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초기 피히테에 있어서 구상력의 문제
배 우 순*
<한글요약>
이 소론이 시도하는 바는 칸트와 초기 피히테의 구상력의 개념을 그들이 각기 갖고 있는 인식론적인 체계, 즉 [순수 이성 비판]과 [인식론](Wissenschaftslehre, 1794/95)을 배경으로 서로 비교하는 관점에서 논의하는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구상력 개념의 특징은 그의 선험 철학 - 경험의 조건 가능성을 묻는 - 의 기초 위에 있다는 점이다. 이런 체계 위에서 이 개념은 먼저 개별적으로 이해되는데, 구상력이란 주관이 대상을 인식하는 세 능력 - 감각, 구상력과 통각 - 중에 하나인 바, 대상 인식의 한 원천이 된다. 이 경우 구상력의 의미는 '대상의 현존함이 없이 그것을 표상으로 떠올리는' 능력이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 더 본질적인 면에서는 - 구상력은 다른 두 근본 능력(들)과 더불어 대상 인식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하나다.
그런데 두 번째 경우의 문제로, "어떻게 이 각기 다른 세 요소의 능력이 하나의 통일된 인식으로서, 논리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종합 연결되는 것을 설명될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그런데 이 물음의 핵심은, 앞서 언급된 세 가지 인식의 요소 가운데서 자발적인 사유 능력의 통각과 수동적인 감성의 능력인 감각이 어떻게 하나의 전체로 통일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 B판에서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형태의 구상력 - "형상적?figuerlich) 구상력 - 을 제시한다(물론 A판에는 없다.). 즉 이 구상력은 그의 독특한 종합, 즉 선험적 도식을 통해서 감성과 오성을 매개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초기 피히테에서 구상력이 문제되는 곳은 인식의 정초 이론(세 근본 원칙론)을 전제로 한, 그에 후속 하는 "자의식의 역사"에서 이다. "자의식의 역사"란 일종의 시도적인 이론 모델 - 쉘링과 헤겔도 이에 가담된 - 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의 이해는 그의 의식 활동과 그 인식 능력들을 한 근원에서, 한 원칙에서, 또 생성론적-발전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의 능력 심리학과 대립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이에 의하면 구상력은 모든 인식과 정신적 활동의 원초적인 기초 능력인데, 바로 이것(이곳)이 "자의식의 역사"라는 프로그램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구상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문제 연관에서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이에 대한 답은, 앞서 위에서 예시된 데로 바로 근본 명제론에서의 셋째 명제, 즉 자아와 비아(非我)가 서로 제한되고 분할되는 곳, 즉 주관과 객관이 매개되는 곳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거기서, 그것을 근거로 인간 정신을 탐구하려고 하는 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서의 "자의식의 역사"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연이어서 주목할 것은 구상력의 개념 자체의 의미 문제인데, 이 경우 피히테에 있어서는 두 가지 의미 규정이 동시에 성립하는 것 같다. 1. 피히테의 구상력은 칸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것들을 종합하는 인식 능력이다. 2. 피히테의 구상력은 인식 능력의 의미 뿐 아니라 자아와 비아가 매개된, 주관과 객관 양쪽이 용해된 어떤 상태를 뜻한다. 즉 구상력은 주관의 능력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상태를 말한다.
1. 문제의 제기
이 소론이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는 칸트와 초기 피히테에 있어서의 구상력(Einbildungskraft)의 문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이 소론은 {순수 이성 비판}(1781,1787)을 중심으로한 칸트의 구상력과 초기 {인식론}Grundlage der gesamten Wissenschaftslehre (1794/95)을 중심으로 나타난 피히테의 구상력을 서로 비교하는 관점에서 논의하는데 있다. 이와 같은 문제 제기의 뜻은 아리스토텔레스이래 현대의 하이데거, 마르쿠제 등에 이르기까지 구상력은 비교적 다양하게 논란되어 왔지만, 칸트와 피히테에 있어서 처럼 인식의 성립과 그 정초 문제에 체계적으로 관여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칸트와 초기 피히테에 있어서의 구상력 - 인식 정초에 관여된 - 을 서로 비교하는 관점에서 문제삼을 때, 각별히 고려되어야 할 점은 주지하는 데로 피히테가 칸트에게 받은 영향의 문제일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유념하면서, 이 문제의 주제적인 논의에 앞서서 그의 문제학적 배경이라는 의미로 칸트와 피히테 양자의 기초적인 관계를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피히테의 초기 저작들 "Recension des Aenesidemus"(1792), Ueber den Begriff der Wissenschaftslehre(1794), Grundlage der gesamten Wissen- schaftslehre(1794/95) 그리고 Grundriss des Eigentuemlichen der Wissen- schaftslehre(1795)가 잘 보여 주듯이 초기 피히테는 "구상력"(Einbildungskraft)을 비롯해서 직관(Anschauung) "자아"(Ich), "체계"(System), "종합"(Synthesis) 등등을 비롯해서 칸트 선험 철학적인 여러 중요한 개념들을 칸트에게서 직접 차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피히테는 그의 '철학하는 것' 자체를 칸트에게서 본받았고 또 그것을 독자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려 했다. 이를테면 칸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대안으로 그의 선험 철학을 제시했고 또 그의 선험적-주관적 입장에서 인식의 마지막 정초를 논증하려 했다. 이에 대해 피히테는 한 면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을 이어받으면서, 또 다른 한면 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에 존재론적인 근거와 기초를 부여하려 했다.
