될 수 있다. 행위의 동기를 묻는 물음에 대해 답하면서 행위주체를 언급할 수 있으나 행위 동기와 행위주체 사이의 관계는 역설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행위주체에 대한 물음은 대개 고유명사에 의해 지시되면서 끝나는 물음이지만, 행위의 동기에 대한 물음은 내적․외적인 영향들 속에서 종결되지 않는 물음이다. 예컨대, 정신분석적 차원에서 어떤 행위의 동기에 대한 탐색은 그의 유아기적 경험으로 소급되고 그것은 다시 그의 부모의 유아기적 경험으로 소급되고 하는 식으로 계속될 수 있다. 행위주체와 행위 동기 사이의 이러한 낯선 관계는 행위주체를 귀속시키기 위한 개념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데, 따라서 행위주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위에 관련된 전체 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행위 의미론은 이러한 전체 망의 관련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리쾨르는 지적한다. 즉 “행위주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은 그 전체 망 속에서 정확하게 행위주체를 위치시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리쾨르가 보기에 스트로슨의 행위 의미론에서는 풀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다. Strawson의 기본적 개별자인 인격은 일반적인 사물들과 같이 신체라는 대상을 가진 “사물들” 중의 하나로서 지시되었다. 사물처럼 지시된 인격에게는 사물 동일화와 같은 동일성이 적용된다. 그러나 행위에 행위주체를 귀속시키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논의될 수 없다. 여기서 리쾨르는 스트로슨의 지시의미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행위 주체의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말하는 주체의 차원을 강조하는 화용론이 요구됨을 지적한다. 반복해서 말하자면, 지시동일화가 가능한 공적 삼인칭 주체에서 결여된 말하고 있는 일인칭 주체의 차원을 복원하는 것이 리쾨르의 전략이다.

3. 행위주체 귀속시키기의 아포리아

행위의미론에서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기는 데에서 발생하는 아포리아는 스트로슨의 논의에서 보았듯이 심적 술어와 물리적 술어가 동일하게 귀속되는 인격 개념에서 술어의 부여는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심적 술어든 물리적 술어든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하여 이중적으로 귀속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귀속시키기 전에 자기에게도 아니고 타자에게도 아닌 그저 미결정된 채 남아있는 귀속의 가능성과 실제적인 귀속 사이의 이중적 관계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미결정된 채로 남아있는 귀속의 가능성에서 인격에게 귀속되는 술어들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은 채, 실제적으로 귀속시키기 과정에서 그러한 술어들을 귀속시켜야 하는 모순에 부딪힌다. 따라서 귀속시키기의 아포리아는 미결정 상태에 있는 귀속의 가능성으로부터 실제 행위주체에게 실제적인 술어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발생된다. 실제적인 행위주체에게 행위를 귀속시키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귀속이 미결정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익명의 ‘우리’나, 무차별적으로 대체가능한 개별화라는 의미의 ‘아무나’, 그리고 독립적인 ‘각자’라는 상태는 귀속이 미결정 상태에 있는 것이다. 스트로슨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중립화된 귀속의 미결정 상태를 통해 자기에 대한 귀속과 자기 아닌 타자에 대한 귀속 사이에는 치환이 가능하다. 그러나 리쾨르는 이러한 미결정 상태에 있는 행위주체를 행위에 귀속시키기를 통해 행위주체 물음을 다시 던지고 있다. 동일화에 중점으로 둔 지시의미론의 범위 내에서는 행위주체가 행위술어를 재소유하는 것과 미결정 상태 사이의 아포리아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없다. 따라서 리쾨르는 귀속의 미결정 상태로부터 귀속의 중립화를 거쳐, 실제적이고 독자적인 귀속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행위주체는 자기 자신을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가능한 귀속의 미결정 상태와 실제적인 행위주체에게 행위를 귀속시키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는 리쾨르의 분석에 의하면, 인과관계의 도식 속에서 지시되는 행위주체와 자기 지시를 할 수 있는 행위 능력이 있는 행위주체 사이의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인과관계의 도식 속에서 지시되는 행위와 행위주체 간의 관계는, 스스로 자기 지시 할 수 있는 행위 능력이 있는 행위주체와 행위의 관계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이를테면, 인과율의 지배 하에 있는 행위주체에게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성이 비켜나가는 면이 있다. 그러나 자기 결단에 의해 행위하는 행위주체에게는 그 행위에 대한 책임성이 부과된다. 행위주체의 행위능력을 말한다는 것은 행위에 대한 책임을 행위주체가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가 행위주체 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그것이 행위주체 능력의 한도 내에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리쾨르의 입장은 행위주체의 행위능력이 인과적 연속 속에서 포함된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행위의 시작으로서의 원인으로 간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기의 아포리아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인과적 행위이론은 행위주체의 행위능력을 행위의 원인 속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말하자면, 인과적 결정론 속에서 행위의 시작은 자연적 사실들 가운데 하나의 원인적 사실로서 설명되고 행위주체의 행위능력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행위의 시작은 리쾨르에 따르면, 단지 인과적 도식 속에서 분별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사유의 작업을 통해서 밝혀진다. 그것은 행위주체의 자발적인 의도를 행위에 접목시키는 귀속의 과정이다. 인과적 도식 속에서 결정된 행위에 대한 설명과 행위주체의 자발적인 행위능력이라는 양단간의 아포리아를 리쾨르는 칸트의 「순수이성의 우주론적 이율배반」의 세 번째 논증을 도입하여 해명하고자 한다.