둘째 칸트와 피히테에 있어서 구상력 개념을 서로 비교하는 관점에서 문제삼을 때, 양자의 개념이 디디고 있는 인식론 체계, 즉 {순수 이성 비판}과 {인식론}(Wissenschaftslehre, 1794/95)의 원초적인 차이점을 동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각기의 인식 체계는 그 구성과 내부 구조에 있어서 서로 많은 상이함을 보이고 있는데, 양자에 있어서 구상력 개념의 차이도 결과적으로 볼 때 각기 이 인식론 체계의 상이함에 기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칸트는 인식의 생성과 근거를 설명함에 있어서 경험 이전에 성립하는, 즉 그 경험의 성립 가능성의 조건을 물었다. 또 선험적인 차원에서 각기 인식 능력을 그 기능에 따라서 개별화시켜서 - 예를 들어 이성, 오성, 감성 등등 이런 식으로 - 분석적으로 나누어 논증하는 입장이었다. 이 소론에서 논의의 중심 주제가 되는 구상력 개념도 마찬가지로 '인식 성립의 조건의 가능성'을 묻는 선험 철학적인 근거 위에서 사용되고 또 개발되었다. 그런데 피히테에 있어서 구상력의 의미는 칸트적인 순수 인식론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정신을 탐구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문제가 되며, 또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모든 다른 인식 능력의 근거가 되는 기초 능력(Grundvermoegen)이 된다. 또 그의 이론 전개의 형식의 면에서도 칸트와는 전혀 다른데, 피히테는 제반 인간의 각기의 인식 능력들과 정신의 활동들은 각각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 한 원천에서, 또 그것들이 하나의 근원에서 하나씩 하나씩 전개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런 피히테의 입장은 그의 초기 {인식론}(1794/95)에서 시도된 그의 고유한 인식 생성론인 바, "자의식의 역사"(Geschichte des Selbstbewusstseins)로 특징지어져 설명된다.
위와 같은 개괄적인 특징을 염두에 두면서 칸트와 피히테에 있어서 구상력의 문제는 아래의 두 가지 물음의 방향에서 비교적으로, 또 유의미하게 논의될 수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양자에 있어서 이 구상력 개념은 '어떤 내용의 인식론적인 체계에서 성립하며, 또 그 체계 안에서의 위치와 기능은 어떠한가'. 둘째, 양자에 있어서 '구상력은 그 자체로서 그 의미 규정은 어떠한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2. 칸트의 선험 철학에 있어서의 구상력의 문제
칸트의 경우, 그가 그의 선험 철학을 통해 보인 철학적 관심은 주지하는 데로 인식에 대한 근본적인 해명과 그 정초에 있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의 학적인 과제를 종래의 형이상학이 추구하던 초월자로서 경험 외부에 있는, 대상 자체가 아니라 경험되는 대상에 관한 인식 방식(Erkenntnisart)을 문제삼는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이 선험 철학은 그 본질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학(學)의 체계라기 보다는 학 일반의 보편적 인식의 방법론이며, 따라서 이 선험 철학은 학의 방법론 자체를 문제삼는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칸트의 선험 철학의 과제는, 또 그의 고유한 학적 출발점은, 존재를 존재 자체로서 문제삼는 종래의 존재론적인 입장이 아니라, 경험의 대상 즉 현상(Erscheinung)과 이를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을 동시에 문제삼고 또 이를 논리적으로 해명하기 위함이 된다. 이 소론에서 조명하고자 하는 칸트의 선험 철학은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이 되는 셈이다. 주지하는 데로 칸트는 이와 같은 전통 형이상학에서부터 그의 전향된 사고 체계, 즉 존재론에서 선험 철학적 새로운 방향 설정을 기꺼이 코페르니크스의 전회에 비유했다. 나아가서 후일에 그는 그의 선험 철학이 종래의 형이상학과 전혀 다른, 형이상학에 선행하는 학적 시도로서 스스로 강한 자부심을 가졌다. 이런 입장을 풀어서 말한다면, 인식이 대상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㤞우리㤜의 인식을 지향한다는 것인데, 이런 인식론적인 새로운 안목은 확실히 인간의 인식 문제를 원천적으로 전혀 달리 설명하는데 지평을 열어 주었다. 그의 새로운 착상과 그의 고유한 인식론적인 체계 구축이라는 성과는 영향사(史)적인 면에서 결코 그 당시로만 제한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적인 혁명적 전환에 즈음하여 선험 철학 그 자신이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이 선험적 주관주의가 그의 인식의 객관성과 보편성을 보증할 수 있느냐는 것이였다. 달리 이 문제의 문제성을 말한다면, 주관주의적인 관렴론으로서의 선험 철학은 또 그의 능력 개념(들) - 구상력의 개념도 포함해서 - 은 그가, 혹은 그들이 파악하는 인식에 있어서 그 객관성 확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사(模寫)적인 실제론 과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식의 객관성 및 보편성의 근거를 선험 철학은 후자의 경우 처름 "소위" 어떤 객관적 존재를 단순히 모사적으로 인식함으로, 그 인식의 객관성 자체를 자동적으로 대상 자체에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선험 철학은 인식 현상을 실재론과 다른 기초에서 - 자기 논리를 통해서 - 대상을 '실질적으로' 인식한다는 그 객관성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의 [순수 오성 개념의 연역] 에서 외부 대상에 대한 경험과 인식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이 심리적 주관주의와 구별됨을 여러 곳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말해서 그의 선험적 주관주의는 그의 능력 개념 중에 하나인 통각 작용을 통해서 확보되는 인식의 객관적 타당성과 보편성을 심리적, 경험적 주관주의의 입장에 대해 대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선험 철학에 있어서 파악하는 인식 내용들은 그 존재 성격의 면에서 또 그 타당성의 근거 면에서 심리적-주관적인 것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칸트적인 선험적 인식론이 디디고 있는 존재론적인 성격은 그 근거 면에서 심리적인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자의 차이를 칸트식 체계의 표현을 빌린다면, 심리학적인(심리적인) 것은 각기 주어진 표상을 연결 혹은 종합함에 있어서 법칙적인 근거를 사유적인 필연성이 없는 심리적인 혹은 경험적 연상 법칙 (Assoziationsgesetz)에 두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하여 후자는 논리적 순수 오성 개념인 범주 (Kategorie)가 적용된, "사유되어진" 보편적인 것이다. 따라서 칸트적 의미에서는 전자는 주관적이고 후자는 객관적이 된다.
1) {순수 이성 비판}에 있어서 근본적인 인식 능력의 문제
칸트에 있어서 구상력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바로 위에 논급된 대로 그의 순수한 선험적 인식론의 기초와 그 근거 위에서 성립된다. 이제 구상력에 대한 실질적인 내용 - 그의 기능, 그 선험 철학에서의 위치 등등 - 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순수 이성 비판}에서 [순수 오성 개념의 연역]부분을 중점적으로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칸트는 그 곳 3절에서 구상력(Einbildungskraft)을 감각(Sinn)및 통각(Apperzeption)과 더불어, 대상 인식에 대한(을 위한) 세 가지 주관적 인식의 원천 중의 하나로서 설명하고 있고, 또 인식 능력들인 그들이 㤞객관적㤜 인식 성립을 위해서 수행하는 종합 작용을 분석적으로 논의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칸트는 그곳에서 자기의 선험 철학의 입장에서, 외부 대상을 인식하는 문제에 관해 자기의 입장을 총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셈이다.
먼저 선험적 인식론, 특히 그의 주관적 관념론이라는 입장에서 이 세 가지 능력이 갖는 원천적인 의미는, 이 세 가지 능력을 거치지 않고는 㤞우리에게㤜 대상의 인식이 도무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그 이유는 한마디로, 그들이 유일하게 주관과 객관 즉 대상 세계를 연결시키는 매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그 능력들이 갖는 내용들을 논의하게 되는데, 그기에 대해서 칸트가 종합적으로 요약 정리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인용할 수 있다.
"감각은 주어진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지각(Wahrnehmung)에 떠올리고, 구상력은 이 표상을 연상 작용(Assoziation), 즉 재생(Reproduktion)에서 - 을 통해서 - 나타낸다. 통각은 현상과, 연상 작용에서 재생된 표상이 동일하다는 경험 의식에서, 즉 재인식(Rekognition)이라는 작용을 통해서 그 표상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세 능력을 이해함에 있어서 한 면에서는 칸트 스스로가 구분하여 설명하듯이, 분리해서 혹은 나누어서 개별적으로 분석적으로 "관찰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다른 한 면에서는 - 더 본질적인 면에서는 - 그들이 갖는 뜻과 기능의 의미는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구성하고 있는 인식 자체의 세 가지의 내면적 "요소"(Element) 혹은 "기초"(Grundlage)들 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인식은 원칙적으로 이런 삼중정의 세 가지 요소로 성립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선험적인 능력들은 그 능력들이 수행하는 그 종합 작용(Synthesis)의 이해를 통해서 더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데, 이에 연관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칸트 경우에서, 인식 능력이란 그 본질에 있어서 다름 아닌 종합하는 능력이라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1. 감각(Sinn)에 의한 직관에서의 각지(Apprehension), 2. 구상력(Einbildungskraft)에 의한 재생산(Reproduktion) 그리고 3. 개념에 의한 재인식(Rekognition)을 말한다. 이들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1. 각지(覺知): 이것은 인식 생성에 있어서 첫 단계로서 어떤 감각적인 소여가 의식에 최초로 직관 형식에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즉 시간 공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는 - 되어 지게 되는 - 종합을 말한다.
2. 재생산(再生産): 이것은 각지 작용에서 통일된 다양한 표상들이 그 자체들이 경험 그들 스스로가 갖고 있는 규칙, 즉 연상(Assoziation)의 법칙에 의해 연결되고 또 종합되는 것을 말한다. 특히 이 구상력을 가능케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표상과 경험의 시간적인 전후 순서인데 - 각지 작용(Apprehension)에서 주어진 - 그 시간성을 근거로 해서 구상력은 표상과 경험을 다른 표상들과 경험들과 연결시킨다.
3. 재인식(再認識): 이것의 특징은 앞 두 경험적인 종합 작용과 달리 개념에 의한 선험적인 통일인데, 이 재인식은 세 가지 면에서 특징적이다. 첫째는 최종의, 최고로 통일로서 "하나의 의식"(dieses eine Bewusstsein)으로 표상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내가 사유한다" Ich denke 라는 선험적 주관의 철저한(durchgaengig) 동일성에 근거한 통각 작용을 말한다. 둘째는 이런 통각 작용의 내용인데, 주어진 표상들이 카테고리 즉 개념에 의해 통일됨으로서, 이런 선험적 통일을 통해서 그 표상의 객관적 실재가 비로소 확보하게 된다. 셋째는 "내가 사유한다"(Ich-denke)라는 선험적인 최종의 종합은 그의 인식 작용에서 모든 표상들을 동반 "할 수 있고", (또) "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는 그 인식은 객관적인 인식으로 성립 승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재인식은 그 자체로서 자발적인 사유 활동이라는 점에서 앞의 다른 두 종합과 구분될 수 있음도 시사된다.