4. 인과적 행위와 행위주체: 칸트적 해답

행위주체 물음을 제기하면서 당면한 아포리아는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는 데서 발생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과적 도식 속에서 결정된 자연적 사실들로서 행위와 행위 주체의 자유 사이의 대립을 리쾨르는 칸트의 「순수이성의 우주론적 이율배반」의 세 번째 논증을 통해 해소해 보고자 한다. 칸트의 세 번째 이율배반은 모든 것이 자연 법칙에 따르는 인과성 속에 종속되는가 아니면 자유도 존재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일단 「정립」의 차원에서 보면 자유가 존재한다.

“자연법칙에 따르는 원인성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경우, 발생하는 일체는 이전 상태를 전제하고 거기서 불가피하게 규칙에 따라서 계기하는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이렇게 원인에 원인을 소급해 가면, 일반적으로 순차로 소급하는 ‘원인 측 계열의 완료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일체의 원인성이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명제는, 이 명제의 무제한의 보편성을 주장함에 있어서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그러므로, 자연법칙에 따르는 원인성이 유일한 원인성이라고 상정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정립」의 입장에서는 자연법칙에 따르는 인과성과는 다른 원인성이 상정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칸트는 이 다른 원인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원인성은 무엇을 발생하도록 하지마는, 이런 발생의 원인은 이전의 딴 원인에 의해 필연적 법칙을 좇아 규정되는 일이 없다. 다시 말하면, 상정되어야 할 원인성은, 자연법칙에 따라서 진행하는 현상들의 계열을 스스로 시작하는 ‘원인의 절대적 자발성’이다. 즉 그것은 초월적 자유liberté transcendentale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유는 자연법칙의 인과성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계열을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반정립」에 따르면, 모든 것은 자연 필연성에 종속된다.

“자유는 없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만 발생한다.” “작용하는 것의 개시는 어느 것이나 아직 작용하고 있지 않는 원인의 상태를 전제한다. (…) 그러므로 초월적 자유는 인과법칙을 위반한다. (…) 이에 우리는 세계 사상의 관련과 질서를 구하여야 하는 자연만을 가질 뿐이다. 자연 법칙에서의 자유는 강제에서의 해방이요, 그것은 모든 규칙의 길잡이에서 해방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하되 우리는 자연 법칙 대신에 자유의 법칙이 세계진행의 원인성 속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자연과 자유 사이의 이러한 이율배반을 칸트는 현상과 물자체의 구별로부터 해결해 나간다. 무제약자인 물자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다. 초월적 자유란 바로 이 무제약자의 영역에서 논의된다. 반면 현상들의 영역에서는 자연법칙적 인과성이 통용된다. 따라서 자유와 필연성의 문제는 상호모순없이 해결된다. 다시 말하면 자연 필연성은 오직 현상, 즉 시․공간적 존재자와 그들의 관계에 대해 타당하고, 반면 자유는 현상이 아닌 물자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현상의 계열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현상과 무관한 사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상 자체가 요구하는 현상의 지적 근거이다. 요컨대, 자유는 “자연 법칙에 따라 나아가는 현상의 계열을 스스로 시작하는 원인의 절대적 자발성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적 자유이다. 초월적 자유 없이는, 자연의 경과에 있어서조차 현상들이 계속하는 계열은 원인 측으로 봐서 결코 완전하지 않다.”
그런데 칸트는 「정립에 대한 주석」에서 계열의 발생을 자유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계열의 절대적인 첫째 시초’라는 것은 시간상의 ‘절대적인 처음 시초’가 아니라, 인과성에 관한 절대적 시초임을 규명한다.