2) {순수 이성 비판}(B판)에서의 "생산적" 구상력
대상을 인식하는 세 요소와 그들의 세 종합 작용들의 내용이 각기 위와 같이 설명된다면, 이제 최종적으로 제기되는 물음은 그들 각기의 종합들이 어떻게 하나의 전체로서, 즉 온전한 인식으로 종합되는가, 즉 각기의 종합 작용들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라는 것일 것이다. 이런 물음의 구체적인 발단은, 각기 종합되는 능력들 - 감각, 구상력, 통각 - 이 근본적으로 그 자체로서 그 양태가 서로 다른데, 어떻게 그것들이 하나로, 즉 논리적으로 무리함이 없이 또 조화롭게 서로 연결 내지 종합될 수 있느냐의 문제인 셈이다. 왜냐하면, 이미 숙지된 바로 오성(Verstand)의 통각 작용은 선천적으로 우리 인식 주관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사유하는 개념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 "무엇"을 규정하고 또 범주에 의해 판단하는 사고의 순수 자발성에 기초된 지적 능력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감각 혹은 감성(Sinnlichkeit)은 외부 세계의 촉발로 말미암아 우리 의식의 직관(형식) 속에 어떤 감각 자료가 직관의 다양성으로 주어지는, 이른 바 수동적인 것이다. 또 구상력이란 현존함이 없는 어떤 대상을 직관 속에 표상하는(표상 해내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들의 성질상, 특히 전적으로 상이해 보이는 통각과 감각의 두 능력들 - 수용적인 것(rezeptiv)과 자발적인(spontan) 것 - 이 어떻게 서로 서로 하나의 통일된 작용으로 매개될(될 수) 것이냐 또 종합을 이룰 것인가의 문제다. 즉 거시적인 규모로 말해서 칸트 인식론에 있어서 인식의 두 축인 감각과 오성이 어떻게 하나의 모습으로 논리적으로 무리 없이 결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혀 다를 두 능력의 결합에 대한 필요성과 그 필연성은 A 판에서도 충분히 제시된 것을 볼 수 있어나, 그러나 A 판에서는 그에 대한 이론적 장치가 뒷받침된 해결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B 판에서 - 예를 들면 B 150, B 152, B 153, B 154 그리고 B 155에서 - 칸트는 그 문제의 난점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으로 구상력의 새로운 기능인 "형상적 종합" (figuerliche Synthesis)을 등장시키고 있다. 즉 "재생산"을 수행하는 구상력이 이제는 인식을 㤞같이㤜 성취해 내는 다른 두 능력, 즉 "각지"(覺知) 작용을 수행하는 지각과 "재인식"을 수행하는 통각의 능력을 매개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기능의 구상력을 B판에서 특히 "형상적(figuerlich) 종합" - 때로는 생산적(produktiv) 구상력 - 으로 표현한다.
이 새로운 종합 개념은 이를테면 "선험적 종합"(transzendentale Synthesis)의 일종이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 통각 자체 내에서 선험적 작용을 수행하는 "생산적 구상력" 이나 순수 개념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순수 "예지적 종합"(intellektuelle Synthesis)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이 형상적 종합 작용의 특징은 단적으로 선험적인 도식(Schema) - 한 면에서는 이지적이고 개념적이며 다른 한 면에서는 감각적인 - 을 산출해 낸다는 것이다. 이 도식은 바로 구상력의 산물인데, 추상적 사유 능력인 오성과 감각적 소여인 그 직관의 다양성들을 자기 속에 매개시키므로 경험에 대해서는 선천적 근거를 부여케 하고, 오성은 이를 통해서 "감각적으로" 구체화되는 선험적인 종합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각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형상적 종합"(synthesis speciosa)을 통해 새로이 제시되는 구상력의 면모이다. 이를 태면 위와 같은 형상적 종합의 경우는, 정의적인 면에서 별 구체성이 없이 이해되는 바 "현존함이 없는 어떤 대상을 직관 속에 표상하는" 그런 능력이 아니다. 위에서 본대로 구상력이 감각과 통각을 자기 속에서 연결 종합한다면, 이 종합 작용을 더 원천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해한다면, 이는 하이데거가 해석하려는 바대로 오성과 감성을 매개시키는 "제 삼의 근본 능력"(drittes Grundvermoegen) - 감각 및 오성과 더불어 공존하는 - 이 된다. 그러나 이럴 경우 문제는 칸트 인식론에서의 일반적으로 또 원칙적으로 대표되는 입장인 바, 즉 인식의 근본 원천을 유일하게 감성과 오성의 능력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좁다는 입장이 나온다. 하이데거는 칸트에게서 이 약점을 보면서 이 구상력은 칸트에 있어서 "발붙일 곳이 없는"(heimatlos) 능력으로 표현했다.
3. 초기 피히테의 {인식론}(1794/95)에 있어서
구상력의 문제
초기 피히테 철학은 근본적으로 칸트의 선험 철학이 그러했듯이 인식 혹은 학(學)의 체계적인 해명과 정초에 대한 관심으로 특징 지워진다. 이점은 이미 언급된 데로 그의 초기 철학은 문제학적인 출발점에서부터 칸트의 선험 철학을 계승했고, 또 나아가서 그것을 심화해 간 것이라는 주장에 직접 연결된다.초기 피히테의 근본 입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인식론"(Wissenschaftslehre)이라는 이름으로 자기의 고유한, 학의 정초 이론을 제시했다. 이런 피히테 이론을 그 전체 구성 면에서 또 학적인 과제 면에서 있어서 분석한다면 근본 명제론(Grundsaetze)과 자의식의 역사로서 "인간 정신의 실용적 역사"(eine pragmatische Geschichte des menschlichen Geistes) 둘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피히테는 이 두개의 문제 영역의 구분을, 그 기준에 있어서 첫째는 서로 다른 사고의 형태의 상이함 - 인위적 사고(kuenstliche Reflexion)와 사실적 혹은 사실(Faktum)에 기초한 사고 - 에 두었다. 이에 연이어 그 둘째는 그들 각기의 문제 주제의 차이에도 주목했다. 이를테면 전자는 인식의 정초 문제에 관계되고 후자는 인간의 정신을, 그의 본질을 생성론적인 입장에서 문제삼는 그런 주제다.
이제 위에서 언급된 {인식론}의 두 가지의 주제 내지 과제를 구상력과의 관계에서 파악한다면, 원칙적으로 이 구상력은 양자의 이론 모두에게 관계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전자에서는 이 구상력의 문제가 간접적으로 관여될 뿐 주제적으로는 논의되지 않는다. 즉 전자는 학 혹은 인식의 정초 이론으로서, 인식 능력인 구상력과의 관계란 '이 이론, 즉 인식 정초론이 인간 인식 능력의 차원에서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를 묻게 될 때, 비로소 구상력이 문제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그 구상력의 개념이 직접적으로 문제의 장에 등장하는데 구상력은 논의하고자 하는 "인간 정신의 실용적 역사"에서 그 중심 개념, 즉 그 문제의 발생학적인 근거와 출발점이 된다.
1) {인식론}(1794/95)에 있어서 학의 정초 이론과 Tathandlung
{인식론}(1794/95)의 처음 과제가 되는 학의 정초 이론은, 그 내용의 구조를 분석할 때 이는 둘로 나누어 정리될 수 있다. 첫 번째의 것은 일반 개별의 학(學)(besondere Wissenschaft)을 학으로서 정초하는 인식의 "체계적인 형식" (systematische Form)(38쪽)의 추구였다. 이 문제가 갖는 구체적인 뜻은 모든 학과 지식에 있어서 학의 보편성 - 체계적 논리성 - 을 부여하며, 또 이 형식의 타당성 자체를 확보하는 것이였다.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 문제를 심화시켜서 - 칸트의 정초 이론에서 그렇게 뚜렷하고 첨예하게 제기되지 않았던 문제인데 - "모든 의식에 기초에 놓인 것" 또 "모든 인간 의식의 절대-최초의 단적인 무조건적인 근본 명제"를 찾는 것이였다. 사실 초기 피히테의 인식론의 학적 과제를 꼼꼼하게 추적한다면 학의 엄밀한 정초와 학과 인식의 최종적인(최초)의 근거에의 추구를 동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초기 피히테의 정초 이론에서의 중심 개념인 Tathandlung은 두 가지 의미 수준에서 같이 조명되어 진다. 아래의 A는 Tathandlung이 그의 인식론에서 갖는 기능적 내용에서 논의하고, B는 인식론의 체계에서, 즉 근본 명제론에서 갖는 제일의 근본 명제로서의 역할과 그 활동을 논의하고 있다.
A: 피히테는 Tathandlung의 내용 문제를 {인식론}(1794/95)의 프로그람적인 저작으로 알려진 {인식론의 개념에 대하여}Ueber den Begriff der Wissenschaftslehre(1794) 에서 설명하고 있다. Tathandlung이 학과 인식의 정초 문제에 있어서 '어떤 근거에서 Tathandlung은 그의 인식론의 체계에서 그 중심이며 그 실체적인 원칙 - 모든 다른 명제가 이끌어져 나오는 - 이 될 수 있는가 이다. 즉 인식론의 체계에서 Tathandlung은 어떤 근거에서 그의 합리성을 최종적으로 보증하는 체계 머리(Systemkopf)가 되는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내용들을 분석적으로 이해할 때 3가지 정도의 분명한 내용의 골격을 아래와 같이 그 근거로서 요약할 수 있다.
a) 체계 사상 (Systemgedanke): 이것은 초기 피히테 인식 정초론의 이론적인 기초 성격 혹은, 그것이 갖고 있는 일종의 독특한 사고 패턴을 의미한다. 그 뜻은 "하나" 이면서 "전체"인 체계로서 학 혹은 인식의 정초 이론으로서 가져야할 구조 형식을 말한다. 그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면, 그 체계 안에서의 모든 명제들은 그 체계의 첫 머리 명제 혹은 제일 명제 - Tathandlung - 에 필연적으로 연결되고 또 그렇게 해서 전체 속에 통합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피히테에 있어서 인식론은 바로 이런 점에서 다른 학의 선험적인 형식을 부여하는 형식의 학(Formwissenschaft)으로 이해된다.
b) Tathandlung의 독특한 내면 구조: 피히테는 Tathandlung이 그 중심이 되는 학의 정초 이론인 바, 그의 인식론과 어떤 대상에 대한 학으로서의 개별 과학 - 혹은 일반 과학 - 을, 그들의 구조 분석의 비교를 통해서 그 차이를 들어내려 한다. 즉 피히테는 그가 고안한 오리지날한 구조 분석의 틀, 즉 "형식과 내용"(Form und Inhalt) - 대상으로서 "무엇에 관한 것"이라는 형식과 "그 무엇에 대해 파악된 지식 내용"으로서의 "내용" - 이라는 두 구조 계기를 통해서 인식론을 다른 학문과를 비교하면서 그 특색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Tathandlung이 그 내용이 되는 인식론은 "형식"(Form)과 "내용"(Gehalt)의 구조 분석의 틀에 있어서 문제의 대상과 그 파악의 내용이 완전한 일치를 보이는 순수 자의식 - 피히테적인 의미에서 - 으로 봐진다. 그 이유는 Tathandlung의 그 술어적인 뜻은 "Ich-setzte-mich" 혹은 "Ich bin Ich" 가 되는데, 즉 이 명제에서 자명한 것은 주어와 술어가 필연적인 일치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서 피히테에 의하면 개별 과학 내지 다른 일반 과학이 갖는 "형식"과 "내용"은 서로 일치하지를 않는다. 왜냐하면, 예를 들자면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동물학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의한 이론적인 파악이며 동물 그 자체의 완벽한 지식이 될 수가 없다.
c) 인식의 첫 전제로서 Tathandlung: 피히테에 의하면 그의 Tathandlung 혹은, 인식론에서의 첫 번째가 되는 명제는 모든 경험적인 인식에 앞서 있다는 점이다. 또 Tathandlung은 어떤 자기 이외의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 따라서 체계 사상의 첫 번째 전제로서 이 Tathandlung은 경험적인 인식 과정에서 경험의 행위들의 과정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a-b-c-d 라는 인식이라는 경험의 행위들의 과정에서 d.-c-b-a로 거슬러 올라 갈 경우,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첫 의식이 그것인데 - "은밀하게 전제된" - 이것이 Tathandlung이며, 피히테의 인식론은 바로 전제된 선험적 의식에 관한 학이라는 것이다.