“문제삼고 있는 것은 시간상의 ‘절대적인 처음 시초’가 아니라, 원인성에 관한 절대적인 처음의 시초이다. (가령) 내가 지금 완전히 자유롭게 그리고 자연 원인이 필연적으로 규정하는 영향력을 입지 않으면서 의자에서 일어설 적에, 무한하게 진행하는 자연적 결과를 수반한 이런 사건에 있어서 전혀 새 계열을 개시한 것이다. 시간적으로 이 사건은 물론 이전에서 내려오는 계열의 연속임에 불과하다. 대저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결의와 행동은 한갓 자연적 작용의 계속 중에는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진정 시간상으로가 아니라, 원인성으로 보아서, 현상들의 계열의 ‘절대적인 처음 개시’라고 말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현상 세계의 우주론적 시작점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현상을 넘어서서 현상을 초월하는 능력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즉 그 자체 시간 제약 하에 있지 않는 능력, 그러므로 당연히 시간 내의 시작점일 수도 없는 그런 능력이 곧 현상 계열을 넘어서는 능력으로서의 자유이다. 시간적 현상의 계열 자체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흐름 한 가운데에서조차도 자유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발성으로서의 자유를 마치 그것이 현상에 선행하는 원인으로서 언젠가 한번 현상을 만들어 내고, 그후 그 현상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단지 자연 인과성에 따라 제약되어 전개되어 나갈 뿐인 그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그런 의미로 현상의 근거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유가 현상의 근거인 것은 그것이 시간적 제약을 넘어서 있기에,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늘 매 순간을 마치 시간의 시작인 것처럼, 이미 있는 현상에 대해 자유롭게 새로운 현상의 시간 계열을 시작할 수 있는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시간의 흐름 안에서도 상이한 계열을 인과성에 따라 스스로 시작하게 하는” 자유로서 칸트가 의미하는 것은 어떤 초인간적인 능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에게서 자발적 행위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 의식이다. 이러한 자연 인과율에 의해 기계적으로 영향받지 않고 현상의 새로운 계열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하는 자유 의식을 칸트는 ‘결단’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자유로운 결단 능력으로서의 자유가 인간을 행위하는 주체로서 모든 현상 즉, 모든 시공간적 제약성을 넘어서게 하며, 따라서 이 행위하는 주체는 시간적 제약 안에 있지 않다. 이러한 행위하는 주체의 자발성을 칸트는 현상의 인과성을 넘어서는 ‘절대적 자발성’이라고 말한다. 곧 ‘초월적 자유’이다.
리쾨르는 이러한 칸트의 “원인들의 절대적인 자발성”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자연 법에 따라 전개되는 일련의 현상들을 자기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정립」과 「반정립」에 뒤따르는 「증명」 속에서, 칸트는 그러한 “행위의 절대적 자발성”은 “이 행위의 책임의 고유한 토대”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칸트의 논의에 따라서 리쾨르는 행위주체의 자발적 행위를 인과적 도식 속에서의 행위와 구별하고, 도덕적이고 법적인 의미에서 행위 할 수 있음pouvoir-faire의 시초적 지층을 책임성이란 명목 하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5. 두 가지 원인: 자연과 자유

앞서 살펴보았듯이, 칸트는 「이율배반론」에서 자유와 인과적 필연성의 이율배반을 현상계와 물자체의 구분 속에서 풀어내고 있다. 따라서 자유와 필연성은 상호 모순적이지 않다. 칸트는 자유에 의한 인과성을 주장하는 「정립」과, 자유라는 것은 없으며 오직 세계 내의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만 생성된다고 하는 「반정립」 사이의 갈등을 만약 이성이 올바로 해석하기만 한다면, 이 이율배반은 해결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자유가 주장되고 있는 「정립」에서는, 현상의 일련의 계기가 그 자체 내에 무제약적인 자유라는 원인성이 제시됨으로써 전체적으로 완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칸트의 관점에 따르면, 내가 자유를 주장하느냐, 혹은 단적으로 자연의 필연성만을 주장하느냐는 “관점”과 조망의 문제이다. 이중 관점을 전제로 하면 자유와 자연 필연성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 양자 모두 “한 동일한 사태에서도 서로 다른 관계에서 생길” 수 있다. 자연이 하나의 일관된 인과적 연관이며, 그 안에는 어떤 예외도 따라서 어떤 자유성도 없다는 것은 흔들릴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인과적 연관성은 오로지 현상 세계에 관해서만 타당하다. 이 말을 물자체에 대해서도 타당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순수 이성은 “오로지 예지적인 능력으로서, 시간 형식과 그리고 또 시간 계기의 조건에 종속하지 않는다. 예지적인 성격의 이성의 원인성은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과를 낳기 위해서 어떤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성은 현상 세계 안에 있는 행위의 자유로운 원인이다. 물론 이 행위가 이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한 그것은 자연 법칙에 따르는 측면을 가진다. 행위하는 이성은 자기의 자유 원인성 사고에 연관해서 자연법칙을 고려한다. 자유 원인성은 그 원천을 이성 자체 안에 가지므로 이 자유 원인성 사고가 한 행위의 원인이 되는 한, 이로부터 시작된 제약된 일련의 현상의 최초 조건은 무제약적이다. 그런 한에서 예지적 성격의 견지에서 본 인간은 무제약적인 자유로운 존재자이다. 그럼에도 “다른 관계에서는” 인간도 현상의 계열에 속한다. 칸트의 이러한 이율배반에 대한 논의 끝에, 자유는 순수 초월적 관념처럼 현상에 결부되지 않고 인과적 연속을 그 스스로 시작하는 능력이라는 궁극적 의미를 구성한다. 즉 “원인들의 절대적 자발성”이란 이러한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초월적 자유 위에 자유의 실천적pratique 개념이 정초된다.
다시 정리하면, 칸트는 발생하는 일에 관해서 두 가지 원인성만이 생각될 수 있다고 한다.

자연에 의한 원인성과 자유의 원인성이 그것이다. 자연에 의한 원인성은 현상계에서 하나의 상태가 규칙에 의해서 그 이전 상태의 뒤에 생기는 경우에, 이런 두 상태의 결합이다. 그런데 현상의 원인성은 시간 조건에 기초하고 있다. 이전 상태가 언제나 그대로 있어 왔다면, 그것은 시간상 발생하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혹은 나타나는 일의 원인의 원인성은 역시 발생한 것이요, 그것은 오성의 원칙[인과성의 범주]에 좇아서 그 자신 또 다시 원인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상계의 인과적 닫힌 체계에 연관해서 행위주체의 의지의 독립성이 정초된다. 그러므로 칸트가 말하는 초월적 자유란 감성계에 속하는 것이 아닌, 지성계에 속하는 지성적intelligible 자유이다. 말하자면, 칸트의 말대로 지성적이라는 것을 “의미의 대상 속에서 그 자체 현상이 아닌 것”이라면, 초월적 자유는 지성적 자유이다. 그리고 이어서, “따라서 감성계에서는 현상이라고 보아져야 할 존재가 그 자체에 있어서는 감성적 직관의 대상이 되지 않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능력에 의해서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런 존재의 원인성은 두 가지 면에서 고찰될 수 있다. 즉 존재의 원인성은 ‘물자체 그것’으로서의 원인성이 작용하는 면에서 지성적이라고 보아질 수 있고, 그런 원인성이 감성계에 있는 현상으로서의 그 원인성의 결과들이라는 면에서 감각적인 세계 속에서 현상의 인과성으로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칸트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주체〔인간 외의 존재까지 포함〕의 능력에 관해서 경험적 의미의 원인성과 지성적 의미의 원인성을 가지지만, 이런 두 가지 원인성은 동일한 결과에 있어서 공존하는 것이다. 감관의 대상이 지니는 능력〔힘〕을 이처럼 이중적 면에서 사고하는 것은, 우리가 현상과 가능한 경험과에 관해서 형성해야 하는 개념들 중의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무릇 현상은 ‘물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현상의 근저에는 초월적 대상이 있어서 이것이 현상을 한갓 표상이라고 규정하는 바다. 이렇기에 우리는 선험적 대상에서 그것이 현상하게 되는 성질 이외에, 현상이 아닌 원인성도 부여함을 방해할 것이 없다.”