B: 피히테는 그의 {인식론}(1794/95)의 처음 주제인 근본 명제론에서 제일 근본 명제 - Tathandlung이 주어가 되는 - 의 실질적 의미가 무엇이며 또 이 제일 근본 명제가 다른 두명제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삼중정적인(dreifach) 관계에 있는 세 근본 원칙들의 상호 관계 문제인데,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첫 번째 근본 원칙 은 Tathandlung 자체에 관한 설명인데, Tathandlung은 그 술어적 내용을 "Ich bin" 혹은 "Ich-bin-Ich"로 언표된다. 이와 같은 절대 자아는 사물 개념이 아니다. 피히테적인 의미의 절대 자아란 정확한 의미에서 Tathandlung의 자기 표현이다. 그런데 "Ich-bin-Ich""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론"의 의미에서는 결코 동어 반복의 명제가 아니다. "Ich(A) bin Ich(B)"이라고 할 때 이를 정초의 입장에서 피히테적으로 정확히 설명한다면 (B)는 (A)를 정초하고 있다는 의미다. 또한 절대 자아로서 "행위"는 간접적으로 모든 인식의 타당성의 주어가 되는데, 왜냐하면 모든 인식은 최종적으로 언제나 "나에 대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근본 원칙은 비아(非我)에 관한 것인데 "나는 비아(非我)가 아니다" 라는, 나와 나 아닌 대상과의 절대 대립된 것을 표현하는 대립 원칙을 말한다. 이 두 번째 근본 명제의 중요한 점은 비아(非我) 자체가 갖는 두 양상이다. 그 하나는 그 자체로서 절대 자아 혹은 "행위"에 매개되지 않은 원 실재(Urrealität)이며 또 다른 하나는 절대 자아에 촉발함으로서 알려진 실재가 그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피히테에 있어서 원 실재(Urrealität)는 실재(Realität)라고 할 수가 없는데 그 이유는 "내"가 촉발될 때 비로소 비아(非我)가 비아(非我)로서 성립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근본 원칙 의 그 본질은 첫 번째 원칙과 두 번째 원칙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즉, "나는 내 안에서 분할될 수 있는 나에게 분할될 수 있는 비아(非我)를 대립시킨다"("Ich setze im Ich dem teilbaren Ich ein teilbares Nicht- Ich entgegen".). 이 명제의 특징적인 내용은 분활(Teilung) 혹은 제한(Beschränkung)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첫 번째 근본 원칙은 순수 행위로서 무한한 활동인데, "Ich-bin-Ich"라는 그의 규정이 말하듯이, 자기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 매개된 것 - 근거 - 이 전혀 없다. 즉 실질적인 내용은 전혀 없다. 두 번째의 비아(非我)의 경우는, 앞서 언급된 데로 그 자체는 무규정적인 것으로서 절대 자아에 대한 대립으로 존재할 뿐, 자기의 실질적인 내용 (파악된)이 아직 없다. 이런 점에서 세 번째 근본 원칙은 앞서 있는 두 앞선 근본 원칙들을 매개시키는 근본 원칙이다. 그런데 좀더 상세하게 이 세 번째 근본 원칙을 살필 경우, "내가 내 안에서 분할될 수 있는(teilbar) 나에게 분할될 수 있는 비아(非我)를 대립시킨다"는 규정이 말하듯이 나와 비아(非我)는 서로 상호관계 속에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나를 "나에게 대해서는" 라는 - 그 타당성의 주어로서 - '다시' 나타나는 원칙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피히테 인식론에 있어서 "세"원칙론은 앞서 본대로 원칙적으로 첫 번째 원칙, 즉 선험적-주관적 Tathandlung에 그 최종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즉각적으로 바로 부연되어야 할 것은, 초기 피히테의 정초 이론이 딛고 있는 문제의 지평은 그 본질에 있어서 칸트에게서 처럼 순수한 주관적 의식의 차원에서 논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형식을 부여하는" 학으로서의 피히테의 인식론은 다른 학과 인식에게 학적 형식을 부여할 뿐 아니라 그 존재적 내용의 근거도 같이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인식론은, 앞에서 논의된 대로 칸트처럼 경험의 기능적 근거를 주관적 인식 능력에서 그 근거로서 묻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식의 실질적인 원칙론으로서 자기 이외의 타자에게부터 도출되어지는 (abgeleitet) 존재론적인 근원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바로 위에서 언급된 인식론의 "근본 명제론"에서 제일 명제에 속하는, 주관성 개념으로서의 Tathandlung - "Ich bin" 혹은 "Ich-bin-Ich"으로 표기되는 - 은 Ich-denke로 표현되는 칸트의 선험적 통각으로서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정확히 말해서 피히테의 Tathandlung은 이중적인 양상을 갖는데, 즉 인식론적인 것과 존재론적인 것을 동시에 자기 속에 갖고 있다는 말이다.
2) {인식론}(1794/95)에 있어서 '자의식의 역사'(Geschichte des
Selbstbewusstseins)와 구상력
앞에서 언급된 대로 피히테에 있어서 구상력의 개념은 '자의식의 역사'의 출발점이며 또 그 출발을 가능케하는 인식론적인 기초 능력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피히테의 구상력 개념의 실질적으로 이해는 `자의식의 역사'의 이해와 동시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서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인식론}에서의 두개의 문제 영역 '근본 명제론'과 '자의식의 역사'가 서로 무관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두 번째 문제학 '자의식의 역사'는 전자 '근본 명제론'을 자기 문제의 성립 근거로서 전제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를 피히테는 전자가 후자에 의해 "의식화되어지는"(zum Bewusstsein erhhoben) 것으로 표현했다.