6. 행위의 시작으로서 행위주체

앞서 행위의 동기를 탐색하는 것이 끝이 없다면, 행위의 행위주체에 대한 조사는 끝이 있다는 것을 리쾨르는 지적하였다. 말하자면, ‘누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유명사, 대명사 등과 같이 한정된 기술 속에서 제시될 수 있다. 즉, 누가 그것을 했는가? 라는 질문에 ‘어떤 사람’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여기서 행위주체는 낯선 원인으로서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 행위주체에 대한 언급이 다른 차원에서 계속되던 원인에 대한 탐색 즉, 동기에 대한 탐색을 종결짓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분은 칸트의 자유에 대한 「정립」의 차원에서 행위주체를 개입시킴으로써 행위동기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연속을 중단할 수 있다는 점과 또한 칸트의「반정립」의 차원에서 행위동기에 대한 물음이 인과적 연속을 계속 해 나갈 수 있다는 설명과 유사하다. 즉 자유와 자연은 행위 능력과 행위의 이유라는 구분과 유사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자연 인과율의 연속 속에서 새로운 시작을 개시할 수 있는 근거를 칸트는 ‘초월적 자유’라고 불렀다. 비슷한 맥락에서, 리쾨르는 행위 동기에 대한 무한한 물음의 연속 속에서 행위주체의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그 연속의 시발점이자 종결점으로 삼는다. 물론 칸트의 그러한 구분은 언급된 것처럼 물자체와 현상계의 구별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리쾨르는 이러한 칸트의 논증에서 머물지 않고 논의를 더 진행시킨다. 칸트는 시작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세계의 시작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의 과정 가운데 있는 시작이다. 이때 후자가 자유의 시작이다. 칸트는 여기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음을 알고 있다. 말하자면, 칸트는 원인들의 절대적 자발성을 말하는데 어떻게 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우선인’ 시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칸트 식으로 대답한다면, 사건의 구체적 계열의 시작인 자유는 세계의 전체 과정에서 상대적 시작일 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여기서 시간에 관해서 절대적으로 우선적인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과성에 관한 한에서 그러한 것을 말하고 있다.” “완전히 자유롭게 그리고 자연적 원인을 필연적으로 결정짓는 영향력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자기의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람의 예를 들면서 칸트는 반복한다. “따라서 일련의 현상 속에서 절대적으로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 것은 시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인과성에 관해서이다”라고.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이 자유와 자연필연성의 대립적 특성을 나타내는 동시에, 시작이라는 개념의 두 가지 구분은 행위 이론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세계의 시작과 세계 속의 시작이라는 시작 개념의 이러한 구분은 리쾨르에 따르면 실천적 관점에서 중요하다. 실천적 시작은 세계 전체 과정의 시작이 아닌 실제적 대상 속에서의 계열 가운데 시작을 말한다. 칸트는 이러한 실천적 시작의 단초를 행위주체의 초월적 자발성에 두었다. 그러나 행위의미론은 사건의 시작과 결정된 인과적 연속 사이의 관계 문제에 직면한다. 행위의미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우선 기술description 이론의 범위 내에서 행위를 인과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문제는 실천적 연쇄에 속하는 행위들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고 동일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의미론에서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 복잡한 경우에 대한 “진정한” 기술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세계의 시작과 세계의 과정 가운데 시작이라는 칸트적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행위를 기술하기의 차원에서는 사건의 시작에 있어서 행위주체의 자발적 결단이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행위주체 귀속의 문제로 넘어갈 때, 행위의미론은 실제적인 답을 제시할 수 없다. 행위주체를 귀속시키는 데서 발생하는 아포리아와 상관없는 기술이론은 실제 행위의 ‘무엇?’에 대한 기술에서 머물고 있을 뿐, 행위주체인 ‘누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 없다.
이제 행위를 기술하기 차원에서 행위주체인 ‘누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갈 때,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물리적 결과들의 무한정한 연속에 관하여 행위 주체의 책임성이 어디까지 미치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원인의 원인을 묻는 원인들의 연속 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그 문제가 멈추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결과의 결과들의 연속 중 어디에서 그 문제가 종결되어야 할 것인가를 리쾨르는 질문한다. 만약 행위주체라는 원인이 원인들의 연속 속에서 일종의 정점을 구성한다면, 이 시작의 효과가 미치는 범위는 또한 결과의 측면에서는 한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이 미치는 범위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데, 그 문제는 리쾨르에 따르면, “세계의 전체 과정 속에서 상대적으로 첫 번째인” 시작이라는 칸트적 개념과 긴밀한 관계를 갖는다. 행위주체의 자유로운 행위 결단이 필연적으로 동반해야 할 것은 행위에 대한 책임성이다. 행위의미론에서 제기하지 않는 문제, 곧 행위주체의 행위능력이 미치는 범위의 문제를 리쾨르는 제기하는데, 이 문제는 바로 행위주체의 책임성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리쾨르에 따르면, 행위주체는 그의 직접적 행위 속에 존립하지, 그와 멀리 떨어진 결과들 속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행위주체의 책임성을 묻는 문제는 그의 책임성이 미치는 사건들의 영역을 한계짓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우선 행위의미론에서처럼 인과적 연속만을 따르자면, 행위의 결과는 행위주체와 분리된다. 이때 우리의 시초적 행위의 연속은 인과 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의 연속은 예상외의 결과들을 낳을 수 있다. 여기서 행위주체의 소관이 되는 부분과 외적 인과성의 연계에 속하는 부분 사이를 분리하는 것은 매우 복잡한 작업이다. 그러나 리쾨르에 따르면, 인과적 체계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과는 별도로 실천적인 삼단논법 속에서 행위주체의 의도적인 부분을 정초할 수 있어야 한다. 행위주체의 의도는 자연의 물리적 구조 속에서 물리적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시작의 효과가 어디까지 미치는가에 대한 물음은 행위주체의 책임성과 물리적 인과성 사이에서 혼란을 드러낸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러한 혼란이 없이 우리는 행위가 세계 속에서 변화를 산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리쾨르는 구체적 현상 속에서 행위의 시작이라는 실천적 영역에서 자연과 자유의 결합 가능성을 궁구한다. 리쾨르에 따르면, 시작은 세계의 과정 속에서 행위주체의 개입이다. 그것은 세계 속에서 실제로 변화를 야기하는 개입이다. 칸트가 초월적 자유를 인과적 현상의 시작으로 삼았던 것과 유사하게 리쾨르는 행위 능력을 실천적 행위의 시작으로 주목한다. 행위의 인과적 연속 속에서 실천적 행위의 시작이 되는 것은 행위주체의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위의 ‘무엇?’, ‘왜?’라는 질문에 대해 ‘누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행위의 인과적 연속 속에서 행위주체를 개입시키는 것과 같다.
실천적인 삼단논법의 결과인 각각의 행위는 세계의 질서 속에서 하나의 사태를 새롭게 도입하는 효력을 가진 행위이다. 그 행위는 인과적 연쇄를 그 차례에서 멈추게 한다. 이러한 연쇄의 효과들 가운데서 동일한 행위주체 혹은 다른 행위주체들에 의해 상황적으로 수용된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행위의 목적과 행위 원인 사이에서 이러한 새로운 연쇄를 근본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주체의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리쾨르는 선언한다. 즉, 그가 행할 줄 아는 것들 중 하나를 그 결과의 조건을 결정하는 체계의 시초 상태와 일치하게 하는 그의 능력이다. 세계 속에서 행위주체의 개입은 새로운 인과적 연쇄를 시작하게 하는 시초이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인과적 설명 체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인식론적 단절이 행위주체의 개입으로 인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행위주체의 부조화로운 개입들 사이의 불연속을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은 바로 행위의 행위주체에 대한 귀속을 통해 가능하다고 리쾨르는 말한다. 이를테면, 행위주체의 개입은 인과적 계열 속에서 새로운 행위를 가능하게 하면서 새로운 연쇄를 형성하는데 이때 인과적 설명 체계에서와 달리 인식론적으로 단절이 일어날 수 있다. 이러한 단절은 행위를 행위주체에게 귀속시키기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누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그리고 ‘왜?’라는 질문에 결합시켜야 하는 필요성은 행위 개념의 상호적 의미망의 구조 때문이다. 행위주체의 행위 능력은 행위 동기에 대한 질문과 행위주체에 대한 질문 사이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형성된다. 동기화의 과정은 정신적 사실들의 차원 속을 끊임없이 배회한다. 그러나 행위 능력이 행위를 실행하는 것은 외적 자연의 과정 위에서이다. 인과적인 외적 자연의 과정 속에서 행위주체 물음을 던지는 것은 바로 ‘누가?’라는 질문을 ‘무엇을?’이라는 질문과 ‘왜?’라는 질문에 연결하는 것이다.