먼저 한 철학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자의식의 역사'의 내용을 살피게 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피히테가 그 당시 대표적인 독일 관념론자들 - 이를테면 쉘링과 헤겔 - 과 공유해서 가졌던 주요한 철학적 사고의 기본 논리이다. 즉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일종의 시도적인 이론적 모델로 이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이 추구하던 철학적 - 정신 철학의 - 진리가 드러나는(드러내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의 세부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그들 각자가 차이점을 보이나, 그 주장되는 이론의 중요한 공통적인 골격은 두 가지로 특징 지울 수가 있을 것 같다. 첫째, 인간 정신을 이해하고 파악함에 있어서 - 인식 활동도 포함한 - 앞서 언급된 대로, 각종의 여러 능력들과 의식 활동들이 한 원칙, 혹은 한 근원에서 발전적으로 나타나는 생성론적인(genetisch) 설명 방식이다. 이런 입장은 그 당시, 인간을 그가 가지고 있는 개별의 심리적 정신적 능력의 측정 지수에 따라 설명했던, 그 당시 유행했던 능력 심리학 (Vermoegenspsychologie)과는 적대적으로 구분되는 모델이기도 하다. 둘째는 이 이론은 그 구조면에서 특징적으로 두 개의 자아 즉, "관찰하는 자아"와 "관찰되는 자아" - 피히테의 경우 "사유적으로 반성하는 자아"(das reflektierende Ich)와 "반성되는 자아"(das reflektierte Ich) - 로 나누어진다. 자의식의 역사란 그의 전개되는 구조의 면에서 특징 지운다면 한마디로 이 양(兩) 자아의 관계, 즉 자아의 "자신과의 관계"(Selbstbeziehung)라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한 인식 주관인 자아는 다른 자아, 즉 객관화된 자아가 자신의 인식 능력의 전개와 그 의식의 활동의 모습으로, 더욱이 단계적으로 발전해 가는 모습을 나의 목전에서 관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발전은 마침내 이 지금 관찰하는 자아, 즉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자아가 아닌 "철학자" 혹은 각성된 자아에로 근접 발전해 간다는 것이다. 피히테의 경우 자의식의 역사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두 가지의 출발점을 동시에 갖는데, 그것은 그 기초적 근거 면에서 "실천적 지식"이냐 "이론적 지식"이냐에 따라 서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경우는 "자아와 비아가 서로 서로 규정하되", "자아가 비아를 규정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자는 그 반대로 자아가 비아에 대해 규정 당하는(촉발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피히테의 자의식의 역사는 그 전체적인 이론 전개의 모습에 있어서 그렇게 조직적이고 명료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자의식의 역사' 이론의 가장 선명하고 좋은 한 예로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들 수 있다. 그곳에서는 먼저, 그 출발점으로서 자연인이 아닌 지금의 나로서의 "철학자" - 혹은 "Fuer uns" - 가 "관찰하는 나"로서 나타난다. 동시에 또 다른 나로서 "관찰되는 나"가 그와 함께 전제되어 있다. 이 "관찰되는 자아"는 최초의 의식의 단계 즉 감각적 확실성에서 시작되는데, "스스로 성취해 가는 회의주의" (sich vollbringender Skeptizismus)라는 방법론을 통해서 "지각"→"오성"→"자의식" 등등으로, 단계적으로, 소위 변증법적 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높은 형태로 고양되어 간다는 논리다.
초기 피히테에 있어서 구상력의 문제학적 위치는 바로 위에서 언급된 대로 자의식의 역사의 근본 능력으로서 이다. 그리고 여기서 간과돠어서 안될 것은, 이미 언급된 데로 이 자의식의 역사라는 프로그램은 자체로서 세 원칙론(Grundsatzlehre) - 인식 정초 이론 - 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인식론}의 주제 순서에 의하면 '자의식의 역사'는 '세 원칙론'이 끝난 그 곳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이 점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의식의 역사가 시작되는, 즉 구상력이 처음으로 그의 근본 능력으로 문제되는 국면이 정확하게 어디인가'라고 다시 물을 수가 있다.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은 바로 "내가 내 안에서 분할적인(분할된) 나에게 분할적인(분할된) 비아(非我)를 대립시킨다"라는 세 번째 원칙이 된다. 이 원칙의 의미는 다름 아닌 대립된 자아와 비아(非我) 가 서로 매개되어 하나로 종합되는 것을 말한다. 분석적으로 설명한다면, 앞에서 논급된 대로 제1 근본 원칙인 무제한적인 자아가 제2 근본 원칙인 비아(非我)에 의해서, 또 그 반대로 무제한적인 비아가 자아에 의해서 서로 제한되는 것인데, 달리 말하면 제1원칙과 제2원칙 양자가 서로 매개되어 어떤 구체적인 실재로서 파악되는, 획득되는 그 상황을 말한다. 자의식의 역사의 기초 능력으로서 구상력이란 바로 이 세 원칙론에 근거한, 또 이 세 원칙론 자체를 가능케하는 능력이 구상력이라는 것이다.
이에 덧붙여서, 피히테는 동시에 이 세 원칙론에서 '주어진 것', 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주관과 객관이, 자아와 비아가 매개된 것 - 혹은 된 곳 - 이 인간 정신의 탐구의 발단의 근거이며, 구상력이란 상황 자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제기와 그 문제 상황을 피히테 자신은 "이미 자기에게 확정된 사실에 대한 인간 정신의 철학적-사유적 반성"(die Reflexion des menschlichen Geistes ueber das in ihm nachgewiesene Datum)이라고 불렀다. 즉 자의식의 역사의 출발은, 구상력과 그의 작용은 무의식적으로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심 문제의 하나로 주목하게 되는 것은 구상력 자체가 갖는 내용인데, 즉 이 개념 자체가 갖는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런 문제의 시각에서 볼 때, 피히테의 구상력은 근본적으로 그 개념 자체로서 독특하게 두 가지 양상을, 그 두 가지 의미의 측면에서 동시에 들어내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피히테 자신이 이 개념을 동시적으로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칸트의 선험 철학에서처럼 대상을 인식하는 능력으로서 구상력의 순수 인식론적인 '기능'의 면이다. 이런 의미의 사용은 그의 {인식론}이나 {인식론의 고유함에 대한 요약}(Grundriss des Eigentuemlichen der Wissen- schaftslehre, 1795)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피히테의 구상력은 칸트의 경우와 같이 대립된 어떤 것들을 종합하는 사고 능력이며, 또 이 능력을 통해서 어떤 대상을 직관 속에 현재화하는 "활동적인 주관의 능력" 또는 "산출해 내는 능력"을 말한다. 무엇보다도 제3의 근본 명제에서부터 시작하는 모든 "이론적 지식"(theoretisches Wissen)의 기초가 되는 종합(Synthesis)이라는 개념은 모두 이 종합 능력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즉 칸트의 경우와 같이 순수한 인식 능력으로서의 의미와 사용법이다.
다른 하나의 측면은 구상력의 의미가 순수한 인식론적인 능력 개념이라기 보다는 어떤 '존재론적 것'과 '인식론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그 양쪽 면을 맴도는(schwebend), 일종의 양쪽의 한계 개념으로서 어떤 '상태' - 어떤 무엇이 수동적으로 성립된 - 를 말하고 있다. 이 존재 양태는 인식과 존재가 서로 용해된 그런 내용의 구조다. 달리 말하면, 세 번째 근본 원칙이 말하듯이 자아가 그 대상 혹은 비아(非我)와 서로 매개되어 종합된 첫 상태인데, 따라서 이 구상력은 존재론적인 시각으로 봐져야 하는, 자아와 비아가 매개된 "산물"(Produkt)이라는 것이다.물론 이 경우 구상력은 종합하는 능력으로서 구상력과 분리 될 수 없는 특유의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구상력은 인식 능력이라기 보다도 일종의 어떤 사실로서의 상태로서 존재한다. 또 이런 해석의 입장에 설득력을 갖게 하는 것은 피히테의 인식론에서 결합하는 능력으로서 구상력은 존재와 비존재, 혹은 나와 비아를 매개시키는 것으로서 - 이미 매개된 것으로 - 어떤 인식 주관이 객관으로서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문제되는 단순한 인식 능력이 아니라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상태라는 것이다.
4. 결 어
지금까지 칸트와 초기 피히테의 구상력의 개념을 그들이 각기 갖고 있는 인식론적인 체계를 배경으로 서로 '비교한다는' 관점에서 추적·논의해왔다. 그러나 이 소론의 논의는 비교한다는 강한 주제 의식에서 출발했다기 보다는 각기의 문제의 배경을 같이 고려하면서 그 개념의 정위된 위치와 뜻을 기술하는 그런 관점이었다. 이에 총체적으로 그 내용들을 일별한다면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에 있어서 구상력은 그의 선험 철학 - 경험의 조건 가능성을 묻는 - 의 기초 위에 있는데, 먼저 그의 특징으로 드러나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세 능력 중에 하나로서 감각과 통각과 더불어 인식 주관이 그의 대상 세계를 경험하는 인식의 원천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 더 본질적인 면에서는 - 구상력은 다른 두 능력과 더불어 대상 인식을 구성하는 삼중적인 요소 중에 하나다.
그런데 이렇게 세 요소가 종합되어 하나의 인식을 성립시킨다면, 어떻게 이 세 요소가 하나의 통일된 최종의 인식으로 총괄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어려움은 간단히 말해서 인식의 요소 가운데 자발적인 사유 능력과 수동적인 감성의 능력이 어떻게 하나로 또 전체로 통일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에 대해 칸트는 {순수 이성 비판} A판에서는 문제만 제기했지 구체적 해결책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B판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형태의 구상력 - "형상적" 구상력 - 을 제시한다. 즉 이 구상력은 그의 독특한 종합, 즉 선험적 도식을 통해서 감성과 오성을 매개시키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바로 이런 이유로, 구상력은 오성과 감성과 더불어, 그들과 대등한 제 삼의 기본 인식 능력으로 해석될 수가 있다(이점 칸트 자신도 배려하지 못한 점이지만).
초기 피히테에서 구상력이 문제되는 곳은 인식의 정초 이론(세 근본 원칙론)을 전제로 한, 그에 후속 하는 '자의식의 역사'에서 이다. '자의식의 역사'란 일종의 시도적인 이론 모델이다. 이에 의하면, 1. 인간의 이해 내지 파악은 그의 의식 활동과 그 인식 능력들을 한 근원에서, 한 원칙에서, 또 생성론적-발전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당시, 인간을 능력 에 따라 세분화시키고 그 기준에서 인간을 이해하던 능력 심리학과 대립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2. 여기서는 인간의 자아가 이중으로 - 관찰하는 자아와 관찰되는 자아 - 나타나는데 관찰하는 자아는 다른 (관찰되는) 자아가 1에 보이는 바 ,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구상력은 바로 이 모든 인식과 정신적 활동의 원초적인, 전제되어 있는 기초 능력이며, 바로 이것(이곳)이 "자의식의 역사"라는 프로그램을 그것을 가능케하는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 "구상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문제 연관에서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를 묻게 된다. 이에 대한 답은 "세 근본 원칙론"인데, 이 문제의 현장을 좀더 부각시켜 말한다면, 근본 명제론에서의 셋째 명제, 즉 자아와 비아가 서로 제한되고 분할되는 곳이다. 그러나 달리 해석한다면 주관과 객관이 매개되어 어떤 실재가 생성, 획득되는 곳(것)이다. 피히테에 의하면 거기서, 그것을 근거로 인간 정신을 탐구하려고 하는 한 새로운 프로그램으로서의 "자의식의 역사"가 실질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피히테의 구상력 개념은 칸트적인 순수 인식론의 입장을 벗어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연이어서 주목할 것은 구상력의 개념 자체의 의미 문제인데, 이 경우에서도 피히테는 칸트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그에 있어서는 두 가지 정의적 의미 규정이 동시에 공존하고 잇는 것 같다. 1. 피히테의 구상력은 칸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순수 인식론적인 기능으로 어떤 것들을 종합하는 능력이다. 2. 피히테의 구상력은 인식 능력의 의미 뿐 아니라 자아와 비아가 매개된, 주관과 객관 양쪽이 용해된 어떤 존재론적인 상태를 뜻한다. 따라서 구상력은 이 경우 이미 능력 개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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