7. “나는 할 수 있다”의 현상학과 신체의 존재론

앞서, 인과적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행위의미론이 행위주체의 문제에 대해 방법적으로 괄호치기épokhé를 수행한다는 것이 시사되었다. 사건 존재론과 인과적 인식론은 행위의 ‘누가?’에 대한 질문을 행위의 다른 문제들의 더미 속에 숨겨버린 결과를 낳았다. 말하자면 행위의미론은 행위 의도와 동기화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행위의 ‘무엇?’을 ‘행해야할 것’과 분리시키고 ‘왜?’라는 질문을 ‘누구?’라는 질문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다. 리쾨르에 따르면, 이러한 분리는 이중의 효과를 가지고 있다. 한편, 심적 현상에 대한 설명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서 그러한 심적 현상들을 인과적인 의도와 동기들로 의미 해석한다. 다른 한편, 행위주체에게 행위를 귀속시키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행위주체가 행위술어를 재소유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행위에 대한 기술을 중심으로 하는 인과적 행위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 결단에 의한 행위로의 이행을 위해 리쾨르는 칸트의 「이율배반」을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음을 살펴 보았다. 세계의 과정 가운데 새로운 행위의 연쇄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근거를 칸트는 현상계와 가상계의 구분에 두고, 초월적인 관점에서 ‘원인의 절대적 자발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리쾨르는 ‘자기 해석학’l'herméneutique du soi의 관점에서, “나는 할 수 있다je peux”의 현상학과 자기 신체의 존재론을 말한다. 칸트가 초월적 자유를 말한 것과는 달리, 리쾨르는 행위주체가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 확신은 행위주체가 세계 속에서 변화를 산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다. 리쾨르는 초월도 아니고, 결정론도 아닌 자기 확신이라는 차원을 주장한다. 이러한 확신은 리쾨르 자신이 그리고자하는 주체인 ‘자기’의 존재 근거가 되기도 한다. 행위의미론에 대한 치밀한 분석 끝에서 리쾨르는 자신의 주체 복원의 전략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행위주체의 결단이 행위의 시작이 될 수 있게 하는 근거는 바로 자기 신체의 존재론이다. 이때 말하는 신체는 나의 신체이면서, 또한 물리적 신체의 차원과 인격personnes의 차원에 이중적으로 결부된 신체이다. 그리고 행위하는 능력은 우리 자신의 것이면서 세계의 질서에 종속하는 사물들의 과정에 속하는 것이다. 리쾨르에 의하면, 행위 능력에 일치하는 시초적 사태가 결정적으로 정립되어지는 것은 “나는 할 수 있다”의 이러한 현상학 속에서 그리고 자기 신체의 존재론 속에서 가능하다. “나는 할 수 있다”의 현상학과 자기 신체의 존재론이 어떻게 ‘행동하고 고뇌하는 인간’humain agissant et souffrant으로서 자기의 현상학에 연관되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를 요하는 과제라고 리쾨르는 밝히면서, 자신의 전략의 향방을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과 자유 사이에서 행위주체 귀속시키기의 아포리아가 효과적으로 극복되는 것은 차후의 일이 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언어분석철학자들은 언어의 남용에서 기인하는 철학의 혼란과 모호성을 제거하고 개념적 명료화와 논리적 분석을 수행하는 것을 일차적 과제로 삼아 왔다. 특히 일상언어에 대한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지금까지의 여러 철학적 문제들을 명료하게 정리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대개 자연과학적인 입장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인과적 설명을 수행하고 있는 주장과는 반대로, 세계에 종속되지 않는 주체의 의지를 강조하는 흐름이 있었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주체의 죽음이 마치 거대 담론처럼 느껴지는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 데카르트의 코기토나 초월적 주관이 아닌 그러면서도 언어의 파편 아래 굴복되어버린 주체가 아닌 겸허한 주체의 복원을 기획하면서 리쾨르는 그것이 해석학적인 ‘자기’Soi로서 가능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기 해석학’l'herméneutique du soi에 대한 논의는 지면상 필자 역시 차후로 미룰 수밖에 없음을 고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